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포에니 전쟁 Third Punic War | ||
시기 | 기원전 149년 ~ 기원전 146년 | |
장소 | 카르타고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80,000명 | 30,000명 |
피해 | 불명 | 거의 전멸 |
결과 | 로마의 최종 승리, 카르타고의 멸망 |
1. 개요
기원전 149년에 발발하여 기원전 146년까지 일어난 로마 공화국과 카르타고 공화국의 최후의 전쟁으로, 118년에 걸친 장대한 포에니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다.이 전쟁의 결과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했다. 그리고 로마는 패망한 카르타고의 풍요로운 영토를 식민지로 접수하면서 지중해의 절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2. 배경
두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연패하면서 카르타고는 서부 지중해 패자의 위상을 완전히 상실했다.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로마를 멸망시킬 뻔한 만큼 불리한 조건에 강화를 맺으면서 해군을 해체, 육군 축소, (이미 점령당했지만) 모든 해외 영토의 소유권을 로마에게 완전히 넘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카르타고는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에게 엄청난 공포를 안겨주었다 보니 로마인들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나마 스키피오 나시카 등의 온건파는 카르타고의 존속을 주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차라리 카르타고가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정말로 로마의 자비 없이는 당장 내일 끼니조차 걱정해야 할 정도로 빈곤한 신세가 되었다면 그나마 국체는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의 개척으로 인한 풍부한 농업 생산력과 지리적 위치에 기인한 뛰어난 해상 무역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부유했고, 이것이 멸망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카르타고는 부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로마인들은 이러한 부가 다시금 카르타고가 강성해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2.1. 로마와 그리스
한동안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었다.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로마는 다음 목표로 풍요로운 동방에 위치한 헬레니즘 국가들을 노리고 그리스인들의 분쟁에 개입하여 그리스에서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기원전 190년 로마는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대왕')의 치세 하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셀레우코스 제국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격파하면서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패권을 확립했고, 패권하에 들어온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일대의 군소국가들을 상대로 온건주의적인 외교를 추진했다. 당시 로마 원로원 내에는 스키피오 가문을 위시한 온건파가 많았고, 또한 온건주의 외교는 이탈리아 반도 내의 동맹시를 다루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온건주의 외교 노선은 로마 문화의 전통인 파트로누스 - 클리엔테스 관계를 국가 간에 적용한 것으로 로마가 파트로누스 역할을 하고, 동맹시들이 클리엔테스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 관계에서 로마는 동맹시들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동맹시들은 로마에게 지원을 해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에서 전제되는 것은 동맹시들이 로마의 패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는 상당히 느슨한 관계였는데 이탈리아 반도 내의 도시국가들은 로마와 수백년간 전쟁을 했으므로 로마의 군사적 강력함을 알고 있었고, 또한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므로 이 관계를 훌륭하게 유지해왔다.
때문에 로마는 그들의 온건한 외교 노선을 신뢰하고 있었고, 따라서 새롭게 패권 하에 들어온 동방의 그리스 국가들에게도 같은 노선을 적용시켰다. 하지만 그리스는 이탈리아 도시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로마와 전쟁을 해본 경험도 별로 없는데다가 지리적으로도 이탈리아 도시들에 비해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로마를 그다지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한 파트로누스 - 클리엔테스 관계라는 것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리스인들은 개인주의적인 사상이 매우 강했고, 이것은 그리스 철학의 발달 등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많은 도시들에서 귀족은 몰락했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하고 있었다. 강력한 가문이 뒤를 봐주고 그의 서포트가 된다는 식의 로마식 전통을 이해할 리 없었다. 때문에 그리스의 도시들은 자발적으로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또한 로마의 온건한 외교를 로마인들이 그리스인들의 우수한 문화에 열등의식을 느껴 비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1]
그 결과 그리스인들은 로마인들에 대해 상당히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물론, 사사건건 군사적으로 반발하려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새로 손에 넣은 도시들이 당연히 클리엔테스의 책임을 다할 줄 알았던 로마에겐 뜻밖이었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지친 로마인들은 온건주의 외교노선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로마 시민들은 이렇게 반발할 때마다 전쟁터에 끌려가야했기 때문에 그리스의 잦은 반발에 대해 꽤 분개하고 있었다.
발레리우스 가문은 명웅변가 대 카토를 내세워 이러한 여론에 편승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발레리우스 가문이 영향력을 확대하자 온건주의 노선이었던 스키피오 일족이 속한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이러는 과정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탄핵당해 실각하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원로원 내의 대 카토의 영향력은 확대되었고, 이것이 시민들의 호응을 얻자 로마는 점점 강경 노선 외교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정계의 중심인물로 부상한 대 카토는 두 가지로 유명하였는데, 첫 번째로 그리스 문화를 매우 혐오하는 태도를 보였고, 두 번째로 카르타고를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카르타고와 별로 관련이 없는 연설에서도 "Carthago delenda est."(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합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2.2. 누미디아와의 전쟁
한편 로마가 이렇게 한 눈을 팔고 사이 카르타고는 다시 재건에 들어가 부유해지기 시작했고, 로마의 정세 변화를 지켜보던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는 자신의 왕국을 넓히기 위해 바로 옆에 붙어있었던 카르타고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의 침략과 약탈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었으므로 로마에게 군사행동의 허가를 요청했으나 로마는 당연히 카르타고의 요청을 반려했고, 이로 인해 카르타고 내에서는 누미디아가 로마라는 뒷배를 업고 저러는 것이라는 반누미디아, 반로마 감정이 강해지기 시작했다.누미디아의 이어지는 침공을 견디다 못한 카르타고는 로마와 맺은 조약을 무시하고 군사적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한 후 대규모 용병을 모집해서 2만 5천 명의 병력으로 누미디아군에 맞서 싸웠지만,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무력화된 카르타고군은 오히려 오로스코파 전투에서 누미디아군에게 패배했다.[2] 패배한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에 50년간 배상금을 주기로 했고 누미디아군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소식을 들은 로마 원로원은 즉시 무단으로 전쟁을 벌인 카르타고에게 조약을 어겼다며 선전포고를 결의했다.[3]
2.3. 강화 결렬, 순진한 외교의 최후
카르타고는 로마 원로원에게 사절을 여러차례 보내 사과하며 앞으로는 강화를 준수하겠다고 했고, 로마는 카르타고 전체의 무기 몰수와 새로운 배상금 부과 등 다양한 압박을 가했지만 카르타고는 반전 여론이 팽배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로마가 내세우는 여러 가지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다. 로마는 이 조건대로 10만 벌에 달하는 무기와 배상금을 넘겨받자 더욱 중대한 조건을 내놓았는데, 선전포고 철회의 대가로 수도를 파괴하고 모든 주민들을 해안에서 15km 밖으로 이주하라고 협박했다. 카르타고 사절들은 이것은 해상 무역으로 먹고 사는 카르타고를 죽이는 것이라고 항의했으나 로마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일 뿐이라며 최후 통첩 후 이들을 돌려보냈다.카르타고 사절의 절반 이상은 이 조건을 전해들은 카르타고 시민들이 자신들에게 분노를 터트릴 것이 두려워 카르타고로 돌아가는 중에 다른 나라로 달아나버렸고, 과연 카르타고 시민들은 이 조건을 듣자마자 분노하며 귀국한 사절들도 매국노로 간주해 모두 처형한 뒤[4] 로마와 전쟁을 결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미 승패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카르타고의 멸망이라는 결론이 나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고, 카르타고인들은 그들의 손으로 자신들의 도시를 파괴해 굴욕감과 비참함을 맛보느니, 끝까지 로마인들과 싸우다 죽는 것을 택한 것에 불과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었다.
3. 카르타고 공방전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로마군은 카르타고 시를 포위해 공성전을 감행했다. 카르타고는 지도자가 된 하스드루발의 지도하에 자신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대규모 징병까지 감행하여 3만 명의 병력을 채웠고, 도시 안의 모든 조병창을 가동하여 재무장했지만 여전히 로마군을 상대로 승산은 없었다.
카르타고의 힘줄을 끊어놓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만큼은 아니더라도, 마지막 숨통을 끊는 것 역시 결코 작지 않은 명예가 될 것이었다. 제2의 아프리카누스를 노린 로마의 집정관들이 무려 8만 명이나 되는 병력으로 맹공을 퍼부었지만, 하스드루발과 카르타고인들은 아예 살아남으려는 생각 없이 처절하게 항전하며 3년이나 버텨냈다. 완전히 고립된 도시에서 어떤 면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던 로마군을 상대로 이만큼이나 버틴 것은 물론 대단했으나, 적을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라 죽더라도 한 명의 로마인을 더 데리고 가겠다는 심정으로 항전하여 그저 하루하루 파멸을 늦추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 입장에서도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며 완전히 고립시킨 적을 상대로 3년씩이나 결판을 내지 못하는 것은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장기전 양상으로 흘러가면서 엄청난 시간과 인력, 물자가 소모되었고, 로마 시민들의 전쟁에 대한 피로감 역시 계속해서 심화된 그 결과 집정관 자격 연령에 약간 미달했을지언정 카르타고 포위전의 첫 2년 동안 다른 지휘관들보다 확연히 나은 활약을 보여 준, 아프리카누스의 처조카이자 양손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여 지휘를 맡겼다. 원칙을 어겨가면서 뽑아줬을 정도로 기대가 크니, 그 기대에 부응해 반드시 카르타고를 끝장내라는 의사표시였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총지휘를 맡은 로마군은 집요하게 공격을 지속했고, 결국 전쟁 3년차에 성벽이 드디어 뚫렸다. 성벽을 넘어선 로마군을 기다리는 것은 도시 전체에서 목숨을 버리고 달려드는 카르타고 시민들이었다. 수많은 카르타고 시민들이 싸우다가 죽는 길을 택했고, 학살과 자결이 더해지면서 희생자의 수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5] 성을 함락한 로마군은 카르타고인이 처절하게 저항하자 더욱 거세게 공격하여 무자비한 대학살을 벌였기에 마지막 저항까지 쓰러져 갈 무렵에는 하스드루발이 남은 시민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로마군에게 항복했고[6]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받아들이면서 처절하고 잔혹했던 전투는 끝이 났다. 결국 살아남은 카르타고인은 고작 50,000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 또한 노예로 전락했다. 이렇게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는 멸망하고 말았다.
4. 전쟁 이후의 이야기
한때 수백 년 동안 지중해를 호령했던 해양민족 카르타고의 본거지는 다시금 일어날 수도 없도록 로마에 의해 17일간 남김없이 초토화되었고,[7] 한동안 폐허뿐인 황무지로 방치되었다.[8][9]한편, 북아프리카의 풍요롭고 비옥한 농지는 라티푼디움으로 바뀌어 로마 귀족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 주었지만, 또 다른 갈등의 단초를 남기고 말았다.
5. 여담
- 전설에 따르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멸망하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트로이[10]의 멸망을 예견하는 《일리아스》의 한 구절을 읊으면서, 언젠가는 로마 역시 카르타고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작 로마는 점차 성장해서 로마 제국으로 개편된 뒤, 오현제 치세 하에 유럽 역사상 최고의 제국이 되었다. 카르타고 멸망 후 짧게 보면 640년 뒤, 길게 보면 1600년 뒤에나 멸망했지만, 이 두 번의 멸망 또한 카르타고의 그것처럼 정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는 파멸은 아니었다.
- 같은 해에 그리스에서 세 번째로 큰 대도시인 코린토스도 카르타고와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에 의해 멸망했다.(아카이아 전쟁)[11] 그리고 기원전 133년에는 이베리아 반도 켈티베리아 지방의 도시인 누만티아도 두 도시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누만티아 전쟁)
- 1985년 1월 이탈리아의 로마 시장이자 이탈리아 공산당의 당원이었던 우고 베테레와 튀니지의 튀니스(현재의 카르타고) 시장 체드리 쿠리빈이 만나 공식적으로 전쟁 종결식을 열고 서명하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 이탈리아와 튀니지의 관계 개선을 위한 퍼포먼스이지 카르타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많은 역사상의 국가들이 별도의 종전 선언 없이 멸망한 만큼 실제 정치학적, 법적인 '종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학술적으로도 제3차 포에니 전쟁을 기원전 149년부터 1985년까지 2100년 가까이 이어졌다고 판단하는 역사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뿐만 아니라 현대 이탈리아와 튀니지는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처럼 라틴계와 페니키아인의 나라가 아니라 인종이 복잡하게 뒤섞인 상태인데다 그들을 직접적으로 계승하는 것 또한 아니기에 큰 의미가 없다.
[1] 그리스인들은 로마가 우리를 군사적으로 정복했으나, 우리는 로마를 문화적으로 정복했다고 자화자찬했다.[2] 《먼나라 이웃나라》 6편인 <이탈리아> 편에서는 정반대로 누미디아군이 완파당했다고 잘못 나와 있다.[3] 이집트의 역사가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마시니사는 로마가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인 것에 오히려 격분했다고 한다. 카르타고의 영역을 장기적으로 갉아먹어 종국에는 북아프리카의 패권을 확립하려던 자신의 야망이 로마의 개입으로 인해 좌절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그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 단 한 명의 누미디아군 병사도 파견하지 않았으며, 노골적으로 로마에 불만을 표시하다가 기원전 148년에 승하했다.[4] 이 사절들이 카르타고 내에서 로마와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 뒤 시민들을 설득해 사절로 간 비둘기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대화로 해결하자고 하더니 국가 멸망 통보라는 처참한 성적표만 받아들고 돌아온 것에 대해 카르타고 시민들이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5] 이원복 화백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군이 패배한 카르타고인들의 용맹을 기려 생존자들을 살려주고 이주를 허락했다고 잘못 나와 있다. 이원복 교수도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 알고 있음을 인지했는지 이원복 교수의 만화로 보는 세계사에서는 이런 말이 없다.[6] 하스드루발의 아내와 아들 2명은 노예가 되기보다는 불타는 신전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항복한 하스드루발은 로마로 끌려가서 노예가 되었지만 별탈없이 잘 살았다.[7] 어찌나 철저하게 때려부쉈는지, 오늘날 제정 로마 시절 유적이면 모를까 도시국가 카르타고 시절 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카르타고에 두 번 다시 농작물이 자랄 수 없도록 땅에 소금을 뿌렸다는 말이 유명하다. 다만 실제로는 그를 증명할 당시 사료가 없어서 중세쯤에 만들어진 말로 보인다. #[8] 카르타고는 기원전 150년에 인구 250,000명의 엄청난 대도시였으며, 풍요로운 곡창 지대는 물론 지중해의 한가운데라 유리한 교역 거점이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이런 도시를 점령했으면 거주민은 노예로 팔아버리거나 죽이더라도, 도시 자체는 이주민을 보내서 살리는 게 효율이 좋은데, 그런 것조차 감히 할 수 없을 정도로, 로마가 점령한 도시 중에서도 제일 철저하게 때려부숴야 할 정도로 로마인에게 있어 카르타고는 저주스러운 이름이었던 것이다.[9] 이후 100여 년 뒤 로마가 카르타고에 대한 강박관념을 떨쳐낸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재건을 시작했고, 50년 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재건을 끝마친 뒤에는 로마 제국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어 5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아프리카 속주의 주도로 재편되었으며, 이후로도 카르타고는 이슬람의 침공 이전까지 북아프리카의 주요한 항구 도시로서 번영했다.[10]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를 시조로 삼은 나라이기도 하며, 그 아이네이아스가 카르타고를 떠날 때 내린 디도 여왕의 저주 역시 카르타고가 멸망함으로서 끝나게 되었다.[11] 그래서 각 연도별 영역을 다루는 영상을 보면 기원전 146년에 그리스와 카르타고가 점령당하면서 급속하게 로마 공화국의 영역이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