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 중장년기 |
1478년? ~ 1546년 7월 4일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해적이자 군인.일명 바르바로사(붉은 수염)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던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바르바리 해적이자,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이다. 그의 튀르키예어 이름은 하이레딘 파샤(Hayreddin Paşa)나 흐즈르 레이스(Hızır Reis)였으며, 아랍어 이름은 하이르 앗 딘(خير الدين)이었다. 오루츠 레이스의 동생으로, 형이 스페인 원정대와 싸우다가 전사한 후 '바르바로사'의 호칭을 이어받았다.
2. 생애
본명은 흐즈르였으며,[1] 아버지는 알바니아계로 오스만 제국의 시파히 출신이었다. 에게해의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나 그 중심 도시인 미티레네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은퇴 후 화물 운송업을 시작한 아버지를 형제들과 함께 돕다가 해적업에 발을 들이게 되었지만, 이윽고 형제인 오루츠와 일랴스가 구호기사단의 습격을 받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일랴스는 전사하고 오루츠는 오늘날 아나톨리아 반도 남서부의 보드룸[2]에 감금되었는데, 소식을 접한 흐즈르는 함대를 보내 형 오루츠를 구출했다. 다만 흐즈르의 세력이 약했는지, 오루츠는 3년 동안이나 감옥 신세를 졌다.2.1. 알제의 지배자
하이레딘의 깃발. 승전을 기원하는 아랍어 기도문과 4대 칼리파의 이름 및 초승달, 줄피카르와 작은 손,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다.
당시 북아프리카 지역은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스에서 쫓겨난 후 스페인에 대해 복수심에 차 있었던 무슬림 해적들의 본거지였고,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왕조들은 기독교 국가들과의 싸움을 위해 이 해적들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처음에 오루츠와 흐즈르 형제는 튀니지의 지원을 받았으나 당시 튀니지의 술탄이 점차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며 명성을 높이고 있는 이들 형제를 부담스러워하여 본거지를 옮길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스페인에게 항구를 점령당한 알제리의 통치자가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들 형제는 스페인군을 몰아낸 뒤 아예 알제리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오루츠는 알제의 술탄을 칭했는데 오루츠, 즉 아루즈[3]는 '바바 아루즈'(Bābā ʿArūj)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바르바로사'(Barbarossa)라는 별칭도 바바 아루즈를 잘못 알아들은 유럽계 사료의 실수로 보는 경우가 있다. 또한 오루츠와 그의 동생인 하이르 알딘 흐즈르 파샤[4]는 동지중해를 오가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난 무슬림이나 유대인의 망명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후 스페인의 침략 가능성을 우려하여 당시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였던 셀림 1세에게 알제리를 바쳤고, 셀림 1세는 오루츠를 알제리 총독으로 임명하여 현재 누리고 있는 권력을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1518년 초 알제리 서부의 틀렘센에서 후계자 분쟁 해결을 위한 파병 요청이 오루츠에게 들어오자, 그는 동생인 흐즈르에게 알제를 맡기고 혼자 원정을 떠났다. 하지만 이후 분쟁에 개입한 스페인군과의 교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알제의 지배자였던 오루츠 레이스가 스페인 침공군과의 전투 중 전사하자 흐즈르는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여 스페인군을 몰아냈고, 뒤이어 오루츠 레이스의 기반 위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2.2.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
1532년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당도한 흐즈르, 즉 하이레딘은 쉴레이만 1세로부터 해군 총사령관[5] 직을 수여받기에 이르렀고, 한동안 수도에 머물며 오스만 제국의 해군 개혁을 주도했다. 1518년 이후 이탈리아와 스페인 해안을 20~30여 차례나 약탈했고, 신성동맹과 카를 5세의 원정군까지 격파하면서 지중해에서의 오스만 제국의 패권을 확립했으며, 자신이 은퇴한 뒤에 사실상 후계자가 되는 투르구트 레이스를 비롯한 부하들을 육성하는 데도 힘써, 이후 레판토 해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지중해는 완전히 오스만 제국의 안방이나 다름없게 되었다.[6] 대표적으로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120여척으로 2배에 달하던 신성동맹 함대를 박살내며 지중해 전역에 명성을 날렸다. 이때부터 하이레딘의 전설이 시작되었다.2.3. 지중해의 무법자
오스만 함대가 정박한 툴롱. 1543년~1544년 프랑스 남부의 항구 도시 툴롱은 일시적으로 이슬람 도시가 되었다.
하이레딘의 손에 의해 에게해와 이오니아해의 수많은 섬들에 오스만 군기가 휘날리게 되었으며, 이탈리아와 스페인 해안은 늘 바르바르 해적들의 약탈에 노출되어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카를 5세가 1540년 9월, 하이레딘에게 스페인 측으로 전향한다면
한동안 휴식을 취한 하이레딘은 1543년 이번에는 프랑스-오스만 동맹의 일환으로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카를 5세의 동맹인 사보이아 공국의 니차[7]를 공략했다. 210척에 달하는 오스만의 대함대는 도중에 레조칼라브리아를 함락시키고 이탈리아 해안을 약탈하며, 로마까지 위협한 후[8] 니차로 향했다. 하이레딘은 30,000명의 병력과 함께 니차를 공격하여, 도시를 점령했으나 프랑스 측이 약속했던 화약 제공을 소홀히 하여 니차 요새까지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안드레아 도리아의 원군이 다가오자 프랑스-오스만 연합군은 철수했고, 프랑수아 1세는 인근 프로방스의 항구 도시인 툴롱을 소개시킨 뒤 오스만 함대에게 월동지로 내어주었다.[9]
오스만의 전통 화풍으로 묘사된 말년의 하이레딘 파샤 | 제해권을 상징하는 포세이돈의 삼지창을 들고 묘사된 그림이다. |
1544년 봄 하이레딘은 툴롱을 거점으로 하여 티레니아 해를 헤집고 다녔다. 우선 스페인-나폴리 함대를 격파한 그는 이탈리아 해안을 또다시 습격했다. 마침내 제노바에 다다른 그는 1540년 안드레아 도리아에게 포로로 잡혀 노꾼으로 복역하고 있었던 동료 투르구트 레이스를 석방하지 않는다면 도시를 공격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자 안드레아 도리아가 대면 협상을 청했고, 하이레딘은 쿨하게 이를 승낙하여 양측은 도리아 가문 소유의 궁전에서 3,500 두카트 금화를 납부하는 조건으로 투르구트의 석방에 합의했다. 이후로도 프랑스 남부를 공격한 스페인 함대를 격퇴하는 등 맹활약을 펼친 하이레딘은 카를 5세와 쉴레이만 대제 사이에 휴전이 체결되자
돌아가면서도 하이레딘은 이탈리아 해안을 습격 혹은 협박하여 배상금을 받아냈고, 엘바 섬에서는 과거 튀니스에서 사로잡혀 세례를 받은 시난 레이스의 아들을 석방시켰다. 토스카나 해안을 유린한 하이레딘은 미틸레네의 본가를 불태워버린 바르톨로메오 페라티의 무덤을 파괴하고, 그 시신을 불태웠다. 이후 하이레딘은 재차 로마에 근접해 갔으나, 이번에도 프랑스 사절이 만류하여 사르데냐 방면으로 향했다. 뒤이어 나폴리 만의 이스키아와 프로치다 섬을 함락시킨 하이레딘 앞에 30여 척의 제노바 함대가 나타났으나 감히 대적할 엄두도 못낸채 시칠리아로 도주했다. 실로 하이레딘의 위세를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강풍으로 살레르노 공격을 포기한 하이레딘은 대신 칼라브리아 일대를 재차 유린했다.
2.4. 말년
이스탄불 베식타쉬 구역의 하이레딘 영묘 |
2년 동안 부지런히 서부 지중해에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 하이레딘은 1545년 초엽 코스탄티니예로 돌아왔다. 다만 얼마 후 재차 출항한 하이레딘은 스페인 항구들을 포격하고 마요르카 및 메노르카를 습격했다. 이는 그의 마지막 원정이었다. 몇 달만에 다시 코스탄티니예로 돌아온 하이레딘은 아들인 하산 파샤에게 알제 총독을 맡기고는 오늘날 루멜리 히사르 근처인 보스포루스 해협에 궁전을 건설하고 은퇴했다.
해적으로서는 흔치않게 천수를 누렸으며,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여생을 이어갔다. 우선 무라디 시난 레이스에게 구술하여 5권 분량의 회상록[10]을 남겼는데, 이는 현재 톱카프 궁전과 이스탄불 대학 도서관에 남아있다. 약 1년 동안 은퇴를 즐기던 하이레딘은 1546년 7월, 자신의 궁전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시신은 생전에 함대를 집결시키던 베식타쉬 해안에, 이미 1541년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미마르 시난이 세운 대리석 영묘에 매장되었고, 문상객으로 장례식장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고 하니 해적으로는 그를 따를 성공 사례가 없을 듯하다.
2.5. 평가
오늘날 튀르키예에서 하이레딘은 '튀르키예 해군의 아버지'로 존경받으며, 튀르키예 해군은 작전을 나가거나 해전을 벌이기 위해 출전할 때마다 꼬박꼬박 하이레딘 파샤의 묘에 참배하고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하이레딘은 헨리 모건, 프랜시스 드레이크, 정일수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성공한 해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조국인 튀르키예에서 부여하는 의미에서는 나머지 세 명을 가볍게 능가한다.[11]실제로, 하이레딘 파샤 사후에 레판토 해전에 이르기까지 지중해를 주름잡았던 오스만 제국의 해군 지휘관들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그와 관련이 전혀 없는 경우는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해군 총사령관직의 경우 바르바리 해적이 아니라 궁정 관료들이었던 소콜루 메메드 파샤나 시난 파샤, 피얄레 파샤 등에게로 이어졌지만 이들도 수도 코스탄티니예의 조선소를 증축하거나 실질적으로 하이레딘의 후계자가 된 투르구트 레이스를 부관으로 삼고 해군 작전에 나서는 등 하이레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 중에 1554년부터 1567년까지 13년 동안 총사령관직을 역임했던 피얄레 파샤는 후임 총사령관인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의 부관이 되어 키프로스 공략에 나섰다.[12] 정황이 다소 불분명하지만 하이레딘의 아들인 카라 하산 파샤도 총사령관직을 역임했다고 하며, 레판토 해전에서 참패한 이후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오스만 해군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던 울루츠 알리 레이스 또한 하이레딘의 부하들 가운데 한 명인 알리 아메드에게 포로로 잡혀 노잡이 노예가 되었다가 눈에 띈 경우였다. 즉 '튀르키예 해군의 아버지'라는 말은 단순히 그 개인의 위상이 높다는 말일 뿐 아니라, 이렇듯 후계자 양성까지도 착실히 해 두었다는 의미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북아프리카나 오스만 제국의 역사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국내에서는 역사상의 인물이었던 하이르 앗 딘 자체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를 모티브로 한 인물과 가문이 <대항해시대> 시리즈에 등장해서 유명해졌다.- <대항해시대 2>와 <대항해시대 외전>에 하이르 앗 딘 본인이 모티브인 '하이레딘 레이스'라는 붉은 수염의 해적이 등장하며 이후 시리즈에는 하이레딘 가문으로 언급된다. <대항해시대 2>에서는 필드를 돌아다니는 해적 중에서도 최상급의 전투력(본인과 함대 모두)을 지니고 있었으며, <대항해시대 2>를 베이스로 한 <대항해시대 외전>에서는 주인공인 살바도르 레이스의 아버지였다. 이 게임의 해적들이 다 그렇듯 죽여도 사망 대사(쳇, 이까짓 놈에게 죽임을 당하다니….)를 남긴 뒤에는 근처 술집에서 멀쩡히 살아서 떠돌이 항해사 노릇을 한다.
- <대항해시대 3>에서는 역사대로 알제를 본거지로 한 오스만 제국의 해적으로 나온다. 능력치는 체력 100에 무력 98, 검술 레벨 3이라는 게임상 존재하는 모든 NPC중 최강의 일기토 상대다. 다만 끌고 다니는 배가 다우 7척이라 초반에는 절대 이길 수 없지만 갤리온과 중카락 등이 등장하는 후반에는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또 전작과는 달리 게임 시스템이 바뀌어서 엔딩을 보는 내내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든 캐릭터가 되어서 싸울 일도 사실상 없다.
- <대항해시대 4>에서는 하이르 앗 딘의 별명인 '붉은수염'(바르바로사)에서 모티브를 따온 발바롯싸 파즐 하이레딘이라는 인물이 지중해 세력으로 등장한다.
- <대항해시대 5>에서도 '바르바로사 하이레딘'이라는 이름으로 본인이 모티브인 인물이 등장한다.
- 튀르키예의 사극인 <위대한 세기>에도 등장하는데,쉴레이만 대제의 장남이자 유력한 황위 계승자였던 무스타파 황자의 조력자 역할이다. 하이레딘 파샤의 딸이 무스타파 황자의 연인이었으니, 무스타파를 띄워주기 위한 가공인물인 듯 하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결정판>에 새로 추가된 역사적 전투 캠페인에서 등장한다. 내용은 알제에서 스페인 군대를 막아내고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다만 실제로는 스페인의 공격을 우려한 오루츠 레이스가 주도해서 오스만 술탄 셀림 1세의 신하가 되었고 스페인군과의 전투도 오루츠가 주도하다가 전사했는데, 작중에서는 오스만과의 연락보다 스페인의 침공이 더 먼저인데다가 오루츠는 막을 대책이 없다며 당황해하고 동생인 하이르 앗 딘(하이레딘)이 알아서 오스만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고증 오류가 많다. 아무래도 훨씬 유명한 쪽은 형인 오루츠보다는 동생인 하이르 앗 딘이기에 그를 띄워 주고 싶었던 듯 하다.
[1] 아랍어로 초록색을 뜻하는 '카드르'에서 온 튀르키예 단어다.[2] 당시 로도스 기사단, 즉 구호 기사단의 영토였다.[3] ʿArūj; 튀르키예어로 Oruç[4] Khayr al- Dīn Khïḍïr Pasha[5] Derya Bey[14]. 하이레딘 파샤가 죽은 직후인 1567년부터는 격이 더욱 높아져서 Kapudan Pasha(카푸단 파샤)나 Kaptan-ı Derya(카프타느 데르야) 등으로 불렸는데, 격이 높아진 것도 하이레딘의 활약상 덕분이었다.[6] 실제로 하이르 앗 딘(하이레딘) 이후에 활약한 해적 두목들을 살펴보면 '하이르 앗 딘 문하생' 이 아닌 경우가 드물었다.[7] 니차(Nizza)는 현재 프랑스 제5의 도시로 성장한 니스다. 당시 사보이아 공작이었던 카를로 2세는 카를 5세의 황후였던 포르투갈의 이자벨의 여동생 베아트리즈와 결혼했는데, 1536년 프랑수아 1세의 침공을 받아 수도인 샹베리와 핵심 도시인 토리노 등 공국의 대부분을 잃고 발레다오스타, 쿠네오, 베르첼리, 니차 정도만 남긴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8] 프랑스가 개입해 로마 자체를 공격하지는 않았다.[9] 그 6개월동안 툴롱은 성당이 모스크로 개조되었고, 기독교도 노예가 거래되는 등 일시적으로 '바르바리' 혹은 '튀르크' 도시로 변모했다[10] 《가자바트-이-하이레딘 파샤》[11] 그러나 전체적인 세력으로 따지면 하이레딘 파샤의 세력은 역사에 남을 대선단을 거느렸던 정일수에 비할 수 없으며, 활약으로 따지면 카리브해를 종횡무진했던 헨리 모건 역시 그에 못지 않다. 바르바로사 하이레딘 파샤가 튀르키예에서 지금까지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 활약도 활약이지만, 무엇보다 튀르키예 해군사에 있어서 그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12] 레판토 해전은 이 키프로스 공략에 베네치아가 대응하면서 벌어지게 된 전투였다.[13] Barbaroslar: Akdeniz'in Kılıc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