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6-16 10:01:13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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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ederico_da_Montefeltro.jpg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Federico da Montefeltro
출생 1422년 6월 7일
교황령 구비오(Gubbio)
사망 1482년 9월 10일
페라라 공국, 페라라(Ferrara)
직업 군주, 용병 지휘관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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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저명한 용병 지휘관(condottiero: 콘도티에로)이자, 우르비노 공국의 통치자(페데리코 3세), 예술 후원자이다.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과의 혼인 관계를 바탕으로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우르비노의 군주가 된 이후에는 학자 군주의 모범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두칼레 궁을 건축하였고, 궁정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루치아노 라우라나(Luciano Laurana),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Francesco di Giorgio Martini) 등 예술가와 학자들을 끌어들여 우르비노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이끌었다.

2. 생애

1422년 우르비노 백작 귀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Guidantonio da Montefeltro)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신원은 확실하지 않다.[1] 1437년, 15세에는 베네치아와의 평화 조약 보증으로 인질로 보내졌고, 메르카텔로 등 영지 확보를 위한 젠틸레 브란카레오니(Gentile Brancaleoni)와 정략 결혼을 하나 자녀는 없었고 1445년에 이혼했다. 그리고 만토바에서 비토리노 다 펠트레(Vittorino da Feltre)에게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고전 문학, 수학, 군사 전략을 포함한 교육이었는데, 훗날 그의 예술 후원과 학문적 관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0대 후반부터 그는 용병 지휘관이 되어 용병들을 이끌게 된다.

1443년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1444년 부친의 후계자였던 이복 형제 오단토니오(Oddantonio)[2]가 암살되어 페데리코는 22세에 우르비노를 장악하게 되었다. 페데리코는 사생아였지만 2세 때인 1424년에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정식 인가를 받아 몬테펠트로 가문의 상속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계승이 가능했다.

1450년대부터 밀라노부터 교황령, 나폴리 등의 의뢰를 받아 활동하며 본격적인 전국구 활동을 시작했다. 이 군사 활동으로 페데리코는 연간 최대 8만 두카트의 수익을 얻으며 치세에 활용한다. 밀라노 공국의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를 위해 활동하며 신뢰받는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교황 비오 2세를 지원하며 교황청의 호의도 얻게 된다. 1460년에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조카이자 페사로 영주 알레산드로 스포르차의 딸인 바티스타 스포르차(Battista Sforza)와 재혼했다. 바티스타와의 사이에서 딸 6명과 아들 1명을 얻었는데 아들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1472-1508)를 출산하고 바티스타는 25세에 사망했다.

1472년에는 피렌체의 의뢰를 받아 볼테라(Volterra)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도시 약탈 등 강경한 전술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리고 1474년에는 드디어 교황 식스토 4세로부터 우르비노 공작(Duke of Urbino) 칭호를 받으며 군사적 충성의 보상을 얻게 된다. 페데리코는 공국의 수도 우르비노를 르네상스의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건축가 루치아노 라우라나에게 의뢰하여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을 건축하였으며, 이 궁전은 르네상스 건축의 걸작으로 현재 국립 마르케 미술관(Galleria Nazionale delle Marche)으로 사용되고 있다. 궁에는 방대한 도서관도 함께 조성하여 서적과 예술품을 보관했다. 도서관은 당시 유럽 최대 규모 중 하나였으며 2천여 점의 필사본(고전 저자, 신학자, 당대의 인문주의자 작품 포함)을 소장했다.[3] 두칼레 궁은 페데리코 당시 조성된 인문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구이도발도 시절 전성기를 누렸고, 훗날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가 당대 귀족의 문화와 예절을 기록한 '궁정인'을 저술하는 배경이 된다.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를 후원하며 자신과 바티스타의 이중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고, 라파엘로의 부친인 조반니 산티도 당시 두칼레 궁에서 활동한 인물 중 하나이다. 페데리코는 우르비노 공국에서 낮은 세율을 유지하고 기반 시설에 투자하며 시민들의 고충을 직접 듣기 위해 공개 접견을 자주 열었다. 그의 통치로 우르비노는 피렌체와 교황령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1478년 페데리코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타도를 목표로 한 파치 음모(Pazzi Conspiracy)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관여 여부는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말년에는 교황령을 위한 군사 활동을 이어갔으며, 1482년 베네치아에 맞서 페라라를 지원하던 중 열병(아마도 말라리아)에 걸려 9월 10일 페라라에서 사망했다. 아들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Guidobaldo da Montefeltro)가 후계자로 우르비노 공작에 올랐다.

3. 여담

파일:Piero_della_Francesca_044.jpg

1450년 마상 창 시합 도중 사고로 오른쪽 눈을 잃었는데 왼쪽 눈의 시야를 가린다며 코의 일부도 추가로 제거했다. 그래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그의 초상화에서 좌측면이 그려졌는데 코 윗부분도 잘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초상화는 1473-75년에 그려졌고 프란체스카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다만 초상화는 단독 작품이 아니고 그와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가 마주 보며 쌍으로 그려져 있다.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우르비노 공작과 공작 부인'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바티스타 스포르차는 1472년에 사망했고 페데리코는 1474년에 공작에 올랐기 때문에 바티스타는 생전에 공작 부인이라는 칭호로 불린 적이 없다. 그녀의 창백한 안면은 출산 후의 비극적인 죽음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바티스타의 죽음으로 슬퍼한 페데리코가 의뢰하여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 군주를 지향하여 군중에서도 리비우스의 로마사 같은 라틴어 텍스트를 읽었으며, 바티칸에 필적하는 도서관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1] 일부에서 말라테스타 가문 출신 여성으로 추측하는 정도.[2] 오단토니오가 우르비노 공국의 초대 공작이다.[3] 페데리코는 인쇄본을 열등하다 보고 필사본만 수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