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 묘사되는 개변된 역사를 서술한다.1914년 대한제국 지도
1차 대전 참전 직전 시점. 아직 남만주를 정식 영토로 인정 받지는 못한채 영향력만 행사중이다.
1917년 대한제국 지도
한인 다수 거주 구역인 북간도와 서간도는 영토로 인정받았으며 요동반도를 제외한 남만주 전역을 군정 형태로 영향권에 포함시킨 채 북만주 진출을 노리고 있다. 1918년 시점에선 합이빈이 최북단으로 여겨질 정도로 영토화에도 진척이 있다. 그와 별도로 의주와 남만주, 합이빈을 이어주는 철도 교차점인 봉천은 직접적 이해관계가 얽힌 국가만 한중러영일 5개국이라 러시아 제국에게 통제권을 이양받았음에도 대한제국이 오롯이 장악하지 못한 채 상하이와 유사한 국제도시로 남았다. 봉천에서 북경 방향으로 이어진 철도는 영국이, 봉천 도심과 외곽 지역은 일본이 지분을 갖고 있는 상태. 봉천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 철도로 연결되는 장춘으로 행정력 투사도 제한이 걸려 있다. 대한제국이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넘겨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추산한 남만주 인구는 1500만.[1][2]
1차 대전 승전 후 협상을 통해 요하 이동 - 송화국 이남 남만주 지역과 송화강 이북 - 아무르강 이남의 북만주는 이권 지대로 인정받는다. 관동주는 한국이 너무 강해지는 걸 원치찮은 영국의 견제로 일본의 위임통치령으로 빼앗기되 비무장지대화하여 일본도 제대로 쓰지 못 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한다. 별도로 전러시아 임시정부에게 연해주의 포시예트를 할양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1920년 대한제국 지도[3]
1919년 3월 소련과의 외교정상화 과정을 거쳐 동쪽으로 아무르강과 다싱안링 산맥, 서쪽으로 치치하얼과 눈강을 소련과의 국경으로 확정지어 영토로 편입시켰으며 전러시아 임시정부에서 추진한 포시예트 할양건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만주의 개발, 주민 동화는 남과 북에 차이가 현격하다. 남만주는 러시아가 대한제국이 20세기 초부터 도로와 철도를 깔고 도시를 세워 인프라를 조성했고 인구도 많아 정부의 시책이 비교적 신속하게 적용될 수 있었다. 민족의식이 심화되기 이전인 19세기~20세기 초에 만주로 넘어온 이들이 많아 학부가 주도한 교육 정책, 철도경비대를 시작으로 군경 입대 허용, 강종이 주도한 농경지 개척과 고구려사 재발굴 등 20여년간 시행된 적극적인 동화 정책에 순조롭게 적응해 스스로를 대한제국 인민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수준에 다다랐으며 삼남과 함께 대한의 강역에서 황실에 대한 지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반면 1919년에야 영토로 넘어온 북만주는 치치하얼과 다칭을 제외한 제대로 된 도시가 존재하지 않는 미개척지고 인구 밀도가 극히 낮아서 요서에서 넘어오는 한족 이민을 최대한 틀어막던 기존 정책을 일시적으로 해지하고 한족 이민을 받아 개척촌을 세워 나간다. 1920년대 대한제국으로 넘어온 이들은 당연히 중국인 정체성이 훨씬 강하고 남만주인들과 정서적 유대감이 전혀 없다.
남만주인들은 새로 이주해 온 북만주인을 굴러들어온 돌 취급해 배척하다 급기야 자경단을 꾸려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북만주인들도 이에 맞서 자경단을 꾸리거나, 마적떼를 고용해 대응해 정부에서 재지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2. 개변된 역사
-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처절한 저항 끝에 밀린 것은 원 역사와 동일하나 여기서는 김시혁의 개입으로 원 역사보다 2~3시간을 더 버티며 일본군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일본군은 경복궁을 향해 대포까지 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반정부 성향의 일본인 기자가 이 장면을 찍어 김시혁에게 넘기는 바람에 약점이 잡혀 원역사에선 창설을 막았던 친위영의 설치를 허락해야 했고 친위영 소속의 김시혁이 주도하는 군제 개혁에도 딴지를 걸지 못하게 된다.
- 동학 농민 혁명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2차 봉기가 터진 건 동일하지만 진압과정이 사뭇 달라졌다. 원역사에서는 동학군이 이인-효포 가도는 점령해놓고 우금치에서 참패했는데 여기서는 김시혁의 개입으로 이인-효포 가도에서 동학군이 와해된다. 홀로 떨어져 세 불리기에 전념하던 김개남 봉기군도 관군과 민보군의 공세에 무너져 1895년이 오기도 전에 진압이 완료되어 동학군이 원역사보다도 빠르게 무너졌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잡히지 않고 몸을 피했으나 이후 조직의 운영을 놓고 남접의 사이비화를 경계하고 북접과 연계해보려던 전봉준이 김개남에게 살해당하고, 김개남은 다시 남접을 사유화한 강경파들에게 제거된다. 완전히 이교 무리로 전락한 남접은 서남해 해적과 연계하고 활빈당, 영학당 등 지하조직을 구성해 제 2, 제 3의 반역을 꾀하다 전부 토벌되고 남은 잔당은 종말론이나 주워섬기는 사이비 종교로 전락한다.[4] 반면 비교적 정권에 협조적이었던 북접은 극동 전쟁 발발 이후 유림과 나란히 호남에 형성된 제 2전선의 주축으로 활약, 신원 복권되어 훈장도 수훈받고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제도권 하의 기성 종교로 올라선다.
- 대한제국 친위 쿠데타
작품상에서 총 2번에 걸쳐 일어나며 1차 쿠데타는 경복궁 습격과 동학 농민 혁명 진압, 을미사변 이후 조선 내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김시혁이 원역사의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기반으로 친일파 내각 척결 계획을 세운 쿠데타로[5] 원역사의 두 사건에서는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해 미국 공사관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여기서는 고종이 탈출하지 않고 경복궁에 머물며 김시혁이 이끄는 소부대와 보부상들이 일본군의 진입을 러시아군이 도착할때까지 막아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용산의 일본군이 도착하기 전에 러시아군이 한 발 앞서 도착하며 1차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이후 2차 쿠데타는 역시나 일본이 다시금 친일 내각을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극동에 전운을 고조시키고 고종도 김시혁을 견제하며 전쟁 준비가 힘들어지자 역시나 김시혁이 수립한 황색 작전을 발동하여 일어나며 역시나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고종의 실권도 대부분 앗아가며 극동 전쟁 준비의 최후의 기반이 되어준다.
- 대한제국 군제개혁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군사 항목 참조
- 의화단 운동
전개 자체는 원역사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원래 역사에선 물자만 팔았지 참전은 안 했던 대한제국이 여기서는 군대가 어느 정도 키워지고 결정적으로 간도지역 한인촌 및 접경지 보호, 청에 파견된 주재관의 위험이라는 명분이 생기면서 참전하게 된다. 김시혁의 각종 개혁으로 성장한 대한제국군의 첫 국제 무대 데뷔전이며 실제로 활약을 이어가지만 고종이 폭주하면서 험난한 여정이 될거라 예상됐으나 다행히 전리품으로 보낸 자금을 본인 비자금으로 돌린 거 외엔 큰 트롤짓은 없었으며 그마저도 해군 육성 자금으로 투자된다.
- 1901년 대타협
원역사에선 없던 외교전으로 일본이 만주와 한반도에 야욕을 드러내자 김시혁의 주도로 프랑스에 중재를 요청했고 거기다 고종이 독일도 끌어들이며 2차 삼국간섭의 형태가 되어 아쉬운 대로나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 극동 전쟁
김시혁의 개입으로 역사의 큰 물결이 바뀐 대표 사례로 원역사의 러일전쟁에 대한제국이 러시아 편에 붙어 싸우게 된데다 1904년 2월에 벌어질 전쟁이 1903년 10월로 당겨지면서 한러일 모두가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전쟁에 돌입했고, 이 결과는 엄청난 변화로 바뀐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포츠머스 조약
원역사와 비슷하게 포츠머스에서 전쟁의 끝을 알리는 조약이 체결된다. 하지만 원역사와 차이가 있는 것이 우선 전쟁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대한제국의 입지가 커지며 협상 당사자로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로 인해 원역사대로면 이 조약으로 한국의 식민화가 확정되지만 여기선 한국이 승리한 만큼 한국의 식민 조항은 당연히 삭제되고 한러방위협정을 끝내는 대가로 일본에 목줄을 채우는 방향으로 협상이 끝난다.[6]
- 남만주의 대한제국-장작림 전쟁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국에게 할당된 남만주를 두고 한일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물론 우선권은 열강들에게 인정받고 남만주를 사실상 점유한 한국에게 있었지만 일본군부의 대륙에 대한 집착은 엄청났다. 한국 역시 당장 남만주를 제대로 편입하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이 틈을 잘 파고든 인물이 장작림으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군의 근대화까지 이루는 등 만주에서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한다. 당연히 일본을 그를 이용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장작림을 지원했고 때맞춰 원세개도 자신의 황제 즉위 명분을 위해 고토 수복을 내걸며 은근슬쩍 장작림을 밀어주면서 장작림은 남만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됐고 결국 전쟁이 터진다.[7]
이러한 장작림의 움직임에 한국군은 신속하게 대응한다. 극동전쟁 이후 대량의 자전거를 보급하고 기동 작전 훈련에 주력한 덕분에 한국군은 미쳐버린 기동성을 지니게 된 상태였고 정보전도 잘돼서 장작림의 움직임에 대한 예견도 어느 정도 되어있었기에 전쟁에서 누가 이길지는 명백해진 상태였다. 결국 장작림은 자신만만한 공세가 무색하게 순식간에 한국군에게 반격당해 주력군의 과반을 잃고 근거지인 잉커우까지 밀리며 시한부 신세가 되고 만다.
당시 황제를 꼬드겨 일본군을 파견할 생각이던 일본 외무성은 서울에 와서야 이상사태를 감지하고 경악한다. 일본 외무성은 중국 현지의 신문을 통해서 정보를 얻은 탓에[8] 장작림이 잘 싸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한국에 왔더니 진실은 정반대 였던 것.[9] 이번 전쟁으로 장작림이 완전히 파멸하면 이번 전쟁을 지지한 원세개는 무조건 몰락하는 길밖에 없으니 대륙의 주도권 전쟁의 승패 결정권이 사실상 한국의 손에 들어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일본이 지난 수십년간 대륙에 펼친 모든 영향력이 소멸할 게 확실했다. 결국 이전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은 일본은 장작림이라도 살리기 위해 주변국들에 중재를 요청하기 시작한다.
결국 러시아 공사관에서 한국에게 전투 중지를 요청하면서 장작림은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다시금 인고의 시간을 보낼 것을 다짐한다. 한국은 잉커우를 포격해 파괴하는 선에서 군사 행동을 마무리 한 뒤 장작림의 행동을 빌미로 북양정부에게서 막대한 배상금을 뜯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쟁은 마무리 되지만 장작림이 살아남으며 만주는 언젠가 다시 전쟁이 터질 수 있는 불완전연소 상태로 남게 된다.
- 호국전쟁
대한제국의 개입으로 원세개는 한층 처절하게 몰락한다. 홍헌제제로 혁명의 이상을 무너뜨리고 일본이 제시한, 사실상 국권 침탈 시도인 21개조를 받아들인 북양 군벌은 한간 취급을 받으며 국민의 지지를 상실한 반면, 수차례 실패로 위상이 땅에 떨어졌던 쑨원은 역으로 불굴의 애국지사로 부상한다.
원세개에게 파견된 일본 군사 고문단의 활동과 일본의 자금 지원은 대한제국 원수부 기록조사실이 포착하는 족족 언론에 까발려 효과적으로 차단된 반면, 대한제국 고문단에게 속성으로 군사교육을 받고, 그들의 보조를 받은 호국군은 원래 역사보다 훨씬 효율적인 전투 지휘가 가능해진데다 한국의 동맹인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통해 무제한에 가까운 군수품과 인력을 공급해주면서 운남과 사천의 군벌들을 아우를 수 있게된 호국군은 짧은 시간에 6개 사단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결성하는데 성공한다. 호국군은 허술한 진압군을 손쉽게 격파하며 사천을 휩쓸었고 이에 자극받은 광동과 광서 군벌들까지 호응하며 15개 사단 20만으로 세를 불려나간다. 반면, 원세개 측은 한국 육군 2개 사단이 산해관 인근으로 기동하는 바람에 50만에 달하는 주력 부대가 북쪽에 발이 묶여 차오쿤이 지휘한 토벌군에 겨우 7개 사단 6만명만 딸려 줄 수 있었고 당연히 허무하게 녹아내리고 만다.
운남, 사천을 넘어 광동, 광서까지 장악하는데 성공한 호국군이 복건성까지 넘보자 원세개는 21개조를 바로 취소하긴 어려우니 일단 홍헌제제를 취소하고 공화국으로 복귀하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으나 호국군이 그 정도로 만족할 리가 없었고 이대로면 열강이 아예 대한제국에게 중국에서의 전권을 위임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린 일본마저 손을 떼면서 완벽히 외통수에 몰린 원세개는 화병으로 쓰러져 사망한다.[10]
- 일본 육군 소장파의 김시혁 숭앙
일본 육군은 극동 전쟁 참패의 책임을 지고 원로급 노장들이 대거 할복하거나 직위 박탈을 당하면서 유신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그의 번벌을 제외한 군맥이 죄 소실되어 버렸다. 종전 이후 임관해 뚜렷한 전범(典範) 없이 성장한 위관급 장교들은 자랑스러운 일본군을 반론의 여지없이 완벽하게 깨뜨린 김시혁에게 관심을 갖고 연구하다 비어있는 그들의 우상 자리에 김시혁을 넣기 시작한다. 국군주의 사회의 젊은 장교들 눈에 일신의 능력으로 약소국에서 최고의 군대를 키워낸 불패의 명장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던 것.
여기에 좌관급 장교들, 직업상 이유로 김시혁의 행적과 전술을 깊이 파고들 수밖에 없었던 사관학교 교수들과 참모본부 아시아 제병과 참모들마저 동조하면서 김시혁은 점차 군부 소장파 전체의 우상에 가까워져 간다. 이들은 극동 전쟁은 물론 동학 토벌과 의화단 진압, 2차례의 쿠데타를 면밀히 분석하며 김시혁이야 말로 (앞으로 벌어질) 모든 전쟁의 아버지란 결론을 내린다.
일본 해군에선 육군과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는데 '해군우파'라 불리는 소장파 장교들이 굉장히 호전적인 성향을 드러내며 해군육전대를 동원해 관동주를 확보하면 한국 육군도 어쩌지 못 할 것이라는 과격한 주장을 하고 장관급 장교들이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조망하며 한국군과도 적대적 공생 관계를 유지하려는 면모를 보인다.
- 한성 폭동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대승이 본국에 전해지며 민족주의적 분위기가 기름을 붓자 일부 흥분한 하층민들이 양화진, 진고개, 정동 일대의 일본인, 중국인 거주민들에 대한 약탈과 폭행을 시작했고 이윽고 종로와 명동까지 휩쓰는 거대한 폭동으로 번진다. 전쟁으로 가파르게 상승한 물가와 흉년으로 흉흉해진 민심이 고토 회복을 부르짖으며 치욕적 과거를 상기시키는 민족주의를 만나 폭주한 것. 이를 국가헌병대의 비중을 확대할 기회로 본 고종에 의중으로 군의 개입이 일절 배제되고 경찰력으로 진압이 이뤄졌다. 진압 과정에서 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습격받은 중국, 일본인 수십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십채의 가옥이 불타, 수억의 재산피해가 발생한다.[11]
- 미국의 군사 개혁
원 역사에서도 1차 대전 시기 추진된 미국의 군사 개혁이 한국군이 독일을 참패시킨 것에 힘입어 한층 강력하게 추진된다. 연방군은 소수만 둔 채 유사시엔 다수의 주방위군으로 대응하겠다는 전통적인 방식을 폐기하고 다수의 연방군과 그 이상의 예비역을 확보하며 무장이나 훈련이 태부족하고 주지사들의 사병 성격까지 띄고 있는 주방위군을 연방군이 강력하게 통제하는 것을 골자로 하며 한국군의 전술 체계를 받아들인다. 다만, 여전히 올드 해빗이라 불리는 보수파들의 반발이 심했고 무엇보다 미국이 이런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할 어떤 인적, 물적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다보니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해프닝이 벌어진다.
- 러시아 2월 혁명
1917년 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총파업이 일어났고 근위군단을 비롯한 진압병력이 여기에 합류해 겨울궁전으로 몰려간 것까지는 동일하나 그곳에 김시진이 지휘하는 근위 시베리아 소총병 사단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은 겨울궁전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거점으로 한채 무장을 해제하고 길을 열라는 반란군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한다. 시베리아 소총병 사단에 소수 근황파 병력까지 합쳐 12,000명에 불과한 충성파는 8만이 넘는 적을 맞아 120시간 동안 방어에 성공한 것도 모자라 역공을 가하고 반군의 장갑대대까지 분쇄해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궁전을 함락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가 길어지자 방관중이던 크론슈타트 섬의 해군이 중재에 나섰고 그 결과 니콜라이 2세는 권력은 잃었으되 일단 폐위는 면하게 되었으며[12] 맨셰비키도 볼셰비키도 아닌 해군과 손잡은 입헌민주당과 두마가 정국 주도권을 쥔 상태로 오월동주가 시작된다.
- 러시아 내전
레닌의 배후에 있는 독일은 차르와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다시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러시아에 퍼뜨려 심리적 내전 상태로 몰아가려했으나 이 선동이 차르와 임시정부를 지지한 영프의 행각과 맞물려 지나치게 잘 맞아 떨어졌다. 토지개혁을 내세워 농촌의 지지를 획득한 볼셰비키는 정권 획득을 위해 발트와 갈리치아에서 막대한 규모의 붉은 군대를 꾸렸고 2월 혁명에서 손에 넣지 못 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한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 핀란드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동유럽 전체로 혼란이 확대되었고 이를 기회로 본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왕국군이 전쟁 재개를 밀어붙이며 동맹군, 볼셰비키, 차르, 임시정부와 동유럽 각국이 얽힌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 만한일체
남만주 영유권을 굳히면서 1400만에 육박하는 한족과 만주족을 통제해야 할 상황을 마주한 고종에게 이용익이 제시한 해법. 1400만의 이민족 중 소수의 진짜 만주인과 19세기에 일찌감치 넘어와 정착한 한족. 도합 800만을 만인으로 묶고 참정권을 부여해 동등한 한국인으로 끌어들이자는 것.
이들은 20세기에 넘어온 한족들과 달리 중국 본토에 향수가 없고, 비빌 모국이 존재하지 않으니만큼 참정권 부여와 행정구역 개편으로 한국인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해주면 충분히 동화가 가능하다는 것 이었다. 효율적인 융화를 위해 부왕령이나 총독령 같은 특수행정구역 설치 대신 프랑스의 데파르트망을 참조해 본국과 남만주를 모두 동일한 행정 구역으로 재편하는 방안이 동시에 제안된다.
인구 2500만 본토로 1400만의 한인, 만인을 통제하는 상황이 3300만으로 500만 한인을 제어하는 상황으로 획기적으로 개선됨과 동시에 전쟁 여파로 여력이 없어 많은 비효율에도 고수하던 13도 23부제의 어정쩡한 섞어찌개도 탈피가 가능함은 물론 선거구 개편으로 정국에도 큰 변동을 가져올 수 있음을 헤아린 고종은 받아들인다.[13] 신채호에게 압력을 넣어 만주인은 고구려, 발해 시절 동포이자 잃어버린 형제이며 청 황실 성씨인 애신각라씨는 실은 김씨라는 주장까지 실어 만주족 동화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합이빈 현지에서 접견한 만주인들에게 한국식 본관을 만들어주거나 극동 전쟁으로 멸절된 가문의 족보에 끼워주는 식으로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이는 사회진화론과 제국주의에 침잠한 지식인들이 많은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신파들에게 어마어마한 반발을 사게 된다.
- 한국의 파시즘
극동 전쟁이란 미증유의 재난을 이겨내고 연이은 성공과 확장이 거듭되면서 암울했던 조선 말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층과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식자층 사이에서 파시즘이 파이를 키워가기 시작한다. 특히 두드러지는 건 이승만이 주창한 일민주의로 <하나의 민족, 하나의 핏줄, 하나의 충성> 이란 모토아래 만주로의 확장을 정당한 생득권으로 주장하며 그곳에 살아가는 한인, 만인을 철저히 타자화하고 내몰아 한민족만의 만주를 완성해야 한다는 나치즘과 다를 바 없는 이념이다. 유림이 중심이 된 구파와 신파 일부는 이를 나라 말아먹을 사상이라며 극도로 경계하고 있으나 확장과 승리가 당연한 시대에 사는 한성의 젊은 층들[14]은 대책없는 우월주의를 내비치며 이에 경도되어 가고 있다.[15]
- 한불동맹
영일동맹의 아시아 장악이 갈수록 노골화되는 가운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비롯한 아시아 식민지 이권을 지키려는 프랑스의 일본의 침탈로부터 만주, 더 나아가 국가의 생존을 지키려는 대한제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히든 카드. 초안이 된 것은 프랑스의 델카세와 대한제국의 홍종우가 기안한 3S 정책. 서울-상하이-사이공으로 이어지는 정치, 경제, 외교 블럭화이며 1차 대전의 향방을 바꾼 한국군의 활약이 더해져 서구 열강과 아시아 신흥국의 공식 동맹관계로 판을 키웠다. 당초 영국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프랑스는 조약에서 태평양이란 구문을 빼고 인도차이나가 들어간 두루뭉실한 조약을 원했으나 대한제국 측의 강력한 요구와 배상함으로 받을 독일의 미완공 전함들[16]을 완공하는데 프랑스산 원자제를 사용하겠다는 당근으로 지중해와 태평양 양 대양으로 확실하게 못 박는데 성공.[17] 1918년 4월 15일. 공식적으로 동맹이 체결되어 열강으로 공인받았는다.
한불 양국만이 아니라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유일한 돈줄인 동인도를 지킬 힘이 필요했던 네덜란드, 파나마 운하 개통 이후 아시아로 투사력이 한결 간편해졌으며 필리핀이란 식민지를 두고 있는 미국, 프랑스와 한국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중국 국민정부[18]까지 끼어들어가 영일동맹과 그들의 입김 아래 있는 화북 중화민국에 맞서는 거대한 블럭이 형성된다.
- 외규장각 도서 반환
한불동맹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영국인 기자가 심술궂게 던진 질문이 빌미가 되어 터진 나비효과. 50년전 옛날 일이고 프랑스 입장에선 동양함대가 벌인 소소한 무력 충돌에 불과했던지라 인식조차 없었던 프랑스 실무진은 다름아닌 김시혁 원수의 아버지가 병인양요 참전용사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급히 도서들을 반환하겠다는 입장을 추가한다. 이로서 300여 책의 의궤들이 수십년 일찍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 아미앵 독감
원래 역사보다 훨씬 대규모로, 빠른 시기에 창궐을 시작한다. 유럽으로 파병된 미군 장병들이 옮겨온 질병이 이상기온 현상과 열악한 위생 환경을 타고 영프 장병들에게로, 이어서 동맹군 병사들에게까지 번져갔는데 미군의 참전 시기가 당겨지고 규모는 훨씬 늘어났으며 윌슨 대통령이 보고를 받고도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해 유럽에 도착했을 땐 이미 거대한 역병 덩어리로 키워져 버린다. 그나마 수도 적고, 후방에서 정비중이었던 한국군은 김시혁의 선제적 예방 조치에 힘입어 피해가 덜했으나 규모가 훨씬 큰 영프군과 의료 인프라와 보급이 붕괴되어 위생과 영양 상태가 한계에 달한, 동부전선 조기 종전 영향으로 원역보다 더 거대한 규모로 힌덴부르크 선에 처박혀 있던 독일군은 짧은 시간에 수십만 명이 감염되었다. 한국군과 아미앵에서 맞붙어 참패한 다음에 창궐한지라 독일 내에선 아미앵 역병, 아미앵 독감이라 부르며, 과거 몽골이 끌고온 페스트처럼 동방의 군대가 가져온 재앙으로 여기는 미신이 번진다. 남만주 철도를 타고 대한제국에도 창궐을 시작해 순식간에 한성까지 휩쓴다. 최초 창궐 보고를 들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황궁 내부에 감염자가 발생할 정도로 빠른 전염성에 고종은 거처를 경운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는 한편, 자신이 조장한 땔감 사태와 독감 방역을 빌미 삼아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다.
2.1. 제1차 세계 대전
원래 역사에서도 1910년대 초반에 버차니를 중심으로 군사 개혁을 추진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대한제국을 방문해 김시혁에게 보다 상세한 노하우를 전수받는 한편 회첸도르프와 그를 지지하는 보수파와도 타협에 성공한다. 개혁에 탄력을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본래라면 정예들을 모두 잃어야 했을 프셰미실 전투에서 정예 병력을 보전하는 데 성공하고[19] 갈라치아까지 일방적으로 패퇴한 러시아는 극동의 대한제국에게서 돌파구를 찾으나 일본의 위협과 내부 갈등으로 쉬쉬하는 모습을 보이자 관동주(뤼순, 다롄) 매각을 조건으로 일본과 접촉할 만큼 급하게 움직였다. 관동주 매각은 곧 안보적 사형선고이기에 참전할 수밖에 없게 된 대한제국은 프랑스에 중재를 요청해 관동주 매각을 뒤로 미루고 본격적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한다.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러시아군을 압도해버린 탓에 부전선을 맡은 영국과 프랑스. 특히 프랑스의 손실이 막심해져 식민지 병사들까지 끌어와 처절한 방어전을 벌였으며 이탈리아는 이대로는 북부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에 도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원래 역사처럼 협상국으로 참전. 이손초에서 오스트리아군과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벌인다.
* 브루실로프 공세
원역사의 동부전선 브루실로프 공세와 달리 김시혁이 본격적으로 유럽 전쟁사를 바꾸게 된 계기다. 동부전선 참전이 확정된 뒤 대한제국이 참전하게 된 최초의 전투로 원역사와 달리 렘베르크와 슈타니슬라우를 차지했으며 독일군조차도 한국군을 막지 못한채 군단 하나에게 집단군[20]이 갈리는 등 원역사와 많이 다른 전개를 보인다.
자신만만한 독일군 앞에 진정한 전쟁기계의 위엄을 선보이며 단 6주만에 독일군 20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 35만을 녹여버리고 동맹군이 서부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을 내놓은 채 비스와강 유역까지 물러나게 만들었다.[21] 다만 파벨 대공의 트롤링으로 코벨을 포위해 섬멸하고 전쟁을 조기 종전 시킨다는 최초의 목적은 이루지 못한 채 라스푸티차와 보급의 한계로 한달 반만에 종료된다.
최종목표 달성엔 실패했으나 동부전선을 사실상 1914년 국경으로 되돌리고 베르됭 공세에 사활을 걸었던 서부전선 독일군까지 멈춰세움은 물론 오랫동안 간을 보던 루마니아의 참전이 사실상 확정되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부담이 극심해졌다.[22]
원역사보다 훨씬 큰 승전은 다른 협상국의 분위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프랑스 신문이 브루실로프와 김시혁을 성자로, 한국군과 러시아군을 성자의 군대로 묘사한 만평을 실는가 하면 영국군은 타타르와 황인종들이 한 걸 자신들이 못 할리 없다며 적극적으로 솜 전투를 밀어 붙인다. 일본에서도 천황이 직접 니콜라이 2세와 고종에게 축하서신, 김시혁에게 국화장을 서훈한다. 김시혁에게 직접 깨져본 일본군 고위 장교들은 소장파에 팽배한 김시혁 숭상에 힘이 더해질 것을 우려한다.
- 치머만 전보
원역에서도 독일의 참담한 외교 안목을 보여줬던 사건이 더 빠른 시점에, 더 큰 스케일로 벌어진다. 동부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안긴 한국을 떨쳐낸답시고 중국과 일본 양쪽에 동맹을 제안하며 전보를 보냈는데 중국에는 교주만, 관동주, 남만주를 탈환해주겠다, 일본에는 관동주, 교주만, 남태평양의 섬들 영유권을 인정해주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아무나 하나 걸리라고 막 던진 것으로 당장 중국과 일본의 조건이 서로 양립이 불가능하다. 여기에 멕시코에 보내는 전보는 또 똑같이 보내서 동서로 불을 지른 꼴이 되었다.
- 비스와 강의 기적 혹은 피의 가을
한국군의 활약으로 갈리치아를 수복하고 왕조의 수명을 연장할 기회를 잡은 로마노프였지만 멍청한 니콜라이와 그를 둘러싼 궁정귀족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 해 기어이 추가로 일을 벌린다. 이번에 확실히 승리를 거둬서 지난 루츠크 전투에서 상실한 러시아 제국 근위대의 손실을 무마시키고 정치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확보하겠다는 차르의 욕심과 그에 부화뇌동한 궁정귀족들은 내각과 스타브카의 공세 만류에도 불구하고 1914년 개전 이전 국경선 회복 및 동프로이센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전쟁을 확실히 끝내겠다는 명목으로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살아남은 훈련된 병력을 모조리 쏟아부은 2차 공세를 실시한다.
그러나 공세의 중심이었던 비스와 강 너머엔 3개 제국과 1개 왕국의 최정예들이 칼을 갈며 기다리고 있었다. 팔켄하인은 러시아의 어설픈 기만전 시도를 간파하고 지난 전투에서 패배한 린싱겐을 야전원수로 진급시킨 뒤, 젝트 중장과 함께 바르샤바의 독일군을 비롯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오스만 제국군, 불가리아 왕국군 도합 40여 만 명을 편성해 역습을 노렸고, 부르흐뮐러 대령이 지휘하는 4,000여 문의 집중 포격 전술과 정교한 화학탄 투발로 러시아 제3군과 제8군을 사실상 궤멸시킨다. 비스와의 참패를 시작으로 동부전선 전역에서 동맹국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고, 김시혁과 브루실로프의 승전이 무위로 돌아감은 물론 전 전선이 무너져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른다.
패전을 눈앞에 둔 러시아가 매달릴 곳은 한국군 밖에 없었다. 온정에 호소하고, 재조지은을 부르짖고, 종국엔 한국이 싸워주지 않으면 우리도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는 저열한 협박까지 늘어놓으며 참전을 채근한다. 김시혁과 주러 한국대사 이상설은 본국 여론을 설득할 대가로 하얼빈 이남의 철도 노선 지분을 한국에 매각하는 형식으로 전부 넘기고 이를 공식 문서화할 것을 요구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러시아는 받아들인다.[23]
- 다섯 군대 전투
재전을 결정한 김시혁은 상처 입은 사단들을 재투입하는 대신 유일하게 건제를 유지한 시베리아 소총병 여단에 타 부대에서 각출한 공병, 포병, 강습 대대들을 더해 증편 여단을 꾸려 교통의 요지 코벨로 나아간다. 절망적인 사투를 벌이던 러시아군이 한국군의 도착을 목도하고 보여주는 반응이 실로 열렬한데 총사령관인 브루실로프조차 그들을 성자의 군대라 칭하며, 장병들은 숫제 무릎을 꿇고 기도와 칭송을 바친다. 딱 이 친구들이 생각나는 장면.[24] 그렇게 다섯 제국[25]의 군대가 코벨에서 마주친다.
적 병력 살상과 장비 무력화에 주력하는 화학전 교리를 막 완성한 동맹군에게 투발 농도와 작용제를 전부 다르게 나눠서 전술적 행동을 제약하는 현대식 화학전 교리[26] 를 선보이고, 독일이 자랑하는 스톰트루퍼마저 강습보병대와 포병대로 통렬히 받아쳐 오스만 최정예 일디림 군단에게 괴멸급 피해를 입혔고[27] 코벨 북서쪽에선 러시아군도 칼닙카에서 오스트리아-불가리아 군을 저지, 린징겐의 공격 의지 자체를 분쇄해 버리고 코벨 방어에 성공한다. 각각 에스토니아와 벨라루스로 진격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나르바와 모길료프에서 라스푸티차와 러시아군의 악착 같은 저항에 진격이 둔화되어가다 코벨 공략 실패로 보급이 위태로워지자 눈물을 머금고 메멜-카우나스 선으로 철수한다. 독일이 공세종말점에 이른 것을 확인한 스타브카는 민스크의 근위군단을 코벨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키던 6군은 나르바로 증원해 예비대를 남김없이 털어내 전선을 강화한다. 결국 동부전선사령부는 물론 카이저와 팔켄하인마저도 동부 전선을 포기하고 서부 전선에 모든 걸 거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 러시아의 단독 강화
김시혁과 한국군의 선전이 불러온 나비효과. 차르의 실권만 빼앗은 채 연정 체계를 꾸린 러시아는 김시혁이 갈리치아를 지켜내고 동맹국 정예 부대를 격파해놓은 덕분에 각 정파가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동맹군의 칼 끝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 원 역사의 브레스트 조약보다 훨씬 관대한 조건으로 전쟁에서 빠져나갈 조건을 달성한다. 이는 곧 영프에겐 거대한 공포였다. 동부 전선에 있던 300만 동맹군의 서부 전선 합류가 시간문제가 되었기 때문.[28] 막대한 물량을 가진 미군이 본격적으로 배치되려면 1918년 여름까지 기다려야 했다. 진지하게 생존의 위협을 느낀 영프는 동방의 두 제국. 한국과 일본을 무슨 수를 써서든 호출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은다.
- 한국의 서부전선 참전과 일본의 회피
협박과 경고가 뒤섞인 독촉을 받아든 양국의 태도는 상반되었다. 내각과 중추원의 결정에 복종하는 군부가 중립을 견지하는 상태로 황실, 내각, 중추원이 갑론을박을 벌였으나 만주의 이권과 막대한 채권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선 파병 밖에 없다는 데 뜻을 모은 한국은 군단급 병력과 독립지휘권을 보장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김시혁의 보장을 누름돌 삼아 지구 반대편 전장으로의 참전을 결정된다.
반면, 거의 동시에 논의를 시작한 일본은 덴노와 민간 내각이 지지하는 파병을 군부가 작당해서 엎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육군대신 다나카 가이치가 중심이 되어 내세운 명분은 극동전쟁 패배의 상흔[29]을 극복 못 한 육군은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단 규모 파병이나 한국군과 연합작전 등의 대안도 모두 고사한 군부는 육해군 장교단 수백명으로 참관단을 구성해 파견하고, 수송 전력이 태부족한 한국에 수송함대를 지원하는 것을 타협안이라며 내놓는다.
한국군 군단의 참전 소식을 접한 프랑스는 반색하며 최신 스패드 전투기의 우선 공급을 약속했고, 일본을 향한 배신감에 치를 떤 영국은 김시혁을 포슈 바로 아래 협상국 최고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추천하는 한편 동맹의 대가로 일본에 지급하던 군사 예산을 한국의 전비를 지원할 예산으로 돌려버린다. 눈치가 보인 일본은 결국 지상군을 파병하기로 하는데. 그 지상군이란게 자원병 6천이었다. 이것도 늘어난 것으로 육군에서 처음 제시한 병력은 2천명이었다. 훨씬 국력이 약한 태국도 1200명을 보내기로 했는데. 6천 파병을 당당히 전달한 것도 모자라 필요한 물자 지급도 전부 영국이 떠맡을 것을 요구해 영국 정계에 어이를 빼놓는다.
- 카포레토 전투
2차 파스샹달 전투와 말메종 요새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독일은 솜과 파스샹달에서 얻은 이득을 모두 토해낸다. 동부 전선에 있던 병력이 재배치되기 전까지 시간을 벌고, 미군과 한국군이 본격적으로 배치되기 이전 승기를 잡을 방안이 필요했던 힌덴부르크는 오스트리아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이는 김에 북이탈리아에 새로운 전선을 열기로 한다. 격전지인 이손초의 북쪽의 카포레토를 쳐서 산악에 묶여 있는 이탈리아군을 포위섬멸하고 자연방위선이 부족한 북이탈리아를 쓸어버리는 것. 한국군의 전술을 받아들여 한층 날카로워진 독일군의 공세는 이탈리아군 사단의 절반을 와해시키는 치명타를 입히며 성공하고 수십만 대군의 물자가 적재되는 베네치아와 산업 중심지 밀라노를 위협한다. 이탈리아는 남은 정예병력을 전부 끌어모아 피아베 강에서 혈전을 벌이고, 자칫 남프랑스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 다급해진 프랑스는 한국에 추가 파병을 요구한다.
- 한일 추가 파병
대등한 관계는 아니나 비백인, 비열강 국가로서 상당한 양보를 받은 동맹제안에 한국의 여론은 추가 파병 찬성으로 기울고, 김시혁의 제안에 따라 이미 한계에 달한 함경, 평안 대신 황해와 경기에 3급 동원령을 내려 5만의 병력을 추가로 징병하기로 한다.[30] 한편 영국에게 전후 아시아 질서를 아예 재편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들은 일본도 자원병으로 퉁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정부에 반항적이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관동에서 5만을 징발해 추가 파병하기로 한다.
- 독일의 공세 지연
이탈리아에 치명타를 입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한국과 일본의 원정군이 완편되고 협상국이 전력을 정비하기 전, 프랑스와 영국의 지경선인 아미앵을 돌파해 파리까지 진격하는 미카엘 작전을 기획하고 사단을 대규모로 끌어모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볼셰비키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내전 상태에 빠지자 땅 욕심에 눈이 돌아간 융커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갈리치아를 비롯한 부크강 동쪽 영토를 확보하려는 욕심에 부화뇌동하고 군부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고자하는 내각까지 합류하면서 잉크도 안 마른 강화협상을 엎어버리고 전쟁 재개를 선언한다. 이로 인해 서부 공세에 투입되어야 할 사단들이 줄어들고, 공세 시기마저 늦춰져 김시혁과 포슈에게 최소한의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게 된다.
- 미카엘 공세
김시혁의 조언에도 헤이그가 끝내 아미앵 방면 방어를 등한시한 반면 독일군은 원 역사보다 더 많은, 강력한 병력을 쏟아붓는다. 여기에 협상국 수뇌부가 적의 주공 방향을 아직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한국군 예비대의 출동을 막아버리면서 김시혁은 긴급출동한 한국군 2개 대대, 일본군 의용여단 4개 대대, 영국군 패잔병 3개 대대의 도합 9개 대대와 프랑스 민간인들을 통솔해 독일군 85개 사단에 맞서게 된다.[31]
원역사에서는 최초의 미카엘 공세로 아미앵을 타격하는데 실패하자 게오르게테, 블뤼허-요르크, 그나이제나우 공세로 협상국의 방어 압력을 줄이는 시도에 들어가지만 러시아의 조기 종전으로 원 역사의 2배에 달하는 병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한국군 신속대응부대 2개 대대를 한국군 주력으로 착각해 파리 방면 협상국에게 남은 예비대가 없다는 착각에 빠진 OHL은 다른 방면에 있던 예비대들까지 다 털어 이미 85개 사단이 투입된 공세에 28개 사단을 추가로 쏟아부어 버린다.
OHL이 우회하는 대신 밀고 들어올 것을 예상한 김시혁은 독일군에게 전략적 불확실성을 강요해 운신을 제한하고 남은 81개 사단이 참호에 틀어박혀 협상국의 백일공세가 지지부진해 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더 과감한 기동을 결의, 2차원의 전장을 3차원으로 확장시킨 기존 보병-전차-포병 연합에 공군을 추가한 공지합동전술을 구현한다.
보급 사정까지 무시하며 조성한 압도적인 수적 우위로 김시혁에게 위협적인 상황을 조성하긴 했으나 한국군의 제병협동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실패한 OHL은 한국군의 전차 운용은 영프와 마찬가지로 보병에게 종속된 형태이며, 일부 생존자들의 증언[32]은 포병과 공습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발생한 착오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린 채 보병을 밀어넣는다. 좁은 길목에 사단을 꾸역꾸역 밀어넣다보니 포병 지원도 제대로 없이 보병만으로 싸우는 꼴이 된 독일군은[33] 21대만 생산된 A7V 중 15대를 아미앵 방면에 밀어넣어 역습을 노리다 한국군의 보전 합동에 막히고 공세가 둔화된 사이 포슈가 이끄는 프랑스군 22개 사단[34]이 증원된다. 1918년 3월 20일 공세가 시작되고 22일 독일군 선견대와 접촉, 23일 새벽 4시부터 27일 오후까지 약 5일간 12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안겨주며 아미앵에 발길조차 들이지 못 하게 만들었다.
식민지 부대의 분전과 포병전에서의 우세를 기반으로 1군과 10군의 충격부대가 전투 전비를 마칠 시간을 벌어주는 데까지 성공했고, 3월 28일에는 47만으로 80만을 포위 섬멸하는 대포위망이라는 전쟁사에 유래 없는 시도의 막을 올린다.[35] 아직 부족한 전차, 차량의 신뢰성과 공군의 폭격 능력을 전통적인 기병대 투입으로 뚫어내며 몰아붙인 끝에 3월의 마지막 날, 독일군의 보급 거점인 페론이 협상국의 손에 돌아온다.
최종적으로 공세 선두에 섰던 독일 제2군과 제7군은 궤멸, 제17군과 제18군은 중장비를 망실한 채 몸만 빠져나갔다. 아미앵 방면에서 최소 35만에서 최대 38만의 사상자와 10만의 실종자가 발생했고 이제르와 솜강 북부, 뫼즈강 유역에서 발생한 사상자까지 합치면 도합 70만의 사상자를 내고 중장비를 거의 망실한 독일군은 공세 여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힌덴부르크 선에 틀어박힌다.
- 독일 군부 쿠데타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중태에 빠져 지도자 자리가 일시적으로 마비되어버린 가운데 페스트와 초기 증상이 일견 유사한 아미앵 독감에 대한 유언비어가 독일 각처에서 번지기 시작한다. 영국을 압박할 새로운 공세를 주장하던 힌덴부르크는 카이저의 부재와 전염병 관련 유언비어를 기회 삼아 전후 정국을 자신의 의사대로 끌고가고, 패전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라이히스탁과 내각을 무력으로 억누르고 자신이 주도하는 쿠데타를 기획한다. 의원들과 경찰 수뇌부를 포함한 관료들이 의사당에 모여 논의하는 틈을 타서 방역이란 명목 아래 의사당을 봉쇄하고 베를린 전체를 장악한다.
- 아라스 공세
카이저의 부재를 틈타 내각과 의회를 무력화하고 쿠데타를 성공시킨 힌덴부르크는 동부전선에서 이동해온 독일 최후의 예비 병력들을 총동원한 공세를 명령한다. 갑작스러운 공세 지시에 의문을 표하는 장교들을 모르는 척 속여넘긴 루덴도르프는 예비 병력들을 아미앵 역병으로 심각한 비전투 손실을 겪고 있는 영국군 2, 3군이 지키는 아라스 방면에 투입해 비미 능선을 돌파하고 영국을 단독으로 협상장에 끌어내어 프랑스와도 유리한 협상을 맺고 군부의 집권을 이어갈 계획을 세우나 김시혁과 포슈는 이미 이를 예상한 채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영국과 캐나다군의 저항을 무너뜨렸다고 판단한 독일군이 비미 능선의 돌파구를 확장하려는 순간, 한국군 2강습보병여단과 9사단이 지친 독일군의 측면을 후려치며 역공세가 시작된다. 솜과 아미앵을 거치며 정예 병력을 모두 잃고 병마와 부족한 보급에 신음하던 독일군은 사흘만에 8만 8천의 인명 손실을 내며 전면 패주하고 김시혁은 포슈와 논의한 대공세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 대공세
마지막 공세가 좌절되고 병력 손실을 감당할 수 없게된 독일군은 안트베르펜-뫼즈 방어선을 구축하던 병력까지 빼내어 힌덴부르크 선에서 틀어박힌다. 김시혁과 포슈는 협상국이 아미앵 독감의 여파를 수습하고, 독일군이 독감의 휴유증을 가장 세게 겪는 시점인 6월 초순에 전 전선에서 555만의 대군을 동원한 대공세를 기획한다. 6월초부터 7월초까지 힌덴부르크 선을 전방위로 타격해 돌파하고 7월 초부터 8월 중순까지 점령된 브뤼쉘, 스당, 메츠, 베네치아를 수복하는 이 대공세에서 한국군은 최고사령부의 전략예비대이자 2차 공세의 주역으로 스당과 아르덴 숲을 돌파하는 계획을 세운다.[36]
영프미이와 벨기에 장성들과의 협의를 거쳐 6월 6일 자정을 개시로 동서 양쪽에서 동맹군을 향한 협상국의 총공세가 시작된다. 억지로 붙잡아둔 오헝군과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예비병력까지 2차례 무모한 공세로 이미 소모시켜 버린 독일군은 동서 양쪽에서 진행되는 공세에 대응할 수 없었고 독일보다 낮은 체급으로 다면 전선을 감당해온 오헝군과 불가리아군도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오헝군은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은 이탈리아의 맹공에 베네치아에 포위 당하고, 불가리아군은 도이란을 함락하고 수도 소피아와 세르비아 양쪽으로 밀고들어오는 영프군 앞에 항복이란 선택지만 남는다. 서트라키아를 넘어 협상국 병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되면서 정예부대를 상실한 채 중동전선의 영국군을 힙겹게 상대하고 있던 오스만군의 운명도 백척간두에 놓인다. 아라스와 수아송 방면으로 가장 크게 공세를 얻어 맞은 독일군은 48시간만에 지크프리트선을 내어주고 전면 패주한다.
숲을 커다랗게 가로질러 스당 동쪽을 방어하는 핵심 요새지대인 무종을 단 하루만에 돌파하고 두지-바제이유에서 스당으로 통하는 교통로까지 차단하는 데 성공한 김시혁은 포슈, 패탱과 논의해 스당 수복의 영광을 프랑스군에 양보하고 아르덴 숲을 돌파해 프랑스-벨기에 국경을 넘기로 합의한다.
여전히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한 루덴도르프는 독일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한 채 배후중상설에 빠져 무종 함락의 책임을 오헝군에 돌려 '믿을 수 없는' 그들을 후방으로 빼 무장 해제하고 바스토뉴에 모여있던 독일 잔존병력 100만을 재무장시켜 버티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가벼운 르노 전차에 탑승한 한국군 근위기병사단은 지키는 사람 없는 아르덴 숲을 가볍게 돌파, 거대한 낫질로 퇴각하던 오헝군에 독일군 패잔병까지 쓸어담아 버린다.
7월 4일 스떼니에서 공세 시작 - 7월 4일 야간에 무종 돌파해서 7월 5일 오후에 두지 점령 - 7월 6일 오후 부이용 함락 - 7월 6일 야간 베흐뜨힉스 함락이라는 전격전을 선보였는데, 2차대전 낫질 작전 때도 프랑스에서 롬멜이 일일 30km였던 걸 1차대전 기술로 1일 25km 진격이라는 기행을 선보였다.(...) 워낙 상황이 급박해서 항복만 받고 가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라,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속한 부대가 포로로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끌려갈 때까지 5번이나 무시당했다.
- 보헤미아의 종군거부 운동
원 역사보다 까마득하게 늘어난 인명 손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오헝 제국은 1900년생 청소년들까지 징발해서 부대를 만들어야 하는 지경에 내몰렸고 이는 산업요충지로 전쟁 내내 제국의 조병창 역할을 한 보헤미아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온다. 군수단지인만큼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보헤미아는 징집에서 어느 정도 편의를 봐주는 식으로 불만을 제어해왔는데 17, 18세 소년들까지 징집되어 가니 그런 배려조차 사라지고 남성인구가 전부 사라져 말라죽게 생긴 보헤미아에선 대대적인 종군거부 운동이 일어난다. 보헤미아 북부에서 시작된 봉기는 현지 란트베어 부대들이 합류하며 보헤미아 전역으로 번졌고 19세기에 팽배한 민족주의 이념까지 더해져 체코 군단의 토마시 마사리크를 지도자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극도로 허약해진 오헝 정부는 봉기를 진압할 병력조차 없었다. 이중 제국에 충성하는 시스라이타니아 병력은 향토방위군인 란트베어까지 몽땅 전선에 내몰렸고 비교적 협조적인 헝가리의 혼베드도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한때 충성스러웠던 남슬라브인도 역시나 피해가 누적되었음에도 독일계, 헝가리계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있던 상황이라 불만이 팽배해 내전 진압에 투입이 불가능했다. 이중 제국이 산산조각 나게 생긴 상황에서 카를 1세는 제국의 명맥만은 이어보고자 무력 진압을 포기하고 동맹국에서의 이탈과 시스라이타니아, 성 이슈트반 왕관령, 남슬라브와 갈리치아를 아우르는 대타협을 시도하나 붕괴를 막기엔 너무 늦은 조치였다.
- 킬 군항의 반란
협상국의 대공세가 개시되고 스당과 메츠가 유명무실해지는 가운데 해군에 무의미한 희생을 강요하는 힌덴부르크의 몽니로 킬 군항의 반란은 훨씬 큰 규모로 발생한다. 힌덴부르크가 카이저를 유폐하고 있음을 파악한 린징겐과 젝트는 해군을 끌어들이고 반란 진압을 명목으로 힌덴부르크에게 충성하는 정예부대가 빠진 사이 역쿠데타를 시도해 성사시킨다. 힌덴부르크는 협상 끝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대를 이끌고 베를린을 이탈하고 린징겐은 군정을 이어가는 대신 민간인 내각에 권한을 이양하고 종전 협상을 시작한다. 그러나 성난 민심을 달래기에는 너무 늦은 조치였고 독일 북부와 동부를 중심으로 소요 사태가 각지로 번져나가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빌헬름 2세는 원역보다 몇 개월 빠른 1918년 7월 12일 새벽자로 퇴위하고 사민당과 조국당, 중앙당의 연립정부가 출범한다.
- 동맹국의 항복
복수심 가득한 세르비아군을 소피아로 진격시키겠다는 협박을 마주한 불가리아 왕국이 가장 먼저 항복하고 이스탄불이 위험해진 오스만 제국이 다음으로 백기를 든다. 오헝 제국은 거세진 민족주의 물결을 감당하지 못 하고 전국이 쪼개져 사실상 통제 불능 상태에 놓인다. 독일 제국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점령지 인정, 국체 보전, 자체적 무장 해제 등의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들이밀다 24시간 안에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협상국 550만이 본토로 진격할 것이란 엄포를 듣는다. 결국 7월 12일자로 문서에 서명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이 72시간 뒤인 15일부터 정식으로 발효된다. 72시간의 여유를 얻은 한국군의 별동대는 당시엔 독일 영토였던 말메디를 지나 아헨을 점령하고 쾰른 시장의 항복까지 받아내 독일 본토에 협상국 깃발이 휘날리게 하는데 성공한다.
전투로만 따지면 아헨 전투가 한국군이 독일 본토에서 벌인 유일한 전투로 기록되는데, 당시 아헨 일대는 공화정 전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정 유지를 주장하던 군부와 공화국 편을 든 군부, 독일을 적화시키려 드는 공산주의자로 인한 3파전이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어서(...) 한국군을 막아내지 못했고, 아헨 시장과 공무원들은 당장 반군과 홍군에게 (물리적으로) 죽을 상황이었기 때문에 즉시 한국군에게 항복해서 살려달라고 빌었다. 한국군은 항복만 받은 뒤 쾰른 시장과 공무원들을 버리고 쾰른으로 진격하려 했지만 아헨 시장은 자신이 쾰른 시장 아데나워와 잘 아는 사이니 항복을 받아내겠다고 요청했고, 당시 한국군도 이대로 후방인 아헨이 혼란스러운 걸 방치하고 쾰른으로 갔다가 후미가 막히면 곤란하다는 이유 때문에[37] 결국 아헨에 남아서 아헨의 반군과 홍군 소탕에 전념했다. 그렇게 소탕이 끝난 7월 15일, 아데나워가 항복을 선언하면서 1차대전 독일 본토 전투는 막을 내린다.
2.2. 전간기
- 대한제국의 승전국 지위로 인한 배상 변화
프랑스, 영국, 미국, 이탈리아, 대한제국. 소위 빅5가 유럽 전선에서 승리의 주역이자 종전 협상의 주역이 된다. 영국은 기여도가 거의 없는 일본까지 억지춘향으로 끌어들여 빅6 구도를 만들려 했으나 아시아에서 세력 확대 외에는 무엇에도 관심없는 일본이 소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실패한다. 빅5에서도 유럽-근동-인도차이나-극동을 잇는 거대한 블록을 구상한 프랑스와 대한제국이 한편으로, 그레이트 게임 판정패 이후 극동 질서 유지에 더욱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영국과 한국이 만주를 통째로 집어먹고 자국 이권을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 영국 첩자를 비선으로 둔 대가리 꽃밭 대통령이 콜라보를 이룬 미국이 한편으로 묶이고 발칸과 이오니아에서 패권을 두고 그리스와 경쟁중인 이탈리아는 그리스와 프랑스가 주장하는 폰토스 공화국 설립을 받아들이고 친프랑스 노선을 확실히 하면서 영미와 한 편에 선다.
영국은 그레이트 게임 패배로 인한 위신 저하를 극복하면서 군비는 줄이고 민생에 투자하라는 모순된 국민 여론을 해결하기 위해 문화권을 공유하는 미국을 끌어들이고 극동에서 철저하게 일본을 밀어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일본은 이를 영리하게 이용해 1860년 베이징 조약과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전부 무효화하고 연해주, 관동주, 교주만을 죄다 파먹을 획책을 한다. 고종이 주도한 대한제국의 외교적 실책(공공연한 만주 전체 영토화 주장, 교주만을 두고 일본과 밀약시도) 또한 일본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이와중에 윌슨은 선심 쓰는 척하며 남만주는 영토로 인정해 줄테니 관동주를 일본에 넘기라는 요구를 한다.
영국, 미국, 일본이 편먹고 견제하는 통에 대한제국에 극히 불리하게 돌아가던 합의는 프랑스의 개입으로 저지되고, 관동주를 일본에 위임통치령으로 넘기되 권총과 소총외에는 무엇도 들고 들어갈 수 없는 비무장지대화하여 대한제국에 감찰권을 넘기는 것으로 합의안을 도출한다. 관동주가 넘어가면서 심화된 일본 해군의 위협에 대비해 반드시 필요한 미완공 전함 6척(마켄젠급 4척, 바이에른급 2척)은 프랑스가 책임지고 최대한 빠르게 건조하고 교관단 파견과 장교 유학을 지원하기로 한다.
이로서 요하 이동, 송화강 이남 남만주는 영토로 인정받고, 송화강 이북, 아무르강 이남 북만주는 이권 지대화에 성공했다. 별개로 러시아 임시정부 측에서 포시예트 등 두만강 인접 지역을 대한제국에 넘기는 대가로 지원을 호소해왔다.
- 미엥지모제
19세기부터 고질적인 저출산에 시달리는 상태로 1차 대전으로 600만의 인구를 상실한 프랑스는 홀로 독일을 견제할 역량이 모자랐다. 아시아 경제블록에서 얻은 막대한 재정적 이득은 얻었으나 전술한 인구 손실에 프랑스를 견제한답시고 독일에게 전향적으로 구는 영국, 서쪽의 프랑스와 합을 맞춰 동쪽에서 독일을 견제하던 러시아 제국의 붕괴는 치명적이었다. 러시아 제국이 그냥 망하기만 한것도 아니고 독일만큼이나 위협적인 빨갱이 적성국이 되어버린지라 더더욱.
이에 프랑스는 폴리투의 재림을 노리던 폴란드 제2공화국을 하위 파트너로 끌어들인다. 러시아와 독일 양쪽 모두에 적대적이면서 확장에 적극적인 폴란드를 무장시켜 독일과 소련을 견제하게 하는 것. 노획한 독일제 무기와 자국산 잉여 무기, 훈련을 전담할 교관단을 파견했으며 대한제국과 협상해 네덜란드의 포커사 설비와 기술진을 넘기는 대신 독일이 인수하지 못 한 400여대의 포커기와 동부전선 포로들로 구성되어 차르를 따라 만주로 이동중인 폴란드 군단, 대한제국이 별도로 데리고 있던 폴란드인 포로를 합쳐 36,000명을 폴란드 공화국군에 지원하고 추가로 한국군 교관단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한다. 유럽, 비유럽 최강 육군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폴란드 공화국은 단기간에 소련에 맞설 정도로 대군을 키워냈고 미엥지모제를 추진하며 소련과 충돌한다.
- 프랑스의 1918~1919년 환율 변화
원 역사와 달리 1부 시점부터의 나비효과로 인해 1910년대에 들어 남중국 경제권에서 영국 파운드-엔화 중심에서 프랑-원화 중심으로 변모하면서 남중국 경제권의 주도권을 쥐게 되고, 그로 인해 1차대전 도중에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남중국을 통해 환율 방어에 성공하면서 원 역사보다 훨씬 재정 상황이 여유로워졌다고 한다. 원 역사 남중국 일대는 1930년대 초까지 법정화폐가 실종되다시피 한 상태라 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본작에서도 그것이 마찬가지였다. 원 역사에서도 1880~1890년대 남중국 일대는 영국-일본의 간섭에 반발해 프랑스와 유의미할 정도의 경제적 연동을 시도했지만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나비효과로 인해 프랑스가 남중국 일대에서 경제적 영향력을 상실하며 실패한 반면 본작에서는 극동 전쟁에서 대한제국-러시아제국이 일본-대영제국을 상대로 승전하고 프랑스가 대한제국과 접촉하면서 대한제국-남중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이어지는 경제 블록을 구상하는데 성공했고, 그 효과가 1차대전 때 제대로 발휘된 것이다.
- 적백내전과 후폭풍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이 시작되었던 원역사와는 다르게 지방에서 시작했기에 트로츠키와 붉은 군대는 내전이 시작하자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차지하기 위해 50만에 달하는 군을 일으켰으나 김시진에게 가로막히면서 6차례에 걸쳐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방전을 벌였고 전부다 굴욕적으로 패하고 역공까지 허용한다. 결국 협상을 통해 차르 일가와 궁정귀족, 황실 충성파 군대, 체코와 폴란드 군단 등 6만~10만에 달하는 인원이 김시진과 근위 시베리아 소총병 사단을 중심으로 합이빈까지 2,500km에 이르는 대장정을 진행하게 되었다. 적군도 그냥 빨리 나가주기를 원해서 작은 저항이나 반항은 있어도 큰 교전은 없지만 내전 여파로 철도망이 엉망으로 운영되고 있어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동물농장 내용은 확실히 바뀔 듯하다
이런 패전으로 정치적 위기를 겪은 트로츠키는 외부로 시야를 돌려 혁명을 수출한다는 명목으로 동유럽으로 진출하려 한다.
- 고종의 친위 쿠데타
전후처리 논의에서 자신이 배격당한 것을 계기로 자신 사후에는 황실이 옥새나 찍어줄 것임을 직감하고 무엇보다 1차 대전으로 소위 문명 세계에서 전제 국가들이 모두 사라지고 대한제국만 남은 것을 목도한 고종은 자신의 정치력으로 유지되는 전제정을 불변의 규범으로 굳혀버리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기획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종 역시 몸 약한 황태자나 정치에 관심 없는 영친왕이 자신이 누린 것과 같은 황권을 행사함은 불가능하고, 그럴 기량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프랑스의 광저우만 조차지 할양 제안을 자신의 의사 없이 현지에서 판단 후 결정해버린 것을 계기로 이대로면 군주가 옥새나 찍는 허수아비로 남거나 숫제 공화정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음을 실감했고 전제제국들의 소멸로 이를 더욱 강하게 의식하게 되자 형편없는 후계자들이라도 일정한 권위를 유지한 채 군주정을 이어가게 만들기 위해 쿠데타를 기획한 것이다.[38]
기존에 황실과 균형을 이루던 군부는 김시혁이 엄선된 장교들을 거느리고 유럽에 발이 묶이며 빈틈이 생겼고, 민영환이 이끌던 내각은 전쟁으로 인한 경제불황과 물가상승으로 지지도가 낮아졌다. 근황파 측에는 유능하고 선을 지키는 이용익이 병환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아 고종이 시키는 것 이상은 기대할 수 없는 부패한 무능력자들만 남겨졌다.
이 모든 걸 호재로 생각한 고종은 남만주 획득으로 증가한 영토와 인구의 민의를 오롯이 대변하고 새로 헌법을 제정하는 데는 250석의 중추원 내각으론 모자라다는 명분으로 내각을 해산시키고 의석을 400석으로 늘리는데 황국협회와 독립협회의 텃밭을 일부러 하나로 묶어 의석 수를 줄여버리고 자신이 미는 어용 정치인들이 대거 당선되도록 선거구를 조작한다. 동시에 수도권 안정을 명목으로 무장 정치깡패 집단인 헌병대를 대대적으로 증강하고 젊은 풋내기 이승만을 끌어들인다. 마음만 먹으면 이승만을 즉시 반역 혐의로 처단할 수 있는 증거를 미리 모아둔 다음 그를 호출해 게리맨더링으로 선거에서 이겨 총리가 되던가, 역도로 처형되던가 2가지 결말을 제시해 전자를 고르게 하고 그가 일본과 밀약을 맺는 것까지 방치하며 당연히 현역 총리가 전후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는 내각의 중론을 무시하고 민영환을 유럽으로 파견하도록 유도한다.
이승만 내각은 출범 직후부터 황제에게 아첨하는 낙루총리 + 연해주의 동포들을 팔아넘긴 친일 정권이란 낙인 + 군부의 불신임 + 나아지지 않는 경제 사정까지 겹쳐 순식간에 지지율이 최하를 갱신하는데 고종은 박제순 몰래 헌병대를 움직여 한성으로 유통되는 땔감을 빼돌리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척 뒤로 빠져 모든 책임을 이승만과 그간 온갖 비위 행위를 눈감아주며 놔뒀던 궁내부 대신 박제순에게 떠넘긴다. 여기에 만주에서 창궐한 스페인 독감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본토로 들이닥치면서 역대 최악을 갱신하자 방역을 핑계로 한성을 봉쇄하고 군부대신과 해군대신을 제외한 대신들을 일제히 억류한다.
군부와 내각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는데 고종이 영관급은 원수부의 엄격한 심사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노려 수도권 인근 부대 영관급에 삼남 출신 근황파 장교들을 배치했고 경무청을 경부로 승격시키려는 이승만의 시도도 엎어버린 다음 경무청 내부에 끄나풀들을 심었기 때문.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정체성 자체가 고종의 일련의 행위들을 정당화시켜줬다.
대한국 국제를 기본으로 하는 대한제국은 전제 제국으로 모든 권력과 정당성이 황제에게서 나왔고 최장기간 재임 군주이자 만주를 획득한 전승 군주가 본래 자기 것이라 규정된 권력을 다지기 위해 벌이는 일을 거부할 명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존에는 김시혁이 이끄는 군부와 민영환이 이끄는 내각이 개인의 위상을 바탕으로 견제해 왔던 것이고 두 사람이 모두 유럽으로 떠나버린 자리를 메울 사람은 없었다.
한성 봉쇄에 성공한 다음에는 전국 각지에서 방역에 종사해야 할 인력들을 모조리 한성으로 끌어모아 지방은 죽든 말든 한성의 민심 유지에만 힘쓰며 무능하고 탐욕스럽지만 그래도 충성은 다 했던 박제순에게 일련의 책임을 떠넘겨 구금해버리고 박두영을 다음 장기짝으로 삼으면서 일본과의 국혼까지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군부, 특히 김시혁의 주변은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데 이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얄미울 정도로 대한제국의 정체성과 자신의 권한을 잘 꿰고 있다. 자신이 법으로 정해진 권한을 되찾을 뿐인 이상 우직한 군인인 김시혁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
헌병대의 무능하고 폭압적인 방역으로 한성부 민심에 폭발 직전에 이르렀을 때 시민들을 폭도 취급하며 무차별 진압하려는 박두영을 힐난하고 예복 차림으로 기자단을 맞이해 일단 민심을 수습한다.
- 훈련 계획 충무
구주원정군에 포함되지 않은 인천의 제3 보병사단, 청주의 제8 보병여단 지휘부가 근황파에 넘어간 상태에서 친위 쿠데타로 무소불위의 힘을 얻은 헌병대의 불미스러운 사태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자 원수부는 대응 방안을 고심한다. 1개 여단에서 6,000명으로 구성된 5개 여단과 그 예하 10개 연대, 사령부 직할 장갑대대 1개라는 거대한 규모로 팽창한 헌병대는 그 전력을 강습보병여단과 근위기병사단이 구주원정군 차출되어 비어있던 한성의 병영에 집중시켜 놓았고, 비협조적이던 경무부장 남만리를 구금해 언제든 용산의 원수부를 타격할 길을 열어둔 상태였다. 원수부는 김시혁 주도로 크게 세가지 상황을 가정하고 각기 다른 대책을 세우고 훈련 계획 충무라 이름 붙인다.
첫번째, 헌병대 단독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를 구금할 경우에는 3사단, 수원의 수도보병사단이 동남으로 헌병대를 견제하고 개성의 제9 보병사단이 남하해 경복궁과 경운궁을 타격해 황제를 구출하고 헌병대 수뇌부를 친다. 이 정도로 진압되지 않을 경우 8여단과 가평의 제1 근위기병사단까지 투입한다.
두번째, 헌병대가 폭동 내지는 무장소요를 촉발시켜 한성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고 용산을 공격하는데 황제가 방관자로 있는 경우. 원수부를 버리고 탈출해도 군정권과 군령권에는 영향이 없으니 해군이 관할하는 한강의 포구로 탈출해 앞서와 같이 대응한다.
세번째, 2번과 동일한 상황에서 황제가 주동자일 경우. 3사단과 8여단은 확실히 믿을 수 없으므로 이들부터 차단해야 했다. 가장 거리가 먼 8여단은 수원의 수도사단으로 저지할 수 있으나 늦어도 6시간, 빠르면 3~4시간만에 열차로 한성에 진입가능한 3사단이 문제인데 개성의 9사단이 정예들을 차출한 임무부대를 우선 꾸려 최대한 신속하게 임진강 이남으로 남하, 파주 혹은 고양까지 치달아 3사단에 심리적 압박을 가해 쉽게 진격하지 못하는 방안을 세운다. 황제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해 총구를 돌리게 만들면 가장 좋고 여의치 않을 경우 가장 확실한 카드인 가평 주둔 제1 근위기병사단을 한성으로 진입시키기로 한다.
- 2.27 계엄령
고종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던 정국은 헌병대의 개입으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김시혁에게 사실상 정치적 동맹을 제안한 고종의 태도에 토사구팽을 직감한 박두영은 의도적으로 시위 예고를 뭉개고, 교통 통제를 풀어 지방에서 상경하는 시위 참여 인력이 경복궁으로 집결하게 방관한다. 한편 파리 강화회의에서 관동주가 일본의 관할하에 넘어갔다는 소식이 일제히 보도되면서 격분한 여론은 경복궁으로 향하고 무려 30만에 달하는 인파가 몰린다. 일본의 행태에 격앙되긴 했어도 시위 자체는 평화로웠고 고종에 대대한 지지 여론도 변함이 없었으나 정작, 그 고종은 자신의 예상보다 까마득하게 많이 몰려든 인파에 임오군란의 트라우마가 발작해 공황상태에 빠져있었다.[39]
고종은 김시혁을 불러들여 계엄사령관으로서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을 명령하나 입궁하는 과정에서 변함없이 고종을 지지하는 시위대를 지켜본 김시혁은 끝까지 반대하며 자신과 함께 밖으로 나가 인민을 위무할 것을 주장한다. 끝끝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김시혁에게 일방적인 결별을 선언한 고종은 그를 연금시키고 박두영에게 계엄령 선포와 유혈 진압을 명령한다. 1919년 2월 27일 오후 10시. 사실상 인민을 향한 선전포고인 고종의 계엄포고문이 발표되고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를 시작한다. 피아식별이 용이한 주간에 실시해야 한다는 일각의 조언을 무시하고 야간에 기관총과 75mm야포 소사, 장갑차까지 동원한 무차별 사격에 경복궁 앞은 피로 물든다.
간신히 빠져나온 현상건에 의해 이 참극을 접한 신민당과 황국협회는 계엄 해제와 황제의 퇴위, 관계자 전원의 처벌을 담은 탄핵안을 발표할 때, 헌병대는 예상치 못 한 난관에 부딪친다. 진압작전을 무리하게 서두른 탓에 비축된 탄약이 충분하지 못했고 좁은 전면에 5개 여단을 한꺼번에 밀어 넣으면서 부대들이 엉키고 만다. 여기에 순검대 상당수가 진압을 거부하고 인민들 편으로 돌아서 교전을 벌이면서 경희궁을 탈취하기에 이른다.
위기감을 느낀 박두영은 고종의 명을 빌려 수도 인근에 주둔하면서 근황파 장교들이 장악한 제3보병사단과 제8보병여단을 동원할 것을 건의하기로 하고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며 제3보병사단, 제8보병여단을 동원한다. 이를 알게 된 원수부에서는 결국 충무 계획을 실행한다. 먼저 제9보병사단은 협조적인 개성 부윤과 함께 근황파 개성 유수와 개성에 있는 헌병분견대를 제압한 뒤 임진강을 도하해 제3보병사단의 진입을 저지하며 수도보병사단은 수원 유수를 포섭한 뒤 헌병분견대를 제압하고 수원역을 점거해 제8보병여단과 대치하며 제1근위기병사단 역시 원수부의 명령을 따를 준비를 한다. 고종은 이 소식과 헌병대가 한성병원으로 진입하려는 것을 군 관계자들이 막았다는 소신을 듣고 원수부를 반역자로 선포한다. 이때 연금된 대신들은 처리하되 김시혁은 건들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으나 박두영과 정훈은 이 지시를 김시혁은 건드리지 않는 대신 그의 가족을 처리하라고 왜곡한 뒤 김시혁에 집에 헌병대를 보낸다.
한편 김시혁의 집에는 의친왕, 안창호, 윤보선, 임병찬 등이 명례방으로 가서 시민군들을 이끌어달라고 김시혁을 설득하고 있었고 김시혁은 원수부의 연락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조동윤으로부터 헌병대가 김시혁의 가족을 노린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이후 전기와 통신이 끊기고 헌병대가 자택 근처에 오자 김시혁과 기록국 요원들, 그리고 의친왕은 2층으로 김시혁의 가족과 중추원 의원들, 임병찬 등을 대피시킨 뒤 헌병대와 맞서 싸우려던 순간 김시혁의 부관인 지청천이 데려온 남만리와 남만리가 이끄는 순검, 시민군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이후 김시혁은 장갑차를 타고 원수부로 가고 의친왕, 남만리, 중추원 의원 등은 경희궁으로 가 시민군을 이끈다.
김시혁이 원수부에 도착하기 전 원수부는 고종이 자신들을 반역자로 선포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제1근위기병사단을 불러들일 계획을 세우고 제1강습보병여단과 제1해군육전여단을 시켜 원산부의 근황파를 제압한다. 기록국 통계실장 김창수는 오류역으로 가 노조대표 이봉창과 함께 제3보병사단의 진입을 막는다.
김시혁은 원수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제1기병사단을 한성부로 출격시킨다. 이 소식을 듣게 된 고종은 헌병대를 야포와 함께 배봉산에 배치시켜 제1기병사단을 막게한 뒤 호위대를 시켜 원수부를 공격하게 한다. 호위대 총관 이근상은 김시혁을 이길 자신이 없어 호위대 부총관 조성근을 보내 원수부와 협상하려 했지만 호위대가 제2의 헌병대가 되려는 것을 본 김시혁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조성근을 억류한다. 게다가 이근상의 수작질을 알고있는 익문사 독리 이호석은 바로 이근상을 압박했고 이근상은 결국 원수부를 공격한다.
이후 원수부는 억류한 조성근을 심문해 호위대가 원수부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게되고 결국 제1기병사단의 진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제1강습보병여단을 불러 배봉산의 헌병대를 무장해제 하려 한다. 제1강습보병여단의 진입을 위해 조동윤은 의정부역에 있는 제1헌병여단 독립대대장 황준성을 설득해 그가 원수부 편에 서게 해 의정부역을 확보하며 삼방역에 기록국 요원들을 보내 유관순 등을 포함한 삼방역에 발이 묶인 사람들과 함께 삼방역에 주둔한 철도경비대와 헌병대를 제압한다.
그러던 중 호위대는 원수부 공격을 시작하고 원수부 호위 병력은 호위대 선봉대대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이근상은 후퇴를 건의하던 선봉대대의 지휘관을 즉시 해임해 버리고 도주하던 호위대 병사들까지 즉결 처형하면서 일본군 마냥 밀어붙였고 숫자에 밀린 원수부는 위험에 처하나 용산역 인근 정비소 사장이었던 김상옥이 용산역에 있었던 A7V를 몰고 와 원수부를 지원했고 결국 호위대는 후퇴하게 된다. 김시혁은 이를 기회로 A7V와 노획한 장갑차, 원수부를 호위하던 거의 모든 병력을 이끌고 근황파 병력을 밀어붙여 청계천까지 진격한다.
고종은 이근상이 원수부 점령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1기병사단의 근위 칭호를 박탈한 뒤 직접 나서려 하지만 곧 김시혁이 직접 전차를 앞세워 반격해왔다는 급보를 듣는다. 이근상과 박두영은 북한산성으로 이어할 것을 건의하나 고종은 김시혁이 청계천 적토에 발이 묶일 거라는 이호석의 보고를 듣고 김시혁이 더는 여력이 없으리라 판단, 헌병대를 보내 병력이 거의 없는 원수부를 다시 공격하며 자신이 김시혁을 이길 수 있다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원수부가 다시 위험에 처하자 원수부 총관 이규태는 자신의 권총을 이갑에게 주며 최선을 다해 원수부를 지킬 것을 지시하고 이갑은 어깨에 총상을 입으면서도 끝까지 지킨다. 그러던 도중 장기렴이 부른 해군의 한산급 구축함 함흥이 드디어 도착하는 데 성공하며 신성모가 이끄는 해군육전대는 원수부를 공격하던 헌병대를 물리친 뒤 용산역까지 점거하는 데 성공한다. 곧이어 김시혁은 한밤중에 최대한 도하가 용이한 지점을 찾아내고, 민가를 뜯어 마련한 자재로 다리를 놓아 기어이 전차를 청계천 너머로 올리는 데 성공한다. 이후 장기렴은 직접 헌병 지휘부에 전화를 걸어 항복하지 않으면 포격하겠다고 공포를 쏘면서 위협하자 겁을 먹은 박두영과 헌병 지휘부는 북한산성으로 도망친다.
고종은 이 소식들을 들으며 해군을 욕하며 북한산성으로 이어하려 했지만 박두영 때문에 이어가 불가능해지자 측근, 황족들을 이끌고 청량리역으로 가 삼남이나 평양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청량리역은 제1강습보병여단이 점거한 상태였다. 제1강습보병여단은 고종의 행렬을 청량리역을 지원하러 온 헌병대로 착각하여 피상공세를 퍼부었고 이 때문에 이재곤과 이근상은 부상을 입고 사로잡히며 고종도 혼자 도망치다가 자신을 알아본 주민들에게 구타당한다. 이후 정미소에서 거꾸로 메달려 맞아 죽는 무솔리니 엔딩을 맞는가 했지만, 타이밍 좋게 도착한 강습보병대가 주민들을 설득해 맞아 죽는 건 피하고 체포된다.
배봉산을 주둔하던 제2헌병여단장 민형식은 제1기병사단이 오면 항복하거나 도망치려는 꿍꿍이를 품었지만 북한산성으로 오라는 박두영의 명령을 거절했다가 참모장에게 살해당한다. 이후 참모장은 북한산성으로 철수 준비를 했지만 곧 제1강습보병여단이 들이닥치자 항복한다. 이후 제1강습보병여단은 배봉산의 방어선을 무력화 시켰고 제1기병사단도 한성부로 진입한다.
이후 김시혁은 의친왕이 이끄는 시민군, 제1기병사단과 합류하며 전차로 광화문을 박살내고 경복궁으로 진입하면서 2.27 계엄령은 종결된다.
- 3월 혁명
고종을 붙잡고 경복궁을 제압한 김시혁 군과 시민군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끝까지 시민의 편에 섰던 의친왕을 새 황제로 추대하고,[40] 의친왕은 스스로를 대한 인민의 황제로 칭하며 1919년 추석 이전까지 민주적인 새 헌법을 제정하고 황제의 권력을 중추원과 내각에 넘기는 입헌군주제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할 것을 온 국민 앞에 선포한다.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은 명목상 상황으로 하얼빈에 종신 유폐되고, 북한산성을 점거했던 근황파 잔당도 인민의 적으로 선포되어 전부 진압당한다.
처음 사태가 전해졌을 때 영국은 내전으로 장기화시켜 강화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 구상을 했지만, 일본은 김시혁이 시민군의 편에 들어간 걸 확인하자마자 내각이 육군을 눌러 개입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고, 미국은 영국에 동조하려던 윌슨이 공화당과 자본가들의 공세에 밀려 입장을 선회하면서 빠진다. 결과적으로 3일만에 근황파 잔당까지 쓸려나가서 영국이 개입할 틈은 없었다. 한편 프랑스는 영국을 단호히 막아세우고 한국의 민주혁명을 전폭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해 한-프 관계는 더욱 돈독해진다.
새 황제 의친왕은 황제도 법 아래에 있다며 입헌 민주주의를 확고히 지지하고, 시민을 학살한 근황파 헌병대, 호위대, 익문사는 수뇌부와 학살에 가담한 병사들까지 모두 사살형에 처해지지만, 삼남 지방에서 성리학 꼴통 전우가 의친왕을 찬탈자라고 강변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그 혼란에 동학당 잔당 과격파까지 날뛰었으나 김시혁이 직접 토벌군을 이끌고 내려가고, 전우 패거리는 전주부 순검대와 포군의 반격만으로도 진압되었고 동학당 잔당들은 끈질기게 싸웠으나 2개월만에 김시혁과 조병옥에게 토벌당한다.[41]
- 소련의 서방공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실패로 권위에 막대한 타격을 입은 트로츠키는 혁명 수출이란 모토 아래 유럽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를 기획한다. 1918년 11월부터 북으로는 핀란드, 남으로는 카프카스에 이르는 광대한 전선에서 시작된 붉은 군대의 진격은 초반 탈린과 리가를 함락시켜며 순조로운 듯 했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나서기 시작하며 지지부진해진다.
핀란드에선 만네르하임이 지휘하는 백위군이 소련에 맞서고, 국토의 9할 가까이를 상실하고 멸망 직전에 이른 발트 3국이 영국 해군과 프랑스의 재정 지원 아래 발트해 방면에서 반격을 개시했으며 러시아 제국을 대신해 독일과 소련을 견제할 프랑스의 사냥개로 선택받은, 폴리투의 재건을 노리는 폴란드는 일부 병력으로 발트 3국을 지원하고 주력 부대를 백러시아로 보내 민스크를 점령하고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죽고 죽이는 혈전을 벌인다. 루마니아는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아 베사라비아에서 소련의 초반 공세를 막아냄으로서 동유럽 전선은 전반적으로 지지부진한 양상을 띈다.
아나톨리아 방면에선 동트라키아는 물론 폰토스 공화국을 기반으로 아나톨리아까지 확보하려는 그리스와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대국민의회 정부가 대치하는 와중에 케말 측이 소련과 협정을 맺고, 이에 맞서 프랑스가 함대와 식민지 부대로 구성된 지상군을 투입한다.[42]
1921년 시점에 폴란드 전선은 폴란드의 공세를 소련이 되받아치는데 성공하며 폴란드의 기세가 꺾인 상태로 전선이 늘어지고 아나톨리아에서는 그리스군이 대국민의회에 연패해 시노프, 트라브존, 콘스탄티노플을 전부 내줄 상황에 몰렸으나 크림 반도에서 퇴출 당한 백군 잔존 세력이 폰토스 공화국에 합류하고 프랑스가 야전군 5만을 콘스탄티노플 방면에 투입하면서 간신히 균형추를 맞췄다.
- 소련과의 국교정상화
북유럽에서 아나톨리아까지 전 전선에서 진행된 서방 공세가 늘어지며 적을 하나라도 줄여야 하는 소련, 연해주 주둔 일본군과 그 일본군에 매수된 백군 군벌들을 처리하고 연해주 교민들의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는 대한제국, 일본 때문에 고사되어 가는 시베리아 무역로 복원이라는 공통의 목적까지 더해져 소련이 먼저 제안하고, 대한제국이 받아들여 치치하얼에서 김시혁과 브루실로프를 대표로 국교정상화와 국경 확정을 위한 회담이 열린다. 사실상 백군에 대한 공동 전선을 요구하는 소련에게 대한제국은 몽골의 운게른슈테른베르크를 제외한 연해주 일본군, 백군과 직접 충돌할 의사는 없으며 대신 국경 확정 후 대한제국 국경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백군 세력을 확실히 끊어낼 것을 약속한다.
소련 측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협상은 빠르게 진전되는데 동쪽으로는 아무르강과 다싱안링 산맥, 서쪽으로는 치치하얼과 눈강을 국경으로 확정지었고[43] 전러시아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에 제안했던 포시예트 할양 문제를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소비에트가 받아들이면서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영토에 편입된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시베리아 방면 교역을 계속 유지한다는 조항이 삽입되어 대한제국과 소련은 정반대 국체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밀착하게 된다. 이로서 다칭유전은 대한제국 영토 안에 있게 되었으며 소련은 대한제국, 남중국과의 교역으로 중공업화 정책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단을 마련했다.
졸지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로마노프 황실은 당연히 반발했으나 황실 충성파 백군은 다른 백군 군벌들의 외면 아래 전멸한지 오래고 남은 백군은 외세와 손잡아 황실을 겁박하고 이용하는 군벌과 도적떼에 불과한데다 근거지가 되어야 할 연해주는 일본군이 영국의 묵인하에 무단 점유 중이라 지원받아 뭘 해보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대한제국측의 반론에 할 말이 없었다. 직접 이강과 접견해 남은 황족들의 안위와 지원을 약속받은 올가 여대공은 동생들을 데리고 대한제국으로 망명하기로 하면서 전 러시아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해진다.
- 일본의 참전용사 시위
일본판 보너스 아미. 쥐꼬리만한 은사금 던져주고 나몰라라 하는 정부의 조치에 서부전선에서 돌아온 사병들이 항의 시위를 일으키자 일본 정부는 군경을 동원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서부전선에 참전했던 장교들이 옛 부하들을 변호하기 위해 무진 애썼으나 견책만 받았고 시위에 참여한 사병들은 모조리 남양 군도로 보내졌다.[44]
- 카프 폭동
원역사와 유사하게 철모단과 자유군단을 이끄는 카프와 뤼트비츠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원역사에서는 국민적인 총파업으로 반란을 막아내지만 여기서는 큰 차이점이 있었는데 바로 라인란트 지역이 연합국에 의해 점령중이었기에 국민들이 정부에 대해 불신감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반란을 막아야할 군부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방관만 하고 있었기에 반란군은 간단히 베를린을 점령했지만 지켜보던 프랑스는 에베르트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라인란트 진주군을 움직여 한국군을 선두에 세워 순식간에 베를린으로 진격한다. 예상보다 빠른 조치에 당황한 카프와 뤼트비츠는 젝트가 이끄는 군부에 도움을 청하지만 젝트는 이들을 외면하면서 군부의 위신강화에만 몰두한다.
한국군이 진격한다는 소리에 모랄빵이 난 반란군은 막아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반란은 종결되었으나 공화국 정부는 외세에 휘둘리는 정부 취급이나 받으며 민심을 잃어버리고 이와중 폴란드는 단치히 자유시를 무력으로 제압해 외교문제도 발생하는 등 혼란은 계속된다.
-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유럽 대륙을 좌지우지하고 남중국과 극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경제망으로 인도 경제권에 도전하는 프랑스, 산업 역량은 애저녁에 영국을 넘었는데 파나마 운하 개통으로 서태평양으로 팽창을 시작한 미국, 이들에게 자극받아 건함 사업에 박차를 가하는 이탈리아, 일본의 팽창에 자극받아 프한 동맹에 달라붙어 해군력을 보충하려는 네덜란드, 동맹이지만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일본까지 건함 경쟁에 뛰어들자 군비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격화되는 해군 건함 경쟁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영국이 주도해 열린 군축 회의. 영국은 어느 정도 건조가 이뤄진 미완공함을 완성시켰을 뿐 주력함(전함) 자체 건조 역량이 없는 대한제국을 여기 불러올 생각이 없었으나 일본 홀로 죽어라 우긴 끝에 영국, 미국,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에 이어 대한제국까지 6개 국가가 참여하게 된다. 해군력으로 쥐고 있는 국가가 아닌 한국이 참여하면서 해군강국들의 전력을 균형있게 손본다는 원역의 의미에서 벗어나 아시아-태평양, 유럽-지중해, 아메리카-대서양의 해상 균형을 짜맞추는 포괄적인 회담으로 스케일이 커졌다.
무츠를 포기할 수 없는 일본과 배상전함 6척을 소화하기에도 벅찬 대한제국은 막후 협상을 통해 일본은 무츠를 예외로 인정받고 배수량 5만톤을 추가로 받아 35만톤을 인정받는 대신 한국의 슈퍼드레드노트 6척 보유에 대해 입 다물고 기존에 악착같이 닫아걸어뒀던 중국 화북 시장을 대한제국에 개방하고 연해주 일대에서 도발을 중단하는데 합의한다. 만주 본토화가 한참 남은 상태에서 군비 경쟁을 막기위해 비교적 온건한 해군 좌파와 민간 내각을 유지시켜줄 필요가 있었던 대한제국은 연료 공급을 통해 일본 해군을 상당부분 통제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일본내 강경파도 수긍할만한 당근을 내밀어 국경 안정과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로 한 것.[45]
한편 5의 해상 전력을 쪼개 영국과 일본을 양쪽으로 감당해야 하는 미국은 한프 동맹이 지중해와 태평양에서 영국과 일본의 전력을 상당부분 잡아 끌어준다면 충분히 맞상대 가능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길영수, 이승만, 후버의 협상을 통해 미국은 한국의 조선소 건설 지원, 추가적인 차관 대여, 고철과 석유 판매량 증대, 한국 장교단의 아나폴리스 유학 허가를, 한국은 자동차 공업단지를 조성해 프랑스 르노사에 밀려있던 포드사의 만주 시장 진출을 전폭 지원하고 연방준비제도 금고에 3억 달러 규모의 금을 위탁하는데 합의한다.
막후 협상을 거쳐 최종적으로 미국과 영국이 5, 일본이 3.5, 한프이가 1.79로 주력함 톤수를 맞추고 항공모함은 영미가 13만 5천톤, 일본이 8만 1천톤, 한프이가 6만톤으로 군축 협상이 마무리된다. 한프동맹이란 강력한 견제 요소가 존재하는 이상 영일동맹을 유지해 묶어 두는 것이 미국의 안보에 도움된다는 판단 하에 영일동맹 해체는 요구되지 않았다.
- 관동대학살
워싱턴 군축조약을 성사시킨 하라 다카시는 여세를 몰아 육해군 군축을 시도했으나 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실패하고 본인은 암살당한다. 경제를 위해 비대한 군을 줄여야 했으나 병력에는 손댈 수 없게 된 내각은 울며 겨자 먹기로 군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무자들을 대거 쳐낸다. 아무런 보상 없이 쫓겨난 이들은 대만, 북중국에서 넘어와 저임금으로 일하고 있던 중국인 노동자들과의 밥그릇 싸움에 내몰리고 소수자인 이들에게 강한 증오를 품게 된다. 이 증오는 관동 대지진이란 초유의 재난을 만나 이재민 전원에게 대대적으로 퍼지고, 빨갱이가 테러를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돌자 중국에서 건너온 노동자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이 시작된다. 내각은 자신들의 대처 실패를 가리기 위해 제3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행위를 묵인했고, 육군 상층부는 발언권 확대 기회로 보고 불과 수개월 전 시베리아에서 귀환해 제대로 쉬지도 못한 병력을 치안안정화 명목으로 시가지에 밀어넣어 학살을 부추긴다. 수십명의 한국인 관비 유학생들과 사업가들도 이 귀환장병들 손에 학살당하면서 모처럼 온화 국면을 맞던 한일 관계는 급격히 경색된다.
김시혁은 '내가 관동을 주시하고 있다'는 엄포를 전하고 패닉에 빠진 내각은 무책임하게 총사퇴해 버린다. 하마터면 육군에 정권이 넘어갈 뻔한 상황에 키를 잡은 야마모토 곤노효에는 영토 할양과 천황의 직접 사과를 제외하면 전부 수용하라는 지침과 함께 협상에 나선다. 민영환을 특명전권대사로 삼은 대한제국 협상단은 학살 가담자들에 대한 철저한 규명과 재판, 인당 5만엔씩 배상금 150만엔을 지불, 천황이 친필로 조의문을 전달을 요구한다.
매국노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시모노세키의 망명자들까지 거론하며 강도 높게 몰아붙이다 장춘선 이남 80km의 철도 노선의 원할한 유지를 위한 완충지대 확보에 동의해준다면 조건을 완화해줄 수 있다는 당근을 내민다. 돤치루이가 몽골을 중국의 영토로 되돌리려는 야욕으로 보낸 3만의 군대가 단치루이 축출 이후 그대로 마적떼로 변모하면서 종심이 얇은 장춘 이남 철도 노선을 지속적으로 타격하고 있었고 때문. 마적떼 잡겠다고 국경을 넘을 수도 없어 고심하던 차에 중화민국에 목숨줄인 일본의 약점을 잡게 되니 이를 활용하기로 한 것.
일본측 협상단은 국민정부의 북벌을 대한제국이 지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장춘선 서쪽으로 30-50km 가량의 완충지 제공에 동의하고 학살 가담자와 지휘 라인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재판, 백만엔의 배상금, 황태자의 친필 조의문 전달로 협상을 마무리한다. 이로서 한국은 1916년 한성 폭동 때 일본인들의 희생되며 잡힌 명분상 약점을 완벽히 털어냈고 남만주 핵심 철도 노선 유지에 필요한 완충지에 획득에 성공한다.
한국인 사망자 30명과 별도로 한국인 망명자(친일파)의 후손들로 이뤄진 한국계 일본인 병사들도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1차 세계대전 때 유럽 전선에 참전했던 이들은 재난 현장 수습과 구조를 위한 후비부대로 편성되어 보내졌으나 도움을 주려던 일본인들에게 공격받아 절반이 사망, 실종되고 귀환후엔 터전인 시모노세키의 정착촌이 일본인의 공격을 받아 가족들이 죽거나 다치고 집이 불타 없어진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분노에 들고 일어선 이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일본편을 드는 고위 친일파(유길준, 이병무)를 쳐죽이고 학살 가해자로 의심되는 이들과 가해자의 가족들을 찾아 닥치는대로 학살하기 시작한다. 진압에 나선 재향군인회와 경찰이 패퇴하고 구마모토에서 6사단이 출동하고서야 겨우 상황은 수습되었으나 조선에선 반역자고, 일본에서도 비국민 취급에 절망한 이들은 무정부주의에 빠르게 경도되기 시작한다.
- 이시영-다카하시 협상
관동대학살 뒷수습과 별개로 이뤄진 경제 협상. 한국측 대표 이시영과 일본 대표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주재했다.
1890년부터 1923년까지 33년 동안 회계감사 겨우 17번 받으며 방만하게 늘어만가는 군비에 관동 대지진이란 재난까지 얻어 맞은 일본 정부는 1903년 극동 전쟁 때 전비 마련을 위해 영미에 빌려 쓴 20년짜리 만기 채권 상환 기일까지 다가오며 막다른 골목에 몰린다. 학살을 뻔히 지켜본 영미가 일본을 믿고 채권 기한 연장 협상에 응해줄 리가 없었기 때문. 공채를 발행해야겠는데 재난 복구 비용만 50~100억엔이라 먹고 죽을 돈도 없던 관료들은 금본위제 실시중이라 환율 차이가 적고, 현금 유동량도 많은 한국에서 5년간 10억엔, 도합 50만엔을 꿔다 급한 불을 끄려한다.
비용이 너무 큰데다 학살로 분노에 가득한 대한제국 중추원에서 이걸 통과시킬리가 없던지라 대한제국측 대표단은 역으로 대한제국 내에서 공채를 팔라는 제안을 건낸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자국이 발행한 애국 채권을 영국에서 판매한 선례를 따르자는 것. 당연히 공짜일리는 없고 이율과 지불일시, 최종상환기간까지 전부 대한제국 탁지부의 결정과 대한제국 법률에 따른다는 단서를 달아서. 내정간섭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한국의 도움 없으면 선채로 굶어 죽을 판이던 일본엔 다른 수가 없었다.
세부 조율과정에서 공채의 2할인 10억엔은 대한제국 정부가 3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구매하고, 나머지 8할은 공기업, 사기업, 개인에게 판매되며 정부에서 구매할 10억엔 중 5억엔은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일본이 일방적으로 미납해온, 10년 가까이 한국 정부가 대납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출자금에서 공제하겠다는 안을 들이밀자 일본측은 다시 기겁했으나 때마침 영미의 가혹하디 가혹한 차환채 발행 연장 조건이 전달되자 굴복. 일본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가진 지분 12%를 담보로 상환 기한 20년, 이율 6%로 도장을 찍고 만다.
이로서 한일 양국 1년 예산보다 많은 수익을 내는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사실상 한국에 넘어갔고 일본의 만주 영향력은 비무장지대화한 관동주만 남기고 소멸한다. 일본은 당장의 위기는 벗어난 대신 20년짜리 목줄과 함께 한국에 경제적으로 완전히 종속되었고, 열강 서열에서 한국보다 명백히 아래임을 사실상 인정하고 말았다. 한국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래 지속되어온 일본의 경제적 침탈 시도를 완벽히 분쇄하고 역으로 일본을 아래에 두는 쾌거를 이뤘다.
- 쑨원의 북벌
우페이푸 계열과 돤치루이 계열의 주도권 다툼으로 촉발된 안직전쟁 때 강소성 군벌 쑨촨팡은 우페이푸의 직계 군벌 이면서도 어느쪽 편도 들지 않았다. 자신의 영지인 강소성 북부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 전쟁이 직계 군벌의 승리로 끝나고 돤치루이가 실각하자 배신자로 몰린 쑨촨팡은 국민정부를 이끄는 쑨원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쑨원이 이를 접수하며 중화민국과 국민정부간 전운이 고조된다.
북벌을 위한 가혹한 징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광동의 천중밍을 진압하느라 1923년을 흘려보낸 쑨원은 1924년 7월. 농번기에 군대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대대적인 북벌에 나선다. 안직전쟁 때 고용승계를 미끼로 회유한 안휘군 소속 장병들과 약속을 지키지 못해 반란에 시달리고, 우페이푸와 옌시산의 불화에 관동대학살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항의는 고사하고 돈 한푼 못받은 채 일본의 강권에 한국에 완충지대를 제공하는 바람에 매국노 프레임까지 씌워진 중화민국 군대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국 25만, 리쭝런이 이끄는 광서군 10만, 룽윈이 이끄는 운남, 귀주, 사천군 15만. 도합 50만을 앞세운 군민정부의 진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한프일 모두 국민정부가 지금 통일되는건 원치 않았던지라[46] 일본은 산둥까지 밀려 북경 방어도 장담할 수 없게된 중화민국을 구원하기 위해 한국의 양해하에 3개 사단 6만명을 파병하고, 한국과 프랑스는 영향력하에 있는 국민정부 해군과 귀주, 운남 군벌을 움직여 전장에서 이탈시킨다.
몸이 바짝 달은 쑨원은 한국측에 북벌을 지지할 것, 중화민국에서 가장 크고 정예한 장쭤린의 동북군이 산해관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견제할 것, 소극적으로 나오는 군사고문단을 교체함과 동시에 500명 규모의 고문단을 6000명 규모로 늘려줄 것, 10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장비와 물자를 지원해줄 것을 요구한다. 칼만 안들었지 강도나 다름없는 요구에 황당해진 한국은 당연히 해당 요청을 거부했는데 자제하기는 커녕 친서를 보내 '일본 해군과 수송 선단이 산동반도로 진입하도록 둔 것은 한국 정부의 잘못이며, 이들의 진입을 저지하거나 격침해야 주권 정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우리를 위해 일본과 전쟁하지 않으면 너희는 주권국이 아니라는 태도에 분노한 한국 정부는 국민정부 대사를 초치해 항의하는 한편 국민정부군에 배치된 군사고문단과 대여해준 장비들, 특히 포병 자산을 순차적으로 철수시키기에 이른다.
한국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음이 확실해져 국민군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쑨원은 전 전선에 무리한 공세를 명령하고 추가 징집까지 실시하며 고집을 부렸고 이에 반발한 일선 지휘관들은 속속 진격을 거부하고 전열을 이탈하기에 이른다. 최종적으로 장제스의 제1 국민군 15만만이 일본군과 동북군에 포위된 채 잔류하게 되고 장제스는 쑨원의 명령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중화민국과 협상에 돌입한다.
중화민국은 강소성에서 우위를 확보함과 동시에 쑨촨팡이 미납한 세금을 배상금으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고 일본도 따로 전비 3억엔을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 돈 나올 곳이 전무한 장제스는 한국 정부에 신용 보증을 받아 10억원을 빌려 납부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쑨원이 야심차게 시작한 북벌은 당사자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채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 프랑스의 외교노선 변화
세계대전 승리하고 191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영광의 세월은 소련의 서부 공세를 상대하고, 동방에선 터키 국민회의와 싸우며 6년만에 막을 내린다. 데스페레가 이끄는 원정군이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던 대국민의회 군대를 깔끔하게 격파하고, 폰토스 공화국의 마지막 남은 도시들을 함락하려던 케말의 시도까지 좌절시키는 것까진 좋았으나 노련한 케말은 병력을 수습해 트라브존을 노리는 기만전술로 데스페레를 끌어내고 이즈미르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내 그리스 영토들을 공격해 함락시킨다.
폰토스 공화국만 남기고 아나톨리아에 확보한 영토를 전부 상실한 그리스 왕국 전쟁 의지를 상실한 채 주저앉았고 데스페레의 원정군만이 남아 남의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구도가 이어진다. 동유럽쪽의 부담이 커져가는 와중에 그리스도 빠진 폰토스 공화국을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었던 프랑스는 미국의 중재하에 터키와 협상을 벌인다.
뉴욕에서 열린 협상에서 프랑스 원정군의 즉시 철수하고 폰토스 공화국을 해체하며 이즈미르를 위시한 아나톨리아 동남부의 터키 영토 인정하는 대신 콘스탄티노플과 동트라키아를 그리스 영토로 인정하고 레반트 지역에 현재 프랑스가 획득한 패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협상이 이뤄진다. 케말은 여기에 점령 지역의 그리스인들을 넘겨서 뒷말 나올 여지도 없애 버린다. 하다 못 해 그리스는 갈망의 도시라도 얻었으나 프랑스 입장에선 군대와 예산만 쏟아붓고 기존의 이권에서 한발도 더 나가지 못했다.
소련과의 협상 역시 만족스럽지 못하게 진행된다. 소련은 1919년 서방공세 이전의 국경으로 돌아가고, 폴란드에서의 프랑스의 우위를 인정(동유럽과 발칸 반도에서 무언가 행동을 할시 프랑스의 사전 양해를 구한다)하는 대신 50억 프랑 이상의 투자로 자국의 5개년 경제계획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해줄것과 소련 물자들의 서방 수출 활로를 뚫어줄 것을 요구한다. 물론 동쪽에서 독일을 견제해 혼자서 독일을 견제할 수 없는 프랑스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단서를 달았고 프랑스의 동맹이자 최근 소련과 관계를 개선한 한국과 연계해 인도차이나-남중국-한반도-시베리아를 연결하는 거대한 경제권을 구상할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지만 당장 오늘의 이권은 없었다.
끓어오른 국민 여론 앞에 클레망소 내각은 붕괴 직전에 몰렸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 온건한 인사들이 대거 입각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강경론자였던 델카세가 사망 이후 외무장관이 된 아스트리드 브리앙은 무력 사용을 지양하는 온건 노선으로 프랑스의 방향을 잡았고 취임 직후 시작된 쑨원의 북벌에 극히 부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이는 쑨원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 한국의 입장과 일치했고 양국은 사이좋게 견제에 들어가 국민정부를 고립시킨다.
[1] 한국인 50만, 러시아인 60만, 한족 500만, 만주족 800만. 진짜로 만주족이 800만일수는 없고 청나라 시절부터 봉금령 무시하고 들어와 일찌감치 터잡은 한족들을 만주족으로 싸잡아 묶은 것이다. 청나라 황제도 만주어를 못하는 시대에 만주족과 화북 출신 한인을 구분할 방법이 없고 20세기 이후에 새로 유입되는 한족들과 이해관계도 다르다는 점에 착안, 만주가 고향이고 의지할 모국이 없는 만주인 정체성을 부여해 통합대상으로 삼은 것. 신해혁명 이전에 넘어온 이들의 조국은 청나라였으니 나라 없는 민족이라는 게 틀린 비유는 아니다.[2] 러시아인 인구도 원역사에선 1941년 일본이 파악한 만주의 백계 러시아인 인구가 우크라이나인이나 조지아인, 유대인까지 다 합쳐 7만명 이었던 걸 감안하면(향후 귀국하거나 서방국가로 빠져나갈 인원을 감안해도) 훨씬 늘어났다.[3] 처음 제작된 지도가 소설 전개와 완전히 따로 놀아 수정된 지도로 철도 노선은 분단된 원 역사 한국 철도 노선을 대충 참고해 그은 탓에 여전히 엉망이다. 작품 속 1920년 대한제국 영토가 저렇다고만 알면 된다.[4] 종말로부터 안전한 금강산에 토지와 주택을 구매하고 다른 이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다 탁지부 조사실의 수사망에 발각, 1915~16년에 걸친 중앙 경무청의 대대적인 토벌로 교세가 찌그러들기도 했다.[5] 시기상으로는 춘생문 사건과 겹치며 러시아에게 지원을 받는다는 세부 사항은 아관파천과 겹친다. 실제 아관파천도 춘생문 사건에서의 교훈을 검토해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6] 이와중에 일본은 정신을 못차렸는지 한반도를 이익 지대로 설정하려고 바득바득 애를 썼지만 비테 선에서 컷됐다.[7] 이때 일본의 목적은 일본군의 만주 주둔이었다. 일본은 한국에 동양척식회사 합자를 제안하고, 그 과정에서 만주에 적잖은 일본 개척민들을 보냈는데, 그들이 큰 피해를 입으면 자국민 보호를 명분삼아서 일본군을 만주에 주둔시킬 명분을 얻으려는 계획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본 개척민들이 이미 엄청난 피해를 본다는 사실은 신경쓰지 않았다. 애당초 개척민의 대부분이 불순분자들로 어차피 일본 내에서도 범죄자 취급받는 이들이라 거리낌이 덜했던 것으로 보인다.[8] 1, 2차 쿠데타와 극동전쟁으로 내부 협력자가 일소당한 탓이다.[9] 정황상 이를 밀어준 원세개의 북양 정부가 신문을 검열해 진실을 감춘 것으로 보인다.[10] 이때 비공식적 유언으로 조선이!! 조선이 감히 나를!!! 이라고 대한제국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사실 원세개가 성장하게 된 계기가 조선 수탈이었던 만큼 조선 덕에 성장했다 조선 때문에 몰락했으니 완벽한 수미상관을 이룬 셈이다.[11] 진압 과정에서 총을 쏘진 않았다. 군을 배제한 채 경력만 투입하고 화기 없이 물대포와 둔기만으로 진압하는 그 시대 기준 무척 선진적인 시위 진압이 이뤄졌으나 워낙 소요가 컸고, 갑작스러웠다.[12]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동부전선을 정리하기 위해 공세에 나선 동맹국을 저지할 군대 편성에 차르와 황실이 협력하고, 공세를 막아낸 후에는 오직 종전에 힘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한동안 황실을 존속시키기로 한다.[13] 고종 지지세력인 황국협회가 커지면서 전통적인 유림 사고방식에 입각해 근황주의를 펴던 구파와는 다른, 개화물 먹은 지식인 중심의 신파가 세를 불려갔기 때문이다. 지지세력이라고는 하나 익숙한 유림계와 달리 계산이 안서는 데다 제국주의적 열망으로 사고칠 위험까지 높은 이들을 마냥 믿고가는 것보다 대다수가 농민인 만인을 새로운 근황파로 끌어들이는 게 고종 입장에선 더 안정적인데 황제가 앞장서서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선거권까지 내려주면 800만에 육박하는 만인 표가 어디로 갈지는 뻔하기 때문이다.[14] 작중에서 이들은 자칭 "모던보이"라 불리며, 말끔한 정장을 입고 다니지만 실상은 제대로 된 식사 할 돈도 없어서 카페에서 커피나 홀짝이는데 그와중에도 자기들끼리 자존심은 챙긴다고 점원에게 팁을 챙겨주는 등 겉만 멀쩡하지 실속없는 모습을 보인다.[15] 조선시대의 오랜 악습인 서북 지방 차별까지 뒤섞여 한반도 북부 사람들까지 되놈 피가 섞인 족속 취급하는데 정작 이들이 아이돌 삼는 김시혁이 서북, 평양 출신이다.[16] 바이에른급 전함 2척(3번함 작센, 4번함 뷔르템베르크)과 마켄젠급 순양전함 4척(초도함 마켄젠, 2번함 그라프 슈페, 3번함 프린츠 아이텔 프리드리히, 4번함 퓌르스트 비스마르크).[17] 처음에는 태평양을 빼는 대신 광저우만 조차지를 한국에 넘기는 방식을 제안했으나 해군의 강력한 거부와 반어거지로 밀어붙여 겨우 일단락한 만주 문제를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반려되고 양국 해군기지에서 자유롭게 기항, 급유, 급탄을 허락하는 선으로 정리한다.[18]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와 가까운 운남 군벌의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고 대한제국은 국민당 직속인 해군을 지원해주는척 하며 배후에서 통제하고 있다.[19] 흔히 오헝군의 약점으로 언급되는 출신지별로 다른 언어 문제는 프셰미실 이전까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전투에서 숙련병과 정예 장교들을 대거 손실하며 불거진 문제였는데 원래보다 정예 병력을 더 많이 육성하고, 성공적으로 보전하면서 이 약점이 사라졌다.[20] 부크강 집단군. 이름은 집단군이지만 실제로는 야전군급 규모다.[21] 오데르-나이세 선에 익숙한 지금 시각에선 그냥 폴란드 땅이지만 동프로이센 코앞이다.[22] 동맹국에서 가장 체급이 작은 불가리아는 원 역사대로 성인 남성의 90%를 징집하는 바람에 루마니아를 상대할 여력이 없다고 설명된다.[23] 하얼빈이 만주 유일의 환승역이라 이곳이 한국에 넘어가면 남만주 전체가 넘어가고, 남만주가 넘어가면 인구 밀도가 낮고 하얼빈 외 대도시가 없는 북만주도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와 사실상 만주 전체가 한국 영향하에 놓이게 된다.[24] 드로즈돕스키를 통해 그들이 투입된다는 건 이 전장이 그만큼 뭣같다는 뜻이라는 언급까지 한 걸 보면 스페이스 마린 묘사에서 따왔음이 유력하다.[25] 대한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는 당시 왕국의 지위였기 때문에 여섯 제국이 아닌 다섯 제국이다. 불가리아의 지도자 호칭이 흔히 황제 칭호 하면 하나로 보는 차르이긴 하지만 1차 대전 시기에 차르라는 호칭은 황제에서 왕을 의미하는 호칭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에 불가리아는 제국을 칭할 수 없다. 그래서 당시 러시아 제국 황제의 칭호는 공식적으론 임페라토르였다.(물론 실질적으로 많이 쓰인 호칭은 차르이긴 하다.)[26] 당시 타국의 화학전 교리는 화학탄을 적 방어선에 직접 투발하는 방식이였는데, 방어선에 잔류한 작용제는 이후 진군하는 아군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제국군은 고농도의, 잔류시간이 긴 작용제를 적 부대의 후방에 투발하여 적이 퇴각하거나 증원이 오는 것을 차단하고, 방어선 전면에는 잔류시간이 짧은 작용제를 투하함과 동시에 전선 곳곳에 일반포격을 섞어 포격함으로써 적에게 포탄맞아 죽을지, 가스에 질식해 죽을지, 아니면 큰 희생을 겪으며 빠져나와 만신창이가 된채 한국군과 맞붙을지 강요하고 고착시키는 전술을 사용했다. 전선 전면에 투발한 작용제는 지속시간이 짧기에 아군이 진격할때도 큰 피해가 없는 것은 덤.[27] 갈리폴리에서 영국군을 격파한 19사단은 편제가 삭제되고, 20사단도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28] 원 역사에선 러시아가 참패하며 두 차례에 걸친 혁명으로 무너져버린 덕에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핀란드, 발트 3국, 캅카스까지 죄다 뱉어내야 했고 동맹국은 이 방대한 땅을 관리하느라 1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묶어둬야 했으나 역사가 바뀌어 온건한 협상을 맺고, 관리할 영토도 크지 않아 아무리 높여 잡아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수십만 정도만 남겨 두고 나머진 서부전선으로 투입할 수 있게 됐다. 영프도 영프지만 60만 이탈리아군이 90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저지하고 있는 이손초 전선은 동부전선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 120만이 귀환하면 절대로 버틸 수 없는 구조이고 이손초 전선이 돌파당해 북이탈리아가 무너지면 남프랑스까지 고속도로가 뚫린다.[29] 장교 사망자만 3만 5천. 오야마 원수, 노기 대장 등 간신히 살아남은 인원들마저 특유의 책임 문화 탓에 할복, 퇴역해버림으로서 메이지 유신 이래 길러온 육군의 인재풀이 통째로 사라졌다.[30] 삼남 지방이 빠진 이유는 극동전쟁 당시 입었던 피해가 너무 커서 아직 복구하지 못한 탓이 컸고 강원도는 애당초 인구가 적다.[31] 최고사령부에 양보하기 싫은 헤이그의 고집과 그에 동조한 페탱의 몽니, 없는 자원 짜내서 지원한 플러머의 신속한 대응 덕분에 프랑스 땅에서 한국군 포병의 지원을 등에 업은 영국군 전차대가 적을 밀어내고 일본군 보병이 이를 엄호하며 한국 제병협동군이 적의 배후를 차단하는데 정작 프랑스군은 없는 촌극이 벌어진다.[32] 가장 먼저 당하고 전멸한 44예비보병사단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한국군 전차는 보병과 동시에 빠르게 몰아치며, 피탄면적이 좁고 빠른데다 강심철갑탄을 정면에서 막을 정도의 방호력은 있어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기동포대라는 내용이었다. 기동간 사격과 보병과의 협동을 기본으로 하는 한국군의 전차 운용 방식을 있는 그대로 증언한 것으로 독일이 1918년까지 정립한 대전차교리로는 상대할 수 없는 적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으나 44사단보다 후방에 위치해 주로 포격과 공습에 당하고 전차와의 접촉은 소수였던 18, 30사단 생존자들의 증언에 묻혀버렸다.[33] 빠른 진격만을 생각하고 기동성이 느린 중포들을 후방에 둔채 땡보병만 앞세워 보내버린데다 지휘부를 잃고도 점조직 형태로 여기저기서 독일군 부대와 보급로를 계속 공격한 영국 5군의 잔존병들이 포병의 이동을 더욱 늦췄다. 때문에 독일군의 포병은 공세 후반에야 겨우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34] 프랑스 제1군 예하 17개 사단+프랑스 제10군 예하 5개 사단.[35] 페탱의 협력을 끌어내 프랑스 제6군이 수비군이 빠져나간 생캉탱을 공격, 독일의 주퇴각로를 차단하고, 플러머와 바잉이 이끄는 영국 제2군, 제3군이 북동부의 바폼므와 캉브레를 막아서고 뒤베니의 프랑스 제1군과 망쟁의 제10군으로 구성된 충격부대가 최소한의 기동 공간조차 없이 좁은 종심에 몰려 포격과 공습에 맞으며 진군하는 독일군을 정면에서 부순다. 기존의 인력과 군마만으로는 80만이라는 질량을 뚫는 게 불가능하지만 600대의 전차와 2500대의 트럭, 1000대의 항공기가 이를 가능성 있는 시도로 만들었다.[36] 이것 때문에 2차 대전 때 독일군의 낫질 작전이 가능할지 안 가능할지에 대해 독자들의 갑론을박이 있는데, 대체로 '반반'이라는 평이다. 원 역사에서도 프랑스군은 아르덴 숲 돌파 가능성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저지대가 주공이라 착각한 것(아예 착각은 아니고 독일군의 실수로 정보가 누출되자 부랴부랴 바꾼 게 낫질 작전이다)+항공결전 대비한다고 정찰기도 안 띄우는 뻘짓을 해서 아르덴 숲 돌파를 늦게 파악한 것이 크기 때문에 주공을 저지대라고 착각하게 만든다면 아르덴의 위험성을 알든 말든 낫질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본작에서는 김시혁이 아르덴 숲을 전차 기동으로 돌파하는 것이 1차대전 기술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만큼 프랑스군이 빨리 간파한다면 6주까지는 안 될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37] 아헨 시장의 말에 따르면 당시 아헨-쾰른 사이의 도로들도 반군과 홍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제법 혼란스럽다고 한다.[38] 김시혁에게 유례없는 군신 간의 동맹을 제안하고 협력하려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전제황권을 누대로 휘두르겠다는 구상이면 가장 큰 걸림돌이지만 황실이 대놓고 반동을 향해가지 않는다면 군의 정치적 중립을 유지시키며 본분에만 충실할 테니까.[39] 정작 박두영은 황제가 당연히 이전처럼 밖으로 나가 신민들을 달래지 대뜸 계엄령과 무력 진압을 꺼낼 거라는 생각도 못 했고, 김시혁이 고종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할 것도 생각 못 해서 여차하면 둘을 유폐할 생각이었다.[40] 공화정을 주장하는 정치세력도 있었지만 미국 대사관에 피신해있던 이승만이 공화정을 주장하며 자신이 권력을 쥐려는 야심을 너무 급하게 내보이는 바람에 다른 모든 정치세력들이 이승만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화정은 아직 안된다는데 합의하고 말았다.[41] 전술 묘사를 보면 군민 분리와 차단선 설치 후 몰아가기, 해, 공군과의 연합작전 등 원 역사에서 유재흥, 백선엽이 선보인 정석 빨치산 토벌 작전이다.[42] 원 역사에선 프랑스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영국이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역사 개변으로 프랑스가 훨씬 적극적으로 나서고 그리스군의 전력이 강화되었다. 케말 측은 똑같이 민병대로 맞서는 대신 소련과 훨씬 밀접해졌다.[43] 처음 소련 측에서 제안한 국경은 아르군강 이었으나 턱없이 낮은 인구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넓어 오히려 방어나 개척에 불리함을 지적한 김시혁에 의해 반려된다.[44] 대한제국은 강종의 내탕금을 헐어 잡음없이 해결했다. 워낙 여기저기 쟁여둔 게 많아서 참전용사 상여금에 2.27 계엄 피해자 보상금까지 전부 지불하고도 돈이 한참 남았다.[45] 미국은 화북 시장 진출로 대한제국이 10년간 30억 달러 이상의 경제적 이득을 취할 것이라 추산했다. 1911년 이래 줄곧 이어진 국경 분쟁이 종식되어 여기로 새나가던 비용이 증발하는 것과 별도로.[46] 쑨원이 관동대학살이든 뭐든 명분 삼아 일본에 복수하려들게 뻔한데 일본과 평화를 유지해 지한 성향의 일본 내각의 수명을 연장시키면서 중국 시장에 영향력도 유지하려는 한국의 외교, 경제 정책을 통째로 흔드는 일이고, 쑨원에 만주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도 빤히 보이는지라 안보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적어도 북만주를 완전히 소화할 때까진 중국은 분열되어 있어야 한다는 게 한국 내부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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