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20 00:16:02

프라티하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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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티하라 왕조의 영역(연두색).
730년? ~ 10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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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칭호 마하라자디라자 (왕중왕)
주요 군주 나가바타 1세 (730 ~ 760)
미히라 보자 (836 ~ 885)
마헨드라팔라 1세 (885 ~ 910)
야사팔라 (1024 ~ 1036)
민족 인도아리아인
아랍인, 페르시아인, 튀르크인
언어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종교 힌두교 (국교)
자이나교, 불교, 이슬람, 기타 토착 신앙

1. 개요2. 기원과 명칭
2.1. 명칭
2.1.1. 프라티하라2.1.2. 구르자라
2.2. 부족인가? 국가인가?2.3. 기원
2.3.1. 타민족 기원설2.3.2. 토착민족 기원설
3. 역사
3.1. 제국의 성립3.2. 제국의 팽창3.3. 전성기3.4. 쇠퇴와 멸망
4. 역대 군주

1. 개요

북인도를 통일한 최후의 힌두 계열 왕조. 구르자라 프라티하라(गुर्जर प्रतिहार, Gurjara-Pratihāra)라는 명칭으로 많이 불리우나, 분파 왕조들과의 구별을 위해서 수도의 이름을 딴 칸나우지의 프라티하라(Pratihara of Kannauj)라고도 불리운다. 한편 그들 스스로는 아리아인이 살고 있는 북인도를 통일했다고 해서 아리아바르타(आर्यावर्त, Āryāvarta)[1]의 왕중왕이라 칭했다.

우리나라의 역사학계에서는 보통 하르샤 왕의 바르다나 왕조를 북인도를 통일한 마지막 힌두 왕조로 여기지만, 사실 프라티하라 왕조가 그 최후의 왕조였다. 몇몇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프라티하라 왕조의 영토는 바르다나 왕조와 맞먹거나 그 이상이었으며 심지어 굽타 왕조의 최대 영토와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슬람 제국의 침공을 수백년에 걸쳐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인도의 방파제로 불리기도 한다. 프라티하라 왕조가 건재하던 시절에 아랍 이슬람은 끝내 인도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는데, 이후 북인도의 군소 국가들을 궤멸시키며 인도 침입에 성공한 이슬람 세력은 아랍계가 아니라 튀르크계페르시아계였다.

2. 기원과 명칭

2.1. 명칭

2.1.1. 프라티하라

이 문서에서 소개하는 프라티하라 왕조와 기타 분파들은 '프라티하라(प्रतिहार)'라는 이름을 자칭하였다. 프라티하라는 산스크리트어문지기, 혹은 수호자를 의미하는데, 프라티하라인들은 스스로를 서사시 《라마야나(रामायणम्)》에서 등장하는 전설적인 영웅 락슈마나의 후손이라고 여겼다.[2]

인도의 사가인 K. A. Nilakanta Sastri는 프라티하라 왕조의 조상들이 본래는 라슈트라쿠타 씨족을 섬겼던 이들이라고 주장했으며, "프라티하라"라는 명칭이 라슈트라쿠타 궁정의 직책 명에서 유래했다고 기록하였다.

2.1.2. 구르자라

상술했듯이 왕조의 공식적인 명칭은 그냥 '프라티하라'지만, 이웃한 왕조들의 기록에서는 구르자라 프라티하라(गुर्जर प्रतिहार)로 등장하기에 학자들은 과연 '구르자라(गुर्जर, Gurjara)'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
  • 구르자라라는 명칭이 바르다나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산스크리트어 일대기 《하르샤차리타(हर्षचरित)》에서 유래했다는 가설이 있다. '구르자라'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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सा सिंह हूनानृपस्य व्याघ्ररूपेण, सीद्ग्धराजस्य प्तपन्द्रमिव ज्वररूपेण, गुर्जराजस्य निद्रावरणे विघातक, गन्धाराधिपस्य गन्धमल्लभ्यूषणरूपी ज्वररूपेण, लाटराजकलार्हतां लादक, मालवदुग्धलता-लक्ष्मी-काण्डसमाहर्ता [...]
사슴같은 후나족에게 사자, 신두의 왕에게 불타는 열병, 구르자라 왕의 잠자리를 방해하는 자, 향기로운 코끼리인 간다라의 왕에게는 담열(膽熱)의 열병, 라타 지방의 솜씨를 파괴하는 자, 말라바의 행운의 여신의 덩굴을 베는 도끼인 자[...]}}}
  •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구절라국(瞿折羅國)이라는 나라가 등장하는데, 이는 '구르자라'라는 이름을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추정된다.
{{{#!wiki style="border: 1px solid gray; border-radius: 5px; background-color: #F2F2F2,#000; padding: 12px"
瞿折羅國
구절라국}}}

* 찰루키아 국왕 풀라케신 2세가 634년에 설립한 아이홀 비문에서는 "구르자라, 라타, 말라바인들이 복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
  • 739년의 나브사리 동판 비문에는 찰루키아의 제후왕 아바니자나슈라야 풀라케신이 아랍 군대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아랍 군대가 사인드바하, 카첼라, 사우라슈트라, 차보타카, 마우리아[4], 구르자라를 비롯한 여러 왕국들을 약탈했다고 한다.
  • 8세기경, 샤일라 왕조의 자야바르다나 2세에 의해 제작된 해독문 라골리(발라갓) 동판에서는 그의 조상 프리투바르다나가 구르자라 국가들을 정벌했다고 명시했다.
  • 라슈트라쿠타 황제 고빈다 3세의 라단푸르 구리동판(808)에서는 인도의 여러 제후왕에 대한 그의 정복과 약탈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중 한 비문에는 "구르자라가 사라졌다. 아무도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꿈속에서도 그를 보지 못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카르카의 라슈트라쿠타 제후왕이 발행한 바로다 구리동판(812)에는 "구르자레쉬바라파티"와 "구르자레쉬바라" 등이 언급된다. R.C. Majumdar 등의 학자들은 이 명칭이 프라티하라 왕조의 나가바타 2세를 가리킨다고 생각했으나, D.C. ganguly를 포함한 일부 학자들은 이 명칭이 서로 다른 두 군주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전자는 프라티하라 왕조의 황제였고, 후자는 그에 복속된 제후왕이었다.
  • 《실실라트 연대기(سلسلة التواريخ)》를 집필한 아랍 상인 술라이만은 "프라티하라 왕조는 유르츠, 혹은 유즈르라고도 불린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명칭은 '구르자라' 혹은 '칸나우지'의 아랍어 전사로 추정된다.
  • 라슈트라쿠타 황제 아모가바르샤의 시루르 · 닐군드 비문(866)에 따르면, 그의 부친 고빈다 3세가 케랄라, 말라바, 가우다와 함께 치트라쿠타 언덕 요새에 있는 구르자라인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 드루바 3세의 바라흐 동판 보조금(867)에서는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반란군과 함께 "매우 강력한 구르자라족 군대"의 공격을 받았으며, "미히라"라는 이름의 구르자라 왕이 쳐들어왔다가 그의 반격에 의해 패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일의 역사학자 게오르그 뷸러와 E. 훌츠슈는 이 기록이 차브다 제후왕 크셰마라자의 군대를 가리킨다고 해석하였지만, B.P. Puri 등의 일부 역사학자들인 이 기록이 프라티하라 황제 미히라 보자와 그의 군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 라슈트라쿠타 황제 크리슈나 3세의 데올리 비문(940)에서는, 그의 선조인 크리슈나 2세(878 ~ 914)가 "구르자라를 겁먹게 하고 가우다, 앙가, 칼링가, 강가, 마가다를 겸손하게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시대에 제작된 카르하드 동판 비문에서는 "칼란자라와 치트라쿠타에 대한 희망이 구르자라의 중심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새겨져 있다.
  • 팔라 황제 나라야나팔라의 바달 기둥 비문에 따르면, 그가 "구르자라나타(구르자라 군주)의 자만심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어 깨부쉈다"라고 한다.
  • 찬델라 왕조의 통치자 야소바르만의 954년 비문에는 그가 가우다, 카사, 코살라, 카슈미르, 미틸라, 말라바, 체디, 쿠루, 구르자라를 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10세기경에 집필된 칸나다어 연대기 《비크라마르주나 비자야(ವಿಕ್ರಮಾರ್ಜುನ ವಿಜಯ)》에는 "구르자라자 마이팔라", 즉 "구르자라의 왕 마이팔라"라는 이름의 제후왕이 등장하는데, 이는 프라티하라 황제 마이팔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 칼라추리 군주 카르나데바가 건립한 1047년 고하르와 비문에서는 그의 조상 락슈마나라자(950?)가 방갈라, 판디아, 라타, 구르자라, 카슈미라의 왕들을 잇달아 물리쳤다고 한다.
  • 12세기에 집필된 힌두 서사시 《라자타랑기니(राजतरङ्गिणी, Rājataraṅgiṇī)》에서는 9세기 무렵 카슈미르의 왕 샹카라바르만이 구르자라 제후왕 알라카나를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2.2. 부족인가? 국가인가?

마타나데바의 라조르 비문에서 등장하는 구르자라 프라티하라(गुर्जर प्रतिहार)라는 명칭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선 "구르자라 씨족의 프라티하라 국가인가? 아니면 구르자라 국가의 프라티하라 씨족인가?"를 두고 논쟁이 일었다.

같은 비문의 다른 내용에서는 "구르자라인이 경작한 모든 대지"라는 문장이 있기에,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구르자라'라는 용어가 특정한 지역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부족이나 사람들의 집단, 씨족 등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서 이들은 '구르자라 프라티하라'가 구르자라족과 프라티하라족의 연합을 가리키며, 이들은 라자스탄 지역에 있던 수많은 부족과 씨족 집단들 가운데 하나였고, 나중에 이들이 라지푸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된다면 프라티하라 왕조는 오늘날 라지푸트족의 조상, 혹은 분파가 되는 셈이다.

다만 이러한 가설을 비판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D.C. Ganguly는 "구르자라"이라는 용어가 동의어로 사용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바나의 카담바리 비문의 "말라비"라는 용어를 예시로 들었다. 이 "말라비"는 의미가 2개가 있는데, 첫번째 의미는 인도 중서부 일대의 도시인 우자인을 가리키는 것이고, 두번째는 라자스탄 지역의 고중세 지명이었던 '말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그와 동료 학자들은 본래 '구르자라'라는 지역에 살고 있던 여러 부족들이 각지로 이주하면서 그 지역의 이름을 딴 "구르자라"라고 알려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후에 그는 구르자라 국가설을 뒷받침하는 두번째 근거로, 여러 고대 사료에서 명확하게 "구르자라"를 국가 이름으로서 언급하거나 자신들이 정복한 영토에 나열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찰루키아 왕조의 아이홀 비문, 라골리(발라갓) 동판, 그리고 아랍 연대기 작가이자 사가 알 발라두리(البلاذري)의 주나이드 원정 연대기(723 ~ 726) 외에도 위에서 언급한 수많은 비문과 동판 보조금 등을 예시로 들었다. 한편 이를 뒷받침하는 다른 사료로는 웃디요타나 수리의 《카발라야 말라(कुवलयमाला)》, 인도판 이솝 우화인 《판차탄트라(पञ्चतन्त्र)》등이 있다.

795년에 건립된 갈라카 비문에 따르면, 프라티하라 왕조의 창시자인 나가바타 1세가 "무적의 구르자라족"을 정복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프라티하라 왕조가 구르자라족이었을 가능성이 낮아진 셈이다.

2.3. 기원

"구르자라"가 고대 부족의 이름이라고 믿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구르자라족은 외부에서 유입된 타민족이다'와 '구르자라족은 인도에서 기원한 토착 부족이다'로 서로 의견이 갈린다.

2.3.1. 타민족 기원설

타민족 기원설을 믿는 이들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3가지를 든다.
  • 프라티하라 왕조는 중앙아시아에서 쳐들어온 후나족이 북인도를 침공한 직후인 서기 6세기 무렵에 갑자기 북인도의 주요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추측해보자면, 아마도 프라티하라 왕조의 지배층은 중앙아시아 유목민과 토착민의 혼혈이거나, 혹은 후대의 델리 술탄국무굴 제국처럼 아예 타민족 계열이었을 수도 있다. 《하르샤차리타》에서는 후나족과 함께 구르자라족을 이민족으로 묶어서 서술하고 있다.
  • 구르자라/구르자르라는 명칭은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방면에 있었던 튀르크 씨족명인 하자르(Khazar)와 유사하다. 구르자라족은 어쩌면 튀르크 연맹체의 일원으로서 유럽 방면으로 서진하지 않고 인도 방면으로 남진한 하자르족의 일파였을 수도 있다.[5]
  • 7세기경 인도의 산문작가이자 시인이었던 바나브하타(Bāṇabhaṭṭa)바르다나 왕조의 군주 가운데 한명이었던 프라바카라 바르다나가 정복한 이민족들로 후나족과 구르자라족을 들었다.

타민족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또다른 근거로는 프라티하라인들 사이에서 인도아리아인 계통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R.C. Majumdar와 같은 학자들은 가장 초창기의 프라티하라계 왕조들 가운데 하나였던 만다비야푸라의 프라티하라 왕조의 창건자였던 하리찬드라는 '로힐라디'로, 그의 후손인 나라바타는 '펠라펠리'로 불리었다는 기록을 밝혀내었다. 이는 확실하게 인도계 이름과는 구분되는 이름이다.

10세기경에 최초로 쓰여진 라지푸트 연대기 《프리트비라지 라소Pṛthvīrāja Rāso》에 기술되어 있는 아그니반샤(अग्निवंशी)에 따르면, 프라티하라 왕조를 비롯하여 다른 3개의 라지푸트계 왕조가 아부 산에 있는 '희생적인 불 구덩이(아그니쿤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프라티하라 왕조의 기원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았다. 왜나하면, 예로부터 타민족들이 인도에 침입하여 왕조를 세우고 인도화될 때 전통적으로 불 의례를 행한 후에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에 편입되었기 때문이었다.[6]

2.3.2. 토착민족 기원설

B.N. puri와 같이 토착민족 기원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 구르자라의 현대적 파생어인 '구자르(Gujjar)' 혹은 '구자라(Gurjar)' 등에서, 하자르와 어떠한 언어적인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 또한 하자르Khazar의 어미 -zar와 구르자라(Gurjara)의 어미 -jara는 전혀 연관성이 없으므로, 이 두 단어가 서로 같은 언어에서 분화되었거나 혹은 같은 집단을 가리키는 다른 언어일 가능성은 0%에 가깝다.
  • 후나족의 북인도 침공 이후 프라티하라 왕조가 부상한 것은 그 자체로 프라티하라 왕조가 타민족 출신이라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또한 가장 신뢰성 있는 산스크리트어 사료 가운데 하나이자 고대 연대기인 《마하바라타(Mahābhārata)》에서는 후나족과 같은 여러 이민족들을 언급하고 있으나 구르자라족이나 하자르족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없다. 프라티하라 왕조는 단순히 굽타 제국의 붕괴 이후 도래한 혼란기에 부상한 무명의 부족 집단이었을 수 있다.
  • Jackson이 제안한 것처럼, 후나족이나 튀르크 연맹체에 속했던 하위 유목부족들이 인도로 이주하여 프라티하라 왕조와 같이 여러 중요한 왕조를 세우는 것은 매우 어렵다.
  • 서기 899년에 구르자라인들에 의해 건립된 우나 비문에는 구르자라 군주 발라바르만이 후나족으로부터 승리하여 "후나인들로부터 지구를 해방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구르자라족이 중앙아시아의 유목 연맹체의 하위 부족이었다는 가설은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 바나브하타는 후나족과 구르자라족을 명확게 구분하며, 말라바나 라타와 같은 다른 여러 왕국들과 함께 서술하는 내용도 있기에 단순히 한 부분만으로 후나족과 구르자라족이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 구르자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타민족이었을 경우, 이들이 토착 세력과 충돌했다는 기록이 어떻게든 남아있어야 하나 이와 관련된 어떠한 사료들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더욱이 이들이 북서쪽의 카이베르 고개 등지를 통해서 인도로 침공해온 세력이라면, 어째서 비옥한 인도-갠지스 평야가 아니라 라자스탄의 반건조 사막 지역에 정착했는지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다.

이외에도 토착민족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여러 근거를 들었다. 일례로 사료들 대부분에는 구르자라 출신의 브라만이 기록되어 있는데, 타민족에게는 이러한 높은 카스트 신분이 부여되지 않았다. 또한 프라티하라인들은 시바비슈누 등 힌두교의 신들을 숭배했으며, 일부는 자이나교불교를 후원하기도 했다.

프라티하라 왕조의 구성원 대부분은 자신들의 기원을 힌두교 신화에서 등장하는 전설적인 신들의 왕조인 익슈바쿠(수리야밤사/태양 왕조)의 영웅 락슈마나에서 찾았다. 괄리오르 비문은 프라티하라 황제 바차라자를 익슈바쿠 왕조의 크샤트리아라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프라티하라 궁정 시인 마헨드라팔라는 프라티하라 왕실을 익슈바쿠 왕조의 개창자인 라구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다. 타민족 기원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근거들이 '프라티하라인들이 타민족 출신이라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도의 관습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그러한 사례보다 토착 인도계 왕조들이 이를 사용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가자파티 왕조와 같은 일부 세력들은 아예 스스로를 '수리야밤사'라 자칭하기도 하였던 탓에 반박은 곧 사그라들었다.

3. 역사

3.1. 제국의 성립

파일:구르자라데사.jpg
프라티하라 왕조의 초창기 영역(Gurjara). 점선은 현장의 여행로를 나타낸 것이다.
देवविप्रपीडितजनार्तिप्रशमनाय बलवन्तम्लेच्छराजधर्मद्विष महत्सैन्यं विनिर्जित्य तद्रूपो विष्णुरिवाभवत्...
억압받는 백성들의 기도에 응하여,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강대하나 덕을 미워하는 자인 믈레차[7] 왕의 대군을 물리쳤으니 그 모습이 마치 비슈누처럼 보였다[...]

괄리오르 프라사스티 비문

굽타 왕조후나족의 침입으로 몰락한 6세기경 이후, 북인도는 언제나 그랬듯이 수많은 세력들이 지역 곳곳의 패권을 놓고 서로 아웅다웅 다투면서 흥망성쇠가 반복되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7세기 중반에는 중북부 인도를 기반으로 성장한 바르다나 왕조가 북인도를 통일하며 잠시나마 두각을 드러냈으나, 명군 하르샤 바르다나가 사망하자 문제가 생겼다. 그에게는 왕위를 이을 마땅한 후계자가 없었고, 바르다나 왕조는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구축했던 이전 통일 왕조들과 달리 봉건제에 기반한 허술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던 탓에, 그의 사후 여러 군벌들에 의해 곧바로 공중분해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8세기 초엽부터는 페르시아 방면에서 쳐들어온 아랍 이슬람 세력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무슬림들은 711년경 무함마드 빈 카심의 원정으로 인더스강 하구의 신드를 점령하였고, 이후 그곳을 인도 침공의 교두보로 삼아 펀자브구자라트 방면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는 당시 북인도의 여러 소왕국들에게 전대미문의 위협이었고, 이들의 존재 자체가 인도 아대륙 내의 세력 구도를 송두리째 뒤흔들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북인도는 상술했듯이 여러 세력들로 분열되어 있었던 탓에 이슬람 세력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프라티하라 왕조의 초대 군주였던 나가바타 1세(739~770)가 738년 라자스탄 전투에서 이슬람 대군[8]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본래 그는 구자라트를 기반으로 한 소왕국 차브다 왕조[9]의 봉신이었으나, 이 승리 이후 단순한 지역 세력 가운데 하나에서 벗어나 북서부 인도의 주요 군벌로 성장하게 된다.

3.2. 제국의 팽창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고, 차브다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나가바타 1세는 우자인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동부와 남부로 활발하게 원정을 감행하여 신생 프라티하라 왕조의 영토를 괄리오르와 구자라트까지 넓혀나갔다.[10] 이후 나가바타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조카였던 카쿠스타데바라자가 차례대로 즉위했는데, 이들을 언급한 사료가 극히 부족하여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이 시기에 프라티하라 왕조는 북인도의 주요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데바라자의 아들이자 프라티하라 왕조의 제4대 군주인 바차라자 시기에 이르러 " 바다 사이에 있는 모든 땅의 주인"이라던가 "서부 지역의 위대한 군주"와 같이, 기존 칭호였던 마하라자(대왕)에서 한 단계 더 격상된 마하라자디라자(황제)와 동등한 수준의 칭호를 사용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차라자의 치세에 서쪽에서 이슬람 세력의 준동이 하강세에 접어들자, 그는 이전 황제들이 물려준 국력을 가지고 본격적인 팽창 정책에 나섰다. 마침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전 바르다나 왕조의 중심지로서 땅이 비옥하고 인구가 풍부하며, 힌두교의 성지들이 여럿 분포해 있던 카나우지였다.[11] 그러나 문제는 당시 프라티하라 왕조만 카나우지를 노리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벵골 일대에서는 혼란했던 지역을 통일한 팔라 왕조가 출범했고, 남쪽의 데칸 고원에서는 찰루키아 왕조를 무너뜨리고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들어섰다.

784년, 카나우지 국왕 바즈라유다가 죽고 장남 인드라유다가 즉위했다. 기회를 잡은 바차라자는 즉시 진격하여 인드라유다를 격파한 뒤 카나우지를 봉신국으로 삼았다. 그러자 팔라 황제였던 다르마팔라가 이에 반발하여 카나우지로 진격, 프라티하라-카나우지군을 무찌르고 팔라 왕조로 망명했던 인드라유다 왕의 동생 차크라유다를 왕위에 앉혀 봉신으로 삼았다.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바차라자는 카나우지 인근의 프라야그로 진격해 다르마팔라와 맞붙었고, 이 전투에서 팔라 왕조의 황실 양산을 두 개나 빼앗을 만큼 대승을 거두었다. 훗날의 역사 서사시인 프리트바라자 비자야(पृथ्वीराज विजय)는 이때 바차라자가 "갠지스 강과 바다가 합류하는 지점에서 칼을 씻고 가우다[12]의 땅을 음미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라슈트라쿠타의 황제인 드루바 다라바르샤(780~793)가 나르마다 강을 건너 말와를 침공, 회군하던 프라티하라 군대를 기습하여 승리하고는 곧장 카나우지를 차지하였다.[13] 이후 프라티하라 왕조는 왕위 계승 분쟁이 터지면서 한동안 카나우지를 포기해야 했으나, 805년에 이를 수습하고 즉위한 나가바타 2세(805~833) 시기에 말와를 되찾고 나아가 팔라 왕조로부터 비하르와 카나우지를 비롯한 인도-갠지스 평원의 대부분을 점령했으며,[14] 서쪽의 이슬람 세력을 다시 한번 막아내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이슬람의 공격으로 파괴된 솜나트의 힌두 사원들을 재건하고 수도를 카나우지로 옮겨 프라티하라의 세력을 북인도에서 공고히 한다.

3.3. 전성기

구르자라의 통치자는 수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그들의 기병은 매우 강력한데, 다른 어떠한 인도의 왕들도 이렇게 훌륭한 기병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는 여전히 아랍인들에게 적대적이지만, 아랍의 왕이 가장 위대한 통치자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왕들 가운데서 그보다 더 큰 이슬람의 적은 없다. 그는 막대한 부와 낙타와 말을 가지고 있다.
미히라 보자의 치세에 인도를 방문한 아랍 연대기 작가 술레이만


나가바타 2세의 후계자인 라마바드라는 3년만 통치하다가 급사했고, 이후 그의 아들인 미히라 보자(836~885)가 즉위했는데 이 시기에 프라티하라 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북인도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미히라 보자는 먼저 라자스탄의 반란 세력들을 제압하여 내부를 안정시킨 뒤에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구자라트에 있던 라슈트라쿠타의 분파에서는 제후왕인 드루바 2세와 그의 동생 사이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보자는 이에 개입, 후자를 지원하면서 기병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구자라트 일부 지역과 말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데바팔라 사후 혼란에 빠져 있던 팔라 왕조를 침공하여 고라크푸르까지 이르는 영토를 점령하고, 타카 왕조를 물리쳐 카슈미르 일대를 정복하기도 했다.

한편 그의 치세에 이슬람의 공격이 다시 재개되었다. 당시 신드의 아랍 총독이었던 임란 이븐 무사는 이슬람의 세를 확장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북인도를 침공하고 있었다. 그러자 미히라 보자는 신단 전투에서 아랍군을 격파하고, 833~842년 사이에 이슬람 세력을 북인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880년경, 구자라트의 라슈트라쿠타 제후왕인 크리슈나 2세가 수도 우자인을 침공하여 프라티하라 왕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곧 미히라 보자의 보복이 뒤따랐다. 그의 치세가 끝나갈 무렵, 미히라 보자는 구자라트의 라슈트라쿠타를 완전히 정복하여 영토로 편입시켰다.

미히라 보자의 후계자인 마헨드라팔라 1세(885~910)의 시기에 프라티하라 왕조는 번영과 권력의 정점에 달했다. 당시의 프라티하라 왕조는 서쪽으로는 신드에서부터 동쪽으로는 벵골까지, 북쪽으로는 카슈미르 너머 히말라야에서부터 남쪽으로는 나르마다 강까지 이르는, 어쩌면 이전 바르다나 왕조굽타 왕조와 맞먹는 수준의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였다.

이 시기에는 여러 건축물들이 대거 건설되었다. 특히 오늘날 우타르프라데시주에 남아있는 카주라호 유적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아름답고 웅장하다. 또한 종교나 학문에 대한 후원도 많이 이루어져, 수많은 학자들이 카나우지에 있는 프라티하라 궁정에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사료와 문헌 등을 남겼다.

3.4. 쇠퇴와 멸망

마헨드라팔라 1세 사후에 즉위한 보자 2세(910~912)는 얼마 통치하지 못한 채로 마이팔라 1세(912~944)에게 찬탈당한다. 그러나 왕위 계승 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프라티하라 왕조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파라마라 왕조, 찬델라 왕조, 후칼라추리 왕조, 토마라 왕조, 차우한 왕조 등이 모조리 독립해나갔다.

916년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인드라 3세가 카나우지를 습격, 함락시킨 뒤에 잠시나마 북인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프라티하라 왕조의 세는 더욱 약화되었다. 10세기 중반까지 프라티하라 왕조는 서쪽으로부터는 튀르크~아랍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남쪽으로는 라슈트라쿠타 왕조로부터, 서쪽으로는 팔라 왕조로부터 계속 공격받았고, 그에 따라 속국들이 계속해서 독립해나가는 악순환에 빠졌다. 심지어 왕조의 발상지인 라자스탄 지역마저 빼앗길 정도였다. 10세기 말이 되면 프라티하라 왕조는 카나우지 인근만을 통치하는 소국으로 쪼그라든 상태였다.

1018년, 중앙아시아의 패자였던 가즈니의 술탄 마흐무드가 쳐들어와 카나우지를 점령했다. 당시 프라티하라 통치자였던 라자팔라는 도망치다가 찬델라 왕조의 비디야다라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찬델라 왕조는 라자팔라의 아들 트릴로찬팔라를 꼭두각시 왕으로 앉혔다. 트릴로찬팔라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036년에 후칼라추리 왕조와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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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리아인의 땅'을 가리키는 산스크리트어 단어.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동·서로는 벵골만아라비아해, 남·북으로는 각각 빈디아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까지의 영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한국어 위키백과 참조.[2] 837년 건립된 조드푸르 비문에 따르면 라마바드라(라마찬드라의 동생)이 그의 형을 위해서 문지기 역할을 한것을 본받았다고 나와 있고, 괄리오르 비문에서는 사우미트리(락슈마나)메가나다의 전투에서 적들을 물리치며 수호자를 자처했다고 말하는 내용이 등장한다.[3] 다만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 언급된 구르자라족이 구자라트 출신의 바루카차인들이라고 추측한다. 이들은 또다른 비문에서는 "사만타"로 언급되며, 칼라추리 씨족의 봉신이었다고 한다.[4] 기원전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와는 동명의 왕조이다.[5] A.M.T. Jackson이라는 학자는 "구르자라"라는 명칭에 대해 유난히 사료가 부족한 이유가, 이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쳐들어온 에프탈이나 돌궐인의 하위 부족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적대감으로서 당대인들이 일부로 기술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여기서 나아가서 구르자라족이 후나족에 의한 굽타 제국의 붕괴 이후 북인도에 혼란기가 도래할 때 유입된 중앙아시아 계통의 타민족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6] 다만 이것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가장 초창기의 필사본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으며, 10~11세기경 라지푸트계 파라마라 왕조 시대에 쓰여진 필사본에서부터 이 내용이 등장하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를 통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프라티하라 왕조와 연결시켜 찾으려고 하였다. 이후 16세기에 쓰여진 근세 필사본에서는 프라티하라 왕조가 무굴 제국에 대항하려는 라지푸트 음유시인들에 의해 라지푸트계 왕조로 둔갑되어(...) 이들의 지배층이 라지푸트의 영웅적인 씨족의 후손이라고 프로파간다 당했다.[7] 당시 인도에서 외부에서 유입된 이민족을 부르던 명칭 중 하나. 이외로는 야바나(인도-그리스), 샤카(인도-스키타이), 팔라바(인도-파르티아), 쿠샤나(쿠샨 왕조), 후나(에프탈, 알촌 훈족)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실제로 인도를 침공한 민족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본문에서는 시기상 아랍 이슬람의 우마이야 제국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8] 이때 이슬람 군대는 수도 다마스쿠스 직속 시리아 기병대와 현지의 아랍 군대를 포함, 튀르크족과 같은 타민족 용병들까지 끌어들여 10,000~15,000명의 기병과 5,000명의 보병, 2,000마리의 낙타 혼성부대를 갖추고 있었다. 정말 작정하고 쳐들어온 것.[9] 차우다, 혹은 차바다라고도 하며, 690년경부터 942년까지 구자라트 서남부 일대를 통치했다. 마지막 왕이었던 사만타마는 자식이 없어 조카인 물라라자를 입양했으나, 그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함으로써 차브다 왕조는 멸망했다. 조카야 지금 뭐하는 짓이냐?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숙부님 [10] 다만 그 과정에서 단티 두르가의 라슈트라쿠타 왕조와 같이 다른 여러 세력들과 충돌하면서 몇차례 패배를 경험하긴 했다.[11] 당시는 아유다 왕조의 통치 하에 있었다.[12] 벵골 일대를 가리키는 고중세 용어이다.[13] 라슈트라쿠타 왕조도 793년에 드루바 다라바르샤가 사망한 이후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려 카나우지를 팔라 왕조에게 상실해버렸다. 어부지리로 카나우지를 얻은 팔라 왕조는 "북인도의 황제"를 선언하기도 했다.[14] 이때 점령된 카나우지는 910년까지 쭉 프라티하라 왕조의 영토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