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황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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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固倫和孝公主 고륜화효공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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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5년 2월 2일 |
사망 | 1823년 10월 13일(48세) |
부왕 | 건륭제 |
생모 | 돈비 왕씨 |
부군 | 삼등효민공 뉴호록 풍신은덕 (三等孝愍公 紐祜祿 豊紳殷德) |
자녀 | 아들 (요절) 복은 (양자) |
1. 개요
청 제6대 황제 건륭제의 막내딸이자 가장 총애한 자녀로, 자금성 익곤궁에서 돈비 왕씨의 딸로 출생했다. 10번째 공주였기 때문에 10공주라고도 불렀다.2. 출생
건륭 40년 1월 3일 (1775년 2월 2일), 익곤궁에서 돈비 왕씨의 소생이자 건륭제의 10번째 딸로 태어났다. 10공주는 돈비의 유일한 자식이고 당시 65세였던 건륭제에게는 늦둥이였다. 당시 건륭제에게 생존해 있던 아들들은 대부분 장가를 갔고, 남은 딸들은 44세였던 셋째 고륜화경공주와 17살이었던 아홉째 화석화각공주뿐이었다.[1]10공주는 건륭제를 닮은 용모와 강직한 성격으로 남장을 하고 아버지를 따라 사냥하며 과감하게 활을 당겨 화살을 쏘았다. 이러한 모습을 본 건륭제는 "네가 황자였다면 너를 태자로 세웠을텐데"라면서 개탄하였다고 한다. 보통 후궁 소생의 공주들은 화석공주(군왕과 같은 지위)로, 황후 소생 공주들은 고륜공주(친왕과 같은 지위)로 봉하는데 10공주는 10살에 화석공주, 12살이 되던 해에는 파격적으로 고륜화효공주로 봉하고 시집 가기도 전에 금정가마를 탈 수 있었다는 것 등을 보면 건륭제의 애정이 대단했다.
3. 결혼 후의 생애
건륭 54년 11월, 권신 화신의 장남 풍신은덕에게 하가했다. 《소정속록》이라는 책에 따르면 공주가 화신의 행적을 일찍이 전해 들은 바가 있으며 남편에게 자주 "황제인 아버지의 은혜를 받고 갚지 않았으나, 뇌물을 받으면 걱정이 될 것이다. 부를 잃을까봐 두렵다면 피곤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를 보아 공주의 식견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어느 겨울 아침, 풍신은덕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인들과 함께 눈 속에서 장난치며 "눈을 파헤치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화효공주는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이미 관례를 지낸 나이인데,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느냐?" 풍신은덕은 즉시 무릎을 꿇고 사과했고, 공주는 그를 일으키며 "이런 장난 말고 나와 함께 시서(詩書)를 읽자"고 다정히 타일렀다. 그만큼 화효공주는 여러 해 동안 건륭제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나 그 총애를 믿고 교만하지 않았고, 대내외적으로 유능하고 대범했기에 이복오빠 가경제도 그녀를 각별히 아꼈다. 가경제는 아끼는 동생이 하필 화신의 며느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건륭제 사후 화신이 탄핵을 당하자 화부(화신의 저택)의 절반과 유산을 남겨 화효공주에게 주었고, 공주의 간청대로 풍신은덕을 용서하고 화신은 목을 매 자결하게 하고 시신을 온전하게 넘겨주었다. 게다가 가경제는 가경 15년(1810년)에 내무부에 명하여 화효공주의 묘소와 원림을 조성하게 했으며, 그녀의 생활이 수입보다 지출이 많다는 것을 알고, 가경 19년(1814년)에는 특별히 은 6,000량을 하사하고, 이자를 받기 위한 대부업을 허락하여 생계를 보완하게 하였다.
화효공주와 풍신은덕은 결혼 후 금슬이 좋아 아들(건륭 58~60년 사이 출생)을 낳았는데 아이가 가경 2년에 요절한 후로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공주는 집안의 대가 끊길 것을 염려해서 남편에게 여러 차례 첩을 둘 것을 권유했고, 처음에는 풍신은덕이 공주가 자신을 떠보려줄 알고는 거절하였다. 그러나 공주가 자신에 대한 깊은 정으로 위한다는 뜻을 알고 비로소 첩을 들여서 근심을 풀게 하였다.
안타깝게도 풍신은덕은 평생 두 명의 딸만 낳았는데,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딸들은 각각 11살과 5살밖에 되지 않았다. 가경제는 자신의 여동생(화효공주)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는 것을 염려하여, 풍신은덕이 병사한 후, 공주에게 장례비로 은 5,000량을 하사하였고, 공주가 노후에 의지할 수 있도록 양자 ‘복은(福恩)’을 들여 풍신은덕의 대를 잇게 하였다. 복은은 화신의 조상이 물려준 작위인 ‘경차도위’ 세습 작위를 계승하였다. 한편, 화신의 양증손녀이자, 복은의 딸인 ‘뉴호록씨’는 애신각라 종실인 ‘혁순(奕純)’의 증손 ‘육후(毓厚)’와 혼인하였으며(가계: 혁순→ 재명(載銘) → 부함(溥咸) → 육후, 《애신각라종보》에 기록됨), 복은의 또 다른 딸 뉴호록씨는 정친왕 단화의 다섯째 아들 ‘정선(征善)’에게 시집갔다.(정선은 숙순(肅順)의 차남이며, 단화의 양자로 입적되었음.)
한편, 도광제 역시 고모를 매우 배려하여, 도광 원년(1821년)에 직접 명을 내려 화신이 몰수당했던 전당포 ‘항승당(恆升當)’을 공주에게 반환하였다. 화효공주는 시아버지 화신의 사후 허약하고 병치레 잦은 남편을 대신하여 10여년 동안 집안일을 처리했고, “가정 내외를 엄격히 통제하여 어렵게나마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편 풍신은덕이 병사하고 10여 년 후인 도광 3년 9월 10일에 49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도광제가 직접 영전에 제사를 지냈다.
화효공주의 무덤은 베이징시 하이뎬구 동북쪽 경계에 있는 융평향에 있는 30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