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38><colcolor=#fff> J. F. C. 풀러 J. F. C. Fuller CB, CBE, DS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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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존 프레더릭 찰스 풀러 John Frederick Charles Fuller | |
출생 | 1878년 9월 1일 |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치체스터 | ||
사망 | 1966년 2월 10일 (향년 87세) | |
영국 콘월주 폴머스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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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군인, 군사학자 | |
학력 | 멜번 칼리지 영국육군사관학교 | |
복무 | 영국 육군 (1899~1933) | |
최종 계급 | 소장 | |
참전 | 보어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
1. 개요
영국의 군인,2. 생애
치체스터에서 영국인 아버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독일 제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4세때 귀국해 멜번 칼리지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졸업 후 졸업 후 소위로 임관했다.[1] 옥스퍼드셔경보병연대에 배치되어 보어 전쟁에 투입되었고 1900년 중위로 진급했다.전후 인도에서 복무하던 도중 장티푸스로 인해 귀국했다. 회복 후 제2사우스미들섹스연대, 제10미들섹스연대에 배치되었고 참모학교를 수료하고 참모직에서 복무했다.
1차 대전 당시 제7군단 참모로 있다가 1916년 기관총부대로 이동했다가 전차부대로 이동했다. 1917년 캉브레 전투의 작전을 담당했고 1918년 공세 당시 전략을 구상했다. 대규모 전차 부대로 적의 사령부와 통신망을 비롯한 "신경망"을 마비시키는 게 최선이라는 요지의 작전계획인 1919 계획 작성했지만 전쟁이 끝났다. 대령으로 진급하고 제자인 바실 헨리 리델 하트와 함께 군사이론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1923년 참모학교 교관으로 재직하고 1차 대전 시절을 바탕으로 기동전을 주장하게 된다. 풀러는 자신이 구상한 1919 계획을 바탕으로 "전략적 마비"(Strategic Paralysis)를 주장했다. 1935년 소장으로 예편하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스페인 내전을 지켜봤으며 자신의 이론을 강화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파시즘을 지지하기 시작해 오스왈드 모슬리가 당수로 있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당원이였으며 나치에 대해서 긍정적인 발언도 꽤 한 편이였다. 그래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앨런 브룩,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를 통해 나치를 지지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발언을 했다. 전후에도 군사이론서를 저술하다가 1966년 사망했다.
[1] 그의 별명은 보니였었는데 풀러가 사관후보생 시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심취해 나폴레옹의 이름을 따 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