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21:26:47

피에르 데 에사르

성명 피에르 데 에사르
Pierre des Essarts
생몰년도 미상 ~ 1413년 7월 1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티외
사망지 프랑스 왕국 파리
아버지 필리프 데 에사르
어머니 마리 드 뷔시
형제 필리프 데 에사르
직위 프랑스 대재무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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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6세 치세에 활동한 프랑스 대재무관. 용맹공 장의 집권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지만, 그와 갈등을 벌이다가 피살당했다.

2. 생애

티외 영주인 필리프 데 에사르와 마리 드 뷔시의아들이다. 형제로 오세르 주교인 필리프 데 에사르가 있었다. 그는 프랑스 재무성에서 관료로 일하다가 1409년 권력을 장악한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에 의해 프랑스 대재무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전임 재무장관 장 드 몽테규를 체포해 샤틀레 요새에 투옥시켜서, 그가 약식 재판을 거쳐 1409년 10월 17일 파리 홀에서 참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동안 장 드 몽테규의 가혹한 세금 징수에 고통을 겪었다고 여긴 파리 시민들은 이에 환호하면서 그에게 "국민의 아버지" 칭호를 붙였다.

그러나 그는 용맹공 장을 등에 업은 인사들이 정부의 부패와 귀족들의 재정적 착취를 비난하며 대귀족들과 척지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1413년경부터 도팽 루이의 측근이 되었다. 1413년 3월, 도팽 루이는 아르마냑파와 동맹을 맺은 뒤 부르고뉴 공작의 측근인 장 드 베이를 상서직에서 해임했다. 그리고 뱅센에서 열릴 예정인 토너먼트를 구실로 샤를 6세를 파리에서 탈출시킬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부르고뉴파 기사들과 정치 조폭들, 그리고 급진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폭도 수천 명이 4월 27일 그레브 광장에 모여 대재무관 피에르 데 에사르를 비롯한 도팽 루이의 측근들을 반역자라고 비난하며 루이가 머물고 있던 별장으로 쳐들어갔다. 도팽 루이는 처음에는 자신의 측근들 중 누구도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군중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반역죄로 처벌받은 50명의 명단을 발표해야 했다.

그는 도팽 루이의 협조하에 티외로 피신한 뒤 상황을 살피다가, 동쪽에서 파리로의 접근을 통재하는 생앙투안 요새를 도팽 루이의 이름으로 접수했다. 그러나 부르고뉴파가 곧 이곳을 포위 공격했고, 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부르고뉴 측은 그가 아르마냑파와 협조해 파리를 그들에게 넘기려 했다고 비난하고, 1413년 7월 1일 파리에서 공개 참수했다. 그 후 그의 수급은 장창에 꽂힌 뒤 파리 홀에 세워졌고, 몸통은 몽포콩 교수대에 매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