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06 20:26:15

파벨 1세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bbd2d, #ffcd30 20%, #ffcd30 80%, #ebbd2d); color: #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로마노프 왕조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표트르 1세 예카테리나 1세 표트르 2세 안나 이바노브나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이반 6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표트르 3세 예카테리나 2세
제9대 제10대 임시 제11대
파벨 1세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니콜라이 1세
제12대 제13대 제14대
알렉산드르 2세 알렉산드르 3세 니콜라이 2세 }}}
}}}}}}
<colbgcolor=#ffcd30><colcolor=#000,#fff>
러시아 제국 제9대 황제
파벨 1세
Па́вел I
파일:Emperor_Paul_I_of_Russia.png
출생 1754년 10월 1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801년 3월 23일 (향년 46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미하일롭스키 성
묘소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재위기간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1762년 7월 17일 ~ 1773년 7월 1일
올덴부르크 백작
1773년 7월 1일 ~ 1773년 12월 14일
전러시아의 황제
1796년 11월 17일 ~ 1801년 3월 23일
구호기사단장
1798년 9월 ~ 1801년 3월 23일
서명
파일:파벨 1세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cd30><colcolor=#000> 가문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
이름 파벨 페트로비치 로마노프
(Па́вел Петро́вич Рома́нов)
아버지 표트르 3세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
형제자매 여동생 안나[1]
배우자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네 공녀(1773년 결혼 / 1776년 사망)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1776년 결혼)
자녀 장남 알렉산드르 1세, 차남 콘스탄틴, 장녀 알렉산드라, 차녀 옐레나, 삼녀 마리야, 사녀 예카테리나, 오녀 올가, 육녀 안나, 삼남 니콜라이 1세, 사남 미하일
신체 166cm, O형(Rh-)
종교 러시아 정교회 }}}}}}}}}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2.2. 즉위와 치세
2.2.1. 개혁
2.2.1.1. 왕위계승법 발표2.2.1.2. 농노제 개혁2.2.1.3. 귀족 특권 제한2.2.1.4. 군사 개혁2.2.1.5. 재정 개혁2.2.1.6. 행정 개혁2.2.1.7. 외교 정책
2.3. 암살
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3.3. 결혼과 후손3.4. 가족에 대한 일화
4. 기타5. 둘러보기

1. 개요

러시아 제국 제9대 황제. 표트르 3세예카테리나 2세의 외아들.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의 남편이자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대공, 알렉산드라, 옐레나, 마리야, 예카테리나, 올가, 안나 여대공, 니콜라이 1세, 미하일 대공의 아버지. 니콜라이 1세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의 장남 알렉산드르 2세의 친할아버지이다. 또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알렉산드르 3세의 친증조할아버지이며, 러시아 역사상 마지막 황제이자 군주 니콜라이 2세의 친고조할아버지.

2. 생애

2.1. 즉위 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okotov_paul_1_as_child.jpg
1761년 8살 때의 모습

표트르 3세예카테리나 2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예카테리나가 외도해서 생긴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소문일 뿐, 근거는 없다.[2]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옐리자베타 여제 밑에서 자라났다.

아버지 표트르 3세가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쿠데타로 폐위당한 후 줄곧 황태자였으나 실제로는 어머니의 제위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위험한 위치에 있었고, 실제로 예카테리나 2세의 즉위 초엔 그녀의 정통성을 이유로 여러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카테리나는 로마노프 왕조와 무관한 외국인 출신이면서 표트르 3세를 축출했지만 당시 9세였던 파벨이 어리다는 이유로 아들 대신 자신이 직접 황제로 즉위하여 통치했기 때문이다.[3]

파벨은 애초에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서 성장했다. 옐리자베타 여제가 파벨이 태어나자마자 예카테리나가 아이를 볼 틈도 없이 안고 나간 후 자기가 독점해 길렀고 예카테리나와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정치적 입장도 미묘해서 생모와 불편한 관계였지만 예카테리나 2세도 낳은 정이 있기 때문에[4] 아들과의 관계회복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유일한 적자 파벨을 위해 며느리 간택 때 미모를 고려하여 아들과 함께 직접 간택했고, 많은 자금을 하사하여 저택과 취미 생활이던 밀덕질에 돈을 펑펑 쓰게 해주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모자 관계에 타격을 준 건 푸가초프의 난이었다. 3여년의 반란으로 남러시아를 초토화시킨 이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 푸가초프가 자신을 표트르 3세라고 사칭하며 파벨의 옹립을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

이 때문에 모자 사이는 서먹해졌고 이들을 이간질하려는 여러 야심가들이 카더라 통신을 배포하면서 험악해졌다. 더군다나 이런 카더라 때문에 예카테리나는 아들의 정사 개입을 원천 차단하고 가치나를 주어 거의 쫓아냈고, 파벨은 수도에서 떨어져 나와 정사에서도 배제되자 예카테리나 2세 치하에 찬밥 신세였던 신하들을 측근으로 삼았다.

2.2. 즉위와 치세

결국 예카테리나 2세는 유일한 적자이면서 정적이었던 파벨을 꺼려서, 장손자 알렉산드르와 둘째손자 콘스탄틴이 태어나자 아들 부부에게 빼앗아서 자신이 키웠다. 그러니 알렉산드르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별 애정 없이 자랐고 예카테리나도 승하하기 10여년 전부터 아들 대신 손자인 알렉산드르를 즉위시키려 구상했다. 하지만 애초에 명분도 약한 데다 알렉산드르 본인도 준비가 안 되었다고 반대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진 못하고 수순대로 황태자 파벨이 파벨 1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하자마자 어머니와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하려 했고, 러시아 제국 궁정에 만연한 프랑스풍은 물론 외국의 풍습과 물건, 심지어는 해외여행까지 금지하려 했다. 파벨 1세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 제국에서 귀중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군대와 자신과 이야기하는 사람 뿐"이었다. 다만 그 사람도 가치 있는 것은 이야기하는 그 순간 뿐.

2.2.1. 개혁

2.2.1.1. 왕위계승법 발표
1797년 대관식을 치르자마자 제위계승법을 발표해 장자계승원칙을 확립시켰다. 그전까지 러시아의 제위 계승은 황제가 생전에 직접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식이었는데 파벨 1세는 제위계승법을 서유럽처럼 법령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장자계승원칙은 왕위계승자를 사전에 확정하고 정치적 혼란을 막는 조치였다.[5] 이것은 앞서 어머니 치세에 대한 반발로 자신을 건너뛰어 황위계승을 하려는 시도와 취약한 정통성을 어떻게든 보완해보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2.2.1.2. 농노제 개혁
파벨 1세는 러시아 제국 사상 농노제 문제에 대해 농노제를 제한하고 농노의 권리를 보장하고자 한 최초의 황제였고, 이때문에 당대의 농민들과 19세기의 인민주의자, 차르주의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러시아의 농노제는 루스 차르국 시대에 법제화되기 시작하여 표트르 대제 시기에 완성되었는데, 러시아가 워낙 넓은 나라라 지역에 따라 운영 양상에 있어서 편차가 심하긴 했지만, 일단 법적인 측면만 보자면 농노에게 매우 억압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모친인 예카테리나 2세가 귀족의 특권을 강화했기 때문에 농노들은 더욱 안좋은 상황에 쳐하게 되었다.

1797년 4월, 황제는 연이어 농노제에 대한 대규모 개혁을 발표했다. 일부 지역에서 지주가 농노를 대상으로 초야권을 행사하거나 자녀를 부모로부터 빼앗는 등의 관습을 엄격히 금지했다. 농노를 노예처럼 사고파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처벌했으며, 농노가 지주를 위해 일주일에 3일 이상 강제노동에 종사하는 관습을 폐지하고 일요일에 의무적으로 모든 노동으로부터 휴식을 취하도록 규정했다.

이후 모든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곡물 강제 수매를 전격적으로 폐지하고, 군 징집을 위해 부과되는 인두세 체납분을 전면 탕감했으며, 농노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소금의 특별 판매를 실시했다. 이후 빵 가격이 오르자 빵 가격을 낮추기 위해 식량 비축분을 풀어 기근을 단기간에 해결했다.

이러한 정책들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황제는 지역 총독들로 하여금 지주들이 농노를 제대로 대우하는지, 법에 어긋나거나 비인도적인 대우를 하지 않는지 감시하고 만약 부적절한 행위가 발견될 경우 정부에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지주가 농노를 착취했을 시 착취한 농노 한명당 5백 루블을 벌금으로 내도록 규정하고, 만약 이런 일이 상습적으로 일어날 시 재산을 압수하는 무거운 처벌을 내렸다.

그리고는 모든 지주들에게 농노의 건강을 적절한 상태로 유지하고, 이를 위해 의사를 고용하거나 병원에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후대에 황제는 '러시아 최초의 무료 건강 보험 정책을 실행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황제는 농노는 지주의 개인 재산이 아닌 황제의 신민이라는 기존의 견해를 공식적으로 재확인하고, 이를 위한 권리를 보장하고자 평생 노력했다. 비록 농노제 폐지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의사를 내비쳤으나, 농노가 지주에게 불만을 표시해도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등, 파벨 1세 기간 동안 농민들은 이전 및 이후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나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농민들은 황제가 암살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황제를 그리워했다.
2.2.1.3. 귀족 특권 제한
러시아 제정은 표트르 1세 시대에 모든 귀족을 대상으로 반드시 공직에 종사하고, 이를 어길 시 처벌하거나 최대 작위 상실까지 이루어지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댓가 없는 귀족에 대한 무조건적 강제 착취는 귀족들로부터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예카테리나 2세 치세가 끝냈을 때 귀족에 대한 모든 의무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간 확충된 귀족들의 권리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예카테리나 2세 재위기 동안 더더욱 확충되었다. 황제는 이런 상황을 시급히 타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일단 관료제 내의 만연한 부패와 사치, 방탕, 도덕적 해이가 만연한 귀족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즉위 직후 전국의 2만여명의 관료를 대상으로 부패, 횡령, 절도,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전격적으로 해고했다. 이후 살인, 강도, 음주 등 공무상 중범죄를 저지른 귀족들을 대상으로 체벌을 재도입했고, 장교 명단에 이름만 올려놓으면서 월급만 받아 쳐먹고 얼마 안가 장교 명단에서 이름을 지워버리는 식의 꼼수를 막기 위해 복무기간 1년 미만의 장교들의 사직을 금지했다. 이듬해에는 군 장교가 무관직에서 문관직으로 전환할 시 반드시 원로원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귀족들의 공직 복무를 조장하고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공직에 복무하지 않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지방 젬스트보 의회 참정권을 박탈하고, 공직을 맡지 못하도록 했으며, 정부를 대상으로 하는 집단적인 청원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했다.

1799년에는 아예 주와 군의 귀족 의회를 폐지해버리고, 귀족들이 지역 법원에 배심원을 선출하는 관행을 금지해버렸다.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인두세를 도입하고, 지방자치 기관에 대해 자치에 참가하는 모든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지세를 도입했다.

황제의 치세 동안 10만명의 귀족들이 뇌물, 횡령, 음주, 부패 등의 혐의로 공직에서 쫒겨나 고향으로 쫒겨났다. 귀족들은 황제를 증오하고 동시에 두려워했으며, 수도로 가는 것을 기피했다. 반면 평민들과 병사들은 황제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고, 자신들이 국가를 위해 공직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황제가 귀족들에게 암살당하면서 무산되었다.
2.2.1.4. 군사 개혁
파벨 1세는 군대의 효율적 전쟁수행을 위한 개혁에 착수했다. 즉위 직후 과도하게 비대해진 군대를 감축하여 2,300명의 장교를 감축하고, 장교 직에 이름만 올려놓고 실제 복무는 하지 않는 이들의 명단을 모조리 장교 명단에서 삭제했다. 예카테리나 2세가 발포한 긴급 징병제를 취소했다.

1796년 11월 29일, 황제는 새로운 제국군 군사 규정을 발포했다. 황제는 모호하고 시대에 뒤떨어졌던 해군의 군사 규정을 혁신하고, 표트르 1세가 마련한 규정 하에서 지나치게 엄격한 처벌이 남용되었던 것을 시정하여 병사 또는 장교의 사형 집행을 폐지했다. 장교가 병사를 대상으로 처벌권을 남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장교의 불법행위에 대해 병사가 탄원하는 것을 허용했다. 또 항해, 천문학, 역사학, 설계 도면 등 전문적 지식을 갖춘 새로운 장교들을 기용했다.

1798년, 황제는 군 의무복무 기간을 기존에는 종신이었던 것을 25년으로 단축하고, 아버지가 농노이더라도 군 복무 중에 태어난 자식은 농노가 되지 않는다는 법령을 발포했다. 이듬해에 황제는 제국 사상 최초로 무공을 세운 낮은 계급의 군인 및 장교들을 대상으로 하는 훈장을 도입했다.

파벨 1세는 특히 흉갑기병 부대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로 인해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계기로 흉갑기병은 이제 시대에 뒤쳐져 쓸모없다고 생각한 군부와 충돌을 빚었다. 그러나 이후 조국전쟁을 통해 흉갑기병이 여전히 유용하다는 황제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후 황제는 러시아 육군에 프로이센식 제복을 도입했다. 이는 반독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던 러시아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여러모로 유용한 조치였다. 우선, 제복의 가격이 기존보다 5배나 싸졌고 이로 인해 장교들은 낮은 월급으로 비싼데다가 별로 질이 좋지도 못한[6] 제복 마련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또 새로운 제복을 도입하면서 러시아군은 따뜻한 월동복을 얻게 되었고, 실제로 이후 러시아군의 겨울 기간 사망률은 극적으로 감소했으며 겨울 동안의 작전 수행력도 크게 증가했다.

황제는 하급 장교와 일반 사병을 위한 각종 복지에도 신경을 썼다. 병사 및 장교 월급을 현실화하고, 매일 소비할 수 있는 고기와 포도주를 도입했다. 모든 병사들을 위한 의무실이 설치되었고, 전문적인 지식과 면허를 가진 군의관을 채용하도록 했다. 일년에 몇일 이상의 정기 휴가를 도입하고, 병사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부상으로 인해 제대하거나 25년 이상 복무한 병사들을 위한 군인연금을 도입했다. 또 군인의 자녀나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고아들을 돌보기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군인들을 매장하기 위한 묘소를 마련했다.

군의 보급과 조직, 훈련을 정기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군 감찰부가 도입되었다. 전국에 11개 지구로 나뉘어진 감찰구가 조직되어 정기적으로 평시의 보급, 훈련 상태를 점검하도록 규정했다. 이후 최고 참모부를 혁신하여 체계적이고 중앙집중적으로 통제되는 명령 체계를 구축했다.

이외에도 기병 근위대를 창설하고, 전문적으로 규정된 공병 부대를 창설했으며, 군사적 목적으로 지도를 제작하고 관리하기 위한 부서를 설립하고, 해군성을 창설했으며, 선박을 만들기 위한 목재가 썩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체계적 관리 프로세스를 도입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2.2.1.5. 재정 개혁
파벨 1세 즉위 시점 러시아의 부채 문제는 심각했다. 어음화폐의 발행이 남용되었고, 궁정 지출은 과도하게 부풀려졌으며, 정기적 회계 감시 체계가 없어 부패와 횡령이 일상화되었다. 황제의 즉위 시점 러시아의 국가부채는 2억 루블에 달했다.

황제는 즉위 직후 궁정에서 들어가는 예산 지출을 10분의 1로 삭감하고, 은화 유통량을 늘리기 위해 식기 등을 모조리 녹이라고 명령했다. 발행이 남용된 종이 지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백만 루블에 달하는 지폐를 붉은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2.2.1.6. 행정 개혁
황제는 즉위 직후 예카테리나 2세 치하에서 과도하게 수가 늘어난 주와 군의 숫자를 대대적으로 감축하기 시작했다. 51개였던 주는 42개로 감축되었고, 군의 수는 534개에 달했던 것이 419개까지 100개 이상 감축되었다.
2.2.1.7. 외교 정책
외교정책에 있어서 프랑스 혁명을 극도로 증오하여 사상은 물론이고 프랑스풍의 옷까지 규제했다. 이 당시 러시아 제국 최고의 군인 중 하나로 꼽히는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기도 하였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몰타를 잃어서 방황 중인 가톨릭 몰타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 쳐발려서 굴복한 유럽 나라에서 대인배 취급을 받았으나 곧 러시아 빼곤 죄다 프랑스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강화에 응해야 했다. 여담으로 프랑스 방문 때 파벨은 루이 16세의 딸인 어린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에게 '당신을 모시게 된다면 큰 영광'이라는 예의상 드립을 날렸는데, 혁명 후 망명한 마리 테레즈가 러시아에서 살게 되고 파벨이 먹고 살게 해주었으니 좀 이상하게 이루어진 셈.

한편으로는 유럽 대륙 내에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였으며 실제로 덴마크를 러시아편으로 끌어들이는 등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해상 교역에 차질이 생긴 영국이 하이드 파커와 호레이쇼 넬슨 지휘 하에 함대를 파견했고, 영국이 덴마크를 코펜하겐 해전에서 탈탈 털어버렸다. 황제는 분개했으나 해상에서는 영국 해군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2.3. 암살

의심병이 점차 심해지면서 자기 가족들과 분리된 파벨 1세는 자신의 호위연대를 궁에 상주시켜 놓고 있었는데 마침 호위연대장을 출타시킨 그날 밤 사건이 터졌다.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과 장교들은 파벨 1세의 개인 침실을 급습해 그의 신변을 억류했다. 처음엔 이들도 직접 죽이진 않고 얌전히 퇴위를 선언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파벨 1세가 끝까지 거부하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주보프가 파벨 1세를 칼로 쳐 죽였다. 1801년 3월 23일, 이렇게 파벨 1세는 즉위한 지 불과 5년 만에 허무하고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레온티 베니히센이 주도했다곤 하는데 영국의 지원설도 있고 그의 단독 범행은 아니었다. 이미 파벨은 국민들과 귀족들에게 호감과 민심을 잃은 지 오래라 귀족들 중 황제 암살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후일담으로 반란군 중 한 명인 팔렌 백작은 아버지가 귀족들의 쿠데타로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3일 동안 잠도 못 자고 울고 있는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위로는커녕 제발 정신 좀 차리라는 듯이 답답해하는 어조로 "그만 울고, 통치를 하십쇼!" 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어쨌든 귀족들이 대신 반란을 일으켜준 덕분에 차르 자리에 오르게 된 최대 수혜자 알렉산드르 1세쿠데타를 주도한 귀족들과 그 가담자들에게 어떠한 사후 조치도 없이 그냥 면직 처리만 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즉위하자마자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정신과 마음으로 통치하고 싶다는 공식 연설문을 발표해 아버지가 철회한 할머니의 모든 정책들을 되살리고 지방 기관 규제도 풀었으며, 해고 당한 친 예카테리나 귀족들과 신료들 역시 복직시켰다. 이것이 알렉산드르의 솔직한 심경이었을 듯하다.

사실 아들들인 알렉산드르 1세와 차남 콘스탄틴 대공은 그 암살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암살까지 동의했는지는 현재까지 불분명하다고 하는데 최소한 아버지의 퇴위까지는 동의했고 "해치지는 않는다" 정도로의 동의가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때문에 알렉산드르는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에게 부친을 살해했다는 강한 의심과 질책을 들었고 재위 기간 내내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파벨 1세
(Па́вел I)
<colbgcolor=#fff3e4,#331c00> 표트르 3세
(Пётр III)
<colbgcolor=#ffffe4,#323300>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Karl Friedrich, Herzog von Holstein-Gottorp)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4세
(Friedrich IV, Herzog von Holstein-Gottorp)
스웨덴의 헤드비그 소피아
(Hedvig Sophia af Sverige)
러시아의 안나 페트로브나 여대공
(А́нна Петро́вна)
표트르 1세
(Пётр I)
예카테리나 1세
(Екатери́на I)
예카테리나 2세
(Екатери́на II)
안할트체르프스트 공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Christian August, Prince of Anhalt-Zerbst)
안할트도른부르크 공
요한 루트비히 1세
(Johann Ludwig I, Prinz von Anhalt-Dornburg)
조이치의 크리스티네 엘레오노레
(Christine Eleonore von Zeutsch)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하나 엘리자베트
(Joanna Elisabeth von Holstein-Gottorp)
홀슈타인고토르프오이틴의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Christian August von Holstein-Gottorp-Eutin)
바덴두를라흐의 알베르티나 프리데리케 공녀
(Albertina Frederica von Baden-Durlach)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알렉산드르 1세
(Alexander I)
1777년 12월 23일 1825년 12월 1일 바덴의 루이제 공녀
슬하 2녀
2남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Grand Duke Constantine Pavlovich)
1779년 4월 27일 1831년 6월 27일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7]
자네타 그루진스카야
1녀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Alexandra Pavlovna, Archduchess of Austria)
1783년 8월 9일 1801년 3월 16일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
슬하 1녀
2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비 헬레나 파블로브나
(Elena Pavlovna, Hereditary Princess of Mecklenburg-Schwerin)
1784년 12월 24일 1803년 9월 24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슬하 1남 1녀[8]
3녀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비 마리아 파블로브나
(Maria Pavlovna, Grand Duchess of Saxe-Weimar-Eisenach)
1786년 2월 16일 1859년 6월 23일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슬하 2남 2녀[9]
4녀 뷔르템베르크의 왕비 카타리나 파블로브나
(Catherine Pavlovna, Queen of Württemberg)
1788년 5월 21일 1819년 1월 9일 올덴부르크의 게오르크 공작
슬하 2남
빌헬름 1세
슬하 2녀[10]
5녀 올가 파블로브나 여대공
(Duchess Olga Pavlona)
1792년 7월 22일 1795년 1월 26일
6녀 네덜란드의 왕비 아나 파울로브나
(Anna Pavlovna, Queen of Netherlands)
1795년 1월 18일 1865년 3월 1일 빌럼 2세
슬하 4남 1녀[11]
3남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1796년 7월 6일 1855년 3월 2일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슬하 4남 4녀[12]
4남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Pavlovich)
1798년 2월 8일 1849년 9월 9일 뷔르템베르크의 샤를로테
슬하 5녀

3.3. 결혼과 후손

첫번째 아내는 1773년 황태자였던 대공 시절 결혼한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네 공녀(러시아식으로는 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였다. 파벨은 여러 신부 후보들 중에서 빌헬미네를 직접 골라 결혼했고 그만큼 빌헬미네를 열렬하게 사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빌헬미네는 하필이면 남편인 파벨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 이를 알게 된 예카테리나 2세가 이 내연남을 외지로 보내버리자 파벨은 친구를 보호하려고 했던 걸 보면 이 불륜을 그저 루머로 여긴 것 같다. 빌헬미네는 1776년 출산 중에 아이와 함께 사망했다.

이후 1776년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와 재혼했으며 그 사이에서 장남 알렉산드르(1777년생), 차남 콘스탄틴(1779년생) 이후 알렉산드라(1783년생), 옐레나(1784년생), 마리야(1786년생), 예카테리나(1788년생), 올가(1792년생), 안나(1795년생) 등 딸만 6명을 두다가 3남 니콜라이(1796년생)와 4남 미하일(1798년생)이 태어났다.

그러나 올가는 1795년에 요절했고 알렉산드라와 옐레나는 출산 중에 죽었다. 파벨 1세 이후로 러시아 제국의 황위 계승에는 살리카법이 개정되었는데, 아들 넷 중 장남 알렉산드르 1세는 두 딸만 남겼고, 차남 콘스탄틴은 사생아만 있는 데다 귀천상혼을 했고, 4남 미하일도 딸만 다섯을 두었기 때문에 로마노프 가문의 계보는 3남 니콜라이 1세의 계보로만 이어지게 된다.

초상화를 보면 파벨 1세가 추남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대비되게 후처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로마노프 가문에 뷔르템베르크의 잘생긴 외모를 가져왔다고 할 정도의 미녀에 단신의 추남 파벨보다 키까지 훨씬 컸다. 덕분에 파벨 1세와 대조적으로 아들 니콜라이 1세유럽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라 일컬어질 정도로 당대에 손꼽히는 미남이 되었다. 조피 도로테아가 로마노프 가문의 외모를 업그레이드해준 덕에(?) 니콜라이 1세 이후 로마노프 왕조의 대공들은 장신인데다 외모도 아주 준수했다.

엄밀히 말하면 파블로비치/파블로브나 세대의 경우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의 뛰어난 외모를 물려받은 자녀가 있는가 하면 추남 파벨 1세의 외모를 물려받은 자녀도 있어서 좀 갈렸지만 아들 니콜라이 1세는 어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은 케이스고, 니콜라이 1세 역시 뛰어난 미녀인 프로이센의 샤를로테[13]와 결혼해서 낳은 자녀들과 후손들부터는 진짜로 장신에 미남미녀들이 많게 된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나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9세처럼 그의 후손들이 유럽의 군주로 이어지고 있다. 차녀 옐레나와 삼녀 마리야, 6녀 안나, 삼남 니콜라이 1세가 각각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 국왕들의 조상이 되었다.[14]

3.4. 가족에 대한 일화

파벨 1세의 사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파벨의 넷째 딸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를 후처로 삼고 싶어했지만 마리야 황태후유럽의 폭도떼 두목(?)인 나폴레옹이 사위가 될 상황을 펄펄 뛰며 반대했고, 러시아 관습상으로도 이 문제에서는 모후를 이길 수 없었던 알렉산드르 1세가 얼른 이종사촌인 올덴부르크의 게오르크 공작[15]에게 예카테리나를 시집보내 버렸다.[16]

당연히 나폴레옹에게 거절 편지를 보내야 했는데 당시 높으신 분들 예법은 직접적인 거절이나 비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이 40줄에 후계자가 급한 나폴레옹에게 전한 말이 "넷째 여동생 대신 14살인 막내 여동생 안나 파블로브나가 있는데 성인으로 장성할 때까지 기다려달라" 였다. 그나마도 이 편지가 도착한 것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쳐바르고 빈에서 프란츠 2세의 딸 마리아 루도비카 공주에게 청혼하고 나서였다. 당연히 나폴레옹 이를 꽤 불편하게 받아들였고 호사가들에겐 if 떡밥으로 "나폴레옹에게 순순히 여동생을 조공으로 바쳤으면 러시아 원정도 없었고, 나폴레옹의 몰락도 없고, 유럽의 역사가 바뀌었을 거다" 하는 카더라가 퍼지기도 했다.

6번째 딸 안나 파블로브나네덜란드 빌럼 2세의 왕비가 되었는데, 서로 종교나 취향이 달랐지만 남편이 정교회 신앙을 존중해 준 덕분에 생활에 딱히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자식들은 결혼계약에 의해 개신교 신자로 자랐다. 유럽에서 종교색이 옅어지는 19세기부터는 종교가 다른 국가나 가문끼리 결혼을 할 경우 한 쪽이 개종하거나 자식들을 특정 종교로 키운다는 합의[17]를 하기 때문에 종교의 차이가 그 이전 시기만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벨 1세의 아버지 표트르 3세부터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까지는 거의 모두 정교회를 믿지 않는 독일 제후국 군주 가문과 통혼했다.[18]

4. 기타

  • 죽기 직전 코사크 부대에게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인도를 공격해서 인도에서 영국 세력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와 협력해서 중앙아시아를 건너 이란 아스트라바드 항구에서 프랑스군과 합류한 뒤 아프간 칸다하르와 헤라트를 거쳐 인도까지 가라고 했다. 이 인도 원정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비슷한 느낌으로 꾸려졌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비현실적인 망상에 시달린 광기라고 조롱하는 의견들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로는 그렇게까지 무모하고 어리석은 명령은 아니고 나름대로 가능성은 있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파벨 1세의 암살 이후 원정은 취소됐는데, 그때문에 그의 암살에 영국이 개입했다는 음모론이 이 조치와 연관되기도 한다. 이 일은 1840년 이후에 프랑스에서 출판물이 나오면서 공개됐는데, 이후 그레이트 게임에서 영국 국민의 반러시아 감정을 더욱 부채질 시켰다.

5. 둘러보기

파벨 1세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90202, #cc0202 20%, #cc0202 80%, #990202);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 필리프 요한 아돌프
빌헬름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
프리드리히 3세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4세 카를 프리드리히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
카를 페터 울리히 파울 }}}}}}}}}


파일:구호기사단원 깃발.svg
몰타 기사단장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000,#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구호기사단#s-3.1|
구호기사단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라르 드 마르티그 레이몽 뒤 퓌 오거 드 발벤 아르노 드 발벤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길버트 드 콩스 가스톤 드 뮈롤 요베르트 드 시리아 로저 드 물랭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아르멩골 데 아스파 가르니에 드 나뷔레 조프루아 드 동종 페르난두 아폰수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조프루아 르 라트 게랭 드 몽테규 베르트랑 드 테시 게랭 르브룅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베르트랑 드 콩스 피에르 드 비에이유브리우드 기욤 드 샤토뇌프 위그 드 레벨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니콜라스 로르뉴 장 드 빌리에 오동 드 팽 기욤 드 빌라레
[[로도스 기사단|
로도스 기사단
]]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풀크 드 빌라레 엘리온 드 빌뇌브 디우도네 드 고존 피에르 드 코르네야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로저 드 팽 레이몬드 베렌가르 로베르 드 쥴리 후안 페르난데스 데 에레디아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리카르도 카라치올로 필리베르 드 네일락 안톤 플라비안 데 리파 장 드 라스틱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자크 드 밀리 피에로 라이몬도 자코스타 조반니 바티스타 오르시니 피에르 도뷔송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에머리 당부아즈 기 드 블랑셰포르 파브리지오 델 카레토 필리프 빌리에 드 릴라당
[[몰타 기사단|
몰타 기사단
]]
(제44대) 제45대 제46대 제47대
필리프 빌리에 드 릴라당 피에로 드 폰테 디디에 드 생자이유 후안 드 홈데스
제48대 제49대 제50대 제51대
클로드 드 라 셍글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 피에르 드 몬테 장 드 라 카시에르
제52대 제53대 제54대 제55대
위그 루벵스 드 베르달 마르틴 가르제스 알로프 드 위그나쿠르 루이스 멘데스 데 바스콘첼로스
제56대 제57대 제58대 제59대
앙투안 드 폴 조반니 파올로 라스카리스 마틴 드 레딘 아네트 드 클레르몽제상
제60대 제61대 제62대 제63대
라파엘 코토너 니콜라스 코토너 그레고리오 카라파 아드리앙 드 위그나쿠르
제64대 제65대 제66대 제67대
라몬 페렐로스 마르크안토니오 존다다리 안토니오 마누엘 데 빌헤나 라몬 데스푸이그
제68대 제69대 제70대 제71대
마누엘 핀토 다 폰세카 프란시스코 시메네스 데 테자다 에마뉘엘 드 로한폴둑 페르디난트 폰 홈페슈
[[구호기사단#s-3.4|
주권 군사 병원 기사단
]]
제72대 제73대 제74대 제75대
파벨 1세 조반니 바티스타 토마시 조반니 바티스타 체스키 아 산타 크로체 갈레아스 폰 툰 운트 호엔슈타인
제76대 제77대 제78대 제79대
루도비코 치기 델라 로베레 안젤로 데 모하나 디 콜로냐 앤드류 버티 매튜 페스팅
제80대 제81대
자코모 달라 토레 델 템피오 디 산귀네토 존 티모시 던랩 }}}}}}}}}}}}


[1] 그러나 어린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파벨이 실질적으로 표트르 3세예카테리나 2세의 외동아들이었다.[2] 무엇보다 아버지와 생김새와 성격이 비슷하고, 표트르 3세가 지능이 떨어져도 자기 자식도 못 알아볼 정도로 백치는 아니었다. 물론 옐리자베타가 살아있던 시절에도 예카테리나 2세는 미래의 폴란드 왕을 비롯한 여러 남자들과 불륜을 했으나 현재는 많은 이들이 후대에 예카테리나 2세가 여러 남을 두고 문란한 것을 두고 공격하기 위해 만든 헛소문으로 본다.[3] 아들이 멀쩡히 있는데 아내가 제위를 계승한다니 뭔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표트르 1세의 뒤를 예카테리나 1세가 뒤를 이은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는 당시 러시아가 지명 상속제를 택하고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지 법제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는 다른 유럽 국가들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계승법이 유럽처럼 되었다면 파벨 1세는 아버지 사후 즉시 즉위했을 것이고, 나이가 어려서 문제가 된다면 귀족들이 섭정위원회를 꾸려서 보좌를 했으면 했지 왕비가 마음대로 정사에 관여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러시아 귀족들도 아직까지 지명 상속제를 유지하고 있는 자기네가 미개하다면서 자조했을 정도.[4] 게다가 6~8살 시점에선 옐리자베타 여제가 오늘내일하던 상태였고, 실제로 파벨이 8살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뒤늦게나마 예카테리나 2세와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었다.[5] 당시 서유럽에서는 왕위 승계시마다 쿠데타가 일어나는 러시아의 야만성을 비웃었다. 특히 예카테리나 2세와도 서신을 교환했던 볼테르까지 지명상속제를 두고, 지명제가 아니라 점령제가 아니냐고 예카테리나를 비웃을 정도.[6] 당시 러시아는 제조업 수준이 처참해 군용 제복의 질이 좋지 않기로 악명높았다[7] 1796년 결혼/1820년 이혼. 에른스트 1세레오폴드 1세의 누나이자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의 언니.[8]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 파울 프리드리히[9] 독일 제국의 황후이자 프로이센의 왕비 아우구스타 등.[10] 네덜란드의 왕비 소피아 등.[11] 빌럼 3세, 헨드릭 왕자 등.[12] 알렉산드르 2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야, 뷔르템베르크의 올가 왕비,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자비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13] 샤를로테의 어머니이자 니콜라이 1세의 장모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가 아름답고 뛰어난 외모의 미녀였다.[14] 영국 국왕 찰스 3세(니콜라이 1세), 네덜란드 국왕 빌럼알렉산더르(옐레나, 안나),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10세(옐레나, 마리야, 니콜라이 1세),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마리야, 니콜라이 1세),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마리야).[15] 올덴부르크 대공 페터 1세와 예카테리나의 이모 뷔르템베르크의 프리데리케의 차남.[16]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는 게오르크 공작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고 잘 살다가 사별한 뒤 뷔르템베르크 국왕이자 외사촌인 빌헬름 1세와 재혼하여 왕비가 되었으나 차녀 조피를 낳고 얼마 되지않아 사망했다.[17] 대부분 아내가 남편 쪽을 따르지만 드물게 상속녀와 결혼하는 데릴사위의 경우에는 아내의 종교를 따르기도 했다.[18] 알렉산드르 1세의 황후 바덴의 루이제 공녀, 니콜라이 1세의 황후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 헤센의 마리 공녀, 니콜라이 2세의 황후 헤센의 알릭스 공녀. 예외는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와 결혼한 알렉산드르 3세인데 덴마크 왕국도 러시아 정교회를 믿지않는다는 건 동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