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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colcolor=#000000,#ececec>1910년 6월 16일 |
페루 카스티야 | |
사망 | 1977년 12월 24일 (향년 67세) |
페루 리마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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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50대 대통령 |
1968년 10월 3일 ~ 1975년 8월 30일 |
1. 개요
페루의 제50대 대통령(1968~1975)이다. 1968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1975년 쿠데타로 물러나고 1977년 사망했다. 20세기 후반 중남미에 세워진 군사정권은 대개 우익 민족주의 성향이었으나, 벨라스코의 군사정권은 볼리비아의 알프레도 오반도 정권(1969~1970), 후안 호세 토레스 정권(1970~1971), 파나마의 오마르 토리호스 정권(1968~1981)과 함께 몇 안되는 좌익 민족주의 성향의 군사정권이었다.2. 생애
2.1. 집권 이전
1910년 페루 북부 피우라 인근의 해안 도시 카스티야의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1930년 초리요스 사관학교(Escuela Militar de Chorrillos)에 수석 입학하여 4년 후 역시 수석 졸업하고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1937년 중위로 진급했다. 1940년 대위로 진급하고 같은 해 미주혁명인민동맹(APRA)의 활동가 콘수엘로 곤살레스 포사다(Consuelo Gonzales Posada)와 결혼했다.1945년 소령, 1949년 중령, 1955년 대령, 1959년 준장, 1965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52년 사관학교 교장이 되어 학교 개혁을 담당했다.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제5사단 소속 보병대대의 대대장을, 1955년부터 1958년까지 보병학교 교장을,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제2경사단장을 역임했다. 1962년 주프랑스 대사관의 국방무관으로 파견되었다가 1964년 귀국 후 제1군구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68년 1월 육군총사령관 및 페루군 합참의장으로 임명되었다. 1968년 10월 3일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민선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 대통령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2.2. 집권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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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발행된 페루의 우편 일하는 자에게 토지를(Tierra para el que la trabaja) |
벨라스코는 집권 첫 해부터 외국계 회사를 국영화했다. 1968년 미국계 석유회사인 IPC를 시작으로 1969년 국제 전신·전화회사(ITT), 1970년 체이스 맨하탄 은행[1] 등을 무상몰수하여 국영화했다. 이 조치는 미국의 반발을 사서 향후 양국 정부간 첨예한 대립을 일으켰다. 전임 벨라운데 정권 대에 본격적으로 확장된 수입대체산업화는 더욱 강화되었다. 외국의 투자는 제한되었으며 참여 시 현지에 이익을 재투자하는 것을 의무화했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조금 및 저리 융자를 확대했다. 또한 기존의 경공업 위주의 제조업을 벗어나 내수 중심의 중공업과 소비재 산업을 육성하는 것을 강조했다.
1969년 6월 24일 농지개혁법을 공포하여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농지개혁법의 주요 목표는 대지주와 중소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이 소유한 협동조합을 구성하고, 전통적인 농민 공동체를 재조직하고, 농민들의 공동 노력을 통한 농산업을 형성하는 것 등이었다. 개혁법 공포 이틀 후 북부 해안지대의 사탕수수 대농장에 군대를 보내어 몰수하는 것을 시작으로 1979년 6월까지 1만 5,826개 필지로 나뉜 최소 900만 헥타르의 토지를 수용하여 37만 농가에 분배했다. 이것은 전임 벨라운데 정부의 온건한 농지개혁 결과를 압도하는 것으로 당시 정부는 546개 대농장으로 나뉜 100만 헥타르를 수용했다. 이렇게 수용된 토지는 대한민국이나 일본처럼 농민들 소유로 분배되어 자영농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약 1만 5천개 필지) 집산화를 위한 1,708개 협동조합을 조직하는데 사용되었다. 사유지를 몰수당한 지주들은 20~30년 만기의 연이율 4~6% 채권으로 보상을 받았다.
원주민의 지위 향상을 위한 문화정책을 펼쳤다. 우선 시골과 농어촌 지역에 학교를 대대적으로 증설하였고, 그 과정에서 케추아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였다. 가장 중요한 문화정책은 1975년에 매년 5월 27일을 원주민 언어의 날(Día de las Lenguas Originarias)로 지정한 것이다.[2] 그 이전까지 소외되었던 많은 페루 원주민들 및 몰라토들은 알바라도의 담론에 호응하여서 더 이상 이전만큼 백인에게 기가 죽지 않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제3세계 노선을 걸을것을 천명했으며,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소련과 관계를 개선하되 공산주의자들은 강력히 탄압하였으며 미국과의 관계는 적성국 수준으로 악화되었으며,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게 되나 1973년에 미주개발은행으로부터 기금을 대출받으면서 경제제재의 여파에서 벗어날듯 보였다. 한편으로는 페루군의 현대화에도 신경을 써서 소련과 프랑스로부터 무기를 대규모로 구입하기도 했다. 1975년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가 페루로부터 얻은 아리카(Arica) 일대를 볼리비아의 다른 영토와 교환하는 식으로 칠레-볼리비아 국경분쟁을 종결하려고 하자 전쟁도 불사하겠다면서 강경하게 반발했다.[3]
벨라스코 집권기 산업화 정책은 단기적으로 도시의 제조업 성장과 중산층 확대에 기여했지만, 열악한 기술 수준과 생산성을 향상하는데 실패했다. 외국 자본에 대한 의존을 떨쳐버리려고 하였으나 자본재를 자급할 수는 없었으므로 외산 자본재에 제조업이 의존하는 행태는 지속되었다. 오히려 국유화를 단행한 업종 가운데 어업과 제당을 비롯한 상당수 업종은 미숙한 운영으로 인해 쇠락하기까지 하였다. 야심작인 토지개혁도 단기적으로 농업 생산성은 대체로 하락하거나 정체했고 특히 곡물과 사료작물의 생산량이 감소했다. 장기적으로도 일부 지역에서 농민 소득이 증가하기는 했으나 전반적인 농업 생산량 증가는 달성하지 못했으며, 현금작물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벨라스코가 추진하던 산업화의 자금 조달도 제약되었다.
또한 토지개혁 및 국유화 과정은 명목상 유상몰수였으나 그 실질은 이미 재정 압박이 심대한 상황에서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강제적인 채권 교환의 형태를 띠었고, 더욱이 이미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상황에서 액면가 기준으로 채권을 상환하기로 했으므로 지주들과 외국 회사의 호응이 적었다.[4] 이렇게 단기간에 지나치게 원대한 사업들을 벌여 기초 경제체력이 부실해지고 대외고립이 심각해졌는데, 1973년 오일쇼크로 인한 대외수지 악화와 인플레이션 증가까지 겹치며 벨라스코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벨라스코의 지나친 급진 정책은 국내의 우파 세력과 미국의 거센 반발을 샀으며 이러한 반발을 언론사 인수를 통한 언론 통제로 막으려 했지만 전 언론을 손에 집어넣을때는 오일쇼크 시기였기 때문에 인기를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2.3. 몰락
오일쇼크를 전후해서 생활비 상승으로 지지율이 추락하여 파업과 시위가 늘어났으며 더군다나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단행해야될 정도로 건강도 나빠졌기 때문에 정국장악력이 이전같지 않았다. 1975년 2월 3일 경찰들이 일으킨 리마 사태(Limazo)가 리마의 역사적 중심부가 휩쓸었는데 사망자만 86명이 나오는 시가전이 벌어진 끝에 5일 진압되었으나 정권의 분열은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1975년 8월 29일 온건파 군인 총리였던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무데스의 무혈 쿠데타로 실각했다. 정계에서 은퇴 후 고향에 은거했는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1977년 12월 24일 리마 시내의 군사병원에서 별세했다.2.4. 여담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정치인 중 하나이다. 아직 사관생도였던 1974년 아야쿠초 전투 승리 150주년을 기념하여 페루를 방문한 베네수엘라 사절단 가운데 차베스가 있었는데 벨라스코의 연설과 이상에 감화되었다고 한다.후안 알바라도 벨라스코는 독재 정권이었다는 점과 경제 부진으로 많은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실수와 실책이 있었음에도 페루의 근대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또한 그 동안 소외되었던 소농과 원주민들의 지위가 획기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페루 사회를 통합하는데 어느정도는 기여했고, 또한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페루 내전에서 정부군이 승리한 이유 중 하나로 알바라도의 토지개혁이 제시될 정도이다. 여러모로 공과 과가 극명히 엇갈리는 독재자인 것이다.
[1] 2000년 하반기, 투자은행인 JP모건과 합병하면서 JP모건 체이스로 사명을 변경했다.[2] 페루는 스페인어 외에도 숫적으로 가장 우세한 케추아어를 비롯한 48개 원주민 언어가 사용된다. 같은 언어로 분류되나 상호소통이 힘든 방언까지 감안하면 언어의 숫자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3] 당시 칠레의 행동은 태평양 전쟁의 강화조약으로 페루로부터 받은 영토를 페루 정부의 동의 없이 임의로 교환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는 1883년 안콘 조약(Treaty of Ancón)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이었다.[4] 이 채권들은 벨라스코 퇴임 후 더 큰 문제를 일으켰는데 1980년대 초인플레이션으로 채권들이 완전히 휴지조각으로 전락하면서 실질적으로 무상몰수나 다름없게 되었다. 연 인플레이션(CPI 기준)이 60% 밑으로 떨어진 해가 단 한번도 없었고 특히 1989년과 1990년에는 각각 연 3,398.7%, 7,481.7%를 기록했는데 연이율 4~6% 채권이 가치를 유지하겠는가. 채권이 휴지조각이 되는 걸 지켜본 현지 자본가들은 정부 정책을 극도로 불신하게 되었으며 이런 투자심리 악화는 장기적으로 페루 경제가 대외 충격에 취약해지고 저성장하는 원인으로 지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