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4 09:45:05

청말민초




1. 개요

淸末民初. 중원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가 중국사 최초의 공화국 중화민국으로 교체된 사건 및 과정.

짧게는 아편전쟁에서 신해혁명까지를 청말민초로 보거나, 길게는 청나라 말기부터 장제스의 북벌까지를 청말민초로 보기도 한다.

2. 경과

2.1. 배경

1616년 후금을 건국한 만주족은 1636년 국호를 청나라로 교체한 뒤 1644년 북경에 입관하여 명나라를 정복하였고, 이후 강건성세의 치세를 거치면서 발전해왔다.

그러나 건륭제 말기부터 황제와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사치가 심해져 국고가 탕진되었고, 만주족이 점점 한족에 동화되면서 민족성과 군사적 역량이 약화되어 청은 점점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여기에 만주족의 지속적인 한족 탄압으로 한족들의 반감이 고조하면서 백련교도의 난과 같은 민란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청은 이들을 진압하느라 많은 국력을 소모했다.

한편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들은 청의 폐쇄적인 무역 정책에 불만을 품으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청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2.2. 아편전쟁

1840년 영국은 임칙서의 아편 단속을 핑계로 전쟁을 일으켜 청과 난징조약을 체결했고, 1856년에는 다른 열강들과 함께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은 서양 열강에게 각종 이권과 영토를 할양당했다.

2.3. 태평천국의 난

1850년 홍수전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켜 한때 난징을 비롯한 강남 지역에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1864년 한족 의용군과 서양 열강 군대에 진압되었다.

2.4. 양무운동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 과정에서 서양의 군사력을 실감한 청은 1860년대부터 이홍장을 비롯한 한족 관료들을 중심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양무운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반발과 자금 횡령으로 양무운동은 지지부진했고, 1894년 조선 종주권을 두고 일본과 붙은 청일전쟁에서 대패하면서 양무운동은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5. 변법자강운동의화단 운동

1898년 광서제를 중심으로 한 변법파 관료들은 서양의 기술과 더불어 서양의 제도와 사상도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서태후의 쿠데타와 위안스카이의 배신으로 광서제가 유폐당하고 변법파가 제거당하면서 변법자강운동은 100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1899년 청을 도와 서양을 몰아내자는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으나 얼마 못 가 서양 열강에게 진압당하면서 청은 신축조약으로 더 큰 이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2.6. 신해혁명

1911년 청의 우창 철도 국유화 반발로 촉발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청 조정은 북양군벌 위안스카이에게 진압을 요청했으나 위안스카이가 혁명 지도자 쑨원과 타협하면서 1912년 청이 멸망하고 중국사 최초의 공화국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2.7. 군벌시대

1915년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 건국을 선포하며 황제가 되었지만 민중의 반발로 역풍이 불었고, 1916년 위안스카이가 병사하자 그의 휘하에 있던 군벌들이 전국을 군웅할거하기 시작하면서 군벌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쑨원은 군벌을 진압하기 위해 분투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25년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후임 장제스가 북벌을 이어받게 되었다.

2.8. 장제스의 북벌

1926년 장제스의 1차 북벌이 시작되었고, 이어 1928년 2차 북벌도 성공하면서 중화민국은 일단 외형상 통일을 이루는데는 성공하였다.

3. 영향

3.1. 중국

진나라부터 청나라 때까지 이어진 중국의 황제 전제군주정이 종식되고, 최초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중화민국은 건국 직후 군벌의 난립으로 사실상 분열되었고 장제스의 북벌 성공 후에도 반장전쟁 같은 큰 혼란이 지속되면서, 이를 노린 일본이 만주사변중일전쟁을 일으켜 본격적인 중국 침략을 감행하자 국민당은 다시 공산당과의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 뒤 중국 국민당은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결국 타이완 섬으로 도피하면서 그곳에서 명맥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후 현재까지 양안관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3.2. 한반도

청말민초 시기 조선은 청의 아편전쟁 패배로 큰 충격에 빠졌고, 이에 서양에 대한 두려움이 강해져 적극적인 쇄국 정책으로 일관하게 되었다.

이후 청은 주변 조공국에 대한 종주국 지위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그동안 조선과의 형식적 조공국 관계에서 실질적인 속방국 관계로 만들기 위해 조선에 많은 내정간섭을 시도하였고, 이에 대한 반발로 조선에서는 갑신정변과 같은 급진 개혁 시도가 일어났다.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배해 물러나면서 조선은 일본의 세력권이 되었고, 러일전쟁을 거쳐 일본에 병탄되고 말았다.

4.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