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22 18:03:15

관우(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1. 개요2. 작중 행적3. 능력4. 기타

1. 개요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관우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2. 작중 행적

입촉을 준비하던 유비에게 곽선호가 빙의되면서 생각을 바꿔 장로의 한중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어 장비와 함께 불러들인다. 방통은 당연히 관우에게 형주를 맡길 것이라 여겼으나 그랬다간 원 역사처럼 손권과 관계가 파탄날 수 있음을 잘 아는[1] 유비는 그를 장비와 함께 한중으로 소환한다. 이후 악진이 상용에 원정군을 이끌고 오자 일군을 이끌고 전선에서 활약한다.

상용에서 귀환한 후 유비와 갈라져 파군 방면을 접수하고 여유가 있으면 강주까지 진군하는 역할을 맡는다.[2] 마침 복황후 일가의 몰살로 유비측의 명분이 한층 강화된 덕에 순조롭게 파군 방면을 뚫었고 낙성 앞에서 맏형과 합류한다.[3]

법정이 낙성을 앞에 두고 제안한 초토화 전술에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한다. 다만 상용에서 자신을 도와줬던 법정을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건 아니라서 장비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수습하자 별 불만없이 받아준다. 관우의 성향을 다시 느낀 유비는 원역사의 유관장 삼형제가 맞았던 슬픈 결말을 돌이켜보고 조조나 손권처럼 쉬운 길을 가고 싶다는 고뇌에 휩싸이지만[4] 결국 인의의 길을 택한다. 다만 약탈을 하지 않을 뿐이지 기병을 활용한 흔들기 자체는 시행하기로 결정되자 장비와 함께 습격 작전에 자원했고 자신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진한 1만 동주병을 장비와의 협격으로 가볍게 박살내고 상존과 호위병들을 단기로 참하는 무용을 선보인다.

동오가 형남을 침공하자 유비와 함께 동오를 막기 위해 형남으로 이동한다. 북방 출신임에도 수군 조련에 일가견이 있어 물길이 매우 거세고 굴곡진 장강삼협을 능숙한 조함 실력으로 돌파한다. 형주에 도착한 후 요립과 함께 임상현을 수복해 동오군과 대치했고 대치가 마무리 된 후 마초를 돕기 위해 서량으로 파견된다. 마초가 관우가 무척 싫어하는 명문가 자제 겸 호족이라 유비는 둘이 불화할 것을 걱정하는데 제갈량은 염행과 마초의 일기토 일화를 거론해 마초를 호족이 아닌 (관우가 한없이 관대해지는)조조에게 핍박받는 약자로 여기게끔 만들며 갈등 가능성을 없앤다. 이후 상규성에 주둔하며 기성에 주둔한 마초와 연계해 염행과 하후연에 대적한다. 그렇게 1년여를 주둔하며 맞서던 중 가까운 진창에서 유비와 하후연의 결전이 벌어지자, 황권과 함께 조홍을 격파하고 진창에 수군을 끌고 들어오는 데 성공한다.

진창을 포기하고 물러나던 서황을 막아세우고 조조군 시절 친분이 있던 그에게 투항시 서황과 병사들 전원의 신변 보장을 약속하나 서황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서황과 일기토를 벌여 서황과 고참병들을 참하고 남은 병력의 투항을 받는다. 조조가 장안에 당도해 북원으로 향하자 유비에게 합류하지만 오랜 친우인 서황을 자기 손으로 참한 충격 탓인지 우울함을 감추지 못했고 그 결과 황충이 자신과 나란히 서있는 것조차 신경쓰지 못한다.[5] 이후 북원 대치에서 마초와 장비가 조조를 습격하러 나가자 왜 자기는 군영에 놔두냐며 투덜댄다. 이어 벌어진 기병전에서 조진이 삼복 전법을 활용하자 이를 겪어본 자신이 나가야한다며 다시 한 번 출진을 청하지만 서막과 관구흥이 원군을 끌고 오고 있던지라 퇴각하는 장비와 마초를 엄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북원 대치가 유비측 판정승으로 마무리된 후 익주계를 선두로 유비의 칭왕을 요구하는 상언이 이뤄지자 장비와 함께 그틈에 섞여 말없이 동의 의사를 밝힌다. 칭왕 논의가 황실에 청원을 넣고 이어가는 것으로 일단락된 다음에도 장비, 방통, 법정과 함께 장막에 남아있다 유봉을 상용으로 보내 후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법정의 의견에 힘을 실는다. 사적으로 조카인 유봉을 사실상 폐출하자는 말을 꺼내기가 양심에 찔렸는지 상언은 전적으로 법정이 맡아했다.

유비의 촉한왕 등극 이후 전장군에 임명되었고 북벌에서도 사령관으로 추천받으나 유비가 친정을 결의하면서 그 부장이 된다. 신야현에서 조홍군과 맞붙을 때는 중앙에서 유비의 보좌로 붙는다.

원역사에서 관우에게 항복한 후 싸우다 죽기까지 한 형주자사 호수, 남향태수 부방이 이번에는 유비의 항복 권유 사절인 동리곤과 종자경에게 화살까지 쏴가며 쫓아내서 유비는 자신이 무언가 놓친 것이 있는지 고민한다. 관우는 원 역사에서 항병들한테 굳이 종군까지 요구한 적 없었는데 호수와 부방은 관우군에서 도망도 안 치고 싸우다 죽었기 때문.

조홍과의 결전에서 기병 500에 보병 2만 5천으로 주령의 보병과 수적으로 월등한 염행, 곽회의 기병에 맞서 혼신의 힘을 다해 진형을 유지한다. 중군에 있는 유비를 치기 위해 조홍이 이끄는 기병의 대부분을 중앙에 집중해 무척 불리함에도 몸소 앞에 나서 사기를 유지하며 진형이 깨어지는 걸 막았고 기병이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법정이 벌려준 틈으로 장비와 마초의 후군 기병이 난입해 위군 대열을 부수며 대승을 거둔다. 조홍과 장합을 비롯한 위군 제장 모두가 맨앞에서 독려하는 관우만 치면 중군이 무너진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달려들 생각을 못했다.

신야 전투 이후로는 2배에 달하는 위군이 증원되어 포위망을 형성하자 장비와 마초와 같이 버티기에 급급했고 그렇게 8~9개월을 버티다 219년 8월이 되자 이러다가 무너진다는 판단에 모든 제장들과 같이 퇴각을 요청했다.[6] 그러나 유비가 끝내 버티다 가을 장마를 보고 진군을 결정하자 이에 따르다가 양번의 기적을 통해 순식간에 전황이 역전되자 감격해 유파와 함께 의형의 천자 즉위를 요청한다.[7]

완성 구원전에서는 결정적 한 방을 날릴 사람이 되어 다른 장군들이 공세를 할 때 뒤에서 대기한다. 이때 관우도 사람인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 내심 불안해하는 모습도 보여주며[8] 안량을 베었던 때처럼 결정적인 때를 또 느끼고 싶어한다.

장비, 황충, 마초의 전황을 차례로 살피다 수레와 화공을 이용한 보병 방진에 막혀 돌격력이 약해진 마초군의 측면을 우회해 전예가 지키는 방향으로 뛰어든다. 이민족 기병들과 싸운 경험을 떠올리며 무의식중에 흐트러져 있던 전예군 보병들은 관우의 돌격을 허용하고 만다.

전예는 당황하지 않고 보병의 밀도로 기병을 삼키기 위해 예비대를 투입시켰으나 관우는 접근한 보병을 한 번 공격에 한 명씩 찔러 죽여버리는 걸로 대응했고 병사들이 잠시 물러서 대열을 정비하는 그 찰나의 틈에 재차 난입, 완벽하게 보병 대열을 무너뜨린다. 유비군에 사관한 이력 때문에 퇴각 후 재정비가 불가능했던 전예는 상대가 안 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직접 검을 들고 맞상대하려다 1합만에 결딴이 났으나 한솥밥 먹은 그를 죽이기 꺼린 관우가 창대로 쳐준 덕분에 갈빗대가 몇 대 부러지긴 했지만 목숨을 건지고 사로잡힌다.[9]

전예군을 붕괴시킨 이후에도 전혀 지치지 않은 체 완성으로 치닫는 관우를 본 염행은 관우만 무너뜨리면 적은 와해될 것이니 관우를 쳐야 한다고 주장하나 관우의 무력을 여러모로 잘 알고 있는 조홍은 거부한다. 답답해진 염행은 자청해 나서 관우가 완성에 접근한 순간 기습했으나 단 일격에 베여 쓰러지고 관우는 마침내 완성에 도달한다.

이 과정에서 관우의 심리 묘사를 보면 적의 대군이나 밀집한 대형을 뚫기 어렵다는 생각은 물론 후음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동기가 옳은지조차 뇌리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자신이 완성에 도달하지 못 하면 완성의 농민들은 전부 죽는다는 한 가지 생각만으로 돌격해 초월적인 무력으로 백전연마의 조위군을 무너뜨렸다. 강강약약의 성향이 여기에서 빛을 발한 것.

다만 그 과정서 본인도 죽을 뻔 했음을 알고[10] 간담이 서늘해졌음을 느꼈지만 아들인 관평이 말을 걸어주어 잡생각을 떨쳐내고 완성에 입성한다.

3. 능력

만인지적의 무용과 야성의 감으로 승부하는 기병사령관. 단순하고 앞뒤 똑같은 성격에 병법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해서 관우는 도적 떼와 군소 세력이 난립하던 시절에나 유효하던 맹장과 소수 정예를 활용한 전투법을 거대 세력들로 재편되며 체계가 잡힌 삼국정립기까지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요립이 관우에 대해 평했던 것처럼 거칠고 정제되지 못한 병력 운용을 하는 약점이 있지만,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안량의 목을 베는 괴력[11]과 오랫동안 곁에 두며 훈련시킨 부곡의 숙련도가 합쳐진 파괴력은 무시무시하다.

그냥 싸움 좀 한다 수준이 아니라 군담물에서 혼자 무협지를 쓴다. 한솥밥 먹다 갈라선 전예는 절대 오래 못 살거라 생각하고 떠났는데 30년 지나도 살아있다며 기 막혀 했는데 그 비결이 그냥 미치도록 강해서다. 분명히 패한적도 많은데 난다 긴다 하는 상장들도 스치면 사망에 군졸들은 이삭베듯 수확해 버리는 통에 도저히 죽일 수가 없어서 50 넘도록 살아있는 것. 베기에 특화된 청룡언월도로 찌르기를 구사해 수비를 뚫어버리질 않나, 한 때 같이 싸웠던 전예를 죽이기 싫어서 창대로 쳐서 낙마시키는 짓[12]을 저지르거나 심지어 마초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간 염행에게 기습을 허용하고도 단 1합만에 죽여버리기도 한다.

당대 제일 전술가인 조조 휘하에서 체계적으로 병법을 익히고 경험도 많은, 오자양장의 일원인 악진이 백전연마의 정예병을 거느리고도 관우의 돌파에 쩔쩔맬 정도로, 이것이 기본기는 부족하지만 피지컬을 이용한 돌파로 득점을 하는 르브론 제임스의 플레이 스타일과 유사하기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관브론 우임스라는 별명이 붙었다.[13] 기병을 활용한 돌격전이 전문이지만 보병 지휘를 못 하지는 않는다. 우수한 기병지휘관들 데리고도 정작 지휘할 기병이 한줌이었던 유비군이라 특정 병과만 전담시키는 사치를 부릴 수 없었기 때문. 기병을 이끌때처럼 최전선에 서서 병사들을 독려하는데 병사들에게 신망이 높은 관우가 솔선하니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사기가 떨어지지 않아 조위의 정예들도 쉽사리 뚫어내지 못한다. 이때 공세측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빠른 해결책은 특공을 걸어 전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 지휘관을 치는 것이지만, 어지간한 돌격대장으론 관우에게 덤벼봐야 반격당해 죽을 것이 뻔한지라 함부로 특공할 수도 없다.[14]

한번 흐름을 타서 힘을 내면 온 천하를 울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어이없이 패배하기 때문에 최대한 변수(현지 호족, 보급, 적의 공세로 등)가 없는 환경을 만들어 오롯이 한타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1인분 이상은 충분히 하고도 남지만 그러기 위해선 옆에서 챙겨줄 유능한 참모와, 참모의 말을 듣도록 제어할 주군의 교통정리가 필수라 손이 많이 가는 유형이다. 관우 본인도 나름 이를 파악하고 있으며 오랜 전쟁 경험으로 자신이 파고들 기회를 감각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또한 유주에서 유비를 따라 기병지휘관으로 군경력을 시작해 명성을 쌓았는데도 수군을 무척 잘 다룬다. 단순히 배 좀 몰줄 안다 수준이 아니라 그 인재 많은 조위에서도 관우를 물위에서 상대할 장수는 형주 출신 항장으로 수군에 잔뼈가 굵은 문빙 정도밖에 없다. 이 정도면 수전 잘 하는 장수들이 즐비한 동오에서도 충분히 함대를 맡아 이끌 수 있는 수준이다. 즉, 손이 많이 가긴 하지만 그것만 채워주면 기병과 보병, 육전과 수전을 막론하고 제몫을 해내는 만능형 장수로 주인공은 이에 대해 유비 진영을 중소기업에 비유하여 "중소기업에서 영업부 직원이 아침, 저녁에 짬을 내서 직원들 통근버스 기사로도 뛰고, 급할때는 총무 일도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입촉 직전까지 인재 부족에 허덕여 한 사람이 여러가지 일을 도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원인으로 보았다.

한 마디로 고대 중국판 조아킴 뮈라+기본기 이상은 하는 보병지휘능력+당대 중국 탑급 제독들에게도 비벼볼 만한 수군지휘능력이 합쳐진 사기캐다.[15] 괜히 관우가 이런저런 단점이 있어도 당대 제일의 만인지적의 일원으로 칭송받은 게 아니다. 어찌 보면 작가의 서술 문제 때문에 능력치가 제대로 실감나지 않는 캐릭터로도 볼 수 있다.

4. 기타

유비와 매우 친한 의형제면서 정작 유비에게 다른 사람이 빙의되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데 조조는 유비가 한중을 공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정말로 자신이 아는 유비가 맞는지 위화감을 느낀 것과 비교된다. 물론 작중에서 이를 느낀 건 조조뿐이고 유비군의 다른 장수들도 빙의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지라 그냥 소설적 허용으로 넘어가 주는 게 맞다. 또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해도 형님은 형님이다"라면서 극도로 신뢰하고 있거나.[16]

삼국지연의로 인해 생긴 이미지가 아닌, 정사의 앞뒤가 지나치게 같고 다혈질적인 성격이 잘 고증되었다. 독자들도 이 때문에 관우의 성격에 대해 상당히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모습을 보인다. 관우의 성격이 호불호가 심히 갈렸다는 원 역사 기록을 감안하면 이것도 고증이라면 고증으로 볼 수 있다.

성격은 단순하고 큰형 앞에서 아이처럼 구는 면모가 있어서 조조가 사건 하나 일으킬 때마다 허도 사냥터에서 베어버렸어야 했다고 칭얼거린다. 의동생인 장비와는 현실 형제처럼 서로 투닥거리는 사이로, 형은 아랫사람에게 가혹한 동생이 염려스러워 볼 때마다 말리고, 동생은 식자들에게 말을 예쁘게 못하는 형이 걱정스러워 충고를 해준다. 관우도 각자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진 않아서 장비에게 우리는 함께 있는 게 좋다고 말한다. 원 역사에서 이들 형제의 말로를 생각하면 씁쓸한 부분. 작중 언급을 보면 평소 유비가 관우에게 성격 교정을 조언하기는 해도 막상 돌아서면 오냐오냐 해왔던 모양이다.

유비가 촉한왕에 즉위한 이후로도 기본 호칭이 큰형님이다. 관우가 호칭 제대로 쓸 때는 아주 엄숙하고 공적인 자리거나, 관우조차 심각하다 여길 정도로 X된 상황이거나 둘 중 하나다.

유비군 2인자로서 타군 2인자들과 비교해도 세력 내에서 갖는 위상이 남다르다. 서량 전쟁 막판에 패잔병을 이끌고 후퇴하던 서황과 대치했을 때 투항한다면 서황과 휘하 병사들의 신변 보장은 물론 책임지고 천거해 줄 것까지 장담했는데 다른 세력이라면 아무리 2인자격 인사라도 적 상장의 신변을 마음대로 확정할 순 없고 이런 신변을 확정하려면 최소한 군주와 사전 교감은 해둬야 한다. 유비에게 사관한지 얼마 안 돼서 사내 분위기를 잘 모르던 황권은 이런 관우의 모습에 놀라는 걸 넘어 기겁을 한다. 타국 2인자 격 인사인 위의 하후돈, 오의 주유는 관우처럼 대놓고 위세를 부리지 못했음을 고려하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얼마나 특이한지 알 수 있다.[17]

원 역사처럼 호족들을 싫어하나(정확히는 유비를 제외한 높으신 분들 전반) 약자, 양민들에게는 친절하다. 죽서기년 발굴로 한중에 온 가난한 학자들이 노숙을 하자 안쓰러워하며 얼른 공개해 돌려보내자고 의견을 냈고 항장 출신이라 유비군 내에서 입지가 좁았던 황권에게도 무척 정중하게 대해주었다. 마초도 유비가 가족들의 비극을 설명하면서 잘 대해주라고 하자 연민을 느껴서 친절하게 대하기도 했다.[18] 반면 힘 있는 사람, 호족 상대로는 불안하기에 외교는 아예 유비가 직접 맡았다.

본작에서는 원 역사의 관우의 북벌에 대해 왜 그랬어야 했는지 여러 화에 걸쳐 설명된다. 요약하자면 호승심에 무리한 북벌을 한 게 아니라 애초에 그때 말고는 방법이 없었던 것.[19]


[1] 유비-손권 동맹 파탄에 누가 더 큰 책임이 있냐는 논쟁은 지금까지도 큰 떡밥거리긴 하지만 일단 형주 사령관으로서 손권에 대한 관우의 대처가 결코 현명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2] 유장이 동주병을 전부 성도 주변으로 물려서 외곽 지역엔 정예 병력이 남아있지 않았다.[3] 이때 파군에서 알게 된 왕평을 유비에게 천거했다.[4] 이 고민의 가장 큰 이유가 된 것도 관우였다. 만일 관우가 번성 공방전 당시 우금과 3만 위군 포로를 무리하게 돌보지 않고 전부 죽였더라면 번성의 조인과 서황 등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지만, 관우는 끝까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패배했다.[5] 원역사에서 관우는 황충이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받자 대놓고 언짢아했었고(정사에도 나오는 기록이며 연의에서도 묘사될 정도로 유명한 일화다.) 그래서 유비도 나름 신경쓰고 있었다. 다만 정사에서도 황충의 활약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 불만을 가질 것이라고 적혀있었던만큼 황충의 활약을 봤기에 불만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6] 지금 퇴각하면 완성의 후음과 농민들은 어쩌느냐는 말에 고개를 떨군다.[7] 본래 관우는 유비는 절대 천자 자리를 욕심내지 않을 것이라고 서황한테 단언했으나, 연이은 기적에 생각이 바뀐 듯 하다. 다만 이는 관우가 의형의 천자 즉위를 지지하는 것 뿐이지 유비 본인은 아직 천자 자리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저 단언은 아직까진 사실이다.[8] 시대 불문 기병대장은 돌격할 최적의 타이밍을 잡는 역량이 무척 중요하고 작중 관우는 이를 틈을 본다고 표현한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틈이 안 난다면 관우는 아무것도 못하고 물러나야 한다는 말이 된다. 물론 관우는 지난 수십년의 경험을 토대로 버티다 보면 적들이 결국 틈을 보인다는 것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는다.[9] 이게 기가 막힌 것이 순간의 판단이 죽음을 부르는 상황에서 아무리 직접 나섰다고는 하지만 짧은 시간에 전예만 골라서 제압을 했다는 이야기다.[10] 염행의 창이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가 전포에 구멍이 뚫렸다. 즉, 까딱했으면 관우도 죽을 수 있었다.[11] 악진과의 교전 묘사를 보면 중년을 훨씬 넘긴 관우는 적진을 한참 휘저으면서도 쌩쌩한데 부하들이 먼저 지쳐서 돌격력이 약해진다.[12] 물론 관우의 힘이 힘이라 그 과정에서 전예의 갈빗대 몇개가 부러져서 몸이 동강난 걸로 착각할 정도로 아파했다.[13] 작중 유비는 이를 '우당탕탕'이란 수식어로 정리한다.[14] 염행, 곽회, 장합, 주령은 관우 혼자서 촉한군의 탱커 역할을 하는 걸 보면서도 관우를 직접 노린다는 시도는 못했다. 그나마 조홍이 나서려 했지만 총지휘관이 나섰다가 잘못 될 경우를 우려한 장합이 뜯어 말렸고 이후 완성 전투에서 염행이 시도했지만 그대로 관우에게 당했다.[15] 나폴레옹의 26원수 중에서 이게 전부 가능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16] 여기에 유비(곽선호)가 내리는 선택이 유비의 초심을 지키는 방향성이기 때문에 역으로 거병시부터 함께 해왔던 둘이 더욱 의심치 않을 가능성이 있다.[17] 물론 관우는 원 역사에서 유비에게 워낙 절대적 충성을 바친지라 당대인과 후세인들도 관우만은 예외로 취급한다.[18] 물론 마초의 신분이 변하는 건 아닌지라 제갈량이 다시 한 번 조치를 취해놓긴 했다.[19] 유비가 한중에서 조조에게 이긴 뒤 각 지역에서 봉기가 발생했기 때문에 관우는 이들과 호응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고, 반란은 다소 시들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혼란하던 와중 홍수로 인해 양번지역으로 직통이 되는 수로가 생겨 문빙의 견제를 받지 않고 바로 북진이 가능해졌기 때문. 또한 작중에서 나오듯 형주의 식자들 역시 손권의 배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북진을 미룰 명분조차 없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