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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베르사이유의 장미)|마리 앙투아네트(베르사이유의 장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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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는 프랑스 왕국과 맞먹을 정도의 유럽의 강국인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막내딸로 첫 등장하며 오스칼, 페르젠과 같은 해 1755년에 태어났다.문화, 예술을 지원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교육방침과 다른 유럽의 왕실들과 달리 쓸데없는 허례허식을 배제하고 자유롭고 가정적인 분위기를 추구한 오스트리아 왕실의 영향으로 마리는 언니, 오빠들과 같이 자유롭게 놀고 예술을 즐기는 안락한 생활을 보내며, 아름답고 우아하게 자란다.
그러나 오랫동안 대립해온 프랑스 부르봉 가문과의 싸움을 종결하고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프로이센을 견재하고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혼인 동맹이 체결되고 대대로 정략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훈에 따라[1] 마리는 프랑스 루이 15세의 손자 왕세손 루이 오귀스트와의 결혼 이야기가 오가게 되었다.
하지만 마리는 나비처럼 우아하게 춤을 출 수 있는 점을 제외하고는 왕족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인 프랑스어, 역사, 정치, 문학, 피아노, 노래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문에서 일자무식인 상황이었다. 당연히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상상 이상으로 심한 막내딸의 무식함에 경악하여[2] 뒷목을 잡았고, 마침 얼마 전에 프랑스로부터 온 국혼 소식을 전해주며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한 철부지인 딸에게 철없는 말괄량이 아가씨라며 야단쳤다.
다른 수업들이야 말할 것 없고, 가장 중요한 프랑스어[3]부터 반드시 익혀야하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장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프랑스어 선생님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마리가 시집을 가기 전까지 어떻게든 마리를 프랑스의 왕세자비에 걸맞는 아가씨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또한 메르시 백작에게 프랑스의 정식 결혼 신청이 오기 전까지 '아무리 유럽이 넓다해도 전통 있는 프랑스의 왕태자비는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만이 유일하다' 라는 선전을 하기 위해, 마리의 아름다운 미모, 고상한 품위, 온화한 성격을 보여주는 초상화와 소문을 유럽 전역에 퍼뜨리라고 명령[4]한다.
한편 이때 마리는 자신의 결혼과 미래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확정되다시피 돌아가는 이 상황에 불만이 있던 마리는 "저는 왜 얼굴도 모르는 전하에게 시집 가야하는 거냐, 저는 사랑이라는 것도 해보고 싶고, 아직은 언니나 친구들과 뛰놀고 싶다" 라고 조용하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리는 "언니들도 다 그러셨다, 무엇보다 프랑스 왕비가 되면 어떤 소원도 이룰 수 있고 모두가 꿈꾸는 자리다, 그보다 날씨가 따뜻해서 기분 좋으니 정원으로 나가 놀자" 라는 시녀의 말에, 마리는 금세 마음이 풀어져서 '골치 아프게 생각해봤자 별 수 없으니 언제나 즐거운 생각만 하자' 라고 가볍게 넘어가며, 왕세자비이자 미래의 왕비로서 책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안일하게 행동했다.
1769년 마리가 14살이 되던 해, 마리는 눈부신 아가씨가 되었고, 루이 15세에게서 정식 결혼 신청과 약혼자의 초상화가 도착하면서 마리와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와의 결혼이 결정된다.
당시 유럽 대륙 양대 강국이자 오랫동안 대립해온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의 국혼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물론 양국의 국민들이 모두 들떠 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번영과 안전을 위해, 이 결혼을 진행했지만 응석받이에 철없는 말괄량이 마리에게 왕비라는 자리가 불행을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마리가 프랑스로 시집가기 전, 몇 주 동안 딸과 함께 지내며 프랑스 왕비라는 지위의 중요함과 무거움에 대해 직접 가르쳤다.
그리고 1770년 4월 21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당일, 마리는 모두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직접 쓴 지침서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읽어보라고 주고, 눈물로 마리를 배웅하며 '멀리 떨어져있어도 나는 너를 위해 기도를 그치지 않겠다' 라고 다짐하며 마리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마리 역시 모두의 배웅을 받으면서 그리운 조국과 어머니를 두고 떠난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나는 프랑스의 왕태자비' 라고 들떠한다.
이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측근인 메르시 백작까지 프랑스로 함께 보내고 그를 통해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으면서 온갖 노력[5][6]을 기울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어머니의 당부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고 이는 그녀의 비극적인 최후에 일조하게 된다.
3. 프랑스의 왕세자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화해와 동맹을 위해 프랑스로 간 마리는 타국에 어린 나이에 시집을 온 불안감과 모국의 모든 것[7]을 두고 와야 하는 것에 대한 상실감으로 시녀장인 노아이유 백작 부인의 품 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 프랑스 왕실 식구들이 기다리는 콩피에뉴 숲으로 가는 마차로 갈아타던 도중 자신의 호위를 맡은 오스칼과 처음 만나게 된다.[8]그리고 콩피에뉴 숲에서 마리를 마중나온 프랑스 왕족들과 첫 만남 때, 마리는 자신의 시할아버지이자 프랑스의 국왕인 루이 15세로부터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부인가! 마치 프랑스에 행복을 가져다 줄 천사같구나!" 라며 큰 환영을 받지만[9], 정작 처음 만나는 자신의 남편이자 결혼 상대인 프랑스의 왕세손 루이의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흐리멍텅한 인상[10]과, 루이 15세에게 "아니 뭘 멍하니 서 있느냐, 신부에게 만남의 키스도 하지않고!" 라는 재촉을 듣고나서야 한 그의 볼키스에도 아무런 설렘이 없다며 겉으로는 티는 내지않았지만 속으로 원래 이런 거냐고 의아해하는 실망하고 결혼식[11]을 마친다.
그리고 왕세자비로서 공식적인 자리에 나서는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첫 연회날을 앞두고, 시녀들은 준비를 해야된다고 말하지만 마리는 듣지않고 고양이와 술래잡기를 하는 장난을 치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결국 보다 못한 시녀장 노아이유 백작 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 님은 자유롭게 뛰어 놀아도 되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라고 호통을 친다. 그러나 마리는 문제의식을 못 느끼며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공식적인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어머님께서는 사적인 자리에서 편한 옷을 입고 자유롭게 해도 된다고 하셨다" 라고 말하지만, 노아이유 백작 부인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다르다, 우리 프랑스는 체면이나 예의범절이 중시한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첫선을 뵈는 날이니 격식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한다" 라며 당부한다.
곧이어 노아이유 백작 부인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신분이 높은 귀부인이 먼저 말을 걸어주기 전에 신분이 낮은 귀부인이 말을 걸 수가 없는 베르사유 궁전의 엄격한 에티켓을 알려주며, 마리는 현재 프랑스 내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12]이니 제발 궁중의 부인들에게 말을 걸어달라고 당부한다. 그 말을 들은 마리는 자신이 '아무도 내게 말을 걸 수 없고 모두가 내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듣고, 마리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의 화려한 사교계에 금방 도취되어 이전의 슬픔과 실망감을 바로 잊어버린다.
직후, 마리는 노아이유 백작 부인에게 왕실 식구들이자 자신 다음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왕실 여성들인 시고모들(아델라이드, 빅투아르,소피), 시누이이자 왕태손(루이 16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트를 소개받은 다음, 마리는 연회에 오스칼이 와있을지 기대하며 첫 연회에 나가게 된다.
마침내 왕세손비로서 처음 마주한 베르사유 궁전의 연회 날, 파리의 귀부인들은 우아하고 의연한 모습과 아름다운 매력을 지닌 마리에게 금방 매료되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마리 역시 자신의 미모와 모습에 꿈꾸듯이 홀려하는 등,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는 프랑스의 사교계를 보며 속으로 멋지다며, 유럽 제일의 프랑스의 궁정에서 자신이 지금 '베르사유의 여왕' 이 된 상황 속에서 긴장과 설레감을 느끼고 흥분감으로 들떠한다.
때마침 미뉴에트 곡이 나오자, 왕태손에게 춤을 추차고 제안하지만 루이는 "나는 춤을 추지않으니 마음껏 춤을 추시오" 라고 거절하자, 마리는 그를 의아하게 보다가 우연히 마리 자신의 건너편에 오스칼이 있는 것을 보고, 그녀를 향해 다가가던 도중에, 이때 마리 자신의 반대 방향의 건너편 멀리서 자신을 경계하듯 힐끔힐끔 쳐다보는 루이 15세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을 보게된다.
마리는 뒤바리 부인과 시선이 마주치지만, 그녀가 누군지 모르는 마리는 '화려해보이지만 교만스러운 태도에 굉장한 육체미이지만 어쩐지 천해보이는 저 여자는 누구길래 나를 저렇게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지?' 라고 의아하게 보다가, 그녀에게서 아예 고개를 돌리며 무시한다.
그 뒤, 연회에서 가장 먼저 오스칼에게 인사하며, "저기서 나를 흘낏거리며 보는 여자는 어떤 신분이냐" 라고 묻자, 오스칼은 "뒤바리 백작부인이지만, 비 전하께서 신경쓰실만한 그런 신분의 여자는 아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오스칼의 대답과 달리, 뒤바리 부인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마치 자신이 여왕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마리는 왜 모두가 뒤바리 부인에게 신경쓰는지 미심쩍어한다.
4. 뒤바리 부인과의 기싸움
연회가 끝난 후, 노아이유 백작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님이 오기 전까지 모든 귀부인들은 자기야말로 사교계의 여왕라며 자기들끼리 남몰래 경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분으로 보나 미모로 보나 진짜 여왕이신 마리 앙투아네트님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라며 마리가 연회에서 가장 멋졌다고 칭찬하며 감탄과 동시에 주변 귀부인들의 반응에 대해 통쾌해하며 웃는다.이때 마리는 그런 그녀에게 "전하는 춤도 안 추지않으시고 여자들과 말도 하지않으시던데, 도대체 뭘 좋아하시냐" 라고 왕태손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노아이유 백작부인이 "전하는 얌전하시고 내성적이시다, 독서랑 사냥, 자물쇠 만드시는 게 취미시다" 라고 대답하는데, 마리는 자신이 질색하는 독서에 화들짝 놀라다가, 자물쇠 만들기[13]라는 예상 밖의 대답에 어이없어한다.
이후 마리는 자신을 찾아온 시고모들에게 "뒤바리 부인은 국왕 폐하의 애첩이며 매춘부 출신" 라고 뒤바리 부인에 대해 알게 되자, 마리는 "그런 하찮은 여자가 어떻게 궁정에 들어올 수 있냐, 오스트리아의 어머님은 그런 여자들을 체찍질을 한 후 감회원에 집어넣으셨는데" 라며 소름돋아할 정도로 질색한다.[14]
평소 뒤바리 부인을 싫어했던 시고모들은 이때다 싶어 "그 여자는 말이죠, 자기 정부에게 돈을 주고 뒤바리 백작과 결혼해서 궁정에 출입해서 국왕의 애첩이 된 거다, 게다가 국왕의 애첩이 된 후로는 총애를 등에 업고 멋대로 대신을 정하고 사치를 부리고 갖은 짓은 다 한다, 그런데 국왕은 완전히 그 여자에게 홀려서 딸인 우리 말은 듣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도 그 여자를 따르는 아첨꾼이 되고 마치 여왕처럼 제멋대로다" 라며 질타하고, 이에 마리는 "정말 뻔뻔스러운 여자다, 그래서 그런 시선으로 날 힐끔힐끔 쳐다본 거냐" 라고 질색한다. 시고모들은 그런 마리의 반응에 "그래요, 그렇다니까요!" 라고 신나게 맞장구를 치며, 마리에게 "그러나 그 여자가 아무리 제멋대로여도 진짜 왕족이며 미래의 왕비인 당신에게는 당해낼 수 없다, 아시겠냐, 완전히 무시하셔라" 라고 부추긴다.[15]
사실 이러한 시고모들의 부추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마리는 매춘을 철저히 금지시키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영향과 천한 신분의 뒤바리 부인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마리 본인의 높은 자존심까지 더해서 그 날 이후,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란듯이 뒤바리 부인을 대놓고 투명인간 취급하며 일부러 못 본 척 인사를 걸지 않는다.
한편 바로 옆에서 마리가 일부러 뒤바리 부인을 무시하는 상황을 목격한 다른 귀족들은 "어쩌시려는 걸까, 무엇보다 뒤바리 부인의 뒤에는 국왕 폐하를 계시지 않냐" 라면서 당황하며 웅성거리고, "그러나 국왕 폐하가 돌아가시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곧 왕비가 되지않냐" 라며 과연 누구의 편을 들어야 이득이냐는 식으로 수근거리고, 당사자인 뒤바리 부인 역시 마리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일부러 무시하는 행동을 눈치채고, 자신에게 도전하려는 그녀의 태도에 분노하면서, 두 사람은 대놓고 신경전[16][17][18] 을 벌이게 된다.
마리의 무시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 프랑스의 왕태자비이자 미래의 왕비라는 신분, 공식적으로 왕실 내 지위가 가장 높은 여성이라는 지위,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마리에게 동조한 베르사유 내 귀족 여성들도 뒤바리 부인을 은근히 피하면서 '오스트리아의 공주로 태어난 왕세자비가 저런 출신이 천한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는 건 당연하다' 라며 뒤바리 부인을 몰래 비웃기 시작하자, 이런 상황에 분노한 뒤바리 부인은 루이 15세에게 대놓고 불만을 터뜨린다.
이때 루이 15세는 "오해다, 마리는 아직 어린애가 아니냐"며 뒤바리 부인을 적당히 달래면서 "나는 이제 그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않다, 부탁이니 내버려둬라"며 하는 식으로 두 사람의 신경전을 각자 알아서 해결하라는 뉘앙스를 보였지만, 뒤바리 부인의 연이은 하소연과 짜증이 계속 이어지자, 루이 15세는 어쩔 수 없이 마리의 시녀장 노아이유 백작부인을 통해 경고를 준다.
그러나 사태 파악을 못한 마리는 루이 15세의 경고와 외교대신 카우니츠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국왕의 명령이라고 해도 프랑스의 왕태자비인 내가 뒤바리 부인에게 말을 걸면 매춘부가 왕궁에 출입하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고, 이것은 내 자신의 문제고 왕태자비로서의 긍지의 문제다, 나는 정통있는 프랑스의 왕태자비니까 그 여자에 대한 경멸을 있는대로 담아서 단 한마디도 걸지않을테다!' 라고 생각한 마리는 결국 일부러 뒤바리 부인을 향해 대놓고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면서 끝까지 말을 걸지않고 버틴다.
그런 마리의 행동에 뒤바리 부인은 모욕감에 울며불며 하소연하고, 루이 15세 역시 프랑스 국왕인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마리의 행동에 불쾌해하며, 루이 15세는 메르시 백작을 따로 뒤바리 부인의 방에 불러서 경고를 준다.
5. 깔끔한 결말
결국 메르시 백작에게 이 사태를 들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까지 주의하라는 편지를 보내고, 메르시 백작까지 강하게 나서며 설득하지만, 마리는 '오스트리아의 공주이자 왕세자비인 내가 매춘부인 뒤바리 부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할 수 없다' 라며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 보다 못한 메르시 백작은 일부러 궁정에 쓰이는 독약 이야기로 마리에게 겁을 준 다음, "마리 앙투아네트님 혼자 싸우는 거라면 아직은 괜찮다, 그러나 국왕은 여차하면 오스트리아와 전쟁도 사양치않는 태도다, 그렇게 되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동맹은 어찌 되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님이 그렇게 노력하셔서 성립시킨 이 동맹은 어떻게 되는 거냐?!"며 강하게 말한다.그 말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떠올린 마리는 큰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결국 마리는 "동맹이 깨져 오스트리아와 프링스가 전쟁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모두 마리 앙투아네트님의 책임이 되는 것"이라는 메르시 백작의 말에 동의하고, 여전히 눈물을 흘리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 약속하겠다. 그 여자에게 단 한번이라면 말을 걸겠다, 하지만 이건 내 뜻이 아니다, 다만 어머니를 위해서다! 메르시 백작, 이제 됐죠?!"라고 메르시 백작에게 자신의 뜻은 아니지만 어머니를 위해서라며 확실히 못을 박으며, 마리는 계속 눈물을 흘리지만 결국 자존심을 굽히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마리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동맹을 위해 자기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베르사유 궁전에 열린 신년 무도회에서 마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늘은 베르사유 궁전에 사람이 많군요"라고 뒤바리 부인에게 인사를 하면서, 결국 뒤바리의 보이지않는 승리를 쥐게 되고, 그렇게 두 여자들의 신경전은 일단락 된다.[19][20] 한편 뒤바리 부인은 오스칼의 경고를 들은 후로, 마리에게 진귀한 선물을 보내는 등 어떻게든 마리와 친해지려고 하나, 마리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되돌려보낸다.
6. 어색한 부부관계
그 뒤, 마리는 뒤바리 부인은 물론 시고모들과 아예 엮이길 피하면서 오랜만에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남편 루이 16세는 여전히 마리를 피하며 자물쇠를 만들거나 사냥 아니면 간식만 먹는 챗바퀴 같은 일상만 보내자, 마리는 이를 답답해 한다.그러던 어느 날 마리는 우연히 루이 16세가 진흙투성이가 되어 기분 좋게 지나가는 모습과 마주치자, 마리는 그에게 버럭 화를 내면서 그를 부르고, 이에 루이 16세는 화들짝 놀란다. 마리는 그에게 "또 대장간에 가셨냐, 왕태자 같으신 분이 직공같은 짓을 하신단 말이냐, 밤에도 혼자 자러 가고, 잠깐이라도 저랑 얘기라도 나누는 게 어떠시냐" 라고 화를 내며 다그치자, 당황한 루이 16세는 마리를 피해서 달아나는데, 마리 역시 그를 쫓아가서 기어이 붙잡는다.
마리는 "제가 놓칠 줄 아셨냐, 오늘이야말로 대답을 들어야겠다! 아시겠냐, 애당초 자물쇠 만들기는 바보같은 취미란 말이다" 라고 다그치자, 루이 16세는 울먹이다가 결국 훌쩍이고, 그 모습에 마리 역시 울먹이며 "제 말이 지나쳤나보다, 울지마셔라" 라며 달래다가, 결국 둘 다 크게 울음을 터뜨린다(...).[21]
그렇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겉으로는 조용한 생활을 보내는 듯했지만, 마리는 여전히 마음에도 없이 결혼한 루이 16세와의 어색한 부부관계와[22] 왕세자비라는 자리에서 오는 과중한 책무로 지쳐가고, 오스트리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에티켓[23]으로 가득 차 있는 프랑스 사교계에서 벗어나서 다른 여성들처럼 무도회, 연극, 오페라를 즐기고 어릴 때처럼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했다.
7. 페르젠과 사랑에 빠지다
그러다 왕세자 부부의 첫 파리 방문[24]을 계기로 가면무도회나 연극 등 파리의 밤문화에 매료된 마리는 어느 날 밤, 오스칼만 동행하여 파리의 가면무도회에 신분을 숨기고 몰래 참석했다.베르사유 궁전에서 엄격한 에티켓에 얽매여 맘껏 웃지도 못하는 환경에 지쳐있다가 가면 무도회에서 신분을 숨기고 오랜만에 맘껏 웃고 놀게된 상황에 감격해 있던 마리는 파리 유학생으로 왔다가 마침 무도회에 참석한 페르젠과 운명적인 첫만남을 가지며, 오스칼을 통해서 서로의 신분을 알게 된다.
이후 페르젠은 마리를 만나기 위해 알현을 핑계로 궁에 자주 출입하기 시작하고, 마리 또한 소극적이고 낯을 가리는 남편과 다르게 수려한 외모와 젠틀한 모습의 자신과 잘맞는 페르젠에 매료된다. 문제는 마리가 페르젠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공식적인 자리에 페르젠과 동행하는 등, 마리가 페르젠에게 호의를 솔직하게 표현하다보니 측근인 노아이유 백작 부인과 메르시 백작도 이 둘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에 오스칼은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8. 프랑스의 왕비
설상가상으로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갑작스럽게 사망을 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직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프랑스 왕비라는 무거운 자리에 오르게 된다.[25][26] 결국 페르젠도 친구인 오스칼의 충고와 왕비 자리에 오른 마리 앙투아네트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프랑스를 잠시 떠나기로 한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마리는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난 페르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페르젠이 떠난 빈자리와 후계자와 관련된 악담, 왕비라는 직위의 부담감과 소극적인 남편과의 원만치 않은 부부관계로 생긴 외로움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디자이너인 로즈 베르탱을 개인 디자이너로 임명해서 각종 드레스와 장신구[27][28]를 사재기하는 사치[29][30][31]를 부렸다. 게다가 왕세자비 시절과 달리 왕비가 되면서 무한대로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고 남편인 루이 16세도 자신을 도와준다는 사실에 도취한 나머지 매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티와 무도회[32]를 열고, 하루가 멀다하고 파리에 드나들며 밤늦게까지 가면 무도회와 연극[33]을 즐기고 국고를 도박과 경마에 탕진하며 유흥과 놀이에 몰두하기만 한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세금을 자신의 사치비용으로 낭비하면서 왕비로서 해야 할 내명부 운영과 사교계의 통솔은 무심하게 여기고 자신의 입김으로 대신을 맘대로 임명[34]하는 것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다소 방만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이 철없는 행동은 평민과 부르주아는 물론 귀족과 왕족들의 불만까지 사게되는 마리 앙투아네트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9. 사치와 낭비, 고립된 생활
더구나 전술한 국고로 사치를 부리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자신이 프랑스 왕비가 된 상황에 도취된 나머지 왕비 신분을 이용해 총애하는 사람들에게 벼슬과 각종 특혜[35]를 마음껏 퍼주었던 것도 문제였다. 하필이면 겉보기엔 다정해보여도 실제론 음흉한 속내를 품고 있던 폴리냑 백작부인에게 호감을 가져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온갖 특혜[36][37]를 주고 그녀의 꾀임에 빠져 법으로 금지된 도박을 하여 많은 돈을 뜯기고도 이에 대해 심각성을 못 느끼는 등, 순진하다를 넘어 사실상 호구같은 짓을 벌였다.[38][39]심지어 폴리냑 백작부인은 마리를 위한다는 이유로 후계자 출산 관련 비난[40]과 아르투아 백작 부부의 장남 앙투안 백작 출산 소식으로 힘들어하던 마리에게 거짓말로 회임하라고 제안한다. 안 그래도 후계자 문제로 우울증까지 걸릴 정도로 지쳐있던 마리는 잠시나마 비난을 피하기 위해 폴리냑 부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거짓 회임 소식을 알리고 이 덕분에 한동안은 잠잠해진다.
그러나 마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오스칼이 도박을 그만해달라고 충고하자 폴리냑 백작부인은 거짓 회임을 끝낼 동시에 걸림돌인 오스칼을 내치기 위해 궁중 사람들에게 오스칼이 마리를 칼로 협박해서 그 충격으로 유산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 이때 마리는 자신의 거짓말로 소중한 친구인 오스칼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는 죄책감으로 마음이 더 무너지고 더더욱 폴리냑 백작 부인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만다.[41][42]
설상가상으로 마리는 힘든 왕비로서의 업무와 지나친 에티켓과 무미건조한 삶이 반복되는 베르사유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함께 여유롭게 지내고 싶다는 지극히 사적이고 어이없는 이유로 남편과 베르사이유 궁전을 떠나, 루이 16세가 결혼 선물로 준 개인 궁전 쁘띠 뜨리아농에 폴리냑 부인을 비롯한 자신의 측근들끼리 틀어 박혀 연극과 농가생활을 즐기며 국정을 멀리하는 일국의 왕비로서 최소한의 책임마저 내팽개치는 바보같은 결정을 하고 만다.
당연히 이 소식을 들은 폴리냑 부인은 속으로 아무 간섭 없이 자신 뜻대로 왕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좋다고 환영하지만, 반대로 최측근인 오스칼은 왕비님이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는 무책임한 행동을 해선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말렸다. 하지만 마리는 '나는 오스칼이 좋은데 왜 매번 내가 하는 일을 반대하는 걸까' 라며 오스칼의 충언을 무시하고 자신을 부추기는 폴리냑 부인과 함께 쁘띠 뜨리아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오스트리아에까지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도 딸의 어리석은 행동을 듣고 놀라서 그만 쓰러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더 문제는 쁘띠 뜨리아농의 출입조차 마리 앙투아네트의 허락이 있어야 해서 알현을 하러 온 백성들과 고위 귀족들은 물론 국왕 루이 16세도 허락을 받지 못하면 들어가지 못했었다. 이런 마리의 모습에 백성들은 민생에 관심을 전혀 주지 않는 왕비[43]에게 실망하였고, 귀족들도 자신들을 무시하는 듯한 왕비의 태도[44][45]에 큰 모욕감을 느끼고, 누가 올 줄 아냐, 와달라고 해도 가지 않을 거라고 대놓고 힐난을 할 정도로 마리에게 제대로 등을 돌려버린다.
그러나 마리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현실을 자각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들, 친한 친구들이랑 트리아농 궁전에서 작은 농장과 마을을 만들어서 직접 젖을 짜고 농사를 짓는 농가 생활을 즐기고, 연극과 오페라, 가장 무도회를 보고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연극을 계획하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출연[46]하는 등 자신이 만든 허황된 낙원 안에서 달콤한 독 같은 행복을 누리며 스스로를 파멸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결국 이런 그녀의 안일한 행동들은 훗날 마리 앙투아네트가 모두에게 버림받고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최후에 한 발짝 더 다가게 만들었다.
덧붙여서 마리의 뛰어난 패션, 예술 감각 덕에 왕실 및 귀족들의 로코코 패션과 미용이 발전하고 다양한 무도회와 춤이 소개되는 등 프랑스의 예술 문화가 발전 되었다는 소정이 긍정적인 영향이 있었다.
게다가 트리아농 내에서 연극,농가생활을 하던지라 마리는 움직임이 쉬운 가볍고 편안한 슈미즈 드레스 (Chemise a la Reine)[47]를 즐겨 입었다. 이후 귀족들도 왕비를 따라 슈미즈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고 슈미즈 드레스는 엠파이어 드레스로 이어지는 등, 어떻게 보면 신고전주의 복식의 시작을 열기도 했다.
또한 최근 연구에 의하면 마리는 쁘띠 뜨리아농 옆에 아담한 촌락을 지어, 가끔 백성들이 그곳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거나, 그동안 악마의 음식으로 오해받은 감자를 올바르게 재배하고 먹는 방법을 농민들에게 전하는 등 나름대로 백성들의 삶에 도움을 주려 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그녀 나름의 정성스러운 도움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으며, 역으로 왕비가 백성들의 삶을 놀잇거리에 이용한다는 악소문이 퍼지고 만다.
10. 각종 추문에 휩싸이다
설상가상으로 소극적인 남편과 남편과의 애매한 사이로 인해 프랑스로 시집 온지 7년이 넘도록 후계자를 낳지 못해 여론은 더욱 나빠진다. 게다가 마리가 오랜만에 만난 페르젠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총애하고 사교계에 같이 있는 부주의한 행동[48]을 일삼아서, 이젠 주변 귀족들도 마리와 페르젠과의 관계에 의심을 가지고 아예 대놓고 조롱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물론 페르젠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을 걱정해 미국 전쟁에 자원 입대하고 가급적 마리와 만남을 자제한데다, 마리 역시 뒤늦게 첫딸인 마리 테레즈를 낳고 장남 루이 조제프와 차남 루이 사를을 낳으면서 추문이 사그라 드는가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장남 루이 조제프는 척추결핵(척추카리에스)으로 요절하면서 후계 구도는 다시 흔들리고 페르젠도 다시 파리에 돌아오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추문에 불을 지피면서, 안그래도 왕위를 노리던 루이 16세의 남동생들인 프로방스 백작 루이와 아르투아 백작 샤를부터 프랑스 왕가의 먼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까지 득세해 차남 루이 샤를이 페르젠과의 사생아라는 루머를 퍼트린다. 심지어 앞서 말한 추문과 실책 탓에 마리 앙투아네트라면 학을 떼게 된 일부 귀족들도 이에 동조하여, 프로방스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 지지파와 오를레앙 공작 지지파로 분열되면서[49] 왕실마저 어지럽혀지게 된다.
더구나 폴리냑 부인에 대한 지나친 총애와 전술했던 측근들하고만 지내고 귀족과 평민들과의 알현 같은 공식적인 활동을 안하는 마리의 모습으로, 귀족과 평민 너나 할 것 없이 불만이 커지고 왕비가 공식적인 활동을 제대로 안 하니 왕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온갖 루머를 추측하면서 이에 불을 지폈다. 문제는 이것이 세간의 헛소문으로만 떠도는데 그치지 않고 각종 음란물 서적과 팜플렛으로 인쇄되어 프랑스 전역에 퍼지면서, 종국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라는 지위가 무색하게 프랑스 전국민의 조롱거리이자 욕받이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50]
11.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결국 전술한 요인들과 오해들로 인해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심해지던 중 로잘리 라 몰리에르의 언니 잔느 발루아 드 라 모트가 프랑스 왕실에 납품될 예정이었던[51]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탐내 사기사건을 벌이고 이에 대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못된 대처[52]까지 겹치면서 다이아몬드 사건[53]이란 대형 사건이 터진다.이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고함이 밝혀졌는데도, 재판에 회부된 잔느는 "마리가 자신을 시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레즈비언이고 여자들과 관계하는 것뿐만 아니라[54] 여러 남자들을 침실에 끌어들이는 문란한 여자다"[55]라는 등의 온갖 위증을 한다.
물론 잔느의 이런 말도 안되는 증언과는 별개로, 잔느가 분명 사기꾼이라는 명백한 증거들이 있었기에 잔느는 사기죄가 인정되어 수백 대의 채찍형을 얻어맞고, 자신의 양 어깨에 도둑(Voleuse)을 뜻하는 머릿글자 V를 새겨서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자 수용 감옥의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그렇게 선 형벌대에서마저 잔느는 간수를 물어뜯으며 발악했고[56] 급기야 마리 앙투아네트를 적대하는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탈옥하여 국외로 망명해서, 돈벌이 겸 복수로 앞서 위증한 레즈비언설부터 수많은 남자들과의 염문설에 살을 덧붙혀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마구잡이로 욕하는 가짜 소설을 팔기까지 한다. 더구나 이 사기극에 일조한 로앙 대주교는 무죄로 풀려나고 부르주아 혁명가들을 필두로 한 황색 언론도 잔느의 사기극을 대대적으로 알리다 못해 그녀를 민중 투사로 포장시켜 버리고 만다.[57]
12. 뒤늦은 변화와 억울한 악명
하필이면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안 그래도 앞서 말한 각종 사치와 무책임한 행태에 이어 페르젠과의 풍문까지 겹치면서 프랑스 전역에서 온갖 조롱과 비난을 받으며 말이 많던 시기였고,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민중과 귀족들도 사기꾼인 쟌느에게 동정을 표하고 로앙 대주교의 무죄에 환호하며 피해자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히려 욕을 먹는 사태까지 치닫고 만다. 이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엄청난 수치심에 떨며 쟌느의 말은 거짓이라고 호소하지만, 평민뿐만 아니라 귀족들까지, 그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이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으로 인해, 뒤늦게서야 자신에 대한 여론이 최악이라는 현실을 깨달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기로 결심하고, 페르젠의 조언을 받아서 간신배인 폴리냑 부인과 그 측근들을 멀리하는 동시에 오스칼과 메르시 백작을 가까이하며 사치와 도박도 그만두고, 자신은 이제 대신을 마음대로 정하지 않는다고 거절하는 등, 국정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바뀌어 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때는 늦어 프랑스 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가는 아무하고나 놀아나는 문란한 오스트리아 여자이자 나라를 망치는 악녀라고 불릴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진다.[58]
이는 어찌보면 잔느가 마리 앙투아네트 일가족과 프랑스의 파멸을 앞당길 정도로 최악의 만행을 저지른 셈이다.
13. 메울 수 없는 재정난 사태
당시 프랑스는 연이은 흉년과 군인들의 식량소비로 파리와 파리 주변부는 식량부족사태가 빈번했으며 이미 루이 14세부터 축적된 왕실의 엄청난 빚과 미시시피 거품, 미국 독립 전쟁[59] 참여 등 여러 실책으로 세금으로 이전 왕실이 지은 빚을 갚는데 대부분을 쓰일 정도로 재정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내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세금 면제란 특혜를 누리고 왕실은 면세 특권을 폐지하는 수단조차 거부하고[60] 백성들에게 세금을 지속적으로 부과하는 악수[61]를 둔다.이러다보니 앞의 부조리한 상황과 식량난과 세금개혁 실패에 평민대표가 삼부회에서 큰 소리를 내고 이후 이런 평민 대표에 동조하는 제 1, 2신분의 귀족과 성직자[62]들도 나타나 테니스코트의 서약으로 국민의회가 성립된다. 이런 급격한 사회 변화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민중들의 소리를 듣고 개선하긴 커녕 왕당파 귀족들과 함께 남편 루이 16세에게 귀족들의 면세특권 유지와 민중들을 반역자로 몰아 남편 루이 16세에게 "군대를 동원해 강경 진압하라"고 강요하는 시대착오적인 언행을 보이고 만다.
14. 프랑스 혁명
결국 이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실책과 무능이 연이어 이어지자 민중들의 고통과 왕실을 향한 증오가 하늘을 찌른 끝에 마침내 유럽 최고의 절대왕정이었던 프랑스 왕실의 존폐 자체를 깨부수고 프랑스 공화국의 시초가 되는 프랑스 혁명이 터진다.이때 혁명을 일으킨 시민들을 제압하라 보낸 오스칼과 위병대들도 이들에 합류하여 바스티유 감옥 함락 사태에 기여하고, 급기야 굶주림에 분노한 민중들과 부녀자들이 아예 베르사유의 궁전까지 쳐들어 와서 왕가 가족들을 습격하는 등 루이 16세 가족들의 생명까지 위헙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다.
특히나 그들에게 가장 증오받았던 마리는 이때 시위대 앞으로 끌려가서, 그들의 분풀이 대상이자 웃음거리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사태까지 갈 뻔했지만 그녀는 직접 베르사유 궁전까지 쳐들어온 분노한 민중들의 앞에 나서서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63]하는 모습을 보여 흥분한 민중들을 진정시키는 것으로 왕비로서 위엄을 보였다. 이후 국민 의회와 민중들의 요구로 가족들과 쫒겨나다시피 베르사유를 떠나[64] 파리의 고성인 튈르리 궁전에 유폐된다.
15. 모두가 떠나다
비록 앞의 사건들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권을 하나 둘씩 빼앗기긴 했어도 매일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받고 어전회의에도 참여하며 여전히 국왕과 왕비로서 국민 의회와 민중들에게 존중받고 있었다. 아울러 혁명의 유력 지도자 중 한 명인 미라보 백작은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봉 왕정도 잘만 하면 절대왕정 시대만은 못해도 최소한의 권위를 인정받고 남은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주변 측근들의 부추김과 루이 16세의 우유부단한 행동, 철지난 왕권신수설을 고집하는[65] 마리의 시대착오적 행동, 미라보 백작의 갑작스러운 죽음 등으로 그마저도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꽉 막힌 상황과 우유부단한 왕과 왕비에게 질려버린 일부 귀족들은 살길을 도모하고자 프랑스와 왕실을 버리고 떠나기 시작하면서 마리는 외톨이 신세로 전락한다.
특히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곁에서 온갖 아첨을 일삼아 막대한 국비를 낭비하게 하고 마리에게 귀족들의 면세특권 유지와 군대를 통한 강경진압을 주장하면서, 이를 반대하며 충언을 하는 오스칼을 모함하고 자신들이 충신인 것처럼 굴던 간신들은 막상 루이 16세 부부가 위험에 처하자 바로 그들을 버리고 해외로 도주해버렸다.[66] 심지어 도망가지 않고 왕실에 충성하는 왕당파마저도 충성심과는 별개로 대다수가 무능하였기에 부르봉 왕실을 수호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67]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 곁에 유일하게 남은 건 시누이 엘리자베트, 페르젠, 자신에게 늘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오스칼[68]의 아버지 자르제 백작 뿐이었다. 이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페르젠에게 더욱 의지하면서도 자신이 베르사유의 중심에 있었을 때는 온갖 아부를 일삼던 사람들이 지금은 자기들끼리 살길을 찾아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도망쳐버린 현실에 비참해한다.
16. 바렌느 도주 사건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장기화되고 왕실에 대한 위협이 갈수록 거세지자 페르젠의 도움으로 가족들과 함께 바렌느를 거쳐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이것이 마리 앙투아네트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가게 된 최대 최악의 실책이었다.마리는 어전회의가 끝나자마자 아들 루이 샤를을 여장시키고 딸 마리 테레즈와 함께 가장 무도회에 간다고 안심시킨 뒤 두 자녀를 데리고 튈르리 궁을 나가 페르젠이 준비한 도주용 마차를 타고 출발한다. 그렇게 무사히 튈르리 궁에서 탈출해 왕당파 군대가 기다리고 있는 바렌느까지 가는데 성공하지만, 중간쯤 다다랐을 때 자신들과 엮일 시 피해를 볼 것을 우려한 루이 16세의 강건으로[69] 페르젠을 먼저 벨기에로 보내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그와 헤어진다. 하지만 계획에 가담한 왕당파의 무능 때문에 계획이 자꾸 어그러지면서 안전한 도피는 물건너 갔고 우연의 우연이 겹친 끝에, 생트머누의 역참이자 자코뱅파의 일원인 장바티스트 드루에가 자신들을 보자마자 바로 국왕 일가임을 눈치채고 이를 국민 의회에게 알리면서 도주극은 실패로 끝난다.
당시 바렌느의 한 민가에 들러 휴식을 취하고 있던 루이 16세 일가는 들이닥친 혁명대를 보고 놀라 시치미를 떼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드루에가 자신들의 정체를 완전히 확신하는 건 물론[70] 파리의 국민 의회로부터 국왕 일가가 튈르리 궁을 탈출하여, 국경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들을 발견하는 즉시 붙잡아 파리로 돌려보내라는 전령까지 받아 읽으면서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이 소식에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민가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린다.
이렇게 된 바엔 남편인 루이 16세에게 틀림없이 푸이에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도우러 올 것이니 1분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보라고 지시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보려고 하지만 속셈을 눈치챈 드루에에게 바로 저지당하고, 분노한 시민들도 국왕의 몸으로 조국을 버리고 도망치려 하다니 비겁하다며 빨리 파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까지 하고 우리들을 배반한 국왕따위 필요없다며 국왕과 왕비를 모조리 사형에 처하라고 위협한다. 결국 바렌느의 시장마저 어서 출발하지 않으면 생명의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다고 하자, 모든 것이 끝났음을 체념하고 먼저 떠난 페르젠만은 무사히 망명해서 자신의 몫까지 살아달라고 빈다.
이후 바렌느의 시민들 앞에 루이 16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만 왕과 왕비가 외국으로 도주하여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키려 했단 것에 분노한 시민들에게 "이 나쁜 년아! 이런 드레스로 치장한 매춘부! 어디 한번 당해봐라!"라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온갖 험한 욕설에 드레스가 찢어발겨지고 돌팔매질까지 당하며 온갖 치욕을 겪는다.[71] 만신창이가 된 채로 견딜 수 없는 조롱까지 들으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정신을 추스려 공포에 질린 아들 루이 샤를을 챙겨 마차에 타려고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군중들은 루이 샤를에게마저 뭐가 왕세자냐며 넌 국왕의 아들이 아니라 페르젠의 사생아라고 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 일가를 모욕한다.[72] 이에 돌을 맞아 얼굴에 피까지 흘리면서도 자신에 대한 증오로 아무 죄없는 어린 아들까지 모욕해대는 시민들에게 분노하여 국민 누구 하나라도 용서할 수 없다며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눈물을 보일 줄 아냐고 겨우 마음을 추스리며 아들을 달래준다.
그렇게 군중과 국민위병에게 둘러싸여 돌아오는 내내 온갖 모욕과 위협을 받으며 3일에 걸쳐 파리로 압송되어 다시 튈르리 궁으로 돌아오지만 이때 5일간의 도피와 3일간의 체포와 압송 중 겪은 공포 때문에 금발 머리가 노파와 같은 백발로 하얗게 세어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바렌느에 도착한 푸이에 장군도 국왕 일가의 귀환 행렬을 보고 이미 늦었음을 깨달아 바로 퇴각하고, 미리 벨기에로 망명해있던 페르젠마저 이 소식을 듣고 운명은 끝내 우리들을 비웃는다며 모든 것이 파멸이라고 절망한다.[73]
결국 왕실 가족의 도피 사건이 프랑스 전체에 널리 퍼지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자신들을 향해 조국을 버리고 도망치려한 국왕과 왕비는 사형에 처하고 왕정을 폐지하자고 소리칠 정도로[74]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분위기는 험악해졌고, 혁명 정부 또한 국왕 일가가 자신들과의 공존은 커녕 협조하려는 마음조차 없음을 여실히 깨닫고 왕정제 폐지와 공화정 준비에 착수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일가는 완전히 몰락하고 그들의 운명도 사실상 이때 결정된다.[75]
17. 폐위와 남편의 처형
그렇게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가족들과 튈르리 궁에 유폐되어있다가, 목숨을 걸고 변장하여 찾아온 페르젠과 감격스러운 재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들을 외국으로 탈출시키겠다고 하는 페르젠의 말에 이미 프랑스 내부의 여론이야 말할 것도 없고 외국 왕실마저 자신들을 버린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6세와 자신의 최후는 정해져 있었고, 스스로도 살아남을 거라 생각치 않아서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하고 초연해하며 구차하게 살기보단 차라리 왕과 왕비로서 아름답게 최후를 맞이하겠다며 페르젠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의 안위를 걱정해 황급히 튈르리 궁에서 내보내면서 영원히 이별한다.이후 전세계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말처럼 프랑스 혁명의 영향력을 두려워 한 여러 유럽 국가들이 관여하고 설상가상으로 국외로 도피한 프로방스 백작 루이와 아르투아 백작 샤를의 부추김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필두로 한 연합국이 프랑스 혁명정부와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누가 이기든 자신들은 무조건 프랑스 국민에 의해 처형당할 게 확실시된 위태로운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에 시누이 엘리자베트 공주가 프로방스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에 대해 피를 나눈 형제이면서 자신들이 국민에게 살해당하길 바라다니, 지옥에나 떨어져야 마땅하다고 절규하자[76] 이성을 잃지 말고 의연하게 기다려보자며 최후까지 왕족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말자고 위로한다. 그 모습을 본 루이 16세가 당신이 이 나라에 시집온 것이 이런 불행을 맛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거라며 슬퍼하자, 자신도 프랑스의 국민들과 가족들은 물론 유럽 전역에게 버림받고[77] 죽기만을 기다리는 신세에 눈물을 흘린다.
이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과의 전쟁에 이어 자코뱅파와 지롱드파의 대립까지 일어나면서 튈르리 궁에서 계속 국민들의 습격을 받으며 위협당하다가 마침내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일가족과 함께 탕플 탑에 수감된다. 루이 1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최후까지 남아있던 왕당파와 지지세력도 이때 모조리 수감되어 학살되면서[78] 완전히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다. 이에 어린 자식들을 위로하면서도 프랑스군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연합군이 빨리 파리로 침공해와 혁명 따윈 박살을 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조국의 안위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더 신경쓰는 왕비로서 최악의 모습을 보인다.
결국 1792년 9월 21일 프랑스가 정식으로 공화국이 된 것을 선언하고 이에 따라 부르봉 왕정의 폐지와 남편 루이 16세의 폐위를 통보하면서 자신도 프랑스 왕비에서 폐위된다.[79] 이후 국민공회에서 격렬한 토론 끝에 찬성 361표 대 반대 360표로 단 한 표 차이에 의해 남편 루이 16세의 처형이 결정되자 절망한다.
처형 전날인 1793년 1월 20일에 격리되어 있던 루이 16세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허락받자 남편의 품에 안겨 오열한다. 결국 다음날 1월 21일 감옥 안에서 엘리자베트 공주와 함께 루이 16세의 처형 소리를 들으며 절규한다. 이후 사랑이 없는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아내와 남편으로서 20여 년간을 함께 사는 동안 루이가 보여준 깊은 애정과 성실함은 진실했고 격렬한 연애감정은 아니었지만 분명 남편을 사랑했다고 회고하면서 루이 16세의 죽음을 애도한다.
18. 가족들과의 이별
남편이 처형당하는 불행을 겪었어도 탕플 탑 안에서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순간만을 위안으로 삼으며 버텨내지만 그조차도 얼마 가지 않는다. 루이 16세를 처형한 국민 공회가 그의 아들 루이 샤를마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서 떼어놓기로 결정하면서[80] 아들과도 생이별하는 비극을 연이어 겪게 된 것이다.감옥에 들이닥친 혁명군들이 국민 공회의 결정을 통보하며 루이 샤를을 데려가려고 하자, 마리는 아들을 필사적으로 품에 끌어안은 채 절대 안된다며 당장 나가라고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끝내 루이 샤를이 강제로 혁명군에게 끌려나가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주저앉아 처절하게 오열하며 아래와 같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당신들은 내게서 모든 것을 뺏어 갔어! 내 지위도, 내 남편도, 내 행복도...! 모든 것을 뺏어 갔어요! 그런데 이 아이까지 뺏으려는 것입니까?! 이제 아무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나를...!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어째서 이렇게까지 괴롭히려고 하지?! 차라리 죽여다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다오! 너희도 한 아이의 부모가 아니더냐!
라고 절규한다.하지만 이 말을 들은 혁명군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동정하긴 커녕 차분하지만 원한이 서린 듯 "물론 우리에게도 아들이 있었죠. 우리가 아들에게 먹일 우유도 없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때... 당신은 호화로운 궁전에서 보석을 몸에 걸친 채 웃고 있었죠."라며 일갈한다.[81] 이 말에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아들을 빼앗기고[82] 완전히 자포자기하여[83] 어서 빨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후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시누이 엘리자베트와도 이별한 뒤[84] 콩시에르쥬리에 감옥에 수감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형수 신세가 된다. 그야말로 일국의 국모에서 바닥까지 떨어지는 비참한 신세였지만 다행히 시중을 든 로잘리[85]와 감옥 사람들의 배려[86] 덕분에 나름 편안하고 행복한 감옥 생활을 보낸다.
19. 국민 재판
그러나 평화로운 감옥 생활도 얼마 가지 못하고 혁명 정부측에 의해 콩시에르쥬리에서 끌려나와 온갖 사치로 프랑스의 세금을 낭비하고 혁명을 때려부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내통하여 도주하려한 반역죄로 국민 재판에 서게 되면서 그동안 자신이 저질러온 실책으로 증오가 폭발한 평민들의 매서운 비난을 마침내 목도한다.이후 국민 재판에 여러 번 회부되어 혁명 정부측이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실책부터 하지않은 짓까지 모조리 유죄로 몰아가는 것[87]에 반박하며 15시간동안 이어지는 긴 재판으로 몸도 마음도 지쳐가지만, 마지막까지 프랑스의 왕비로서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란 사람' 이 어떤 사람인지 알리기 위해 끝까지 침착함과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때 로잘리의 도움으로 자신을 찾아온 자르제 백작에게 탈출 제안을 듣지만 자녀들까지는 함께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녀는 "어떠한 행복이 있어도 아이들을 두고 갈 수는 없다"며 의연한 태도로 스스로 탈출을 거절하고, 자르제 백작에게 마지막까지 애써줘서 고맙다는 작별 인사를 나눈다.[88]
그렇게 지리멸렬한 싸움을 반복하던 중 급기야 자신을 확실하게 처형시키기 위해 에베르가 자신을 아들 루이 샤를과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며, 말도 안되는 혐의로 고발하고 장래에 루이 샤를이 국왕이 되었을 때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한 음모가 틀림없다는 어이없는 이유까지 갖다 붙히며 매도하기에까지 이른다. 이때 아들이 자신에게 강간당했다고 거짓 증언했다는 것[89]을 듣고 경악한 마리는 할 말을 잃고 법정 역시 충격으로 웅성거린다.
하지만 마리는 왜 대답이 없냐는 판사측의 재촉에 당당한 태도로 "이것은 인간의 모든 어머니, 모든 여성에 대한 부끄러운 모욕입니다. 적어도 어머니에게 가해지는 이와 같은 비열한 고발에 대답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나는 이 법정에 있는 모든 여자분들에게 말합니다."라며 마지막까지 위엄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대응한다.
더군다나 에베르의 근친상간 주장은 누가봐도 급조된 혐의였기 때문에 법정은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라면 이를 가는 평민측 방청객들 역시 에베르의 주장에 반발 섞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나 마리 앙투아네트를 '드레스로 치장한 매춘부' 라고 부를 정도로 증오한 여인들까지 이건 우리 여성 전체에 대한 모욕이니 비열한 에베르를 끌어내야 한다고 마리의 변론에 호응할 정도였다.
이렇게 자신을 처형하고자 근거도 없는 누명까지 씌우려는 국민의회에게 제대로 한방 먹인다.[90]
20. 최후
이처럼 멋지게 근친상간 혐의를 반박해냈지만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채로 진행되는 재판이었기에 끝내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이미 왕비에서 폐위되고 남편이 처형당하는 걸 시작으로 어린 자식들과도 생이별하는 여러 가지 비극을 겪으면서 삶의 의지를 잃은지 오래였기에[91], 판사측이 "피고는 이 판결에 대해서 할말이 있냐"라고 물어도 말없이 고개를 저으면서 '마침내 길고 긴 고통이 끝나는구나'라고 눈물을 흘리며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인다.처형 전날 밤, 지친 몸으로 겨우 이끌고 시누이 엘리자베트 공주에게 마지막 편지[92]를 쓰고 모든 걸 포기한 채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눈물만 흘린다. 그런 자신을 보고 로잘리가 울먹이며 자신에게 아침식사를 드시겠냐고 묻자, 마리는 고맙지만 모든 것이 끝났으니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거절한다. 그러나 로잘리 역시 자신을 걱정하며 흘리는 눈물을 본 마리는 마음을 돌려서 식사를 가져다달라고 말하고, 그렇게 로잘리의 도움으로 겨우 기운을 차린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이 처형당한지 9개월 뒤이자 자신의 처형식 당일인 1793년 10월 16일에 콩시에르쥬리 감옥에서 나와, 단두대에서 참수당하기 쉽게 긴 머리카락을 잘리고 반항하지 않도록 손까지 묶인 채 처형장으로 끌려간다. 떠나기 직전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로잘리와 마주치자 자신의 리본을 로잘리에게 간직해달라며 고마움을 표현한다.[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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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71a36><colcolor=#ffffff>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후 |
자아, 봐라!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 죽는 모습을... 이 목이 떨어지고 피가 방울져 떨어져도, 나는 영원히 눈을 뜨고... 조국 프랑스의 장래를 지켜보련다. 잘 봐두어라! 이것이 프랑스 왕비의 죽는 모습이다!
안녕, 페르젠! 언제까지나 나를 잊지 마세요. 최후의 이 순간까지 끌려가듯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만나겠죠. 신이여! 이제... 갑니다.
원작 8권 中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유언
이후 남편과 다르게 초라하고 굴욕적인 모습[94]으로 대중들의 야유를 받으며 처형장에 당도하지만[95], 마지막까지 침착함과 위엄을 잃지 않고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긴 후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다.[96]안녕, 페르젠! 언제까지나 나를 잊지 마세요. 최후의 이 순간까지 끌려가듯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만나겠죠. 신이여! 이제... 갑니다.
원작 8권 中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유언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유품[97]은 로잘리가 간직하게 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안좋게 생각했던 베르나르, 알랭[98] 역시 오스칼과 더불어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추모한다.
21. 사후
불행하게도 사후마저도 그녀의 처지와 평가는 박하기 그지없는데 세간의 평처럼 희대의 악녀는 아닌데다 개인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해주는 상냥한 여성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감정만 중시하며 왕비로서 온갖 실정을 벌인 것도 사실이었기에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왕비로 낙인찍히고 만다.[99]그 악명의 수준이 어찌나 대단한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후 그녀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황실마저 자신들의 궁정 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엄중히 금지해버리고 아예 없는 존재로 취급할 정도이며[100], 페르젠을 때려죽이던 스웨덴 시민들은 자신들에게는 한참 지난 일이고[101] 프랑스 혁명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보자마자 프랑스 국민을 배신하고 목이 잘린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할 정도다.
더 비극적인 것은 막내아들 루이 샤를은 혁명군에 끌려가서 왕자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자라나고 외전에서 언급조차 안될 정도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나마 부모형제부터 고모까지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 마리 테레즈는 프랑스 혁명정부의 포로 교환 협상으로, 외가인 합스부르크 황실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게 되고 페르젠 백작의 도움과 사촌 프란츠 2세와 마리아 테레사 부부의 배려로 부르봉 왕가의 공주로 대접받게 된다.
그러나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과 고된 유폐 생활로 인해 과거의 천진난만하고 말괄량이의 모습은 잃어버리고 자신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자신도 감옥에서 학대한 프랑스 혁명군과 민중들은 물론[102][103], 가족들의 죽음을 방관한 외가[104]와 혁명군의 세뇌로 거짓 증언을 하여 어머니가 처형당하는 데 공헌한[105] 남동생 루이 샤를마저 부모를 죽인 죄로 총살시켜야 된다고 할 정도로 저주할 정도로 냉혹하고 매마른 성격이 되어 버렸다.[106][107]
[1]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제 모토가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일 정도다. 그만큼 철저히 정략에 따른 결혼을 통해 일개 지방 영주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와 스페인 왕위를 몇 백년 동안 독차지할 정도로 성장하여 카를루스 대제의 피를 이은 카페 왕조에서 시작된 프랑스 왕가와 라이벌 관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합스부르크 주걱턱으로 대표되는 과도한 정략혼과 근친혼의 폐해도 가장 많이 보여준 가문이다.[2] 작중에서 수업 시간에 잠깐 들어와 프랑스어는 물론 모국어인 독일어조차 문법, 작문이 엉망진창인 마리의 글을 보고 경악했다가 선생님께 마리가 쓴 글이 맞다는 확인을 받고 2차 충격을 제대로 받는다.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춤에는 나름 능했지만 역사와 정치, 노래 등 각종 수업에서 낙제점을 받았고, 남긴 글에도 엉망진창인 문법과 오타자가 보일 정도로 문해력이 부족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교육을 맡은 가정교사와 베르몽 주교 모두 "모친과 같은 놀라운 지성과 이해력과 기품 등 뛰어난 자질을 가졌지만 집중력과 열의가 부족하다"고 냉정히 평가했다.[3] 마리가 시집 가서 살아야하는 나라인 이유도 있지만, 당시 유럽에서 프랑스어는 지금의 영어와 비슷한 국제 공용어였다. 그러다 보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물론 프랑스 측에서도 상당히 신경을 썼고 실제로 프랑스 대주교인 베르몽 주교를 파견시켜 마리 앙투아네트의 프랑스어는 물론 프랑스 정치, 인물 관계 등 여러 교육을 담당하게 했다.[4] 작중은 물론 실제 역사에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에 시집 가기 전 마리의 치아교정과 프랑스 옷과 헤어스타일을 한 마리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마리의 선전에도 신경을 썼으며,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동시대를 다룬 경국의 재봉사 로즈 베르탱에서도 프랑스 내에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초상화와 소문이 널리 퍼져 있다는게 묘사되었다.[5]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아 테레지아는 시집간지 7년 가까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대자연이 찾아왔다" 라는 사생활까지 감독하는 편지를 받을 정도로 막내딸을 많이 신경썼다. 게다가 아들 요제프 2세처럼 프랑스의 불안한 현실을 직감해서 사돈인 루이 15세의 서거 소식을 듣자마자, 메르시 백작에게 마리를 지켜봐달라고 당부하고 동시에 내 딸의 행복한 나날은 이제 끝났을지도 모른다라는 불안한 예견을 남겼는데 이 예견은 최악으로 이뤄지고 말았다.[6] 또한 작중에서는 안 나왔지만 실제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큰오빠 요제프 2세도 어머니 못지 않게 막내 여동생의 안위를 걱정해 결혼식 때 같이 동행하고, 어머니로부터 여동생의 철부지 행동을 듣고 보다 못해 루이 16세 부부를 보러 프랑스에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의 불안한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방만하게 행동하는 여동생과 매제에게 정신 차리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엄하게 충고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큰오빠가 다녀간 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침내 임신하여, 첫 자식인 마리 테레즈를 시작으로 아이를 출산하여 후계자 문제를 종식시키면서 좋은 영향이 되기도 했다.[7] 당시 마리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지역에서 인도과정을 거쳤는데 오스트리아에서 동행한 시녀와 애완견을 포함한 모든 것을 놓고 오스트리아에서 출발할 때 입은 옷도 속옷까지 전부 프랑스의 옷으로 갈아입는 과정을 거쳤다. 다만 이때 어머니가 준 지침서와 금시계만은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8] 애니메이션에서는 둘의 첫 만남이 더욱 임팩트가 커졌는데, 입고 있던 옷은 물론,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직접 선물해준 반지까지 회수한다는 말을 듣자 마리는 차라리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겠다며 시녀들을 피해 숨으려고 했다. 이때 왕위를 탐내는 오를레앙이 보낸 시녀가 옷을 바꿔입자고 제안했고, 마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녀 차림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갑자기 나타난 자객들에 의해 납치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때마침 낌새를 눈치챈 오스칼이 나타나 마리를 자객들로부터 지겨주었다. 비록 이들 뒤에 누가 있는지 아직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시녀가 도착하기 전 오스칼이 마리를 루이 15세와 왕실 가족 앞에 데려다 주었으며 마리는 자신을 도와준 오스칼을 너무나 멋있는 사람이라며 호감을 느꼈다.[9] 애니메이션에선 앞에 설명했듯이 조금 다르지만, 오스칼의 도움으로 마리가 직접 귀족들과 루이 15세 앞으로 나타나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시녀 차림인데도 마리의 매우 아름다운 미모와 공주답게 기품있는 모습을 보자 일제히 감탄하였다.[10] 다만 이는 안타까운 오해로 사실 루이는 아름다운 마리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한편 실제 역사에서도 루이는 마리를 보고 멀뚱멀뚱 서있었고 볼키스만 하고 바로 떠나버려 루이 15세는 물론 같이 온 남동생들(프로방스 백작 루이, 아르투아 백작 샤를)도 괜히 무안해했다고 한다.[11]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지하는 듯 결혼 문서 서명 중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에 검은 얼룩이 번지고, 결혼식 당일 폭풍우가 몰아치는 등 불길한 징조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게다가 작중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인도 과정을 거치는 건물에 불길한 결혼의 대명사로 불리는 '왕녀 메데이아'의 내용을 담은 태피스트리가 걸려있고, 루이 16세 부부의 첫 파리 방문에 니콜라이 2세 대관식처럼 사람들이 몰려 대형압사 사고가 나기까지 했다.[12] 마리 앙투아네트가 갓 시집을 올 당시 루이 15세의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와 왕세자비인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는 이미 사망했다. 그래서 공식 애첩인 뒤바리 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기 전까지 왕비 역할을 해왔지만 형식적인 신분으론 백작 부인에 지나지 않았다.[13] 실제 역사에서도 루이 16세는 자물쇠 만들기를 취미로 삼았으며 아예 궁전 안에 자물쇠를 만드는 대장간을 두기도 했다.[14] 비록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매춘업을 금지하려고 했고 매춘부들에게 채찍형을 내린 후 감화원에 집어넣는 등, 축첩과 매춘을 엄청 싫어했다.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도 '돈에 몸을 팔거나 남자의 애첩이 되는 일은 여자로서 가장 천한 행동' 라고 가르쳤다.[15] 당시 루이 15세가 딸들에게 약했기에 공주로 대접 받은 것이지, 사실상 이 3명은 놀고 먹는 잉여인간에 불과했다(당장 막내 여동생인 루이즈가 수녀로 사는 길을 선택했고 그들이 무시한 뒤바리 부인이 자선 사업에 열중했던 것과 대조적). 게다가 심보도 고약해서 실제 역사에는 마리가 처음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오자 적국의 여자가 왜 왔냐는 뒷담을 까고 뒤바리 부인과의 다툼에서 지자 베르사유에 마리에 대한 악의적 소문까지 퍼뜨렸다. 참고로 이런 시고모들의 철부지 행각을 본 마리는 자신의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만큼은 저런 안하무인으로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 딸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16] 전술했듯이 뒤바리 부인이 공식 애첩에 마리가 오기 전부터 왕비 자리를 대신해온 실질적인 궁정 안주인이었지만, 공식적인 신분으로는 왕세손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 궁정에서 가장 지위 높은 왕실 여성이었고, 평민 출신인 뒤바리 부인과 달리 오스트리아의 공주인 만큼 출신도 신분 차이도 까마득히 높았다. 루이 15세의 공주들과 왕세손비 마리는 이 점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뒤바리 부인을 견제했던 것이다.[17] 한편 두 여자의 살벌한 신경전을 지켜보던 오스칼은 누구의 편을 들어야할지 이득이냐고 고민하던 귀족들을 비웃으며 "나는 누구의 편에도 붙지않고 이 재미있는 여자들의 기싸움을 구경하고 싶을 뿐이다" 라고 그저 웃으면서 관망하는 자세였으나, 오스칼의 인기를 이용하려는 뒤바리 부인과 반대로 그걸 막으려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둘 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각자 자기 시녀로 오라는 명령을 동시에 내리면서 오스칼은 본의 아니게 휘말리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오스칼의 어머니에게만 내려진 명령이었지만 사실상 오스칼에게 '둘 중 누구를 지지할 건지 선택하라' 라는 의미였고, 이 사실을 잘 알던 오스칼은 어머니가 이런 왕실 내의 기싸움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국왕의 명령이었으니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다만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는 루이 15세가 선택의 자유권을 줬기에, 결국 오스칼은 누구를 선택하든 어머니가 괴로워하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한명만을 꼭 선택해야한다면 어머니를 위해 평판이 안 좋은 뒤바리 부인이 아닌 혈통, 지위가 높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선택한다. 그렇게 오스칼의 어머니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로 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오스칼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 쪽에 가게 되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칼의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피고 언제나 상냥하게 대해주었다.[18] 다만 이 기싸움과는 별개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공식적인 첫 자리에서 오스칼에게 말을 가장 먼저 걸 정도로 호의적이었고, 전술했듯이 오스칼도 뒤바리 부인은 비 전하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다고 조언했다. 게다가 권력을 위해선 잔인한 방법을 가리지 않는 뒤바리 부인과는 달리 마리는 다정하고 상냥한 순수한 여인이고, 특히 뒤바리 부인이 마리와 오스칼에 대한 응보라고 오스칼의 어머니를 독살범으로 몰고 죄없는 하녀도 장깃말로 이용하는 걸 보고 오스칼은 뒤바리 부인을 적대시하게 된다. 실제로 루이 15세 서거 며칠 전 뒤바리 부인이 마리의 진정한 친구인 오스칼을 따로 불러 마리와 자신의 화해를 부탁 및 협박까지 하는데, 뒤바리 부인의 목적을 이미 알고 있던 오스칼은 '그럼 처음부터 호의적으로 다가갔으면 될 걸 왜 이제야 이러냐'는 팩트를 날리며 거절한다.[19] 원래는 메르시 백작과 세운 계획대로 왕실 가족들 간의 카드 게임 시간을 끝내고 돌아가는 틈을 타서 마리가 뒤바리 부인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는 걸로 일단락 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아델레이드 왕녀(마리의 시고모중 한명)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인사를 하려는 마리를 갑자기 붙잡자, 마리는 당황하지만 왕녀가 마리를 억지로 끌고 가버리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왕실 가족들과 귀족들이 전부 목격해버리면서 뒤바리 부인이 모욕감에 얼굴을 붉히고 귀족들은 뒤바리 부인을 남몰래 비웃는데, 결국 루이 15세가 노발대발하며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마리 입장에서는 분명 억울한 상황이었기에 메르시 백작과 마리가 루이 15세에게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여 가까스로 기회를 얻었다.[20] 이후 원작, 애니에서 이 모습에 대놓고 비웃는 뒤바리 부인을 보자마자 그간 극에 달한 스트레스와 자신이 뒤바리 부인에게 졌다는 분함을 못 이겨 울면서 뛰쳐나간다. 다행히 마리를 걱정하며 달려온 오스칼의 위로 덕에 평정심을 되찾게 된 마리는 '이것으로 이제 끝이다, 이제 절대로 뒤바리 부인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테다' 라고 결심한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대단한 게, 남들 같았으면 아예 뒤바리 부인을 향해서 복수를 계획했겠지만, 반대로 마리는 아예 이번 말 한마디로 확실히 끝이라고 결론짓는 깔끔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상황은 상황인지라 모든 사람들이 보는 눈앞에서 울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해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원작과 애니와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뒤바리 부인과의 일은 끝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으며, 뒤바리 부인이 보내는 보석들은 모두 거절하는 등, 아예 관계를 모두 정리했다.[21] 애니메이션에서는 한술 더 떠서, 루이 16세는 자기가 만든 자물쇠 중 하트 모양의 큰 자물쇠 하나를 급하게 마리에게 선물하고 자리를 피했는데, 이에 어처구니없던 마리는 지금 장난하냐며 자물쇠를 던지고 "왕태자님은 제가 싫으신가요?"하며 오열하기까지 했다. 이 광경을 바라본 메르시 백작은 한숨을 쉬며 메르시 백작에게 루이 16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 사람은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 사람은 멋지고 아름답지만 그에 비해 나는 근시안에다 날씬하지도 않고 수줍음만 타고..."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22] 이 어색한 관계에는 전술한 부분도 있지만, 루이 16세의 성격이 소극적인데다 취미도 독서, 사냥, 자물쇠 만들기처럼 정적인 반면에 마리는 활달하고 연극이나 무도회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는 걸 좋아하는 등, 부부의 성격부터가 정반대인 것도 한몫했다. 설상가상으로 루이 16세는 그런 자신이 볼품없다고 생각해서 마리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며 마리의 첫 연회 때부터 춤을 추지도 않으며 한동안 각방을 쓰는 등, 그런 루이에게 마리는 실망하는 악순환의 연속이 되면서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두 사람의 사이는 서먹했다.[23] 예를 들어 프랑스 왕궁에는 매 시간마다 왕비나 왕세자비가 귀부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옷을 갈아입는 일명 '투알레트' 라는 의식이 있었다. 게다가 과정도 그냥 옷을 갈아입고 끝나는 게 아니라 담 다투르(의상담당)가 치마를 보여주면 담 도뇌르(시녀장)가 입히고 담 도뇌르가 속옷을 골라주면, 다음 귀족이 입히는 역할이 하나하나 정해져있고 만약 담 도뇌르보다 서열 높은 귀족이 들어오면 그녀에게 권한이 넘어가는 온갖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다. 이렇다보니 왕비나 왕세자비는 30분이 넘도록 추위에 떨며 수행원들이 옷을 입혀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또한 당시 왕세자 부부를 포함한 왕실 식구들의 식사는 공개 식사로서 귀족, 평민들을 포함한 여러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으며 당시 어린 마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식사를 잘 하지 못해 유일하게 사적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오전 시간에 맘껏 먹었다고 한다.[24] 이때 마리는 튈르리 궁전에서 파리 민중들의 큰 환영을 받자 크게 감명하고 오스칼(실제 역사에선 파리 시장)에게 "비 전하는 지금 여기서 비 전하를 사랑하고 있는 20만명의 국민들을 보고 계신 겁니다."라는 감동적인 말을 들었다. 기묘하게도 20년 후 마리는 자신이 환영을 받은 그 자리에서 정반대로 민중들의 차가운 반응과 경멸을 받으며 처형되었다. 작가 이케다 리요코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세손비 시절 파리 방문 때 환영하는 인파에 감동하는 장면에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의 감동을 잊지 않았다면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거다."라는 각주를 달았다.[25] 작중과 실제 역사에서 새로운 왕의 즉위를 환영하는 귀족들과 대조적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갑작스러운 즉위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채 "신이시여. 아직 어린 나이에 즉위한 저희들을 지켜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올렸다. 심지어 신극장판에서는 불안함 탓에 두 부부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공포에 떨었다. 덤으로 본인을 그렇게 욕하고 멸시하던 뒤바리 부인은 루이 15세의 사망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쫓겨나게 된다.[26] 다만 시할아버지의 안타까운 서거에 대한 충격과는 별개로, 정작 만화 내에서와 실제 역사에서 마리는 불안감은 금방 잊어버리고 랭스에서 열리는 루이 16세의 대관식에 화려한 드레스를 맞춰 입고 (카트린 드 메디시스 이후로 226년만에)대관식에 왕비로서 직접 참석하고,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마침내 프랑스 왕비로 즉위하다니 감격스럽다는 편지를 보내는 등, 왕비가 된다는 것에 매우 들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철부지 막내딸이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한 채 너무 일찍 즉위한 것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고 메르시 백작에게 전술한 자신의 불길한 예감을 적은 편지까지 보내며 딸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27]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행시킨 드레스로 작중에서 나온 벼룩색 드레스, 세 갈레 퍼브의 로브 아 라 폴로네즈, 동양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로브 아 라 시르카시엔느가 있다. 작중과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패션 리더로서 왕실 문화를 주도했고 마리의 패션은 귀족들은 물론 패션 잡지였던 르 메르쥐르갈량의 판화에 실려 크게 유행했다.[28] 또 드레스나 악세서리 뿐만 아니라 초상화, 만화에서 묘사한 머리카락을 붙임머리와 함께 높게 올리고 약간의 가루를 사용해 머리카락을 높고 풍성하게 고정시키는 일명 푸프라고 불리는 화려한 헤어스타일도 유행시켰다. 마리의 개인 헤어 디자이너 레오나르 오테에는 가끔 가루에 색을 넣어 머리카락에 화사한 색을 연출했고 상황에 따라 터번, 깃털 심지어는 거대한 배 모형이나 미니 정원(...)을 올렸다고 한다. 다만 푸프를 고정하는 가루에 주로 밀가루가 사용되었던 지라 당시 식량난과 고물가로 힘들어 한 백성들이 마리의 헤어스타일이 밀가루 가격을 폭등 시킨다고 엄청 비난을 했다. 여담으로 푸프의 높이(30~60cm) 및 풍성함 탓에 간혹 마차를 타야 할 때, 여성들은 머리 장신구와 붙임머리를 떼어내고 안에 들어가서 다시 스타일링 했거나, 아예 바닥에 앉거나 창문 밖에 머리를 내놓는 식으로 마차를 탔었다.(...) 더구나 헤어 스타일을 유지하고자 최소 2주 동안 머리를 감지 않다보니 냄새는 말할 것 없고 푸프에 각종 벌레들이 꼬이고 심지어 쥐(...)까지 서식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행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대 귀족들과는 달리 목욕을 자주 하다보니 이상없이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29] 프랑스 왕비에 오른 후 화려하게 치장한 자신의 초상화를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보내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작중은 물론 실제 역사에도 "이건 프랑스 왕비의 초상화가 아니라 화려하게 치장한 여배우의 초상화로구나!"라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런 한심한 초상화는 돌려보내라고 한 동시에 저 아이는 본인의 사치에 어느정도의 세금이 쓰였는지 알고나 있을까라며 딸의 어리석은 행동에 한탄하였다.[30] 결국 어머니의 불길한 예측대로 마리는 요절한 장남 루이 조제프의 장례식에 치를 돈조차 없어서 궁정 내 은식기나 보석을 팔아 겨우 돈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악화된 프랑스의 재정 상태를 듣고서 이제껏 자신이 부려온 사치에 대한 응보를 받았다고 크게 후회했다. 심지어 국민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도 총신들에게 연금을 퍼다주고, 온갖 사치를 부리느라 국민들의 세금을 낭비하지 않았냐고 추궁한 검사 측 주장에 상상한 이상의 돈이 들어갔을 거라며 본인 스스로 인정할 정도였다.[31] 다만 실제 역사에서 그녀의 사치비용이 역대 왕비들보다도 훨씬 적은 것으로 밝혀졌고, 왕실에서의 사치란 단순히 돈을 쓰는 행위가 아니라 품위 유지이자 왕실의 위상을 알리는 의도에 동시대 입헌 군주제인 영국도 왕실의 사치를 어느 정도 허용했던지라 시청자들 및 독자들 중 저 정도 사치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냐는 의견도 많다. 그러나 역대 왕비들보다 검소할지언정 당시 프랑스 상황은 후술하겠지만 루이 14세, 루이 15세를 거치면서 국가가 진 빛이 너무도 많아서 작은 사치조차 허용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애매한 편이다.[32] 예술을 후원한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자란 영향으로 마리도 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왕비에 오른 뒤 다양한 주제의 연극,오페라,무도회를 선보였다. 한번은 본인이 직접 나서서 각선미를 드러내고 동양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드레스인 로브 아 라 시르카시엔느를 입고 카드리유를 추기도 했다. 당시 루이 15세 때까지 엄중한 분위기의 행사였던 무도회는 마리 앙투아네트로 인해 모두가 즐기는 경쾌한 행사가 되었고 프랑스 문화와 패션도 엄청 발전했다는 소정의 긍정적인 바람을 주었다.[33]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는 왕세자비 시절부터 틈만 나면 측근들과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 샤를과 함께 파리로 가서 밤새도록 가면 무도회와 연극을 즐기고 돌아왔다고 한다. 문제는 마리가 밤에 놀러다닐 동안 루이 16세는 잠을 자고 반대로 낮에 루이 16세가 활동을 할 동안 마리는 밤새 논 여파로 푹 자는 등 생활패턴이 서로 안맞다보니 후계자가 늦게 태어나는 악영향으로 이어졌다.[34] 작중은 물론 실제 역사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벼슬 자리를 청탁하는 귀족들을 제대로 판단하지 않고 다 받아주고 심지어 폴리냑 백작 부인이 추천하거나 자신이 좋아한 사람들을 임명해달라고 루이 16세에게 강하게 말했다고 한다. 문제는 후술할 공평성의 문제야 말할 것 없고 과거제도로 인재들을 판단할 수 있는 조선,중국 왕실과 다르게 유럽 왕실은 추천제여서 제대로 된 인재 판단이 힘들며 만약 임명된 대신이 문제를 일으키면 후폭풍은 왕실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니 메르시 백작은 제대로 사람들을 살펴보지 않고 벼슬자리에 임명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충고했지만 마리는 이를 흘려 들었다. 결국 메르시 백작이 염려한 것처럼 마리의 불공정한 인사 개입은 마리의 악명을 더 키워버렸다.[35]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 자리에 오르자 먼저 한일이 총애하는 오스칼을 근위연대장으로 승진시키고 막대한 봉급과 선물을 보낸 것이었다. 물론 오스칼은 마리의 지나친 총애를 떠나 근위연대장으로 승진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기에 주변에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대쪽같은 오스칼은 봉급 인상과 마리가 보낸 선물을 거절하였고, 마리가 훌륭한 왕비가 되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는 등 마리 앙투아네트의 순진한 면모를 걱정했다.[36] 폴리냑 백작 가는 경제적인 부분이야 말할 것 없고 공도 하나 세운 적 없던 몰락 귀족 가문이었기 때문에, 폴리냑 백작 부인은 어쩌다 운좋게 한번 베르사유 궁전에 올 정도로 비천한 신세였다. 그러나 폴리냑 백작 부인이 자신의 사정을 솔직하게 말한 것을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가 솔직담백하고 소박한 사람이라고 제대로 착각하고, 폴리냑 백작의 벼슬을 올려주고 폴리냑 가에 품위 유지비 지원, 궁정 거주 허락권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해서 귀족들도 반감을 보였다.[37] 원작에선 폴리냑 부인이 마리의 특혜를 이용해서 딸 샤를로트를 베르사유의 여왕님으로 만들겠다는 장면에 "내가 좋아하는 친구를 도울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라고 순진하게 좋아하는 마리의 모습을 대조시켜 보여주면서 마리의 주변을 돌아보지 않은 지독한 순수함의 폐해와 어리석음을 묘사했다. 결국 보다 못한 메르시 백작이 마리에게 "폴리냑 부인은 왕비님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는 교활한 사람입니다"라고 지적했으나, 마리는 내 소중한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화를 내며 듣지 않는다. 이 모습을 본 메르시 백작은 도대체 누가 진짜 왕비인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고 웬만하면 마리의 사생활에 간섭을 안하는 오스칼도 지나가다 메르시 백작의 말을 듣고나서 폴리냑 부인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38] 도박으로 뜯겨나간 비용이 얼마나 컸으면 프랑스의 재무대신이 갈수록 불어나는 마리의 도박빚을 견디지 못해 그녀의 측근인 메르시 백작에게 따로 보고할 정도였고 그 엄청난 액수를 보고받은 메르시 백작은 아예 기함을 넘어 기절해버렸다. 결국 메르시 백작에게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낭비했는지 듣게 된 마리도 놀라 도박을 그만두자고 말하려다가 또 다시 폴리냑 백작부인의 피해자처럼 눈물 연기에 약해져 포기하고 말았다. 이후 다행히도 폴리냑 부인이 임신 일로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오스칼의 조언도 있고 마리도 자신이 생각해도 심각하다고 생각해 도박을 그만두게 되었다.[39] 물론 실제로 폴리냑 백작부인이 과연 간신배인지 아니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진정한 친구였는지는 의견이 크게 갈린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첫 아이를 낳기 전까지 후계자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와 남편과의 원만치 못한 사이로 생긴 외로움을 달래고자 폴리냑 부인을 비롯한 측근들과의 도박, 경마, 무도회, 연극, 드레스 구입 등의 사치로 국고를 낭비했으며 이는 당시도 물론 현재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 최악의 실책으로 손꼽히고 있다.[40] 사실상 이게 마리가 알현을 꺼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다. 나라 발전을 위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면 좋을지 묻는 자리에서 귀족들이 대놓고 애 언제 낳을 거냐고 닦달하니 우울증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심지어 작중에서 마리는 임신 중인 궁정화가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를 보며 "르브룅 부인 엄마가 된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겠죠?"라고 물을 정도로 아이 일에 스트레스를 크게 받고 있었다.[41] 이걸 실제 역사와 대입한다면, 오스칼의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는 랑발 부인의 자리를 폴리냑 백작부인이 가로챈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오스칼과 마찬가지로 랑발 공비는 마리에게 어떠한 사욕 없이 친구로 남았다.[42] 심지어, 폴리냑 부인은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오스칼을 몰아내려는 것도 모자라 암살하려 했다. 당시 페르젠도 폴리냑 부인이 왕비의 비선실세라고 오스칼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나, 아무것도 모르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칼의 위험에 놀라머 폴리냑 부인에게 하소연 하기도 했다. 게다가 양어머니 일은 물론 오스칼마저 없애려는 폴리냑 부인의 행동, 샤를로트의 죽음으로 친딸 로잘리는 생모 폴리냑 부인을 증오를 넘어 경멸하게 된다. 특히 로잘리의 이부동생 샤를로트는 오스칼의 암살 미수 사건과 가문과 권력을 위해 자신을 10살 많은 공작과 정략결혼을 하려는 걸 듣고 어머니의 권력욕과 냉혹함을 마주하면서 너무 어린 나이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43] 원작에서 평민 대표들이 세금 감면을 청원하기 위해 왕비를 알현하고자 먼 지방에서부터 어렵게 베르사유 궁까지 왔는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며 문전 박대를 당하자 민생에 전혀 관심을 안주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으며 어쩔 수 없이 돌아간다.[44] 사실 작중에서 안 드러났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태도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은 즉위 초부터 조짐이 보였다. 당시 마리는 즉위하자마자 늘 해온 투알레트를 아예 생략해버리고 시녀장과 일부 측근들만 데리고 카바네(개인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이로 인해 귀족들의 불만이 터지고 보다 못한 노와이유 백작 부인 등 여러 사람들이 충고하자 결국 마리가 투알레트를 하는 대신 옷맵시를 이유로 패션 디자이너인 로즈 베르탱을 동행하겠다고 하자 평민과 같이 있을수 없다는 귀족들의 반발로 흐지부지되었다.[45] 물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랐고 아직 10대인 마리의 입장에선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건 수치스러운 장면에 과정 하나하나가 까다롭다 보니 오히려 투알레트를 생략하는 게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귀족 입장에선 투알레트를 포함한 에티켓과 왕실 일정 공개는 돈을 쓰지 않고도 귀족들에게 왕비의 옷에 관여할 수 있다는 특권을 주어 반발을 무마하고, 귀족들도 이를 통해 자부심을 얻는 등 서로 윈윈하는 전략 이었다. 더군다나 마리는 엄연한 프랑스의 적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온 여자라는 꼬리표가 있기에, 프랑스 귀족들 눈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왕비가 프랑스의 전통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으며 결국 이 악수로 비호감이 더 쌓여갔다.[46] 문제는 연극 주제가 귀족, 왕족들을 풍자하는 '세비야의 이발사' 였다는 것이었으며, 실제 역사에도 마리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무지 좋아해 연극을 보고 계획하는 것은 물론 연극 내 대사를 궁정에서 습관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 이야기를 들은 오스칼은 "이 연극을 들은 평민들이 왕가를 어떤 눈으로 볼지에 대해 아무도 생각을 안한 것이 기가 막힌 일이다." 라고 분노를 참지 못했고 동시에 왕비 곁에 제대로 된 충언을 해준 사람이 하나도 없는 현실에 한탄한다.[47] 원작에선 페전트 룩이라고 언급했고 신극장판에선 슈미즈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나온다. 여담으로 슈미즈 드레스는 칭찬을 받긴 커녕, 귀족, 백성들 대부분에게 왕비인데 왜 이렇게 천박하게 속옷 드레스[108]를 입었냐는 비난을 받아 슈미즈 드레스를 입은 마리의 초상화는 비공개 처리되고, 같은 포즈지만 화려한 복식으로 바꾼 초상화로 대체됐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억지스러운게, 기존 패션에는 왕비가 세금을 사치로 낭비한다고 비난하고, 이제는 왕비인데 왜 이렇게 초라하냐는 비난을 퍼붓는, 어느 쪽을 골라도 무조건 욕하는 상황이다.[48]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는 페르젠은 물론 영국 출신의 러시아 외교대신인 로잔 경에게도 호감을 느껴 벼슬과 특혜를 주고 사교계에 대동했다고 한다. 물론 실제 역사의 마리는 로잔과 페르젠을 남사친으로 생각했지만 귀족과 평민들 눈에는 왕비가 불륜을 저지른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49] 이런 불안정한 왕실 계승 구도와 왕당파의 분열은 프랑스 혁명 세력의 득세 속에 왕당파가 힘을 못쓰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결국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의 비참한 최후에 이어 부르봉 왕조의 몰락과 프랑스 공화정 성립에 일조하게 되었다. 참고로 영국도 프랑스보다 먼저 혁명이 일어나서 올리버 크롬웰의 주도로 공화정이 세워지고 국왕 찰스 1세가 처형되었지만, 찰스 1세의 장남이자 왕세자 찰스 2세라는 구심점이 있었고 제임스 2세를 포함한 형제자매들은 물론 왕당파들도 분열되지 않고 찰스 2세에게 철저히 충성했기 때문에 올리버 크롬웰의 사후 바로 군주제로 돌아올 수 있었다.[50] 귀족들은 마리를 보자마자 부끄러움을 모르는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대놓고 욕을 하고 파리 시민들은 물론 근위대 대원들마저 마리 앙투아네트를 성희롱하는 음란물 팜플렛을 보고 희희낙락했다. 당연히 이를 본 오스칼은 "결국 내가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고 절망한다.[51] 정확히는 루이 15세가 자신의 정부였던 뒤바리 부인에게 선물하려고 주문 제작한 목걸이였지만 루이 15세가 사망하여 흐지부지되었다. 그후 보석상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이 목걸이를 사달라고 제안했지만 마리는 그 돈으로 최신 포대가 달린 전함을 두대 사겠다고 거절했다. 거기다 그 목걸이의 원래 주인이 왕세자비 시절 자신을 모욕하고 다닌 뒤바리 부인이라는 것과 더불어, 당시 패션 센스가 뛰어난 마리가 봐도 목걸이 디자인도 그닥 예쁘지도 않다고 했다. 실제로 역사 박물관 중에서 그 목걸이의 복제품을 착용한 라모트 백작부인의 밀랍 인형도 있는데, 정말 마리의 예상대로, 착용하면 아름답다기보다는 현란하고 촌스럽기까지 하다.[52] 보석상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목걸이 대금을 지불해달라고 편지를 보내면서 사태를 제때 눈치채고 무마할 기회를 얻었지만 마리는 찌라시라고 여기며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편지를 태워버리는 경솔한 행동을 벌였다.[53] 작중에서는 잔느(실존인물이자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의 범인이었던 라모트 백작부인이 모티브)는 마리에게 추근덕거리던 로앙 대주교를 속여내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필체 위조자를 이용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칭한 연애 편지를 보내고 심지어 마리와 얼굴이 쌍둥이 수준처럼 닮은 창녀(니콜 올리버)까지 데려왔다.[54] 여기서 잔느는 폴리냑 부인과 오스칼을 지목했는데, 이 말을 들은 오스칼은 마리와 자신을 모욕한 잔느의 헛소리에 크게 분노했고 재판정에 있던 로잘리도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 반박했다.[55] 물론 마지막 부분에 있어서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로 페르센과 불륜을 벌였으니 좀 찔리는 부분은 있겠지만 그래도 잔느의 말대로 늘상 문란하게 생활하는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페르젠과는 실제로는 건전한(?) 플라토닉 관계였을 가능성이 높다.[56] 더 소름끼치는 부분은 형벌대에서 V자가 새겨지기 직전 이 사건은 물론 자신이 받은 형벌과도 전혀 관계없는 무고한 피해자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옥에 떨어지라며 저주해놓고 고문당한 후 감옥에 들어갔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재밌었다며 비웃었다는 점이다. 이런 면 때문에 천하의 오스칼도 경악을 금치 못했고 심지어 동생인 로잘리도 이런 언니에게 크게 실망해 그녀의 은신처를 고발했다.[57] 심지어 애니메이션에서 폴리냑 부인도 겉으로는 마리를 위로해주는 듯 싶었으나, 한 사람이 이런 스케일의 사건을 일으키다니 좀 신기하다며 비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샤를로트가 세상을 뜬 얼마 후 잔느가 자신의 친딸 로잘리의 언니임을 알아내고, 이를 빌미로 로잘리에게 자신의 딸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잔느와 로잘리의 관계를 폭로하겠다는 비열한 협박까지 해버린다.[58] 작중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때 파리로 가서 직접 해명을 하겠다고 나서자 오스칼마저 신변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왕비님에 대한 민심이 최악이라고 말릴 지경이었고, 이후 삼부회 때 성직자, 귀족, 평민측의 모든 대표가 루이 16세를 환영한 것에 반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들어왔을 때 환영 인사는 고사하고 싸늘한 눈으로 처다보고 수군거리며 아무도 반기지 않는 반응을 드러낼 정도로 마리에 대한 평가는 최악이었다.[59] 특히 이 부분은 역대급 자살골이라도 할말 없는게 프랑스가 전쟁으로 얻을 이득을 바라고 미국의 독립을 도와준게 아니라 라이벌 국가인 영국을 골탕 먹이고 7년 전쟁의 복수라는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참전했다(...). 이로 인해 안그래도 최악 상태인 왕실에 빚이 더 늘어나는 것은 덤.[60] 실제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이자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귀족과 성직자에게 세금을 거두는 제도를 만들었고 그녀의 아들들인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도 나름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1차 세계대전까지 살아남고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는 가난과 실의에 빠져 요절했지만, 그의 아내인 치타 황후와 자식들은 무사히 살아남아 어느 정도 천수를 누렸고 카를 1세의 자손을 포함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계 후손들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61] 게다가 만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당시 프랑스 왕실은 세금을 걷는 권리를 국가 공무원이 담당하는 게 아니라 그 직책을 산 사람들이 하는 일명 세금징수업자들이 했기에 상황을 더 악화되었다. 예를 들어 한 마을에 걷을 세금이 100만원이라고 상정하면 세금 징수업자는 평균 200~300만원을 걷는 식으로 백성들에게 통상 2~3배의 세금을 걷어갔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세금징수업자들은 막대한 부를 누리는 동시에 백성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고, 그 업보로 혁명 이후 대부분 잔혹하게 처형되었으며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이런 케이스다.[62] 대표적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한 라파예트 후작, 시예에스 신부가 있었으며 미라보 백작은 귀족 신분에도 불구하고 평민대표로 삼부회에 참여한다.[63] 마리 앙투아네트가 강한 자존심을 지녔던 걸 고려해보면 사태의 심각성이 얼마나 컸는지,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 스스로도 그 사실을 얼마나 잘 인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여하튼 사과에서 어느 정도 진정성이 보인 탓인지 분노에 가득차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궁전에서 작정하고 끌어내려 했던 민중들도 침착하게 인사를 하던 마리를 보고 조용해졌을 정도다.[64] 파리로 떠나는 루이 16세 일가의 행렬을 본 한 시민이 "국왕, 왕후, 왕자를 모두 생포했다!"라고 소리칠 정도. 마리 앙투아네트도 과거 처음 파리에 방문했을 당시 시민들이 자신에게 환호와 찬사를 보내던 걸 떠올리고, 지금은 그때와 정반대로 온갖 비난을 받으며 쫒겨나는 꼴로 전락한 자신들의 초라한 현실에 절망하며 눈물을 흘린다.[65] 물론 당시에는 영국 이외에는 입헌군주제라도 대부분 왕권이 강할 정도로 전제군주제가 당연했던 시기임을 감안해야한다. 당장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합스부르크 왕가도 전제군주제였고 의회가 설립되고 힘이 강해져 입헌군주제가 확립된 뒤에도 제 1차 세계대전까지도 군주의 권한이 막강한 편이었다. 물론 이건 합스부르크 왕가가 특이한 것이기도 했지만.[66] 이렇게 도망간 사람들 중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이용해 여러 특권을 뜯어낸 폴리냑 일가와 루이 16세의 동생들인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도 있었다.[67] 작중 오스칼과 대립하고 평민 출신들을 차별했던 푸이에 장군은 낭시에서 벌어진 반란을 제압할 때 주동자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가혹한 처분을 해서 국민들이 왕당파에 반감을 사게 만들었고 바렌 사건에도 일을 엉성하게 진행하여 국왕 부부가 시민군에 체포당하는 계기를 마련했다.[68] 사실 오래 전부터 프랑스의 부조리한 현실에 의문을 품고 위병대로 있으면서 평민계급의 비참한 실상과 그들의 분노를 경험한 오스칼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군대를 철수시키고, 민중들의 분노를 달래주셔야 합니다" 라고 탄원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칼의 말조차 거절한다. 결국 이런 왕실에 실망한 오스칼은 귀족 신분을 버리고 시민군에 합류해 바스티유 감옥 함락을 성공시키까지 이른다. 사실상 마리 앙투아네트는 스스로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충신을 내친 것.[69] 이는 특히 애니메이션에서 더욱 감정적으로 묘사되었는데, 비록 자신의 왕비와 정신적으로 깊은 관계임을 알지만 그에 불구하고 그들을 도와준 페르젠에 대한 진심어린 감사함과 걱정을 표한다.[70] 하인으로 변장한 루이 16세와 귀부인인 척한 자신, 여장한 왕세자 루이 샤를, 공주 마리 테레즈의 정체까지 알아낸다. 참고로 실제 역사에서 드루에는 이전에 마리 앙투아네트를 본 적이 있어서 바로 왕비임을 눈치챘고 화폐에 새겨진 왕의 초상화를 통해 마리 옆에 있는 남자가 루이 16세라는 것도 알아보면서 국왕 일가임을 눈치챘다고 한다.[71] 다만 애니메이션에선 심의 기준 등을 고려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탄 마차를 둘러싸고 "왕과 왕비라는 작자가 어떻게 나라를 버리고 도망칠 수 있느냐!" 수준의 폭언만 하는 걸로 묘사되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애니와 마찬가지로 마차가 지나가는 길마다 사람 취급 조차 안해주는 온갖 욕설이 난무하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공격은 받지 않았다는 기록이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아무리 신체적인 공격은 받지 않았다고 해도 일평생 오스트리아의 공주이자 프랑스의 왕비로 고생 한번 안해보고 자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있어서 저런 사람 취급도 안해주는 욕설과 모욕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주 참혹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후술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때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실제 역사에서나 만화에서나 모두 30대 초중반의 젊은 나이었는데도 머리가 노파처럼 하얗게 세어버리고 말았다.[72]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로서 수준 미달의 여러 실책을 저질렀고 이후로도 잘못을 뉘우치고 상황을 수습하긴 커녕 아예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는 사실상의 국가반역죄를 저지름으로서 프랑스 백성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한 것은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결국 이에 대한 응보인지 몰라도 프랑스 민중들은 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와 프랑스 혁명 세력을 경계한 각국의 간섭으로 인한 전쟁으로 온갖 고생을 겪는다.[73] 이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모두 처형당하자 페르젠은 바렌느 도주 때 끝까지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하지 않았던 걸 죽는 그 순간까지 후회한다.[74] 이러한 분노는 비단 일반 시민뿐만 아니라 국민 의회도 마찬가지였다. 파리에 돌아온 루이 16세에게 한 의원이 "멋진 여행을 하셨더군요. 국왕 폐하... 인권 선언을 인정한다고 말씀하신 당신이... 혁명을 배신하고 프랑스 국민을 배반하다니..."라고 차갑게 일갈할 정도였고 외전에서 알랭 드 수아송도 파리로 끌려가는 국왕 일가의 행렬을 보고 국왕부부가 어떻게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냐며 이건 부르봉 왕실의 장례식이라고 한탄한다.[75] 일단 남편인 루이 16세부터가 국왕의 몸으로 직접 맹세한 인권 선언마저 저버리고 외국으로 도망치려 했고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를 말리긴 커녕, 아예 적극적으로 동의했으니 사실상 국왕 일가 전체가 스스로 혁명정부와의 공존 가능성을 완전히 내다버린 셈이었다. 더구나 만약 루이 16세 일가가 무사히 탈출해서 오스트리아에게 혁명세력을 반역자로 때려잡아달라고 요청하고, 이를 받아들인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파견해 프랑스를 침공했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너무나 뻔했다. 여기서 왕실 일가가 무죄라면 혁명정부가 유죄라는 소린데 결국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 모두가 죽어 마땅한 대역죄인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이걸 혁명정부측이 두고 볼 리가 없었다.[76] 기묘하게도 이에 대한 응보인지 몰라도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모두 혁명 이후 해외를 떠도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노년이 되어서야 겨우 조국에 돌아왔다. 그나마 왕위에 올랐다가 천수를 누리고 간 루이 18세와 달리 샤를 10세는 또다시 혁명 세력에 쫓겨나 살아생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타지에서 외롭게 죽고 시신조차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다. 게다가 루이 18세는 자녀없이 사망하면서 후손 자체를 남기지 못했고 샤를 10세 역시 마지막 남계 후손인 샹보르 백작 앙리가 자녀없이 사망하면서 부르봉 왕조의 남성 직계는 완전히 끊어지고 만다.[77] 당시 페르젠이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루이 16세 일가의 구출을 요청했지만 대부분의 국가들과 심지어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마저 그 어떤 도움도 주기를 거부하며 사실상 손절했다. 그나마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친한 언니들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아 아말리아만이 겨우 연락을 주고 받을 뿐이었고 마리를 유독 아꼈던 큰오빠 요제프 2세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이후 둘째오빠 레오폴트 2세가 바렌느 도주 사건 이후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여동생을 구하려는 협상을 벌이려 했지만 중도에 사망했으며, 레오폴트의 아들이자 뒤를 이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 프란츠 2세는 고모와 고모부 일가를 구해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철저히 외면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형 이후를 다루는 외전과 실제 역사에서도 아예 오스트리아 황궁 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엄중히 금지할 정도였다.[78] 재판도 받지 않은 왕당파 죄수들을 무작정 국민들이 끌고가 죽였기 때문에 처형이 아니라 학살이 맞다. 이때 만화에서 묘사되진 않았지만, 오스칼의 포지션 겸 마지막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켜주던 진정한 친구인 랑발 공비도 그저 왕당파란 이유로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다행히 마리는 랑발 부인의 시체를 목격하진 못했지만, 소식을 듣자 정신을 잃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79] 이때부터 프랑스의 왕비 폐하라는 공식 칭호도 전부 박탈당하고 마담 카페(카페 부인)라고 불리게 된다. 남편 루이 16세도 폐위된 이후 처형될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칭호 다 빼고 루이 카페란 본명으로 불렸다.[80] 명분은 루이 샤를에게 자신이 왕위 계승자라는 사실을 잊게 하고 공화국의 한 시민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루이 16세의 마지막 남은 아들이자, 왕세자로서 왕당파의 마지막 희망이자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루이 샤를의 신변을 혁명정부측에서 먼저 확보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추정된다.[81] 이 장면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성품은 선량했을지언정 백성들의 현실과 시대적 변화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일국의 왕비로서도 실격인 인물이란 걸 잘 보여준다. 그나마 원작에서는 우리라고 좋아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고 양해를 구하며 루이 샤를을 데려가고 저 대사도 차분하게 말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절규에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분노하며 저 대사를 소리친 뒤 루이 샤를을 강제로 데려간다.[82] 더 비극적인 건 이후 루이 샤를은 혁명군들에게 세뇌당하여 그들과 함께 혁명가를 부르며 자신의 어머니인 줄도 모른 채 탑에 갇힌 마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등 본래의 신분과 처한 상황부터 어머니와 가족들은 물론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다. 외전에서 포로 교환으로 오스트리아에 간 누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다르게 루이는 등장하지 않은 걸 보면 실제 역사대로 요절했거나 아예 평범한 아이로 자라게 된 듯.[83] 외전에서 딸 마리 테레즈의 언급에 따르면 유일하게 남은 딸의 존재도 위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절망에 빠져 있었고, 로잘리에 의하면 콩시에르쥬리 감옥에 갇힌 후에도 코르셋에 몰래 아들의 머리카락과 초상화를 숨겨 가져가서 이를 보며 계속 울었다고 한다.[84]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두 사람과도 죽을 때까지 재회하지 못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후 시누이 엘리자베트도 처형되고 홀로 남은 마리 테레즈는 포로 교환 전까지 탕플탑에서 감금된다.[85] 로잘리는 마리의 소식을 듣자마자 국민 의회 일원인 남편 베르날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중을 지원했다. 마리는 바로 로잘리를 알아보고 반가워 했으며 자신을 걱정하며 우는 로잘리를 위로해주었다.[86] 마리를 악녀로 보는 대다수의 대중들과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를 구경거리로 보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마리의 치장을 돕는 로잘리에게 꽃을 선물하거나, 방 안을 따뜻하게 해주는 등 이모저모 도움을 줬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왕비에게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이유로 로잘리를 제외한 사람들을 전부 쫓아낸다.[87] 폴리냑 부인 등을 비롯한 총신들과 사치를 부리며 국민의 세금을 낭비했다는 것과 자신의 불륜남과 내통하여 바렌느로 도주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는 마리 앙투아네트조차 변명을 못하고 인정했지만 명백한 모함이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과 그외 다른 사건들까지 전부 마리의 죄로 몰아갔다.[88]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르제 백작에게 자신의 유품을 페르젠에게 전해주고 당신은 무사히 탈출하라고 부탁했다. 또한 외전에선 로잘리가 자르제 백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가 브레게의 시계를 원한다고 말하자 이때 자르제 백작은 아내의 유품인 시계를 준다.[89] 실제 역사에서도 루이 17세는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을 겁탈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어머니의 처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누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도 루이 17세의 사칭자들을 두고 부모를 죽인 죄로 총살시켜야 된다고 할 정도로 남동생을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로 모자간의 근친상간이 있었던 건 아니고 당시 혁명정부측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확실히 처형시키기 위한 물증으로 가족들과 전부 떨어진 채, 독방에 수감되어 간수들에게 학대까지 받으면서 육체와 정신 상태가 매우 불안정해진 어린 루이 17세를 세뇌시켜 거짓 증언을 받아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결국 루이 17세 역시 부모와 고모의 처형 뒤에도 계속 탕플 감옥에 수감된 채, 열악한 환경에서 온갖 학대를 당하다가 부모가 처형된 지 2년만인 1795년에 고작 10살의 나이로 요절한다.[90] 이 광경을 재판에 참석하여 직접 목도한 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 저 멍청이가 법정에 끼어들어 신성한 혁명을 망쳤다며 저런 녀석이 동지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고 분통을 터트렸으며 생쥐스트는 아예 저 녀석도 머지않아 단두대행이라고 읆조리며 에베르의 최후를 정확히 예측한다.[91] 애니메이션에서 특히 살아갈 의지도 잃고 자포자기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더 확실히 묘사한다. 프랑스에 시집온 순간부터 끝나지 않는 거짓 소문과 악담에 시달리는 것을 시작으로 비록 자신의 실책이 어느 정도 원인 제공을 하긴 했지만 프랑스 혁명에 휘말려 가족을 비롯한 모든 걸 잃고 아예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게 됬으니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마따나 드디어 모든 고통이 끝난다며 죽는 게 더 나았던 셈이다. 다만 자포자기하며 싸늘한 태도로 죽음을 받아들이던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원작에선 비참함의 연속에도 당당하게 프랑스의 장래와 발전을 기도하며 마지막까지 왕비로서 품위를 버리지 않았다.[92] 안타깝게도 이 편지는 엘리자베트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엘리자베트의 사후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드러난다. 더 비극적인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편지에서 자신의 아이들만은 복수심을 품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길 바란다고 쓴 것과 정반대로 이미 가족들과 떨어져 온갖 학대를 받던 루이 17세는 요절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마리 테레즈는 나폴레옹 몰락 후 조국 프랑스로 돌아오지만, 오랜 감옥 생활과 가족들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메마르고 차가운 성정이 되었고 평생 혁명 세력과 프랑스 민중을 증오했다.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마리 테레즈는 백색 테러를 여러 번 일으켜 자신에게 동정적인 민중들의 민심을 잃어버리고,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 왕조가 집권하면서 프랑스에서 쫓겨나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93] 애니메이션에서는 감옥 안에서 직접 휴지로 만든 장미꽃을 로잘리에게 건네주며 "평소 오스칼이 좋아하던 색으로 장미를 칠해달라"는 말을 남긴 채 처형장으로 향하고, 단두대에서 원작 만화처럼 당당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실책을 부정하거나 울며불며 발악하지도 않고 그저 후회와 서글픔이 교차한 표정으로 조용히 최후를 맞이한다. 나중에 로잘리는 알랭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막상 자신은 오스칼이 생전에 무슨 색의 장미를 좋아했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로잘리가 앙투아네트에게 받은 휴지 장미는 알랭 앞에 보여질 때까지 여전히 아무 색도 칠해지지 않았으며 분명 앙드레는 흰색을 좋아했었고 아마 오스칼도 그랬을 것이라는 알랭의 말에 로잘리로 그렇다고 생각해 흰색 그대로 둔다.[94] 남편 루이 16세는 가장 좋은 의례용 옷을 입고 금장 마차를 타고 처형대로 향했고 처형 집행인도 나름 예의를 갖추었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예우 따윈 없이 하얀색의 소박한 드레스를 입고, 단두대에 목이 잘리기 쉽게 긴 머리카락도 단발로 잘리고 두 손이 묶인 채 짐마차에 앉아 처형대로 끌려갔다. 게다가 가는 길 내내 루이 16세의 처형을 엄숙하게 지켜보던 시민들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만은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다. 참고로 처형대로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라한 모습을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의 크로키가 남아있다. 다만 단발인 채 처형당한 것은 원작 한정이고, 1979년판 애니메이션에서는 긴 머리인 채로 죽게 된다.[95] 이때 과거 프랑스 왕세손비로 파리에 처음 방문했을 때 대중들에게 환호받던 장면이 교차되어 대비된다. 마리는 그뒤 왕세자비, 왕비 시절의 행복했던 나날과 오스칼과의 추억 등 과거의 주마등을 떠올리다가 "공화국 만세"라는 말에서 깨어나 단두대와 대중들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한다.[96] 구작 애니메이션에서는 침착함을 잃진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당당했던 원작과는 달리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싸늘하고 자포자기한 피해자로서 묘사되며, 마지막 순간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거의 빨리 자신을 죽여달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슴 아프지만 조용하게 생을 마감한다. 참고로 실제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생각하면 이 장면이 더욱 가슴 아픈데 처형 집행자의 발을 실수로 밟아 "용서해주세요, 무슈. 절대 일부러 그런게 아니었어요."라고 했다.[97] 후술할 왕제들, 페르젠, 메르시 백작, 자르제 백작에게 전해줄 유품들과 로잘리에게 선물로 준 물건(원작은 리본, 애니메이션은 휴지로 만든 장미).[98] 애니메이션에서 알랭은 처음에 로잘리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얘기를 들려줄려고 하자 나라는 신경쓰지 않고 사치나 부리던 왕비에게 관심없다고 했지만, 로잘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자신도 몰랐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안타까운 사연에 잠시 놀라다가 씁쓸해하면서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였다.[99] 애초에 그녀 자신이 프랑스와 적대하던 오스트리아 출신이던 게 큰 비극이었기에 혁명정부에서 좋은 꼬투리를 잡았던 것이다.[100] 실제 역사에서도 합스부르크 황실은 프랑스 혁명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조차 꺼내지 않았으며 그녀의 딸이자 자신들의 외손이기도 한 마리 테레즈마저 '마리 앙투아네트를 외면했다는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존재'였기에 썩 반기지 않았다. 다만 마리 앙투아네트와 제일 친했던 언니들인 마리아 아말리아와 마리아 카롤리나는 여동생의 처형 소식을 듣고 극심한 슬픔과 충격에 빠졌고, 특히 카롤리나는 아예 동생의 처형 이후로 당시 유럽의 공용어나 다름없었던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를 증오하게 되었다.[101] 페르젠이 사망한 년도는 1810년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1793년에 참수당한 뒤로 무려 17년이나 지난 뒤다.[102] 외전 편에서 자신을 강간하려는 남성 간수에게 강경하게 저항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후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 때 조국인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극렬한 왕당파 보수주의자가 되어 백색 테러를 여러번 일으키고 자신의 일기에서도 혁명 세력과 민중들을 일관되게 악마로 묘사했다. 물론 뒤늦게나마 프랑스 민중들이 불쌍한 인생을 보낸 마리 테레즈를 동정했지만 전술했듯이 프랑스 혁명정부와 그에 동조한 민중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아무 죄없는 마리 테레즈와 루이 샤를을 학대한 것은 사실이기에 마리 테레즈에겐 이제 와서 멋대로 괴롭혀놓고 동정하는 그들의 모습이 위선적이고 가증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103] 더군다나 마리 테레즈를 학대하고 괴롭힌 조국의 민중과 혁명군 세력과 정반대로 러시아의 파벨 1세, 영국의 조지 4세, 친증조할머니 마리아 레슈친스카의 후손들을 비롯한 여러 왕족과 귀족들은 겉으로라도 잃을 게 없는 신세로 전락해 여러 나라를 떠도는 불쌍한 마리 테레즈를 위로하고 보호해줬다. 즉, 마리 테레즈의 입장에선 프랑스의 혁명 세력과 민중들은 모두 그녀를 괴롭히고 가족들까지 몰살한 원수들뿐이었던 반면 미래의 남편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를 포함해 타국의 왕족 내지 귀족들은 그녀를 보호해준 은인이기에 민주주의와 혁명, 나폴레옹을 사무치게 증오하고 골수 전제군주제 옹호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사촌들인 프란츠 2세와 마리아 테레사 부부도 마리 테레즈를 고깝게 보긴 했지만 적어도 프랑스의 민중과 혁명군 세력처럼 잔혹한 폭력과 모욕을 퍼붓지는 않았고, 만화 내에서는 포로 교환으로 탕플 탑에서 석방시켜준 건 물론 화려한 드레스를 선물해주고 다과회에에도 초대해서 위로해주려고 하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 마리 테레즈를 보호해줬다. 특히 실제 역사에서 프란츠 2세는 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과의 결혼을 주선하여 마리 테레즈가 정식으로 합스부르크 왕실에 입성할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했는데 이 또한 마리 테레즈를 배려한 최선의 조치였다.[104] 외전에서 외사촌 프란츠 2세가 화려한 드레스를 선물로 주고 사촌 올케 겸 이종 사촌인 마리아 테레사가 티파티에 초대해주며 부르봉 왕조의 공주로서 극진히 대하지만, 어머니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금지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분위기에 환멸을 느끼고 대놓고 마리아 테레사가 그리 맘에 안든다고 말할 정도로 불편해했다.[105] 사실 마리 테레즈의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몬 주범이자 진정한 원흉, 만악의 근원은 본작, 역사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의 주범은 잔느 드 라 모트이다. 물론 잔느는 만화에서는 남편을 실수로 죽이고 오스칼에 쫓기다 투신자살, 애니에서는 남편과 함께 폭탄으로 동반자살, 실제 역사에서는 영국으로 도망치고 사치를 일삼은 끝에 사채업자들과 빚쟁이들에 쫓겨 투신자살하는 만화,애니, 실제 역사 전부 카톨릭과 기독교, 개신교 입장에서 가히 최악의 죄라고 여기는 자살이란 비참한 최후를 맞는 인과응보를 받았지만 공범인 남편 니콜라스는다른 여자와 재혼하고 천수를 누리는 등 죄질에 비해 너무나도 과분한 결말을 맞이했다. 이후 진실이 밝혀지고 전술했듯이 잔느는 자업자득의 비참한 결말을 맞았지만 적어도 이 둘이 형사재판을 받아 단두대에서 공개처형당하여 모든 죄를 되돌러 받아야 했었다.[106] 게다가 만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마리 테레즈는 오랜 감옥 생활로 얻은 발성장애까지 더해져 날카롭고 찢어지는 목소리로 엄청난 고성을 토해냈다고 한다. 정작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부부는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도 않고 자녀들에게 절대로 자신의 죽음을 복수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부탁했던 걸 생각하면 안타까운 현실이다.[107] 실제 역사에서든 만화에서든 보면 사실 마리 테레즈 본인도 루이 17세가 학대와 세뇌 때문에 위증을 했다는 것 자체는 인정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생을 그 지경으로 만든 원흉인 과격파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제대로 복수하지도 못했기에 형식적으로나마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이미 죽어버린 남동생이라도 원망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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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당시 슈미즈는 그냥 속옷 내지는 잠옷이었고 더구나 그 옷의 재료인 모슬린은 프랑스와 오랜 라이벌 국가인 영국에서 생산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