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바스 내전 (4차 피트나)의 대략적인 전개
1. 개요
아랍어 الفتنة الرابعة영어 Fourth Fitna
제4차 무슬림 내전(811 ~ 827년)이라고도 한다. 압바스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의 사후 그의 서자인 장남 알 마문과 적자인 차남 알 아민 간의 제위 계승 분쟁으로 촉발하여 제국 각지의 지방 세력들이 자립하며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호라산의 알 마문이 바그다드의 알 아민을 격파하고 칼리파가 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타히르 왕조가 세워진 이란 등 여러 지방들이 사실상 독립하며 압바스 왕조의 분권화가 시작된다. 또한 알 마문의 정치적 계산으로 이맘 알리 알 릿다가 희생되며 시아파 (열두이맘파)의 분노가 축적된다.
2. 배경: 하룬 알 라시드의 아들들
천일야화와 구당서에 등장하고 샤를마뉴와 동맹해 동로마 제국을 압박할 정도로 위세를 떨친 하룬 알 라시드는 왕권 강화를 위해 신하들을 잔혹히 숙청하면서도 아들들을 끔찍이 아꼈다. 786년 9월, 하룬의 즉위 당일에 태어난 장남 압둘라 (알 마문)는 비록 호라산[1] 출신 페르시아인 노예 여성인 마라질의 소생이었지만 길조로 여겨졌고 총명했기에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불과 6개월 후인 787년 3월에는 하룬과 외가 및 친가 양쪽으로 4촌인[2] 왕비 주바이다 빈트 자파르가 적자인 무함마드 (알 아민)을 낳았다. 생모 마라질이 출산 얼마 후 사망했기에 알 마문은 동생 알 아민과 함께 계모 주바이다에 의해 양육되었고, 후일 칼리파에 오른 후에도 그녀를 친어머니처럼 모셨다. 그외에 하룬은 789년에 노예 여성 카시프에게서 알 카심, 796년에는 소그드인 노예 여성 마리다에게서 무함마드 (알 무타심) 등의 아들을 얻었다.792년 하룬은 알 아민을 후계자로 선포했고, 799년에는 알 마문을 제2의 후계자로 삼았다. 국정 운영에 있어 하룬은 호라산 출신 페르시아 인들을 대거 등용했다. 알 마문과 알 아민 형제 역시 호라산 출신 페르시아인 재상들을 배출한 바르마크 가문 소속의 자파르 빈 야흐야, 알 파들 빈 야흐야 형제에게 교육을 받았다. 다만 바르마크 가문 대신 아랍화된 페르시아계 개국 공신 세력인 후라사니야 (아브다 앗 다울라)[3]와 친분을 쌓은 알 아민과 달리 알 마문은 계속해서 바르마크 가문과 어울렸다. 802년 메카 성지 순례를 떠나게 된 하룬은 세자 알 아민을 바그다드에 남겨두며 그의 후계자 알 마문을 호라산 부왕에 봉했고, 삼남 알 카심을 제3의 후계자로 지목하며 자지라 및 동로마와의 국경지대 (앗 타가르) 총독에 봉했다. (메카 협정)[4] 803년 1월, 바그다드로 돌아온 하룬은 왕권 확립을 위해 바르마크 가문을 숙청했다.
이후 후라사니야 귀족들이 중요한 지방 총독들을 맡으며 바그다드의 중앙 통제력이 강화되었는데, 특히 선조의 고향으로 인식한 호라산에 대해 간섭하며 자신들의 봉급용으로 높은 세금을 거두었다. 대표적으로 알리 빈 이사 빈 마한은 내정에도 실패하여 카와리즈 반란이 벌어지는 등 혼란이 일었다. 그러자 호라산의 아랍 및 페르시아 인들은 불만을 품었고, 바그다드에 격렬히 항의했다. 이에 805년 4월, 하룬이 직접 라이까지 나아가 알리를 소환했다. 하지만 알리가 3천만 디나르 금화에 달하는 선물을 바치자 하룬은 그를 유임했을 뿐만 아니라, 멀리까지 배웅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이에 깊게 실망한 사마르칸트의 아랍인 태수 라피 이븐 알 라이트는 806년, 현지인 및 튀르크 유목민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하룬은 즉각 알리를 해임하고 발흐 출신인 하르마타 빈 아얀을 임명했다.
다만 이후로도 반란이 지속되자 808년 말엽, 직접 토벌군과 함께 출정한 하룬은 동행한 아들 알 마문을 선발대와 함께 메르브로 보낸 후 자신은 후방인 투스에 머물렀다가 809년 3월에 그곳에서 병사했다. 뒤이어 알 아민이 바그다드에서 여론의 지지와 함께 칼리파로 즉위했다. 동시에 알 마문이 메르브에 당도해 802년의 메카 협정의 의거해 호라산 부왕으로 등극하자 라피는 그에게 항복하고 사면을 받았다. 이후 알 마문은 잔여 반란 세력을 토벌하려 했으나 알 아민은 형의 야심을 경계하며 병력 대부분과 호라산의 국고를 바그다드로 불러들였다. 또한 알 아민은 부왕에 의해 감금되었던 알리를 석방해 친위대를 맡겼고, 투스에서 원정군 및 하룬의 시신과 함께 수도로 돌아온 재상 알 파들 이븐 알 라비를 중용했다. 알 파들과 알리를 필두로 한 후라사니야 귀족들은 호라산의 세수를 중앙 통제 하에 둘 것을 주장했다.
2.1. 알 아민 vs 알 마문
호라산에 대한 세수 통제는 802년의 협정을 어기는 것이었지만, 후라사니야 귀족과 이라크 민심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알 아민은 그대로 추진했다. 여기에 알 아민은 자지라 총독이던 이복동생 알 카심을 해임했고, 후계자 작위도 박탈한 후 바그다드에 연금했다. 810년 들어 알 아민은 자신의 아들 무사를 후계자로 봉했고, 메르브에 사절을 보내 알 마문의 라피에 대한 사면을 비판하며 호라산 서부 태수들의 연공 및 복속을 요구했다. 여기에 우편 관세를 포함한 호라산의 수조권 이양 및 세수의 이라크 운송을 요구했고, 알 마문을 바그다드로 소환했다. 이미 호라산 부왕 및 후계자 작위를 보장한 메카 협정이 완전히 깨진 상황에서 알 마문이 알 카심처럼 바로 해임되거나 감금되지 않은 것은, 호라산이 자지라에 비해 이라크에서 멀었기 때문이다. 알 마문은 자신의 입지가 동생에 비해 불안정하다고 여겨 항복을 고려했다.하지만 바르마크 가문의 후원을 받던 페르시아인 관료 알 파들 빈 사흘은 호라산의 여론을 모아 대적할 것을 제안했고, 알 마문은 그를 중용했다. 알 파들 빈 사흘의 조언에 따라 알 마문은 세금을 인하했고 재판을 직접 처리했으며, 자치와 특권을 약속하며 호라산의 아랍 및 페르시아인 귀족들을 포섭해 지지를 얻어냈다. 그의 지지자들은 또한 60여년 전 호라산에서 시작된 압바시야 혁명 (3차 피트나) 당시의 일화들을 상기시키며 혁명 성공 후에도 전리품이나 권력을 나눠주지 않은 억압적인 정부에 호라산을 내주지 말자며 정의 구현을 위한 궐기를 촉구했다. 각각의 강경파 재상들의 영향으로 형제 간의 불신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알 마문은 금요 예배와 주화에서 칼리파 알 아민의 이름을 지웠다. 그러자 810년 11월, 알 아민은 알 아민의 후계자 작위를 박탈하고 자신의 아들 무사와 압둘라를 후계자로 봉했다.
알 마문도 곧바로 스스로 종교 지도자 성격이 강하면서 (호라산에서 시작된) 압바시야 혁명 당시 선조들이 취했던 직함인 '이맘'[5]으로 선포하며 맞섰다. 811년 1월, 알 아민은 원로 대신들과 여러 총독들의 만류에도 알 마문을 호라산 부왕에서 해임한다고 선포했다. 동시에 그는 알리를 호라산 총독에 봉하며 후자에게 후라사니야 귀족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4만 대군을 주어 무력으로 명령을 이행하게 했다. 알리는 바그다드에서 출정하며 알 마문을 압송할 은 사슬을 챙겼다 한다. 압바스 대군의 출정은 호라산에 혼란을 야기했고, 알 마문은 위구르 제국으로 망명할 고민까지 했다. 다만 호라산의 페르시아인 귀족이자 알리에게 감금되어 고초를 겪었던 애꾸눈 장군 타히르 이븐 알 후사인은 자살 임무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라산에서 최대한 끌어모은 4-5천의 기병대와 함께 출정했다.
3. 전개
타히르는 이라크에서 호라산으로 진입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라이 (레이, 현 테헤란)로 나아갔다. 알리의 토벌군 역시 당시의 주요 도로를 따라 라이에 이르렀고, 양측은 811년 5월 1일에 전투를 벌였다.- [세력별 주요 등장 인물 (펼치기 · 접기)]
- * 주요 등장 인물 (카이스계) [^^]
- 왈리드 2세 744
- 마르완 2세 750
- 유수프 이븐 우마르 앗-타카피 744
- 야지드 이븐 우마르 알-파자리 750
- 하우타라 이븐 수하일 알-바힐리 750
- 나스르 이븐 사야르 알-라이티 알-키나니 748
- 알 하리트 빈 수라이즈 앗-타미미 746
- 압둘말리크 빈 무함마드 빈 아티야
- 압둘말리크 빈 마르완 빈 무사 빈 누사이르 750 전향
- 알 카심 이븐 우마르 앗-타카피
- 나드르 이븐 사이드 알-하라시
- 아미르 빈 두바라
- 나바타 알-칼라비 748
- 압둘라 빈 마르완 750
- 주요 등장 인물 (예멘계)
- 야지드 3세 744
- 이브라힘 이븐 알 왈리드 745
- 술라이만 빈 히샴 745 전향
- 압둘라 빈 우마르 745 전향
- 만수르 이븐 줌후르 알-칼비 745 전향
- 칼리드 알 카스리 745
- 야지드 이븐 칼리드 알-카스리 745
- 무함마드 이븐 칼리드 알-카스리 749 전향
- 하프스 이븐 알 왈리드 알-하드라미 745
- 주다이 알-키르마니 747
- 주요 등장 인물 (하쉬미야)
- 주요 등장 인물 (쉬아)
- 자이드 빈 알리 740
- 야흐야 빈 자이드 743
- 압둘라 빈 무아위야 747
- 샤리크 이븐 샤이크 알-마흐리 751
- 자파르 앗 사디크
- 주요 등장 인물 (카와리지)
- 앗 다하크 이븐 카이스 앗-샤이바니 746
- 술라이만 빈 히샴
- 만수르 이븐 줌후르 알-칼비 751
- 압둘라 빈 우마르 750
- 주요 등장 인물 (이바디)
- 알 무크타르 이븐 아우프 알-아즈디 747
- 압둘라 이븐 야흐야 알-킨디 747
4. 전후
5. 평가
일부 학자들은 4차 피트나의 발단을 알 아민과 알 마문 형제의 아랍, 페르시아계 모친에서 기인한 아랍 민족주의와 이란 민족주의 간의 대결로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로 알 마문의 페르시아인 지지자들은 '우리 누이의 아들'이란 선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 아민과 알 마문 모두 각자의 아랍계 귀족들을 열심히 포섭했고, 호라산의 아랍계 및 페르시아계 귀족들은 힘을 합쳐 자신들의 자치권을 지키려 알 마문을 열렬히 지지했다는 것이 현재의 대다수 관점이다.주도권을 쥔 세력이 경쟁 세력을 먼저 토벌하려 했다가, 오히려 반격을 당해 패망했다는 점에서 국공내전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