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6년 포르투갈 쿠데타 Golpe de Estado de 28 de Maio de 1926 28 May 1926 coup d'état | |
| 기간 | |
| 1926년 5월 28일 | |
| 장소 | |
| 포르투갈 전역 | |
| 원인 | |
| 소련의 지시 |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 포르투갈 정부 | 쿠데타군 |
| 지휘관 | |
| 베르나르디누 마샤두 안토니우 마리아 다실바 | 멘드스 카베사다스 고메스 다코스타 시넬 드코르데스 |
| 병력 | |
| -명 | -명 |
| 결과 | |
| 쿠데타군의 승리 | |
| 영향 | |
| 포르투갈 제1공화국의 멸망 포르투갈 국가독재 출범 | |
1. 개요
1926년 5월 28일 포르투갈에서 발생한 군사 쿠데타로 실행자들에 의해 국민 혁명 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군인과 민간인이 수행한 쿠데타로,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포르투갈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2. 배경
1910년 10월 5일에 수립된 포르투갈 제 1공화국은 빠르게 불안정과 제도의 점진적인 쇠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920년부터 1926년까지 23개 정부가 교체되는 등 현기증 나는 속도로 정권이 교체되었고, 폭탄 테러와 강력한 무정부주의 생디칼리즘 활동으로 인해 정권의 임박한 종말을 예고하는 반란 전 분위기가 나라에 조성되었다. 1921년 10월 19일, 군과 해군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피의 밤’으로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고, 당시 총리 안토니우 그란주를 비롯한 주요 공화정 인사들이 살해되었다. 이후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은 더욱 심화되어, 1924~1925년에 폭력 시위, 폭탄 테러, 군 반란이 빈발했다. 1924년에는 항공부대 반란과 군·헌병 간 충돌, 좌파와 파시스트 세력의 움직임이 잇따랐으며, 여러 차례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1925년 4월 18일에는 장성급 장교들이 가담한 대규모 군사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이어 7월에도 또 다른 군사봉기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는 권위와 통제력을 잃고 반란자들이 곧 풀려나는 등 무기력했다. 이후 군 내부의 불만과 쿠데타 음모가 계속 이어졌으며, 고메스 다 코스타와 멘데스 카베사다스 등 주요 군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 재건’을 명분으로 한 군사행동을 준비했다. 1925년 말, 안토니우 마리아 다 실바 정부가 들어섰지만 이미 체제는 붕괴 직전에 있었고, 국민은 질서와 안정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군사독재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포르투갈 내에서도 군사정권에 대한 기대가 커졌고, 1926년 2월 1일의 알마다 반란 등 연속된 쿠데타 시도 끝에 제1공화국은 몰락 직전에 이르렀다.3. 쿠데타 발생
1926년 5월 28일의 쿠데타는 안토니우 마리아 다 실바 정부의 위기 속에서 시작된 제1공화국 내 또 하나의 군사반란이었다. 정부는 정치적 무능과 담배 전매 문제로 신뢰를 잃고, 5월 25일 의회 대표권을 포기하면서 사실상 의회제의 기반이 붕괴되었다. 이미 고메스 다 코스타 장군에게 쿠데타를 주도해달라는 요구가 이어지고 있었고, 마침 5월 28일 브라가에서 가톨릭 보수 인사들이 모이는 마리아회 대회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그가 그곳으로 향하자 반란이 임박했음이 명확해졌다.27일 쿠냐 레알이 브라가에서 민주당과 기존 정치세력을 강하게 비판하는 연설을 한 뒤, 밤 10시에 고메스 다 코스타가 도착해 쿠데타 지휘를 맡았다. 28일 새벽 6시, 군사반란이 시작되어 브라가에서 리스본으로 향하는 행진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1922년 이탈리아의 로마 진군을 연상시켰다. 반란은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어 5월 29일 리스본 주둔군이 쿠데타에 합류했고, 멘데스 카베사다스와 가마 오초아, 하이메 바프티스타 등이 구성한 ‘공공구원위원회’가 성명을 발표했다. 그날 오후 정부는 무력하게 사임했고, 5월 30일 대통령 베르나르디누 마샤두는 멘데스 카베사다스에게 새 정부 구성을 맡겼다. 카베사다스는 총리와 모든 장관직을 임시로 겸임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리스본의 행정권 역시 장악되었다. 이어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의회정치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고, 마샤두는 사임하며 국가 원수를 카베사다스에게 넘겼다. 이후 고메스 다 코스타는 리스본으로 진군하며 6월 1일 카베사다스, 가마 오초아와 함께 삼두정치를 제안했으나 오초아가 탈퇴했다. 이 쿠데타는 단순한 군사반란을 넘어 공화주의자, 보수파, 군국주의자, 왕당파 등이 연합한 국민적 운동으로 발전했으며, 대부분의 국민이 이를 지지했다. 6월 3일 고메스 다 코스타의 군대가 저항 없이 리스본 근교에 도착했고, 카베사다스는 새 내각을 구성해 전쟁·해군·식민지부를 고메스 다 코스타에게, 재무부를 살라자르에게 맡겼다. 그러나 고메스 다 코스타와 카베사다스의 권력 분점은 불안정했고, 살라자르는 리스본 입각을 거부하고 코임브라로 돌아갔다. 6월 7일 고메스 다 코스타가 공식적으로 취임하고 리스본 자유대로에서 1만5천 명의 병력이 참여한 대규모 개선행진이 열리며 ‘리스본 진군’이 완성되고, 군과 민 양면에서 새로운 정권이 확립되었다.
4. 결과
권력이 멘데스 카베사다스와 고메스 다 코스타 두 사람 사이에서 분열된 이중구조와 다양한 세력이 섞인 불안정한 연합체로 인해 정부는 공통된 방향을 갖지 못했다. 온건한 공화파였던 카베사다스는 헌정질서를 유지한 채 민주당의 영향만 제거하려 했으나, 고메스 다 코스타와 오스카르 카르모나 등 보수·군사 지도자들은 그를 무능하다고 보고 제거를 결정했다. 1926년 6월 17일, 쿠데타 주도자들이 삭카벵에서 회의를 열고 카베사다스를 강제로 사임시킨 뒤 고메스 다 코스타가 대통령과 총리를 겸임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새 내각은 불안정했고 6월 19일 새 정부를 구성했으나 7월 초 연이은 인사 혼란과 내각 붕괴로 혼란이 심화되었다. 결국 7월 8일, 보수 세력을 이끄는 카르모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메스 다 코스타를 체포하고 아소르스 제도의 앙그라 두 에루이즈무로 유배시켰다. 이로써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고메스 다 코스타는 몰락했고, 7월 9일 카르모나가 새 정부를 수립하며 정권은 보수·국민주의 세력의 수중에 완전히 들어갔다. 이후 정권은 점차 파시즘적 성향을 띠며 스페인의 프리모 데 리베라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체제를 모방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베르나르디누 마샤두 포르투갈 대통령은 1926년 5월 30일 멘드스 카베사다스를 정부수반으로 임명하고 카베사다스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이후 1926년부터 1928년까지 군사독재가 이어지다가 1928년 안토니우 오스카르 드프라고주 카르모나가 대통령이 되었고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를 총리로 임명했는데, 살라자르의 권세가 드높아지면서 군사정권의 실력자들도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