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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루이 다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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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654><colcolor=#fff> 프랑스 제35대 국민공회 의장
자크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출생 1748년 8월 30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825년 12월 30일 (향년 77세)
네덜란드 연합 왕국 브뤼셀
재임기간 프랑스 제35대 국민공회 의장
1794년 1월 5일 ~ 1794년 1월 20일
직업 화가, 정치인
학력 왕립회화조각학교
사조 신고전주의
수상 로마 대상
레지옹 도뇌르 훈장
정당

서명
파일:자크루이 다비드 서명.svg
1. 개요2. 생애3. 대표작4. 기타

1. 개요

파일:Napoleon Bonaparte Portrait.jpg
알프스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1804년
파일:Tennis Court Oath.jpg
테니스 코트의 선서, 1789년
프랑스신고전주의 화가.

2. 생애

1748년 8월 30일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얼굴에 종양이 있어 말하기 불편했고,[2] 이로 인해 어려서부터 조용히 그림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가 아직 어렸을 때 아버지가 결투를 벌이다 사망했고, 어머니는 그녀의 형제, 즉 그의 외삼촌들에게 그의 교육을 맡겼는데, 건축가였던 삼촌들은 그도 건축가가 되기를 바랬지만, 그는 이미 화가의 길을 택했고, 실제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해 가족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친척이자 화가였던 프랑스와 부셰는 그를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시켜 당대의 거장 조제프 마리 비엥에게서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는 여기서도 탁월한 기량을 선보이며 단연 두각을 나타냈지만, 당시 가장 권위있는 예술경연인 '로마 대상(Prix de Rome)'[3] 수상에는 두번이나 낙선했다. 이에 낙심한 다비드는 자살하겠다며 단식을 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절치부심하여 결국 1774년에는 로마 대상을 받는데 성공했다. 또한 낙선이 단순히 시간낭비는 아니어서, 이 과정에서 그 이후 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화풍을 완성하게 된다. 한편 로마 대상은 로마에서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왕립 회화 조각 학교에서 선정하는 것이었고, 로마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국비로 로마에 유학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었는데, 이에 따라 그는 이듬해인 1775년에 이탈리아로마로 유학하게 된다. 유학을 떠날 땐 "이미 죽은지 오래된 옛날 그림에서 뭘 배우겠냐?"며 투덜거렸지만, 막상 도착하자 가지고 간 스케치북 12권을 모두 채울정도로 열성적으로 르네상스의 고전적 그림을 공부하고 습득했는데, 이 스케치들은 이후 그의 평생에 걸친 그림들의 기본구도를 제공하는 원천이 된다.

1780년 프랑스로 귀국해 왕립 회화 조각 학교의 정회원이 되어 1781년 살롱에 그림을 출품한 뒤 루이 16세로부터 루브르 궁전의 아틀리에에서 생활할 권리를 받는 최고의 영예를 얻어, 이른바 성공한 미술가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50명 이상의 제자를 두었고, 왕실건물를 담당하던 부유한 관료의 딸 마르게리트 샤를로트와 결혼하여 많은 지참금을 받기도 했다. 부인과는 열 살 이상 차이가 났지만,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이 부부는 결혼한 다음해부터 네 명의 아이를 쉬지 않고 낳았다. 이후 혁명기에 다비드가 혁명파를 지지하자 마르게리트 샤를로트는 다비드와 이혼하게 되지만, 그가 로베스피에르 처형 이후 감금되자 재결합했고,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벨기에로 망명했을 때도 그를 따라갔다.

한편 그는 정부에게 호라티우스와 관련된 그림 의뢰를 받자, "로마에서만 이미 죽은지 오래된 옛날 로마 그림을 그릴 수 있지."라며, 장인에게 지원금을 받아 다시 제자 3명과 로마로 가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그려 1785년 9월 프랑스 살롱전에 출품했다. 혹자는 로마의 공화정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찬양하는 이 그림에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볼 수 있다."며 곧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 되었지만, 본인은 "정치적인 의미를 담아 그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1787년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1789년에는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체를 날라 오는 형리들>을 그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였던 그는 왕정에서 받은 모든 영예를 던져버리고 급진파였던 자코뱅에 가입해, 1794년 1월 5일부터 1월 20일까지 혁명 정부였던 국민 공회의 의장까지 올랐을 정도로 혁명에 깊게 관여한 거물 인사가 되었다.[4] 프랑스 혁명 때 문화재를 보호하고 혁명의 현장을 화폭에 담았던 것도 그가 혁명의 중요 인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왜 갑자기 왕정에서 받은 권리를 벗어던지고 온건파 지롱드파도 아닌 급진파 자코뱅에 가입해 혁명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그가 이미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독보적인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예술계를 관장하던 왕족과 귀족들은 그가 너무 어리다며 그의 앞길을 번번히 막았고, 이에 경연에서 한번 낙선했다고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격렬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다비드가 깊은 원한과 함께 보수적인 왕정을 예술적 진보를 위해선 마땅히 타도해야 할 악으로 본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특히 왕실이 대중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며 그의 역작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체를 날라 오는 형리들>의 전시를 막고, 이에 분노한 대중들의 항의로 이 그림이 전시회에 출품될 수 있었던 사건은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한편 다른 이들은 그가 로마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로마 공화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유학 이후 그의 그림에서 로마 공화정을 다룬 그림이 크게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로베스피에르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처형당한 이후에는 뤽상부르 궁전에 유폐되었다가, 1799년 나폴레옹의 집권 이후에 복권되어 그의 총애를 받아 궁정의 수석 화가로 활약하면서 나폴레옹의 활약에 로마풍의 신고전주의를 투영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말에 탄 나폴레옹의 영웅상을 그린 <생 베르나르 언덕을 넘는 나폴레옹> 그림도 이때 그린 것.[5]

예술적 · 정치적으로는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를 비롯하여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고전파 화가들은 모두 그의 가르침 및 영향에서 나왔다. 역사적 주제를 그린 작품은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우아 · 섬려한 것에 비해, 고대 조각이 지니는 조화와 질서를 존중하고 장대한 구도 속에서 세련된 선에 의하여 고대 조각 그대로와 같은 형태미를 만들어낸 것이 특징이다. 그가 왕정부터 프랑스 혁명자코뱅 정부, 나폴레옹 정부 모든 시대에 거물 미술가로 있으며 프랑스의 문화를 보존하고 키운 덕분에, 나폴레옹 시대가 끝나고도 프랑스파리는 유럽 예술의 중심지로 기능할 수 있었다.

1816년 나폴레옹의 퇴위 후 벨기에브뤼셀로 망명했다. 이때 프랑스 왕실에서는 그에게 사면[6]과 함께 궁정화가 자리를 제안하며 프랑스로 귀국해 달라는 요청을 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벨기에에서 그림 작업에 몰두했으여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1825년 12월 30일 77세의 나이에 브뤼셀에서 마차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묘지는 처음엔 생조스탱누(Saint-Josse-ten-Noode) 묘에 안치했다가, 이후 브뤼셀 에베르(Evere) 묘지로 이장했다. 그의 부인 샤를로트는 그를 프랑스로 이장하기를 희망했지만, 그가 국왕시해자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는데,[7] 결국 다음해 그녀 역시 사망해 프랑스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을 때, 이때 그들의 자녀들이 그의 심장을 가져다가 그녀의 무덤 근처에 매장했다.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서 프랑스 정부가 다비드의 묘지를 페르 라셰즈의 납골당으로 이장하는 것을 추진했으나, 브뤼셀시 측에서 강하게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3. 대표작

4. 기타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따르면 <마라의 죽음>을 그리게 된 데에는 "앙투안 라부아지에에 대한 복수심이 담겨 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 직전 라부아지에 부부로부터 부부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그의 집을 들락날락했는데, "라부아지에의 아내 마리 안 라부아지에와 불륜을 한다."는 오해를 받아 일방적으로 라부아지에로부터 화가로서는 모욕적인 폭언을 듣고,[9] 분노하여 그를 파멸시키려고 동분서주했다는 것. 이후 라부아지에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마라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을 이용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다룬 <마라의 죽음>을 그리고 공개하게 된다. 당연히 이 그림으로 인해 앙투안 라부아지에를 향한 비난이 집중되던 차에, 라부아지에가 징세청부인으로서의 죄가 있음이 밝혀져 그것으로 라부아지에가 처형되면서 다비드의 복수가 성공했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후 서프라이즈의 다른 코너인 <아주 사적인 리플레이>에서는 <마라의 죽음>을 "그의 시체를 직접 보고 그렸다."며 오류를 범했고[10], "오히려 공화파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미화했다."고 하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후의 그림도 마녀 같이 묘사했다."는 등, 다비드를 권력을 쫓는 소인배 같이 묘사했다. 하지만 서프라이즈의 내용에는 오류가 많은데, 우선 라부아지에의 아내 마리 안은 원래 다비드로부터 그림을 배운 제자였으니, 굳이 이제와서 초상화 때문에 오해를 살 일이 없다. 또한 다비드는 해당 초상화를 그린 댓가로 라부아지에로부터 엄청난 거액의 사례금을 받았다. 또한 라부아지에가 몰락하여 감옥에 갖힌, 그리고 처형당한 이후에도 마리 안은 남편에게 엄청나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에 불륜 논란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무엇보다 라부아지에가 처형당한 것은, 마라가 라부아지에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징세청부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 때문이었고, 이때 라부아지에 외에도 서른 명에 가까운 징세청부인들이 같이 처형되었다.

[1] 다비드 본인이 로베스피에르 사후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직접 거울을 보고 그린 자화상이다.[2] 자화상에는 상당히 순화되었지만, 실제로는 입이 상당히 비틀릴 정도로 얼굴이 비대칭이었다.[3] 1663년부터 시작된 예술 경연이었는데, 처음에는 회화와 조각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건축, 음악, 판화가 추가되었다. 다비드가 도전하던 시절에는 아직 음악과 판화는 없었다.(나폴레옹이 추가) 여담으로 프랑스에서는 정말 권위있는 예술경연이었지만, 정작 이 상의 수상자들중에 일반인들도 알만한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프랑스 미술을 선도한 화가들이 기존 미술에 대립각을 세운 도전적인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듯 하다. 회화에서는 앵그르 정도가 그나마 유명한 사람이며, 음악은 그래도 좀 많아서 베를리오즈, 비제, 드뷔시 등이 유명하고, 구노마스네는 특정 곡을 통해 이름 정도는 알려진 정도. 결국 이 상은 68 운동 와중에 "틀에 박힌 예술가나 양성하는 로마상 따위는 집어치워라"라는 주장을 받아들인 당시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에 의해 폐지된다.[4] 물론 그 당시 국민공회 의장은 14일마다 새로운 의장이 뽑히는 제도라 지도자급이 아니어도 오를 수 있던 자리였다. 자코뱅 정부의 진짜 지도부는 로베스피에르의 공안 위원회.[5] 나폴레옹은 시간이 날 때마다 작업실을 찾아와서 구경을 하곤 했는데, 이 그림을 보고선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자네를 존경한다."라고 말했을 정도.[6] 개혁적인 7월 왕정이나 프랑스 제2제국도 아닌 부르봉 왕정복고 시절이었음에도 왕실에서 그를 사면한 것을 넘어서 궁정화가 자리를 제안한 것 자체가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는 의미이다. 훗날 샤를 10세가 되는 아르투아 백작만큼은 아니지만 당시 국왕 루이 18세 역시 혁명 및 혁명 잔존세력에 대한 증오는 하늘을 찔렀음에도 말이다.[7] 물론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루이 18세는 그에게 궁정화가 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을 했으므로, 진짜 이유는 그가 루이 18세의 제의를 거부한 것이 밉보여서일 것이다.[8] 밴드 Have a Nice Life의 앨범인 Deathconsciousness의 앨범 커버로 쓰였다.[9] 당시 화가라는 직업은 천대를 받는 직종이었던 데다 라부아지에는 자기보다 15살이나 어린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는 애처가였으니 저런 폭언을 할 만도 하긴 했다.[10] 마라 항목에서 보면 마라가 매장된 후 그린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