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우의 수상 경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 |||||||
2011 | 2012 | 2013 | 2014 |
| ||
2011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 2013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 2014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
2007 KBO 퓨처스 북부리그 타격왕 |
2007 KBO 퓨처스 남부리그 홈런왕 |
2007 KBO 퓨처스 남부리그 타점왕 |
2008 KBO 리그 신인왕 |
2016 KBO 리그 타격왕 |
2016 KBO 리그 최다 안타왕 |
2011 KBO 리그 홈런왕 |
2011, 2016 KBO 리그 타점왕 |
2011 KBO 리그 장타율왕 |
최형우의 역대 등번호 / 직책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
진갑용 (2011~2012) | → | 최형우 (2013~2014) | → | 박석민 (2015)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43번 | ||||
정성열(2001) | → | 최형우(2002~2005) | → | 현철민(2006~2007)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4번 | ||||
오상민(2002~2007) | → | 최형우(2008~2016) | → | 김헌곤(2017~ ) |
1. 개요
KIA 타이거즈 소속 외야수 최형우의 삼성 라이온즈 시절 기록을 담은 문서. 2002년 신인드래프트 2차지명 6라운드, 전체 48번으로 삼성에 입단해서 중간에 방출과 경찰청 복무시절을 빼고 2017년 기아로 이적하기 전까지 13년간 삼성에서 뛰었다.
2. 삼성 라이온즈 1기
2.1. 2002~2005 시즌
전주고를 졸업하고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당시는 포수였는데, 2002년 ~ 2005년까지 4년 동안 1군에서 대타와 대수비로 6경기에 출장해 7타수 2안타를 기록했는데, 이 2안타는 모두 2루타로 첫해인 2002년에 기록한 것이다.
2군에서도 매년 2할 중후반대의 타율을 기록했고 2005년에는 남부리그 타율 2위(0.322)에 오르기도 했지만, 수비가 나아지지 않아[1] 결국 2005년 시즌이 끝난 뒤 삼성 라이온즈에서 방출당했다.
이후 싸이월드에 이런 다짐을 올렸다.
이런 말하면 비웃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난 반드시 돌아온다..
날 배신했던 것에 대한 복수를 품고 반드시 돌아온다..
지금 있던 곳이 아닌 저 먼곳에서 이곳을 부수기 위해 칼을 갈 것이다.
반드시...반드시...반드시...언젠가는...복수한다...
하지만 난 반드시 돌아온다..
날 배신했던 것에 대한 복수를 품고 반드시 돌아온다..
지금 있던 곳이 아닌 저 먼곳에서 이곳을 부수기 위해 칼을 갈 것이다.
반드시...반드시...반드시...언젠가는...복수한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쓴 정말 오글거리는 허세글이지만 이후 최형우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삼성이 재영입하지 않았다면 삼성은 정말 복수당할 뻔했다. LG 트윈스가 트레이드해서 내보낸 박병호와 김상현의 사례처럼, 정말 저 글대로 상황이 바뀌었다면 삼성 입장에선 그야말로 재앙이 일어났을 것이다. 비록 FA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게 되지만, 재입단 후 9년동안 wRC+ 147, sWAR 41.69에 정규시즌 5연패와 통합 4연패로 삼성은 그야말로 제대로 뽕을 뽑아 먹었다.
이후 세월이 훨씬 흘러 2023년 11월 18일 자 이대호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여 이 글이 다시 언급 되었는데 한창을 부끄러워하면서 제대로 읽지를 못했다.
3. 경찰청 복무
방출 후 상무 입대를 타진했으나 이마저도 탈락하면서 선수 생활에 큰 위기가 닥쳤지만, 때마침 경찰청의 창단 소식에 곧바로 지원하여 합격, 창단 멤버로 입단하게 되었다.[2] 타격 자질을 살리고 수비 부담을 낮추기 위해 김용철 당시 경찰청 감독의 권유에 따라 외야수로 전향했다.경찰청의 중심 타자로 활약하면서 1년차에는 팀 내 타율 1위(0.344)에 홈런 공동 1위(11홈런) 등을 기록했다. 경찰청 2년차인 2007년에는 2군 북부리그에서 타율 1위(0.391), 최다 안타 1위(128안타), 최다 2루타 1위(41개), 홈런 1위(22홈런), 타점 1위(76타점), 득점 1위(72득점), 장타율 1위(0.731) 등 타격 부문 7관왕을 달성하며 그야말로 2군 북부리그를 평정했다.
경찰청 복무를 마칠 즈음, 경찰청 김용철 감독은 최형우가 제대 후 갈 팀이 없을까봐[3] 최형우의 연고 팀인 KIA에 언질을 넣었으나, 긍정적인 답변을 했던 서정환 감독이 사임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SK 와이번스 스카우터들이 최형우를 주목했으나 김성근 감독의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아서 영입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4] LG 트윈스에서도 데려가려는 듯 했으나 나가리.
이때 마침 경찰청 경기를 보러 간 김응용 사장이 "쟤 아직 우리 소속이지?"하고 같이 간 삼성 프런트 직원에게 물었고 깜짝 놀란 프런트 직원이 부랴부랴 계약에 나섰다. 상술한 이대호의 유튜브에서 최형우가 직접 삼성과 다시 계약한 이유를 밝혔는데, 낯가림이 심해서 새로운 팀을 가기에는 두려움이 있었고 삼성에는 조동찬 등 같이 입단한 친한 동기들이 여전히 팀에 남아 야구를 하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타 팀에서는 계약 연봉으로 높아야 3천만 원을 불렀으나 삼성은 5천만 원을 불렀다고 한다. 당시 집안 형편이 굉장히 안 좋아서 막노동까지 겸하며 생계를 책임졌기 때문에 2천만 원의 연봉 차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여튼 최형우를 다시 데려온 건 김응용 당시 사장의 공로다.[5]
4. 삼성 라이온즈 2기
4.1. 2008 시즌
전체적으로 노쇠한 삼성 타선의 젊은 피 중 하나로 활약하면서 최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마쓰이 히데키를 닮아서 나온 별명이다. 마쓰이처럼 우투좌타라는 점도 같다. 재밌는 건 점점 스탯도 마쓰이 히데키를 닮아간다! 2009년도 즈음 해서 나온 이야기가 점점 더 확실한 현실이 돼 가는 실정.시즌 초반에는 대타로 시작했지만, 원래 우익수를 볼 예정이었던 외국인 타자 제이콥 크루즈가 아킬레스건 때문에 1루수로 출장하면서 우익수로 출장하게 되었다.
팀 중심 타선에 자리잡아 홈런(19홈런)과 타점(71타점) 부문에서 팀 내 1위를 차지하면서, 중고 신인이지만 규정상[6] 신인왕 자격이 있는 것으로 판정되어 2008년 강력한 신인왕 후보로 떠올랐다. 게다가 다른 후보인 KIA 타이거즈의 김선빈과 LG 트윈스의 정찬헌이 예상 외로 부진했기 때문에 2008년 신인왕 후보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최고령 신인왕이 됐다. 이 기록은 2011년 배영섭이 경신한다. (현 최고령 신인왕 수상자는 신재영)
4.2. 2009 시즌
2009년에는 시즌 중 한때 백업 포수난으로[7] 다시 포수로 기용될 계획도 있었지만 트레이드로 채상병이 합류하면서 외야수로 고정되었고, 양준혁의 외야자리를 잇게 된다.팀의 4번 타자로 자리잡아 타율·출루율·장타율 모두 성장한 모습을 보였지만, 부족한 수비능력과 삼성의 1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 걸려있던 2009년 가을 동안 4번타자의 이름에 걸맞지않은 모습을 보여준 점(2009년 9월 타율 0.172 4홈런 12타점) 때문에 최잉여라는 별명이 굳어졌다.
4.3. 2010 시즌
2010년 4월 6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홈런을 친 후 가면라이더 세레머니를 했다. 그것도 가면라이더 V3의 세레머니여서 한국 야구 선수 중 최초로 특촬물 덕후가 나왔나 싶었지만, 오치아이 코치 때문에 한거라고 한다.[8]2010년 6월 10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발 김광현의 구위에 눌려 노히트 노런의 굴욕을 당하기 직전 9회 2사 이후에 신명철이 볼넷을 골라낸 후 3구째를 노려쳐 안타를 쳐냄으로써 굴욕적인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디씨 야구 갤러리에선 SK갤을 제외한 7개 구단이 하나가 되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으며 도마 최형우, 구국의 열사 최형우 등 큰 호응을 받고 있다.
9월 17일 KIA와의 경기에서 김상현의 타구를 쫓다가 벌러덩…. 두 팀이 4블론을 주고 받으며 벌인 병신매치에 마지막 정점을 찍었다. 덕분에 패전투수가 된 김효남은 최형우를 썰어버릴 듯한 표정으로 쳐다 보았고 그는 알을 품는 최디슨이란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그날 밤, 베이스볼 투나잇 야의 변두리 야구의 주제는 야 웃음이 나오냐였다.
최형우는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22타수 6안타 1홈런 3볼넷 4타점 5득점, 타율 .273, 장타율 .545, 출루율 .36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최형우는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13타수 3안타 2볼넷 1희생플라이 1타점, 타율 .231, 장타율 .385, 출루율 .313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최형우는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35타수 9안타 1홈런 5볼넷 1희생플라이 5타점 5득점, 타율 .257, 장타율 .486, 출루율 .341을 기록했다.
4.4. 2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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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최형우/선수 경력/2011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시즌 성적 타/출/장 .340/.427/.617 OPS 1.044 163안타 30홈런 118타점 WAR 7.64 wRC+ 182.2를 기록했다. 홈런왕, 타점왕, 장타율왕을 수상하며 3관왕에 올랐고 데뷔 이후 처음으로 골든 글러브도 수상하였다. 아쉽게도 이대호가 타격왕을 가져가며 트리플 크라운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2016 시즌과 함께 최형우의 양대 커리어하이로 꼽히는 시즌이다. 그리고 이 시점을 기준으로 최형우는 리그 최고의 좌타거포 외야수에 등극하게 된다.
4.5.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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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최형우/선수 경력/2012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부진을 겪으며 무너지는듯 했으나 여름에 맹타를 휘두르며 결국 투고타저의 리그 속에서 .271의 타율과 14홈런, 77타점이라는 준수한 성적과 한국시리즈에서 2차전 만루홈런과 함께 2홈런 9타점이라는 흠좀무한 활약을 펼쳤다.
4.6.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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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최형우/선수 경력/2013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시즌 성적 29홈런 98타점으로 지난해의 부진을 잊고 4번타자로서의 부활을 알렸다. 아쉽게 30홈런 100타점에는 실패했는데 두산전 한 어린이팬의 기행[9]이 없었다면 30홈런 100타점 달성에도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매우 뛰어난 성적을 올렸으므로 시즌 후 골든글러브 수상에는 성공하였다.
4.7.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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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최형우/선수 경력/2014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할 30홈런 100타점과 2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여전히 리그 최고의 외야수임을 입증했다.
4.8.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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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최형우/선수 경력/2015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시즌 성적을 보면 3-30-100을 달성하고 또한 외야수 중 홈런 1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9월 이후와 한국시리즈에서 최악의 부진을 보인 탓인지 골든글러브 수상에는 실패했다.[10]
4.9.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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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최형우/선수 경력/2016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2011 시즌과 함께 최형우의 양대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꼽힌다. 또한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된 해이다. 아쉽게도 3-30-100-100과 본인의 커리어 첫 트리플크라운은 하지 못했다.[11] MVP 수상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었으나 더스틴 니퍼트에게 밀려 수상에는 실패했다.
시즌 후 FA를 통해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5. 총평
최형우는 삼성 왕조의 4번 타자로, 통상적으로 최형우의 전성기[12]로 받아들여지는 시기이자 2010년대 KBO 리그 최고의 좌타자이기도 하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시 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가장 뛰어난 타자를 꼽을 때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선수[13][14]이기도 하다.2008년부터 잠재력을 폭발시켜 매년 훌륭한 실적을 올렸다. 2009년, 2012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즌에서 팀의 4번 타자를 맡기에 손색이 없는 성적을 올렸으며, 2011년과 2016년은 아예 MVP를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성적이었다. 또한 최형우는 이런 성적을 10년 가까이 꾸준히 올렸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최형우의 삼성 시절 OPS는 0.951에 wRC+는 147에 달할 정도로 굉장히 높고, 삼성에서의 커리어가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삼성 역사상 최고의 타자를 꼽을 때 다섯 손가락 안에 넉넉하게 꼽히는 위대한 성적을 남겼다.
다만, 실제로 최형우가 삼성 왕조 시절 4번 타자를 맡을 때에는 팀 내에서 그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했다. 큰 이유는 야수진에는 이승엽, 박석민과 같은 성골 스타들이 있었고 삼성 시절 말기에는 최형우와 이승엽의 후계자격인 성골 구자욱이 등장했으며, 투수진에는 압도적 임팩트의 오승환[15]을 필두로 JOKKA 라인과 윤안임오가 상당수의 인지도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최형우는 위의 선수들과 달리 타향 출신이라는 점에서 인기가 다소 깎이기도 했고, 똑같은 타향 출신인 오승환처럼 압도적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하고 늘 최상위권의 성적을 올리는 선수라는 점에서 역시나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당하기도 했다. 이 문제로 인하여 두 번의 MVP급 성적을 올리고도 최형우의 KBO MVP 수상 경력은 0회이다.[16]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팀에 대한 공헌도 대비' 인기가 낮을 뿐, 실제로 최형우는 삼성 왕조 시절 삼성 왕조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로 반드시 언급되었다. 사실 당연한 것이, 삼성 왕조 시절 팀 내 최고 타자이자 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하나였으므로 이런 평가를 듣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즉 최형우는 팀 내 인기가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뿐이지, 타 팀 팬들에게나 삼성 팬들에게나 삼성 라이온즈를 대표하는 선수로 늘 인식되었다. 당장 2014년 한국시리즈 당시 역전 끝내기 2루타와 2016년의 MVP급 위대한 성적이 삼성 팬덤에게 현재까지 회자되는 것을 보면,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조차도 그를 기억하는 올드 삼성 팬덤은 아무도 삼성 시절 그의 활약상을 절대로 간과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최형우는 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구단과의 이별을 좋지 않게 맞이하는 바람에 현재는 삼성 팬덤이 언급하기 꺼리는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윤안임오의 원정 도박 사건으로 인해 지원금이 감소한 상황이었고 최형우, 박석민, 차우찬 등의 주축 선수들이 이적했으나, 이들 중 삼성의 가장 큰 라이벌 구단인 KIA로 이적한 최형우만 인터뷰로 타향 출신이라 팀 내에서 소외감을 느꼈다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팬덤에게 이미지가 몹시 좋지 않아졌다. 선술했듯 최형우는 성적 대비 팀 내 인기가 높지 않아 이것이 그의 이 발언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자유계약으로 라이벌 구단으로 이적하면서 해당 발언을 하면서 삼성 팬덤 내에서 크게 평가가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인터뷰 당시 똑같이 타향 출신인 차우찬을 끌고 온 것 역시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지난 현재는 실질적인 고향 구단이자 삼성의 라이벌 구단으로 이적하여 그곳에서도 전설급 성적을 찍고, 특히 2024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꺾는 데 기여[17]하며 현재는 삼성 레전드로써의 인식이 많이 소멸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형우가 삼성 라이온즈 시절 기록한 타격 성적은 삼성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삼성 팬들은 그가 이적 당시에 행한 만행과는 별개로 삼성 왕조의 상징적인 선수이자 리그를 호령한, 이견 없는 레전드급 성적을 올린 삼성의 마지막 타자이기에[18] 그의 실력과 성적만큼은 그리워하는 여론도 남아있다.
6. 삼성에서의 기록
삼성에서의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
2002 | 삼성 라이온즈 | 4 | 5 | .400 | 2 | 2 | 0 | 0 | 0 | 0 | 0 | 0 | .800 | .400 | |
2003 | 1군 기록 없음 | ||||||||||||||
2004 | 2 | 2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
2005 | 1군 기록 없음 | ||||||||||||||
2006 | 군복무(경찰 야구단) | ||||||||||||||
2007 | |||||||||||||||
2008 | 삼성 라이온즈 | 126 | 384 | .276 | 106 | 24 | 0 | 19 (5위) | 71 | 68 | 3 | 54 | .487 | .364 | |
2009 | 113 | 415 | .284 | 118 | 24 | 0 | 23 | 83 | 70 | 1 | 62 | .508 | .375 | ||
2010 | 121 | 420 | .279 | 117 | 29 (4위) | 1 | 24 | 97 (4위) | 71 | 4 | 79 | .524 | .389 | ||
2011 | 133 | 480 | .340 (2위) | 163 (3위) | 37 (2위) | 3 | 30 (1위) | 118 (1위) | 80 (4위) | 4 | 81 | .617 (1위) | .427 (3위) | ||
2012 | 125 | 461 | .271 | 125 | 27 | 1 | 14 | 77 | 51 | 2 | 60 | .425 | .348 | ||
2013 | 128 | 511 | .305 | 156 (2위) | 28 (3위) | 0 | 29 (2위) | 98 (2위) | 80 (4위) | 2 | 54 | .530 (3위) | .366 | ||
2014 | 113 | 430 | .356 (5위) | 153 | 33 (4위) | 0 | 31 (5위) | 100 | 92 | 4 | 57 | .649 (4위) | .426 | ||
2015 | 144 | 547 | .318 | 174 (5위) | 33 | 1 | 33 (5위) | 123 (5위) | 94 | 2 | 82 | .563 | .402 | ||
2016 | 138 | 519 | .376 (1위) | 195 (1위) | 46 (1위) | 2 | 31 | 144 (1위)[19] | 99 | 2 | 92 (4위) | .651 (2위) | .464 (2위) | ||
통산 | 1147 | 4174 | .314 | 1309 | 283 | 8 | 234 | 911 | 705 | 24 | 621 | .553 | .398 |
[1] 특히 송구 부문이 문제였다. 포수로 어깨는 강한 편이었는데, 본인 말로는 연습 때는 잘하다가도 실전 경기에서는 야수 키를 넘기는 송구를 종종 했다고. 경찰청 입단 테스트 때 최형우의 송구를 본 정현발 코치는 학창 시절이나 프로에서 송구 때문에 된통 혼난 적이 있는지 그게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고 평가했다.[2] 창단 동기로는 김태완과 최진행 등이 있다.[3] 타격7관왕이긴 했지만 문제는 수비였다. 이재원이 그랬듯 타격은 문제없는 선수도 수비가 안돼서 1군에 대타로만 쓰거나 2군에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2군기록이 아무리 좋아도 1군에서도 100% 연결된다는 보장도 없다.[4] 김성근의 돌직구2에서 김성근 감독 본인이 언급한 내용으로, 당시의 결정을 김성근 감독은 아직도 후회한다고 밝혔다.[5] 선동열의 공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팩트가 아니다.[6] KBO 규정상, 신인왕은 그 해에 데뷔한 선수뿐만 아니라, 처음 계약 후 5년 이내, 30이닝(투수)/60타석(타자) 이내 출장한 선수도 수상할 수 있다. 이 때, 국방부/행안부 퀘스트 플레잉 타임은 계산하지 않는다.[7] 주전 포수였던 진갑용은 손목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백업 포수였던 현재윤마저 부상을 당한 상황이었다.[8] 삼성은 대개 일본에서 전지훈련을 하는데, 이때 쉬는 날에 최형우나 박석민 등은 빠칭코를 많이 한다고. 이때 이들이 한 빠칭코 기계가 가면라이더 캐릭터가 나오는 것이었고, 이를 본 오치아이 코치가 재미삼아 최형우와 박석민에게 가면라이더 피규어를 선물했다. 그 이후에 저런 세레머니를 하게 되었다.[9] 홈런성 타구를 잡으려 글러브를 뻗다 공을 쳐내는 바람에 홈런을 2루타로 바꿔버렸다.[10] 심지어 이용규보다도 표를 적게 획득했다.[11] 타율, 타점은 1위로 충족하나 홈런에서 이 부문 1위인 최정, 테임즈와 9개 차이인 31개로 7위에 머물며 결국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참고로 득점 1위는 121점을 기록한 정근우.[12] KIA 이적 후에도 삼성 시절에 비해 성적이 거의 떨어지지 않았으나 삼성 시절의 성적이 근소하게 더 높다.[13] 비율 스탯으로는 양준혁, 이만수, 이승엽 영결 3인방 다음가는 수준이다. 누적으로 봤을시 스탯티즈 기준으로는 영결 3인방에 박한이만이 그의 위에 서 있다.[14] 삼성 내에서 비율 스탯 상으로 최형우를 넘을 선수는 당분간 아주 오래 없어보인다. 그나마 누적으로는 구자욱이 최형우에 서서히 근접하고 있고, 몇 년 안으로 상당수의 기록을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15] 2011년 당시 최형우와 함께 MVP급 성적을 올렸는데 오승환이 최형우에게 MVP 단일화를 제안했고 그 결과로 윤석민이 MVP를 수상하였다. 물론 윤석민은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기에 그 역시 MVP를 수상해도 큰 이상은 없다.[16] 물론 최형우의 MVP 수상 경력 문제는 단순히 최형우가 스타성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저 그가 너무 강력한 경쟁자를 MVP급 시즌에 가져 그냥 MVP 운이 대단히 없었다고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2011년은 윤석민이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해버렸고, 2016년은 니퍼트가 단일 시즌 22승에 두산이 2014년 삼성조차 넘는 KBO 역대 최고의 시즌 중 하나를 보냈기에 세이버상으로 이들을 압도한 최형우의 실질적 MVP 수상 가능성 자체가 안 높았다.[17] KIA의 우승을 결정짓는 5차전의 3회말과 5회말에 각각 적시타, 홈런을 치며 2타점을 올렸다.[18] 삼성이 보유한 마지막 리그 올타임 레전드급 선수는 팀의 투타 상징과도 같은 이승엽과 오승환이나, 이들은 최형우가 떠나고 난 삼성의 암흑기 이후에는 압도적 성적을 올리진 못했다. 그나마 오승환의 2021년이 KBO 1기 시절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근접한, 동시대 마무리 투수 중 대단히 훌륭한 성적이었다. 그나마 그의 후계자 자리를 엉성하지만 일단 맡아두기는 한 구자욱이 2024년 매우 훌륭한 성적을 올렸지만 한 시즌 내내 잘했던 2016년 최형우의 임팩트에 미치지는 못하고, 커리어 전체를 보자면 최형우 포함 이전의 이만수, 장효조, 양준혁, 이승엽 등에 크게 밀린다.[19] 역대 단일시즌 타점 2위이자 삼성라이온즈 한시즌 최다타점 1위인 이승엽의 2003년 144타점과 타이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