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3 20:47:06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호민관)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
라틴어: Quintus Aelius Tuberō
생몰년도 미상 ~ 미상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조부)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아버지)
아이밀리아 테르티아(어머니)
직업 로마 공화국 호민관

1. 개요2. 생애

1. 개요

로마 공화국호민관.

2. 생애

플레브스 가문인 아일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 가문 구성원들은 기원전 3세기 말부터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조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투베로는 기원전 201년과 177년에 법무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는 레가투스로서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를 보좌한 뒤 상관의 딸인 아이밀리아 테르티아와 결혼하여 그를 낳았다. 따라서 그는 기원전 140~130년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로마 정치가이자 군인 중 한 명이었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외조카였고, 그라쿠스 형제의 사촌이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일리우스 투베로 가문은 매우 크고 가난했다. 18명이 비좁은 집 한 채에 모여 살면서 단 한 구획의 땅으로 근근이 살았으며, 아버지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가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공적을 세우기 전에는 은식기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생활에 깊은 영향을 받은 투베로는 어린 시절부터 일상 생활에서 검소하고 소박함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옛 생활 방식을 고수하고 로마에 만연한 사치 풍조를 비판했다. 그는 연회에 대한 지출을 제한하는 판니우스 법의 요구 사항을 준수한 로마인으로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와 함께 거론되었다.

2세기 후에 활동안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스토아 학파를 언급하면서, 이 종파에 속했던 과거 인사 중 한 명으로 투베로를 거론했다. 투베로는 검소하고 품위 있는 삶을 추구한 스토아 학파에 이끌렸던 것으로 보이며, 당대 스토아 철학자 로도스의 파나이티오스의 제자였다. 파나이티오스는 그에게 저서 <고통을 견디는 법>을 헌정했고, 솔리의 크란토르의 저서 <슬픔에 대하여>를 암기하라고 조언했으며, 두 사람은 서로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스토아 철학자 로도스의 헤가토도 저서 <근무 중>을 투베로에게 헌정했다.

투베로는 그리스 문화에 대한 사랑과 온건한 개혁을 추구한 "스키피오 서클"에 속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그의 삼촌이었고,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저서에서 그를 친구라고 부른 것으로 언급되었다. 또한 투베로는 사촌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라쿠스가 호민관으로서 국가에 격변을 일으키려 하자, 투베로는 그를 위험한 인물로 여기고 등을 돌렸다. 키케로는 투베로가 동료 호민관으로서 그라쿠스와 싸우며 용기와 강인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고, 그라쿠스파의 가장 위험한 반대자 중 한 명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키케로는 <브루투스, 그리고 유명한 연설가에 대한 대화>에서 스토아주의에 대한 신봉이 투베로의 연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그의 연설이 "가혹하고, 엄격하고, 무례했다."라고 평했다. 그러면서도 투베로가 토론에 매우 능했으며,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에 대한 비판 연설문 중 몇몇은 실제로 출간되었고, "이 저서를 쓸 당시(기원전 46년)에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라고 밝혔다. 또한 키케로는 투베로가 법정을 주재하면서 삼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아우구르가 판사로서의 직무에서 면제될 권리가 없다고 판결해 과도한 엄격함을 대중에 보여줬다고 밝혔다. 투베로가 언제 호민관을 역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학계에서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으로서 활약할 무렵인 기원전 132년에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급사한 기원전 129년 사이일 거라고 추정한다.

키케로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장례 연설을 한 사람이 투베로이며, 연설문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가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키케로는 다른 사료에서 이 연설을 한 사람은 고인의 또 다른 조카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이며, 투베로는 잔치를 조직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이때 투베로는 이 기회를 이용해 로마 시민들에게 선조의 검소한 면모를 보여주기로 마음먹고, "비천한 포에니인 침대에 염소 가죽을 깔고 사모스섬의 요리를 차려놓았다." 이에 사람들은 고인이 막대한 위업을 달성했는데도 장례 잔치가 보잘 것 없는 것에 분노했고, 투베로는 나중에 법무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이 일로 그를 미워하게 된 시민들의 외면으로 낙선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