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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공무술|특공무술]]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용무술인 특공무술의 창시자 논란을 정리한 문서.2. 창시자 논란
아직도 특공무술은 창시자, 명칭, 기술 문제를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 정체성과 관련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특공무술' 자체의 창시는 장수옥 총재가 군용무술을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특공무술은 77년 대한민국최초대테러부대(606특공부대)가 만들어지면서 특공부대에 맞는 무술을 만들었고 부대가 특공부대이었기에 특공부대 특공사격 특공장애물등 그래서 부대원들이 특공무술이라고 하였고 이를 당시 차지철경호실장에게 보고 하였고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정희대통령께 보고 하여 무명(武名) 특공무술이 탄생하게 되었다 여기서 위험한 기술 등 여러 요소를 개편하고 바꾼 것은 협회마다 기술이 다르고 품새 또한 다르다. 때문에 특공무술을 생활 스포츠나 건강 등 일반인도 편하게 즐길 수 있게 개편한 것은 협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논문 참조.[1]
하지만 군용 무술의 특성상 이런 창시자나 계보 논쟁은 무의미하다. 특공무술은 군대에서, 또는 부대의 특성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파편화된 특공무술 단체들도 뿌리는 군대에서 특공무술을 배운 사람들이 전역하고 도장을 만든 것이다. 그 1세대가 도장을 만든 시점에서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기술 체계가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의 연장선에서 현재 일반인이 군대 외부에서 배울 수 있는 특공무술은 과거의 특공무술이 생활체육화한 것이다. 현 한국군은 무사트 같은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만들거나, 크라브 마가 같은 외국 무술을 들여온 시점에서, 과거 군용무술이 지금 특공무술 도장에서 가르치는 무술과 동일하진 않을 것이다.
특공무술이 협회가 난립하고 서로가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각각 특수부대들에서 배우던 특공무술 버전과 기술이 다르고 사회로 나오면서 전역자들이 새롭게 정리한 기술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2.1. 특전사
70년대 당시 대통령경호실에서는 유도, 태권도, 합기도, 검도를 수련했고, 군대에서는 태권도가 전군에 보급되었으며, 606특공부대의 군소속인 특전사에서는 '특전무술'이라는 명칭으로 총검술 등을 훈련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테러 특공작전에 투입될 606특공부대는 경호실이나 군에서 수련하고 있는 무술보다 더욱 실전적인 공격술, 방어술, 응용 기술이 추가된 무술이 필요했다.한국특공무술협회
대한민국특공무술협회
제606특공부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1978년 6월 1일에 창설된 특전사 소속 606부대는, 1978년 7월 2일 대통령경호실에 배속되어 국내 최초의 항공기 대테러를 목적으로 비밀리에 운용되었다. 그리고 606부대에서는 기존 무술들의 장점을 합한 실전 종합무술로서 특공무술을 만들었다.
특공무술은 경호무도의 특성을 가지고 개발되었다. 606특공부대원들은 대통령경호실 소속 특공부대의 일원으로 특공무술을 개발했고, 이에 특공무술은 개발단계부터 경호무도로서의 특성을 포함하게 되었다.
606특공부대의 특공무술은 군과 경호실로 나뉘어 발전했다. 군에서는 제5공수특전여단에 의해 새롭게 구성한 국방무술로 보급되었고, 대통령경호실에서는 기존에 수련하던 합기도를 특공무술로 교체하여 보급되었다.
따라서 개발 과정으로 볼 때, 특공무술은 어느 한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부대차원에서 체계화한 것이다.
제5공수특전여단
606부대의 특공무술과 달리, 제5공수특전여단의 특공무술은 장병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기술체계의 간소화, 태권도 비중 증대, 전투복 착용 등에서 차이가 났다. 그렇기 때문에 군에 보급된 특공무술은 606부대의 특공무술을 모태로 하여, 5공수특전여단이 군부대에 맞는 전장무술의 특징을 살려서 새롭게 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5공수특전여단의 특공무술은 1980년 9월 20일부터 11월 21일까지 약 2개월간, 특전사령관의 지시로 새로운 무술연구에 착수하여 25특전대대 15지역대에서 당시 15지역대장인 황인기대위를 필두로 15지역대원들에 의해 개발했다. 1980년 11월 21일 사령관 및 육본 참모부장, 각 여단장이 모인 가운데 시범을 실시하여 전시 공격형 군대무술로 인정받았으며, 특전사 이하 여단 교관요원에 대한 집체교육을 2차에 걸쳐 실시하여 이를 보급하였다.
1981년 4월 22일에 선보인 대한민국 육군본부 시범으로 인하여 보급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전국의 우수 장교들을 교육하여, 특공무술의 군 보급이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2.2. 장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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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옥 총재 |
장수옥은 대한기도회 소속 합기도 사범을 하던 중에, 1978년 7월 1일부터 1980년 10월 31일까지 제606특공부대, 제27특공부대의 무도사범으로 활동했다. 이후 1980년 11월 1일 대통령경호실의 합기도사범으로 임용되었고 2002년 3월 31일 퇴직하였다.
장수옥 총재에 의하면 박정희대통령 시절에 대통령 경호실에서 쓸 무술을 필요로 하자 자신과 부인 철선녀 김단화씨가 경호실에 초청받아 만든 무술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장수옥씨 본인의 주장일뿐 당시 606특공부대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미 만들어진 특공무술에 술기 몇가지를 좀부드럽게 수정하였을뿐이라고 했다 당시 606특공부대 전원이 유단자라서 총검술을 비롯한 유도와 태권도 합기도 권투등 특공무술 관련 기술개발은 부대 자체 내에서도 가능했기에 특공무술을 만들었다고 당시 부대원들은 말한다. 그러나 부대원들 가운데 경호실의 무도종목인 합기도를 담당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에서 합기도사범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수옥을 27특공부대장의 추천으로 시간제로 고용하게 되었다. 장수옥은 부대원들에게 합기도를 일부 교육하면서 특공무술 개발의 일부분이었던 합기도를 담당했다. 결국, 특공무술은 김택수의 지시로 번역한 세계 각국의 무도서적, 제606부대원들의 유도와 태권도 기술, 장수옥의 합기도 기술의 일부분을 종합한 것이었고, 이 기술들의 체계화는 특공무술 교범작업을 통해 진행되었다.
이에 대해서 특공무술 창시자라 주장하는 다른 사람들과 이견이 있다. 다른 특공무술 창시자들과 이견이 생기는 것은 주로 '특공무술'이라는 단어를 누가 먼저 쓰기 시작했느냐 하는 차이인 것으로 보인다. 장수옥 총재는 주로 합기도와 태권도를 수련했고, 철선녀씨는 쿵후를 수련했다고 하며, 때문인지 기술체계에서 이 무술들의 특징이 보인다고 한다.
대한특공무술협회
2.3. 박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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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원 회장 |
제5공수특전여단에서 특공무술을 개발할 당시 민간의 무술지도사범(박노원)을 위촉교관으로 5개월간(1980.09.02~198011.20까지 민간무술사범으로 참여하였고 3개월은 5공수특전여단 교관들이 경찰대학 상무관에서)교육으로 술기와 교안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1980년 당시 특전특공무술 교범의 모든 기술지도는 박노원회장 자신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하며, 1986년에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 특공무술 교육참고 교재를 발간하였는데, 이때 박노원 회장의 자료와 기술을 정리하여 교재를 발간하였다고 한다. 당시 1980년
박노원회장의 (1956년생) 나이가 23세이다
국제특공무술연합회
2.4. 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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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 총재 |
5공수특전여단장 장기오의 지시으로, 이원익은 육군 사단에 있는 수색부대에 수 개월간 특공무술을 배운다음 제대하기 몇 개월 전 동두천에 있는 미 2사단에 가서 미군에 특공무술을 가르쳤다. 그 후 1982년 미국에 도장을 열어 텍사스 주립대(University of Taxas at Austin)를 시작으로 미국에 특공무술을 보급했다.
1986년 4월5일 장기오 당시 교육사령관 등 여러 군 실무자들이 텍사스 주립대를 방문하여 세계특공무술연맹 창립총회를 갖게 되어 장기오는 초대 총재로, 부총재로 이원익이 임명 받게 된다. 후에 장기오는 명예총재로, 이원익은 연맹총재로 부임하게 된다.임명장
세계특공무술연맹
[1] 한국경호경비학회지, 2008, 제15호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 강사 김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