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1 00:53:32

환향녀

還鄕女

1. 개요2. 역사적 배경3. 조선사회에서의 경우4. 조선시대 속환해 온 여인들에 대한 언급5. 기타6. 관련 링크

1. 개요

임진왜란병자호란등 조선시대에서 벌어진 전란 속에서 적국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을 뜻하는 말.

의외로 조선시대때 쓰여진 말로 많이들 생각하나 사실 병자호란 이후 당대에 환향녀라는 단어가 사용된 증거는 전혀 없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아예 사용되지 않았으며, 당대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환향' 대신 돈을 주고 데려온다는 뜻으로 '속환(贖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1] 대체로 해방 이후 일부 지식인들이 환향녀 유래설을 제기한 것이 무분별하게 확산되어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진 결과로 추정된다.[2]

즉 후대에 만들어진 용어이며 당시의 표현은 아니나 "전란에 휘말렸다가 돌아온 여성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후 설명할 이야기들을 가리키는데 적절한 표현이라 자주 보여지는 것이다.

종종 화냥년의 어원이 되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던 단어이나 실제로는 어감만 비슷할 뿐 전혀다른 유래를 가진 용어다. 오늘날 화냥년창녀를 의미하던 중국 외래어 '花娘'의 중세 한국어 발음인 '화냥'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며 일제강점기에도 화냥년의 어원을 '환향(還鄕)'에서 찾은 사례는 없다. 자세한 것은 화냥년 항목을 참고.

이와 마찬가지로 병자호란에서 비롯되었다는 잘못된 속설이 나도는 단어로 호로자식이 있다. 어원에 대한 여러가지 설 중 하나가 병자호란때 끌려간 여인들이 강간당해 낳은 사생아를 말한다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호로(胡虜)는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니 호로자식은 그냥 오랑캐에 빗대어 욕하는 것일 뿐이다.

2. 역사적 배경

전근대 사회에서는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전쟁 포로는 노예로 간주되어 일단 포획자의 소유물이 되었다.[3] 이는 만주족뿐만 아니라 서양-중동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만주족은 생산가능한 인구가 매우 적었고 더구나 명나라와 전쟁중이었던 만주족 남성은 전원 군인이었으므로, 포로로 잡은 한족이나 조선인들을 붙잡아 노예로 활용했으며 여성과 아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일부 신체 건장한 노예는 청군으로 편입해 최전선에 화살 받이로 전진 시키기도 하였다. 도망치면 죽음 뿐이었으므로 이들에게는 군대가 빨리 전쟁에 승리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노예는 물건취급을 받았으므로, 몸값을 내면 양도의 개념으로 노예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경로로 만주에서 노예로 살던 조선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성노예 복무를 했던 여성들은 좋은 시선을 받지 못했다. 여인들은 몇 년의 수치 끝에 간신히 고국에 돌아오는 데 성공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따뜻한 환대가 아닌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라는 모욕과 비난이었다.

3. 조선사회에서의 경우

“신의 외아들 장선정의 처가 병자호란 때에 잡혀갔다가 속환되어 지금은 친정에 있습니다. 예전처럼 부부로서 함께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게 허락해주십시오.”
1638년 인조 16년에 신풍부원군 장유가 자신의 며느리 문제로 인조에게 보낸 글
환향녀들은 친정이나 조정에서 대가를 지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남편 또는 시댁으로부터 이혼을 강요받았다. 임란과 호란이 대표적인 예시로 특히 지체높은신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은 집안과 사회로부터 곱지못한 시선과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왜냐면 그들의 입장에서 그녀들은 "오랑캐에게 더럽혀져 주변 망신시키는 집안의 오점" "조상님들께 제사를 올리는데에 있어 정절을 잃은 여인이 받들수 없다." 였기 때문이다.[4] 당장에 당시 영의정조차 며느리가 정조를 잃었다면서 이혼을 허가해달라고 징징거렸을 정도였다. 또한 반대로 사위가 자신의 딸을 버리고 새장가를 들려 한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임진왜란 때는 상황이 나아서 일본군에게 끌려갔던 여자들 문제로 잡음이 덜했고 선조의 보호와 이원익 등의 중신들이 이혼 문제에 대해 강하게 극딜을 하면서 문제가 없었지만 병자호란 때는 이러한 문제에 대처가 미흡했는지 많은 고충이 있었다.

당시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조정에 이혼을 시켜달라 단체집회를 열어 항의했을 정도로 환향녀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런 모욕에 인조와 양반들 사이에서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비판했을 정도였다. 사람이 사람을 어찌그리 쉽게 내칠수 있냐는 입장과 집안과 종사를 지키는게 중요하다는 입장이 대립하였고, 좌의정 지천 최명길과 그녀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깨어있던 관료들이 청을 올리자 인조도 최명길의 주장에 매우 동감하며 "부녀자들을 내치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선언이었기에 집안의 안위가 우선인 사람들이 임금의 말을 신하들이 제대로 들을 턱이 없었고 결국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재혼 또는 첩을 두는 길을 선택한다.

조정에선 사대부들과 입장이 달라서 임진왜란 이후 인구가 격감했기 때문에, 포로가 된 사람을 죽어라 내버려두는 식의 멍청한 짓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던 조선 정부는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 꽤 노력했으며 안되면 국가 재정으로 포로의 몸값을 지불해서 데려오기도 했다. 도망쳐 온 사람들도 겉으로만 송환하겠다고 했을 뿐 실제로는 숨겨주는 일이 흔했다. 또한 여인들이 홍제원의 물에 목욕을 하면 깨끗해진 것으로 간주하고, 난리에 끌려갔다는 이유만으로 이혼하거나 여성을 내치는 것을 금했다. 즉 해볼 건 다 해봤다.
신풍부원군 장유가 예조에 단자를 올리기를 "외아들 장선징이 있는데 강도의 변에 그의 처가 잡혀 갔다가 속환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달라"고 하였다. 전 승지 한이겸은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되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한다는 이유로 그의 노복으로 하여금 격쟁하여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였다. 형조에서 예관으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인조실록』 16년 3월 11일
조선 중기인 이때까지만 해도 사대부와 달리 평민들은 이혼이 자유롭기 때문에 이혼한 여자도 꽤 많았다. 조선시대에 특히 과부들이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이 집단거주하는 동네나 상부상조하는 모임도 많았다. 그러므로 정신적 고통이야 당연히 심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의외로 이들이 혼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는 고질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사서를 보면 아내가 몰래 염색 같은 수공업이나 임노동,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것을 발견하고 불같이 노해 이를 나무라는 관리를 청렴하고 안분자족함을 실천한다며 칭송하고, 반대로 누구누구 안사람은 부업한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왕왕 보이는데, 관리들의 안사람들이 쉽게 경제활동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은 바로 '만성적 노동력 부족'이라는 저간의 사정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4. 조선시대 속환해 온 여인들에 대한 언급

좌의정 최명길이 헌의하기를, "(…) 신이 전에 심양에 갔을 때 출신 사족으로서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 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듯이 하여,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으로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차 차례로 가서 속환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물정으로 참작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이겸의 딸에 관한 일은 별도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심양으로 갈 때에 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자못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다가 사하보에 이르러 굶어 죽었는데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 주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이 심양에 관사에 있을때,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속하려고 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위배하고 값을 더 요구하자, 그 처녀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가령 이 두 처녀가 다행히 기한 전에 속환되었더라면 반드시 자결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비록 정결한 지조가 있더라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렵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을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한이겸이 상언하여 진달한 것도 또한 어찌 특별히 원통한 정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이 뒤로는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는 합하는 자가 없었다.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3월 11일 갑술 2번째기사, 신풍 부원군 장유가 포로로 잡혀 갔다 돌아 온 부녀자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 계하다 中

참고로 이런 최명길의 말에 대한 사관의 평은 이렇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3월 11일 갑술 2번째기사, 신풍부원군 장유가 포로로 잡혀 갔다 돌아 온 부녀자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 계하다 中

후대에는 최명길을 비판하는 시각이 주류를 차지했는데, 이는 성리학의 교조화가 이뤄졌다는 것이 대중적인 시각이나 좀더 연구하고 논의해볼만한 문제이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저렇게 이혼을 하든 소박을 놓든 저 여인들은 모두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의 돈을 주고 데려온 여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당시 기록에는 저렇게 가족을 속환해오기 위한 재물 마련을 위해 고심했던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5]

5. 기타

2008년 리메이크된 전설의 고향 최종부에서 환향녀에 대해 다뤘는데, 고향의 박대에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환향녀들이 원귀가 되어 남자들을 홀려 죽이고 제삿나무에 교수해 놓는데, 남편은 자신의 처였던 환향녀를 구하기 위해[6] "저 세상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자결한다. 부부는 결국 죽어서 만나지 못한 채 서로를 애타게 부르짖으며 성불하는 결말로 일단 막을 내린다. 하지만 전부 수습된 뒤에도 여행객을 다른 환향녀가 홀리는 모습이 나오면서 찝찝하게 끝이 난다.

6. 관련 링크



[1] 속환이라는 개념은 병자호란 이전부터 쓰이던 개념이다.[2] 예컨대 춘원 이광수가 1948년에 쓴 글인〈나의 고백[7]〉에 홍제원에서 목욕한다는 전설에 대해 쓰고 있지만 환향녀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만약 이광수가 환향녀가 화냥년의 어원이라는 이야기를 이전에 들은 적이 있다면 이 글에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에 환향녀라는 단어는 이광수가 저 글을 쓸 시점에도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다분하다.[3] 설사 포획자가 노예로 취급하진 않아도 몸값지불이든 협정으로 인한 포로교환, 포획자의 석방 등 자유의 몸이 되기 전에는 포획자의 소유물이였다.[4] 일부 야사에선 청군이 여자들을 끌고 갈때는 그래도 연약하다고 말을 내주기도 하고 그걸 남자 조선포로들이 끌게 했는데, 남자 포로들이 지금 오랑캐들에게 잡혀가는데 '정절을 지켜라!'라고 여자들을 말에서 끌어내려 죽이기도 했다는 얘기가 있다.[5] 주로 담배를 마련해 많이 속환해왔는데, 당시 만주에서는 담배가 자라지 않은데 비해 흡연 인구가 폭증해서 담배가 조선보다 수십 배나 비싸게 거래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담배를 한 짐 마련해 짊어지고 가면 몇 명은 속환해 올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조금 늦게 간 사람들은 담배값이 폭락해 이전에는 서너 명을 속환할 수 있던 분량으로 1명밖에 속환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렇게 폭락해도 조선보다 10배 이상 비쌌다고 한다.[6] 제 시간에 그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그녀는 영원히 원귀로 떠돌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