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9 21:44:47

티레 공방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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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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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32년 1월~8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아제밀쿠스(Azemilcus)가 이끄는 티레를 포위 공격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2. 배경

기원전 333년 11월 이소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뒤, 알렉산드로스 3세는 페니키아로 진군해 비블로스시돈의 항복을 받아냈다. 특히 페르시아인을 싫어했던 시돈 시민들은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에 우호적인 태수를 내쫓고 대신 아브달로니무스 왕을 앉힌 것에 고마워하며 도시에 입성할 것을 적극 청했다. 이후 티레로 진군하던 그는 티레에서 온 사절단을 만났고,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기로 결정했음을 전달받았다. 사절단 중에는 티레에서 가장 명망 있는 가문 출신들과 티레의 왕 아제밀쿠스의 아들도 끼여 있었다. 당시 아제밀쿠스는 아우토프라다테스와 함께 항해를 떠나 티레를 비워놓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사절단에게 감사를 표한 뒤, 자신이 티레에 들어가서 헤라클레스에게 제의를 올리고 싶다는 뜻을 시민들에게 전하게 했다. 티레의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와 알크메네의 아들이자 그리스 신화의 대표적인 영웅 헤라클레스가 아니라, 페니키아인들이 주신으로 섬기는 바알이었다(멜카르트라고도 한다). 그리스인들은 티레의 바알 신전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헤라클레스 신전이라 여겼는데, 알렉산드로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사절단이 돌아가서 그의 요구를 시민들에게 전하자, 티레 시민들은 페르시아인이나 마케도니아인을 성벽 안으로 들이는 것만은 강력히 거부했다. 마케도니아-페르시아 전쟁의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것만이 안전을 확보하는 최선의 길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이 결정을 전해들은 알렉산드로스는 분노해 사절단을 돌려보낸 뒤, 헤타이로이와 각 부대의 장교들을 불러 자신의 뜻을 전했다.
친구이자 전우여, 페르시아가 바다를 장악하고 있는 한 우리는 무사히 이집트로 진군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또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티레를 후방에 남겨두고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적의 수중에 방치한 채 다리우스를 쫓는다면 현재 그리스의 상황을 고려할 때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우리 군이 바빌론 내륙 깊숙한 곳에서 다리우스를 쫓는 동안 페르시아군이 해안 지역을 수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전장을 그리스로 옮길 수도 있다. 그리스에서 스파르타는 이미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고, 현재 아테네는 호의가 아닌 두려움 때문에 마지못해 우리 편을 들고 있는 동맹국일 뿐이다.

하지만 티레를 무너뜨리면 페니키아 전체가 우리 차지가 될 것이고,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페르시아 해군의 주축인 페니키아 함대가 우리에게 넘어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신들의 도시가 우리 수중에 들어오면 페니키아의 수병과 선원 혹은 병사들로서는 다른 도시를 위해 싸우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차례는 키프로스가 될 것이다. 키프로스는 별 어려움 없이 우리 편이 되거나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키프로스, 마케도니아, 페니키아의 연합함대를 얻는다면 해상의 패권을 보장받을 것이며, 이집트 원정도 수월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집트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에 대해 불안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본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명성을 드높이며 바다뿐 아니라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대륙 전체에서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바빌론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알렉산드로스는 티레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중에서 가장 고된 공성전으로 손꼽히는 티레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기원전 332년 1월, 알렉산드로스는 전군을 이끌고 티레로 진군했다. 티레는 육지의 구 도시와 신 도시로 나뉘었는데, 신 도시는 '티레 섬'이라는, 육지와 700~800m 떨어진 섬에 요새처럼 형성된 도시였다. 이 도시는 바다가 해자처럼 도시를 둘러싸고 있어서 접근이 지극히 어려웠다. 게다가 페르시아가 바다를 장악하고 있고 티레의 함대도 강력했기에, 해상 공격은 시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해상 공격이 힘들다면 섬과 육지를 연결한 뒤 육군으로 공격하면 된다고 판단하고, 구 도시를 허문 뒤 거기서 나온 돌로 본토 해안과 섬 사이의 얕은 해협에 제방을 쌓기로 했다.

해협에서 본토의 해안 쪽은 얕은 개펄이었지만, 도시와 가까운 쪽은 수심이 깊어서 거의 3패덤(fathom: 수심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단위. 1패덤은 1.83미터 정도이다)에 이르렀다. 돌과 목재를 진흙 속에 단단히 박아넣는 형태로 제방을 쌓았는데, 알렉산드로스는 항상 현장에 나와 작업을 정확히 지시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성과가 두드러진 경우에는 특별한 보상까지 베풀었다. 해안 쪽에 제방을 쌓을 때는 물이 얕았으며 적의 방해도 없었다. 티레 측은 그가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한다며 비웃었다. 한 번은 배 한 척이 다가와서 "당신이 포세이돈도 못할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요?"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방이 점점 섬 쪽으로 다가가자, 그들은 이러다가 큰일나겠다고 판단하고 반격에 착수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무장도 하지 않은 작업복 차림이어서, 티레군이 배를 타고 제방 여러 곳에 화살을 퍼부을 때 큰 피해를 입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막고자 제방에 두 개의 탑을 세우고, 그 위에 투석기를 배치했다. 그리고 화공에 대비하고 탑을 지키는 병사들이 화살에 맞지 않도록 가죽으로 탑을 씌웠다. 탑 위의 장병들은 제방에서 일하는 병사들을 공격하는 적을 투석기로 공격해 몰아냈다. 그러나 티레군도 곧 대응책을 찾아냈다. 그들은 가축을 실어 나르는 배에다 마른 땔나무와 불이 잘 붙는 갖가지 목재들을 가득 싣고 뱃머리에 두 개의 돛대를 세웠다. 그리고 역청, 황 등의 인화 물질을 가득 실어서 뱃전의 사방에 울타리를 최대한 높이 세웠다. 두 개의 돛대 사이에는 보통 길이의 두 배에 달하는 활대를 가로로 덧대고 그 위에 큰 솥을 걸었다. 솥 안에는 거센 불길을 일으키는 물질들을 가득 담았다. 마지막으로, 뱃머리를 최대한 높이 들어올리기 위해 고물 쪽에 무거운 바닥짐을 실었다.

이후 순풍이 불자, 티레군은 여러 척의 트리에레스 선들에다 이 화공선을 굵은 밧줄로 묶어서 제방 쪽으로 끌고 갔다. 두 개의 탑 근처에 이른 그들은 화공선에 불을 붙였고, 트리에레스 선의 수병들은 불타는 배를 힘껏 밀어 제방 가장자리로 충돌시켰다. 화공선에 타고 있던 병사들은 제방에 부딪치기 전에 물 속으로 뛰어들어 안전한 곳으로 헤엄쳤다. 탑들은 곧 맹렬한 화염에 휩싸였고, 트리에레스 선들이 제방 근처에 머문 채 인화 물질을 쏘아댔기 때문에 아무도 불을 끄기 위해 접근할 수 없었다. 탑에 불이 붙자, 도시에 있던 티레군이 몰려나와 배를 타고 제방의 이곳저곳을 공격했다. 그들은 제방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울타리를 순식간에 망가뜨렸고, 이제껏 공격으로부터 안전했던 공성 장비들까지 모두 불태웠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포기하지 않고 해안 쪽부터 제방을 다시 쌓으라고 명령했다. 이번에는 더 많은 탑을 세울 수 있도록 더 넓게 제방을 쌓기로 했다. 그러는 한편 배가 없이는 티레를 공략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근위대와 아그리아니아군을 데리고 시돈으로 떠났다. 그는 곧 시돈의 전함과 비블로스의 전함을 합해 약 80척의 페니키아 함대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로도스의 정찰선과 그외의 배 9척, 솔리와 말루스의 배 3척, 리키아의 배 10척, 안드로니코스의 아들 프로테아스가 지휘하는 50개의 노가 달린 마케도니아 갤리선 1척도 합류했다. 여기에 키프로스 섬에서는 이소스 전투 소식을 전해들은 뒤 120여 척의 배로 이뤄진 함대를 이끌고 시돈으로 가서 알렉산드로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한편, 코엘레-시리아 계곡 동쪽의 안틸리바누스 산 주민들은 뗏목과 탑을 만들 목재를 모으는 마케도니아 병사 30여 명을 살해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대, 근위대, 아그리아니아인, 궁수들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향하여 열흘 만에 무력과 협상을 병행해 부근 지역을 정복한 뒤 시돈으로 돌아왔다. 함대가 충분히 갖춰지자, 그는 티레를 공격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병사를 배에 태웠다. 함대는 밀집 대형으로 티레를 향해 진격했다. 티레군은 알렉산드로스가 바다에서 공격해오면 맞서 싸울 작정이었으나, 키프로스와 페니키아 배들이 모두 알렉산드로스 함대에 합류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자 항구로 후퇴하여 입구를 틀어막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도시에서 약간 떨어진 바다에 멈춰서 싸움을 유도했으나 적이 응하지 않자, 도시 주변의 티레 함대를 몰아낸 뒤 제방에서 그리 멀지 않고 바람도 피할 만한 해안에 정박했다. 다음날, 안드로마코스가 지휘하는 키프로스 파견대는 북쪽 항구를 봉쇄했고, 페니키아군은 제방 맞은편 남쪽 항구를 봉쇄했다. 이후 제방 공사를 다시 실시해, 오래지 않아 섬과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알렉산드로스는 제방 뿐만 아니라 성벽 근처에 자리를 잡은 배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티레군은 제방이 내려다보이는 성벽에 방어용 목탑을 여러 채 세워 공성 장비가 위협을 가할 때마다 투석 무기로 대응했고, 배가 다가오면 불화살을 쏘아 적선이 사정거리 안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위협했다. 또한 제방 맞은편에는 높이가 약 46m에 두께도 그에 비례하는 탄탄한 성벽이 버티고 있어서 좀처럼 허물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공성 장비를 수송선들에 싣고 그 주변에 트리에레스 선을 배치해 공격을 이어갔으나, 티레군이 돌덩어리들을 바다에 던져서 진로를 방해하는 바람에 여의치 않았다. 이 돌덩어리들을 제거하려 했지만, 티레군이 특수 장갑선을 타고 트리에레스 선의 뱃머리 쪽으로 다가와 닻줄을 끊는 바람에 배들이 제자리에 있을 수 없어서 제거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노가 30개인 여러 갤리선에 티레의 배와 비슷한 방어용 철갑을 입혀 트리에레스 선의 닻줄 앞을 가로막는 식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자 티레군은 잠수부들을 내보내 바다를 헤엄쳐서 닻줄을 끊어버리게 했다. 마케도니아군은 밧줄을 쇠사슬로 바꾸는 것으로 대응했고, 잠수부들은 이것만큼은 끊을 수 없었다. 그 후 마케도니아군은 돌덩어리에 쇠사슬을 묶어 제방에서 끌어당긴 다음 거중기로 들어올려 배가 다니는 데 방해되지 않는 깊은 바다에 버렸다. 이렇게 장애물들을 걷어내자, 배들은 어려움 없이 성벽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티레군은 북쪽 항구를 봉쇄하고 있는 키프로스 파견대를 급습하기로 했다. 그들은 항구 입구에 돛들을 활짝 펼친 뒤, 한낮이 되어 그리스 배 수병들이 저마다 맡은 일을 하기 위해 흩어지고 알렉산드로스도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을 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티레군은 5단 갤리선 3척, 4단 갤리선 3척, 트리에레스 선 7척에 정예병들을 태우고 일렬로 항구를 빠져나가 침묵 속에 노를 젓다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맹렬하게 노를 저어 최고 속력으로 적에게 돌진했다. 이 기습공격으로 페니키아 파견대 소속 함선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노획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도시 남쪽에 있는 전 함대에게 전투 준비를 갖추고 남쪽 항구 앞쪽에 진을 쳐서 적이 남쪽 항구에서 나오지 못하게 한 뒤, 자신은 직접 5단 갤리선을 타고서 트리에레스 선 5~6척을 거느리고 북쪽 항구로 항해했다.

성벽에서 이걸 목격한 티레군은 아군 병사들에게 항구로 돌아오라고 외쳤다. 그러나 전투 소음이 너무 커서 목소리가 묻혀버리자, 안전한 곳으로 철수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티레의 수병들이 항구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고, 가까스로 항구로 피한 몇 척 외의 대부분의 배는 알렉산드로스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파손되었으며, 5단 갤리선 1척과 4단 갤리선 1척은 항구 입구에서 붙잡혔다. 배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배를 버리고 바다에 뛰어들어 항구로 헤엄쳐 달아났기에, 티레군의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다.

이후 티레 함대는 더 이상 출격하지 않았지만, 마케도니아군이 동원한 공성 장비는 티레의 성벽을 뚫지 못했다. 도시 북쪽에서도 공성 장비를 실은 많은 배가 공격을 전개했지만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배를 타고 성의 남쪽으로 항해하다가 성벽이 약한 지점을 찾아내고, 그곳을 집중 공격해 넓지 않은 틈을 만들어냈다. 그는 즉시 육군을 상륙시켜 그 틈새에 공격을 가했지만, 상륙한 부대는 티레군에게 격퇴되었다. 하지만 여기를 집중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 알렉산드로스는 사흘 뒤 배에 실은 공성 장비들을 총동원하여 그 부근에 공격을 퍼붓게 했다. 이리하여 성벽에 충분한 틈이 만들어지자,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배를 철수시킨 뒤 현문을 설치한 배 2척을 출동시켜 성벽 틈에 다리를 놓게 했다. 배 한 척에는 아드메토스가 지휘하는 근위대가, 다른 배에는 코이노스가 지휘하는 중보병대가 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근위대와 함께 무너진 성벽으로 기어 오를 준비를 했다.

한편 트리에레스 선 일부를 두 항구 쪽으로 보내 적들이 다른 지점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할 때 항구 입구로 밀고 들어가도록 했다. 궁수들이 타고 있거나 투석 무기를 실은 다른 배들에게는 섬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성벽에 접근할 수 있는 곳을 노리고, 접근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사정거리 밖에서 정박한 채 모든 방향에서 티레 수비대를 향해 투석 무기를 발사하도록 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뒤 공격을 개시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배들이 무너진 성벽 밑에 도착하자, 근위대 병사들은 현문에서 내린 뒤 돌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과 함께 싸우면서도 적의 동태를 면밀히 살폈다. 아드메토스는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이끌다가 성벽을 오르던 중 창에 찔려 전사했지만,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가던 알렉산드로스가 무너진 성벽을 점령했다. 일부 탑들과 그 사이의 성벽을 장악한 그는 도시로 향하는 길로 보이는 흉벽을 지나 왕궁으로 진격했다.

한편, 남쪽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페니키아군이 수비용 방책을 박살내고 진입해 일부 적선을 들이받아 침수시켰고, 다른 배들을 해안으로 몰아냈다. 키프로스 함대는 북쪽에서 침투해 들어가 항구를 장악했다. 티레 수비대는 알렉산드로스가 성안으로 들어가자 성벽을 포기하고 아게노르[1]의 신전으로 물러나 항전하려 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근위대를 이끌고 접근해오자 일부는 싸우고 일부는 달아났다. 그 후 항구에서 내린 해병들이 그와 합세했고, 코이노스의 대대도 도시 안에 들어갔다. 이후 처참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332년 1월부터 8월까지 7개월에 걸친 기나긴 공성을 치렀던 장병들은 자신들을 고생시킨 티레인들에게 처절한 응징을 가했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티레 병사 8,000명이 전사했으며, 마케도니아군 40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티레의 왕 아제밀쿠스는 도시의 고관들 및 카르타고의 사절들과 함께 신전으로 피신했다. 알렉산드로스가 그곳에 이르자, 아제밀쿠스는 무릎을 꿇고 자비를 호소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너그럽게 용서해줬다. 그러나 티레 시민들의 운명은 처참했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티레 시민과 외국인 3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1만 3천 명이 노예로 팔렸고 2,000명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한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에 따르면, 시돈인들이 같은 페니키아인인 티레의 운명을 딱하게 여겨 시민 1만 5천 명을 안전한 곳으로 몰래 피신시켰다고 하나, 현대 역사가들은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알렉산드로스는 헤라클레스에게 제물을 바치고 완전군장을 갖춘 병사들의 거리 행진을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함대도 참여했으며, 신전 안에서 운동경기와 횃불계주도 열렸다.

이리하여 페니키아인들의 최대의 도시였던 티레를 무너뜨린 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로부터 1만 달란트를 지불할 테니 아내와 아이들을 돌려주고, 유프라테스 강 서쪽부터 에게 해까지의 영토 전부를 내줄 것이며, 자신의 딸을 줄 테니 혼사로써 페르시아와 우호적인 동맹관계를 맺자는 제안을 받았다. 파르메니온이 "제가 왕이라면 이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파르메니온이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나는 알렉산드로스이니 다리우스에게 다른 답을 내놓겠다."라고 응수했다. 그 후 다리우스의 제안을 깨끗이 거부한 그는 이집트로 남하하여 시리아 팔레스타인 일대의 해안 도시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다가 페니키아에서 이집트로 향하는 경로의 마지막 도시인 가자에서 입성을 거부당하면서, 가자 공방전을 벌였다.


[1] 티레와 시돈의 창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