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3-28 16:36:03

지젤(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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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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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옛 성채. 20세기부터 현재까지도 병영으로 쓰이고 있어 사진 촬영이 불가, 옛 사진밖에 없다.

1. 개요

아랍어 جيجل
베르베르어 ⵉⵖⵉⵍ ⴳⵉⵍⵉ
영어 Jijel

알제리 동북부의 도시. 베자이아에서 동쪽, 세티프에서 동북쪽으로 60km, 콩스탕틴에서 서북쪽으로 7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15만명으로, 베자이아와 스킥다 사이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이다. 침입을 막아주는 배후의 산지와 굴곡진 해안, 부두 역할을 해주는 앞바다의 암초들 덕에 과거 카르타고 시대부터 도시가 세워졌다. 고대의 지명은 이길길리였으나 이슬람 정복 후 아랍어 지명인 지젤이 정착하였다. 중세 시기에는 파티마 왕조의 창건 세력인 쿠타마 베르베르 인들의 거점 중 하나였고, 동부 해안은 코타마 해변이라 불린다. 동서로 늘어선 백사장 덕에 여름마다 피서객들이 즐겨 찾고, 대부분 알제리 내국인들이다. 동쪽 7km 지점 신항 쪽에 지젤 페르하트 압베스 공항이 위치한다.

중세 후반 오루츠 레이스의 거점이 되어 바르바리 해적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고, 1664년 프랑스 군이 일시 점령했으나 후퇴하였다. 그러다 1839년 재차 프랑스가 점령한 후 강한 주민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구도심을 파괴하고 군사 기지화하였다. 따라서 과거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지젤에는 메디나와 같은 구도심이나 2세기 이상의 오래된 건물이 거의 없다. 산업으로는 코르크와 가죽 정제업, 제철업 등이 발달하였다. 시내에는 지젤 대학교, 해군사관학교 등이 있다. 볼거리로 구시가지와 성채가 있지만, 프랑스령 알제리 시기부터 해군 기지로 계속 쓰이고 있어 일대를 촬영하기 어렵다.

2. 역사

카르타고, 누미디아의 지배를 거쳐 유구르타 전쟁 후 이길길리는 로마령이 되었다. 기원전 33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길길리를 로마 식민 도시, 즉 콜로니아로 전환시키며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팍스 로마나 시기 마우레타니아 주에 배속된 이길길리의 인구는 6천이었고, 이탈리아 및 이베리아 반도와의 교역으로 번영하였다. 당시 제작된 모자이크는 스킥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74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장군 테오도시우스를 파견해 도나투스파를 지지하며 북아프리카에서 황제를 칭한 베르베르인 귀족 피르무스의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테오도시우스는 이길길리에 상륙하여 협상과 게릴라전을 동행한 피르무스를 격파하고 일대를 평정하였다. 비록 이듬해에 피르무스가 자살하며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도중 피해를 입은 이길길리는 429년 반달 왕국에게 점령된 후 쇠퇴하였다.

2.1.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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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레이스 제독의 지도 중앙부의 지젤 뒤켄 요새 앞에 있는 바바 우르지 기념 조형물

반달 왕국. 동로마 제국의 재정복에 이어 7세기 후반 일대는 우마이야 왕조에게 점령되었다. 아랍인들은 현지인들이 부르던 '길길'을 변형시킨 지젤이라는 지명을 정착시켰고, 적극적인 개종 정책으로 8세기 말까지 주민 대다수가 무슬림이 되었다. 지젤 동남쪽 소 카빌레 산지는 10세기 초반 파티마 왕조를 세우는 쿠타마 베르베르 인들의 거점이었다. 그후 일대는 파티마 조, 지리 왕조, 함마드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143년에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 인들에게 점령되었다가 1152년 무와히드 왕조령이 되었고, 다시 13세기 하프스 왕조에 편입되었다. 13세기 말 ~ 14세기 중반의 혼란기에 베자이아 혹은 콩스탕틴 공국에 포함되었던 지젤은 1500년경 제노바 공화국에 복속하여 유럽에 지젤리 (Djidjelli)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다 1514년 하이르 앗 딘 바르바로사 형제에게 점령되어 바르바리 해적의 거점이 되었고, 자동으로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었다.

바르바로사 형제는 지젤을 기반으로 1516-18년에 걸쳐 모스타가넴, 셰르셸, 알제 등을 점령하며 현대 알제리의 기틀을 마련한다. 알제 총독령의 주요 도시로써 지젤에는 예니체리 부대가 배치되었고, 1555년 살라흐 레이스는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인근의 베자이아를 스페인으로부터 되찾을 수 있었다. 현재까지도 주민 중 일부는 예니체리 주둔군의 후예라고 한다. 안달루스 출신 이주민들이 가세한 사략선 활동으로 번영하던 도시는 동부 알제리의 수피즘 (특히 라흐마니야 종단) 중심지로 높은 문화 수준을 이루었다. 하지만 도시의 번영을 가져다 주었던 해적질은 유럽 국가들에 있어서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1664년 프랑스의 야심찬 군주 루이 14세는 프랑스 해상 무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마치 1661년부터 영국이 탕헤르를 이용하는 것처럼) 알제와 튀니스 사이에 위치한 지젤을 정복하여 바르바리 해적에 대응하는 프랑스의 해군 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2.2. 프랑스의 침공 (16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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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수뇌부는 출항 직전까지 보포르 공작 프랑수아와 가다녜 공작 샤를 펠릭스 간에 점령 대상을 두고 다투었다. 전자는 부유한 지젤을 주장한 반면 후자는 수비대가 적고 콩스탕틴에서 멀어 원군이 당도하기 까지 더 오래 걸리는 베자이아를 목적으로 주장하였다. 결국 루이 14세의 사촌인 프랑수아의 의견대로 지젤 공격이 결정되었고, 5천 6백의 병력을 실은 22척의 함대는 7월 2일 툴룽 항에 집결하였다. 발레아레스 제도메노르카 섬에서 8척의 몰타 기사단 함대와 합류한 프랑스 군은 7월 21일 베자이아를 거쳐 23일 아침 지젤 연안에 나타나 성채를 포격하며 상륙 작전을 개시하였다. 4천의 프랑스 군과 1천 2백의 몰타 군은 하필이면 수피 성직자 (마라부트)의 무덤에 상륙하였고, 따라서 분노한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다만 3개의 부대로 나뉜 침공군이 공격을 이어나가자 베르베르계 수비대는 카빌레 산지로 피신하였고, 밤까지 도시는 점령되었다.

다음날 현지인들이 백기를 흔들자 원정군은 사격을 중단하고 협상을 시도했는데, 이때 산에서 내려온 카빌레 부대가 습격을 가하여 프랑스 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비록 몰타 부대가 반격하여 격퇴해내었지만, 프랑스 군은 4백의 전사자를 내었다. 그후 원정군은 도시를 요새화하고 수성에 전념하였고, 카빌레 산지의 쿠쿠 왕국과 베니 압베스 군대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10월 6일) 한편 9월 22일에 식량 등을 실은 12척의 보급 함대가 출항한 것에 이어 10월 18일에는 두 기병 부대의 증원 병력을 실은 6척의 함대가 툴룽을 떠났다. 이들은 10월 22일 지젤에 당도하였고, 보포르공 프랑수아 대신 가다녜공 샤를 펠릭스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러자 같은날 프랑수아는 휘하 병력과 귀환해버렸다. 그무렵 툴룽에서 전염병이 퍼져 더이상의 보급품이나 증원 병력이 지젤에 당도할 수 없었고, 알제와 콩스탕틴의 베이들이 병력을 보내 도시를 봉쇄하는 악조건이 이어졌다.[1]

이어진 전투로 원정군 중 절반은 포로가 되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현지화되거나 몸값을 내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샤를 펠릭스는 10월 30일과 31일의 밤을 틈타 성벽을 허물고 남은 병력과 함께 철수하였다. 함대는 무사히 툴룽으로 돌아왔지만 전염병 방지를 위해 격리되어 입항하지 못한채 대기하다가 노후 선박 라 루네가 침몰하여 병사 7백명이 익사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백여명의 생존자들은 당시까지 무인도이던 포흐 크호 섬에 당도했지만 전부 아사하였다. 이듬해인 1665년 8월 25일 보포르공 프랑수아는 알제리 해적선 두 척을 격침하고 세 척을 나포했는데, 그중 하나에서 1664년 지젤 원정 당시 프랑스 군이 버리고 갔던 대포가 발견되었다. 같은해 11월 25일 프랑수아는 튀니지의 베이와 휴전을 맺었고, 다시 1666년 5월 17일에는 알제의 베이와 휴전을 맺었다. 다만 당초 목적 중 하나였던 '프랑스의 요새' 엘 칼라[2]의 재건은 1682년 알제 포격 이후에나 이뤄졌다.

2.3.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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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켄 성채. 현재는 주변이 매립되어 바다와 수십미터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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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시가지 전도

1830년 알제를 정복한 프랑스는 1839년 5월 13일, 175년만에 재차 지젤을 점령하였다. 프랑스 인들은 기존 구도심 동남쪽에 뒤켄 요새를 세우고 정착하였다. 1842년 주민들은 압델 카데르의 선동으로 봉기하였고, 이는 1851년을 정점으로 10여년간 이어졌다. 1856년 지진을 겪은 후 프랑스 군은 도시 재정비를 핑계로 구도심 전체를 몰수하여 파괴한 후 군사 기지를 세웠다. 1860년 지젤은 코뮨으로 승격되었고, 많은 유럽인 거주민이 유입되었다. 독립 후 지젤은 80년대를 거치며 인구가 두배로 늘었고, 특히 카빌레 지역의 혼란을 피해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다. 1990년대 알제리 내전 당시 지젤은 이슬람구국전선 (FIS)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고, 1993년부터 휴전이 체결되는 1997년 9월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시가전의 결과 수천명의 주민들이 납치되거나 살해되었고, 수만명이 피난하였다. 그러다 21세기 들어 재정비되어 현재는 피서객들이 찾는 안정된 도시로 남아있다.

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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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부분이 시타델 성채, 오른쪽 아래가 뒤켄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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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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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세워진 서쪽 외곽 반도의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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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켄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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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 부분 확대

3.1. 옛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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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이들과 대립하던 쿠쿠, 베니 압베스 왕국이 자체적으로 도시 탈환에 나섰으나 실패하자 정부군에게 길을 열어준 것[2] 안나바타바르카 사이의 프랑스 거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