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심 일대
도시 서쪽의 '선셋 리조트' 일대
1. 개요
불가리아어 Поморие그리스어 Αγχίαλος (안키알로스)
영어 Pomorie
불가리아 동남부의 도시. 부르가스에서 동북쪽으로 12km, 네세바르에서 서남쪽으로 10km 떨어진 흑해로 돌출된 반도에 입지하고 인구는 약 1만 4천명이다. 옛 지명은 안키알로스로, 아폴로니아 (소조폴)의 속령이었다가 로마 제국 시기 트라키아 지역 최대 항구가 되어 번영했다. 708년, 763년, 917년에는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 제1제국 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며 점차 메셈브리아 (네세바르)에 주도권을 내주었다. 소조폴, 네세바르에 비해 구도심이 잘 남아있지는 않으나 역시 서쪽 해변에 리조트 단지가 있어 휴양지로 분류된다. 서쪽 7km 지점에 부르가스 공항이 있어 접근이 용이하다.
2. 역사
서쪽 외곽에 남아있는 고대 트라키아인 무덤 유적
기원전 4세기 무렵 부르가스 만의 건너편에 있는 아폴로니아 (소조폴)의 식민 도시로 세워졌고, 그리스어로 '바다와 가까운'이란 뜻인 안키알로스 (Ἀγχίαλος)라 명명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 아폴로니아의 경쟁 도시인 메셈브리아 (네세바르)가 도시를 점령했으나 얼마 후 아폴로니아가 수복한 후, 성벽을 허물었다. 안키알로스는 기원전 29-28년, '삼두정 크라수스'의 손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원정 후 로마 제국령이 되었다. 이후 성벽이 재건되었고,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의 속국인 오드뤼사이 왕국의 항구로 양도되었다가 서기 46년에 왕국이 병합되면서 로마령 모이시아 속주에 편성되었다. 2세기 들어서는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도시 지위를 받았고, 내륙의 넓은 농토를 배후지로 얻었다. 팍스 로마나 시기 안키알로스는 쇠퇴한 아폴로니아를 대신하여 트라키아의 주요 항구로 번영했다.
2.1. 동로마 제국기
917년의 안키알로스 전투
비록 270년 고트족이 도시를 함락하여 약탈했지만 294년 10월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3일간 머물렀고, 4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건설 후에는 제국의 수도에 트라키아산 농산물을 보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 무렵 기독교의 도래로 주교구가 되었고 안키알로스의 주교들은 344년 사르디카 공의회,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등에 참석했다. 476년에는 아드리아노폴리스로 향하던 테오도리크 대왕이 지나갔고, 513년에는 플라비우스 비탈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킨 후 안키알로스의 함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에 활용했다. 584년에는 아바르 칸국이 도시를 점령해 성벽을 파괴했고, 카간인 바얀 1세가 몇달 간 머물며 동로마 황제 마우리키우스와 평화 협상을 진행한 후 회군했다. 안키알로스를 회복한 마우리키우스는 성벽을 재건했다.
본래 아드리아노폴리스 대주교구 관할에 있던 안키알로스는 그 무렵 자체적인 대주교구가 되었고, 681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창건 후에는 동로마의 중요한 군사 거점이 되었다. 708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도시 근처에서 불가르 칸 테르벨에게 대패했다. 역으로 763년 6월에는 불가르 칸 텔레츠가 근처에서 콘스탄티노스 5세에게 패배한 후 폐위되었다. 766년 6월 콘스탄티노스 5세는 먼저 안키알로스로 향한 후, 2천 6백척의 대규모 함대를 소환했으나 상당수가 도중에 침몰하자 철수했다. 783년 5월에는 여자 황제 이리니가 안키알로스를 방문해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다. 812년 불가르 칸 크룸이 안키알로스를 정복한 후 슬라브 및 불가르 인들을 이주시켰다. 다만 864년 미하일 3세가 불가르 칸 보리스 1세로부터 일대를 돌려받았다. 917년 8월, 대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3만의 동로마 군대는 도시 북쪽에서 차르 시메온 1세의 1만 5천 불가르 군대와 맞섰다. 초반에는 동로마 군대가 불가르측 우익과 중앙을 압도하며 승기를 잡았지만, 포카스의 전사 소식을 퍼뜨리며 시메온이 직접 반격에 나서자 전세는 역전되어 안키알로스 전투는 동로마의 대패로 귀결되었다. 이후 메셈브리아와 안키알로스는 재차 불가리아 령이 되었고, 971년에야 요안니스 1세가 스뱌토슬라프 전쟁으로 약화된 불가리아를 침공해 동로마 령으로 수복했다. 11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낸 미하일 3세를 배출하는 등 안정을 누리던 도시는 1201년 불가리아 제2제국령이 되었고, 1263년 다시 동로마 령이 되었으나 1304년 또다시 불가리아 령이 되었다. 그러다 1366년 10월 사보이아 백국의 아메데오 6세의 십자군에 점령되어 마지막으로 동로마 령이 되었다.
2.2. 오스만 제국기
성 요르요스 수도원
1453년 콘스탄티노스 함락 후 안키알로스는 메셈브리아, 소조폴리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오스만 시기 지명은 아흐욜루 (Ahyolu)가 되었고, 실리스트라 에얄레트 산하의 카자 (읍)이 되었다. 도시는 여전히 그리스 정교도가 대부분이었고, 주교구였으며 15세기 말엽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낸 예레미아스 2세 트라노스를 배출했다. 그리스 유력 주민 중 상당수는 1819년을 전후로 민족주의 단체인 필리키 에테리아에 가담했고,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발발 후 주교 에우게니오스 등이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인 1829년 7월에는 러시아 제국군이 점령해 수개월간 주둔하다 철수했다. 당시 안키알로스 인구는 5천여로, 대부분의 그리스계에 일부 불가리아 및 튀르크계로 구성되었으며 6개의 성당 및 1개의 모스크가 있었다. 1856년에는 성 요르요스 수도원이 세워졌다. 1867년 행정 개편으로 아흐욜루 카자는 에디르네 빌라예트 산하 슬리미아 (슬리벤) 산작에 포함되었다. 1878년 1월, 러시아제국군이 도시를 재차 점령했고 오스만령 자치주인 동루멜리아의 부르가즈 산작에 속했다가 1885년 불가리아 공국령이 되었다.
2.3. 근현대
1907년의 모습
1900년 무렵 불가리아어로 안히알로 (Анхиало) 혹은 투톰이라 불린 안키알로스에는 6천여명이 살았고, 주민 중 82%가 그리스 계였다. 그러다 1905년부터 확산된 반그리스 기류가 1906년 7월의 폭동으로 이어져 안키알로스에서도 그리스의 박해를 받은 마케도니아 출신 불가리아 난민들의 주도로 3백여명이 학살되었다. 이후 많은 그리스 주민들이 도시를 떠났고, 테살리아 지역에 네아 안키올로스를 세웠다. 대신 오스만령 트라키아의 로젠그라드 (크르클라렐리)에서 피신한 불가리아 인들이 정착하며 안키올로스는 불가르화 되었고, 1934년에는 불가리아어로 '바다와 가까운'이란 뜻인 포모리에로 지명이 훈차 형식으로 바뀌었다. 20세기 중반 포모리에는 근대적 항구 도시로 성장한 부르가스에 밀려 쇠퇴했고, 인근의 석호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배후 농지의 포도주 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