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루인(ruin)[1]은 대한민국의 젠더학 연구자로, 한국 페미니즘 학계에서 보기 드물게 퀴어학, 트랜스젠더 이슈에 큰 관심을 드러내는 학자이다.TERF로 대변되는 여성주의 학계와 운동권의 트랜스젠더 배척, 배제 흐름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글과 강연을 통해서도 꾸준히 언급을 하는 한국 내 몇 안 되는 인물로, 트랜스페미니즘 계열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의 글이나 사상을 자주 인용하고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를 합한 '트랜스젠더퀴어'라는 긴 용어를 굳이 사용하는 등 여러 가지 젠더 이슈에 관한 포용적 태도로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들에게 명망이 높고, 과거 결성되었던 트랜스젠더 인권연대 지렁이나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설립에도 기여하는등 비단 논바이너리만이 아닌 트랜스젠더 인권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2010년대 한국의 트랜스페미니스트 사이에서는 상당히 돋보이는 존재로 인정받는다.[2] 트랜스젠더 숙명여자대학교 합격자 입학 반대 논란에 대해서도 TERF들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비단 트랜스페미니즘 뿐만이 아닌 장애여성 인권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인터섹스와의 교차적인 사유에도 관심을 드러내어 장애인권 관련 매거진에도 글을 자주 투고하고 있다. 트랜스젠더의 탈성전환에 대한 금기시 풍조를 가시화의 장애물이다, 또 하나의 억압이다 등의 비판을 서슴치 않는등 사회적 고정관념(퀴어 사회에서의 고정관념조차도 예외가 아니다)을 비틀어 생각하려는 사고방식을 강조하며, 활동명인 루인 또한 그러한 사고방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선임연구원이며, 비온뒤무지개재단 산하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의 상임 근무자이기도 하다.
2024년 이 기록물을 바탕으로 트랜스페미니즘을 연구하여 문화인류학자 김현미 교수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트랜스레즈비언 당사자이기도 하다.
2. 비판
본인의 저작에서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뜻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사회적 젠더 규범을 실천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데버(devor)는 미국 백인 중산층 여성이 젠더 규범을 어떻게 체화하고 실천하는지를 조사했다. 그결과는 예상할 수 있는 만큼이나 흥미롭다. 이성애-비트랜스여성이건, 레즈비언 부치건, ftm/트랜스남성이건 상관없이 태어날 때 '여자'로 지정받은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여성 젠더 규범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거의 항상 불안과 젠더 경합(gender dysphoria)을 겪는다고 한다(Devor, 1997). 젠더 경합은 트랜스젠더의 젠더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의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로,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에 불만, 불편, '불일치'를 느끼는 경험을 지칭한다. 많은 트랜스젠더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 범주와 불화를 일으키고 때때로 불일치를 느끼며 자신에게 적합한 젠더의 몸으로 바꾸기 위해 의료적 조치를 취한다. 의학은 이를 젠더 경합(종종 '젠더 위화감', '젠더 불화'로도 쓰인다)으로 명명했다. 따라서 젠더 경합을 단순히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와 상당한 위화감을 느끼고 결국 다른 젠더로 자신을 설명하는 실천으로만 이해한다면 비트랜스여성과 ftm/트랜스남성의 젠더 경험을 연속선상에 두는 데버의 결과를 납득하기 힘들 수 있다.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의 경험을 분리해서 사유하는 입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다른 젠더로 자신을 설명하진 않는다고 해도,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를 자신의 젠더 범주로 받아들이고 그 범주에 적합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취하는 일련의 노력과 전략을 포괄하는 언어로 젠더 경합을 재해석한다면 데버의 설명은 익숙한 것으로 바뀐다.[3]
예를 들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비트랜스여성은 이 사회의 적절한 여성 젠더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몸과 불화하고 경합하며 다이어트를 하고 때때로 성형수술을 한다. 다이어트나 화장을 하지 않는 여성은 '여자가 화장도 안 하냐'라는 지적을 받기 마련이고 이런 지적은 여성 젠더 범주 자체를 의심하진 않는다고 해서 여성 자신의 젠더 범주를 스스로 검열하도록 한다. 다이어트나 화장을 한다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고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해도 몸은 불완전한 상태에 머문다. 조금이라도 더 완벽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해도 사회적 규범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몸은 불가능한 이상일 뿐이다. 젠더 규범은 도달하고 체화해야 하는 기준이면서도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며 불안과 공포를 유발하는 사회 질서다. 이성애-이원 젠더를 자연 질서로 삼는 사회에서는 젠더가 두 가지 뿐이라고 해도 이 사회의 구성원은 이를 '선택'할 수 없고 지정 받은 젠더로 살아가야 하며 또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은 선택이 아니라 금기로 작동한다. 그것도 실천해서는 안 되는 금기가 아니라 실천해야 함에도 성취하면 안 되는 금기다. 규범을 지향할 순 있지만 완벽하게 실천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실천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결코 누설해서는 안 되는 금기다. 그러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비트랜스여성은 태어날 때 지정 받은 젠더로 살아가기 위해, 그 젠더를 자신의 젠더로 받아들이기 위해 끊임없는 몸 변형을 경험한다. 이런 맥락에서 젠더 경합을 독해할 경우,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가 겪는 젠더 정체성 형성 과정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이 된다. 이 사회의 젠더 자체가 불안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욕망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젠더 체화 과정은 불화와 경합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할 수 없고 불화와 경합을 체화하는 과정이다.#
이글은 그가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의 공통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젠더 디스포리아를 재정의 하는 부분이다. 우선 기본적으로 나올 수 있는 비판은 젠더 디스포리아라는 용어의 과잉 확대된 정의다. 시스젠더 여성이 외모를 지적당하면서 겪는 스트레스와 FtM 트랜스젠더가 젠더, 신체가 불일치하는 것에서 오는 불편함은 질적, 양적 차이가 있다. 전자는 성에 보수적인 사회의 경직성과 사회적 압박에 대한 반응이지만, 후자는 정체성의 근본적 위기와 의료적 개입 필요성을 포함한다. 트랜스젠더 역시 전자의 문제에 대한 2차적인 압박을 경험할 수 있지만, 후자는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다. 모두가 젠더 디스포리아를 겪는다는 이상한 주장은 트랜스젠더가 경험하는 특수성을 부정하며 의료적 성전환을 사회의 경직된 젠더 체계에서 파생되는 부작용으로 프레이밍화할 수 있다. 사회의 젠더 규범과의 갈등으로만 트랜스젠더를 보면 성전환을 하는 트랜스젠더를 젠더 규범에 적응하는 것에 실패한 사람들이라는 오독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트랜스젠더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젠더 체계와의 갈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소수자의 인권 문제를 정치적 투쟁의 도구와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그는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가 공통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 위해서 이런 주장을 했으나, 이것은 실질적으로 트랜스젠더의 고유한 경험을 박탈하고 트랜스젠더가 경험하는 취약성을[4] 무시한채 거짓된 동일화를 하면서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을 무력화하는 것에 가깝다.예를 들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비트랜스여성은 이 사회의 적절한 여성 젠더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몸과 불화하고 경합하며 다이어트를 하고 때때로 성형수술을 한다. 다이어트나 화장을 하지 않는 여성은 '여자가 화장도 안 하냐'라는 지적을 받기 마련이고 이런 지적은 여성 젠더 범주 자체를 의심하진 않는다고 해서 여성 자신의 젠더 범주를 스스로 검열하도록 한다. 다이어트나 화장을 한다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고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해도 몸은 불완전한 상태에 머문다. 조금이라도 더 완벽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해도 사회적 규범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몸은 불가능한 이상일 뿐이다. 젠더 규범은 도달하고 체화해야 하는 기준이면서도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며 불안과 공포를 유발하는 사회 질서다. 이성애-이원 젠더를 자연 질서로 삼는 사회에서는 젠더가 두 가지 뿐이라고 해도 이 사회의 구성원은 이를 '선택'할 수 없고 지정 받은 젠더로 살아가야 하며 또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은 선택이 아니라 금기로 작동한다. 그것도 실천해서는 안 되는 금기가 아니라 실천해야 함에도 성취하면 안 되는 금기다. 규범을 지향할 순 있지만 완벽하게 실천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실천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결코 누설해서는 안 되는 금기다. 그러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비트랜스여성은 태어날 때 지정 받은 젠더로 살아가기 위해, 그 젠더를 자신의 젠더로 받아들이기 위해 끊임없는 몸 변형을 경험한다. 이런 맥락에서 젠더 경합을 독해할 경우,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가 겪는 젠더 정체성 형성 과정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이 된다. 이 사회의 젠더 자체가 불안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욕망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젠더 체화 과정은 불화와 경합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할 수 없고 불화와 경합을 체화하는 과정이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적인 젠더 관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회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젠더 기준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남성들에게도 그런 관점을 적용할 수 있는가? 못생긴 남성, 키가 작은 남성, 능력이 부족한 남성들이 경험하는 고통에 대해서도 이런 페미니스트들이 동정을 해줄 수 있나? 루인의 주장대로라면 이들도 이상화된 남성 젠더 기준에서 탈락한 자들이기 때문에 젠더경합을 경험하고 트랜스젠더와 다를바 없는 존재가 된다. 남성들이 여자를 못만나며 도태되고 추해지는 것은 여성들의 사회가 만든 이상적인 젠더 기준이 높기 때문인가? 이걸 옹호할 수 있나? 아니라면 왜 '생물학적인 여성' 만이 피해자로 규정되고 그런 주장이 어떻게 '젠더 정치'와 공존할 수 있나? 본래의 의미에서 젠더 디스포리아는 지정성별 남/녀 상관 없이 사용하는 말이지만, 루인이나 그의 글을 인용한 페미니스트들은 오직 여성에게만 이 말을 적용 시킴으로서 트랜스젠더의 언어를 분리주의의 언어로 변질 시켰다. 루인의 주장에서 트랜스젠더의 젠더 디스포리아의 원인은 무엇이며 트랜스젠더는 왜 성전환 하는가?[5] 그의 말대로 젠더"경합"이 사회 때문에 생기는 거라면 트랜스젠더의 성전환과 그들의 존재의 사회가 병들어서 생기는 부작용이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나?[6] 그리고 루인은 이런 주장을 왜하고 있나? 사회가 젠더 문제를 야기 해니까 매체에서 이상적인 성에 대한 표현을 더욱 통제해야 하고 그래야 젠더에 의한 고통과 신체훼손 같은 부작용을 막을 수 있을거라고 주장하려 한다면, 이건 그가 트랜스페미니즘이라고 자칭하는 것이 아니라 트랜스 배제 래디컬 페미니즘과 맞다아 있는 주장이다.
시스젠더는 과연 소위 두 가지 다른 성이 “일치”하는 존재인가? 많은 비트랜스젠더가 다이어트, 성형 등을 통해 젠더 경합을 겪으며 소위 두 가지 다른 성이 완전하게 일치 하지 않는 상황을 겪는다. 그렇다면 트랜스젠더는 아니지만, 사회적 여성성 규범에 부합하지 않아 ‘섹스와 젠더’가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으며, 그저 둘을 불안하게 봉합하며 사는 비트랜스여성은 무슨 젠더인가?트랜스와 시스는 반대말인가
이것도 굉장히 해괴한 주장인데 시스젠더 여성이 다이어트와 성형을 한다고 해서 '생물학적인' 섹스가 바뀌지는 않고, 당연히 생물학적인 섹스를 바꾸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섹스는 태어나는 것으로 얻게된 '생물학적' 성별을 의미할 뿐이다. 그가 예시로 든 사례에서의 (자신의 생물학적인 성별을 의문시하지 않는)'여성'은 이상적인 '여성' 이미지를 가지려는 노력에서 갈등과 스트레스를 겪는다. 이 사례에서 여성은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며, 자신의 섹스에서 다른 젠더로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과 의지가 없다. 그는 "두 가지 다른 성이 완전하게 일치 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여기서 성별은 (여성적인 외모관리 노력을 하는 생물학적) 여성 하나다. 그가 성이 불일치한다고 계속 예시로 드는 것들은 차라리 버진 vs 채드 밈과 유사하다.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가 반대의 의미로 범주화 되선 안된다는 주장은 트랜스젠더의 취약성을 가리고 시스젠더라는 말이 젠더 권력에서 비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에게 특권을 가지며 차별을 하는 주체임을 상기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는 용어라는 점을 간과한다. 이런걸 보면 그가 근본적으로 젠더 디스포리아를 무슨의미인지 알고 사용했나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다."젠더 경합"이라는 번역도 이상하다. 그가 2006년에 작성한 글에서 번역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는 gender dyphoria가 의학에서 트랜스젠더를 병리적으로 설명하고 정신병으로 정의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 경합이라고 번역했다고 한다.# 트랜스젠더를 젠더 디스포리아만으로 분석하는 것이 병리적일 수는 있으나 젠더 디스포리아는 정신병이라는 뜻이 아니다. 디스포리아는 트랜스젠더 문제 외에도 의학에서 환자가 호소하는 어떠한 불편함을 뜻하는 말로 젠더 디스포리아는 그냥 트랜스젠더가 본인이 가지고 태어난 성별이 싫고, 자신의 성정체성이 부정당하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dyphoria를 dispute와 착각 했는지 뜬금없이 경합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에서 오는 괴로움이라는 본래의 뉘앙스가 사리지고, 사회 젠더 체계와의 갈등이라는 오해를 야기할 수 있는 오역이다.
ICD는 디스포리아를 "우울, 불안, 불만, 과민함, 불행감 등을 포함할 수 있는 불쾌한 기분 상태" 라고 설명하며#, 젠더 디스포리아라는 맥력에서 이런 괴로움은 원하지 않는 성별로 태어난 것의 고통, 사회가 태어난 성별에 강요하는 젠더와 반대로의 젠더를 수행하기 때문에 받는 부모와 교육 기관으로부터의 탄압에 의한 고통, 원하지 않는 사춘기를 경혐하는 것에 대한 고통, 의료 기관으로 부터 적절한 순간에 젠더 긍정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통, 극우 정치세력이 성전환 치료를 범죄화 하려는 것에서 오는 고통, 성전환 치료가 부족해 어색한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으면서도 어떻해든 치료비를 모아야 하는 것의 고통,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아버지가 자신을 죽은 자식 취급하며 전세계적으로 트랜스혐오를 선동하는 것에서 오는 고통을 의미하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를 자신의 젠더 범주로받아들이는" 시스젠더의 '다이어트 스트레스' 같은걸 표현하기 위해서 쓰는 말이 아니다.
굳이 젠더 디스포리아라는 개념을 끌고 온것도 이상한데 트랜스운동에서 디스포리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젠더퀴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강한사람들이고 "트랜스젠더퀴어"라는 말을 쓰는 사람과는 맞지 않다. 트랜스 운동에서 병리화 관점으로 트랜스젠더를 분석하는 것이 싫은 쪽은 젠더수행성을 드는데 이건 크로스드레서 같이 지정성별의 규범에서 반대로 가버리는 젠더 비순응자를 모두 트랜스 실천으로 아우르기 위한 것이지 이것도 시스젠더의 다이어트 스트레스와는 무관한 이야기다. 실제로 그의 글을 인용한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이말을 본래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굉장히 이상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도 "젠더가 경합한다" 같이 이상하게 사용하고 있다. 다음은 몇가지 사례들이다.
젠더 경합(gender dysphoria)이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를 자신의 젠더 범주로받아들이고, 그 범주에 적합한 존재로 살아가고자 취하는 일련의 노력과 전략을 포괄하는 언어이다. 태어날 때 '여자'로 지정받은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여성 젠더 규범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거의 항상 불안과 젠더 경합을 겪는다고 한다. 결국, 이 사회의 젠더 자체가 불안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욕망으로 구성되며, 젠더를 체화하는 과정은 불화와 경합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할 수 없다. 젠더 경합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새로 해석하는 젠더 폭력은, 한 개인이 태어났을 당시 지정받은 젠더로 평생 살아가고 그 젠더 규범을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실천으로 체화하도록 강제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즉,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가 겪는 젠더 정체성 형성 과정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연속상에 있는 사건이 된다.
일부 사람들은 실제로 전재하지 않는 이상을 만들고 그 틀처럼 살기를 원한다. 이는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장치들을 사회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MTF 혐오 문제를 개인이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에 겪는 문제로 만든다. 여성 혐오의 문제 또한 그렇다. 젠더 경합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생각했을 때, 우리가 추구해야 할 페미니즘의 방향은 무엇일까? 개인이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 맞추는 것이 과연 옳을까? 그것이 옳지 못하다 생각하여 맞서고자 시위하는 것이다. 근데 같은 문제를 겪는 다른 소수자를 그 이유로 혐오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분법적인 생각과 누군가를 배제하는 세상은, 모두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고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가 젠더 경합을 넘어설 수 있는 세상을 꿈꿔야 한다."트랜스 페미니즘: 젠더 경합을 넘어선 세상으로
일부 사람들은 실제로 전재하지 않는 이상을 만들고 그 틀처럼 살기를 원한다. 이는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장치들을 사회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MTF 혐오 문제를 개인이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에 겪는 문제로 만든다. 여성 혐오의 문제 또한 그렇다. 젠더 경합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생각했을 때, 우리가 추구해야 할 페미니즘의 방향은 무엇일까? 개인이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 맞추는 것이 과연 옳을까? 그것이 옳지 못하다 생각하여 맞서고자 시위하는 것이다. 근데 같은 문제를 겪는 다른 소수자를 그 이유로 혐오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분법적인 생각과 누군가를 배제하는 세상은, 모두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고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가 젠더 경합을 넘어설 수 있는 세상을 꿈꿔야 한다."트랜스 페미니즘: 젠더 경합을 넘어선 세상으로
나는 여성이라는 젠더 규범을 완벽히 실천하지 못해 삶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젠더 경합’(gender dysphoria)을 겪어야만 했던 사람이다. 페미니즘 이론을 통해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어서야 그 불안과 공포의 근원을 마침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여자’라는 이름에 의문을 품어보자 - 일다 -
나는 왜 내가 되고싶은 것이 될 수 없으며 왜 어떤 특정한 일, 예를 들어 집안일이 내 일이 돼야 하는 거지? 제약은 성(Sex)이라는 우연적 속성에 있지 않다. 그 성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사회의 방식에 있다. 이같이 해석된 성을 ‘젠더(Gender)’라 한다면 ‘젠더 디스 포리아(Gender Dysphoria)’라 일컬어지는 현상은 단지 트랜스젠더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젠더 경합’이나 ‘젠더 위화감’으로 흔히 번역되는 이 용어에서 디스포리아 (Dysphoria)는 유포리아(Euphoria)의 반대말이다.(...) 이같은 젠더 디스포리아는 비 트랜스젠더에게도 확인된다. 한 예로 다이어트나 성형의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 또한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화한 젠더 이미지에 가까워지려는 시도 속에서 언제나 만족할 줄 모르고 디스포리아(불행, 불편함)를 겪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의 차이는 좁혀진다. 그 둘은 젠더 디스포리아라는 공통된 경험에서 만나 서로 연대를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실제로「젠더, 인식, 그리고 젠더폭력」(2013)이라는 글에서 루인(ruin S.M. Pae, 트랜스/젠더/퀴어 연구가)은 이런 의미에서 그 둘의 연대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같은 젠더 디스포리아는 살과 몸의 거리,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는 그 괴리에 서 그 기원적 설명을 찾는다.현상학적 페미니즘 – 구성주의의 한계를 넘어
인용된 사람들은 모두 지정된 성별과 젠더 정체성이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글들에서도 젠더 디스포리아가 원하지 않는 신체를 가지고 태어나서(지정성별과 젠더 정체성의 불일치) 느끼는 정체성의 위기와 괴로움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글들에서는 트랜스젠더가 고유한 성소수자가 아니라 사회문제 때문에 생겨나는 부작용 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런 입장에서는 다같이 경험하는 문제니까[7] 트랜스젠더들은 몸을 바꾼다는 잘못된 관념에 사로 잡히지 말고, 신체 훼손을 장려하는 주장을 해서는 안되며 몸을 긍정하라는 트랜스혐오적인 결론도 도출될 수 있다. 게다가 루인의 글들을 읽어보면 스스로가 트랜스젠더라고 자칭을 함에도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의 몸을 혐오한다거나 호르몬과 시술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이 향하는 방향으로 몸을 바꾸는 것을 이해 자체를 못하는 듯한 내용이 계속 나오는데#, 트랜스젠더 공동체가 양지화된 지역이었다면 디스포리아가 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개념을 왜곡한다는 점에서 어마어마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8]
1. 미녀는 젠더경합을 분명히 겪었다.
루인에 따르면 모든 성별화된 주체는 젠더경합(gender dysphoria)을 겪는다. 기존에 젠더경합은 ‘몸과 마음의 갈등’을 표현할 때, 즉 트랜스젠더의 불만, 불편, ‘불일치’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용은 트랜스젠더 젠더실천을 병리로 낙인찍고, 그를 토대로 시스젠더 젠더실천의 자연스러움을 증명해왔다. 그러나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몸과 마음의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다. 젠더규범은 염색체나 성기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학교와 같은 사회로부터 배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스젠더 몸의 탄생 : <미녀는 괴로워>가 젠더경합을 무마하는 방식에 대하여
루인에 따르면 모든 성별화된 주체는 젠더경합(gender dysphoria)을 겪는다. 기존에 젠더경합은 ‘몸과 마음의 갈등’을 표현할 때, 즉 트랜스젠더의 불만, 불편, ‘불일치’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용은 트랜스젠더 젠더실천을 병리로 낙인찍고, 그를 토대로 시스젠더 젠더실천의 자연스러움을 증명해왔다. 그러나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몸과 마음의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다. 젠더규범은 염색체나 성기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학교와 같은 사회로부터 배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스젠더 몸의 탄생 : <미녀는 괴로워>가 젠더경합을 무마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글 역시 지정된 성별과 젠더의 불일치에서 오는 괴로움과 성역할 압박을 혼동하고 있다. 성역할 압박에 따른 스트레스는 협소한 젠더 규정과 높은 평균치, 개인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보수적인 사회문화 때문에 발생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몸으로 태어 나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시스젠더 여성, 남성이 사회의 기준을 맞추지 못할때는 압박을 받을 수 있으나 반대로 그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노력할 때는 격려를 받게된다. 예를 들어서 호르몬 이상 때문에 털이나고 생리에 문제가 생긴 시스젠더 여성은 나이를 불문하고 태어난 몸에 일치하는 젠더를 갖기위한 호르몬 처방이 허용되고 장려된다. 하지만 남성으로 태어(지정)났으나 그걸 혐오하고 반대의 젠더를 체현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지정성별과 젠더의 불일치) 그것은 부정되고 낙인이 찍히게된다. 트랜스젠더는 지정성별의 규범을 따르지 않기(젠더 비순응) 때문에 처벌받고, 지정성별에서 벗어난 젠더(트랜스)를 체현하고자 하는 소망이 처벌받으면서 젠더 맥락에서 이중의 억압을 받게된다.[9][10] 이게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의 차이고 트랜스젠더가 가진 핵심적인 취약점 중에 하나다.(안드레아 롱 추, "sex의 자유" 참고)
이 부분은 트랜스혐오주의자들이 사회가 병들어 발생하는 문제를 트랜스젠더 운동가들이 신체훼손에 대한 장려로 이끌고 있다고 비난 선동하는 부분인데, 트랜스젠더 운동가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면 서양 기준으로 트랜스 커뮤니티에서 엄청난 논란을 받을만한 주장이지만, 루인 본인은 트랜스라고 자칭을 함에도 문제 의식이 없는지 이런 글들이 뛰어났다며 본인 블로그에서 인용하기 까지 했다.#
루인이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의 공통점을 지적하고 싶었다면, 젠더 디스포리아 개념(지정성별과 젠더의 불일치감)을 왜곡할게 아니라 젠더에 의해 발생하는 억압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했을 것이다. 성역할에 경직된 사회에서의 젠더의 사회화는 일반적인 시스젠더들에게는 그저 감시와 처벌이지만 트랜스젠더에게는 원치않는 성별로의 사회화가 강제됨으로서 존재의 부정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성전환 이후에도 트랜스젠더는 취약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경직된 이분법적 젠더 체계에서는 협소하게 규정된 젠더의 범위에 의해 트랜스젠더 여성이 가진 여성성은 의심되며 부정되고 언제나 "생물학적 성별"의 특징으로 오도된다. 그러나 어떠한 여성성이 진짜 여성성인가? Transvestigation라는 현상이 말해주듯 트랜스젠더에 대한 배제는 언제나 전통적이고 경직된 젠더를 체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억압을 가하게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트랜스젠더 혐오의 문제는 젠더에 의한 억압에서의 최전선에 있게된다.
3. 저서
-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4. 역서
5. 학력[11]
- 서강대학교 학사
- 서강대학교 대학원 여성학협동과정 석사 (2009년) 학위 논문: 젠더 범주의 다중성 연구
- 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 박사. (2024년) 학위 논문: 한국 트랜스젠더퀴어 페미니즘의 이론화 : 퀴어 아카이브 기록물 분석을 중심으로
6. 관련 문서
[1] 법적 실명은 따로 있지만 공적인 일이 아니면 사용하거나 드러내는 것을 몹시 꺼리는 편이며 책도 루인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한다.[2] 사실 한국의 트랜스페미니스트라는 건 트랜스여성 페미니스트 당사자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탐구하고 주변 사람에게 페미니즘 운동에 나서는 존재지, 학술적인 수준으로 트랜스페미니즘을 연구하는 건 사실상 루인이 유일하다.[3] 성역할 압박에 따른 스트레스를 태어나 지정된 성별과 정체성이 불일치 하면서 오는 괴로움과 혼동하게 해서 성별 불쾌감을 정반대의 의미로 왜곡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몸으로 태어나고, 내가 혐오하는 성호르몬이 몸에서 나오고, 내가 원하지 않는 사춘기 외모 변화를 경험하고, 최선의 노력에도 사회에서 정체성을 부정 당하면서 오는 괴로움은 성역할에 따른 스트레스와는 질적인 차이가 크다.[4] 시스섹슈얼 특권 부분 참고. 그가 숙명여대 관련하여 인터뷰한 내용이 왜 문제인지 언급되어 있다.[5] 루인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는 젠더 디스포리아가(본래의 의미에서) 없고 HRT나 시술을 포함한 어떠한 성전환도 하지 않았고 원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기본적인 개념을 왜곡하면서 이런 주장을 하면 서양에서야 논란이 엄청나겠지만, 한국에서는 제대로 트랜스젠더 공동체라는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묻히고 있는 실정이다.[6] 젠더 경험은 연속체이고 시스젠더 여성의 다이어트 스트레스가 젠더 경합이라면, 여성은 심한 다이어트 스트레스 때문에 남성으로 성전환하고 트랜스남성이 탄생하는 것인가? 루인의 주장에서 젠더화된 인간은 주체성이 없고 사회적인 영향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트랜스젠더를 시스젠더와 대비되는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전제하지 않은 이상, 트랜스남성은 사회의 여성혐오를 내면화 해서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사람이 되고, 이것은 트랜스혐오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트랜스남성을 비난할때 쓰는 논리와 일치하며, 전통적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사회보수주의 자들이 트랜스 운동가와 의사집단이 사회적 질병을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재포장해 여성을들 불임이 되게 해서 사회를 붕괴시키려고 하고 있다며 선동하는 논리와 일치한다.[7] 이 사람들은 지정된 성과 젠더가 불일치 한다는 것을 이해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8] 그가 트랜스젠더로 스스로 정체화한 이유는 채식을 하다가 그냥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서사는 매우 간단하다. 어릴 땐 집이 가난해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게 다행이었고 다른 군것질 같은 건 불가능했다. 이런 배경에서 10대 시절 난 채식을 선택했고 채식이 몸에 안 좋다는 당시의 인식에서 나는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채식을 하는 건 내게 중요한 투쟁의 순간이고 채식이 얼마나 정치적 행위인지 그때부터 확인했다. 20대 시절에도 나는 여전히 채식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했고 많은 것을 채식 경험을 경유해서 이해했다. 그리하여 20대 중반 즈음 트랜스젠더로 나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설명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에겐 당혹스러울 수 있겠지만 내겐 매우 ‘자연’스러운 정체화 과정. 그리하여 음식은 채식주의자라는 정체성 말고 다른 정체성/범주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9] 그래서 제대로된 트랜스 옹호 페미니스트들은 사회 문제에서 자기 결정권을 강조한다. 젠더는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해서는 안되고 내몸은 내 것이라는 것. 낙태가 금기시 되는 것은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젠더를 애낳는 존재로 강제하기 때문고, 그런 강제력에 맞서 여성 자신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해야 여성의 자유와 권리가 증진 된다는 것. 이것은 트랜스여성(아이를 못낳는 여성)이 스스로의 젠더를 주장하고 신체를 원하는 대로 바꿀(내몸은 내것) 권리와 연결되어 있다.[10] 현실정치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생물학적으로 협소하게 규정된 여성의 범주를 지키기 위해(여성=애 낳는 존재) 낙태를 범죄화 함과 동시에 시험관 시술을 지원하는 평책을 펼쳤고#, 반대로 생물학적 성별에서 벗어난 젠더를 체현하게 하는 성전환 치료를 낙인을 찍으면서 젠더클리닉 의사와 트랜스젠더 어린이의 부모를 범죄자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시스젠더의 다이어트 스트레스 같은게 아니라 이런게 생물학적의미에서만 젠더가 해석되고 강제될때 발생하는 억압이다. 루인의 괴상한 주장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젠더 권력에서 '(생물학적)여성'만이 피해자여야 하며 그것을 위해 소수자의 용어와 경험마져 빼앗아가려 하는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의 독선적인 욕구만("젠더경합을 가장 강하게 겪는것은 이성애자 여성")을 달래줄 뿐 실제 소수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11] 다만 루인은 본인의 블로그에서 자신의 학력을 공개하는 것에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대략 '세상 살며 오죽 해놓은 게 없으면 학력 따위 밖에 소개할거리가 없냐고 느껴져서 불쾌하다'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