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9 17:18:15

딘 애치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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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51대 국무장관
딘 구더햄 애치슨
Dean Gooderham Acheson
파일:Dean_Acheson.jpg
<colbgcolor=#172172> 출생 1893년 4월 11일
미국 코네티컷주 미들타운
사망 1971년 10월 12일 (향년 78세)
미국 메릴랜드주 샌디스프링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재임기간 제51대 국무장관
1949년 1월 21일 ~ 1953년 1월 20일
정당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냉전 시대의 첫 국무장관2.3. 말년
3. 기타 자료

[clearfix]

1. 개요

"코리아가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1]
딘 애치슨은 미국의 51대 국무장관으로, 해리 트루먼 시기에 재임했다. 냉전 시기 미국 외교정책의 서문을 연 인물이다.

6.25 전쟁 직전 애치슨 라인을 선언한 장본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며, 때문에 한국에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1893년 코네티컷 주에서 태어났다. 1915년에 예일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18년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였다.

그 후 애치슨은 민주당에 가입하고,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의해 재무 부장관에 임명된다.

2.2. 냉전 시대의 첫 국무장관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타계하자, 후임 대통령에 취임한 해리 S. 트루먼에 의해 국무 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애치슨은 소련에 회유적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련과의 갈등이 노골화되면서, 그 역시 서유럽에서 대소 강경 노선으로 점차 기울어졌다. 1949년 트루먼이 재선되면서, 애치슨은 트루먼의 2기 내각에서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미국이 주도하는 NATO 결성이 이루어졌다.

1949년 일명 <중국백서>(China White Paper) 정식명칭 <United States Relations with China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Period 1944~1949>를 발간했다.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의 끔찍한 부패를 비난하면서 버리고,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에 접근하려고 시도하였다. 애치슨은 마오쩌둥이 티토처럼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할 가능성을 주목했다. 그것을 위해 나온 것이 바로 애치슨 라인이다.

기존에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여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남침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식으로 알려졌는데, 냉전 이후 연구성과에 따르면 애치슨 선언은 남침을 유도한게 아니다. 국내에서 남침유도설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조차도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애치슨 라인은 남침을 유도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리처드 쏜턴 같은 남침유도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NSC-68을 주목하지, 애치슨 라인은 아니라고 분석한다. 현대에는 애치슨 라인은 티토-스탈린 결렬처럼 중소결렬을 시도했다고 본다.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에서 애치슨 라인은 중소 결렬 시도라고 한다. 한마디로 애치슨 라인은 한반도를 북한 김일성한테 팔아넘긴게 아니라, 중국 마오쩌둥한테 넘겨주겠으니 서로 잘 지내보자는 제안을 보낸 유화책이라고 볼 수 있다. 헨리 키신저가 한 핑퐁외교의 선배격 되는 정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중소 결렬이 이뤄진다면 대만과 한반도를 중국의 세력권으로 넘겨줄 수 있었지만, 중소 동맹이 이뤄졌기에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하지 않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53년 공화당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2.3. 말년

공직을 떠난 후에도, 그는 외교계 원로로서 후임 정부들에 자문을 제공하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자 케네디 행정부의 요청을 받고 정책 조언을 하기도 했는데, 소련과의 일전 불사를 포함한 강경책을 주장했다. 하지만 케네디 행정부는 그보다는 온건한 쿠바 봉쇄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애치슨은 위기 당시 유럽 특사로 파견되어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아데나워 서독 수상 등으로부터 쿠바 봉쇄에 관한 지지를 얻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애치슨은 케네디의 피살 후 들어선 린든 존슨 행정부에서도 일정 수준의 자문을 했다. 당초 그는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전 개입을 지지했지만, 이후 철회하였다. 후임 닉슨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된 헨리 키신저도 애치슨의 자문을 받았다.

이후 1971년, 메릴랜드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뇌졸중으로 눈을 감는다. 향년 78세. 유해는 워싱턴 조지타운에 안장되었다.

3. 기타 자료

트루먼 도서관acheson paper에 애치슨이 남긴 자료들이 있다.


[1] "Korea came along and saved us" 역설적이게도 애치슨 라인을 그었던 자신의 실수로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그로 인하여 미국의 동맹이 강화되고 소련에 대한 압도적 우위를 챙길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