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2 12:23:17

초영왕

초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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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의 영윤(令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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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초(楚)나라 10대 왕
영왕
靈王
미(羋)
웅(熊)
위(圍) → 건(虔)
아버지 초공왕(楚共王) 웅심(熊審)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29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29년

1. 개요2. 그의 인생 초반기3. 초 영왕의 치세4. 평가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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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나라의 26대 군주, 10대 . 원래 이름은 '위'(圍)였으나, 왕이 된 뒤 '건'(虔)으로 고쳤다. 초공왕의 차남.

자신의 조카인 겹오를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초 영왕은 대외적으로 채나라진(陳)나라를 멸망시켜 그곳을 초나라의 행정 구역으로 만들었으나 채와 진(陳)의 구신들 및 왕족들의 반란이 일어나 쫓기는 신세가 되어 우윤 신해의 집에 머물다가 결국 잡히면 죽는다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다.

2. 그의 인생 초반기

겹오 3년(기원전 542년), 조카인 겹오에 의해 영윤이 된다. 그는 공자 흑굉과 백주리[1]로 하여금 정나라와 초나라의 경계에 주, 겹, 역 3개 성을 쌓았다. 그것 때문에 정나라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졌다.[2]

겹오 4년(기원전 541년) 12월, 정변을 일으켜 겹오를 시해한다.

3. 초 영왕의 치세

초 영왕 원년(기원전 540년), 초나라 왕으로 즉위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름을 건으로 고쳤다. 그는 가는 허리의 여자[細腰]가 취향이었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허리를 가늘게 하기 위해 굶어 죽는 일이 적지 않았다. 언젠가 제나라재상안영이 초나라를 방문했는데, 초 영왕은 그가 키가 작은 것을 깔보았다. 그래서 그를 기죽이기 위해 거한들에게 병거를 타게 했다. 그러나 안영은 기죽기는 커녕 오히려 당당했다. 그리고 안영은 초나라의 신하들과 설전을 벌여 말빨로 제압을 했으며, 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르자 그것을 가지고 초 영왕이 제나라 사람들을 까니 안영은 남쪽에서는 귤나무였던 것이 북쪽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면서 초 영왕을 말빨로 눌렀다.

초 영왕 3년(기원전 538년) 6월, 제후들과 신 땅에서 회맹했다. 7월에 오나라(吳)를 쳐서 8월에 오나라에 의탁한 제나라의 몰락한 권신 경봉의 일족을 멸하였다.[3]

초 영왕 7년(기원전 534년), 장화대를 건립하고 그곳에 미녀들을 채웠다.

초 영왕 8년(기원전 533년), 공자 기질에게 명하여 진(陳)나라를 멸했다.

초 영왕 10년(기원전 531년), 채영후가 아내를 뺏은 아비 채경후시해하자 입조를 요구해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고 곯아 떨어졌을 때 죽였다. 존속살인을 심판한다는 명분이 있지만 명분을 밝히고 채나라를 쳐서 심판해서 죽이고 후계를 세우는 게 아니라 비겁하게 재워서 죽이고 기습해서 채나라를 정복했는데 춘추시대는 큰 나라의 임금답지 못 한 행동이 비판받는 시대다. 더 큰 문제는 그것도 모자라 채은세자(蔡隱世子) 희우(姬友)[4]를 강산()[5]희생한 거다. 그리고 공자 기질로 하여금 채나라를 정복하다록 하여 그를 채공으로 봉한다. 신하 신무우(申無宇)가 채은세자 희우를 산제물로 바친 일을 걱정하였다.
겨울 11월, 초자가[6] 채나라를 없애고 은태자를[7] 강산에 희생하자 신무우가 말하기를 "재수없다. 다섯 희생을[8] 아니 바꿔 쓰거늘 하물며 제후[9]를 희생하다니! 왕이 반드시 후회하리라!"(冬 十一月, 楚子滅蔡 用隱大子于岡山. 申無宇 曰 “不祥. 五牲不相爲用 況用諸侯乎! 王必悔之!")
춘추좌씨전
초 영왕 11년(기원전 530년), 서나라를 정벌해 오나라를 위협했다.

초 영왕 12년(기원전 529년) 봄, 진(陳)나라와 채나라의 옛 신하들이 초 영왕의 아우인 공자 비, 공자 흑굉, 채공 기질을 꼬셔서 초나라 백성들을 거느리고 그의 치세를 뒤엎으려 했다. 그러자 초영왕은 쫓겨났고, 반란군은 공자 비를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초 자오다. 영왕은 정처없이 달아나다가 우윤 신해의 집에 숨었다. 여름인 5월에 초영왕은 목을 매어 자살했다. 우윤 신해는 그의 두 딸을 초 영왕과 같이 순장했다.[10]
왕이 여러 아들이 죽었음을 듣고 스스로 수레 아래로 뛰어내리며 말하기를 "남이 아들을 사랑함이 나와 같을까?"라고 하문(下問)하자 모시는 이가 말하기를 "더하죠. 소인은 늙고 아들이 없어서 도랑과 구덩이에 굴러떨어질 걸 압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남의 아들을 많이 죽였으니 이 지경이 이르지 않았겠나?"라고 하자 우윤 자혁이 말하기를 "교외에 가서 나랏사람의 (여론을) 들으소서"라 하니 왕이 말하기를 "뭇사람의 성냄은 못 거스른다."고 하자 (우윤 자혁이 또) 말하기를 "일단 서울에 들어가 제후에게 군대를 요청하소서."라고 하자 왕이 말하기를 "모두 배신했다."고 하니 (우윤 자혁이 또) 말하기를 "제후에게 망명해서 큰 나라의 임금자리를 찬탈할 (기회를) 들으소서."라 하니 왕이 말하기를 "큰 복은 아니 거듭하고 다만 욕볼 뿐이다."라 하였다. 연단이 이에 초나라로 돌아가다. 왕이 한수(漢水)를[11] 따라 내려가 언(鄢)으로 들고자 하엿다. 우윤 신무해의 아들 신해가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께서 임금의 긔걸을 거듭 씹었는데 왕께서 아니 죽였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무엇이겠는가? 임금의 어려움을 도울 수도 없고 차마 버릴 수도 없으니 내가 왕을 따르리라."라며 이에 왕을 찾아 극위에서 만나 같이 돌아왔다. 여름 오월[12] 계해일에 왕이 우윤 신해씨(의 집에서) 목을 매다. 신해가 두 딸을 순장하다.(王 聞 群公子之死也 自投于車下 曰 "人之愛其子也 亦 如余乎?" 侍者 曰 "甚焉. 小人 老而無子 知擠于溝壑矣." 王 曰 "余殺人子多矣 能無及此乎?" 右尹 子革 曰 "請待于郊 以聽國人." 王 曰 "衆怒不可犯也." 曰 "若入於大都 而 乞師於諸侯." 王 曰 "皆叛矣." 曰 "若亡於諸侯 以聽大國之圖君也." 王 曰 "大福不再 只取辱焉." 然丹 乃歸于楚. 王沿夏 將欲入鄢. 芋尹 無宇之子 申亥 曰 "吾父再奸王命 王弗誅 惠孰大焉? 君不可忍 惠不可棄 吾其從王." 乃求王 遇諸棘闈以歸. 夏 五月 癸亥, 王 縊 于 芋尹 申亥氏. 申亥 以其二女 殉而葬之.)
Ibid.

4. 평가

초영왕(楚靈王)이 채후(蔡侯)를 유인하여 사로잡아 붉은 끈으로 목을 매어 군중(軍中)에 조리돌린 뒤에 죽였는데, 채후는 참으로 죄가 있었다. 그러나 영왕도 어찌 죄가 없었겠는가? 세자가 무슨 죄가 있기에 양과 돼지처럼 잡아 제사에 희생(犧牲)으로 썼단 말인가. 영왕의 포악함이야말로 너무하구나! 간계(乾谿)의 난리 때 후회했으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영왕이 뒤졌으나[13] 채나라의 원한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초회왕(楚懷王)이 진나라에 구금된 것은 이것의 응보였던가 보다. 채나라가 보복할 수 없어서 진나라가 대신 보복한 것이다.(楚靈王 誘執 蔡侯 係其頸以朱組 徇諸軍而戮之 蔡侯 固有罪也. 然 靈王 亦 豈無瑕者耶? 且 世子 何罪 而 用之以祭 屠刲若羊豕然? 甚矣, 靈王之虐也! 乾谿之難 悔之何益? 靈王 雖斃 蔡之怨 終未解也. 懷王之拘於秦 其 是之報與. 蔡不能報 秦代之報也.)
청성잡기』, 「췌언(揣言)」, 진나라와 초나라의 보복(秦楚報復), 성대중(成大中)

5. 여담

뒤를 이은 군주인 자오는 공자 기질에 의해 쫓겨나고 공자 기질이 왕이 되니 그가 평왕이다. 평왕은 처음에는 나라를 나름대로 잘 다스리다가 간신 비무극의 참언을 들으면서 나라가 점차 기울게 된다.

[1] 오나라의 간신배로 유명한 백비의 할아버지다.[2] 강대국인 초나라가 경계에서 군사 행동을 하니 겁나지 않을 수 없다.[3] 초 영왕이 오나라를 친 명분이 바로 경봉을 죽이기 위해서였다.[4] 춘추좌씨전에서는 은태자(隱太子) 유(有)라고 나온다.[5] 이게 그냥 언덕과 뫼란 뜻인지 땅이름인지 몰?루[6] 초나라는 임금을 왕이라 일컬었으나 중원에서 아니 인정하여서 초자라 격하하였다.[7] 원문에는 대()라고 쓰였는데 "태"로 읽어야 한다.[8] 말·소·양·돼지·개·닭을 육축(六畜)이라 하는데 여기서 말을 뺐다.[9] 엄밀히 말해 제후가 아니라 세자지만[10] 이 당시 아직 순장의 악습이 유행했다.[11] 여기서 하(夏)는 한수의 다른 이름이다.[12] 동아시아의 역법은 대체로 입춘이 든 달을 정월로 삼기에 5월이면 한여름이다.[13] 그래도 왕을 일컬었건만 원문이 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