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韓)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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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韓)나라 제5대 왕 한왕 안 韓王 安 | ||
성 | 희(姬) | |
씨 | 한(韓) | |
휘 | 안(安) | |
아버지 | 한환혜왕(韓桓惠王) 한연(韓然)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226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238년 ~ 기원전 2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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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한(韓)나라의 11대 국군, 5대 왕. 한환혜왕의 아들. 이때 결국 한희왕과 한환혜왕 대의 계속 된 패배 누적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하였다.2. 생애
한왕 안 5년(기원전 234년), 진나라의 장수인 번오기(樊於期)[1]가 조(趙)나라의 평양(平陽), 무성(武城)을 차지하고 10만 명을 죽였다. 조나라의 장수 호첩(扈輒)은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한왕 안은 한비자(韓非子)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진시황(秦始皇)[2]은 그를 중용하려고 했으나 승상 이사(李斯)가 그를 모함해 죽였다.한왕 안 9년(기원전 230년), 진나라에서 내사 등(騰)을 보내 한나라를 쳐서 멸하니 한왕 안은 투항했다. 진나라는 멸망한 한나라 땅에 영천군(穎川郡)을 두었다. 치소는 양택현이었다.[3]
진시황 21년(기원전 226년), 신정(新鄭)에서 한나라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시황은 그것을 진압하고 본보기로 한왕 안을 제거한다.[4]
훗날 진시황이 죽고 그 아들인 영호해가 즉위했을 때 장량(張良)이 항량(項梁)의 허락을 구해 한나라의 왕손인 한왕 성(韓王成)을 세워 한나라를 다시 세웠다. 그 뒤 한왕 성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해 한나라가 또다시 망했으나, 유방과 장량의 협조로 조카인 한왕 신(韓王信)이 뒤를 잇는다. 한왕 신은 유방을 배신하지만 후손이 용서받아 전후한, 위나라, 서진까지 종가가 쭉 출세하면서 이어진다. 대부분 대가 끊긴 다른 전국칠웅 직계 후손과 비교하면 가장 해피엔딩.[5] 참고로 가충의 뒤를 이은 가밀은 이쪽의 종갓집 후손이다.
[1] 사람 이름으로 쓸 때는 於의 발음이 '어'가 아닌 '오'다.[2] 이때는 진나라 왕 정이 황제를 칭하기 전이므로 진왕 정이라고 해야 맞으나, 진시황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니 그리 적는다.[3] 참고로 그곳은 삼국지에서 조조(曹操)의 모사 곽가(郭嘉)의 고향이다.[4] 다른 6국 왕들과는 달리 멸망 이후에도 몇 년 이상 살아있었던 유일한 왕이다. 다른 망국의 왕들은 대놓고 사형에 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멸망한 그 해에 죽었다.[5] 직계가 아닌 방계도 따지면 제나라의 후손이 가장 번성했다. 진군, 진태 등을 배출한 영천 진씨가 제나라 왕실의 방계 후손이다.(엄밀히 말하면 거꾸로 제나라 전씨가 방계이고 진씨쪽이 직계였다.) 왕망은 제왕 건의 후손이고, 법정은 제양왕의 후손이다. 조나라의 후예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북송의 초대황제인 조광윤은 조가의 후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