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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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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청동릉
영어 Eastern Qing Tombs
중국어 清东陵
프랑스어 La zone des tombeaux des Qing de l’est
국가·위치 중국 허베이성 탕산시 쭌화시 류판잉춘
中国河北省唐山市遵化市六盘营村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0년
등재기준 (i)[1], (ii)[2], (iii)[3],(iv) (vi)
지정번호 1004-012
파일: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_4.png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colbgcolor=#CCC,#666><colcolor=#000,#FFF> 명칭 한국어 청동릉
간체 清东陵
번체 清東陵
영어 Eastern Qing Tombs
분류 고대 무덤
(古墓葬)
시대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AAAAAA급
일련번호 1-0179-2-018
등재 1961년
차수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1. 개요2. 역사3. 건축물
3.1. 효릉(순치제)3.2. 경릉(강희제)3.3. 유릉(건륭제)3.4. 정릉(함풍제)
3.4.1. 보타욕정동릉(서태후)
3.5. 혜릉(동치제)
4.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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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허베이성 탕산시 쭌화시에 위치한 청나라의 황릉. 청나라의 황제들 중 다섯 명이 안장되어 있으며 베이징의 동쪽에 있다 하여 '청동릉(清东陵)'이라 불린다.

순치제, 강희제, 건륭제, 함풍제, 동치제 등 5명의 황제들이 여기에 묻혔다. 황제 5명뿐만 아니라 함풍제의 후궁이자 동치제의 모후였던 서태후를 비롯한 황후 15명, 비빈 136명, 공주 2명, 왕자 3명 등 총 청나라 황족 161명이 여기에 함께 묻힌 거대한 무덤군으로, 그 면적만 무려 80 제곱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청나라 멸망 이후 40년에 걸친 혼란기 동안 죄다 집중적으로 도굴당한 탓에 현재 온전한 무덤은 순치제의 무덤 밖에 없다. 그나마 순치제의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말년에 승려로 출가한 탓에 무덤 안에 부채 하나를 빼면 부장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2. 역사

청동릉의 위치 선정에는 여러 설들이 있다. 하나는 순치제가 쭌화시에서 사냥 도중 이 곳을 발견하고 감탄해 묘역으로 삼았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명나라 최후의 황제 숭정제가 쓸 황릉 후보지들 중 하나였는데 명나라 멸망 후 순치제가 이를 낚아채 대신 자신의 황릉으로 썼다는 설이다. 어찌됐든 순치제가 이 곳을 자신의 묘지 터로 정하면서 후임 황제들도 다 여기에 자기 묘를 만들었다.

강희제는 집권 2년인 1663년부터 이미 청동릉에 강희제의 묘역 조성에 착수했다. 청동릉 인근의 만리장성도 무덤에 흐르는 용혈(龍穴)을 누른다는 이유로 죄다 허물어버렸고 따로 성벽을 세워 보강했다. 청동릉 내부와 근처에 세워졌던 민가는 물론이요 사찰이나 사당도 황제의 기와 상충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하나 빼고는 모조리 철거했고, 심지어 흙까지 파내가며 터까지 없애버렸다. 청나라 시절에는 최고의 성소로 여겨졌기 때문에 근처에서 나무를 베거나 건물을 올리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묘를 조성하는 것 모두가 절대 금지였다. 365일 24시간 삼엄한 경비가 보초를 섰고 960개의 빨간 말뚝, 960개의 하얀 말뚝, 10개의 화강암판, 1,000개가 넘는 초록빛 말뚝을 무덤 전체에 빙 둘러박아서 어디서나 청동릉의 경계를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표시해놨다. 이 안에서 발견된 일반인은 그 즉시 처형이었다.

이후 강희제, 건륭제, 함풍제, 동치제 등 4명의 황제들이 순치제를 이어 이 청동릉에 묻혔다. 옹정제의 경우 청동릉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들어서 새로운 묫자리인 청서릉(淸西陵)을 조성했다. 청동릉에 안장되지 않은 옹정제, 가경제, 도광제, 광서제, 선통제 등 나머지 5명의 황제들은 이 청서릉에 묻혀있다. 건륭제는 이후 부지의 균형을 위해서 황제들이 번갈아가면서 청동릉과 청서릉에 묻히도록 했다. 다만 가경제는 청동릉이 풍수적으로 불길하다 여겨서, 도광제는 원래 청동릉에 묻힐 예정이었지만 무덤을 파다가 물이 쏟아져 나와서, 선통제는 이미 죽을 적에 나라가 망한지 오래였기에 각기 다 다른 이유로 청서릉에 묻혔다.

이렇게 청동릉은 청나라 시절에는 최고의 성지였지만,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면서 본격적인 파괴에 직면했다. 중화민국은 고작 무덤 지키기 따위에 많은 경호병력과 예산을 투입할 여유가 없었다. 당연히 도굴과 절도가 넘쳐났고, 1921년에는 지린성 군벌 차오루이가 무덤 인근의 나무들을 싹다 베어갔다. 제2차 직봉전쟁 때는 장쭝창이 청동릉 일대를 점거한 뒤 청동 학, 청동 사슴, 구리 솥 등 돈이 될만한 것들은 모두 떼어갔다. 건물에 붙어있던 금은장식들도 모조리 훔쳐갔는데 이때 나온 분량이 수레 12개가 넘었다고. 이때 건륭제와 황후가 쓰던 침대도 누군가가 훔쳐가서 장물로 내다팔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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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릉 도굴 사건
하지만 가장 심각한 도굴은 1928년 쑨뎬잉이 저지른 동릉 도굴 사건이다. 그나마 이때까지만 해도 무덤 위쪽의 누각과 건물들만 털렸을 뿐 지하의 무덤과 관, 시체는 완벽하게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었는데, 이 도굴 사건으로 인해 건륭제서태후의 무덤이 작살났다. 건륭제의 시체는 도굴이 끝나고 병사들이 철수한 뒤,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남아있는 보석을 찾겠답시고 몰려와 모든 걸 마대자루에 쓸어담고 인근 하천에서 철망으로 걸러 금붙이만 찾던 과정에서 시냇물에 쓸려갔고, 서태후의 시체는 병사들이 입에 든 야명주를 찾겠다고 식도를 찢어버리고 옷가지조차 벗겨져 알몸으로 짓밟히는 등 최악의 수난을 겪었다.

안타깝게도 청동릉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45년 9월부터는 마적떼들이 몰려와 아직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들을 죄다 털어대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 간부들도 '황제와 악덕 지주들에 맞서고 무덤에 묻힌 재물을 팔아 기근을 해결한다'라는 핑계로 두 손을 걷어붙이고 청동릉을 도굴했다. 국가 규모로 도굴이 자행되면서 그나마 온전한 채로 남아있던 강희제, 함풍제, 동치제의 무덤들도 모조리 파헤쳐졌다. 부장품은 당연하며 강희제와 함풍제, 동치제의 시신조차 아무 데나 내팽겨쳐졌고 지금은 아예 사라졌다.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2년 후에야 공식적인 보호에 나서면서 청동릉의 수난도 끝났다.

청동릉에 안장된 5개의 황제묘 중 오직 순치제의 무덤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까닭은 순치제가 말년에 승려로 출가를 한 탓에 무덤 안에는 부채 하나 빼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알려졌기 때문. 순치제의 무덤을 빼면 나머지 후궁이나 황족들의 무덤들도 온전한게 없는 수준이다. 이후 중국 정부는 청동릉, 청서릉과 명나라 가정제의 아버지의 무덤 현릉(顯陵)을 묶어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청동릉에 있는 묘들은 모두 지하에 무덤과 묘실이 있지만, 현재는 오직 강희제, 건륭제, 서태후의 지하 무덤 내부만을 공개하고 있다.

3.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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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릉의 구조와 전경. 뒤에 있는 산은 창서산(昌瑞山)이다.
태조 천명제(누르하치)와 태종 숭덕제(홍타이지)는 북경 입관 전에 사망하여 당시 청나라의 수도였던 선양에 묻혔고, 옹정제, 가경제, 도광제, 광서제는 청서릉에 묻혔으며,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는 사후 28년 뒤에 청서릉에 안장되었다. 때문에 청동릉에 안장된 황제는 순치제, 강희제, 건륭제, 함풍제, 동치제 이렇게 5명이다.

청동릉은 앞에 신로와 패방, 대홍문과 대비루가 있고, 그 뒤쪽으로 여러 황제들의 무덤이 순치제의 효릉을 중심으로 횡열로 쭉 늘어서 있는 구조다.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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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로(神路)
돌과 벽돌로 쌓은 신성한 길. 한국의 종묘에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길이 있다. 일부러 길 중앙을 조금 높게 올려서 만들었는데, 이 폭은 약 80cm고 길 양 옆에는 폭 40cm 정도다. 길 양 옆으로는 70cm 간격으로 대리석 조각상을 세워놨다. 당연히 황제나 황후의 관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걸을 수 없는 신성한 도로로, 예외적으로 제사 때 바칠 공물이나 위패는 여기로 다녔다. 금성산의 발치에서 시작해 창서산까지 이르는 길이 6km에 달하는 기나긴 포장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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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방(牌坊)
중국에서 가장 거대한 돌패방이다. 문이 5개, 기둥 6개의 형태이며 폭 31.25m, 높이 12.48m다. 명나라의 석공들이 지었기에 명대의 영향이 짙게 남아있으며 아직도 색칠이 남아있다. 330년 간 2번의 대지진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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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문(大紅门)
청동릉의 정문. 원래 이 대홍문 양 옆으로 40마일에 달하는 거대하고 두꺼운 담벼락이 청동릉 권역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숱한 도굴과 파괴를 거치면서 지금은 고작 반 마일 밖에 안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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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루(大碑楼)
말그대로 황제의 업적을 새긴 거대한 석비가 안에 있어서 '대비루'다. 석비에는 순치제의 치적이 만주어와 중국어로 쓰여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형태이며 누각 기단의 네 개의 모서리에는 대리석을 깎아만든 화표가 각각 하나씩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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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복전(具服殿)
대홍문과 대비루 사이 뜰 오른쪽에 있는 독립적인 건물. 황제들이 청동릉을 방문했을 때 의관을 정제하는 장소였다.

3.1. 효릉(순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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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陵. 제3대 황제 세조 순치제의 능. 순치제, 효강장황후, 효헌장황후 이렇게 총 3명이 안치되어 있다.

청동릉의 한가운데에 있는 능이자 가장 중심축에 위치한 황릉이다. 그 이유는 청동릉을 처음 만든 사람이 순치제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무덤을 청동릉의 중심축과 맞춰서 지었기 때문. 뒤에 주산(主山)으로 창서산이 버티고 있고 앞에는 안산(案山)[4]으로 영벽산(影壁山)이, 그보다도 더 앞에는 조산(朝山)으로 금성산(金星山)이 자리한다. 금성산 - 영벽산 - 창서산을 남북으로 잇는 거대한 축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금성산과 창서산 사이의 거리가 8km가 넘기 때문에, 일부러 6km에 달하는 신로(神路)를 조성하여 금성산과 창서산 사이를 이었다.

청동릉에서 가장 격이 높은 능이기도 하다. 순치제가 청동릉에서 최고 어른일 뿐더러 황릉군 가장 중앙에 있는 묘이기 때문. 이후의 황제들은 그의 양 옆으로 차례차례 무덤을 지었다. 순치제가 말년에 불계로 출가해서 부장품을 거의 묻지 않았다는 야사 덕분에[5] 유일하게 청동릉에서 도굴당하지 않은 황제릉이다.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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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문(龙凤门)
효릉으로 향하는 신로 위에 지어진 문. 6개의 기둥과 3개의 문을 가졌으며 4개의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은 노랗고 초록빛의 도자기들을 구워 만들었으며 중앙에는 용, 꽃, 새 등 기하학적인 문양들로 장식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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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공공교(七孔拱桥)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진 다리라고 해서 '칠공공교'라고 한다. 청동릉에서 유일하게 7개의 아치를 가진 다리로, 청동릉 내에서도 가장 격이 높은 효릉의 위상을 보여준다. 다리는 길이가 110m에 달하며 양 옆에는 석조 난간이 둘러있다. 칠공공교 옆에는 아치가 하나 짜리인 다리 2개가 양 옆으로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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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루(小碑楼)
순치제의 업적을 새긴 비석이 있는 누각이라 해서 '비루'라고 부르지만 앞쪽에 있는 대비루보다 크기가 작기에 '소비루'라고 부른다. 비석에는 순치제의 시호가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 3개 언어로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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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거(神厨库)
제사에 쓸 동물들을 도축하던 장소. 저 담장 뒤의 2층짜리 누각에서 소와 양을 도살했다. 5칸짜리 건물 하나와 3칸짜리 건물 2개로 이루어져 있다. 소비루 오른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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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조방과 서조방(东,西朝房)
소비루를 지나면 나오는 뜰 양 옆으로 서 있는 건물 2채. 제사에 바칠 음식과 차, 과일, 술 따위를 준비하던 곳이다. 서조방은 떡과 과자, 술 등을 준비했기에 '발발방'이라고 불렀고 동조방은 차와 음식 등을 준비했기에 '차선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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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인전(隆恩殿)
효릉의 본전이자 가장 중요한 건물. 순치제와 그와 함께 묻힌 효강장황후, 효헌장황후를 위한 제사가 치러지던 장소였다. 내부에는 순치제, 효강장황후, 효헌장황후의 신위가 있다. 청명절, 중양절, 동지, 연말, 순치제의 기일 때마다 이 곳에서 제사가 치러졌다. 앞에는 세발달린 청동 솥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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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배전과 서배전(东,西配殿)
융인전 양 옆에 있는 2채의 단층짜리 건물들. 제사를 위한 축문과 비단을 보관하던 장소였다. 순치제가 사망했을 당시, 13명의 티베트 라마들이 이 곳에서 경을 외우며 황제의 평안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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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백로(焚帛炉)
융인전으로 들어오는 융인문 양 옆에 놓인 화로. 화려한 누각 형태의 독특한 화로로, 통째로 도자기로 만들었다. 제사를 마치면 축문, 비단, 오색종이, 금은붙이를 여기서 태웠다. 황제의 묘에는 2개의 금빛 지붕 누각 모양 화로가 있는 반면, 후궁들의 묘에는 1개의 초록색 지붕 누각 모양 화로만 있다. 순치제의 묘에는 당연히 2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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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침문(陵寝门)
황제의 능침은 융인전 바로 뒤에 있다. 3단의 계단을 올라 이 능침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능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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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명루(方城明楼)
능묘에서 바로 보이는 건물이자 청동릉 전체에서 가장 높은 건물. 정사각형의 2층 누각으로 거대한 회색빛 벽돌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기단 위에 3면으로는 낮은 흉벽을 담장처럼 둘렀으며 남북 축으로 통로가 나있다. 누각 내부에는 주사가 덮인 비석이 하나 있고, 비석에는 '세조순치제지묘(世祖章皇帝之陵)'라는 어구가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 3개 언어로 쓰여있다. 이 누각 바로 뒤에 야트막한 언덕[6]이 하나 있는데, 이 언덕 바로 아래에 순치제의 지하 무덤이 있다.

3.2. 경릉(강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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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陵. 제4대 황제 성조 강희제의 능. 강희제, 효성인황후, 효소인황후, 효의인황후, 효공인황후, 경민황귀비 이렇게 총 6명이 안치되어 있다.

이 무덤은 강희 재위 15주년인 1676년 완공됐다. 청나라 황제 역사상 최초로 시체를 태워 화장하지 않고 대신 부장품들과 함께 묻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안타깝게도 이 때문에 오히려 도굴꾼들에게 유린당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경릉 앞에 세워진 거대한 성덕비에는 옹정제가 친히 작성한 4,300자에 달하는 기나긴 축문이 쓰여있다.

청동릉에 2번째로 지어진 무덤으로 순치제의 효릉와 구조는 비슷하지만 규모도 조금 더 작고 격식도 낮다. 예를 들어 용봉문은 단순한 아치문으로 바뀌었고, 앞에 서있는 석상도 5쌍으로 줄어들었으며 효릉의 석교는 7개의 아치가 있는 것에 비해 경릉의 석교는 5개의 아치 밖에 없다. 다만 그걸 빼면 웬만한 건축물들, 예를 들어 아치가 있는 석조 다리, 신주거, 동조방과 서조방, 동배전과 서배전, 융인전, 방성명루 등은 거의 똑같다.

강희제의 무덤은 이미 청나라 시절부터 지하수에 침수되어 버린 탓에 훼손이 상당했다. 동릉 도굴 사건 때도 구덩이를 파기만 해도 물이 뿜어져나오는 바람에 병사들이 포기하며 도굴만은 피하는듯 했지만, 1949년에 아예 국가 주도로 도굴을 벌여버리면서 역시나 모조리 털렸다. 강희제와 그 후궁들의 시신은 도굴꾼들이 시체 안에 숨긴 보물을 찾겠답시고 헤집는 바람에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부장품은 보석 쪼가리 하나 남지않고 모조리 사라졌다. 남은 것은 부서진 관곽과 돌덩어리들 뿐이다.
사진 설명
패루문(牌楼门)
순치제의 효릉과 가장 큰 차이점들 중 하나다. 효릉에는 도자기로 만든 용봉문이 세워진 데 반해 경릉에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패방 모습의 패루문이 세워져 있다. 역시나 황제의 격에 맞게 5개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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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신공비루(圣德神功碑楼)
정식 이름은 '성덕신공비루'라는 거창한 이름인데 줄여서 '대비루'라고도 한다. 건물 내부에는 옹정제가 친히 강희제의 업적을 적은 석비가 있다. 그런데 강희제가 워낙에 위대한 황제였기에 그 업적을 비석 하나에 다 써넣는게 불가능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석비를 2개 세웠다. 그 이래로 모든 황제들의 영묘에 2개의 비석을 세웠다.
융은전(隆恩殿)
경릉의 정전이자 가장 중요한 곳. 이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강희제, 효성인황후, 효소인황후, 효의인황후, 효공인황후, 경민황귀비 이렇게 총 6명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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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성명루(方城明楼)
경릉의 명루다. 명루란 무덤 봉분 바로 앞에 있는 명나라식 누각으로 방형의 성곽을 두른 기단 위에 명루가 올라가 있다하여 '방성명루'라고 부른다. 방성명루 앞에는 돌로 깎은 5개의 향로와 화병이 놓여있다. 돌로 만들어져 있어서 용케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3.3. 유릉(건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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裕陵. 제6대 황제 고종 건륭제의 능.

3.4. 정릉(함풍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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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陵. 제9대 황제 문종 함풍제의 능.

3.4.1. 보타욕정동릉(서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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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祥峪定东陵. 함풍제의 아내 서태후동태후의 능.

3.5. 혜릉(동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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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陵. 제10대 황제 목종 동치제의 능.

4. 관련문서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앞쪽에 버티고 있는 산. 예를 들어 서울의 주산은 북쪽의 북악산이고 안산은 남쪽의 남산이다.[5] 게다가 실제로 청나라 초기에는 만주족의 풍습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시신을 그냥 묻는게 아니라 화장했다. 순치제의 무덤에는 보물은커녕 잿가루만 든 항아리 하나가 전부일 가능성이 컸다. 가장 중요하게는, 효릉의 비석에 대놓고 '그 어떠한 금과 옥 장식품도 숨기지 말라'라고 쓰여있었기 때문에 도굴꾼들도 땀흘려가며 도굴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6] 이렇게 지하 무덤 바로 위에 야트막하게 지어진 흙언덕을 중국어로 '보성보정(宝城宝顶)'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