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 공화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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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공화국 제10대 대통령 헤라르도 바리오스 Gerardo Barrios | |
| |
<colbgcolor=#0f47af><colcolor=#ffffff> 출생 | 1813년 9월 24일 |
엘살바도르 산미겔주 | |
사망 | 1865년 8월 29일 (향년 51세) |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시 | |
재임기간 | 제10대 대통령 |
1861년 2월 7일 ~ 1863년 10월 26일 |
1. 개요
엘살바도르의 제10대 대통령.2. 생애
어릴 때부터 자유주의 교육을 받아왔고 10대부터 프란시스코 모라산 휘하에서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통일을 위해 싸웠다. 1836~1838년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연방의회 의원을 지냈고 1842년 모라산이 코스타리카에서 처형되자 배를 타고 탈출했다. 1844~1845년 자국의 보수주의 대통령 프란시스코 말레스핀(Francisco Malespín)을 축출하는 과정에 참여했고 1850년 엘살바도르 국회에서 총대장(captain general) 직위를 받았다. 1851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자유주의자들이 과테말라의 보수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과테말라를 침공했으나 라 아라다(La Arada) 전투에서 자유주의자 군대의 주력군이 패배하여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라 아라다 전투에서 바리오스는 사단장으로 참여했다. 윌리엄 워커가 벌인 필리버스터 전쟁에서 바리오스는 사단장으로 참여하여 워커에 대적했다.1856년 이후 바리오스는 자신의 군사적 영향력을 기반으로 각종 권모술수를 획책하면서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1856년 10월 당시 엘살바도르 대통령 라파엘 캄포(Rafael Campo)를 상대로 쿠데타를 계획했고, 1857년 1월 캄포가 내무부장관으로 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6월 7일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 1858년 2월 7일 대통령이 된 미겔 산틴 델카스티요(Miguel Santín del Castillo)는 그를 외무부장관에 임명했다. 같은 해 6월 24일 산틴의 지병으로 대통령이 공석이 되자 바리오스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일했다. 이후 산틴이 그를 다른 자리에 임명하면서 권한대행에서 내려올 것을 종용했으나 바리오스는 동반 사임을 요구하면서 이를 거부했다.
1859년 1월 19일 산틴과 바리오스가 둘 다 사임하면서 의회는 새로운 대통령을 지명하게 되었는데 바리오스는 호아킨 에우프라시오 구스만(Joaquín Eufrasio Guzmán)을 지지했다. 구스만이 대통령이 되자 산틴은 자기 지지자들을 데리고 국외로 이주했다. 구스만은 2월 15일 호세 마리아 페랄타(José María Peralta)로 교체되었고, 3월 12일 페랄타가 사임하자 바리오스는 다시 한번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 12월 4일 바리오스는 대선에 단독 출마하여 1860년 2월 1일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 16일 과테말라를 방문하기 위해 부통령 호세 펠릭스 키로스(José Félix Quirós)를 권한대행으로 하고, 엘살바도르에 귀국한 다음 1861년 2월 7일에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이처럼 바리오스는 자신의 군사적 영향력을 기반으로 엘살바도르의 정치를 조종하다가 결국 대통령이 되어 엘살바도르의 전권을 장악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자유주의 정치가로서 내정에 여러가지 업적을 남겼다. 바리오스는 공교육을 확대하고 근대식 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하면서 세속 교육을 강화했다. 또한 행정 체계를 근대화하고 교회 소유지의 국유화를 시도했는데 이것은 아직까지 엘살바도르 사회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던 가톨릭 교회의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커피 산업을 집중적으로 후원하여 후일 엘살바도르 커피 산업의 토대를 형성했다. 대외적으로는 중앙아메리카 통합에 여전히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자유주의 개혁 때문에 국내의 보수주의 세력을 상대로 곤란을 겪었으며 국제 관계에서는 자유주의 정권을 경계한 과테말라의 라파엘 카레라 때문에 특히 그러했다. 본래 카레라는 바리오스가 지역의 안정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고 그래서 1860~1861년 겨울에 바리오스가 국빈으로 방문할 때 그를 맞이하는 등 바리오스와 관계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1862년 11월 온두라스의 보수주의 대통령 호세 산토스 과르디올라(José Santos Guardiola)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바리오스가 온두라스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면서 카레라와 바리오스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양측의 갈등은 1863년 2월 라파엘 카레라가 일으킨 엘살바도르 침공으로 비화되었다. 바리오스는 2월 말 코아테페케(Coatepeque)에서 카레라의 침공군에 전술적으로 참패를 안겼으나, 군대를 재조직한 카레라의 재침과 과테말라측에 가담한 자국의 보수주의자들에 의해서 수도 산살바도르가 함락당하면서 패망했다.
이후 강제 추방된 바리오스는 1865년 귀국하여 권력 복귀를 시도하려 했으나 그가 탄 배가 폭풍으로 니카라과 해안에 표류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엘살바도르로 송환,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을 당했다.
3. 기타
현재 그는 엘살바도르에서 국가 영웅으로 우대받으며 그의 이름을 딴 장소와 기관들이 존재한다. 또 과거 엘살바도르 50콜론 지폐의 도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엘살바도르의 역사학자이자 시인, 언론인인 이탈로 로페스 바예시요스(Ítalo López Vallecillos)는 헤라르도 바리오스의 용모와 습관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바리오스는 키는 중간 정도였고, 밝은 갈색 피부에 크고 검은 눈을 가졌으며, 짙은 눈썹과 단단한 턱, 높은 이마, 콧수염과 턱수염, 튼튼한 체격에 넓은 어깨를 지닌 사람이었다. 말수는 적고, 태도는 소박했다. 여성들에게는 공손하고 친절했으며, 판단에 있어서는 진지하고 책임감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프랑스인 같았고, 성격과 감정 표현에 있어서는 스페인인 같았다. 친구에게는 진실하고 충직했지만,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거칠고 엄격했다. 한 가지 단점은 절뚝거렸다는 점인데, 지팡이를 짚고 걸을 때 위엄이 있었다. 그는 프랑스식의 화려한 장식이 달린 군복을 즐겨 입었고, 진정한 군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애국심에서 비롯된 전사였다. 전쟁을 할 때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는 좋은 음악, 특히 행진곡과 종교 음악을 즐겨 들었고, 끊임없이 책을 읽는 독서가였다."
Gerardo Barrios y su Tiempo, Italo López Vallecillos
Gerardo Barrios y su Tiempo, Italo López Vallecil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