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5-10 20:30:49

트라시마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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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시마코스
Θρασύμαχος|Thrasymachus
파일:소크라테스 트라시.png
[그림설명]
출생 기원전 459년[2]
아케메네스 제국 이오니아 칼케돈
사망 기원전 400년경(향년 59세)
고대 그리스
직업 철학자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정의에 대한 관점3.2. 루소의 반박
4. 관련 영상5. 여담

1. 개요

φημὶ γὰρ ἐγὼ εἶναι τὸ δίκαιον οὐκ ἄλλο τι ἢ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
나는 정의란 것이 더 강한자의 이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 플라톤, 『국가』 1권 338c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한 소피스트로서,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친 인물이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가 저술한 『데모스테네스의 문체에 대하여』에서도 그의 글을 그 당시 양식의 예시로서 인용한다.

2. 생애


3. 사상

3.1. 정의에 대한 관점

트라시마코스가 인식하는 정의는, 강자 혹은 권력자의 이익이나 그가 설립한 기준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3] 정의를 객관적인 인류를 위한 선행의 관점으로 바라보기에, "처벌 등을 통해 집행되는 정의는 '인류의 미덕'에 부합하지 않기에 정의가 아니다."[4]라는 시각을 지닌 소크라테스와 상당한 논쟁을 벌인다[5].

이를 곧이 곧대로 '정의란 지도자가 원하는 대로 하면 장땡임!'이란 단순히 파시즘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단, 이를 해석하여 주관적/객관적 도덕 및 정의에 관한 트라시마코스만의 고찰을 알아보는 방향이 추천된다. 소크라테스는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관점을 견지하는 데 반해 트라시마코스는 도덕이라는 게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고 오직 법만이 실증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관점이 오류라고 말한다. 즉, 트라시마코스는 회의주의자인 셈이다. 또한 트라시마코스의 관점에 따르면 법은 도덕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법을 정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 사람들이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법은 곧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증명할 수 없는 도덕이라는 개념을 마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정의(definition)를 따르면, 어떠한 집단의 시점에서 정의(justice)란 결국 권력의 요구에 부합하는 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법은 봉건주의 사회 등지의 1인 절대권력 사회에선 오로지 왕 내지는 총통 등의 권력자가 믿는 정의(definition)가 곧 그 사회의 정의(justice)가 되나, 현대 대한민국 등의 민주주의공화주의 국가 등지에선 국민의 과반수(majority)가 합의하는 방향성이 곧 그 사회의 정의(justice)가 된다. 현대 민주사회를 기준으로 정리하자면, '개개인이 지향하는 주관적인 정의가 모여 다수의 의견이 형성되면, 투표 등을 통해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곧 법의 형태로 해당 사회에 객관적인 도덕의 기준을 제시한다.'가 될 수 있으며, 이는 위헌으로 인해 규탄받는 법 등의 존재 및 근본적으로 시대, 정부의 지향점, 민중의 여론 등으로 인해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법을 설명할 수 있으며,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집단은 고유의 기준으로 이에 속한 개개인을 조율하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관계에 부합한다. 트라시마코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엔, 당장 <국가론>에서도 다뤄지듯이 이미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심지어 공산주의의 개념마저 존재했으므로, 그가 의도했던 "정의에 대한 정의" 역시도 이와 같거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트라시마코스는 직접 양치기의 예시를 들며 소크라테스에게 열변을 토해내는데,
"정말로 양치기와 목동들이 그들의 양과 소들을 위해서 행동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노예의 소유자들과 그들 자신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위해 가축들을 살찌우고 돌봐준다고 생각하는가. 도시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그들이 국민을 보는 시각이 우리가 양떼를 보는 시각과 다르며, 그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 가는 일들만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낮과 밤을 지새운다고 생각하는가." [6]
보다시피 반어법이다. 즉, 아무리 양치기들이 일을 하더라도 이는 결국 동물들이 아닌 그들의 주인을 위한 일이므로, 개인이 규범을 지키고 행동하는 행위는 권력의 이익에 기여하는 일이란 뜻이다. 또한 도시의 지도자들을 언급하는 단락으로부터 그가 정부에 대해 불신을 지닌다는 사실 역시 엿볼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정의(justice)를 "강자 혹은 권력자의 이익이나 그가 설립한 기준에 따르는 것", "권력의 요구에 부합하는 일"로 정의(definition)내린 것으로 볼 때 그의 지향점은 봉건주의적인 사회 내에서 한 명 혹은 소수의 지도자가 도덕을 정의내리는 것이 아닌, 민주주의공화주의 체제 아래에서 대중이 직접 그들 고유의 정의(justice)를 정의(define)하는 방법을 지향하는 것임을 유추해 낼 수 있다.

3.2. 루소의 반박

루소는 『사회계약론』 1권 3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힘을 권리로, 복종을 의무로 변형시키지 않는다면, 가장 강한 자도 언제까지나 지배자일 수 없다. 그 정도로 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자의 권리droit du plus fort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이 권리를 겉으로는 빈정대지만, 실제로는 원리로 확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에 대한 해명은 언제쯤이나 듣게 될까? 힘은 물리적 역량이다. 힘의 결과로 어떤 도덕성이 도출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힘에 굴복하는 것은 필연적인 행위이지, 의지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신중한 행위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의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른바 권리라는 이것을 잠시 가정해 보자 나는 이 가정이 설명할 수 없는 혼란만 일으킨다고 말하겠다. 힘이 권리를 만든다면, 결과가 원인과 자리를 바꾸게 되어 어떤 힘이라도 첫 번째 힘을 이기면 권리를 계승하게 된다. 처벌을 피해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즉시 정당하게 그럴 수 있으며, 강자는 항상 옳기에 오직 강자가 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데 힘이 멈추면 함께 소멸하는 권리란 무엇인가? 힘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면 의무 때문에 복종할 필요는 없으며, 복종이 강제되지 않을 땐 복종할 의무도 사라진다. 따라서 권리라는 말이 힘에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을 보게 된다. 이 경우 권리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7]
즉, '힘이 정의'라면, 언제든지 강자를 쓰러뜨릴 수 있을 때 그 즉시 복종의 의무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강자가 되는 것만이 중요해질 뿐, 법(의무)을 지키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힘으로 정당화된다면, 그 약자는 강자가 자고 있을 때 그를 언제든지 죽이고 더 이상 복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쎈 힘을 가진 강자라 할지라도, '힘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은 또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죽일 명분만 만들어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소는 현실적으로 '강자의 힘에 굴복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힘이 곧 정의'라는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4. 관련 영상

5. 여담

  • 말투가 굉장히 과격하다. 논쟁에 처음 참여할 때부터 싹수가 보이는데, 시작부터 소크라테스에게 하는 말이 남다르다.
{{{#!wiki style="word-break: keep-all"
«ἀλλ᾽ εἴπερ ὡς ἀληθῶς βούλει εἰδέναι τὸ δίκαιον ὅτι ἔστι, μὴ μόνον ἐρώτα μηδὲ φιλοτιμοῦ ἐλέγχων ἐπειδάν τίς τι ἀποκρίνηται, ἐγνωκὼς τοῦτο, ὅτι ῥᾷον ἐρωτᾶν ἢ ἀποκρίνεσθαι, ἀλλὰ καὶ αὐτὸς ἀπόκριναι καὶ εἰπὲ τί φῂς εἶναι τὸ δίκαιον.»}}}

"하지만 선생께서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알고자 하신다면, 묻기만 하시지도, 또한 누가 무슨 대답을 하던 그걸 논박하고서 뽐내려고만 하지 마세요. 대답하는 것보다는 질문하는 게 더 쉽다는 것, 이 점은 선생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선생께서도 몸소 대답해 보시죠. 올바른 것을 뭐라 보시는지 말씀하세요."
국가론 1권 336c, 박종현 역
라는 패기 넘치는 등장으로 소크라테스를 벙찌게 만들었다. 실제로도 소크라테스는 생산성 따위는 무시하고 길거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철학적인 질문들만 쉼없이 해댔던 인물이니... 그래도 그런 행동으로 인해 2400년이 지난 후로도 철학의 아버지 격의 인물로서 회자되는 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인물.
  • 이뿐만 아니라 심심하면 한번씩, 고상함의 대명사로 연상될 법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기준으론 현대의 쌍욕에 비견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너는 역겨운 놈이다."(βδελυρὸς γὰρ εἶ, 338d) 등의 말로 직접적인 비난을 하기도 하며,
{{{#!wiki style="word-break: keep-all"
«κἄπειτα, αὕτη δή,» ἔφη, «ἡ Σωκράτους σοφία· αὐτὸν μὲν μὴ ἐθέλειν διδάσκειν, παρὰ δὲ τῶν ἄλλων περιιόντα μανθάνειν καὶ τούτων μηδὲ χάριν ἀποδιδόναι.» }}}

"그게 소크라테스만의 지혜지. 아무도 가르치기 싫어하면서, 감사의 말 하나조차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모두에게 배우는 거."
국가론 1권 338b
같은 돌려까기로 얼핏 보면 "싸우자는 건가?" 싶을 정도의 수위를 지닌 모욕을 남발한다. 참고로 이 말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 쓴 책에서 나온 거다. 그만큼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태도가 편향되어 묘사되었을 수 있지만, 일단 적힌 건 적힌거니... 참고로 저 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은 "네가 맞다. 트라시마코스.(ἀληθῆ εἶπες, ὦ Θρασύμαχε)"이다. 이와 같은 욕지거리를 즐겁게 웃으며 하는 비범한 인물이다.

[그림설명]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묘사되는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
존 라 파지 작, 1903년.
[2]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 예상[3] 국가론, 339e, 344c[4] 국가론, 335c[5]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으로 '정의'란 인류에게 해를 끼칠 수 없고, 절대선이어야 하며, 죄에 따른 처벌마저도 그 대상에게 위해가 가해지는 이상 정의가 아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선은 해를 입히기 위함이 아니다"[8]라는 그 자신의 말로 한번 더 대변되었다.[6] "You think shepherds and herdsmen look out for what's good for their sheep and their cows - that they fatten them up and care for them with a view to something more than merely what's good for their slave-masters and themselves; and when it comes to rulers in cities, rulers properly so-called, you actually think their attitude towards their subjects is somehow different from the one we'd have towards sheep, and that they spend their days and nights worrying, not about what will bring them the greatest benefit, but something else." (국가론, 343b)[7]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김영욱 옮김. 후마니타스. 2018. p.15


[8] 국가론, 335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