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08 21:32:47

히베이랑프레투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연방 공화국의 도시
‎Ribeirão Preto

히베이랑프레투
파일:히베이랑프레투 시기.png
AÇÃO DOS BANDEIRANTES
<colbgcolor=#239f40><colcolor=#fff> 지역 상파울루
면적 650.9km²
인구 728,400명[A]
인구밀도 1,119명/km²[A]
HDI 0.800[3]
시간대 UTC-3 (BRT)

1. 개요2. 역사3. 경제4. 관광

1. 개요

브라질 상파울루주의 도시로, 1856년 6월 19일 설립되었다.

축구단 보타포구 FC[4]의 연고지이며, 교육기관으로는 히베이랑프레투 대학교가 소재하고 있다.

2. 역사

히베이랑프레투는 1856년 6월 19일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에서 좋은 목초지를 찾아 온 농부들이 세운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주민들 중 아프리카 노예들이 많아서 포르투갈어로 검은 개울을 의미하는 히베이랑프레투라고 이름이 붙였다. 히베이랑프레투 지역의 비옥한 토양은 높은 작물 생산성을 가능하게 했다. 처음에는 목초지, 가축, 그리고 자급자족 농업이 주요 농촌 활동이었다. 그러나 1870년대에는 커피 재배가 본격화되면서 히베이랑프레투에 부와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히베이랑프레투는 1880년대에 세계 최대 커피 생산지가 되었다.

"녹색 금"이라고도 불리는 커피는 히베이랑프레투에 "골드러시"를 불러일으켰고, 세계 각지에서 노동자와 모험심 넘치는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이즈음 브라질에 노예제가 폐지되자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일본에서 온 이민자들이 노예 대신 커피를 수확하였다. 특히 일본인들이 히베이랑프레투에 많이 이민와서 일본 이민의 요람으로 여겨졌다. 지역 정치는 광대한 토지와 커피 재배자들의 경제적 집중에 힘입어 권력을 행사했지만, 1918년의 극심한 서리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10년대 후반에 발생한 공급 위기로 인해 생산을 다각화해야 했다. 특히 1929년 일어난 대공황은 커피 농사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그래서 히베이랑프레투는 신재생 연료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는 특히 히베이랑프레투와 같은 대규모 사탕수수 생산 지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이 지역 사탕수수 농장과 제분소의 높은 생산성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3. 경제

원래 히베이랑프레투는 커피를 재배했지만, 대공황 이후 사탕수수를 주로 재배하고 있다. 특히 사탕수수 붐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브라질의 캘리포니아"라고 불렸던 이 도시에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가져왔다. 히베이랑프레투의 주요 생산품은 의료용 재료, 치과용 재료, 동물 사료, 육류, 유제품, 섬유, 철강, 가구, 건축 자재, 농약 , 의약품, 그리고 맥주이다.

브라질의 주요 영화 중심지로, 상파울루 영화위원회 산하 카이저 필름 스튜디오가 1만 3천 제곱미터가 넘는 부지에 시청각 제작을 위한 완벽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4. 관광

  • 페드루 2세 극장 (Theatro Pedro II) : 1930년 10월 8일 개관한 극장으로 뛰어난 음향 시설 덕분에 라틴 아메리카 최고의 극장 중 하나로 여겨진다.


[A] 2022년 기준.[A] [3] 2010년.[4] 리우데자네이루보타포구 FR과는 다른 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