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 라틴어: Lucius Anicius Gall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조부)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60년 |
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이우스 판니우스 스트라보 |
동기 |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팔레스트리나에서 로마로 이주한 플레브스 가문인 아니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기원전 168년 외국인과의 법률 문제를 다루는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마케도니아 왕국과 동맹을 맺은 일리리아 왕국의 국왕 겐티오스를 상대하기 위해 발칸 반도로 파견되었다. 그 해 봄, 그는 아폴로니아에서 일리리아 함대를 격파한 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육군과 합세한 뒤 스코드라로 진격해 일리리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겐티오스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끝내 추격병에게 사로잡혔다. 그 후 가족과 함께 로마로 끌려간 그는 기원전 167년 개선식에서 '전리품' 취급 받는 신세로 전락했고, 이탈리아 페루자 지역의 구비오에서 여생을 보냈다.
한편, 갈루스는 기원전 167년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마지막까지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 페르세우스 편에 섰던 에페이로스 연맹을 공격해 복종시킨 뒤 스코드라로 돌아와서 일리리아를 3개의 공화국으로 분할한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로마로 돌아온 뒤 기원전 167년 에 열린 개선식에 참석했다. 이때 그는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를 초대하는 게임을 조직했다.
기원전 160년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지만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았다. 기원전 154년 소아시아에 가이우스 판니우스 스트라보 등과 함께 파견되어 비티니아 왕국의 국왕 프루시아스 2세와 페르가몬 왕국의 국왕 아탈로스 2세가 전쟁을 끝내고 프루시아스 2세가 페르가몬 왕국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하려 했지만, 프루시아스 2세가 끝까지 거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니키우스 씨족은 이 인물부터 본격적으로 원로원에 입성하여 노빌레스 가문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특이하게 그들은 군인 황제 시기후반부터 시작해, 서로마 제국 말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된다. 로마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그들의 디오클레티아누스시기부터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하였으며 정치적 상황에 적응하여 최초의 기독교 원로원 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아나키우스 가문에 4세기부터 6세기까지 로마의 주요 고위 정무관명단에 지겹도록 등장하게 된다.
아니키우스 가문은 서로마 멸망 직전 올리브리우스로 황제에 등극하기도 하였다. 그 자체는 114일만에 살해되었으나 그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플라키디아 사이에 낳은 딸 아니키아 율리아나가 유명하다. 그녀는 앞서 말한 두 황제 외에도 플라키디아의 어머니(즉 외할머니)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가 테오도시우스 2세의 딸이었기에 동로마, 서로마 두 황제의 피가 섞였으면서 당시 대단히 존경받던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후손이라는 어마어마한 혈통을 자랑했다. 그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평생을 살았는데 국가로부터도 황족, 공주의 대우를 받았고 대단히 부유했다고 한다. 그녀는 내심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되기를 원한것 같지만 결국 실패하였고, 하기아 소피야이전 콘스탄티노플에서 성 폴리에욱토스 성당의 건설자금의 대부분을 후원했고 중세초기 식물학 서적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Vienna Dioscorides'의 집필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는듯 문화, 예술적인 분야에서 크게 이름을 남겼다.
서로마에 남은 아니키우스 가문은 제국이 멸망하고나서도 지식인층이자 구로마 상류층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동고트 왕국시기에도 존중받았다. 이 당시 유명인물로는 마지막 그리스-로마 철학자라는 보에티우스, 중세 신학과 유럽의 가톨릭 중심 정치 시스템을 최초로 제안했다는 그레고리오 1세가 있다. 이후 7세기 이후 랑고바르드 족의 침입과 전쟁으로 로마가 황폐화 되면서 다른 구 로마 출신 엘리트와 마찬가지로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동로마에서도 아니키우스 가문은 이름을 크게 떨쳤으며 노빌레스 출신은 커녕 5현제 시기 엘리트 가문들의 명맥도 끊어진지 오래인데, 공화정부터 이어진 아니키우스 가문은 대단한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역사학자 사이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사촌이자 명장으로 이름 높은 게르마누스가 6세기의 역사서 '게티카'에 아니키우스 가문출신이라고 적힌 구절 탓에 [1] 그가 아나키우스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냐가 논쟁꺼리이긴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름 없는 가문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는 게르마누스도 마찬가지이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의 원로원, 혹은 총독으로 아니키우스라는 이름이 붙은 인물은 종종 언급되나 역시, 7세기 부터 이어지는 이슬람 침공, 그리고 정치,경제적 대혼란 시대에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그 후 중세 중기인 11세기경부터 로마에서 많은 고위성직자를 배출하는 명문가 플랑지파니 가문은 자신들이 아니키우스 가문의 후손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콜론나 가문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후손을 칭하는듯 이탈리아의 귀족가문이 본인들을 로마의 유명가문과 엮는 것이 대유행이던 시대였기에 인정되지 않고 있다.
[1] Thus was united the stock of the Amali and Anicii by this marriage (영문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