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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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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女子高生コンクリート詰め殺人事件
파일:콘크리트사건.png
사건번호 헤이세이 21058
(平成[ruby(二一零五八,ruby=にいちゼロごはち)])
발생일 1988년 11월 25일 ~ 1989년 1월 5일
사건 발각 1989년 3월 29일
발생 위치
[[일본|]][[틀:국기|]][[틀:국기|]]
사이타마현 미사토시 (납치)
도쿄도 아다치구 아야세 (감금)
도쿄도 고토구 와카스 (시체유기)
범죄 항목 약취유인(납치, 유괴)
감금
성폭행(강간, 윤간)
폭행
살인
사체유기
가해자 미야노 히로시(주범, 당시 18세)
오구라 유즈루(당시 17세)
미나토 신지(당시 15세 → 16세)[1]
와타나베 야스시(당시 16세 → 17세)[2]
나카무라 테츠오(당시 17세)
이하라 코이치(당시 15세)
그 외 최소 18명의 비행 청소년[3]
볼드체: 핵심 인물
피해자 후루타 준코(당시 17세)
판결 미야노 히로시(징역 20년)
오구라 유즈루(징역 5~10년 부정기형)
미나토 신지(징역 5~9년 부정기형)
와타나베 야스시(징역 5~7년 부정기형)

1. 개요2. 경과
2.1. 11월 25일2.2. 11월 27일2.3. 11월 30일2.4. 12월 5일2.5. 12월 6일2.6. 12월 7일2.7. 1월 4일2.8. 1월 5일
3. 사건 발각 (3월 29일)4. 피해자가 당한 일
4.1. 부검 결과와 사인
5. 반응
5.1. 피해자 측의 반응5.2. 가해자 측의 반응
6. 세간의 만행7. 사건 외적인 영향8. 환경적 요인9. 범인들의 인적사항 및 근황
9.1. 소년 A
9.1.1. 성장 과정9.1.2. 출소 후 근황9.1.3. 기타
9.2. 소년 B
9.2.1. 성장 과정9.2.2. 출소 후 근황9.2.3. 기타
9.3. 소년 C
9.3.1. 성장 과정9.3.2. 출소 후 근황9.3.3. 기타
9.4. 소년 D
9.4.1. 성장 과정9.4.2. 출소 후 근황9.4.3. 기타
9.5. 소년 E9.6. 소년 F9.7. 기타 공범들
10. 판결11. 관련 매체
11.1. 다큐멘터리11.2. 영화11.3. 만화, 소설11.4. 영화11.5. 노래
12. 유사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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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8년 11월 25일부터 1989년 1월 5일까지 일본 도쿄도 아다치구에서 15~18세의 남성 비행 청소년[4]들이 주 2회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17세 여고생 후루타 준코를 납치한 뒤 감금하며 온갖 가혹행위고문, 폭행, 성폭행 등을 저지르고 방치하여 살해한 뒤 시신을 콘크리트 등과 함께 드럼통에 넣고 유기하여 은폐한 사건이다.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age(1989-01-05)]년이나 지났지만 해당 사건의 잔혹성, 극악무도함, 비인간성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는 사건이다.[5]

해외에서는 都足立区女子高生監禁リンチ殺人事件(도쿄도 아다치구 여고생 감금 린치 살인사건), Murder of Junko Furuta(후루타 준코 살인사건)이라고도 불린다.

피해자 후루타 준코(古田順子, 1971년 1월 18일 ~ 1989년 1월 5일)는 당시 17세로 사이타마현 미사토시에서 태어나고 자라 사이타마현 야시오시 미나미가와사키 소재 모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으며 [6] 1989년 3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예정이었고, 가전 판매점에 취직이 결정되어 있었다.[7]

이렇게 그녀는 창창한 미래를 앞두고 있었으나, 후술할 극악무도한 범죄의 타깃이 되어버렸고 이로 인해 18세 생일을 불과 2주 앞두고 사망했다.

2. 경과

2.1. 11월 25일

1988년 11월 25일 오후 8시 30분경 사이타마현 미사토시에서 주범 미야노 히로시(소년 A, 당시 18세)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후루타 준코(당시 17세)를 발견했다. A는 공범 미나토 신지(湊 伸治, 소년 C, 당시 15세)에게 "내가 잘 해 볼 테니 저 여자를 발로 차."라고 지시했다.

미나토 신지에 의해 타격을 받은 준코는 무릎이 까지고 도로 옆의 도랑에 자전거와 함께 넘어졌다. 이후 준코의 곁에 A가 나타나 "저 녀석은 유명한 변태다. 나도 저 녀석에게 칼로 협박당했다. 여긴 위험하니 데려다 주겠다."고 말을 걸어 대화를 하면서 천천히 준코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

히로시는 준코의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어두운 창고 앞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난 야쿠자의 간부다.[8] 야쿠자가 너를 사고로 위장해 차로 치어 죽이기로 되어 있다. 얼마 뒤 차도 이리로 오겠지만, 내게 몸을 바치면 용서해 준다."며 준코를 키타아야세역에서 가까운 WINGS 호텔(사건 이후에도 그대로 영업 중)로 데려가 강간했다.[9]

이후 "원래는 야쿠자가 너를 죽이기로 되어 있었지만, 넌 내 여자친구와 닮았으니 살려 주고 싶다. 너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윗선과 잘 얘기해 볼 테니 그때까지 여기에 있어라."고 말하며 준코를 안심시켰다.

그 직후 히로시는 납치 당일 자판기 앞에서 행인을 대상으로 퍽치기를 하던 동료 오구라 유즈루(소년 B, 당시 17세)와 와타나베 야스시(소년 D, 당시 16세)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를 하나 잡아 두고 있다. 너희들 같이 먹어 버리지 않겠냐?"고 불러내 히로시-유즈루-야스시 순서로 4~5차례씩 돌아가면서 윤간하였고, 이 후 준코를 끌고 근처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때 준코는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생전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된다.[10]

도중 차 안에서 히로시가 준코에게 "신지가 너를 좋아한다. 신지와 사귀어라."고 명령했지만 준코는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남자를 사귀기 곤란합니다."라고 대답했고 이에 히로시는 "굴욕을 교육시켜 준다."고 했다.[11]

그러던 중, 히로시와 유즈루가 술을 마시러 자리를 떴고, 신지의 집 근처 공원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일행들은 추위를 피해 가까웠던 신지의 집에 준코를 데려가 감금하게 된다.

2.2. 11월 27일

길에서 행인을 폭행하고 있던 히로시는 함께 어울리던 나카무라 데쓰오(소년 E, 당시 16~17세)와 이하라 고이치(소년 F, 당시 15~16세)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겠다"며 불러내 23시 경 신지의 집에 자고 있던 준코의 앞에 나타난다.

히로시는 준코에게 겁을 주려고 감기약을 각성제인 척 복용하고 약에 취한 듯 행동하며 피해자를 넘어뜨렸다. 신지의 형이 쿠션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누르자 피해자는 소리치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비명으로 인해 신지의 부모가 2차례 찾아온다. 먼저 신지의 어머니가 2층에서 나온 소음에 방문을 열어 확인하려 했으나 조명이 꺼져 스탠드만 있던 상태였기에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이 후, 준코가 비명을 지르자 신지의 아버지가 올라와 문 앞까지 와서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지?"라며 무슨 상황인지 물었으나 신지가 "상관하지 마"라고 소리지르자 돌아갔다.

일련의 과정으로 화가 난 가해자들은 2시간 동안 준코의 허벅지와 다리를 집중적으로 폭행했고, 음부에 불을 붙인 뒤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입을 막고 윤간했다.

2.3. 11월 30일

파일:o0448026814250420564.jpg
사건이 일어난 미나토 신지의 자택 2층[12]
납치 후 5일이 지난 11월 30일에 준코 부모가 경찰에 신고할 것을 걱정한 히로시의 제안으로 가해자들은 준코에게 집에 "가출했으니 찾지 마. 친구 집에 있으니 실종 신고는 취소해 줘."라는 내용의 전화를 먼 지역의 공중전화로 하라고 강요했다. 이 때 소년들은 경찰들의 위치 추적이 어렵게끔 전화를 걸 때마다 다른 장소에서 전화를 하도록 시켰다.

5일에 걸쳐 3번 걸게 시키면서 "경찰서도 멀고, 저 차는 야쿠자의 차다. 도주하려고 하면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협박하였고 전화를 할 때도 극청회의 일원들이 옆에서 감시했다. 그리고 그날 신지 어머니와 인사한 준코는 자신을 "사이타마현의 고교생"이라고 소개했고 신지 어머니는 준코에게 "늦었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준코는 소년들과 2층으로 올라갔고 신지는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낸다."고 말하면서 따라 올라갔다.

2.4. 12월 5일

5일 뒤인 12월 5일, 신지 방을 청소하다가 쓰레기통에서 생리대를 발견한 어머니는 2층으로 찾아가 감시 담당인 야스시와 함께 있던 준코에게 "왜 집에 돌아가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야스시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던 준코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준코를 가출소녀라고 생각하고 이름을 물었지만 준코는 "사이타마현에 사는 고교 3학년 학생이고, 취직이 결정됐다"는 엉뚱한 대답밖에 하지 못하였고 어머니는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테니 어서 돌아가라"고 말했다. 감시를 하고 있던 야스시도 "그래, 돌아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해 식사를 시킨 뒤 준코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분위기가 됐다.

그러나 식사 도중 신지와 아버지가 돌아왔고 신지의 아버지는 신지에게 "여자친구인가? 나에게도 소개해 주렴."이라고 말을 걸었으나 신지에 의해 묵살당했다. 그 후 준코는 소년들에게 이끌려 다시 2층으로 올라가게 됐다.

2.5. 12월 6일

신지의 가족들은 집에 낯선 소녀가 드나드는 걸 보고 신경이 곤두서 다음 날에 다시 찾아와 "이 집엔 남자가 2명(미나토 신지와 그의 형)이나 있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거지?", "여긴 그 야쿠자 같은 것들(미야노 히로시, 오구라 유즈루)도 있으니 얼른 돌아가렴."이라고 말을 걸었으나 이미 겁에 잔뜩 질려있던 준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른 돌아가자"며 준코의 가방과 소지품을 들고 내려왔지만 준코는 가해자들이 두려워 2층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준코 가방에서 나온 집 전화번호를 확인한 뒤 아들에게 구타당할 것을 염려해 시부모의 집으로 찾아가 준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신지 어머니가 "댁에 후루타 준코라는 딸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준코 어머니는 "지금은 준코가 집에 없습니다. 누구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신지 어머니는 주저하다가 가짜 이름을 대고 끊어 버렸다. 경찰은 신지 어머니가 댄 가짜 이름을 토대로 수사했기에 준코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신지의 집에서는 신지의 아버지가 준코를 귀가시킬 채비를 시켰고, 신지의 형과 오구라 유즈루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럼 돌아가기로 한 거지? 어머니가 걱정하시니 얼른 집에 돌아간다고 전화하거라."
"괜찮아요. 전에도 전화했으니까."
"그럼 그쪽까지 데려다 줄게."
"혼자서 돌아갈 수 있어요..."
"택시비 가지고 있니? 내 줄까?"
"있어요. 괜찮아요."
"그럼 곧장 돌아가렴."
"알겠습니다."

집 근처 공원에서 신지의 형은 준코를 귀가시키자는 쪽으로 유즈루를 설득했고 준코 또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 제발 집에 가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유즈루는 신지의 부모가 자고 있을때 집 앞의 전봇대를 통해 준코를 신지의 방으로 올려보냈고, 준코는 다시 감금당하게 된다.

이 후, 어머니가 준코의 집에 전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나토 신지는 수 시간 동안 어머니를 폭행한다.

이 시점에서 신지의 부모는 피해자가 귀가한 것으로 인지하여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 "이미 준코가 귀가한 줄 알았다"고 진술하긴 했지만, 아들의 폭행이 두려워 알면서도 모른 척 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아들의 폭행이 두려워 아예 2층으로 올라가지 않아서 진짜로 귀가한 것으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소년들은 이때까지는 준코가 가지고 있던 3,000엔[13]으로 옷을 사서 갈아입히거나 음식을 먹이고 생필품을 사주는 등 배려 아닌 배려를 해주었다. 사실 이것도 배려라고 하기엔 뭣한 게, 준코의 돈을 뺏어서 준코에게 사준 것이기 때문에 배려인 척 가장한 위선이다. 하지만 감금이 지속되고 하루 18시간 이상 지속되는 폭행 및 성적 고문 등으로 인해 상처가 심해지면서 그런 것마저도 사라졌다.

납치 약 1달째인 12월 하순까진 신지의 형이 컵라면, , 우유, 계란 등을 준코에게 먹였지만, 이후 급속도로 쇠약해져 고작 하루에 우유 1잔만을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옆방에 있던 신지의 형은 이후에도 소년들이 없을 때 한 번씩 준코를 도와주긴 했지만, 신지의 형 역시 동생과 동생 일행의 폭력에 잡혀사는 처지였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았다.

2.6. 12월 7일

12월 7일, 준코는 가해자 소년들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몰래 1층으로 내려와 신고했지만 인기척을 느낀 히로시에게 들켰다.[14]

강제로 전화가 끊기자 경찰은 역추적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히로시는 "여동생이 장난전화를 건 모양이다, 죄송하다"라고 말하며 무마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히로시는 고함을 지르면서 자고 있던 다른 소년들을 깨워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냐"고 물컵을 집어 던지는 등 광분하며 호통쳤다. 신고한 것도 화나는데 히로시에게 혼나기까지 해서 유즈루, 신지, 야스시도 격분했다.

준코는 소년들에게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것이 준코가 방 밖에서 한 마지막 행동이 되었다. 이때부터 준코는 죽을 때까지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지금껏 당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도 높고 끔찍한 고문들을 당하게 된다.

특히 그녀를 짝사랑했던 오구라 유즈루는 이때부터 가장 집요하게 준코를 괴롭혔다. 밖으로 나가기 전 준코에게 매우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게 한 뒤 돌아와서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있으면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준코를 나체로 매달아 놓고 복부를 구타하거나 턱과 팔, 무릎을 탈구시킨 후 관절을 부러뜨리고 가위로 아킬레스건을 절단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유즈루의 이 만행은 신지의 집에 있는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되어 남아 있었다.

2.7. 1월 4일

약 한달 뒤인 1989년 1월 4일, 미야노 히로시는 전날 마작에 크게 실패해 10만 엔(2024년 5월 24일 기준 약 87만원)에 달하는 빚을 지고 야스시의 집에서 일행과 합류했다. 사실 12월 20일경부터 준코의 상태가 극히 심각해져서 그들은 준코를 처리하기 귀찮은 물건으로 여겨 한동안 찾지 않고 C의 집에 방치해 두고 있었다.

히로시는 "마작에서 진 것도 다 준코 때문이야"라며 "오랜만에 준코를 괴롭히러 가자"고 제안했다. 이에 다같이 신지의 집으로 가 준코를 폭행했다.

오전 8시 경, 그들은 탈진한 준코를 세우고 얼굴에 촛농을 떨어뜨리거나 소변을 먹였고 양 옆에서 1명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른 1명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머리, 어깨 등을 번갈아 가며 구타했다.

이때에 대해 야스시는 "딱히 관심 있지는 않았으나, 히로시와 유즈루가 두려워 폭행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

준코가 자력으로 일어서려다가 넘어져 카세트 플레이어에 머리를 부딪혀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히로시는 준코의 죽음을 예감했지만 꾀병이랍시고 폭행의 강도를 높혔다. 그리고 유즈루가 1.74kg짜리 아령을 준코의 복부에 떨어뜨렸으나 준코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소년들은 준코를 억지로 깨우기 위해 불로 준코의 피부를 지졌다.

준코는 처음엔 움찔했지만 후엔 미동조차 없어졌고 소년들은 "준코가 죽은 것 아닌가?"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신지는 "원래 이렇다"라고 말하였고 이에 안심한 소년들은 테이프로 준코의 발목을 묶어 방에 방치해두고 오전 10시에 막 개장한 사우나로 향하였다. 준코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감시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전원 외출한 것으로 보인다.

2.8.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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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이 담긴 드럼통이 발견된 현장[15]

하루 외박을 한 소년들은 미나토 신지의 형에게 준코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연락을 받고 신지의 집으로 향한다.

당시 준코가 감금 당한 방은 안에서만 열 수 있었기 때문에 소년들은 바로 옆, 미나토 신지 형의 방 베란다에서 준코의 상태를 지켜봤는데, 준코가 이불 위에 쓰러져 있었다. 소년들은 "준코가 죽은 것 같다"며 들어가길 꺼렸다. 소년들이 방으로 들어갔을 때, 준코는 이미 사망하여 싸늘한 주검이 된 상태였고 소년들은 준코의 시신을 바로 앞에 두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사망확인이 된 날은 1월 5일이지만 부검 결과 실제 사망 시점은 소년들에게 마지막으로 폭행을 당한 1월 4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기일(1월 5일)은 그녀의 생일(1월 18일)의 약 2주 전이었다. 또 준코가 납치(11월 25일)된 지 3일 후(11월 28일)가 그녀의 어머니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전부터 그녀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히로시는 준코의 시신을 이불로 싸맨 뒤 여행 가방에 넣어 테이프로 말아 자신이 일했던 타일 공장 근처에서 가져온 드럼통에 넣어 콘크리트를 넣고 벽돌 등으로 고정했다. 굳이 콘크리트를 넣은 까닭은 공구리 괴담[16]을 믿은 걸로 추정된다.

다큐에 따르면 조폭만화에서 힌트를 얻었다고도 한다. 이때 백주대낮에 당당히 준코를 콘크리트에 매장한 장소는 놀랍게도 아다치구의 주택가가 밀집한 히로시의 집 앞 주차장이었고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빌린 차에 드럼통을 실어 옮겼다고 한다.

드럼통을 숨기기 위해 이를 검은 쓰레기 봉투에 넣은 뒤 테이프로 밀봉했다. 이후 히로시가 빌려온 왜건 차량을 운전해 드럼통을 아야세 강 근처에 버리려 했으나 유즈루가 "집 근처라 귀신이 되어 나올 거 같다"며 무서워했다. 그래서 바다 한가운데인 도쿄만에 버리려 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도쿄도 고토구 와카스 14호지 해변 공원 정비 현장의 공터에 버렸다. 만약 바다에 버렸다면 영구 미제사건이 됐을지도 모른다.[17]

히로시는 드라마 <톤보>[18]의 마지막 회를 녹화한 비디오를 찾았다. 준코가 납치된 날 준코는 그것의 마지막 회를 보기 위해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귀가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대해서 준코가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같이 넣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비디오를 꽃다발과 함께 넣으려고 했지만 "범인을 특정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는 B의 만류로 인하여 그만두었다. 자기들이 살해해 놓고 추모하는 것이 무슨 헛짓거리인가 싶지만 후에 히로시가 밝힌 이유는 준코가 불쌍하다기보다는 준코의 원혼에 저주받기 싫어서.

3. 사건 발각 (3월 29일)

이 천인공노할 사건은 가해자들의 시체 유기로 인해 영영 묻히는 듯했으나 시체 유기로부터 약 3개월 뒤인 1989년 3월 29일 뜻밖의 일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히로시는 사건 이전인 1988년 11월 8일에 있었던 또 다른 19세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치상절도 등의 혐의로 네리마 소년 감별소에서 아야세 경찰서 수사관의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담당 형사가 실수로 "너 사람을 죽이면 안 되잖아?"[19] 라는 질문을 했다.

이때 히로시는 부하들이 이미 사건에 대해 자백했다고 착각한 나머지 사건의 전모를 몽땅 불어 버렸다.[20] 정말 무서운 건 만약 담당형사의 말실수가 없었거나 시신을 바다에 버렸거나 시신을 심하게 훼손해서 부검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면 이 사건은 실마리조차도 풀지 못 하고 영원히 드러나지 않은 채 단순한 실종 사건으로 묻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히로시는 담당 형사에게 사건의 전말을 불기 시작했고 이런 터무니 없는 소리에 경찰은 반신반의하면서도[21] 현장에 다급히 출동해 범인들이 자백한 공터에서 콘크리트 범벅이 된 드럼통 하나를 발견했다.

드럼통의 틈새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경찰은 즉시 크레인을 동원해 드럼통을 그대로 경찰서로 옮겼다. 원래 드럼통 하나의 무게만 해도 굉장히 무거운데 여기에 약 40kg 가량되는 준코의 시신, 이불, 가방, 그리고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까지 더해져서 전체 무게는 305kg에 달했다.

다음날 오후 경찰서에서 해체 작업이 시작됐고 곧 보스턴백에 담겨져 두 이불에 싸인 준코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미 사망한 지 3개월 가까이 지난 데다 당시 온전한 상태로 사망해서 유기된 것도 아니라 부패가 매우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였다.[22]

당연히 경찰들은 히로시가 밝힌 사건의 전모가 사실임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23]

공판 당시 재판소는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였으며 배심원단이 실신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4. 피해자가 당한 일

재판에서 공개된 범행이 워낙 끔찍해서 세상에 알려진지 [age(1989-03-29)]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가 되면서 인터넷 등지에서는 검증 되지 않은, 피해자가 당했다고 하는 엽기적인 범행도 많이 적혀 있다. 인터넷에 적혀 있는 글을 읽을 때 곧이 곧대로 믿는 건 곤란하고 과장되고 와전된 범행 루머는 피해자 유족에게도 상처를 준다.[24] 아래에 서술한 내용은 헤이세이 21058 판결문에서 공개된 내용만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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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성제를 먹고 피해자에게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피해자를 억누르고 옷을 강제로 벗겨 윤간하였다. 그 후 면도기를 꺼내 음부를 제모하고 음부에다 성냥을 넣고 불을 붙였다.
  • 12월에 피해자가 도주를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이에 분개하여 얼굴을 마구 때렸고 발목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화상을 입혔다.
  • 알몸 상태로 디스코의 곡에 맞추어 춤을 추게 하거나 자위행위를 강요하거나 피해자의 얼굴에 매직펜으로 수염을 그리는 행위를 했다.
  • 피해자의 음부에 철봉을, 항문에는 병을 삽입하였다.
  • 시너를 흡인시키고 위스키, 소주 등 술을 강제로 마시게 했다.
  • 겨울 한밤중에 피해자를 반나체로 베란다로 내쫓은 뒤 우유, 물 등을 다량으로 먹이고 담배 두 개비를 한 번에 빨게 하였다.
  • 12월 중 ~ 말에 걸쳐 소년 A가 피해자가 흘린 소변을 밟았다는 핑계로 소년 B, 소년 C와 함께 피해자의 얼굴을 여러 차례에 걸쳐 때려서 얼굴이 부어 올랐는데 그걸 보고 재밌어 하며 웃었다.
  • 그 이후로 학대는 더 심해져서 피해자의 허벅지와 손 등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불이 꺼지면 다시 기름을 붓고 붙이는 걸 반복했는데 이 무렵 피해자는 그만 죽여 달라고 애원하였다.
  • 가해자 주범은 12월 중순경부터 주로 소년 F에게 피해자를 감시하도록 맡겼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피해자에게 음식을 조금 밖에 주지 않았고 12월 말에는, 우유 조금만 주었다. 피해자는 영양장애와 가해자의 거듭된 폭행으로 극도의 쇠약상태에 빠져 식욕이 감퇴하고, 안면은 부어오르고, 화상 때문에 피부에 고름이 생겨 악취를 품겼다. 아래 층 화장실에 가는 것도 어려워지자 하루 종일 거실에서 누워 있는 상황이 되었다.
  • 피해자에게 양갱을 보여주며 이것은 무엇이냐고 물었고 피해자가 양갱이라고 대답하면 왜 이름을 함부로 부르냐고 하고 "양갱씨"라고 하면 왜 양갱에 ""를 붙여 부르냐며 또 이를 핑계로 괴롭혔는데 폭행을 하고 나서 밀랍에 불을 붙인 뒤 피해자의 얼굴을 덮을 정도로 녹인 밀랍을 떨어뜨렸다. 이 때 피해자의 반응이 거의 없었다.
  • 피해자가 쇠약해 져서 화장실도 갈 수 없게 되자 음료팩에 소변을 봤는데 그걸 강제로 마시게 했다.
  • 피해자의 얼굴을 돌려차고 쓰러지면 강제로 일으켜 다시 차는 행위를 반복하였는데 이 때 피해자가 넘어지면서 물건에 부딪혀 경련을 일으켰다. 이 때부터 피해자가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했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진 피해자를 계속 폭행하였다. 이 때 피해자는 코피를 흘리고 화상을 입어 생긴 고름이 터져 피가 사방에 튀겨졌다.
  • 가해자들은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비닐봉지로 손을 감싼 뒤 피해자의 전신을 마구 폭행하였다. 그것도 모잘라 1.74kg 운동 기구로도 폭행한 뒤 소년 D가 이 기구를 어깨 높이에서 피해자의 복부에 2~3회 떨어트렸다.
  • 소년 A는 반복적으로 기름을 피해자의 허벅지 등에 붓고 불을 붙였는데 피해자는 처음에는 손으로 불을 끄려는 등 저항을 하였지만 이윽고 반응이 거의 없었고 축 늘어져 쓰러졌다.
  • 이러한 폭행은 피해자가 사망한 날 당일 오전 8시경부터 10시경까지 약 2시간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졌고 결국 피해자는 숨을 거두었다.

4.1. 부검 결과와 사인

상세한 조사 결과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준코의 사인은 구타에 의한 외상성 쇼크와 위의 토사물에 의한 질식사로 추정됐다. 사망 당일 2시간에 걸친 폭행이 끝난 후 준코는 결국 사망했다.[25]

인터넷에 준코의 시신이라고 나오는 사진들은 대부분 해당 사건을 다룬 영화다큐멘터리에 나온 장면이고 실제 시신은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 펼치기 · 접기 ] 시신 부검 당시의 기록 (열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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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준코의 시신은 손발이 묶인 상태였고 얼굴은 눈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손상됐으며 하반신은 얼굴보다 훨씬 더 참담한 상태였다. 온몸의 근육은 폭행과 화상 등으로 흐물흐물하게 녹아 있었고 고름과 진물이 흘러 범벅이 되어 있었다.[26]
  • 준코의 장기는 모조리 터지고 박살난 데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진 부분도 있었다.
  • 얼굴의 뼈 상당부분이 으스러져 있었고 가슴에 빈틈이 없이 바늘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으며[27]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카락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28]
  • 새끼손가락의 손톱이 벗겨져 있었고 왼쪽 유두는 공구로 집혀 심하게 손상됐으며 잇몸에 제대로 배열된 치아는 하나도 없었고 강제로 발치된 흔적도 있었으며 또한 축소되어 녹아 있는 상태였다. 는 피와 고름으로 꽉 막혀 입으로 호흡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막도 심하게 파열됐기에 마지막엔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29] 너무나 가공할 고통 속에서 입술을 깨물어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모두 절단되어 있었다.
  • 피하 지방의 두께는 평균치의 100분의 6이 채 되지 않아 극도의 영양실조 상태였다. 원래 체중인 53kg에서 36kg[30]으로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준코의 키가 165~6cm[31]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저체중이다.
  • 준코의 위장에선 지네바퀴벌레, 다량의 먼지와 쓰레기, 본인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소변과 대변, 그리고 식도를 가득 채운 데다가 기도까지 막아 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정액, 페트병 등 차마 말로 꺼내기도 힘든 것들이 발견됐다. 정액은 도대체 몇 명의 것인지 확인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양이 많았으며 동물의 정액도 검출되었다.[32] 성기에는 비타민 음료 병 2개가 꽂혀 있었다. 준코의 몸 아래쪽에 있는 장기들의 상태는 두 배로 심각했다. 대장에는 큰 화상을 입었고 그 외의 기관들의 상태도 전부 정상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구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전신에 입은 화상과 장기 외상 등을 치료하기도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극심한 후유증트라우마, 정신질환 등으로 인해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망 당시부터 심각하게 손상되어 안면이 심하게 함몰 및 변형되어 있었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시신이 부패되었던 터라 외관만으로는 사인을 비롯한 신원 확인조차 쉽지 않았지만 손상된 시신에 남아 있던 지문과 치열을 조합하고 머리카락의 DNA 등을 검사한 결과, 1988년 11월 25일 밤에 아르바이트 후 귀가 도중에 행방불명된 사이타마현 미사토시 타카스 1번지에 거주했으며 현립 야시오 미나미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당시 17세의 후루타 준코임이 확인되었다.

시신 발견 당시, 온갖 사건 현장과 시신들을 봐온 베테랑 형사들조차 구토하며 기절하거나 오열할 정도로, 이 세상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잔인한 상태였던 준코의 시신은 과연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을 정도로 참혹한 상태였다고 한다. 준코가 목숨을 잃은 방에선 벗겨진 그녀의 팬티만이 남아 있었다.

5. 반응

5.1. 피해자 측의 반응

준코의 부모님은 당시 준코가 야시오시 시내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뒤 귀가하지 않자,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냈다. 준코가 무사히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렸으며 일을 쉬어 가면서까지 준코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실종된 지 4개월이 넘어서야 겨우 찾은 준코는 납치되어 각종 폭행과 온갖 고문에 시달리다 고통스럽게 죽어있었고, 준코의 부모님은 이미 사망한 것도 모자라 참혹하게 변해버린 준코의 시신을 마주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세간의 시선에 시달려야 했는데 재판 당시 준코의 아버지 후루타 아키라(古田晃)는 "가는 곳마다, 지인들이나 모르는 사람들이 죽은 딸의 이야기를 집요하게 물으면서 물고 늘어지며 괴롭힌다" 라고 통탄했다. 특히 "지인들은 질문하고 나서 위로라도 해줬지만, 기자들과 다른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면서 한탄했다.
추도사를 들으며 눈물을 보이는 준코의 지인들[33]

준코의 장례식은 학교 친구들, 가족,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4월 2일 일요일에 준코의 집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이 장례식에는 기자들도 많이 참석했다.[34] 원래 일본식 장례식은 화장을 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시신의 상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부검이 끝나자마자 바로 화장을 하고 장례식을 시작했다.

준코의 묘지는 한번 유즈루의 부모에게 훼손된 후 다른 곳으로 이장했고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35]
장례식에서 준코의 친구인 미야시타 카나(宮下佳奈) 학생이 읽은 추도사는 다음과 같다.[36]
준 짱, 어서 오세요.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팠죠? 괴로웠죠? 아무것도 모르고 생활했던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언제나 온화하고 밝았던 준 짱. 문화제 때 모두와 만든 핫피(일본 전통 축제 의상)는 정말 잘 어울렸었죠.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저희는 준 짱의 죽음을 절대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끔찍한 범죄가 없어진 평화로운 날을 보낼 수 있도록, 사회인이 된 저희들도 노력하겠습니다. 또 괴로운 일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갔던 준 짱을 생각하며 힘내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특별히 졸업장을 들고 와주셨다고 하네요. 이로써 3학년 8반 47명은 전원 졸업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준 짱… 이제 고통도 괴로움도 없어요. 편히 잠드세요. 잘 가, 준 짱. 야시오미나미고교 3학년 8반 일동.

그리고 4월 초에 야시오 미나미 고등학교에선 준코가 돌아오리라 믿고 보관해 두고 있었던 졸업장을 그녀가 살던 집으로 보내줬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후 나온 관련인들의 진술도 통탄스럽다. "준코가 감금 도중 가장 많이 한 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해자들의 대답은 마치 짜고 친 것처럼 똑같았다. 바로 "나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였다고.

사건의 전모, 자신의 딸이 얼마나 처참하고 끔찍하게 죽어갔는지를 알게 된 준코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쓰러져 오래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준코의 아버지는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후에도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웬만해선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이 준코의 신상정보를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하자 결국 언론사에 직접 찾아가서 "딸의 신상정보를 유출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기까지 했다.

5.2. 가해자 측의 반응

자식이 저지른 범죄를 알게 된 히로시의 부모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집과 자산을 정리해 5천만 엔(단순 환율로 따지면 한화로 5억 가량[37])을 준코의 부모에게 건넸지만 거절했다고 한다.[38]

당시는 물론 현재도 상당히 큰 액수이지만 이미 딸을 잃은 피해자 부모 입장에서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히로시의 부모로서는 사죄를 할 방법이 그 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위로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준코의 유가족에게 거절당했지만, 다른 가해자 가족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사과와 위로를 하고 용서를 구하려했다는 점에서 가해자 가족 중 가장 인간다운 면모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히로시의 부모도 유즈루의 부모처럼 이혼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해자들의 가족과 관련된 몇몇 영상의 처음 장면에서 수많은 짐 가방들을 잔뜩 든 상태로 기자들의 인터뷰도 거절하고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이 히로시의 어머니 미야노 시즈에인데[39] A의 부모도 구제불능인 아들의 행동을 감당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히로시의 아버지의 혼외정사와 동거 이외에도 자식의 범죄 행각이 이혼 사유일 것이 사실상 확정이다.

유즈루의 부모는 참으로 그 자식에 그 부모란 면모를 대놓고 드러냈다. 어머니 오구라 에츠코는 자식이 전과자가 된 것에 분노해 "이게 다 준코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준코의 묘를 찾아가 부숴버리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B의 부모는 이 사건 이전부터 B의 아버지의 혼외정사로 인해 별거 중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이혼했다. 유즈루의 아버지는 사과가 아니라 "노코멘트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유즈루의 생모는 준코가 죽고 [age(1989-01-05)]년이 지난 후에도 조롱이라도 하듯 버젓이 사건 발생지 인근에 음식점을 차리는 등의 행태를 일삼으며 준코를 모욕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유즈루의 부모가 유족에게 지급한 위자료는 50만엔[40] 정도로 매우 적었지만, 사건 후 곧바로 아파트[41]를 구입하고, 유즈루에게 고급차를 사주는 등 유족에게 지불해야 할 돈을 자기 가족의 사리 사욕을 위해서만 사용하였다. 유즈루의 부모는 사건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즈루의 어머니는 언론이나 이웃을 피해 차 안에서 생활하기도 했다고 한다.

준코가 감금된 장소를 제공한 C의 부모는 "여학생이 2층에 있는 걸 내내 알고 있었으며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그나마 제일 회유하고 노력했지만 아들이 두려워[42] 어쩌지 못했고 이미 돌려보냈다고 의심치 않았기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사건이 밝혀지고 증거 확보를 위해 경찰관들이 들이닥쳤을 때 방의 바닥과 커튼, 베란다 벽 등이 모두 새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어머니가 깨끗하게 청소해서 집안엔 어떠한 증거도 안 남은 상태였다. 진짜로 몰랐을까?[43]

당시 미야노 히로시와 약혼을 하고 동거를 하던 야스시의 누나는 "후루타 준코가 그 집에 감금되어 있다는 걸 내가 알았더라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구출했을 것이다. 나는 전혀 몰랐다." 라고 말했다고 하며 끝내 파혼했다.

6. 세간의 만행

일부 황색언론은 준코의 얼굴이나 교복, 수영복, 핫팬츠 차림의 사진 등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행실이 불량한 아이였다느니, 불량배 패거리의 일원이었다느니 하는 등의 불분명한 사실들을 기사로 내놓는 추가적인 만행을 저질렀다.[44] 설령 피해자가 행실이 불량했거나 불량했다고 해서 범죄를 저지른 게 정당화도, 참착 요소가 될 수 있는 것도 절대로 아니지만, 준코의 주변인들과 동급생의 증언에 따르면 준코는 최상위권의 성적에 결석도 1년에 두세 번 정도였으며 아르바이트도 아주 성실히 하는 등 불량학생과는 거리가 먼 아주 우수한 모범생이었다.

준코는 교우 관계도 원만했고 밝고 명랑하고 누구에게나 웃으며 인사하는 상냥한 성격에 미인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친구들에 따르면 준코가 아이돌을 동경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엔 곧바로 근처의 가전 판매점에 취직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케이크 만들기가 취미였던 준코는 크리스마스에 어머니와 함께 케이크 만드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를 공경하는 아이였으며 아르바이트도 졸업여행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준코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선 왜 준코가 출근을 안 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살아생전 우수한 모범생이었고 아무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인 준코와 준코의 가족들은 각종 유언비어에 시달리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기자들은 피해자과 유족들의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극성만을 노리며 본인들의 이득과 기사로 인해, 관련된 사람 목숨이 어떻게 될지 신경조차 쓰지 않은 보도에 환장한 나머지 근거도 없는 비난이 피해자인 준코와 그 가족들에게 쏟아졌고, 당시 준코의 아버지는 범행 내용이 너무나 끔찍해서 아내에게 딸(준코)이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알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찾아와 사건에 대한 내용이 담긴 칼럼 등을 보내면서 준코의 부모에게 딸이 끔찍하게 살해된 일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결국 사건의 내용을 준코의 어머니가 전부 알게 됐고 누가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자살할 것 같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고 한다. 분노한 아버지는 딸의 실명 보도에 대한 문제점을 강하게 제기했으며 이후 준코의 가족들은 피해자의 유족들인데도 불구하고 아무 죄 없이 시선을 피하며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그녀의 억울함을 알겠습니까?》 란 책에선 "준코는 언론에게 다시 한 번 살해당했다" 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덧붙여 준코는 범행을 당하기 전 미성년자 성폭행범에게 교제를 전제로 한 스토킹을 집요하게 당하고 있었으며, 이 남자가 가해자 일행에게 정보를 주고 준코를 협박했고 가해자들은 계획적 범행인 것이 탄로날 수 있음이 두려워 이 사실을 누설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범행에 계획성이 있었다고 보이면 형량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설에 대한 근거로 범인들이 평소 강간에 쓰던 차[45]를 쓰지 않아 준코를 협박할 자신이 있어 보였다는 점, 또한 준코의 집 근처가 인적이 드문 창고 앞이었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한 점 등이 언급됐다.

7. 사건 외적인 영향

4년 뒤인 1992년에 일어난 이치카와 4인가족 살인사건의 범인 세키 테루히코는 이 사건의 범인들이 사형이 아닌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을 근거로 "나의 범행은 별 거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나 이 사건은 범행 수위와 별개로 1명이 살해된 것과 달리 이치카와 4인가족 살인사건은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고, 무엇보다 범행 당시 테루히코가 만 19세로 성인이었기 때문에 2017년 12월 19일 얄짤없이 사형 당하게 되었다.[46] 일본은 법률상 나가야마 기준에 따라 2명 이상 살해할 시 어지간하면 사형 선고를 내리고 집행한다.

추가로 이 사건이 발생한 시기에 도쿄, 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도 잇따라 발생했다.[47] 쇼와 시대에 극단적인 살인 사건이 총 2번 발생한 셈이며 이 때문에 무고한 유소녀 4명, 여고생 1명, 총 5명이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차이는 이 사건의 범인이 미성년자 소년들이었다면 옆동네는 20대 청년 남성이 감행했다는 점이 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의 범인들이나 미야자키나 재판 후에도 반성의 여지가 전혀 없다. 다만 차이는 미야자키는 2008년에 사형당한 반면 이 사건의 범인들은 당시 청소년이었다 보니 사형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다.

너무 충격적이다 보니 한국에서도 사건 직후 심해지는 일본의 소년 범죄에 대한 기사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미국, 유럽 등의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했다.

사실 형사의 말실수로 인한 우연한 계기로 범인들이 자백해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진실을 뒷받침하기 위한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48]

범인들의 주변인은 모두 준코를 목격하거나 정보를 들었음에도 방관했고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했다. 많은 사람이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누구도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용기를 내 알렸더라면 준코는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이 사건은 지극히 평범한 주택가의 한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범죄가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무시해선 안 된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뒤 증거도 없이 묻힐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용기 있게 대처하였다면 피해자를 구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논픽션 라이터 후지이 세이지가 주범들과 공범, 그리고 목격자들을 만나 탐문한 걸 바탕으로 엮은 책 《소년의 거리》(개정판: 17세의 살인자)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 대부분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여학생을 납치한 것은 알았지만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신고하겠지.", "소년들의 보복이 두려웠다", "집에 돌려보냈다는 말이 미심쩍었지만 범인과는 친구였기에 믿었다"고 말했다.

주범들의 명령에 따라 준코를 강간하고 폭행한 소년들 중 일부도 자신의 죄가 밝혀질 게 두려워 신고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만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두려워 친구를 범행에 끌어들인 소년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후지이 세이지는 "준코를 살해한 것은 주범들이지만 직접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그들 한 명 한 명의 무관심과 약한 마음 역시 확실하게 준코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했다"고 결론 내렸다.

사람에 따라 '미성년자들이 이런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만으로 충격적일 수 있다.[49]

8. 환경적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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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경 촬영된 아다치구의 방치된 아파트 단지.[50]

사건이 벌어진 동네는 사건 이후에는 재개발되어 백화점 및 신도시가 들어선 주택가가 됐지만 사건 당시엔 좁고 어두운 골목에 막장 치안으로 유명했다. 특히 준코가 감금되어 생을 마감한 1970~90년대 도쿄도 아다치구 일대는 깡패 소굴이었던 과거의 일본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고 현재도 죽은 고양이나 비둘기의 사체가 가끔씩 발견된다고 한다.

해만 지면 온갖 별의별 비행 청소년들이 어슬렁거리면서 싸움질을 하거나 오토바이로 밤새 엄청난 소음공해를 일으키면서 거리의 기물을 파손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필사적으로 이들을 못 본 척했고 비명 소리가 들리든 말든 눈을 돌리고 귀를 막았다. 주민들은 물론 아다치구 공무원들도 이들의 눈치를 봐야 했을 정도. 가해자들로 인해 납치당한 준코가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은 것은 주민들에겐 그냥 매일 들려오는 소음 중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51]

당연히 주민들은 이 사건 이전에도 "순찰 경관 좀 늘려 달라", "분서를 설치해 달라"는 민원을 아야세 경찰서에 넣었지만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동안 묵살당했다. 사건을 주변에서 방관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동네에서 살기 위해서는 비행 청소년 패거리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 동네는 사건 이후에도 도쿄에서 가장 소득이 낮고 치안도 안 좋기 때문에 여자가 혼자 살기 가장 위험한 동네로 유명하다.[52] 뭐 아다치구가 예나 지금이나 청소년/청년 야쿠자 조직으로 유명하니 말 다했다.

결국 경찰의 방만한 대응은 이 참혹한 살인 사건을 불러왔고 이 사건 이후 인원 부족을 이유로 민원을 무시한 아야세 경찰서는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력과 예산으로 순찰 경관을 늘리고 보안등을 추가로 설치했다.

첨언하자면 사건이 발생한 동네에서 이 사건을 주민들 앞에서 언급하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이미 [age(1989-01-05)]년 전 일이고 당시 거주하던 주민들[53]의 대부분은 사건 이후 재개발 등 여러가지 이유로 대부분 다른 곳으로 떠나 새로운 주민들이 자리를 채워서 당시에 있었던 일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일인데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기 때문.

한편 준코가 태어나서 쭉 살았던 사이타마현 미사토시는 사건 이후에도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준코가 살던 집과 다녔던 고등학교도 그대로 남아 있다.[54] 그렇지만 이 지역에 가서 이 사건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게 예의다. 이곳 사람들에게도 이 사건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니.[55]

9. 범인들의 인적사항 및 근황

파일:콘크리트 살인사건 소년 ABCD.jpg
주범들의 히가시아야세 중학교 졸업사진
이들은 일반적인 양아치들과는 차원이 다른 악질이었다.

아다치구를 근거지로 하여 미야노 히로시를 중심으로 극동회(極東会, 교쿠도카이)의 청년부 조직 극청회(極青会)를 결성한 이들은 남녀노소 상대를 가리지 않고 폭행절도, 퍽치기, 강도, 유괴, 납치, 감금, 강간, 윤간 등 온갖 강력범죄들을 일삼았고, 이 때문에 주민들은 해가 지면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다고 한다.

네 명의 주범들 중 와타나베 야스시를 제외하고는 전부 운동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 비해 힘이 강했고 이 때문에 주민들은 더더욱 그들을 두려워했는데 그 중에서도 미야노 히로시는 수 년간 꾸준히 해온 유도, 킥복싱 그리고 팔굽혀펴기복근 운동 등 각종 맨몸 운동으로 온몸이 상당히 단련된 상태였고, "도쿄 동체급 남성 중 무력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강했다.

또한 그는 소년 시절 카츠시카구와 하치오지 시내 일대의 불량배들의 씨를 말리고 다녔다고 하는데,[56] 하필 이런 괴물에게 준코가 붙잡혀버렸다.

굳이 인터넷으로 검색할 필요 없이 잊을 만하면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 때문에 웬만한 일본인이라면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57]

9.1. 소년 A

<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파일:미야노 히로시.jpg
본명 미야노 히로시(宮野裕史) (개명 전)
요코야마 히로시(横山裕史) (개명 후)
출생 1970년 4월 30일 ([age(1970-04-30)]세)
도쿄도 카츠시카구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타카나와다이 고등학교[58] (중퇴)
가족 부모님(1942년생), 여동생(1977년생)
극청회의 두목이자 해당 사건의 주범.

사건 이후 요코야마(横山)로 을 바꾸었는데 출소와 함께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는 형식을 사용했다.[59]

미야노 히로시는 이 사건이 발각되기 전까지 강간치상, 폭행, 절도, 살인미수, 강도강간 등을 셀 수 없이 저지르고 다녔고, 그로 인해 끔찍한 고통을 받은 피해자들은 100명이 넘는다. 당시 대한민국에서도 이 정도 수준의 죄질은 '가정파괴범'으로 지칭하여 살인에 버금가는 흉악범죄라고 판단해 사형을 선고 및 집행했었다.

9.1.1. 성장 과정

1970년 4월 30일, 증권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60]피아노 연주 강사인 어머니[61]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군인이자 야쿠자 출신의 정치인이었고 고모부 또한 야쿠자의 간부였다.

아버지가 증권회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수입이 좋은 부유한 가정이었으나 아버지가 외도를 하며 집을 거의 오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혼자 육아를 하였고, 일을 하러 갈 때는 어린 히로시를 동네에 맡기고 밤 늦게 찾으러 왔다고 한다. 집에 아버지도 없었고, 어머니와 함께있는 시간도 적었기 때문에 히로시는 어린 시절을 외롭게 보내게 된다.

어머니는 히로시의 교육에 열중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영어 학원에 보내고 밤늦게 공부를 시키는 등 히로시의 장래에 대해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식의 교육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히로시를 구두 굽으로 때리는 등의 행동을 하였고 이러한 부모님의 기대는 히로시에게 큰 스트레스가 된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히로시가 미래에 좋은 직장을 가지고 독립할 수 있도록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어머니의 이러한 태도는 공부보다 중요한 인격 형성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시절 히로시는 부모님의 돈을 훔쳐 과자 가게에 가는 등의 비행을 저지르곤 했다.

1977년, 히로시는 아다치 구립 아야세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7살 터울의 여동생이 태어났는데 부모님은 여동생만을 이뻐하였고, 히로시에게는 소홀해졌다.

1981년, 초등학교 5학년이 된 히로시는 헤어스타일을 펀치 파마로 바꾸었다.[62] 그리고 이때부터 교내에서 폭행을 하거나 기물을 파손하는 등의 비행을 저지르며 본격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했고, 교원으로부터 "학교에 오지 말라"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그동안은 어머니에게 맞고 자랐지만, 성장을 하며 힘이 세진 히로시는 어머니를 상대로 가정폭력을 시작하게 된다.[63]

히로시는 평소에 무력에 가치를 크게 두는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무렵부터 키가 작은 대신 몸집을 키워 싸울 때 날아가지 않도록 밥을 많이 먹어 체급을 키우고 멸치를 씹어먹으며 뼈를 강하게 했다고 한다.

1982년, 6학년이 된 히로시는 친구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은 바보같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히로시는 정신을 차려 변화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고 초등학교의 졸업 앨범에는 자신의 미래 꿈을 '소년원의 원장'으로 적었다고 한다. 이유는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을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1983년 4월, 아다치 구립 히가시아야세 중학교에 진학하였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졸업하기로 다짐한다.

중학교에 갓 입학할 당시엔 키가 160cm 정도[64]유도부에 들어가기엔 약간 왜소했지만 몸이 단단하고 다부졌기에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의 추천으로 입학하자마자 유도부에 들어갔고 도쿄의 유도 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 도내 2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유도에 재능을 보였다.

중학교 동창들은 "소년 시절부터 몸을 쓰는 일 뿐 아니라 이름을 날리는 쪽으론 이골이 날 정도로 강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카츠시카구의 남자들 가운데 무력 최강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유도에 재능을 보이며, 중학교 3년간은 그의 다짐대로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졸업하게 되었다.

1986년 4월, 히로시는 학교장의 추천으로 도카이 대학 부속 타카나와다이 고등학교에 체육 특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1학년 때 도쿄 전체에서 2~3학년을 모두 제치고 우승했지만[65][66] 상위 체급의 유도부 선배들은 그런 미야노 히로시에게 질투심을 느껴 심한 집단괴롭힘을 가했다.

그 집단괴롭힘의 주요 내용만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 85kg의 바벨을 1분 동안 머리 위로 40회 들어 올리도록 하기
* 살충제 스프레이 캔에 라이터를 대고 화염방사기처럼 흩뿌리기
* 조임 기술로 실신시키기
* 들어서 던져버리기

이처럼 도를 넘는 집단괴롭힘으로 인해 유도부 선배들은 히로시의 부모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히로시는 분풀이를 위해 집 안의 물건을 모두 때려 부수고, 어머니를 폭행하고, 다른 학교의 복도에 오토바이를 타고 쳐들어가 학생들과 교사들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지고 구타하는 등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키기 시작했다.[67]

그가 구타를 할 때는 교사 6명이 몰려와도 떼어놓지 못해 경찰까지 출동하고 나서야 겨우 떼어 놓았다고 하는데 정말 경악스러운 건 경찰의 한심한 대응이었다. 소년원에 보내져야 할 짓을 하고도 소년원 송치 및 보호관찰 정도로 끝났다. 물론 할아버지와 고모부의 빽도 있었겠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유도를 계속하긴 했지만 선배와의 시합에서 일부러 져주는 행동을 하는 등 예전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히로시는 좌절한다.

1986년 9월, 지속되는 괴롭힘을 견뎌오던 히로시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좌절하며 유도부에서 나오게 된다.

1987년 3월, 고등학교 2학년이 되기 직전 중퇴하고 친가 근처의 타일공장(유한회사 나카무라 타일)에 취직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오구라 유즈루와 친해지게 되었고, 함께 다니며 상해, 주거침입, 절도, 폭행 등의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얼마 가지않아 마음을 고쳐먹은 것인지 다시 타일 공장에서 성실히 일하기 시작한다.

사실 히로시는 자신의 부하인 와타나베 야스시의 누나[68]고등학교 시절부터 교제를 하고있었다. 그는 성인이 되어 야스시의 누나와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동거하며 200만엔[69]을 모으고 있었다고 하는데,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마음을 바로 잡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1988년 8월, 맞지 않는 적성과 낮은 임금에 싫증이 난 히로시는 타일공을 그만두고 폭력조직 관계자의 일에 초대되어 상품 강매, 폭력단 사무소 당번 등의 일을 시작했고 시너를 흡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무렵에 자신을 동경하는 불량배들을 모아 아다치구를 근거지로 폭력 조직 극동회[70]의 청년부 조직 '극청회'를 결성하였다.[71]

이 시점부터 미야노 히로시는 갱생을 완전히 포기했으며 폭행, 강도, 강간, 상해 등의 강력 범죄들을 수도없이 저지르고 다니는 미치광이가 되어버렸다.

그가 이렇게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된 것에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주변 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것이 그를 동정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9.1.2. 출소 후 근황

본래 2009년 출소 예정이었으나 교도소에 있을 때는 별 사고를 안 쳐서인지 2006년, 가석방 되었고[72] 이후 7년에 걸쳐 사이타마현 카와구치시의 용역 업체 미야우치 해체 공업소(宮内解体工業所)에서 일했다. 거주지는 카와구치시 하스누마 298번지 사카에하이츠 201호(埼玉県川口市蓮沼298 栄ハイツ201)였다.

2013년, 보이스피싱 사기 혐의[73]로 체포됐지만 묵비권으로 일관한 탓에 1월 31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고 이는 전과로 남지 않았다.

같은 형무소 수감자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뻘인 자신에게도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 왔고 항상 밝고 평안했다고 하며 이렇게 극악무도한 강력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한다. 보통 강력범죄를 저지른 수감자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그는 그런 것 없이 복역 기간 동안 잘 지냈다고 한다.[74]

또 출소 후 이름을 바꾼 뒤에도 킥복싱 체육관을 다니거나 친한 후배와 유흥을 즐기는 등 잔인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가해자라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반성이나 죄책감 없이 일상생활을 했다.

출소 후 그와 친해진 사람들 모두 히로시가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범인이란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하며 그가 이 사건의 주범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명이 그에게 같이 술을 마시자며 불러내어 "당신이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주범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니죠?" 라며 떠 보자 그 이야기를 들은 히로시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며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사기 혐의로 체포되기 전까지 외제차를 타고 고가의 시계를 차며 명품 옷을 입고 다니는 등 청소년 시절에는 강간, 폭행, 상해, 강도가 주특기였다면 어른이 된 후에는 사기를 쳐서 무위도식하며 상당히 호의호식하고 희희낙락하면서 살던 것으로 추측된다.

2017년, 한 기자가 그의 여동생에게 사진을 받아 '실화 너클'이라는 잡지에 게재하였다. https://images.app.goo.gl/R1kEx4kD2w1tYfB16[75]

9.1.3. 기타

  • 재판 당시 "1년만 늦게 저질렀어도 너는 사형이었다"는 말에 "그랬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이런 짓을 하려면 미성년 시절 말고는 기회가 없다", "걔(준코)는 운이 나빠서 붙잡힌 것 뿐이다. 하필이면 나 같은 놈의 먹이가 됐으니"라는 망언을 했다.
  • 이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도 폭주족을 탈퇴한 동료를 찾아가 12시간 가량 집단 폭행해서 불구로 만들어 놓는다든가 지나가던 남성 2명을 다리 밑으로 집어던져 살인미수로 체포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미성년자라서 이렇다 할 처벌을 받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 극청회의 두목으로 몸을 담던 시절의 후배 및 동료들에 따르면 자신에게 한 번 표적이 된 대상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 집요하게 집주소와 동선을 파악시켜 야밤에 폭행해 반죽음 상태로 만들거나 납치, 강간을 하곤 했다고 한다.
  • 한동안 이 사진의 우측에 있는 남성이 출소 후의 히로시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그러나 우측에 있는 남성은 히로시가 아닌 한국계 미국인 종합격투기 선수 조 선이다. 공교롭게도 조 선 또한 범죄자인데, 그는 다수의 폭행납치, 윤간 5건, 강간 2건으로 징역 275년을 구형받았다. 수감 직후 교도소 안에서 재소자를 폭행해 사망케 하는 살인까지 저질렀으나 과실치사 혐의만 유죄가 인정되어 최종적으로 27년 형을 선고받았다.

9.2. 소년 B

<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파일:오구라 유즈루.jpg
본명 오구라 유즈루(小倉 譲) (개명 전)
카미사쿠 조(神作 譲) (개명 후)
출생 1971년 5월 11일 ([age(1971-05-11)]세)
도쿄도 아다치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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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사립고등학교 (퇴학)
가족 아버지(1946년생), 어머니(1945년생), 누나(1968년생)
신체 193cm
극청회의 부두목이자 피해자를 가장 집요하게 괴롭힌 인물.[76]

키 193cm의 상당한 장신이며, 건장한 체격과 흉측한 외모, 들끓는 듯한 굉음과 저음의 목소리가 특징이다.

가해자 일행들 중에서도 가장 체격이 컸으며 왼손의 손가락이 6개였고, 매우 심한 액취증이 있었다고 한다.

9.2.1. 성장 과정

1971년 5월 11일, 도쿄도 아다치구에서 지방 검찰 고위 간부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3살 위의 누나가 한 명 있었다.

1980년, 유즈루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 서로 사이가 나빴던 유즈루의 부모는 별거하게 된다. 별거 중이던 아버지는 외도를 하였으며 2명의 아이까지 생겼다.

아버지는 외도생활을 계속하기로 선택하여 유즈루의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유즈루는 누나와 함께 어머니의 밑에서 자라게 된다.

어머니는 혼자 육아를 했고, 밤일을 하고있었기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밤에 어떤짓을 하던 주의를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환경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유즈루는 매일 성실하게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중학교 때는 하키부 활동을 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그만 두게 되었고, 이 때부터 유즈루는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1987년, 사립 고등학교에 진학한 유즈루는 학교 내에서 폭력사건을 일으켜 퇴학을 당하게 되었고 그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미야노 히로시, 와타나베 야스시와 친해져 함께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다.

9.2.2. 출소 후 근황

1999년 출소한 뒤 이름을 개명했다. 형무소에서 컴퓨터에 대해 배웠기 때문에, 파견 사원으로서 2001~2002년까지 컴퓨터 관련 업체에 채용되어 일을 했다.[77]

중국인 여성과 결혼 후 일본에선 살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중국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이혼하게 되며 실패했다. 사실 당시 그 중국인 여성의 부모가 그의 실체를 알고 결혼을 결사반대했는데 중국 공항까지 흉기를 들고 쫓아가서 그녀의 부모를 위협하는 난동을 일으켜 중국 경찰에 체포를 당하기도 했다. 이들의 범죄가 해외까지도 알려진 셈이다. 하지만 별다른 조치나 처벌은 취해지지 않은 모양.

2004년 6월 4일, 아다치구에서 자신의 여자를 가로챘다는 이유[78]로 이소노 타카토시라는 사람을 트렁크에 태워 납치하여 어머니의 스낵바에 감금한 뒤 폭행하는 감금 치상 사건을 일으켜 전치 10일의 부상을 입히고 체포되었다.

그러나 재판장은 출소 후 컴퓨터 관련 업체에서 파견 사원으로 일하는 등 일정한 갱생 노력이 보인다며 징역 4년을 선고하였다. 이 감금 치상 사건 이후, 미디어의 취재에 대해 유즈루의 아버지는 유즈루가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피해자 이소노에 따르면 유즈루는 딱 봐도 180cm는 넘어 보이는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으며 첫눈에 그런 부류의 인간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상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유즈루는 이소노의 집에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고, 새벽에 다짜고짜 들어와서 냉장고를 뒤지고 술을 꺼내 그 자리에서 동료들과 밤새도록 술판을 벌인다거나 여자 이야기나 온갖 음담패설을 내내 늘어놓으면서 과거 이력을 자랑하고 "지갑이 사라졌다"면서 새벽에 찾아와 집안을 뒤집어엎은 적도 있다고 한다.

재판 당시 이소노가 그를 마주하는 게 두렵다며 재판 참석을 거부한 탓에 칸막이를 두고 재판을 진행했다. 이때도 그는 협박도 감금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감금이 아니라 이소노와 가게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성이 스스로 트렁크에 들어갔다." 등 전혀 신빙성 없는 발언들을 하면서도 너무나 여유로워 보였다고 한다.

피해자는 감금되어 있는 동안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그저 영문도 모른 채 용서를 빌어야 했고 살아 있는 게 아닐 만큼 지독하게 오싹했다고 한다. 피해자는 뺨에 손바닥만한 멍이 시커멓게 들었고 턱뼈와 앞니가 부서져 피가 철철 쏟아지는 동안에도 계속 맞았다고 한다.

사건 당시 그는 금고 앞에 서서 야쿠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금속 배트와 칼로 피해자를 위협하면서 "사람을 1명 죽이는 놈과 10명 죽이는 놈은 다를 게 없다. 나는 사람을 마음대로 구워삶는 여유를 배웠다. 검찰은 나의 노리개니 무슨 짓을 벌려도 풀려날 것이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게 해 줄까. 야쿠자를 우습게 알면 어떻게 되는가를 똑똑히 알려준다."고 협박했으며 평소 이 사건에 대해 "그 때 후배들을 끌어들인 것도 나고, 내가 진짜 주범이다.''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정말 그가 주범이라면 정작 진범에 대해 제대로 된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나 다름없다.[79][80]

사실 재판 당시에도 히로시는 "나는 준코의 온몸에서 고름과 진물이 쏟아져 나와 더러워진 이후에는 미나토 신지의 집에 잘 오지 않았고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납치하거나 강간했다.[81][82] 그러나 유즈루와 신지 등은 이 시기에도 준코를 지독하게 괴롭혔다."고 밝히긴 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는 히로시에게 대항할 수 없었기에 따른 것뿐, 우리도 피해자다."라는 망언을 지껄였고 심지어 이게 받아들여진 건지 지나치게 가벼운 형량을 받았다. 애초에 가해자들 중 자기 죄질에 상응하는 형량을 받은 놈은 없지만 말이다.

2004년에 4년형을 선고받았으니 출소한지 20년이 다 되어 갈 텐데도 근황에 대해 전혀 알려진 게 없다. 두 번이나 감옥에 다녀왔으니 어지간하면 밖에 나오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겠지만 다른 가해자들처럼 죽을 때까지 평생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은 변함없을 것이다.

특히 유즈루의 부모는 위자료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상황에서 주택과 고급 차를 구입하거나 준코의 묘지를 파손하는 등 전형적인 막장부모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은 더더욱 나쁘다.

9.2.3. 기타

  • 중학교 시절 지인은 그가 폭주족 선배인 고등학생 2명과 싸움이 붙었다고 했는데 "얻어맞으면서도 싸움을 멈출 줄 몰랐다"고 할 정도로 호전적이고 집요했으며 폭력적이어서 어디를 가나 싸움을 일으키고 다녔다고 한다.
  • 그의 지인 및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학생 시절에 손가락으로 튀어나온 못을 박아넣거나 차량 앞유리나 두꺼운 나무판을 주먹으로 단 한 번에 파손시키거나 알루미늄 캔을 한 손으로 찌그러뜨릴 정도로 강골인 인간흉기였다고 한다.[83][84]
  • 그는 엄청난 맷집과 괴력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와 싸운 상대들은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하고 몸이 단련 되었더라도 내 주먹이나 발길질 한 방에 기절하고 뼈가 부서졌다."라고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 그는 이 사건 당시에도 피해자를 1달 가량 하루 18시간 이상 겁탈할 정도로 체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다.
  • 이 범행을 저지를 무렵에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학생을 쫓아가 덮친다든가, 치마와 속옷을 벗기는 등의 성추행을 해서 보호관찰 대상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다.
  •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걸레 같은 계집"이라고 말한 것을 계기로 가정폭력을 시작했다고 한다.
  • 심각한 가정폭력을 저질러서 어머니가 가정 재판소에 몇 번이고 상담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B의 어머니도 동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아들이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에 분노해 "내 아들의 인생이 저 여자 때문에 망했다!"라며 준코의 묘를 부숴 버리는 미친짓을 저질렀다.
  • 공판 당시에는 "그래도 놀아줬으면 된 거 아니야?" 라고 말하며 유족 앞에서 낄낄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 성인이 된 후에도 한낮에도 "캬", "우우우"하는 괴성을 지르고 어머니에겐 "맞기 싫으면 내 앞에 있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 그의 현재 사진으로 알려진 창문을 닦고 있는 사진은 본인이 아니며 단지 개명 전의 이름인 '오구라 유즈루'의 동명이인이다. 앞서 말했듯 진범은 카미사쿠 조로 개명했으며 해당 사진을 보면 왼손의 손가락이 정상적으로 5개이기 때문에 그의 사진이 마치 범인인 것처럼 와전되는 바람에 동명이인인 당사자는 곤혹을 치렀다고 한다.
  • "여자(후루타 준코)를 삭발시키고 떼거지로 패며 강간하면서 비디오를 찍었는데 소리지르지 못하도록 턱관절을 탈구시키고 팔을 분지르면 까무러쳤다. 그 땐 너무나 즐거웠다. 하루는 돌아왔는데 몸에 불을 질러도 미동도 없길래, 코에 담배 연기를 피우고 숨을 쉬지 않는 걸 알았다."고 말하면서 웃음을 섞어 가며 자랑했다고 한다.

9.3. 소년 C

<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파일:미나토 신지.jpg
본명 미나토 신지(湊 伸治)
출생 1972년 12월 16일 ([age(1972-12-16)]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화학 전문 공업고등학교 (중퇴)
가족 부모님, 형 미나토 코우지(1972년생)
신체 약 160cm[85]
피해자의 감금 장소를 제공한 인물.

범인들 중 최연소이다. 그의 큰아버지는 야쿠자 고위 간부였고 부모는 일본공산당 소속의 진료소 간호사로 근무했으며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적기)에서 표창을 받기도 하는 등 열성적인 일본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일본 공산당 측은 "해당 사건은 일본 공산당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고 미나토의 부모를 제명시켜 버렸다.

9.3.1. 성장 과정

1972년 12월 16일, 공산당원 부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산당계 진료소의 사무국장이었으며, 어머니는 주임 간호사였고 연년생인 형이 한 명 있었다.

미나토 신지의 아버지는 굉장히 엄격한 성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식들이 집의 정해진 을 지키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그것을 보고받아서 혼을 냈고, 자식들이 자고 있더라도 때려서 깨운 뒤 혼내는 등 학대 수준의 징계를 하였다.

또한 신지의 아버지는 거의 매일 밤 을 마시고 귀가하였는데, 신지 형제의 증언에 따르면 1주일에 최소 한 번 이상은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1988년, 명문중학교를 졸업하여 도내에서 유일한 화학 전문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한 미나토 신지는 1학년 2학기부터 불량배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며 미야노 히로시를 비롯한 주범들과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미나토 신지의 자택 2층은 극청회의 아지트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한편 고등학생이 된 신지는 부모님보다 힘이 강해졌고 지금까지 부모에게 당하며 참아왔던 것들이 폭발하게 된다. 결국 미나토 신지는 학대에 대한 반발로 부모를 심하게 폭행하게 되었고, 힘이 없던 어린 시절과는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어 부모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해졌다.

9.3.2. 출소 후 근황

1994년경 출소하였다.

1995~1996년경, 아야세의 태국 요리점에서 무에타이 파이터로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프로 선수로 활동했다.[86]

하루 10시간 넘게 훈련하는 등 프로 무에타이 파이터로서도 결코 약한 편이 아니었다.[87] 하지만 그의 본성이나 행적이 숨겨지는 것은 아닌지라 등장할 때마다 야유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결국 2001~2002년경 은퇴했다.

2006년, 루마니아인 여성과 결혼해 오사카로 이사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결혼한 상대가 리히텐슈타인 국적이라고 한다.

2007년, 간병인 자격증을 취득했고 네야가와의 한 파칭코 가게에서 일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2008년경, 도쿄도 오타구 미나미카마타에 있는 아파트에서 생활을 했다. 도쿄의 아파트에서 살았을 무렵, 미나토 신지에게는 동거녀가 있었던 것 같지만 동거녀와의 싸움으로 인해 종종 소음 트러블을 일으켰고 다른 주민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끼쳤다고 하는데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밤 중에 남녀가 구론하는 목소리 특히 남성의 울음소리나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여러번 났고 아파트 방의 창유리가 깨지기도 했다고 한다.

2018년 8월 19일, 사이타마현에서 주차 문제로 같은 날 32세의 한 남성을 41cm의 삼단봉으로 내려치고 또 다른 1명을 8cm 칼로 후경부를 수 차례 찔러 살인미수로 긴급 체포됐다는 기사가 나왔다.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311688

이에 미나토 신지는 칼로 찌른 것은 맞지만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칼로 목을 찔렀다는 점에서 전혀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다.

2019년 11월 22일, 징역 1년 6개월, 보호 관찰부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

9.3.3. 기타

  • 예전부터 사람을 기분 나쁘게 노려보면서 고함을 지른다던가 아침이나 새벽 3시에 아래층의 천장 전등이 흔들릴 정도로 쿵쿵 뛰어 잠을 깨웠고 올라가 보면 문을 열어주지 않고 대답도 없어 다시 내려가면 또 다시 괴성을 지르면서 쿵쿵 뛴다든가 하는 짓을 끝도 없이 반복해 문 앞에서 만나 따지려고 했지만 "들려?"라고 말하며 지나간다든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도널드 트럼프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걸어 오거나 차 안의 짐을 빼고 있는 사람의 뒤에서 차 문을 쾅 닫아 버리는 등 이웃들을 온갖 방식을 동원해 집요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 2016년 12월, 아버지가 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한다.
  • 2010년경에 간사이에서 외국인 여성과 동거하여 을 낳았다는 소문이 있지만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9.4. 소년 D

<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파일:와타나베 야스시.jpg
본명 와타나베 야스시(渡邊恭史)
출생 1971년 12월 18일 ([age(1971-12-18)]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공업고등학교 (중퇴)
가족 부모님, 누나[88]

9.4.1. 성장 과정

1971년 12월 18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1985년, 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집단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1986년, 친누나가 히로시와 교제를 시작하게 되면서 히로시와 친해졌고 이 때부터 집단괴롭힘이 거짓말처럼 멈췄다고 한다.[89][90]

9.4.2. 출소 후 근황

1994년 경 출소하였다.

2018년 8월 24일, 살인미수를 저질러 체포되었다.
그러나 형량과 사건 경위 등 사건의 정확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9.4.3. 기타

  • 히로시와 연인 관계이자 약혼을 한 사이였던 야스시의 친누나는 남동생을 대신해 유가족들을 찾아가서 정식으로 사과하고 준코의 묘소를 찾으려고 했지만 유가족들의 거절로 무산됐다고 한다. 이미 유즈루의 어머니가 준코 무덤을 훼손한 적이 있어서 준코의 가족들은 무덤을 비공개로 하고 있다.
  • 그래도 가해자들 중 그나마 반성하는 모습[91]을 보여 4명 중 그나마 나은 취급을 받았으나 그도 훗날 살인 미수를 저질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역시 그 놈은 그 놈이다'라고 대차게 까였다.
  • 히키코모리로 살아가게 된 것으로 알려진 한편 용접공, 공조 장치 설치 등의 일을 전전하며 요코하마시 카나자와구의 친누나의 집에 얹혀 살고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누나는 히로시와 파혼한 후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9.5. 소년 E

<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본명나카무라 테츠오(中村 哲夫) (개명 전)
이와이 테츠오(岩井 哲夫) (개명 후)
출생 1971년 ([age(1971-12-31)] ~ [age(1971-01-01)]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히로시의 협박 때문에 강간에 가담한 공범. 가담에 거부하다가 주범들에게 폭행당했다. 중년이 된 후에는 고향의 술집에서 당시 사건을 별 생각없이 떠들고 다닌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겠지만, 이쪽도 악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9.6. 소년 F

<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 본명 이하라 코이치(伊原 孝一) (개명 전)
가키히가시 코이치(垣東 孝一) (개명 후)
출생 1972년 ([age(1972-12-31)]~[age(1972-01-01)]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E와 함께 C의 방으로 불려와 강간에 가담했다.[92] 사건 이후 소년원에 송치됐다. 출소 후 성인이 돼서 결혼해 딸 둘을 낳아 사이타마현 우라와시(현 사이타마시)에 거주했으나 잦은 문제와 범죄 행각을 일으켜서 쫓겨나 사이타마현 이루마시 또는 도쿄도 히노시로 이사간 것으로 밝혀졌다.

9.7. 기타 공범들

확실하게 확인된 공범으로는 남성 17명, 여성 1명이 있다. 위의 6인 이외에 타케우치 쿠니, 아이다 코이치, 츠즈키 히로시, 카도 아키라, 하기와라 카츠히코, 무라카미 아키히로, 나무 류스케, 이시카와 아카네[93] 등 대부분 극청회 소속이었다. 이들은 살인과 학대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공범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준코를 강간하는 일에만 참여하는 줄 알고 불려왔다가 엮이게 됐다.

공범 중 망보기 역할이었던 소년의 인터뷰에 따르면 '탈출시킬 기회도 있었고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들이 무서워서 하지 못했다'[94]고 했다. 이들은 취재하러 온 기자들을 폭행하고 온갖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히로시 패거리는 '사람을 샌드백처럼 장소 가리지 않고 어떻게 저 정도로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구타하고 상대가 울면서 용서를 빌거나 기절해도 폭행을 계속했다고 한다. 준코가 "나 이제 어떻게 돼요?"라고 묻자 공범 소년은 그들이 무서웠기 때문에 "명령 받아서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주범들은 부하들이 약간이라도 명령을 듣고 머뭇거리거나 준코를 적극적으로 폭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신발을 집어던지거나 2층에서 베란다 밖으로 집어던지거나 준코가 보는 앞에서 집단폭행을 가하는 등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위협했다고. 때문에 도저히 대항은커녕 신고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후에 준코가 어떻게 당했는지 알게 되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0. 판결

이 사건의 심각성이나 기타 죄책을 감안해도 일본 사법부의 판단은 엔자이와 직접적으로 유사하진 않더라도 일종의 병폐이고 소년범이라고 해도 과도한 선처를 한 점을 보아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볼 수 있다.

설사 사형이나 이에 준한 극형이 나올 성질의 범행이 아니더라도 법원의 양형 이유 등을 살펴보면 일단 도쿄 지방검찰청은 미야노 히로시부터 와타나베 야스시까지 총 4인을 "상호 공모에 의한 미필적 고의에 따른 살인, 외설 목적의 유괴, 약취, 감금, 강간, 사체유기 등의 각 죄로 피고인들이 가정 형편에 있어서 불우하게 성장했음을 감안해도 일본 소년범죄 사상 보기 드문 중대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매우 잔악하고 무자비하게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겨 사회적인 물의를 빚은 점을 참작해야 한다"면서 피고인 A를 주범으로 공소 사건의 발단을 만든 배후라며 무기징역을, 피고인 B를 "피고인 A의 최측근으로서, 피고인 A의 버금가는 지위로 하여금 공소 사건을 주동해, 종국에는 공소 사실에 기재된 범행을 자행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며 징역 13년을, 피고인 C와 D는 준코에 대한 범행에는 가담했지만 피고인 A와 B의 주동 하에서 소극적으로 응한 점을 참작해 각 부정기형으로 징역 장기 10년, 단기 5년의 형을 법원에 구형했다.[95]

하지만 1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피해자를 위 사건 공소 사실의 범죄로 인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이르렀다는 검찰의 주장은 인정되고, 그 범죄의 심각성 또한 반인륜적이여서 형사 책임은 무겁지만 아직까지 미성숙한 미성년자들에 의한 집단 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극단적인 사태에 놓인 상황에서 정상적인 사리 판단을 하지 못해 불행한 측면에 빠졌음을 감안해야 하고, 수감 생활 도중 반성문을 제출한 것을 보아 교정의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미야노 히로시는 무기징역에서 법원 선고가 가중 감경되어 1심에서는 징역 20년, 2심에서 최종적으로 징역 20년이 선고되었다.

심지어 돈을 받고 범인들을 변호해 주겠다고 자청하는 변호사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96]

2심 도쿄고등법원에 이르러 "피고인들이 반성하고 이후의 소년범으로서 교정 등의 갱생 필요성을 감안해도 유족이 엄벌주의로 처벌하기를 탄원하고 있고 해당 사건의 죄책이 사회적 통념에 비춰보아 매우 흉악하고 중하다"면서 1심에서의 양형이 가중돼 소년 A에게 징역 20년, 소년 B에게 장기 10년, 단기 5년, 소년 C에게 장기 9년, 단기 5년, 소년 D에게 장기 7년 단기 5년이 확정됐지만 유일하게 상고해 1심으로 확정됐다.

재판 기록에 의하면 실제론 이들 이외에도 가담한 100여 명의 가해자가 더 있지만 그들은 직접적으로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 대부분 약식절차로 처분돼 가볍게 처벌받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동생의 범행을 방관, 방치했다고 볼 수 있는 C의 형도 피고인 4인의 공범으로 살인 및 사체유기와 강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지만 소년보호처분을 받는 것으로 끝.

이들은 일본에 소년법이 없었다면 사형이 선고되었을 자들이다.[97]

당시 기록에 따르면 법정에서도 그들은 "준코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죽는다는 생각조차 할 여지가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A는 "준코는 단지 운이 없어서 바보 같이 잡혔던 것뿐이다."라고 말하고 반성조차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나가면서 자신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적반하장으로 "억울한 사람을 이렇게 끌어들이고 부끄럽지도 않냐"고 하고 욕설까지 퍼부었다.

게다가 그는 눈물을 흘리긴 했으나 그것은 피해자에게 저지른 짓에 대한 반성의 눈물이 아니라 병신 같이 잡혀 버린 내 자신이 불쌍해서 흘린 눈물이었다고 한다.

분노한 준코의 부모는 피고인 측의 면회 신청 및 성묘를 금지했고 그 비통한 심정을 재판소에 토로했다. 준코의 아버지는 재판 증언 당시 "피고인에 대한 원 판결의 과형은 너무 가볍다"고 했다. 그나마 형량을 제일 많이 받은 A도 준코의 부모 입장에선 죽일 놈인데 나머지도 미성년자라고 해도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다만 소년법의 적용뿐만 아니라 사형 판결을 내리는 일본 사법부의 관행에 비춰 봤을 때 판사들이 사형 판결까지 나올 성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말도 있긴 하다.

다수를 살해하거나 유괴살인 혹은 살인 전과가 있는 상황에서의 추가적인 살인은 사형 선고가 원칙이지만 그 외의 살인에 대해선 가급적이면 사형 선고를 회피하거나 주범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일본 사법부의 관행이었기에 20년 이상 선고가 불가능한 소년법의 적용과 더불어 A에게만 엄한 판결이 나온 것이란 분석이다.

현재도 달라진 것이 거의 없어서 간혹 나오는 일본의 사형 집행 기사를 보면 사형수 대부분이 사람을 두 명 이상 죽이거나 살인 재범, 유괴살인 등을 저지른 범죄자들 뿐이다.

11. 관련 매체

11.1. 다큐멘터리

1989년 방송된 다큐멘터리.
범인들의 인적사항과 주변인들에 대한 인터뷰가 주된 내용.
극초반에 히로시의 어머니가 기자를 피해 도망가는 모습과
범인들이 가정재판소에 송치되는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1995년 발매된 다큐멘터리 비디오(부제: 망가진 17세들 ~壊れたセブンティーンたち~)
범행을 재연한 영상들이 있어 사건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현재 연령제한이 걸려있지만 아래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

위의 링크에서 재생이 안된다면 밑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1시간 분량의 원본 영상이 7개의 파트로 나눠져있다.)
1, 2, 3, 4, 5, 6, 7

11.2. 영화

  • 나카무라 히로무 감독의 영화 콘크리트
    2003년 출판된 논픽션 《17세, 악의 이력서》를 바탕으로 2004년에 제작된 영화. 제작사에 수많은 협박 전화 등이 와서 개봉이 미뤄졌으며 당사는 '희망이 없는 청소년들의 미래를 그린 의도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유감'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이 사건을 범인 소년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자세한 건 영화 참조.

11.3. 만화, 소설

  • 진 현대엽기전
    상업지 작가인 우지가 와이타가 그린 만화이다. 영화보다도 더한 막장. 작가가 서문에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묻히고 있는 데다, 이런 일을 세상에 알려서 다시는 같은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기 위해 본 작품을 그렸다"고 적어 놓기는 했으나, 피해자가 납치당한 뒤 강간, 폭행, 고문, 살해당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이 내용의 전부다. 피해자가 강간당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성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폭행과 고문을 적나라하게 전시하고 있다.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렸다는 말은 핑계일 뿐 작가료나물 소비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 천사의 나이프
  • IWGP 시리즈 2권 <소년 계수기> 中 '물 속의 눈동자' 편
    치하야 여고생 감금 사건이라는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 온 사건이 등장한다. 성폭행 후 성기에 불을 붙여서 화상을 입히거나 하는 등 비슷한 부분이 많다.
  • 소년탐정 김전일 시즌 2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켄모치 경부의 살인의 중심 소재인 3년 전의 사건의 모티브이다. 그 때문에 여기 나온 가해자들도 실제 사건의 가해자들 못지 않은 말종 흉악범들이다. 다만 이 만화가 청소년들도 보는 만화이다 보니 해당 작품 내에서의 3년 전 사건의 수위는 실제 사건과 비교하면 많이 순화된 편이다. 물론 그 피해자인 토가미 마리나도 몹쓸 악행들을 당하다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 17세.(17歳。)
    후지이 세이지가 글을 쓰고 카마타 요지가 그림을 그린 합작. 부제는 '여고생 감금 살인 사건'.
    모티브는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이지만 후지이 세이지가 여러 청소년 범죄에 대해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재해석됐다. 청소년 범죄는 어째서 일어나는가, 왜 아무도 피해자를 구하지 못했는가, 법과 사회의 문제점, 어떻게 하면 같은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까 등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 Crónica de una muerte anunciada(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데 여기선 주인공이 살해당할 것을 알고도 그대로 방관한 마을 사람들이 나온다. 어찌 보면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과 비슷하다. 방관한 이유도, '농담인 줄 알았다.' 등의 변명으로 일관한 것도 비슷하다. 주인공이 죽기 직전에 주인공에게 경고하기 위해 주인공을 찾아다닌 의대생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 휴먼버그대학교
    이쥬인 시게오 에피소드에서 일부 각색되어 묘사되었다. 주범은 20년 동안 복역하고 피해자의 아버지를 폭행해 돈을 빼앗았다 피해자의 아버지가 의뢰를 걸어 능지형 고문을 43일 동안 받고 죽는 것으로 표현된다.

11.4. 영화

11.5. 노래

12. 유사 사례



[1] 범행 중에 생일이 지났다.[2] 범행 중에 생일이 지났다.[3] 남성 17명, 여성 1명[4] 주범들은 모두 남성이지만 주범 외 범인들 중 여성 비행 청소년 공범도 한 명 있었다.[5] 한국의 강호순, 유영철, 조두순 등의 흉악범죄자가 한국에서 갖는 인지도와 비슷하다.[6] 오빠와 남동생이 있었다고 알려졌지만 무남독녀 외동딸로 더 많이 알려진 만큼 형제자매에 관한 정보는 사실확인이 필요하다.[7] 학교에서 손꼽는 우등생이었음에도 대학에 가지 않고 가전 판매점에 취직한 이유는 일본은 한국과 달리 대학은 가는 사람들만 가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8] 실제로 미야노 히로시는 야쿠자 조직인 극동회 청년부 산하 조직인 극청회의 두목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극청회에 관하여 아무 소식이 없는데 히로시가 수감된 후 히로시 본인이 조직에서 파문이나 절연을 당했을 확률이 높아 히로시가 두목인 극청회도 아예 상부에서 파문 또는 절연되어 와해됐거나 다른 조직원이 새롭게 조직을 이끌었을 것으로 추측된다.[9] 1995년 제작된 다큐멘터리에서는 히로시가 장난삼아 준코 머리에 을 뱉어 붙이는데 실제로는 껌을 씹고 있지 않았다.[10] 준코는 사고 한번 안 쳐본 모범생이라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11] 사실 당시 준코는 6세 연상인 카와무라(川村)라는 이름의 23세 남성과 연애 중이었다. 이 남성은 기자와의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는데 준코의 친구와 자신의 친구가 연애 중이었고 이들 커플과 동행하여 1987년 여고생들의 여름 방학에 함께 별장으로 여행을 가면서 알게 되어 연애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굳이 극청회 패거리에게 밝힐 이유도 없고 밝힌다고 하더라도 남자친구까지 납치 또는 해코지를 당할 수 있으니 거짓말로 둘러댄 것으로 추정된다.[12] 당시 2층에서는 미나토 신지와 그의 형이 살고 있었다.[13] 2024년 5월 24일 기준 한화 약 2만 6천원.[14] 바로 집 밖으로 탈출하면 살았을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도망치면 야쿠자에게 살해당할 것"이란 히로시의 협박이 떠올라 전화기로 향한 모양. 실제로 히로시는 "이때 준코가 짐을 싸 놓고 옷도 처음에 입었던 교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고 증언했다.[15] 사진으로 추정하건대 도쿄도 고토구 와카스 2-3-2(東京都江東区若洲2丁目3−2) 주변으로 보인다. 사건 이후에 창고가 세워졌다.[16] 사람이나 시체 등을 콘크리트 안에 넣어 굳히는 행위.[17] 도쿄만에 버리기 위해 소년들이 살던 아다치구에서 멀리 떨어진 도쿄만 한가운데 있는 매립지인 고토구 와카스까지 왔으면서도 구태여 코앞의 바다를 두고 공터에 유기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바다에 유기하면 시신이 떠오를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들만 알고 있는 매립지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김주열 열사가 떠오른 건 묶어놓은 체인이 풀려서 그런 것이고 그 콘크리트 드럼통은 무게만 305kg에 달하기 때문에 쉽게 떠오르진 못할 것이다.[18] TBS 테레비에서 방영했던 야쿠자 드라마. 일본판 야인시대라고 생각하면 된다.[19] 담당형사가 이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건이 영영 묻혔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죽은 준코의 영혼이 담당형사에게 마법을 건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20] 이전에 유즈루와 신지 등 부하들이 여성을 상대로 납치강간치상을 저질러 소년원에 들어가 있었는데 히로시는 이미 이들이 진상을 불었다고 착각했다.[21] 아무리 막나가는 불량 청소년이라도 이렇게까지 극악무도한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형사가 의심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로시의 착각과 달리 부하들의 자백은 없었던데다가 잡혀온 이유도 이 사건과 무관했다.[22] 대부분의 시신 유기 사건은 사망한 지 몇 년이 지나서 시신이 백골로 발견되어 신원 확인에 며칠씩 걸리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데 준코의 시신은 그나마 일찍 발견돼서 바로 다음날 신원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일찍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저 꼴이라는 건 그만큼 피해자가 심각하게 당했다는 뜻.[23] 준코의 부모는 딸의 시신이라도 찾게 해 줘 고맙다면서 히로시의 담당 형사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24] 부검 결과와 사인 문단 역시 마찬가지로 매우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커서 걸러서 보는 것이 좋다.[25] 이 정도면 마취 없이 수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수준이다.[26] 육안으로도 근육은 물론, 뼈가 보이는 부분이 일부 있었을 것이다.[27] 200여개 정도가 그녀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고 한다.[28] 이는 유즈루가 준코의 머리를 우스꽝스럽게 밀어버린 것도 있다.[29] 다큐에서도 마지막에는 준코가 소년들의 말을 잘 듣지 못한다.[30] BMI 상 165cm에 53kg면 19.47로 정상으로 뜨지만 165cm에 36kg이면 BMI 13.22로 말기 암투병 환자나 세상에 이런일이에서나 볼 정도로 심각한 저체중이다.[31] 준코가 1971년생 일본인 여성임을 감안하면 장신인 셈이다.[32] 오구라 유즈루가 데려온 대형견의 것으로 추측된다.[33] 내용은 '린치 살인 피해 여고생, 반 친구들과 눈물의 이별'[34] 오열하는 여학생들 앞에 전통 의상을 입은 남자가 보이는데 일본신토식 장례에서 망자의 명복을 비는 사람이다. 그리고 준코의 친구가 추도사를 읽을 때 집 안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조용히 추도사를 듣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고 그 옆에서 망연자실한 채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사람이 어머니다.[35] 준코 때문에 자신과 아들의 인생이 망가졌다며 피해자인 준코의 묘지를 훼손했다[36] 추도사는 영상의 1분 9초부터 들을 수 있다.[37] 1989년의 물가를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당시 일본의 버블경제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최소 수십억 정도로 볼 수 있다. 미야노 히로후미가 금융업을 해 재산이 대단했다고 한다. 다만 버블경제 시절이어서 이 정도는 쉽게 버는 사람들도 많긴 했다.[38] 돈을 받으면 자칫 법적으로 '합의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합의금 성격이라 정말로 법적인 처벌을 원한다면 안 받아야 한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가해자 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가 가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참작되어 처벌을 피하거나 약한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 애당초 합의금의 액수를 떠나 자기자식의 목숨을 한낱 합의금 따위로 바꾸려는 부모는 막장부모 외에는 없을 것이다.[39] 후술하겠지만 아들이 2006년에 가석방될 때까지는 그 자리에서 이불 판매업을 하면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이혼 후 남편과 아들과 별거했어도 도쿄에서 그대로 살아 왔던 것으로 보인다.[40] 한화 약 500만원.[41] 주소 사이타마 현 야시오시 중앙 4-21-12[42] 상술했듯 C는 자신의 어머니가 준코의 집에 전화한 사실을 알게 되자 어머니를 4시간 동안 구타한 패륜아다.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와 형도 폭행하는 집 안의 폭군이었다.[43] 다만 C는 자기 친부모조차 폭행하는 인간말종이었으니 C의 부모는 사건에 대해 몰랐지만 C가 자기 부모를 시켜서 증거인멸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44] 보나마나 수영복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당대 고령층을 자극시키기 위해 그런 것으로 추정.[45] 소년들은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도 지나가는 여성을 강제로 차에 태워 강간하거나 절도하는 등의 범죄를 최소 90건 넘게 저질러 왔다고 한다.[46] 그가 언급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은 범행 당시 가해자들의 나이가 15~18세였기 때문에 소년법에 따라 20년 이상의 형벌을 받지 않은 것이다.[47] 정황상 날짜별로 따지면 유아납치 살해사건 쪽이 먼저 발생한 사건이다.[48] 다만 공구리 문서에 나와 있듯이 콘크리트로 시체를 매장해도 악취가 나서 시신 자체는 언젠가 발견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면 너무 늦게 발견돼서 신원 확인조차 못 했을 것이다.[49] 하지만 오히려 미성년자들이기 때문에 더 흉악해질 수 있다. 미성년이라는 것은 제대로 된 가치관 형성이 아직 덜 형성된 시기인 만큼 어떻게 살고 어떤 환경을 겪느냐에 따라 정말 양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부류다. 현재 한국에서 자신이 촉법소년이랍시고 만행을 일삼는 청소년들이 많아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50]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많은 낡은 아파트들이 재개발 지역으로 정해져 주민들을 다른 데로 이주시키는 건 그 당시 일본에서 흔했다.[51] 당시 일본의 가옥은 내진설계를 위해 법적으로 목조 가옥으로 지어야 해서 방음이 되지 않았다. C의 집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수십 채의 주택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주택가였다.[52] 2019년에도 500여 점에 달하는 인간과 동물의 백골이 민가에서 발견됐고 90년대 최악의 소년 범죄라고 불리는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드러났다.[53] 즉, 당시에 거주했다가 다른 지역으로 사라진 이들도 알고 보면 후루타 준코와 비슷한 사건들의 피해자도 있었고, 가해자도 있었고, 목격자 내지 방관자도 섞여 있었다. 가해자들이 일으킨 사건의 피해자가 후루타 준코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54] 애초에 문제를 따지자면 아다치구가 문제였지 사이타마현 미사토시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름 정상적인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에 해당 사건을 문제삼아 굳이 갈아엎을 필요가 없다.[55] 거기다 피해자의 연고지이다 보니 피해자의 이웃들, 피해자의 학교 동창도 상당수 살고 있다. 많은 세월이 지나 이제서야 잊을 법 한 상처를 타지에서 온 외부인들이 다시 건드린다고 생각해 보자.[56] 당연히 범죄 척결이라는 정의로웃 뜻으로 행한 것은 아니고 그는 이 때에 대해 "자신의 난폭함과 무력을 강조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역시 엄청난 불량배였고 이들보다 더 심각한 범행들을 끝도 없이 저지르고 다녔다.[57] 마치 한국인들이 강호순, 유영철, 조두순에 대해 피해자 가족, 지인이 아니어도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58] 토카이대학 부속 사립고등학교.[59] 일본에서는 법원의 허가를 받으면 성씨를 변경할 수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해당 집안의 명시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60] 사건이 터진 후에는 트럭운전사로 일했다고 한다.[61] 상술했듯이 사건 후에는 이불 장사를 했었다.[62] 198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 일본 불량배들이 즐겨 하던 헤어스타일.[63] 5학년 때부터 시작된 가정폭력은 점점 심각해졌고, 나중에는 어머니의 온몸에 타박상을 입힌다거나 갈비뼈골절시켜 중태에 빠트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64] 2020년대 한국 중1 남학생 평균키가 160cm 안팎이므로 1980년대 일본인이 만 12~13세에 160cm 정도면 오히려 평균 이상의 키다. 체격이 어느정도 있어야 하는 운동부 치고는 미야노 히로시가 왜소했다는 의미. 이 사건을 일으켰을 당시엔 키와 체격이 더 커진 상태였을 것이다.[65] 도쿄 전체를 통틀어서 동체급에선 최강이었다는 의미.[66] 또한 미야노 히로시의 사진을 보면 귀가 뭉개진 상태(만두귀)가 아닌데, 그만큼 교착상태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히로시가 유도에 큰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세계 최고 수준의 유도실력을 가진 국가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67] 유도부 선배들이 그의 내면 속에 잠들어가던 잔혹성과 폭력성에 불을 붙여버린 셈.[68] 현재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69] 한화 약 2000만원.[70] 신주쿠 카부키초를 근거지로 하는 야쿠자 조직.[71] 일하던 꽃가게가 극동회 간부의 가게다. 후일 이 가게의 주인인 43세 극동회 조직원은 아동복지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이유는 히로시의 패거리가 밤까지 가게에서 일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72] 어머니는 이혼 후 남편과 아들과 별거에 들어갔음에도 2006년까지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고 주변에서 그대로 살다가 아들이 석방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들이 찾아올 것이 무서웠는지 주소도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이사를 갔다. 이후 신흥 사이비 종교에 열광하게 되었다고 한다.[73] 파칭코 필승법으로 사기를 쳤다고 한다.[74] 반면 일당들 중 가장 힘이 약한 와타나베 야스시는 형무소에서 폭행을 당해 장애가 생겼다.[75] 그의 여동생 역시 오빠랑 사이가 가깝지도 않으며 오히려 초등학생 때 오빠가 일으킨 사건 때문에 오빠에 대해선 치를 떨고 있다.[76] 사실 오구라 유즈루는 감금 도중 준코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녀를 짝사랑했다. 하지만 1988년 12월 7일, 준코가 몰래 경찰에 신고전화를 하려다가 히로시에게 들켜버렸고, 이로 인해 오구라 유즈루를 비롯한 히로시의 부하들은 화가 난 히로시에게 폭행을 당하는 등 크게 혼이 났다. 이때부터 그녀를 좋아하던 유즈루의 마음은 증오심으로 바뀌었고 그 누구보다도 준코를 집요하고 잔인하게 괴롭혔다.[77] 2004년 재범 당시 이곳 직원들에 따르면 출소 후에도 깡패처럼 산 모양이고 실제 야쿠자 사무실에도 드나들었다고 한다.[78] 사실은 자신의 애인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었다.[79] 아버지가 검찰 고위 간부인 점을 생각하면 그 빽을 이용해서 중형을 피했을 가능성도 있다.[80] 하지만 그가 주범이라면 '어떻게 미야노 히로시가 주범 격으로 기소됐다는 건가'라는 의문이 생긴다.[81] 사건이 진행 중이던 12월경 미야노 히로시가 "납치한 지 1달은 된 거 같은데, 온몸이 피투성이에 피고름 때문에 썩은 냄새가 나서 먹을 수도 없게 됐으니 그만 돌려보내자"고 말했다. 하지만 "신고할 수 있으니 위험하다"며 미야노 히로시를 말린 오구라 유즈루 때문에 준코는 집에 갈 수 없게 되었다.[82] 피해자가 납치되기 17일 전 11월 8일에 19세 여성을 히로시 패거리와 함께 납치했는데 이때 그가 "소년원에서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오오아라이에 가자", "오오아라이의 파도가 높고 거칠다"고 말하면서 으름장을 놔 도망 의지를 상실케 한 뒤 패거리들이 매우 난폭하고 거칠게 집단 강간을 했고 금품을 빼앗은 뒤 나체가 된 여성을 버려두고 도망쳤다고 한다. 이때 피해 여성이 영구장애를 입었다는 말도 있다. 여러모로 그들이 얼마나 악질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준코가 죽고 난 뒤 히로시가 3월 29일 네리마 소년 감별소에서 조사받았던 사건이 이 사건이다.[83] 다만 인간의 손뼈는 매우 섬세하고 약해 평생 복싱으로 주먹을 단련해 온 마이크 타이슨도 맨손으로 사람을 패다가 주먹이 골절될 정도다. 고속 주행 중 노후 트럭에서 떨어지는 판스프링도 뚫지 못할 정도로 튼튼한 앞유리를 맨손으로 파손시킨다는 것은 과장일 확률이 높다. 아니면 손이 다치니까 시도를 안 할 뿐이거나.[84] 차량의 앞유리는 아치형인 데다 옆유리와 두께, 강도 측면에서 비교가 안 되게 두껍고 단단해서 망치로도 깨기 어렵고 중량급의 격투기 선수들조차 맨주먹으로는 깰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배우 조정석 역시 운동을 잘 하고 탄탄한 몸매를 가졌음에도 영화 뺑반 촬영 당시 차량 앞유리를 골프채로 손쉽게 깨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20대 가량 가격해야 균열이 생기면서 파손됐다고 한다. 반면 차량 옆유리는 창문 유리나 얇은 나무판, 기껏해야 타조알 정도라서 건장한 성인 남자라면 일격에 파손되며 중학생이나 여자라고 해도 몇 대 치면 부서진다. 다만 강도 자체는 약해도 날카로운 유리조각으로 인한 부상 위험이 있다.[85] 목격자들에 따르면 키가 160cm 정도 되어보였다고 한다.[86] 사건 당시에도 그의 방에는 각종 권투 훈련 기구와 아령, 덤벨 등이 있었다고 하며 이것들은 준코를 고문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87] 한국에는 전적이 변변치 않았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일본 기사를 뒤져보면 45전 9패였다고 한다.[88] 미야노 히로시의 약혼녀였다. 사건이 발각된 후 파혼한 것으로 추정.[89] 당시 아다치구야쿠자, 청소년 야쿠자, 폭주족 등이 꽉 잡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야쿠자 출신 정치인인 조부와 야쿠자 고위 간부 고모부를 빽으로 둔 히로시의 영향력은 고작 10대였음에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히로시의 약혼녀가 야스시의 누나였기 때문에 함부로 야스시를 건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90] 빽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히로시 자체가 싸움을 굉장히 잘하고 강했기 때문에 두려워했을 것이다.[91] 준코가 가혹행위를 당하고 난 뒤 자신에게 언제 집에 돌아갈 수 있냐고 질문했던 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다.[92] 이후 코이치가 집에 귀가해 형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그의 형이 경찰에 신고해 2명의 경관이 C의 집에 방문했으나 A 패거리의 거짓말에 그냥 돌아갔고 사건이 밝혀진 후 해당 경찰들은…[93] 위에 나온 여성 1명이다. A와 함께 준코의 얼굴에 매직으로 수염을 그리며 놀렸다.[94] 소년들은 밤늦게까지 놀다가 늦잠을 자기 일쑤였는데 그 틈을 타서 몰래 준코를 밖으로 내보내고 망을 보는 것이었다.[95] 이 사건이 일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무렵에 검찰은 위 소년 4인을 소년부에 송치했다가 소년부 판사의 역송치 결정으로 일반 형사재판을 진행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96] A는 구치소에 있는 동안 어떤 책을 읽곤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큰 중죄인지 깨달았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 서술했듯이 출소 후에도 범죄를 저지르는 등의 행보를 일으킨 것을 보아 거짓된 눈물일 수도 있다.[97] 다만 "이런 극단적인 일화 때문에 소년법을 폐지하는 건 UN 아동권리협약으로 무리"란 게 일단은 일반적인 주장이다.[98] 피해자가 가혹행위를 당한 기간도 대략 40일 정도고 가해자가 4명이라는 점, 그리고 온갖 극악무도한 육체적, 정신적, 성적 가혹행위가 자행된 것까지 굉장히 유사하다.[99] 이 사건은 가해자가 4명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피해자가 1명이지만 고의적인 살인이라는 점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이 사건의 주범격인 하기와라 카츠히코(19)와 우메자와 아키히로(19)에게는 무기징역을, 무라카미 히로키(19)에겐 징역 10년을 선고하고 비교적 혐의점이 작은 소년(16)은 소년원에 수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