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10 16:12:35

그라쿠스 형제

파일:그라쿠스 형제.jpg
그라쿠스 형제 조각상[1]

1. 개요2. 출신 가문과 부모3.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3.1. 농지법
4. 가이우스 그라쿠스
4.1. 호민관 이전의 삶과 행적4.2. 첫 번째 호민관 시기4.3. 두 번째 호민관 시기4.4. 몰락과 죽음4.5. 사후 이야기
5. 형제의 동기6. 평가7. 후손

1. 개요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 공화국정치가로, 형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2]와 동생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3]를 말한다.

이들은 기원전 2세기에 호민관을 역임하며 농지법을 발의한 뒤 시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원로원에 의해 피살당하는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다. 이는 고대사에서 평민에게 부의 분배를 시도하기 위해 귀족층에 맞선 가장 유명한 사례로 꼽히며, 훗날의 사회주의대중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

2. 출신 가문과 부모

유서깊은 평민 귀족노빌레스 중의 노빌레스로 자타가 인정한,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가문 출신이었다.

흔히 셈프로니우스 씨족은 그라쿠스 가문이 평민 귀족으로 번역되는 노빌레스인 까닭에, 평민 씨족의 대명사로 인식된다. 하지만 셈프로니우스 씨족은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씨족 등과 마찬가지로 파트리키플레브스가 지파 가문에 걸친 성씨였다. 따라서 이들은 여러 지파로 나눠져 있었지만, 전통을 공유한 다른 씨족 가문들처럼, 그들 나름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이들은 지파 가문 모두 공통적으로 '가이우스'를 개인 이름으로 공유했고, 각 지파 가문마다 특정 개인 이름을 사용해 구분했다. 또 평민 계급에 속한 지파 가문은 종가격 지파의 개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라쿠스 가문보다 먼저 이름을 날린 셈프로니우스 씨족 출신 가문은 파트리키에 속한 지파 가문인, 아트라티누스(Atratinus) 가문이었다. 이들은 셈프로니우스 씨족 가문 전체에서 유일하게 파트리키였고, 왕정부터 공화정 초기까지 위세가 대단했다. 이들의 코그노멘 뜻은 "검은 상복을 입고 애도하는 자"였고, 가이우스 외에 독점적으로 '아울루스', '루키우스'를 선호해 사용했다.

그라쿠스 가문은 셈프로니우스 씨족의 평민 지파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신체적 특징을 씨족 내 가문명으로 삼은 루푸스, 루틸루스, 투디타누스 가문이나, '현명한 사람'을 뜻한 소푸스 가문, '파리'를 뜻한 무스카 가문과 달리, 그라쿠스 가문은 종가격 지파인 아트라티누스 가문의 코그노멘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뜻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라쿠스'(Gracchus)는 '갈까마귀'를 말했고, 그들의 뜻은 아트라티누스 가문과 연결되었다. 따라서 그라쿠스 가문은 공화정 초기 이후 멸문되어버린 아트라티누스 가문 이후 실질적인 셈프로니우스 씨족의 리더격 지파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런 평가처럼 그라쿠스 가문과 그라쿠스 가문에서 분가 형태로 갈라진 롱구스 가문은 다른 평민 가문들이 대개 가이우스 외의 '푸블리우스', '마르쿠스'를 쓴 것과는 달리 '티베리우스'를 독점해 장남에게 물려줬다. 따라서 루틸루스, 루푸스, 무스카 가문은 티베리우스라는 이름을 쓰지 못해 '티투스'를 개인 이름으로 사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런 그라쿠스 가문은 같은 셈프로니우스 씨족의 마지막 파트리키 지파였던 아트라티누스 가문이 기원전 380년 집정관을 지낸 아울루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를 끝으로 공화정 시대의 고위직에서 사라진 뒤에 등장했다. 약 100년 뒤인 제1차 포에니 전쟁 때부터였는데, 이들은 같은 평민 지파들인 소푸스 가문, 루틸루스 가문, 투디타누스 가문 이후에 등장하여, 평민 지파 전체를 넘어 노빌레스의 상징적인 명문가로 위세를 떨쳤다. 이들은 공화정 시절인 기원전 3세기 ~기원전 2세기 중반 그라쿠스 형제를 끝으로 대정치가나 개선장군을 배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거보다 가세가 기울었다고 평가받음에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및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치세때는 고위 선출직 로마 시민 명부에 매년 이름이 올랐고,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때인 트라야누스 대제 시절까지 집정관과 법무관을 배출해, 오래된 로마 귀족의 상징적인 명문가로 추앙받았다.

형제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대 그라쿠스'로 불리는데, 대 그라쿠스는 그 조부인 기원전 238년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처음 집정관이 된 뒤부터 노빌레스의 전형으로 불린 평민 귀족의 간판 명문가를 대표한 정치가이자 개선장군이었다. 그는 생애 동안 2번 집정관을 지냈고, 2번의 개선식을 허가받아 개선장군으로 임페라토르를 두 번 찬사받았다. 따라서 역사가로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였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양손자였던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스승이었던,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이 인물을 두고 이렇게 극찬을 했다.
(대 그라쿠스는) 당연코 당대 가장 유능하고 정력적인 젊은이다.

이런 극찬처럼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 대 그라쿠스는 대단했다. 그렇지만 그라쿠스 형제의 출신 가문인,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가문은 대 그라쿠스의 조부 시절부터 이미 그 일가가 노빌레스로 불렸는데, 그 위상이 파트리키들보다 위대했다고 극찬을 들은 순간은 그라쿠스 형제의 할아버지와 종조부 때부터였다. 이중 그라쿠스 가문을 명망가 중의 명망가로 이름을 날리게 한 인물은 그라쿠스 형제의 종조부로, 대 그라쿠스의 숙부였던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숙부뻘 친척 어른으로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로 잘 알려진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롱구스였다. 두 사람 중 유명세를 떨치며, 존경을 크게 받은 인물은 대 그라쿠스의 숙부였는데,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칸나이 전투의 대패 이후 독재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의 부독재관을 맡았고, 기원전 215년 집정관에 선출되어 전쟁의 가장 어려운 순간, 노예로 편성된 군단을 이끌고 맹활약하다가 전사했다.

이처럼 그라쿠스 형제의 일가는 대단했다. 어깨를 나란히 한 노빌레스 가문들로는 사비니인으로 처음 로마 왕위에 오른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차남 칼푸스를 시조로 둔 칼푸르니우스 씨족의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4], 리비우스 씨족의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5][6],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로 유명한 리키니우스 씨족[7] 등이 있었는데, 키케로는 이들을 명문 중의 명문 노빌레스 출신이라고 표현하면서 당시 로마인 사이에서 돌던 말을 적었다.
그들은 요람에서부터 집정관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그라쿠스 형제는 아버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8]와 어머니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 아프리카나[9]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들 형제 위로는 누이인 셈프로니아가 있었는데, 그녀는 제3차 포에니 전쟁누만티아 전쟁의 명장이었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결혼했다.

아버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77년과 163년 집정관을 맡았던 위대한 정치인이었고, 어머니 코르넬리아는 한니발 바르카자마 전투에서 이긴 로마 공화국의 위대한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둘째 딸로, 종종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 아프리카나'로도 통칭된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매우 상냥하고 절제적이었으며, 전형적인 이탈리아 어머니답게 주관이 확실했고, 파트리키 집안의 딸답게 입양으로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에 들어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아끼면서도 견제하는 성향도 있었다.

그래서 코르넬리아는 친정에 입양된 법적 조카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딸 셈프로니아의 결혼을 주선해 성사시켰고, 아이밀리아누스에게 호의적이면서도, 매우 정략적으로 아이밀리아누스를 대했다. 코르넬리아는 아이밀리아누스가 청결을 강조하여 매일 면도하는 등의 모습에 대해, 그런 습관을 훌륭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습관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은 명망을 위해 허세를 부린다고도 여겼다. 또 입양된 조카이자 사위가 친정인 스키피오 가문에서 가장의 명예를 얻는 자격에도 복잡한 재산 분할 등이 엮여 있어,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 아프리카나는 로마인들이 아직까지도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가 아니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장모로 부른다는 것을 두 아들에게 상기시키면서 아들들의 야망을 부추겼다. 하지만 이런 코르넬리아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10살의 나이에 아버지 대 그라쿠스를 여읜 처남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게 카르타고 포위 작전에 참전할 기회를 가장 먼저 제공했다. 그러나 가문의 명망과 재산은 한 가문에 두어야 했다. 그래서 정략혼과 입양으로 맺어진 복잡한 관계로 인해 그라쿠스 형제가 성인이 되기 이전부터 어머니 코르넬리아 및 매형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의 관계는 미묘했고, 이는 이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재무관이 되기 이전부터 묘한 긴장감을 불어 넣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형제의 아버지인 대 그라쿠스와 외할아버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서로 정적 이었지만 스키피오는 대 그라쿠스의 능력을 인정했고, 자신에게 부패 혐의가 씌워져 처벌받게 되는 것을 대 그라쿠스가 호민관의 거부권을 사용해 막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둘째 딸 코르넬리아를 보냈다고 한다.[10]

나이차가 상당히 많이 나는 결혼이었지만 부부의 금슬은 매우 좋아서 자녀가 무려 12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형제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는데, 일반적인 로마 여성들과 달리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 아프리카나는 재혼하지 않고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그리스 출신의 교육자를 붙여주었고, 형제는 이 가정교사들로부터 웅변술과 정치학을 배웠다. 이때 이들은 그리스의 민주주의 체계 및 공화정의 모든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상을 배웠다. 이는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또한 이들은 당시 젊은이들에겐 필수적이었던 군사 교육도 이수했는데 승마술과 무술 등을 배웠다. 형제는 곧 젊은이들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재능을 보이게 되었다. 두 형제 중 맏이였던 티베리우스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 종군했던 젊은 장교들 중 가장 뛰어난 통솔력을 보여주었는데, 혼잡하고 치열한 카르타고 성벽을 가장 먼저 돌파한 용맹스러운 지휘관이기도 했다. 또한 히스파니아에서 발발한 누만티아 전쟁에서는 뛰어난 외교술로 20,000명에 이르는 병력의 목숨을 구해내는 등 맹활약을 했다. 그라쿠스 형제의 뛰어난 재능과 배경은 곧 원로원 귀족층의 눈에 띄었고, 이후 이들 형제가 성장하면서 귀족들과의 교우는 점점 더 두터워지게 되었다.

3.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라틴어: Tiberius Sempronius Gracchus
생몰년도 기원전 163년 ~ 기원전 133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향년 29세)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
부모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아버지)
코르넬리아[11](어머니)
가족 클라우디아(아내)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장남)[12]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아들)[13]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롱구스(아들)[14]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동생)
셈프로니아(누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매형)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외조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사촌)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장인)[15]
참전 제3차 포에니 전쟁
누만티아 전쟁
경력 로마 공화국 재무관(기원전 137년)
로마 공화정 호민관(기원전 133년)


흔히 전체 이름 대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로 불리는 형 그라쿠스는 형제 중 맏이로, 그라쿠스 형제 중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비교해 포에니 전쟁 전후 로마 공화국의 자영농이 몰락하고 각종 사회 문제가 발생한 가운데에서 농지개혁법을 추진하며, 온건하게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을 개혁하려고 노력한 호민관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매우 선동적이고 과격한 형태의 극단적인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동생 가이우스와 비교되는 인물로, 당대부터 지금까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은 로마 공화정의 쇠퇴와 궁극적인 붕괴의 전통적인 시작을 의미한다고 평가받는 첫 번째 공화정 시대의 사람이다. 따라서 논란의 인물 중 위험인물로까지 후대의 로마인들에게 평가받아 호불호가 분명한 동생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달리, 그 평가가 당대부터 분명히 갈림에도 고결하고 로마 귀족 정신을 내보인 호민관이라는 평이 따라 다녔다.

그는 동생과 달리 호불호가 분명해, 논란이 많고 위험하며 과격한 호민관의 시초이자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파란만장하고 극단적인 호민관으로 불림과 동시에 평가가 갈렸던 사람으로, 그를 불호한 공화정 후기의 여러 권력가들에게도 큰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 제2대 황제였던 티베리우스 등에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그들이 주목할 모습을 보여주어 그 평가가 특별했다. 이를 증명하듯이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최측근으로, 노빌레스 출신 원로원 의원이었던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정통성 등이 담겼다는 평가도 듣는 저서《로마 역사》에 이를 적었다. 그는 자신과 그가 모신 두 황제 등의 생각을 정리하여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티베리우스는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았다. 그는 고귀한 성품과 최고의 교육이라는 자양분 위에 뛰어난 지성, 정직한 마음 등 인간으로 지닐 수 있는 최선의 미덕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로마 역사》, 2.2.1

출신, 혈통, 가문, 경력 모두 당대부터 후세대의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함께, 로마 공화정 시기 로마인들이 말한 "요람에서부터 집정관으로 만들어진 사람"[16]의 전형으로 평가된 인물로, 흔히 평민귀족, 신귀족으로 번역되는 노빌레스 출신 로마인이었다.

티베리우스의 군사 경력은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사촌형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 의해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에 임명되었다.[17] 기원전 137년 그는 재무관에 선출되었으며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이끄는 히스파니아(스페인)의 누만티아에 대한 원정군에 복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만키누스의 실수로 로마군은 참패하고 현지인 군대에게 포위되고 말았다.(누만티아 전쟁 항목 참조.) 만키누스는 화평을 구걸했으나 이미 로마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었던 누만티아군은 이를 거부했고, 그때 만키누스의 재무관이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협상 대표로 나섰다. 그의 아버지였던 대 그라쿠스가 히스파니아 총독 시절 공정한 통치를 행했던 것을 기억한 누만티아군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의 협상에는 동의하여, 로마군이 모든 물자를 누만티아군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 원로원의 입장에서는 이는 매우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행위였기에, 원로원에서는 이 협정을 무효로 선언하고 패장 만키누스는 결박하여 누만티아군에게 넘겼으나 누만티아군이 이를 함정으로 의심하고 만키누스를 석방하여 그는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매형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군사적 승리 속에서도, 자신이 처남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게 쏟아진 세간의 비난, 즉 군인으로서 명예가 짓밟히는 것을 줄여주면서 비난의 짐을 덜어줬다고 생각했고, 이를 자부했다. 하지만 당대와 후대의 평가 그대로 이것은 스키피오의 착각이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호의가 진심이었더라도 개인과 가문의 이익에 따라 돌아간 원로원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군인이 아닌 로마 귀족이자 엘리트로 개인적인 명예를 중시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아버지 대 그라쿠스의 이름을 걸고 맺은 누만티아와의 협정이 원로원의 손에서 사실상 무효화된 것, 그리고 매형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협정의 무효화에 앞장서고 누만티아 정벌군을 이끌며 출정한 것에 대해, 티베리우스는 심한 배신감과 모욕감을 느꼈고, 모욕 속에서 그가 아버지와 함께 명예를 걸고 보장한 평화가 깨진 까닭에 정치적인 입지에서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이는 그가 느낄 때 의도가 명백하지만 교묘하게 자신의 신망을 망쳐놓아 정치적 입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스키피오 일가는 서로 적대하게 되었다.

누만티아 사건은 양쪽 입장에서 이 사건 전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결혼 등으로 생긴 것들까지 엮이면서, 양쪽 모두에게 오해를 낳게 했다.

히스파니아에서의 일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그라쿠스 가문 사이의 앙금을 깊게 했다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혼인 및 티베리우스가 처가쪽 식구들과 돈독한 관계를 쌓은 결혼생활은 아이밀리아누스와 그라쿠스 가문 사이가 회복되지 못할 이유로 서로에게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재무관에 선출되기 전, 어머니 코르넬리아의 주선으로, 최고의 사윗감으로 생각해 청혼한 여러 파트리키 출신 규수들 중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 클라우디아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결혼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할아버지 및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모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격렬한 정적이었기 때문에, 이는 히스파니아에서의 일과 엮여 오해를 계속 낳았다. 따라서 아이밀리아누스의 의도가 선량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그 가족 모두에게는 정치적 내상을 입히는 정적의 술수로 인식되었다. 그렇지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입장에서 볼 경우, 그는 매형으로서 처남의 실수가 공식 견책으로 이어지지 않게 한 터라, 자부할 근거가 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꼼짝없이 죽을 처지에 놓여 있던 수많은 병사들을 구해 공로가 크다고 해도, 나이 많고 완고한 원로원 인사들이 독선적으로 대하는 현실에서, 공식 견책으로 이어지지 않음은 분명 최악까지는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 사건에서 맡은 역할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공식 견책만 모면했을 뿐 정치적 외상에 있어 회복이 필요했다. 그는 여전히 많은 친구를 뒀고, '명예로운 경력'을 통해 선친 대 그라쿠스의 뒤를 밞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재무관 때 공식 견책만 피했을 뿐, 본인의 할아버지, 아버지 뻘의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맹렬한 비난을 피해가지 못한 과거는 약점으로 남게 되었다. 어쨌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원로원의 대응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승전에 이어 로마 귀환 당시 자신을 맞이한 로마인들의 반응에서 냉담함을 느꼈다. 아군을 적지에서 구한 업적이 군사적 승리보다 뛰어난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함에 대해,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불분명하다. 다만, 티베리우스는 로마군 경력에서 분명히 오판하여 흠이 생긴 결과가 돌아옴을 이때의 반응에서 느꼈다.

이런 가운데, 당시 로마는 무수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징집된 군단병들은 자주 그들의 농토를 떠나 종군해야 했다. 이 때문에 자영농인 군단병들은 농사를 망쳐[18] 자주 파산했으며 이러한 땅은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로마의 부유층이 사들인 뒤 대규모의 농지를 경영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획득한 넓은 영토는 매각되거나 임대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주로 자금 동원 능력이 뛰어난 부유층의 소유가 되곤 했다. 부유농들은 이러한 넓은 농지를 수많은 노예를 동원해 경영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티베리우스가 누만티아를 떠나 로마로 귀국하며 많은 농장을 지나갔는데, 이때 그는 농촌마을이 텅텅 빈 것을 목격했고 또한 넓은 농경지에 많은 야만인들이 노예로써 농작을 짓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로써 이에 대한 해결방법을 모색했고 이는 그와 그의 동생을 훗날 파멸로 밀어넣게 된 불길한 생각이 된 것이었다.

군단에서 복귀한 로마 시민들 중 많은 이들은 그들의 농경지가 황폐해진 것을 보고 이를 팔아치운 뒤 로마로 상경해 수많은 무산자 계급들과 함께 일거리를 찾아 로마 시내를 배회했다. 이 때문에 로마 군단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가진 재산을 가진 자들의 수는 줄어들게 되었으며, 이는 로마 군단의 약화를 초래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한때 군단병이었던 로마 시민들은 그들의 영토를 잃고 나선 더이상 군대의 일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또한 자녀를 키우는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탈리아 전체에서 점점 일손이 부족해지기 시작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부유층이 제공하는 노예들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로써 자유민들은 실업자가 되었고, 이들의 자리를 노예가 대체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기원전 133년, 로마는 누만티아를 점령했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는 입후보 순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대 그라쿠스의 아들로 조부, 종조부, 선친 모두 집정관을 지냈으며,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였던 까닭에 큰 홍보없이도 그때까지 출마한 역대 호민관들과 비교가 되면서 단연 돋보였다. 지지자들도 그 명성이 대단했다. 기원전 144년 집정관을 지냈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비롯한 전직 집정관들이 줄줄이 티베리우스를 지지했다. 전직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유력한 명문가인 무키우스 일족 출신으로 저명한 법학자이자 변호사로 유명했던 스카이볼라 형제, 완고했으나 유연하고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로 존경받고 있었던 대 카토 일가의 일원인 C.포르키우스 카토 등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가진 배경, 재능, 인품 등을 이유로 지지했다. 이중에는 장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도 있었다. 그는 감찰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아들로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지냈고, 클라우디우스 씨족 사람답게 고집이 강하고 고지식한 단점이 있으면서 법질서를 중요시하고 거짓말을 무척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외가인 스키피오 가문과 가장 대척점에 선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을 이끌었고, 로마 귀족사회에서 딸바보로도 유명했으며, 반(反) 스키피오 전선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스키피오 가문이 이끈 원로원에 의해, 알프스 산맥에서 벌어진 갈리아인과의 전투에서 개선식 거행 수준의 승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식을 허락받지 못한 악연이 있었다. 이에 풀케르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처제로 당시 베스타 여사제였던 딸과 함께 전차에 타서 로마인들의 축하를 받는 방법으로, 스키피오 가문 전체와 원로원이 사적인 감정으로 벌인 행동을 비꼰 전적이 있었다.[19]

이렇게 지지자들이 막강한 가운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도운 또다른 지지자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20]였다. 노빌레스 명문가들 중 리키니우스 씨족은 최초의 호민관을 배출한 이후부터 당시 로마와 이탈리아 평민들에게는 대대로 평민층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앞장선 호민관 명문가로 평판이 대단했다. 이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유명무실해진 옛 '리키니우스 법'을 되살려야 함을 인식 중이었는데, 그들이 여러 후보자들 중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지지하기로 한 것은 그가 공유지 임차 상한선을 500에이커로 규정한 옛 법을 되살리면서 보완할 결심을 굳혔던 것도 컸다.

이렇게 되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존의 카토, 갈바 등 전•현직 집정관 및 명문가 후예들, 스카이볼라 형제, 장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등의 후원에 더해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리키니우스 씨족의 지원까지 받아, 압도적으로 호민관에 선출되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선출된 직후, 자신을 후원한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리키니우스 씨족의 요청 등을 접수했고 자신의 조부, 종조부, 선친 이래로 여러 집정관과 호민관들이 입안했지만 번번히 여러 사정으로 무산된 농지 개혁 등을 정리해 실현코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선출되자마자 그가 그동안 쭉 생각해온 군단병이 실업자로 전락하는 문제를 막기 위한 법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티베리우스는 군인으로 겪었던 경험, 재무관을 지내며 알게 된 점 등을 솔직히 털어놓으며, 군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이탈리아를 떠도는 짐승도 모두 몸을 숨길 토굴을 가지고 있지만,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용사들은 공기태양 빛 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집도 없고 가정도 없이 처자식을 데리고 떠돌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에게 그들 조상의 무덤신전을 지키라고 외치는 장군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용사들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신전도 없고, 많은 로마인이 조상의 무덤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남들을 잘 살고 사치하도록 만들어 주려고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용사들이 마치 세상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들지만, 군인들은 자기 이름으로 된 흙 한 덩어리도 없습니다.[21]

3.1. 농지법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탈리아 농민과 평민들의 완전한 몰락을 막고, 기존의 리키니우스 법이 유명무실해진 이후 이 법을 되살리고 현실에 맞게 재수정할 필요성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부터 로마 사회의 꾸준한 화두였다.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 반도를 전쟁터로 삼아 로마군과 수많은 격전을 벌인 이후, 로마 공화국의 자작농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장기간 군대에 차출되었고, 텅빈 그들의 토지는 사기, 강압, 매매, 몰수 등을 이유로 새롭게 떠오른 에퀴테스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에퀴테스를 경멸하면서도 이를 제대로 시정하지 못했으며, 새롭게 정복된 옛 카르타고 본토인 북아프리카 해안 지방(푸닉 지방)과 히스파니아 일대에서의 라티푼디움의 출현은 자작농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원로원 역시 공유지에 손을 뻗치기 시작해, 일부는 여러 세대에 걸쳐 마치 사유지인양 리키니우스 법을 역이용해, 편법적인 방법으로 공유지를 개발한 후 대부금이나 지참금 형태로 거래했다.[22] 그리고 이는 로마군의 주력으로, 복무를 겸한 자작농이 붕괴되는 가운데 로마 공화국이 군대를 편성하는데 있어 큰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고, 전•현직 집정관들도 이 부분에 대해 논쟁을 시작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징집 병력의 부족, 에퀴테스들의 발호 아래에서 위기 의식이 확실한 원로원의 상황, 로마 시민들의 가난한 생활상 등은 기원전 2세기 당시 로마 원로원에서 모두 고민 중인 부분이었다. 원로원은 그들의 위엄과 국가 로마를 통치하는 근간을 모스 마이오룸과 기존의 로마법으로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에서 원로원은 모스 마이오룸의 관례이며 전통인 선례의 명확함을 인정하는 중이었다. 기원전 232년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농지법을 제정했다. 이때 그는 원로원과 상의없이 이를 입안했고, 통과시켰다. 심지어 기원전 145년 또는 기원전 140년에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본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가이우스 라일리우스가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 법의 수정 형태인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을 다시 도입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하려고 했을 때, 라일리우스의 입안을 일정 부분의 필요성에서는 용인했다. 비록 이 제출안은 라일리우스 본인이 자진 철회라는 이름으로 물러서면서 끝이 났지만, 이 부분 역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이전의 과거 법안을 되살리는 명분이 되었다. 즉,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입법안을 민회를 통해 제출한 것은 없었던 것을 만들어 원로원에게 도전한 행동이 아니었다. 다만, 여러 번의 자진 철회 등에서 증명된 것처럼 원로원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라는 것은 각오해야 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매우 신중하고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꼼꼼했기 때문에, 확실한 계산이 선 다음에 움직였다.

기원전 367년 전례 등에 따른 모스 마이오룸상의 선례 존중 및 원로원과 논의없이 호민관 책무에 따라 가능한 규정에 따라,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동료들과 함께 평민회(concilium plebis)에 농지법을 제출했다. 이 법안을 작성한 사람은 원로원의 '프린켑스'(princeps)였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법률가였던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같은 해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였다. 즉 티베리우스는 이 법안의 작성자라기보다는, 열렬한 옹호자이자 대변자로 나선 것이었다. 이 농지법은 전쟁으로 획득한 국유 토지[23]에 대한 관리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법은 개인당 320에이커의 공유지 보유한도를 초과하는 땅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를 초과하여 소유했을 경우 그 나머지 부분은 국가가 몰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이유는 당시 로마에서 대토지 소유주가 자신의 노예와 자신들의 보호민(클리엔테스)인 로마 시민들의 명의로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편법을 농지법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이 거의 대농장의 소유주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달래기 위해 그라쿠스는 농지법에서 그들이 불법으로 소유하는 토지를 정부로부터 임대받는 형태로 소유하는 것을 인정했다. 또한 이렇게 형식적으로 몰수한 것에 대해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는 것을 허용했다. 이는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런 상황속에서 옛 리키니우스 법에 따라 불법 또는 편법으로 공유지를 사고 팔고, 자작농 가정의 토지를 사들인 자들의 부동산을 재검토해, 무산자와 소작농 가정에게 배분하여 근본적으로 로마군의 질적 악화를 막겠다는 내용의 법안과 목적성을 제출했다. 원로원이 꼬투리를 잡으려고 해도, 기원전 3세기까지 올라가면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전례 등이 있어, 민회에서 적법한 절차만 거친다면 불법이라는 주장을 펼치기 어려웠다. 모스 마이오룸의 선례와 가치라는 확실한 정당성이 있어, 이 부분부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비난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더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입법안에는 저명한 법학자들이었던 스카이볼라 형제의 도움 속에서 체계적이고 꼼꼼하게 손질된 법안이 적혀 있어, 가구당 약 30유게라(약 36,000평)씩 분배되는 땅에는 매매와 권리 양도가 절대 불가능하도록 하는 조항을 첨부해 넣었다. 이는 과거 리키니우스 법을 모스 마이오룸에 의거해, 로마 시민권의 기본과 함께 로마 자작농의 생활을 안정시킬 목적을 명확하게 규정했다.

기원전 133년 법안에는 정부 관리하에 있는 국유지의 경우, 무산자들에게 9에이커에서 18에이커로 추정되는 각기 다른 크기로 땅을 나누어 주게 한 뒤, 지대와 병역 복무의 의무를 지게 하는 하는 제안을 내놓으며, 분배된 토지의 판매와 양도를 금지하도록 했다. 이는 로마 사회 내 무산자의 급증과 병역 복무 가능 인원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해결책이었다.[24]

티베리우스의 제안에 대해 원로원은 강하게 반대했다. 사실 이들의 반발은 티베리우스의 법안 제출이 독단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서 그의 제안을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으므로[25] 그는 당시 원로원에 우선 제출하여 의논을 거친 뒤 민회에 회부하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직접 이 법안을 민회에 가져간 것이었다. 비록 이것이 로마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원로원을 무시하는 티베리우스의 방식에 분개했고, 이 때문에 원로원과 티베리우스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티베리우스의 법안을 저지하기로 결심한 원로원은 동료 호민관인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설득하여 티베리우스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옥타비우스의 거부권에 의해 농지법의 통과가 여러 차례 저지되자 분노한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가 호민관의 본분을 저버리고 평민의 권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들어 그를 해임시킬려고 했다. 티베리우스는 그의 해임에 대한 투표를 하려고 했는데 옥타비우스는 이러한 투표가 전례에 없으며 또한 이런 것이 로마법에 규정되어있지 않음을 들으면서 호민관직을 계속 유지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그가 평민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저지했고 옥타비우스의 해임안에 대한 투표를 강행했는데, 이는 호민관에 대한 신성불가침 권한을 위배하는 것이었으므로 티베리우스의 지지자들은 이에 대해 우려했다. 마침내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호민관으로써 갖고 있는 거부권을 활용해 로마 시내의 모든 축제와 시장이 열리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로써 로마 시내의 모든 상업과 행사가 중단되었다. 특히 티베리우스는 이 농지법이 통과되어야만 자신의 거부권을 철회하겠다고 버텼다. 이러는 동안 티베리우스의 신변을 우려한 민중들은 그가 이동할 때마다 그를 에워싸며 보호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 해임안을 관철시키는데 성공했다.[26]

옥타비우스를 해임하자 티베리우스는 거리낌없이 농지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반발하여 농지법에 아주 적은 양의 예산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훼방을 놓았다. 그런데 그해 마침 로마 공화국의 속국인 페르가몬 왕국의 국왕 아탈로스 3세가 로마에 자신의 왕국을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로써 로마는 그의 왕국과 국고를 손에 넣게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이 새로운 자본을 농지법의 예산으로 쓰고자 했다. 그는 이를 위해 평민 집회에서 이 돈을 농지법의 자원으로 쓰는 법안을 제출하고 이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는 원로원에게 있어 자신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라고 비추어졌는데, 로마에서 전통적으로 예산 집행은 원로원의 고유한 권한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었다.

이때 퀸투스 폼페이우스[27]가 원로원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는 아탈로스 3세가 죽으면서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의 국왕 인장과 가운을 주었고, 이는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국왕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라며 티베리우스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마침 아탈로스 3세는 티베리우스의 아버지였던 대 그라쿠스의 도움을 받아 그의 클리엔테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에 솔깃한 원로원 의원들이 많았다.

특히 당시 티베리우스의 호민관 임기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티베리우스가 옥타비우스를 해임시킨 것은 신체 불가침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었으므로 원로원은 그의 임기가 끝나면 재판에 회부하고자 했다. 이를 안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에 재출마하려고 했다. 그는 선거의 공약으로 군복무 기한을 줄이고, 배심원을 기사(에퀴테스) 계급으로 구성시킬 것을 내세웠다.[28] 그런데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호민관의 연임은 위법 여부가 불분명했지만[29] 관례에는 맞지 않았는데[30] 그래서 티베리우스의 행동은 고대 그리스의 참주가 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당시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였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는 티베리우스의 사촌임에도 불구하고[31] 그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티베리우스의 아버지 대 그라쿠스의 몽니 때문에 집정관 당선이 취소되었던 원한까지 겹쳐 티베리우스를 맹비난하고, 그가 왕이 되려하는 것을 가만 놔둘 수 있느냐고 말하며 원로원 의원들을 선동했다. 그는 당시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32]에게 그라쿠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스키피오 나시카는 자신의 철제 의자 다리를 뜯어 들고 곤봉을 만든 뒤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티베리우스를 항해 돌진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티베리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혼란에 빠졌고, 패싸움 도중에 티베리우스는 스피키오 나시카와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때 그의 지지자들도 같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현직 호민관이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포로 로마노 한복판에서 살해당한 참극은 로마 시민들을 경악시켰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었지만, 본래 호민관은 고대로부터 이러한 상황을 염려하여 법률로서 신체불가침권을 인정받고 있었는데, 사회 지도층이라는 원로원 의원들이 이를 대놓고 무시하며 살해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원로원은 스키피오 나시카를 파면하고 추방형에 처한 뒤[33] 농지법의 시행을 약속하고, 실제로 충실하게 수행했다. 왜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을 원로원이 수행했는지는 후술.

4. 가이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라틴어: Gaius Sempronius Gracchus
생몰년도 기원전 154년 ~ 기원전 121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향년 33세)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
부모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아버지)
코르넬리아[34](어머니)
가족 리키니아(아내)
셈프로니아(딸)[35]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아들)[36]
풀비아(외손녀)[37]
셈프로니아(누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매형)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외조부)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사촌)
참전 누만티아 전쟁[38]
사르다니아 전쟁[39]
경력 로마 공화국 트리부누스 밀리툼
로마 공화정 재무관(기원전 126년)
로마 공화정 호민관(2회)

4.1. 호민관 이전의 삶과 행적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으로 그보다 9살 연하였다.[40] 티베리우스가 사촌인 스키피오 나시카에게 살해되었을 때 가이우스는 21살이었는데 형의 참담한 죽음은 그에게 아주 큰 슬픔을 안겨주었으며, 이때의 슬픔은 가이우스가 호민관의 길을 걷는 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이유 때문에,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그의 형에 비해 더 급진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을 거라고 서술했다.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비슷하게, 가이우스 그라쿠스 역시 로마 공화정의 엘리트 출신 파트리키노빌레스 청년처럼 군복무를 시작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기원전 133년, 군복무 최소 연령인 16세가 되자마자 매형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휘하에서 로마군에 복무했으며, 이 시기에 트리부누스 밀리툼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가문의 전통 그대로 빼어난 군인이자 고귀한 성품의 로마 시민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책무를 맡기위해 '명예로운 경력'을 위한 각종 자격을 갖추는데 집중했다. 그는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지지자였던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딸 리키니아와 결혼했고,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개혁을 지지했으며, 로마에 머물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유민이 로마 공화국의 도시에 정착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렇게 한 사람을 퇴거시키는 호민관 관련 법을 제안하는 것을 반대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주장한 농지법의 작성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티베리우스가 농지 분배 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그의 장인과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여기에 참여시킨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농지법에 대한 방해 공작으로 고생했을 때나 살해당했을 때 가이우스는 이것을 아주 직접적으로 체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 그는 이미 성인이었던 21세였으므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했는지[41]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이며,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상술한 그대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 이후에도 본인 성격과 초기 경력 그대로 '명예로운 경력'을 밟아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연설할 기회가 생겼을 때, 흥분을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언사를 작심하며 내뱉었고, 이것이 그의 본심이었기 때문에 원로원 전체를 격앙시켰다.
"로마에서 가장 훌륭한 시민인 티베리우스를 죽인 악당들이여! 두고 보시오. 내가 반드시 그대로 갚아주겠소!"

다만 그 이후로는 공개 연설 중에 원로원을 자극하는 이렇다할 실언을 한 기록은 없다.

가이우스는 기원전 126년 선거에 입후보해, 28세의 나이로 콰이스토르[42]에 선출되었다. 이때 그는 로마가 아닌 사르데냐 섬에 배치되었다. 군인 시절의 경력으로 인정받고, 군공을 세우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배치된 건데, 이곳에서 그는 재무관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맡았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누만티아 전쟁과 사르데냐 전쟁에서 로마 군대에게 민간의 보급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전형적으로 모범적이었으며, 현실적인 개혁을 진지하게 모색했던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는 달리, 재무관 시절 당시 부임지인 사르데냐 섬을 떠나 일찍 로마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직위 책무를 사실상 그만두는 것처럼 보인 태도로 인해 감찰관의 심문을 받게 되는 경력을 남기고 말았다. 이에 대해 플루타르코스는 원로원이 그를 로마에서 멀리 떨어뜨려놓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어쨌든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때의 일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오래 복무했고 1년 후에 돌아올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했다고 전해지며, 이후 재무관 경력과 이전의 트리부누스 밀리툼 경력 및 출신 가문의 명망을 통해 기원전 123년 호민관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43]

이 과정은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원로원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과정에서 분수령과 같은 사건이 되었다. 왜냐하면 양측 모두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각자 보다 과격하게 행동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사회적으로 떠오르는 에퀴테스들의 열망과 함께, 라틴 동맹의 이름 아래 한니발에 맞서 함께 싸운 이탈리아인과 로마인 사이의 관계 조정 등의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중 이탈리아의 리리스 계곡에 거주한 프레겔라이인들은 로마의 가장 충실한 친구이자 동맹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만한 원로원과 로마 공무원의 행태가 폭정에 가깝다며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봉기를 일으켰는데, 법무관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는 이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면서 로마 원로원에게 저항한 같은 동맹시에 대해 보복했다. 이때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1년에 행한 연설에서 상술한 형에 대한 복수 의지를 밝히고, '명예로운 경력'의 다음을 위한 준비를 모색하는 중이었다.

그는 형 티베리우스의 개혁이 비극적으로 실패한 이유가 탄탄한 지지층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을 무력으로 괴롭히며 골치아프게 하지 않고, 예의바르며 높은 도덕적인 기준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가이우스는 원로원과 공생관계이면서도,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던 에퀴테스 계급과 이탈리아의 여러 강력한 라틴 동맹 가문들에게 눈을 돌렸다. 이를 위해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불만을 품은 그들이 오만한 로마 원로원과 로마 공무원의 폭정 속에서 불만을 쌓아가고 있다고 분석해, 그들의 지지를 얻고 대표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러자 원로원은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압박하기 위해, 그가 출전 중이었던 사르데냐 및 시칠리아 전선의 재무관과 장교들의 복무 기한을 연장시키고 그들이 계속 주둔해야 함을 법안 형태로 가결시켰다. 여기에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반발했다. 총사령관이 남으면 휘하의 재무관을 필두로 한 장교단 모두 남아야 된다고 원로원이 가결시킨 것에 대해 그는 정면으로 들이박았다. 가이우스는 재무관 임기가 끝났고, 자신은 상위법에 따라 귀환하겠다며 로마로 돌아왔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감찰관들을 앞세워 가이우스를 탄핵재판에 회부했다. 이에 그는 감찰관들과 배심원들 앞에서 본인은 로마법과 모스 마이오룸에 따라 의무 복무기간 12년을 넘게 군인으로 성실하게 있었으며, 의무기간은 10년이고, 사르데냐 섬에 있다가 시칠리아 섬까지 가서 3년을 더하여, 의무 기간을 최소치로 잡아도 1년을 초과해 로마의 모스 마이오룸에서 벗어났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따라서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 재판 이후 그 이름이 더욱 알려지게 되었고, 원로원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던 지지자들의 대표가 되었다.

그래서 그라쿠스 형제의 초기 행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본래부터 자기 주장이 강했을 것이며, 그가 형의 불행한 죽음을 목격했을 때, 앞으로의 연설 내용처럼 은둔자로 조용히 살고 싶어했다는 이야기는 그가 상술한 연설 내용인 형을 살해한 이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위한 명분이라고 평가한다. 즉, 형의 죽음 이후부터 복수심 때문에 급진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이라는 것을 확정적으로 결론내리지 않으며, 그가 재무관 이후의 안찰관 선거보다 호민관 선거에 집중한 것 역시 연설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분석한다.

4.2. 첫 번째 호민관 시기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후 기원전 124년 호민관에 출마했다. 노빌레스 중 노빌레스로 평민귀족의 상징이었던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가문 출신이었고, 지지층이 출마 이전부터 확실해 그는 무난히 당선되었다. 그리고 가이우스는 호민관이 되자마자, 당대의 로마인들이 봤을 때 공격적이고 과감한 행보를 선보였다. 그는 감찰관 카토와 위대한 연설가 키케로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로마 공화정의 연설가들 중 선동적이고 대중에게 열정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연설 스타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동시에 그는 원로원에서 눈살을 찌뿌린 호민관들 중 형 이상으로 논란을 낳아 화제를 모았다.

가이우스는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티베리우스는 동생과 달리 냉정하고 이성적이었으며, 규율을 준수하는 로마 귀족의 전형이었다. 반면에 가이우스는 본인의 생각이 확고한 나머지 지지 않으려는 승부욕이 강했고, 이성적이며 규율을 준수했음에도 불처럼 열정적이었다. 형제는 문제 해결 방법에서도 차이가 분명했다. 티베리우스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꼼꼼했으나, 충동적이고 완고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가이우스는 평소 성격이 형과 달랐음에도 문제 해결의 원인을 스스로 결정내리면, 놀라울 만큼 차분하고 날카롭게 파고드는 전략가였다. 또한 폭발적인 연설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다가 굴복시키는 재주도 탁월했다. 형제는 정적이나 대중이 자신을 폄훼하거나 가족을 욕할 때도 그 대응 방식이 달랐다. 형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으로 업무를 할 때를 제외하면 늘 겸손하고 이성적이었으며, 냉정한 사람답게 세련된 말로 대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반면 가이우스는 늘 세련된 말만 사용한 형과 달리, 상대가 폄훼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그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방식으로 세게 되갚아줬다. 한번은 누군가가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를 폄훼하자, 다음과 같이 발언하면서 쏘아 붙이고, 그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내 어머니에게 어떻게 감히 너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냐?! 내 어머니께서는 남자인 너보다 유감스럽게도 더 오랜 세월 사내를 멀리했다!"

그래서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재무관 시절부터 주변 친척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렸는데, 그는 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가이우스는 자신의 열정적인 성격이 형과 달리 한번 끓어오르면 멈출 수 없다는 한계를 명확하게 알아 이 점에 대해 신경쓰며 행동했다. 이런 행동은 훗날 그를 좋게 여기지 않은 원로원 의원들조차 인상적으로 평가한 부분이었다. 일례로 가이우스는 가수나 광대 등을 고용해 사치스러운 삶을 보내는 귀족이 아님에도, 자신의 열정적이고 격정적으로 변하는 성격의 단점을 통제하기 위해서, 피리를 잘 부는 노예를 고용하여 옆에 두고, 평소보다 말을 빠르게 하거나 격정에 휩싸일 때마다 피리로 경고음을 불도록 했다. 이 외에 가이우스는 재치가 뛰어났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연회에서도 진지하고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뛰어나면서도, 풍류를 즐기고 노래를 부르는 실력이 탁월했다.

이런 이유로 훗날의 키케로는 친 그라쿠스파도 아니었고,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위험인물의 전형으로 봐서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가진 웅변 실력과 폭발적인 연설가로의 카리스마는 높게 평가해서, 가이우스의 죽음을 '라틴 문학의 막대한 손실'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성격과 스타일 차이 그대로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이 된 이후, 여러 번의 연설을 통해 그 솜씨를 발휘했다. 그는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처럼 항상 세련된 표현이나 단어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매우 귀족적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세련된 표현 속에서 상황에 따라 모두를 흥분시켜버리는 표현에도 능했다. 쇼맨쉽도 뛰어나고 농담도 잘해서, 시민들은 그를 큰 소리로 부르며 호응했다. 그래서 가이우스가 호민관이 된 뒤, 열정적으로 업무를 밤늦게까지 하고 연설을 한 다음, 원로원을 압박하자 그 파괴력은 엄청났다.

아래의 구상들을 형이 살해되기 이전부터 가이우스가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올 정도로 광범위한 법안을 발표했다.

우선 그는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살해했거나 그를 폄훼한 모든 사람을 처벌하는 법안을 차례로 발의했다. 가이우스는 형의 일을 복수할 때, 원로원이 정신없이 방어하기 바쁘도록 숨 가쁘게 법안을 발의하고 밀어 붙였다. 먼저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법안에 호민관 거부권을 발동했던 옥타비우스를 겨냥해, 민회에서 해임된 모든 로마의 행정관은 다시 공직을 맡을 수 없도록 만든 법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 그나마 유화적이었던 외가 친척들과 어머니 코르넬리아가 개인 원한을 내세운 보복이라고 만류하여 철회되었다. 하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죽은 뒤 그의 동료들을 처형한 당시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공격하는 법안은 제출해서, 통과시켰다. 당시 로마법에서 사형선고를 할 수 있는 재판은 반드시 민회[44]만 가능했는데,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이를 어기고 특별위원회를 연 후 거기서 재판을 통해 그들을 처형시킨 바 있었다. 가이우스는 민회를 통하지 않은 사형 판결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 법안은 소급 적용이 되었던 고로 포필리우스는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티베리우스의 공약이었던 에퀴테스(기사) 계급으로 배심원단을 채우는 정책을 실현시켰다. 다만, 이 정책을 통과시켜 운용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혼란은 통과 당시부터 격론이 오고갔다. 또 가이우스 그라쿠스 사후에도 많은 이야기를 낳아,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와 같이 기사계급과 지방 세리들이 일으킨 속주민 강탈 문제와 비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청렴한 총독 및 행정관들이 누명을 쓰고 추방되는 일이 벌어지면서,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이 이 개혁을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이 법안들은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때 수많은 논란을 낳았으며, 많은 이들이 정치적인 사건에 엮여져 살해되는 원인이 되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도 적극적으로 실현하려고 했다.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에게 대단히 적대적이었던 것은 티베리우스가 추진했었던 125헥타르의 제한이 원로원의 토지 소유와 충돌했기 때문이었는데, 가이우스는 이를 피하려고 해외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이것을 로마 시민들에게 배분하려고 했다. 이 점은 원로원의 재산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고, 또한 원로원이 이미 평민들에게 농지법을 약속한 것도 있어서 가이우스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았다.

이에 그는 형보다 더 광범위한 개혁을 계획하고, 농지법 외에도 몇 가지 정책을 더 추진했다. 첫번째는 곡물법(lex Frumentaria)이었다. 이 법은 국가가 해외에서 곡물을 수입하여 로마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 매월 일정량을 1모디우스(modius) 당 6.5아스(ass)에[45] 공급하도록 규정했다. 흔히 곡물법은 '곡물을 싸게 공급하는 것' 정도로 알려져있지만 실상은 더 복잡했다. 이 가격 자체는 당대 로마의 평균적인 시장 가격보다 그리 낮지는 않았고, 오히려 시기에 따라서는 시장 가격보다 높은 경우도 많았다. 곡물법의 진정한 의의는 곡물가의 안정화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곡물법은 당시 로마의 곡물 공급이 수입에 거의 대부분 의존하고 있었던 현실상 도움이 되더라도, 재정 고갈 측면에서는 큰 반발을 낳았다. 훗날의 키케로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곡물법 추진으로 시민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막대한 뇌물이었다고 혹평했다.[46]

여기에는 한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곡물 배급소로 갔을 때, 노빌레스를 대표하는 명문가 중의 명문가 출신이자 원로원 의원이었고, 개혁에 반대했던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가 시민들 사이에서 곡물을 싸게 사고자 줄을 선 모습을 목격했다.[47]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를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는 피소 프루기를 향해 그가 곡물법에 그렇게 반대했으면서 왜 줄에 서 있냐고 비난했고, 피소는 이렇게 반박했다.
"나는 당신이 내 재산을 빼앗아 시민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발상을 좋아하지 않소. 하지만 그게 당신이 할 일이라면, 내 몫이라도 가져가겠소."

다만,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이렇게 곡물법을 통과시키면서, 일부 지역에게는 큰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가이우스는 곡물법 시행을 위해 로마가 속주로 거느리고 있었던 지역 주민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여 중앙 정부의 국고를 채웠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큰 수탈의 대상이 된 속주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아시아 속주를 비롯해, 셀레우코스 제국 등에게서 로마가 빼앗아 차지한 속주들이었다. 이때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푸블리카니'로 불린 에퀴테스들이 경영하는 민간세금징수 대행기업들에게 특혜를 주고, 세금 징수를 일임하며, 징수된 세금의 1할을 떼주는 법안을 통과시켜 적극 활용하도록 했다. 그래서 원로원의 우려와 달리 로마 공화국의 재정은 큰 타격없이 곡물법을 유지했고, 이는 공화정에서 원수정으로 넘어간 뒤에도 곡물법과 일명 '징수 도급'이라고 불린 속주 징세 제도가 연동 형태로 유지되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다음 법안은 본인을 적극 지지해주고, 많은 정치 후원 등을 해준 에퀴테스들을 위한 푸블리카니 조합 가입 보호법이었다. 그는 징수 도급 제도를 통과시키면서, 원로원의 일가 친척들이 모두 가입하지 못하게끔 법규를 추가로 제정했다. 이는 고리대금업과 징수 도급을 똑같이 바라보면서 경멸한, 양심있는 원로원 의원들이 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 반발한 이유가 되었다. 왜냐하면 푸블리카니, 고리대금업, 경매 모두 인간이 양심을 팔고 벌이는 탐욕스러운 도둑질이라고 경멸한 로마 귀족들 입장에서는 본인들이 가입할 생각이 없음에도,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예방 차원이라는 이유하에 명예를 손상시켰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노빌레스로, 원로원 구성원과 똑같이 명예와 위엄을 목숨보다 중요시여기는 로마 귀족 정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가 후대의 로마인들로부터 지나치게 과격하고, 지지세력의 결집을 위해서는 정적이 아닐 수 있는 사람들까지 정적으로 만드는 위인이라는 악평을 듣도록 만들었다.

가이우스의 두 번째 정책은 시민권이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라틴인들에게 확대 부여하고, 라틴인들의 권리를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 주민들에게 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시민권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곡식에 대한 법은 통과되었음에도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은 기각되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다른 이탈리아인과 공유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정책은 훗날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그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재차 공론화되었고, 동맹시 전쟁 발발 후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통과시켜 현실화되었다.

세 번째 정책으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원안에는 있었으나 어느새 삭제된 농지 분배 위원회의 사법권을 부활시켰으며, 네 번째 정책으로 대규모 도로 건설 사업의 실행으로 고용률을 올렸다. 다섯 번째로 가이우스는 군대법(lex Militaris)을 입안했는데, 정부가 병사들의 급료를 줄이지 않고 의복과 장비를 지급하며, 군복무 기간을 단축하고, 17살 미만 소년들의 징집을 금지하도록 했다. 이는 군대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병사들과 동맹국 주민들 및 유권자들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여섯 번째로 그는 로마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식민시 건설(lex rubria)을 추진했으며, 선정된 지역은 캄파니아카푸아, 풀리아타렌툼,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였다. 특히 카르타고 지역에 건설된 식민시인 유노니아는 가이우스의 각별한 관심을 받은 곳이었는데, 로마 및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에서 데려온 6,000명의 개척자들을 125에이커의 농지에 정착시키는 계획이었다. 가이우스는 유노니아 개척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직접 건너갈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하지만 이 모든 개혁보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정책 중 큰 논란을 낳고,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로마인에게 끝없는 갈등을 낳은 것은, 그가 원로원을 견제할 목적으로 만든 배심원단 전원을 에퀴테스 계급으로 교체한다는 파격적인 법안이었다. 여기에는 속주 총독의 모든 업무가 비리로 고발된 순간 에퀴테스들이 단독으로 재판한다는 것이 담겨, 큰 논란을 초래했다. 온화한 원로원 의원과 장차 원로원에 들어갈 목표를 가진 호민관, 에퀴테스들까지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속주 총독 및 로마 공화국의 모든 공무원, 군인들을 세리, 푸블리카니 경영자,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살짝이라도 밉보이면 고발되는 상황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견제할 조항을 함께 제출하지 않았다면서, 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은 속주 총독의 비리를 막고, 푸블리카니가 오롯이 세금 징수를 수행하면서 견제받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로원 견제 차원에서 배심원단이 전원 에퀴테스로 되어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설파했다. 원로원은 완강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투표 결과는 한 선거구 차이로 과반수 아래 통과되었다. 따라서 이 법안 통과 직후, 누군가는 이런 한탄을 했다고 한다.
"그 호민관을 지지한 대가로 에퀴테스는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고, 그 결과 원로원 의원은 경악했다."

이렇게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원로원 전체의 원한을 샀고, 에퀴테스 중 본인이나 본인의 아들, 손자를 신참자로 원로원에 입성시켜 가문을 노빌레스로 만들어보고 싶어한 사람들에게도 위험 인물로 인식되었다. 그럼에도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호민관 임기 후반이 될 무렵, 원로원을 다시 한번 견제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 내용은 원로원이 집정관 당선자가 추진할 국정 과제를 정하는 시기를 집정관 선거 전으로 잡아야한다는 법안이었다. 이 법안에는 원로원이 집정관이 해야 될 일을 정하는 주체라고 하더라도, 집정관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과 함께 그 선출에는 민회와 호민관의 1차 판단이 담겨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그의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보다 위험인물이며, 그가 복수를 위해 자신의 친인척까지 복수하려는 복수의 화신이라고 점찍어 이를 갈게 되었다.

4.3. 두 번째 호민관 시기

가이우스 그라쿠스 역시 이런 상황을 인식했다. 그는 자신의 개혁안이 너무 방대해서, 본인에게 의욕이 넘치고 열정적인 지지자들이 있다하더라도 1년 안에 전부 완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힌 다음, 그를 가장 확고하게 지지한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호민관으로 나선 선거 운동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는 명확한 불법이었다. 왜냐하면 플라쿠스는 집정관을 역임했던 전직 집정관이었기 때문에, 모스 마이오룸 아래에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해 호민관 선거에서 재미있게도,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입후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호민관에 당선되었다. 이에 대해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호민관에 재선된 것은 본인이 원하거나 간청하지 않았음에도 지지자들이 원했기 대문이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어쨌든 이렇게 가이우스는 형과 달리 연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이를 갈고 있었던 원로원과 반 가이우스 그라쿠스 성향의 에퀴테스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것은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이례적으로 호민관 연임에 성공한 다음, 소금까지 뿌려지면서 사라진 옛 카르타고가 있었던 푸닉(북아프리카) 지방에 거대한 식민 정착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사업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한 행동이었다. 이는 그가 로마 시민권을 모든 이탈리아 자유민들에게 부여하겠다는 제안과 함께 발의되면서, 원로원과의 갈등을 폭발시켰다. 그렇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개의치 않고, 카르타고에 건설된 새로운 식민시의 농지 분배, 공공 기관 및 인프라 건설 장소 물색을 위해 푸닉 지방으로 건너갔다. 기회를 포착한 원로원은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제거할 움직임에 나섰다.

이때부터 원로원은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들은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행한 방법에 이를 갈면서, 자신들 역시 선례가 있는 이상 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 당한 방법 그대로 똑같이 행동해야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고 여겼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취지에 공감했던 원로원 인사들도 지난 1년을 경험하면서,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악감정이 없었던 원로원 의원들도 상술한 곡물법 통과 후 벌어진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일방적인 폭언 때문에 이를 갈게 되었다. 따라서 원로원은 여러 호민관들 중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은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당시 호민관이었던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도 원로원이 접촉한 인사였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지나친 대(對) 원로원 언행 때문에 민회와 원로원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는 것을 우려한 까닭에, 그는 이 부분에 신경쓰고 있었고, 그의 출신 가문의 역사와 가계상 친인척 관계 때문에,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를 따른 에퀴테스 중심의 지지자들은 호민관 대 드루수스를 의심하고 있었다.

본래 호민관은 공화정 말기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처럼 순수한 평민 출신으로 부모와 그 형제•자매 모두 소작농 출신인 전례는 극히 드물었다. 대개는 그라쿠스 형제처럼 노빌레스들의 독무대였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를 위해 노빌레스 중 셈프로니우스 씨족, 리키니우스 씨족, 칼푸르니우스 씨족 등과 함께 파트리키와 대등하거나 그 역사가 유구한 노빌레스 중의 노빌레스로 평가된 리비우스 씨족에 속한,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에게 자신들이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어떤 점을 우려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이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이 봤을 때 원로원이 평민 전체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세력을 이간질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를 비열하거나, 이간질을 벌이려고 한 수작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흔히 그라쿠스 형제와의 대립구도로 인해 악인처럼 비춰진 인물로, 호민관 이후의 경력을 보면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점에서 그라쿠스 형제와 정반대에 선 인물인 것은 분명 맞다. 그렇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비슷한 연배였던 그는 중년 이후의 완고한 이미지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현실주의자였다. 실제 그는 말년의 이미지가 옵티마테스 중 강경파 같았음에도, 외손자인 소 카토, 혈연상의 외손자이나 법적 손자였던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와는 달리 유연한 면이 많았고, 민회나 훗날의 포풀라레스에게 마냥 적대적이지는 않았던 귀족이었다. 즉, 대 드루수스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대립하고 그를 몰락시킨 장본인이었음에도 이미지와 다르게, 술라 이후의 폐쇄적인 옵티마테스와 같지는 않았다. 이런 인물적인 특징처럼 그에게는 호민관 당선 이후, 지나칠 정도로 원로원에 적대감을 드러내고, 선동정치 아래 수많은 지지자를 결집시킨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설득해 온화한 방법으로 현실책을 제안했던 전례가 있었다.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기원전 147년 집정관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차남으로, 형은 시각장애가 있어 사실상 맹인과 같았음에도 뛰어난 변호사로 이름을 날린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였다. 대 드루수스의 할아버지는 본래 혈통적으로는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 사람으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친동생이었으며, 가정사 때문에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뒤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으로 입양되어 파트리키에서 플레브스 신분이 된 사람이었다. 또한 대 드루수스의 친증조부는 파트리키 명문가인 아이밀리우스 가문으로 칸나이 전투에서 전사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였고, 조부는 루키우스의 두 아들 중 둘째로 아버지가 전사한 후 외가 친척이며 아버지의 동료에게 입양된 마르쿠스 리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였다. 따라서 대 드루수스의 종조부(할아버지의 형)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였으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대 드루수스의 당숙이었다. 그래서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지지한 사람들은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은근히 견제했는데, 여기에서 이들이 더 크게 의심한 것은 호민관 대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집안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이 여러 번의 결혼 및 입양 관계로 본래부터 파트리키 계급의 아이밀리우스 가문과 사실상 한몸인 노빌레스였다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대 드루수스의 처가는 코르넬리우스 씨족이었다.[48][49]

이런 배경 및 상황 때문에 원로원은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설득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게 된 대 드루수스를 쉽게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대 드루수스는 곧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이 자신의 호민관 지위를 위협하고, 권한 행사까지 방해하는 것에 대해 맞불을 놓았다. 그는 민회에서 연설하는 동시에 호민관이 가진 권한을 합법적으로 활용해 극단으로 심화된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 대 드루수스는 그라쿠스가 제정한 법안에 거부권을 무조건 행사했으며, 그라쿠스의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최대한 저지했다. 이때 원로원은 대 드루수스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비판을 늘어 놓지 않았다. 이렇게 기원전 122년이 흘러갔는데, 대 드루수스는 민회에서 가이우스 그라쿠스에 대해 평민들이 지지하는 와중에, 가이우스가 연설을 하면서 선동한 조치를 저지시켰다. 그와 함께 대 드루수스는 그라쿠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지만 실제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개혁안을 잇따라 선제적으로 발표했고, 원로원은 그를 지원하면서 마치 자신들 역시 문제 인식을 하고 있다는 행동을 내보이며 가이우스 그라쿠스 지지자들의 내분을 유도하고, 그 지지자들을 원로원 지지파로 포섭했다. 결국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중심의 반(反) 가이우스 그라쿠스 전략은 성공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 지지세력의 균열을 초래한 것이다.

가이우스를 이렇게 압도한 대 드루수스는 곧 이탈리아인 모두에게 시민권을 나누어주는 것은 기존 로마 시민권자들의 권한을 줄일 것이라고 민회에서 연설했다. 이런 대 드루수스의 행동은 가이우스 그라쿠스 지지자들에게 있어 호민관이 원로원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따라서 그들은 그를 협박했다. 그러나 대 드루수스는 물러서지 않았고,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모든 것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 드루수스는 가이우스보다 더 급진적인 법안을 내놓았다. 이는 완전히 인기 영합주의적인 법안으로, 원로원과 대 드루수스가 이 법안을 계속 유지시키고자 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 확인된 점에서,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견제하기 위한 이간책이었다. 그렇지만 이중 몇 가지는 보다 과격하고 급진적이더라도 원로원이 편들면서 현실로 포장되었기 때문에, 곧 시민들의 인기는 대 드루수스에게 집중되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연설은 여전히 강력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지지자들 사이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균열 속에 조각났다. 여기서 운명의 장난처럼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시찰 중인 옛 카르타고에서 토지를 측량하던 도중 강풍이 크게 불어 기둥이 쓰러지면서, 로마까지 그 이야기가 퍼지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신들에게 버림받은 카르타고 땅에 로마인을 보내 저주를 받게 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라고 믿었으며, 원로원은 이를 놓치지 않고 미신적인 성향을 활용해 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이는 완전히 먹혀 들어,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 임기 후반부터 어떤 법의 입안도 압도적으로 통과시킬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지지도가 떨어지고, 지지세력 중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에게 붙은 이들까지 늘어나게 되면서 호민관 거부권도 마음껏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4.4. 몰락과 죽음

제1차 호민관 재임 시절과 제2차 호민관 재임 초반까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인기는 로마 민중들 사이에서 대단했다. 로마와 이탈리아 안의 로마 시민권자 주민들에게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인기는 어쩌면 형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보다 훨씬 뜨겁고 강렬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명민한 사람답게 이를 활용해, 호민관 연임 도전과 성공 과정에서, 자파에게 이득이 될 집정관 후보인 가이우스 판니우스의 선거 운동을 도와, 판니우스는 기원전 122년 집정관이 되었다. 이때 판니우스의 동료는 노빌레스의 대표 명문가 중 하나인 도미티우스 씨족의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수장이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였다. 그라쿠스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이 시류를 만들어 연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호민관 임기 말은 달랐다. 그는 8명의 호민관들 중 지지자가 떨어져 나가는 '한때 인기 많던 호민관'으로 인식되었고, 이마저도 과격하고 논란이 많다는 혹평을 들었다. 이런 평가는 원로원이 내린 평가가 아니었다. 원로원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라면 이를 갈 정도로 혐오했고, 적대감은 나날이 커졌다. 확고한 지지자였던 풀비우스 플라쿠스 외엔 없다 싶을 정도로, 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 호의적인 인사는 귀했다. 한때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그 취지에는 공감을 해준 인사들마저도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무자비하고 선동적인 위험인물로 인식했다. 동시대의 가이우스 마리우스조차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논란의 인물로 기억할 정도로,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원로원 안의 노부스 호모 사이에서도 평가가 갈렸고, 이마저도 호의적이지 못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보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로마 공화국에 훨씬 해악을 미친다고 혹평하는 여론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이렇게 된다면, 그 결과는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장점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원로원과 집정관을 상대로 불도저처럼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입법안을 제안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분위기를 감지한 원로원은 어떻게든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몰락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거세지는 원로원의 적대감, 암울해진 미래, 점점 위기 속에 빠져드는 현실은 당연히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이끈 지지세력의 결속을 강화시켰다. 그렇지만 이는 곧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앞길에 더 짙은 암운이 드리우게 되었다는 말과 같았다. 눈치 빠르고, 영리했던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결국 호민관 임기 말이 되면 어떻게 될 것인지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임기 중반이 되기 전,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원로원과 7명의 호민관 동기들은 고차원적인 전략으로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상정한 제안을 경쟁적인 방법으로 남발했고,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싸늘해지는 인기 속에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으니,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의 지지자 및 친구들 역시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가장 끔찍한 형태의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방법은 이것 뿐이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먼저 세 번째 호민관 출마를 결심하고 입후보했다. 그는 선거 운동이 다가오는 6월에 맞춰, 몇 가지 승부수를 던졌다. 먼저 선거 중 거처할 집을 서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포룸 로마눔 쪽으로 옮겼다. 이는 지지자들의 보호를 받아 원로원파에게 암살될 가능성을 줄이려는 현실적인 이유도 뚜렷하게 있었다. 다음 승부수는 선거운동이 시작된 6월이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 동료 7명이 검투사 경기 관람 중 벌어질 사고 예방을 위해 설치한 관람석을 "좀 더 많은 서민들이 즐기게 해야 한다."라며 철거하자고 했다. 하지만 7명의 동료들은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일꾼들을 모아, 밤에 검투사 경기장 관람석을 철거해버렸다. 이에 일부 민중들은 그라쿠스를 대단하게 여기면서, 가장 힘있고 위엄있는 호민관이라며 화끈하다는 찬사를 쏟아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무리수를 넘어, 정치적인 치명타가 되었다. 로마 민중 모두는 관람석 철거로 벌어질 안전 문제 등을 떠올렸고, 곧 의견이 양분되었다. 로마인은 공공의 안전을 중시했고, 이를 놓치지 않은 원로원은 모스 마이오룸 아래에서 이런 식의 행동은 과격한 것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7인의 동료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이들을 동료가 아닌 부하로 대했다는 인식이 커져, 7인 모두를 정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대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원로원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그라쿠스를 궁지로 몰았지만, 그라쿠스의 대의만은 높이 평가하던 터라 그와 경쟁관계였어도 존중했지만, 이때부터는 그를 진심을 다해 지지하지 않았다. 다른 6인의 호민관들도 같았다. 이들은 자신들을 완전히 무시한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동료 호민관 및 민중 모두에게 지지받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임기 중반인 7월 세번째 호민관 선거에 출마했음에도, 낙선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 지지자들은 원로원이 개표에 부정한 개입을 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따라서 혹자들은 원로원이 개표에 부정하게 개입하여 그리 되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8명의 다음해 호민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설상가상 그해 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던 루키우스 오피미우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오피미우스는 선거 운동 내내 다음과 같이 발언하면서,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동료 및 지지자들에게 당선되면 절대 안 되는 위험인물로 공인된 자였다.
"내가 당선되면 책임을 물어 그라쿠스를 제거하겠다!"
하지만 결과는 되돌릴 수 없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할 수 있는 것은 남은 임기인 5-6개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 전역에 자신이 벌인 도로, 항만, 상하수도 건설과 보수 사업에 매진하는 것 뿐이었다. 동시에 그는 사이가 틀어진 옛 친구, 동료 원로원 의원 및 호민관 동료들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충돌을 삼갔다. 즉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민회를 소집해 거부권을 남발하거나, 무리한 입법 제안을 펼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첫 호민관 시절, 너무 많은 적을 만들어 놓았다. 재무관 시절 로마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 등을 떠올린 옛 친구, 동료, 친인척들은 그가 이미지 개선을 하고, 이 경력을 살려 조영관이나 법무관 혹은 집정관이 되고자 하는 정치적 야욕이라고 의심했다. 더군다나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심정적으로 형의 개혁을 일부나마 이해해줬던 인사들에게도 완전히 눈밖에 난 터라, 관계 개선의 중재자가 될 인사도 많지 않았다.

기원전 121년 1월 1일, 하루 전인 12월 31일부로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호민관 임기가 끝났고, 오피미우스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가 집정관이 되었다. 이중 가이우스 그라쿠스라면 이를 갈 정도로 그를 증오한 오피미우스는 취임식이 열린 1월 1일부터
"그라쿠스의 법안을 폐기하겠다."
고 원로원 안에서 떠벌리며 나섰다. 원로원과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 집정관은 오피미우스를 방치했고, 오피미우스를 따른 원로원 의원들은 세력을 꾸려, 오피미우스의 발언에 합세했다. 이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 시절처럼 맞불을 놓으면, 곧바로 그라쿠스 세력을 일망타진하겠다는 것을 내포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 임기 종료 후, 저택에서 칩거하면서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참고 견디려했으며,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동료이자 지지세력의 리더였던 풀비우스는 달랐다. 그는 사방에서 자신들을 지지하는 세력을 불러모으기 시작했고, 저택에 있었던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찾아가 그를 설득했다. 원로원에게 있어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풀비우스는 허튼 짓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위험인물인터라, 이들의 동향은 오피미우스와 원로원에 보고되었다.

이 보고 이후,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생애를 기록한 플루타르코스와 아피아노스의 서술이 상반된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중 가장 유명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오피미우스는 가이우스의 법안을 철회하려 했는데, 이에 항의하는 군중들이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항의하려고 모인 군중들은 풀비우스가 사방에서 불러모은 가이우스 그라쿠스 지지자들이었다. 그러자 집정관의 릭토르 25인 중 한 명이었던 로마 공무원 퀸투스 안틸리우스가 관습 그대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안틸리우스는 이때
"불량배들아! 선량한 시민들에게 길을 터라!"
라고 소리치면서 자진 해산을 요청했다. 이에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풀비우스 지지를 계속 외친 지지자 중 한 명이 격분해 안틸리우스를 때려 죽였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 아피아노스는 전혀 상반된 주장을 기록했다. 아피아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풀비우스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선동 연설을 시작했고,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지지자들과 경호원들을 대동해 나타나, 그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했다고 한다. 가이우스와 풀비우스는 이후 다른 곳에서 무리를 규합할 계획을 회랑에서 의논하면서, 시기에 대해 입을 맞췄다. 그런데 그때 평민 출신의 안틸루스라고 하는 로마 시민권자가 이를 듣고
"제발 우리 나라를 위하여 그러한 일들을 저지르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간청했다. 이에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는데, 이때 가이우스의 충직한 경호 담당 시종이 들고 있었던 철필 송곳으로 안틸루스의 급소를 찔러 죽였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와 아피아노스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이후 이야기는 똑같다. 안틸리우스인지 안틸루스인지 하는 사람이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풀비우스를 지지하는 세력에게 맞아 죽거나, 급소가 찔러 살해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이 살해되자 난리가 났고, 시신이 실려 나갈 때, 소나기가 내리면서 모임이 해산되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뒤늦게 이를 알고(또는 사고가 터지자마자)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유가족에게 용서를 구하는 등 사건 해결에 최선을 다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리고 이튿날, 집정관 오피미우스는 그라쿠스 지지자들에게 맞아죽은 남성의 시신을 포룸에 정중하게 안치한 뒤, 원로원 의원 전체를 소환해 만행을 폭로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끔찍하고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며 대성통곡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한심하게 생각했다가,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사건이 터졌을 때, 적에게 비난할 구실을 제공했다며 나무란 언사를 알곤, 이를 정치적인 이유로 해석했다. 이렇게 되자,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폭력 확산을 막고자 신속하게 제지하고, 싹싹 용서를 구한 일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원로원은 희생자의 죽음을 추모한 뒤, 평소 열리는 회의장으로 복귀해, 다시 회의를 열었다. 원로원은 최초로 '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뭄'을 발의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여러 번역서를 통해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원로원 최종 권고가 이렇게 역사상 최초로 공포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모스 마이오룸 아래에서 비공식적으로 집정관이 어떤 조치를 취하더라도 원로원이 승인한다는 뜻과 같아, 정확하게 표현하면, 가이우스 그라쿠스에 대한 원로원의 적대감이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로써 원로원 의원들은 로마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초월적인 권한을 오피미우스에게 건넸다. 오피미우스는 다음날 원로원 의원들 모두에게, 집안에서 건장하고 배짱 좋은 하인 2명을 데리고 무장시킨 뒤 모여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식은 풀비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도 전해졌다.

풀비우스는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며, 지지자들을 끌어 모았다. 반면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자택에서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게 있다가, 그저 아버지 대 그라쿠스의 전신 동상을 바라만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쏟았다. 이후 모습도 달랐다. 풀비우스는 결전 직전의 모든 것을 다짐한 사람처럼 집에서 있는 대로 술을 진탕 마셨다. 하지만 그라쿠스는 아버지의 동상 앞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오피미우스와 원로원은 최후 통첩으로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풀비우스에게 원로원으로의 소환 통보를 내렸다. 사실상 최후 변론을 듣고, 처형하겠다는 통보였다. 이에 풀비우스는 지지자들과 함께 무장한 뒤 이를 거부했다. 반면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명령을 거부했다. 이후 그는 풀비우스에게 사람을 보냈고, 두 사람은 지지자들을 모아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도망쳤다. 디아나 여신을 모신 신전에 들어가 농성을 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신전 안은 모스 마이오룸에 따르면 안전한 성소였다. 동시에 이들 지지자들은 만나는 모든 노예들에게 자유를 약속한다고 했는데, 호응은 없었다고 한다.

한편, 원로원 회의가 열리는 곳에서 두 사람의 출두만을 기다리던 오피미우스와 원로원 의원들은 이들이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도망쳤다는 소식에 격분했다. 즉시 오피미우스는 무장한 노예들을 진격시켰다. 이런 가운데, 풀비우스의 아들 퀸투스 플라비우스 플라쿠스가 사절 대표로 원로원을 방문했다. 그는 원로원과 오피미우스에게 아버지와 그라쿠스의 입장을 전달했다. 그 입장이란 집정관에게 항복하겠다면서 협상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로원은 시간끌기일 뿐이라며, 당장 지지자들의 무장 해제가 선행되어야 하고, 논란의 당사자 2명은 원로원으로 출두해 최후 진술을 한 뒤 법의 판결을 받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원로원과 오피미우스의 입장을 들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자신이 직접 원로원을 찾아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풀비우스는 이를 만류한 뒤, 아들 퀸투스에게 다시 원로원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이후,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입장과 풀비우스의 입장이 원로원에게 알려졌는데, 원로원은 백기를 들고 원로원 앞에서 변론한 후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할 것을 다짐한 가이우스 대신 아들을 보낸 풀비우스의 입장에 더 크게 화를 냈다. 퀸투스는 체포되었고, 오피미우스는 무장 병력을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진격시켰다. 자신 때문에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절망했고, 자신의 칼로 자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살 시도는 실패했다. 가이우스는 자살을 저지당했고, 추종자들은 그를 강제로 끌고 간 뒤, 언덕 남쪽의 숲으로 피신시켰다. 이 숲은 성스러운 숲으로 불린 곳으로 테베레 강 건너에 있었다.

그라쿠스 지지자들은 그 숲으로 통하는 수블리키우스 다리 위에 무장한 채, 곧 오피미우스가 보낸 무장 노예들과 맞붙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무장 노예와 군대가 합쳐진 원로원 쪽의 승리로 결과는 끝났다. 다리에선 살육이 벌어졌고, 성스러운 숲으로 불린 곳에서 친구들과 지지자들이 장렬하게 싸우다가 모두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죄책감에 모든 것을 체념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충성을 다한 노예이자 소꿉친구였던 필로크라테스에게
"주인이 귀족으로 명예롭게 목숨을 끊게 도와라"
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필로크라테스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명령을 이행한 다음, 그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함께 죽었다. 병사들이 성스러운 숲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날 250명의 가이우스 그라쿠스 지지자들이 우선 학살되었고 이후, 그의 지지자 3,000명이 모두 처형되었다. 그렇게 잔혹한 숙청을 마무리지은 뒤 원로원은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입안한 모든 법을 폐기시켰다.

4.5. 사후 이야기

당시 오피미우스는 따로 명령을 내리면서,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목을 잘라 그 머리를 자신에게 바친다면, 머리통 무게만큼의 황금을 주겠다는 현상금을 내걸었다. 따라서 성스러운 숲에 들어간 일부는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었는데, 이중 셉티물레이우스라는 자가 그라쿠스의 시신을 보자마자 머리를 잘랐다. 그런데 그는 더 많은 황금을 받아내겠다고,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머리에 납을 가득 채워 넣은 뒤, 이를 오피미우스에게 바쳤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죽고, 머리가 잘려 오피미우스에게 전달되는 사이, 풀비우스는 맏아들 마르쿠스를 데리고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던 목욕탕으로 들어가 숨었다. 하지만 그는 발각되었고, 곧 맏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풀비우스의 머리 역시 현상금을 노린 자에게 잘렸는데, 그 사람은 풀비우스 머리에 납을 넣는 짓을 저지르지는 않고, 이를 온전히 바쳤다. 하지만 오피미우스는 약속과 달리 풀비우스는 이름없는 자와 같다며 현상금 지급을 거부했다.

한편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제거한 오피미우스도 스키피오 나시카처럼 뒤끝이 좋지는 않았는데, 누미디아와 한판 붙은 유구르타 전쟁 직전에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것이 들통나 공직에서 파면되고 디라키움으로 추방되는 형벌을 받아 한 신전에서 칼로 찔러 자살했다.

5. 형제의 동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 개혁 법안을 둘러싼 싸움을 단순히 티베리우스 진영과 로마 원로원간의 권력 투쟁으로 묘사한 학자들이 많았다. 이 학자들의 눈에는 티베리우스가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를 주축으로 움직인 민주적·자유주의적 혹은 급진적 개혁자로 비치고, 원로원은 로마의 사회·경제적 문제에는 아랑곳 없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던 부유한 토지 귀족들로 비쳤다. 이 견해는 오래 버틸 수 없다. 티베리우스는 급진적 개혁을 염두에 두고서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의 개혁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개혁으로서, 언제나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에 의존했던 군 병력 자원을 되살리고, 노예들에 의해 경작되는 대농장의 확산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 티베리우스를 반대했던 원로원 의원들 중 다수가 자신들의 방대한 토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의원들은 그의 행동을 자신들이 순수하게 믿고 있는 정체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또 개인과 계파의 정치에 근거하여 그를 반대한 의원들도 있었다. ······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을 집행하도록 구성된 농지 분배 위원회가 그 입안자의 사후까지도 활동을 허용받은 것은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에 대해 조성되었던 반감이 주로 개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반대나 편협한 개인의 경제적 이해에 기초를 두지 않고 개인적이고 파벌적인 정책에 기초를 두었음을 암시하는 또 한 가지 점이다. 개혁으로부터 가장 큰 정치적 이익을 거둘 뻔한 당사자가 죽었기 때문에, 개혁 자체가 더 이상 그의 정적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실은 이번에는 그들이 자진해서 호의(gratia)를 베풀고 토지를 분배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은 수의 피호인들을 확보했다. 콘술 포필리우스 라이나스(Popilius Laenas)는 심지어 자신이 그 법을 시행하기 위해 했던 일을 자랑했다. 그는 루카니아의 지계석(地界石)에 자신이 "목동들로 하여금 농부들을 위해 길을 내주도록 만든 최초의 인물"이라는 글귀를 새겨넣게 했다.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에 임명된 농지 분배 위원회 위원들은 티베리우스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었던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M. Fulvius Flaccus)와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C. Papirius Carbo)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활동한 결과 6년만에 75,000명이 넘는 인구를 정착시킨 듯한데, 그것은 군 복무가 가능한 병력 자원을 20% 늘린 셈이었다. 그라쿠스의 농지법은 로마의 군사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을 일시적으로 성취한 듯하다.
······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죽은 뒤에 넓은 의미에서 귀족파로 분류할 수 있는 그의 정적들은 한때 그가 자신들을 누르는 대가로 이익을 얻으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그의 법을 시행할 의지가 있었다. 그들은 곡물법을 폐지하지도 않았고, 부당취득재산 반환청구 법정에 선정된 배심원들을 교체하거나 속주 세금 행정 체제도 수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식민지 설립과 관련된 법을 포함한 농지법도 비록 수정은 했으나 폐기하지 않았다.
Friz Moritz Heichelheim,《하이켈하임 로마사》 中

전통적으로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둘러싼 당대의 논쟁은, 기득권층의 특권을 박살내려는 그라쿠스 형제와, 개인적이고 편협한 동기에 사로잡힌 기득권층의 대립으로 이해되었다. 이 견해는 부분적으로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나 하이켈하임이 지적했듯이, 근래에는 씨족의 디그니타스(dignitas, 존엄)을 높이려던 청년 귀족들인 그라쿠스 형제의 야심 및 정치적 이해관계와 그들 내부의 고결한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설명된다.

형제의 아버지 대 그라쿠스는 집정관을 두 번이나 지냈고, 두 번의 개선식을 거행했으며, 히스파니아에서는 존경받는 총독이었고, 감찰관을 지냈으며, 복점관 사제단의 일원이었다. 아버지의 디그니타스를 재현하거나, 혹은 뛰어넘으려는 전통적인 로마 엘리트의 마음에서 바라볼 때 형제들의 동기는 더욱 쉽게 이해된다. 특히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형제들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가졌던 사적인 관계이다. 하이켈하임은 이 점을 특히 주목한다. 아이밀리아누스는 형제들의 친척이였으며, 티베리우스의 정채적 행보 초기에는 아이밀리아누스와의 친족 관계가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하였으나, 티베리우스의 가족과 아이밀리아누스 사이에는 그들의 복잡한 인척 관계로 인해 생긴 유산 상속 문제를 둘러싸고 악감정이 쌓여있었다. 게다가 스키피오는 티베리우스의 누이였던 셈프로니아의 남편이였으나 이 결혼 생활이 불행하게 되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고, 티베리우스가 카르타고에서 귀환한 후 2~3년 뒤에 귀족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스키피오의 큰 정적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과 약혼하게 되어서 기름을 부었다. 또한 BC 137년에 티베리우스는 히스파니아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C. Hostilius Mancinus)[50] 밑에서 재무관(quæstor)으로 일하기도 했다. 또한 만키누스가 누만티아군에게 패배했을 때 티베리우스가 자신과 아버지 대 그라쿠스의 명예를 걸고 누만티아군과 맺은 평화협정을 스키피오가 앞장서서 무효화하고 원정군을 이끌고 가서 누만티아를 파괴하여 티베리우스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켰다. 다시말해, 아이밀리아누스와 그라쿠스 형제(최소한 티베리우스)는 이웃보다도 더 웬수 같은 친척이였던 셈이다. 위에서 말한, 아이밀리아누스의 평화협정 거부는 그와 티베리우스의 관계가 파탄이 났음을 말해준다.
스키피오는 야심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만키누스뿐 아니라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정치 생명까지도 희생시킬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스키피오에 대해서 공정히 말하자면, 그는 티베리우스가 만키누스와 같은 운명에 떨어지지 않도록 도왔지만, 그 사건을 전체로 놓고 보면 티베리우스의 신망에 엄청난 타격을 입힌 셈이 되었고, 따라서 티베리우스로서는 일가 사람 시늉을 하려고 한 스키피오의 어설픈 행위를 조금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유지하고, 아울러 두말할 나위 없이 스키피오를 응징할 수단을 필사적으로 찾게 되었다. 농지 개혁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수단이었다.
Friz Moritz Heichelheim, 『하이켈하임 로마사』 中

특히 이 사건은 티베리우스의 디그니타스를 처절하게 찢어놓았고, 따라서 그의 디그니타스를 복구하기 위해 과감한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 이러한 사적인 이해관계 및 정치적 야망과 그의 고결한 성품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농지법이라는 폭풍을 부르게 된다. 우선, 농지법을 시행하게 되면 당연히 로마가 당면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호민관 출마를 앞두고 있던 티베리우스에게는 유권자들에게 호소하여 표를 받을 수 있는 매력적인 아이템이였으며, 시행에 성공할 경우 부동의 지지층을 형성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점은, 농지법이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정치적 타격을 준다는 점이다. 농지 위원회가 구성된다면, 아이밀리아누스가 히스파니아에서 귀국하면 자신의 전역병들에게 보상해야 할 '바로 그 토지'를 아이밀리아누스가 아니라 농지 위원회가 분배하게 된다. 다시 말해, 아이밀리아누스의 피호인이 티베리우스의 열렬한 지지자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아이밀리아누스에게는 크나큰 타격이다. 다시 말해, 농지법은 정의로우면서도 동시에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에게 유익한 개혁이였던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티베리우스의 사후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위에서도 인용했듯이, 농지 위원회는 해산되지 않았고 업무를 중단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까지 했다. 아직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이 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엄청난 지지자를 확보하여 줄 농지법 프로젝트를 엎어놓지 않았고, 심지어 티베리우스의 가장 큰 정적이였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이탈리아 동맹국 시민들이 자기들에게도 공유지의 혜택을 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혼쾌히 수락하고 농지법의 동맹국 혜택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가 된다. 그러므로 원로원이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을 반대한 것에서는, 경제적인 이해관계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인해,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붕괴된 농지법을 부활시킨' 인물로 바라보기보다는, 티베리우스 사후에도 유지되어온 농지 위원회의 위원으로서 티베리우스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지지자를 흡수한 인물로 바로봐야 할 것이다. 가이우스의 광범위한 개혁의 동기는 티베리우스의 경우처럼 '정의'와 '정치적 이득'이라는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엮여있고, 여기에다가 티베리우스의 사망으로 인해 찢어진 가문의 디그니타스를 회복하려는 동기도 있다.

티베리우스를 살해할 때 그의 정적들은 티베리우스가 참주가 되려고 한다며 고소하였고, 참주는 처형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옛 법을 근거로 그를 살해하였다. 물론 티베리우스가 공화정을 뒤엎고 참주가 되려고 했다는 근거는 없으나, 당시 그의 정적들이 어마어마한 민중 지지자를 확보해나가던 티베리우스에게 얼마나 큰 공포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그의 정적들이 오직 단 하나 '기득권 옹호'만으로 움직였다고 바라보기보다는, 여러 요인을 함께 감안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그리고 대부분의 정적들에게는)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이 문제였겠으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이 문제였을 것이다.

가이우스의 사후 농지법이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를 본다면, 역시 이 주장은 더더욱 힘을 얻는다.
세 번에 걸쳐 연속적으로 제정된 법들이 그라쿠스의 농지법과 관련된 모든 집단의 이해에 맞춰 점차 수정했다. 기원전 121년에 제정된 듯한 첫째 법은 정착민들에게 자기들이 할당받은 농지를 매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 법은 군 복무를 위한 재산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부유한 토지 소유자에게 주변의 작은 토지들을 사들이거나 강제 매각하도록 허용하려는 목적을 무산시키는 경향을 띠긴 했지만, 반드시 인기가 없지만은 않았다. 소규모 토지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만약 그것을 상속자들에게 더 작은 토지로 분할해 준다면 생계 유지는 더욱 힘겨운 일이 될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정착민들은 그것을 팔아 현금을 손에 쥐는 것을 좋아했을 것이다.
두번째 법(아마 기원전 118년에 제정됨)은 농지 분배 위원회를 해산하고(그 위원회의 임무는 이미 끝났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공유지에 대한 더 이상의 분할을 중단하고, 국가에 소액의 지대를 지불한 대가로 이미 분배된 토지에 대해 법적 소유를 보장했다. 이 법은 대규모 토지 소유자들과 소규모 소유자들을 동시에 만족시켰고, 특별히 이탈리아 동맹국들에게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공유지를 더 이상 분배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들의 희생을 전제로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11년에 세번째 법(비명<碑銘>에 부분적으로 보존된 토리우스 법(lex Thoria>인 듯함)이 제정되어 기원전 118년의 법에 의해 지시된 모든 임대 행위를 폐지하고, 그라쿠스 농지 분배 위원회에 의해 320에이커까지 분배된 모든 공유지를 사유 재산화하고, 식민 도시들과 자치 도시들에게 이미 준 토지를 안전히 보유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아울러 이 법은 공공 방목지를 더 이상 잠식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 목초지에서 풀을 뜯는 가축의 수효를 엄격히 규제했다. 지대 경감은 대규모 토지 소유자와 소규모 소유자 모두에게 혜택을 주었고, 자치 도시들의 동맹국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하사된 토지의 안전한 보유권에 대해서 감사히 여겼다. 소규모 자영농들은 대규모 지주들이 부가적인 공유지를 불법으로 잠식하지 못하도록 막아준 조치를 환영했을 것이며, 소규모 목축업자들은 목조지를 못쓰게 만드는 과잉 방목의 규제조치로 인해 혜택을 입었을 것이다.
Friz Moritz Heichelheim, 『하이켈하임 로마사』 中

6. 평가

그라쿠스 형제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를 총칭해 평가할 경우, 로마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을 수호하다 죽은 인물들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로마가 가진 문제점을 파악하였고 높은 교양과 법률적인 지식을 무기로 이를 개혁하고자 하였다고도 평가받는다. 때문에 중세에서든 근대에서든 현대에서든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평가는 학계에서도 대중에서도 매우 호의적이다.

다만, 당대부터 그라쿠스 형제 중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에 대한 평가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차이가 분명히 갈린다.

두 사람 중 당대 로마인부터 제정 시대 황제, 원로원 의원, 역사가 모두에게 현대까지 그 동기와 평가 모두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그라쿠스 형제 중 이들 형제가 가진 고결하고 정의로운 호민관이라는 평을 온전히 듣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모두의 최측근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내부까지 관통한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의 평 등에서도 확인될 만큼,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농지 개혁 동기와 정당성, 명분 모두는 현대에서 생각한 그라쿠스 형제의 평가처럼 대단히 좋다. 이는 그를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함께 냉소적으로 바라본 키케로 역시 비슷했는데, 그는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에 분명 쇠퇴와 궁극적인 화두를 던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게 대해서는 요람에서부터 집정관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삶에 부합한 인물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키케로는 그라쿠스 형제 중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삶과 암살이 갖는 비극성 역시 분명히 짚으면서, 명암이 분명했다고 평가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 그리고 그 이전에도 그의 호민관 뒤에 있는 모든 근거는 연합된 시민을 두 개의 별개의 세력으로 나누었다.
키케로

따라서 독일의 고전사학자 위르겐 폰 운게른 스테른베르크는 공화정 후기, 제정 시대 로마인들처럼 로마 공화정 붕괴의 시작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암살된 그 순간부터임을 명시하고 있고, 여타 현대 학자들 역시 그라쿠스 형제 중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과 그 죽음은 로마 원로원이 중심이 된 공화정의 쇠퇴, 궁극적 붕괴의 상징으로 평가한다.

반면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는 약간 그 평가가 다르다.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제정 시대까지 로마 사회에 훨씬 더 많은 화두를 던졌다면, 가이우스 그리쿠스는 원로원과 정면으로 부딪친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그의 죽음과 이후 상황에서 로마 공화정을 이끈 원로원이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잘못된 선례를 세우도록 했다는 평도 따라온다. 인물 자체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이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형과 달리 논란의 인물이라는 평을 더 많이 들었다.

물론 위에서도 지적하였듯이, 형제의 개혁에는 그들의 성품, 활동의 차이가 있더라도, 공통점이 분명히 있어 복합적인 평도 함께 따라 다닌다. 설령 정치적 야망도 함께 복합적으로 얽혀있다고 해도, 이들과 원로원의 대립은 그 평가 속에서 많은 시사점을 주면서 많은 화두를 낳고 있다.

이들의 법안은 옛 리키니우스 법이 있었고, 여러 전현직 집정관이 자영농의 몰락을 막고자 벌인 입안 아래에서 새로운 발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이를 철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끝까지 밀어붙였고, 결국 모두 원로원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원로원 귀족들의 이익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형제를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와 얽혀 현직 호민관이 살해된 점은 로마사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들은 평민 집회가 가진 입법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원로원의 의사에 반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군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도전했다는 이유로 비무장 상태로 살해당했고, 이 사건은 매우 보수적이고 모스 마이오룸을 중시한 로마 사회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원로원 안에서 명예로운 경력보다는 출신 가문과 친인척 관계 속에서 그라쿠스 형제가 가진 위상을 떠올리면, 이런 종류의 도전을 그들이 처음했고, 원로원 손에 살해된 일은 최초였다.

공화정이 생긴 이래 원로원은 실질적인 로마의 최고 권력 집단이었다. 집정관이 공식적으론 최고 권력자이나 이들은 집정관 경험이 없는 뜨내기들이 주로 맡았고 원로원은 전직 집정관이 우글거리는 집단이었다.[51] 또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는 인사들은 이미 원로원 의원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집정관들은 거의 모든 문제를 원로원과 상의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원로원의 의사는 곧 로마의 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이러한 구조에 처음으로 도전한 것이다. 여지껏 호민관들 중 그라쿠스 형제처럼 그들이 가진 권한을 쓴 적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호민관의 권력은 막강하였다. 행정권과 군단 지휘권을 제외하고 호민관과 집정관의 권한의 차이는 거의 없었으며,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이 아니라 호민관 특권과 군단 지휘권 두개만으로 황제의 직위를 획득하였다는 사실에서 호민관의 막강함을 알 수 있다. 이 호민관 특권은 군사권만 빼면 황제의 권한과 전혀 다를바 없었으며 단지 아우구스투스는 일년 임기를 없애고 종신으로 호민관 권한을 가졌을 뿐이다.[52] 그 이전에 강력한 군단 지휘권을 쥔 폼페이우스가 호민관 가비니우스의 배후에서 원로원에 불리하고 민중파에 유리한 법들을 잇따라 제정하게 했는데도 원로원이 아무 조치도 못 취했다는 점에서[53] 그 강력한 권한이 충분히 설명된다.

호민관에겐 독자적인 입법권, 사법권, 거부권이 있었기에 분명 법률적 권한은 막강했다. 이들은 원로원의 허락없이 자신의 재량만으로 재판을 열 수 있었고 법률을 민회에 회부할 수도 있었으며 원로원의 어떤 결정이나 입법도 거부권을 동원해 무력화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이런 권력을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로원인데, 이는 원로원이 귀족과 평민의 차별을 없애라는 개혁을 요구하는 평민들의[54] 요구를 수용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편법 때문에 호민관이 이런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이었다.

원로원은 평민들로 하여금 평민 집회를 따로 갖게 하였고 이들이 호민관을 선출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정부 체제를 완전히 고수하는 한편 평민들의 정부를 따로 구성케 한다. 그리고 이 평민들의 정부를 자신들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평민들의 요구 수용"과 "귀족들의 기득권 수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다. 평민들의 정부가 완전히 원로원의 통제하에 있게 된 이유는 호민관에 출마할 자격을 가진 자들이 평민 귀족들 뿐이었고, 이들은 원로원과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로원이 자신들과 같은 계급이라고 생각한 그라쿠스 형제가 최초로 이 평민 정부를 움직여 로마의 개혁을 추진하고 원로원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최초로 평민 정부가 원로원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원로원은 위에 나오듯 이를 심각한 위협이라고 판단하였고 원로원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법을 만들고 추진하는 것을 왕이 되려는 행보라고 판단하였다. 그럼으로써 원로원이 일찍이 없던 무력으로 호민관을 죽이는 초법적인 행동에 의지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라쿠스 형제 이후 로마 정부는 피와 폭력으로 얼룩지게 된다.[55][56]

즉, 그라쿠스 형제의 출현은 로마 정부의 모순점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이런 모순을 만든 건 다름아닌 원로원 계급이나 다름없었다. 군단 지휘권만 없었지 실제론 왕이나 다름없는 권한을 호민관들에게 줌으로써 사실상 로마 안에 두 개의 정부가 구성되게 만든 것은 바로 원로원들이었다.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는 이 꼼수가 제대로 먹혀서 호민관들이 원로원의 하수인으로써 제대로(?) 역할을 수행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가 도시국가에서 식민제국으로 본격적인 확대가 이루워지면서 귀족과 평민간의 갈등이 본격화 되기 시작했으며 사실상 다른 마음을 품은 정치세력이 마음만 먹으면 평민들로 이루어진 정부를 굴려 원로원 체제를 전복시키려 하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훗날 이뤄진 민중파의 대두는 바로 이런 터전에서 생긴 것이며 이들은 사병화된 군단들과 영합하여 군사력까지 갖춤으로써 기어이 원로원 체제를 전복시키는데 성공한다.[57]

한편,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동기 및 당대 공화정의 모순을 드러냈다는 의의와 별개로 이들 형제가 실시한 개혁의 배경과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현대에 들어서는 복합적이다. 기본적으로 이들 형제, 특히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인식했던 ‘라티푼디움에 의한 자영농의 몰락’이라는 전제부터가 사실과는 조금 달랐다고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늘어났던 로마의 도시 빈민 인구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주장했듯이 라티푼디움 탓에 자영농이 몰락하여 도시로 몰려든 것이 원인이라기보다는, 기원전 2세기 초부터 시작된 호황으로 인한 로마 공화국 인구 자체의 급증과 로마 특유의 분할상속으로 인해 세대가 넘어갈수록 소규모 자영농이 소유한 토지와 재산은 파편화되며 줄어드는데 인구압이 폭등하면서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특히 이탈리아 중부 지방에서 위 문단과 같은 현상이 심화되었다. 애초부터 공유지가 대부분 사유지로 전환된 채였던[58] 이 지역에서는 시장경제의 발달로 상업작물의 수요가 올라갔고, 전술했듯 인구압 증가까지 겹치며 땅값이 올랐다. 분할상속으로 인해 소규모 자영농이 소유한 토지가 파편화되며 거기서 나오는 수입만으로는 가족의 부양이 점점 힘들어지던 상황에서 이처럼 땅값이 오르자, 이들은 토지를 팔아치우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 특히 로마 시를 향해 이동하였다. 기원전 2세기 초의 호황기에는 다양한 공공 사업과 이에 수반하는 다수의 임금 노동 기회가 제공되었으므로, 이러한 이촌향도 경향은 당시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일자리를 찾던 소농들에게는 입대라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당시 로마가 치렀던 마케도니아 전쟁과 같은 전쟁은 일개 사병들에게도 제법 짭짤한 이익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말로 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로마 공화국의 인구는 계속해서 폭증하며 로마 시로 유입되는 인구는 늘어가고만 있었다. 하지만 경제 상황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이 시기로 가면 곡물 수급 문제로 물가 상승과 불황이 찾아왔고, 자연스레 공공 사업들이 줄어들며 도시에서 얻을 수 있던 일자리도 감소했다. 거기다 기원전 2세기 말의 전쟁들, 대표적으로 루시타니아 전쟁이나 누만티아 전쟁 등은 이전의 전쟁들과 달리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는데 사병들이 감당해야 하는 위험도는 높았다. 따라서 입대를 고사, 기피하는 경향이 늘어났고 기존에 전쟁을 떠난 상태여야 했을 상당수의 인구가 이탈리아 내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즉, 일자리는 감소했는데 일자리를 원하며 로마 시로 몰려온 시민의 수는 오히려 더 늘어난 것이다.

이리하여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도시의 인구압이 폭등하고 그에 따른 도시 빈민의 증가와 같은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일어났다.[59] 그러나 이탈리아의 타 지역에서는 상황이 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60]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자영농 몰락으로 인구가 감소함을 제시하였지만[61] 사실은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BC 131년 조사에서는 318,823명, BC 125년의 인구조사에서는 394,736명으로 외려 조사상 인구가 늘어나는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그라쿠스 형제-최소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자영농의 몰락에 의한’ 도시 빈민층의 증가[62]라는 사태를 과도하게 심각한 일로 오판한 것이든, 아니면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편 것이든 잘못된 근거를 들어 지나치게 급진적인 주장을 하였다. 또한 개혁의 결과 역시 반드시 긍정적이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은 공유지를 빈민들에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공유지는 어디서 왔는가? 바로 이탈리아 동맹시민들에게서였다. 과거 확장의 과정에서 로마는 정복하거나 굴복시킨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영토를 로마라는 국가의 공유지, 즉 국유지로 편입했다. 이 토지들은 명분상으로는 그렇게 국유지가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그곳을 점유하고 있던 이들은 원 주인인 이탈리아인들이었다. 로마 당국도 기존까지는 공유지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반기를 들지 않는 이상 그들을 쫓아낸다거나 그 토지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제재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헌데 티베리우스 그리쿠스의 개혁안에 의해 이 공유지가 “로마 시민”들에게 재분배되기로 결정되었다. 로마 시민권이 없었던 이탈리아인들은 그로 인해 대대로 내려오던 토지를 갑자기 빼앗기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한 불만과 비시민권자란 이유로 받는 차별이 겹치면서 이탈리아인들은 로마 시민권을 원하게 되고, 이 문제를 인지한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이후의 호민관 드루수스가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로마 시민권 부여를 추진하나 원로원 꼭대기부터 도시 빈민들까지 전 계층에서 엄청난 반대에 부딪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 직전까지 가지만 드루수스가 암살당하면서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시민권 부여 정책은 동력을 상실하고, 결국 이탈리아인들은 로마에 대한 전쟁을 일으킨다. 이것이 동맹시 전쟁이다. 동맹시 전쟁이 로마 공화정에 치명타를 가한 사건 중 하나였음을 감안하면, 여기에 한 원인을 제공한 그라쿠스 형제를 단순히 ‘빈민을 구제하려 시도하여, 성공만 했다면 공화정의 모순을 타파할 수 있었을 개혁가’로 선뜻 정의내리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은 훗날 제정이 되고 나서도 황제들이 다시[63] 시도하지 않는데 이는 너무도 기득권과 반대되기 때문이었다.[64] 당시 원로원 계급은 반드시 대농장을 경영하는 지주여야만 하였고, 원로원의 상업활동을 금지하는 법이 플라미니우스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에, 원로원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대농장을 소유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은 바로 이런 대농장의 소유를 금지케 하는 것이었으며, 농지법의 시행은 사실상 원로원 계급의 씨를 말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의견이 있다.[65][66] 사실상 사유 재산에 한계를 긋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사회주의 외에 어디서도 시행되지 않는다. 이렇게 고대~중세 국가의 귀족 집단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성공 사례가 극히 드문데, 이런 귀족 집단의 영향력은 왕조차도 무시할 수 없으며, 이들이 왕보다 권력이 큰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대개 이들의 기득권이 전복된 것은 외부의 침략으로 아예 나라 전체가 쑥밭이 되거나 또 다른 지배계급이 등장하여 기존 지배세력의 대체를 시도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67][68][69]

그라쿠스 형제는 농지 개혁을 원로원과 관료들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시도하려 하였고, 이에 맞서 원로원은 위법적인 무력 수단을 동원한다.[70] 그 결과 그라쿠스 형제는 목숨을 잃고 로마는 엄청난 혼란에 빠진다. 이는 결국 원로원과, 부족한 힘으로 무모한 개혁을 시도한 그라쿠스 형제의 대결이 결국 원로원의 승리로 끝난 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비롯한 내부적인 모순이 쌓이고 쌓여 원로원은 점점 지지를 잃어갔으며 마침내 율리우스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를 거쳐 원로원은 힘을 잃고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그라쿠스 형제의 출현은 로마 공화정의 모순된 정치구조를 보여주는 최초의 조짐이라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득권 출신이었음에도 기득권에 반하는 개혁을 추진하다가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했다는 점 때문에 후세의 많은 동정을 받았으며, 때문에 그라쿠스라는 이름은 '양심적인 로마인'을 묘사할 때 애용되는 이름으로 남아 고대 로마를 다룬 작품에서 등장한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스파르타쿠스와 노예들의 처지를 동정한 민중파 영수의 이름도,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콤모두스 황제 이후의 로마를 맡아 공화정으로 회귀시킬 역할을 맡은 원로원 의원의 이름도 모두 그라쿠스이다.

7. 후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아들들은 모두 후손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일찍 요절했다고 하는데, 유명하지 않아 알려지지 않았다는 평도 있어, 단절됐다는 이야기 역시 여러 이야기가 있다. 단, 세 아들 중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경우에는 유년기에 확실히 요절했고, 장남 역시 큰 이름을 떨치지 못했다. 둘째 아들 혹은 셋째 아들 중 한명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롱구스[71]인데, 그는 그나마 기록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는 기원전 90년대 시칠리아 총독 특사 대리를 지냈다. 하지만 이 경력 외에는 평범한 원로원 의원으로 있을 뿐 크게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이 외에도 장남의 후손으로 추정 중인 기원전 40년경 활동한 화폐 감독관이자 재무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때인 서기 35년에 그나이우스 마르키아누스를 반역법에 따라 고발하고 탄핵한 원로원 의원인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도 있다. 그런데 이들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진짜 후손인지 여부는 그 평이 엇갈리며, 이중 가장 유력시되어 설명된 롱구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이름 미상 막내 아들로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명확히 기록상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아들이나 후손 중 그 후손으로 언급된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롱구스 외에는 특별히 로마 고위 공직 경력자 비문에 이름이 새겨진 아들과 후손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아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딸로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여자형제 셈프로니아는 결혼 후 낳은 딸이 가이우스 그라쿠스 이상으로 유명해 그 후손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알려져 있다. 셈프로니아의 딸로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외손녀가 공화정 후기 내내 많은 논란과 영향을 쏟아낸 귀부인 풀비아이다. 그녀는 평범한 귀부인이 아니었고, 기원전 40년 사망 때까지 외조부 이름이 회자될 만큼 여러 이야기를 낳았던 귀부인으로 로마 정부를 상대로 직접 군대를 동원해 내전까지 벌여 당대부터 유명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외손녀 풀비아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로마 공화정 전체에서 당대 논란을 낳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첫 남편이었고, 두번째 결혼으로 맞이한 남편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마지막 결혼으로 함께 한 남편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 이 결혼 생활 동안 풀비아는 자녀도 여러 명 얻었는데, 이중 유명한 자녀는 후일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될 옥타비아누스의 첫 아내였던 클로디아 풀크라,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 중 막내로 풀비아의 막내 아이였던 율루스 안토니우스이다. 이중 제일 유명한 자녀는 율루스 안토니우스인데,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 풀비아는 페루시아 내전을 주동했다가 사망하면서 어머니 풀비아에게 큰 애정이 없었으며, 오히려 계모 소 옥타비아의 손에[72] 사실상 친아들로 자라고 입양돼 양자가 되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외증손자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족이 되어 평화의 제단에 그 모습이 부조됐고, 양모 옥타비아의 장녀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해 두 아들과 딸을 낳았다. 그러나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아내의 사촌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친혈육인 대 율리아가 벌인 불륜 스캔들과 그녀가 정치세력을 꾸리면서 벌인 일에 이름이 올라가면서, 아우구스투스에게 진노를 사면서 휘말렸다. 그는 율리아에게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위한 섭정 자리를 제안받았다는 일이 있다는 이유로 인해 불륜을 한다고 아우구스투스에게 기소되었다. 이 기소는 그가 불륜을 실제 하지 않고, 율리아의 제안을 받은 일이 숙청 명분으로 정해진 결과로 보인다고 평가받는다. 어쨌든 이때의 일로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곧바로 재판에서 유죄를 받는데, 그는 유죄 판결을 받자마자 남은 아내와 자녀들을 보호하고자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로마 내부 권력 투쟁에 휘말려 비명횡사한 결과가 됐는데,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자식들은 옥타비아의 외손자들이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율루스 안토니우스에게 큰 배신감을 느낄 뿐 그 이상은 문제 삼지 않았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율루스 안토니우스 자녀들을 철저하게 보호해주어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손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훗날 유능한 장군으로 성장해 비텔리우스 타도와 베스파시아누스 옹립에 큰 공헌을 했고,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딸 또한 자식들을 낳으며 무탈하게 대를 이어갔다. 이 이후로는 기록이 없으나 어떤 형태로든 후손은 이어졌다고 볼 수는 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 활동한 같은 가문 사람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들도 유명했다. 이들이 그라쿠스 형제의 후손인지, 그라쿠스 형제의 친척들의 후손인지 여부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다만, 이들은 모두 법무관까지 지냈고, 이중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에 법무관을 지낸 그라쿠스의 후손이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에 마지막으로 고위 선출직에 이름을 올린, 서기 167년 집정관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이다. 두 그라쿠스 중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동한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딸, 티베리우스의 아내인 대 율리아와 수십년간 불륜을 벌였고 이 문제로 유죄판결을 받고 추방됐다가, 대 율리아의 남편이었고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2대 황제가 된 직후, 추방지인 리비아에서 처형됐다. 하지만 이 사람의 딸과 아들은 모두 처벌을 받지 않았고, 사위와 아들 일가 모두는 원로원에 제명되지 않았다. 동명이인의 또 다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동명이인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아들이 아닌 별개의 인물이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측근으로 세야누스 몰락과 처벌 과정에서 세야누스 파 숙청 당시 기소를 담당했다. 이외에도 상술한대로 서기 35년에 원로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세야누스 잔당 처벌에 열을 올린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도 제정 시대에 이름을 기록으로 남긴 그라쿠스 일가 사람으로 종종 회자된다.


[1] 이 조각상은 19세기프랑스에서 상상하여 만든 것이다. 즉, 로마 시기에 만들어진 그라쿠스 형제의 조각상은 존재하지 않는다.[2] Tiberius Sempronius Gracchus. 생몰년도: 기원전 168년 혹은 163년 ~ 기원전 133년[3] Gaius Sempronius Gracchus. 생몰년도: 기원전 154년 ~ 기원전 121년[4]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내인 칼푸르니아의 친정으로 공화정 시대의 대표적인 노빌레스 집안이었다. 아이밀리우스 가문, 폼포니우스 가문 등이 누마 폼필리우스 왕의 후예를 자처했음과는 달리, 여러 근거상 누마 폼필리우스 왕의 후손이 확실해 파트리키 계급이 아니었고, 피소 가문이 원로원에 입성하기 전부터 그 위상이 대단했다. 어느 정도로 대단했는지 공화정 초기에 처음으로 피소 가문 사람이 법무관이 된 직후부터 줄줄이 가문의 남성 및 사위들이 법무관 및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 위세는 서기 3세기 군인황제시대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부자 황제 시절까지 계속 되었다. 이 가문 중 끝까지 위세를 떨친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 가문은 이 집안 출신의 루필리아 파우스티나가 로마가 히스파니아를 장악한 뒤 이곳의 막대한 땅을 소유해 히스파니아로 잠시 이주한 안니우스 가문으로 시집을 간 인연으로, 서기 2세기를 지배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아래에서 그 후손이 황제까지 되었다. 왜냐하면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딸이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황후인 대 파우스티나였고, 요절한 장남의 아들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였으며, 외손녀이자 며느리가 안토니누스 피우스, 대 파우스티나 부부의 막내딸이었던 소 파우스티나 황후였고, 증손자가 악명높은 폭군 콤모두스였기 때문이다.(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외할머니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누나였으며, 이부 언니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황후였던 비비아 사비나였다.) 이런 이유로 부모 모두를 통해 그 가계가 전설시대에 재위한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자랑스럽게 여긴 콤모두스 황제는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집정관에 직접 추천했고,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와 그의 두 아들은 피소 가문을 비롯한 이탈리아 원류 귀족의 후예임을 비문에 새겨 자랑스럽게 여겼다.[5]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대립하며 정쟁을 벌인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배출했고, 그라쿠스 형제 이후 여러 이야기를 낳으며 '고결한 호민관'으로 불린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장인이며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외조부로 본래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풀케르 집안 출신이었으나 외가로 입양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로마 제국의 초대 아우구스타(황후)였던 리비아 드루실라를 배출했다.[6]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대립한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조부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에서 입양되어 왔고, 이후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으로 대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장남이 입양된 역사가 있다. 또 대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장녀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으로 시집간 뒤에 낳은 외손자가 외삼촌이었던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양자로 입양되어 대를 이었고,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가문에서 입양하여 대를 유지했다. 그래서 여느 노빌레스 가문들 이상으로 파트리키 가문들과의 유대가 깊었다.[7] 로마 공화국 최초의 호민관을 배출한 노빌레스 명문으로 에트루리아계 로마 평민 귀족이었다. 근거지는 팔레리, 루카 등의 도시들로 오늘날 토스카나 지방이었으며, 가문의 역사는 로마 건국보다 훨씬 오래된 에트루리아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훗날 서기 3세기경, 에그나티우스 가문과의 연합형태로 군인황제시대에 발레리아누스 및 갈리에누스 부자 황제를 배출했다.[8] Tiberius Sempronius Gracchus. 대(大) 그라쿠스라고도 불린다. 생몰년: 기원전 217년 ~ 기원전 154년[9] Cornelia Scipionis Africana. 생몰년: 기원전 190년경 ~ 기원전 100년. 훗날 로마 여성의 모범으로 존경받았다.[10]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전>, 1장[11] 종종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라고도 불린다.[12] 일설에 따르면 성년식 이전에 요절했다고 한다.[13] 유아기 혹은 유년기에 요절했다.[14] 둘째 아들과 동일인물이라는 주장도 간혹 있으나, 보편적으로는 '가이우스 롱구스'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기원전 90년대 무렵 시칠리아 총독 특사 대리를 지냈으며, 그라쿠스 형제의 종조부였던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롱구스의 친척인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와 입양 혹은 모종의 가족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지냈으며, 그라쿠스 형제의 외가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대귀족인 스키피오 가문과 대척점에 선 클라우디우스 씨족 풀케르 가문의 당주였다.[16] 서기 1세기~2세기 경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아래의 로마 제국에서는 부모가 현직 임페라토르아우구스타일 경우의 황족에게 비슷하게 사용된 관용표현으로 "날 때부터 보라색 천을 두르고 태어난 사람"이 있었다. 이 표현은 카라칼라고르디아누스 3세 같은 황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조부모 및 부모가 연이어 황제 직위 등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가리켰다. 따라서 동시대 사람인 헤로디아누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의 아들이었던 콤모두스가 그 형제였던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와 함께 이렇게 불렸고, 콤모두스가 개선식 당시 주민들에게 불렸음을 서술했다.[17] 한국에서는 주로 '군사호민관'으로 번역되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 호민관과는 전혀 상관없는 군사 지휘관이다. 즉 오역의 폐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시오노 나나미는 '대대장'으로 번역했다. 이쪽도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관련 문단 참고.[18] 전쟁 때문에 농사를 지을수 없다보니 망치는 것은 당연했다.[19] 이에 대응해, 스키피오 가문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자신의 아버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등과 함께 그들 소유 노예들이 결혼해 자녀를 출산하면 그들 가족을 해방시켜주고 폐가를 사들여 고쳐 살게 하면서 그 대가로 표를 늘린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풀케르는 사과를 하면서 선거를 앞두고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다고 했는데, 정작 로마의 서민들은 본인 일가를 넘어 친인척들의 노예까지 이렇게 자유를 주고, 선거구 전체 집까지 사들여 당선을 공고히 한 이들이 더 나쁘면서도 나무란다고 손가락질했다.[20] 훗날 제1차 삼두정치로 유명해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조상이었다.[21] 플루타르코스 지음, 신복룡 옮김,《플루타르코스 영웅전 5》, 서울, 을유문화사, 2021, p.254-255.[22] 관련 유적은 베이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여러 공화정 중기 도기 유물 등에서 확인된다.[23] =공유지, ager publicus[24] 문제는 이 농지법이 이탈리아인(즉 로마 시민이 아닌 이들)에 대해선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탈리아 동맹국의 시민들이 경작하던 토지 대부분이 로마의 공유지였다. 즉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병합된 이탈리아 국가들(훗날 이탈리아 동맹국이 되는)의 영토가 공유지로 편입된 것이다. 기존까지는 로마 당국도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반항하지 않는 한 그냥 공유지에서 농사짓도록 냅뒀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 의해 공유지가 "로마 시민"들에게 재분배되면서 이탈리아인들은 대대로 경작하던 토지를 뜬금없이 빼앗기게 되었다. 또 당시 이탈리아 내의 지주 상당수가 원로원 의원들이 아닌 그냥 이탈리아인들이었던 고로 농지법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토지를 몰수당하는 주 피해자는 부유한 이탈리아인들이 되었다. 당연히 이탈리아인들은 농지법에 반발했지만 로마 시민권이 없는 이들이 반발해 봤자 뭘 할 수는 없었고, 로마 시민권이 없어 농지법의 혜택도 주어지지 않았다. 훗날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 문제를 파악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 이탈리아인들을 달래는 동시에, 농지법의 적용 범위도 넓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자 했지만 그 역시 살해당하면서 없었던 일이 되었다. 결국 여기에다 기존에 로마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로 받고 있었던 차별 대우까지 더해져, 쌓이고 쌓인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폭발한 내전이 동맹시 전쟁이라는 주장이 있다.[25] 실제로도 그들의 기득권을 제한하는터라 찬성할리가 없었다.[26]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옛 친구이기도 한 옥타비우스를 최대한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논쟁할 때 옥타비우스에 대한 인신 공격은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법안에 저촉되는 옥타비우스의 땅값을 개인 재산으로 내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결국 해임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민중들 앞에서 간절히 설득한 뒤 자신의 호민관 직부터 거는 안부터 내밀고, 이걸 거절하자 해임안을 제출했으며, 투표가 진행된 뒤에도 옥타비우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흐르자 투표를 중지시키면서까지 설득했다.[27]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싸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같은 씨족(gens)이긴 했으나 가문은 다른 먼 친척 정도였다. 그래도 카이사르와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어서 퀸투스 폼페이우스의 증손녀가 바로 카이사르의 부인들 중 한 명이었던 폼페이아였다.[28] 이는 티베리우스 자신에 대한 보신책이기도 했다. 원로원을 싫어하는 기사 계급으로 배심원을 구성하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무죄를 선고받을 확률이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배심원단보다 훨씬 높았다.[29] 호민관의 연임이 위법이라는 법률이 있었다고 확실히 증명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연임 시도 이후, 제한적인 상황(후보가 나서지 않는다든지)에 한해 호민관의 연임을 허용한다는 법률이 제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이를 통해 그 이전에는 호민관의 연임이 위법으로 정해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자세한 내용은 허승일의《로마 공화정 연구》참조.[30] 사실 이 관례도 정치적인 면에서 호민관을 원로원 의원의 전단계로 생각했기에, 아무도 연임을 하지 않으려 해서 나온 관례에 불과했다,[31] 티베리우스는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로, 스피키오 나시카 가문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큰아버지의 후손인데다가, 스피키오 나시카의 어머니의 여동생이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였던 코르넬리아였다. 당시 최고의 장군이자 두 번의 집정관, 감찰관 경력을 통해 막대한 권위를 가졌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사촌이었고, 최고 제사장이었던 스키피오 나시카 역시 사촌이었던 것은 티베리우스가 지배계급인 원로원과 얼마만큼 가까웠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티베리우스가 평민들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것은 아이러니하다.[32] 스카이볼라는 그라쿠스의 동지로, 농지개혁법의 법률적인 작성자 중 한 명이었다. 이때 스카이볼라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재판없이 시민을 처형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만약 민중이 티베리우스의 선동이나 강제에 이끌려 불법적인 표결을 강행한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했는데, 스카이볼라마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모습은 당시 그라쿠스의 호민관 연임 시도가 로마 사회에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33] 보통 로마의 최고 제사장은 로마에서 나가는 법이 없었지만, 격노한 민중들을 달래고자 외교 임무를 구실삼아서 스키피오 나시카를 추방시켰다. 그러다보니 나시카는 추방당해서 소아시아를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고(일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의 지지자들에게) 죽었다.[34] 종종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라고도 불린다.[35] 기원전 129년 집정관을 지낸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딸인 동명이인의 셈프로니아와 종종 동일인물로 오해받는 귀부인이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로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친모인 풀비아의 어머니였다. 참고로 동일인물로 종종 오해받고 있는 귀부인 셈프로니아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사람들 중 한 명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의 어머니였다.[36] 개인이름은 미상이다.[37] 셈프로니아의 딸이었는데, 외할아버지 가이우스 그라쿠스 못지 않은 논란의 인물로 당대 로마인에게 평가받았다.[38] 기원전 133년 누만티아 전쟁 말미에 복무.[39] 재무관 시절, 오늘날의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에서 반란군과 교전하면서 물자 보급 역할을 담당했다.[40]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그가 죽은 뒤 14년이 지나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가이우스 마리우스보다 3살 연하였다.[41] 즉, 원로원 의원들의 부패와 횡포 및 이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라는 것을...[42] =《로마인 이야기》식 번역으로는 회계감사관. 각종 서적에서는 재무관[43] 굳이 따지면 호민관은 명예로운 경력/관직의 사다리에 들지 않았다.[44] 그중에서도 당시 형식적인 존재로만 남은 쿠리아 민회(코미티아 쿠리아타)를 빼면 제일 유서깊은 민회이자,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모든 로마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민회였던 켄투리아회(코미티아 켄투리아타)였다.[45] 한 부셸의 약 1/4쯤 되는 곡물에 비숙련 노동자가 받는 하루 품삯의 절반쯤 되는 가격이었다.[46] 다만, 이 조치는 겨우 가문이 세습할 원로원 의석만 유지 중인 평범한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그리 나쁜 조치로 폄훼받지 않았다.[47] 피소 프루기는 명문가 출신이자 인격도 훌륭한 사람이었으며, 필력은 별로라는 혹평을 들었지만 처음으로 체계화된 편년체 로마 역사서를 쓴 사람이었다.[48] 두 사위들 중 한 명은 기원전 130년 집정관이 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였다. 이 사람의 차남은 자녀가 없었던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에게 일찌감치 입양을 가면서, 외가를 물려받게 되는데, 이렇게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법적인 손자이자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아들로 입양된 이가 초대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였던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였다.[49]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이런 전례 때문에 혈통적 본가의 가계가 끊길 위기에 놓이자, 갓 태어난 장남을 아이밀리우스 가문에 입양보냈다. 입양을 가게 된 장남이 젊은 시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술라의 대숙청으로부터 구해준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였다.[50] 그의 가까운 친척인 L. Hostilius Mancinus가 아이밀리아누스의 정적임.[51] 그 이유는 집정관은 해마다 두 명씩 나왔으며 이들은 연임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원로원은 대략 2~30여 명의 전직 집정관을 꾸준히 포함하고 있었다.[52] 아우구스투스는 사실상 로마를 제정으로 만들었지만 겉으로나마 공화정으로 보이길 원했기에 황제라는 칭호를 쓰진 않았다. 대신 제 1시민이란 뜻의 프린켑스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이후 황제들도 '호민관 특권 XX회 갱신'등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종신 호민관 특권을 유지했다.[53] 호민관의 신성불가침도 무시할 수 있는 원로원 최종 권고가 있었지만, 강력한 군사력의 지원을 받는 호민관을 상대로 발동했다간 정치적 정당성은 물론 오히려 원로원이 박살날수도 있기 때문에 발동 자체가 불가능했다.[54] 이런 요구는 도시 국가에선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대부분 민주정으로 바뀌었고 귀족들은 몰락하게 되었다.[55] 키케로는 그의 저서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왕위를 차지하려 시도했는데, 아니 오히려 그는 실제로 수개월간 통치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누만티아를 파괴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훌륭한 인물로 뛰어난 군인이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죽인 평범한 개인 푸블리우스 나시카보다 공화국에 더 유익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하며 티베리우스의 개혁이 공화국을 무너뜨릴 뻔 했다고 비판했다. 다만 키케로는 티베리우스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을 많이 했기에, 그의 의도 자체는 선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56] 하지만 키케로의 성향을 봤을 때 의도가 선해서라기보다는 그냥 티베리우스가 로마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라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57] 하지만 근본적으로 호민관의 존재 자체는 어디까지나 민중파가 원로원 체제가 무너지는 데 있어서 하나의 요소였을 뿐이지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인해 상황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는데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개혁에 무관심했던 원로원이 오히려 더 큰 문제였다.[58] 즉, 공유지를 엘리트층이 점거했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논리는 전제부터 잘못되었다.[59] 이러한 경제 불황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이게 다 원로원 부자들이 공유지 죄다 가져가서 그런 거다!’라며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헌데 ‘엘리트층의 공유지 점유가 문제’란 주제는 이미 공화정 초기부터 평민층 지지를 받고자 하는 정치가들이 자주 들고 나왔던 주제였고, 이것 때문에 심하게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그냥 사회 혼란기에 기회를 노리던 선동정치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도 제기되곤 한다. 물론 중론은 정치적인 의도도 어느 정도 있었되, 기본적으로는 선의를 가진 개혁가였다는 것이긴 하다.[60] 로마 공화국은 이때까지 특히 중부 이탈리아에서의 가파른 인구상승과 그로 인한 인구압 문제를, 정복지에 식민시를 건설해 시민들을 이주시켜 인구압을 분산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의 시기는 로마의 정복전쟁이 끝에 이르던 때였으므로, 더 이상 새로운 식민시를 개척하기가 어려워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는 인구압을 해소하는 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경우 상술되었듯 카푸아, 타렌툼, 카르타고 지역에 대규모 식민시를 건설해 해당 문제에 대응하려 하긴 했다. 그는 특히 카르타고 쪽에 심혈을 기울였다. 본격적으로 삽을 뜨기 전에 제거당하긴 했지만.[61] 실제로 BC 164년부터 BC 136년까지 켄수스상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감소는 실제로 인구가 감소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구 과잉으로 인한 무산계급 증가와, 상술했듯 기원전 2세기 말의 수익성 낮은 전쟁을 피하기 위한 병역기피에 의한 것임이 더 가능성 높아 보인다.[62] 실은 인구의 급증으로 인한.[63] 위에서도 강조했지만, 형제들의 농지법 자체는 당대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농지법이 '또' 시행되는 경우는 후대에 없었다는 의미.[64] 급진적이었던 셈프로니우스 농지법과 달리, 폼페이우스 퇴역병들의 문제로 인해 보수파 군벌 폼페이우스의 힘을 얻은 카이사르는 집정관으로서 원로원 귀족들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보장하는 형태의 율리우스 농지법을 통과시켜 왜곡을 어느 정도 완화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 카이사르가 통과시킨 농지법이 그라쿠스의 농지법이라고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었는데 실은 둘의 법안은 같지는 않았다. 로마인 이야기에도 서술되듯이 그라쿠스 형제가 국유지 임차에 있어 로마 귀족과 동맹시 기득권층의 이해를 크게 건드린 것과 달리, 대부분의 이탈리아 반도 도시민이 로마시민권을 얻은 상황에서 타협적인 내용의 율리우스 농지법이 통과되었다. 그 뒤에는 개선장군인 보수파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에 대한 보상이 있었고, 그 힘으로 평민회 통과가 가능했다.[65] 따라서 원로원 의원들에게 있어선 절대적으로 농지법의 통과를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되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그라쿠스 형제가 이것을 몰랐던 것인지 혹은 의도했던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원로원에게 있어 그들의 계급 자체를 파멸시키는 법안이나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농지 위원회가 해산되지 않고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을 시행했다는 점은 이런 주장이 온당한 평가가 아니라는 반론을 가능하게 한다. 애당초 그라쿠스의 형제의 법안에서 원로원의 사유농지 자체를 불법화한 적이 없다. 이전부터 농지의 임차와 소유의 상한선은 정해져 있었지만 원로원이 일가족과 노예들 명의까지 동원해서 사실상 무제한으로 토지 점유가 이루어졌고, 그라쿠스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임차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상한선을 넘긴 토지도 국가가 돈을 주고 사는 식이였다. 농지법에서 정해진 상한선은 1000유겔룸(= 250헥타르)인데 이게 원로원을 파멸시킬 수준인지는 의문이다.[66] 다만 그라쿠스 형제가 내세운 다른 개혁들은 대부분 이후에도 살아남거나 당대에는 시행되지 않았더라도 나중에 이뤄진다. 특히 곡물법의 경우,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사후 어느 시점에 잠깐 폐지되었다가 사투르니누스가 부활시킨다. 이후 곡물법은 기원전 58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에 의해 무료 배급의 형식으로 바뀌고 제정기까지 이어지면서, 빵과 서커스에서 "빵"을 담당하게 된다.[67]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후삼국시대-고려로의 이행 중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백제고구려의 경우 최상층 집단은 소수는 해외로 자의든 타의든 나가고 국내에 남은 다수는 성씨를 바꾸거나 하여 숨어 살았으나 통일신라의 견고한 골품제 아래에서 상층으로의 진입은 거의 봉쇄된 꼴이었고 극도로 운 좋은 몇몇 외엔 전원 중류 이하 계층으로 편입되었다. 최상층 바로 아래 이전의 삼한 거수국 지배층 혹은 고구려 5부의 일부였던 집단은 역시 상층으로의 진입은 완전 봉쇄되어 전원 중류 이하 계층으로만 살 수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통일신라가 악질 침략국들 마냥 백제와 고구려의 거의 모든 유민을 하류층으로 쑤셔박거나 노예화한 건 아니었으나 여하튼 정치적 권리가 있는 상층으로의 진입을 제도적으로 원천봉쇄한 건 사실이었다. 물론 통일신라라고 인물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무열왕계 왕실이 흡사 그라쿠스 형제처럼 선견지명을 갖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고 꾸준히 애썼으나 로마의 원로원 계급이 민중파의 모든 개혁 시도를 찍어눌렀듯 진골들 또한 가능한 수단을 다 써서 무열왕계 왕실의 모든 개혁 시도를 방해했으며, 끝내 무열왕계 왕실은 진골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68] 물론 그 결과 등장한 원성왕계 왕실이라고 개혁 시도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으나 무열왕계 왕실이 진골들 비위를 꾸준하게 거스르다 어떻게 되었는지 똑똑히 지켜본 이상 근본적인 개혁 시도는 무리였다. 끝내 고구려, 백제 유민들은 동맹시 전쟁 당시 궐기한 이탈리아인들이 그랬듯 한번 봇물이 터지자 서라벌 및 진골 집단에 대한 모든 공물 납부를 거부하며 집단으로 무력 행동에 나서게 되며 그 결과 벌어지는 혼란 상황은 마치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그랬듯 패서의 고구려 유민 왕건이 수습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견훤은 이런 구도에서 기존 체제 파괴자와 경쟁자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술라와 안토니우스가 했던 역할을 한 셈이다.[69] 이슬람 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무아위야 왕조는 겉으로는 다 같이 평등한 이슬람 교도라고 하였으나 그건 말 뿐이었고 실제로는 비아랍계에 대한 꾸준한 차별이 있었다. 아바스 왕조의 등장은 같은 이슬람 교도고 납세는 더 많이 하는데 어째서 정치, 경제, 사회상 권리가 차별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비아랍계들의 강력한 반격 양상을 등에 업었다.[70] 이부분은 그라쿠스 형제의 자업자득적 면이 있는데 동료 호민관인 옥타비우스를 탄핵함으로서 로마 역사상 최초로 호민관의 신성불가침 권리를 같은 호민관이 침해를 한 것이다. 이는 로마정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그라쿠스 형제가 일종의 위험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71] 롱구스(Longus)는 종종 지루한 성격을 가진 진지한 사람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보통 꽤 키가 큰 사람을 지칭해 부모나 형제 중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붙이는 일도 많아, 로마에서 롱구스, 롱기누스는 키가 유난히 큰 아들에게 많이 붙여 이름 뒤에 덧붙여졌다.[72] 사실 대부분의 안토니우스의 자식들을 키운 게 바로 소 옥타비아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아이들을 키운 것도 소 옥타비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