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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프랑스-멕시코 전쟁 | |
| 일시 | |
| 1861년 12월 8일 ~ 1867년 6월 21일 | |
| 장소 | |
| 멕시코 | |
| 교전국 | |
(1864~1867) | |
| 지휘관 | |
| 동원병력 | |
종전 당시 100,000명 | |
| 지원국 | |
1. 개요
제2차 프랑스-멕시코 전쟁은 1862년부터 1867년까지 벌어진 전쟁이었다. 멕시코의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가 1861년 멕시코의 채무 불이행 선언을 하고 전쟁이 발발했다. 채무 불이행 선언 이후에 영국, 프랑스, 스페인이 런던 조약으로 동맹함대를 결성해 멕시코로 파병하였다.그때 멕시코가 채무 불이행, 디폴트 선언을 철회하였음에도 동맹함대는 작전을 계속 수행하여 1862년에 수도 멕시코시티의 외항인 베라크루즈에 도착해 멕시코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영국과 스페인 함대는 돌아갔지만, 프랑스는 몇년 전 멕시코의 개혁 전쟁에서 패배한 보수주의자들의 도움을 얻어 아메리카에 프랑스 영향력 아래의 국가를 세우자 멕시코를 침공하며 시작되었다.
1862년 5월 5일의 푸에블라 전투이후에도 프랑스군은 1863년 6월 10일부터 멕시코시티를 지속적으로 점령하는데 이르렀고, 프랑스의 괴뢰국인 멕시코 제2제국을 선포하였다. 그 결과 자유주의 공화국 정부는 멕시코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며 항전을 이어나갔다.
프랑스군은 1866년부터 멕시코군의 공격에 의해 물러났는데,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이 임박하고 미국 남부연맹이 북부 미합중국에 대한 항복을 선언하자 완전히 철수했다.
또한 카메론 전투에서 등 프랑스 외인부대가 용맹을 떨치기도 했다.
2. 배경
멕시코는 독립 후에도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는데, 가장 큰 쟁점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 토지 소유, 군의 특권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막대한 토지와 영향력을 갖고 있었고,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개혁해 세속화·토지 분배·근대적 법치국가를 세우려 했다. 이에 따라 1857년에 자유주의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보수 세력이 반발하며 내전이 시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의 독재에 반대에 자유주의 지식인과 군인들이 아유틀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2전쟁 전부 정부의 승리로 끝이났지만, 이로 인해 국가 예산을 많이써서 멕시코 정부가 2년간 외채 상환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분노한 스페인, 영국, 프랑스는 1861년 10월 멕시코의 경제 정책에 공동으로 항의하기 위해 3자 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멕시코의 내전에 개입할 의도는 없었지만, 부채 상환을 요구했고, 멕시코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베라크루스에 무장 원정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에 깜짝놀란 멕시코 외무장관 마누엘 도블라도는 부채 유예가 일시적이라고 설득했다. 이에 스페인과 영국 정부는 떠났지만, 프랑스는 철수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를 프랑스 휘하에 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는 멕시코를 통해 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부연맹을 지원하여 이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킬 계획이었다. 또한 나폴레옹 3세의 아내인 외제니 드 몽티조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멕시코의 자유주의자들이 가톨릭을 약화시키자 멕시코 제국을 건설해 가톨릭을 널리 퍼트릴 생각이었다.이에 멕시코 정부는 프랑스가 순순히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또한 일부 멕시코인들은 프랑스에 호의적이었다. 왜냐하면 개혁 전쟁에서 패배한 보수 정부의 외무장관이었고 프랑스에 의해 멕시코로 송환된 멕시코 장군 후안 알몬테가 자신의 선언문을 발표하여 멕시코 국민들에게 프랑스의 자비로운 의도를 확신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보수파 멕시코 장군인 플로렌티노 로페스, 레오나르도 마르케스, 후안 비카리오는 프랑스 편을 들기 시작했다. 결국 두 국가 사이는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3. 전개
1862년 5월 5일 푸에블라 시 근처에서 이그나시오 사라고사가 지휘하는 멕시코 공화국 군대와 로렌세스 백작 샤를 페르디난드 라트릴레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로렌세스 백작은 프랑스가 전쟁에서 빨리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이에 빠르게 결판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사라고사는 언덕 위의 요새를 핵심 방어 거점으로 삼고, 여기에 중·대형 야포를 배치하여 고지의 관측·사격 우위를 확보했다. 프랑스는 몇 차례 맹렬한 돌격을 감행했는데, 포위·근접작전에서 프랑스군 제복의 붉은 바지가 목표가 되었고, 근접전에서 멕시코 보병의 결사적 저항과 포병의 정확사격으로 공격이 원천봉쇄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전투 중 멕시코의 포르피리오 디아스와 다른 사단들이 위협받는 구간으로 급히 이동해 보강했고, 산발적인 백병전·소규모 돌격·반격이 전장 전면에서 일어났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소나기가 내려 프랑스의 화력·조준·기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오후 중반 이후 프랑스의 반복 공격은 소모만 거듭했고, 멕시코군은 부분적인 반격과 추격으로 프랑스 보병을 흩뜨렸다. 이같은 상황에 프랑스는 결국 철수 할 수 밖에 없었다. 푸에블라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자 나폴레옹 3세는 엘리 프레데릭 포레가 지휘하는 3만 명의 증원군을 파견하였다. 3월 16일, 포레는 다시 푸에블라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도시는 여러 날 동안 저항했지만, 마침내 산타 이네스와 산 하비에르 요새가 파괴된 후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었다. 더구나 5월 8일, 프랑수아 아킬레 바젠 과 레오나르도 마르케스는 산 로렌소 전투에서 전 멕시코 대통령인 이그나시오 코몬포르트가 지휘하던 신병 부대를 격파해 푸에블라로의 위협을 차단하였다.푸에블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수도 멕시코시티를 떠나 산루이스포토시로 정부를 옮겼다. 멕시코 의회는 후아레스 대통령에게 비상 권한을 부여한 후 5월 31일에 폐회하였다. 한편, 6월 10일, 프랑스군은 멕시코시티에 승리의 입성을 했고, 포레이 장군은 점령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산루이스포토시로 도망간 베니토 후에레스 대통령은 저항군을 조직하였다. 포레는 프랑스로 돌아와 원수 칭호를 받았고, 프랑수아 아킬 바젠이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프랑스군은 이제 4만 5천 명이 넘었고, 이전에 정복했던 영토에 더해 틀락스칼라, 톨루카, 케레타로를 점령하였다. 이같은 프랑스의 북진에 멕시코 정부는 저항의 거점을 살티요로 옮겼다. 그러고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멕시코 제2제국의 장군 마르케스는 산루이스포토시를 점령하였다. 공화파는 주로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전국 곳곳에서 프랑스군의 진격에 저항했지만, 프랑스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고 1864년에는 멕시코 제2의 도시인 과달라하라를 점령하였다. 1863년 7월 11일 의회는 멕시코를 입헌군주제로 하고 막시밀리아노 1세를 멕시코 황제로 선포하였다. 새로운 군주국은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 국가들에게 인정하였다.[1] 의회의 인정을 받은 막시밀리아노 1세는 그의 아내 벨기에의 샤를로트 공주의 대관식이 열림으로서 멕시코 제2제국 성립에 쇄기를 박았다. 이렇게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나 하였다.
나폴레옹 3세의 내부 및 외부 문제가 프랑스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먼저 북부가 남부 연맹를 이김으로서 미국은 멕시코 공화 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함으로 인해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베니토 후아레즈는 막시밀라아노 1세에게 빨리 멕시코를 떠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또한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H. 수어드가 프랑스의 철수를 강권하였다. 때 마침 멕시코 게릴라들의 집요한 공격을 멕시코 북부 전황도 좋지 않자 결국 1866년 1월 프랑스 의회 개회식에서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에서 프랑스군을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계획은 세 단계로 철군하는 것이었는데 첫 단계는 1866년 11월, 두 번째 단계는 1867년 3월, 세 번째는 1867년 11월까지 완료하는 것이었다. 단, 실제 실행은 이 일정보다 앞당겨지거나 조정되었다. 이에 막시밀리아노 1세는 공화파에게 관용을 보이는 정책, 혹은 일부 개혁 조치를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이 것은 보수파에게는 배신처럼 여거져 황제의 지지 기반이 분열되었다. 그의 부인인 샤를로트가 유럽으로 가서 지원을 호소하였지만, 실질적 지원은 거의 얻지 못하였다.
프랑스군이 서서히 철수하자 멕시코 제2제국은 북부와 남부에서 영향력은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1866년 12월 12일, 프랑스군은 과달라하라를 포기했고, 제국군은 12월 19일 과달라하라를 떠나 과나후아토로 향했다. 프랑스 장군 바젠은 1867년 2월 5일 멕시코시티에서 철수했고, 수송선, 우편선, 전대선을 포함한 30척 이상의 선박이 베라크루스 철수를 도왔다. 1867년 초, 거의 마지막 프랑스 병력들이 베라크루스를 떠나 툴롱으로 가버리자 황제의 군사 기반은 더 작고 취약해졌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막시밀리아노 1세는 남은 병력을 중부에 집결시키면서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공화군은 3월 5일 케레타로에 도착했고, 그 후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국군은 저항하며 몇 차례의 접전에서 승리했지만, 공화군이 점점 세력을 확장하자 해안으로 진격할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통자인 미겔 로페스 대령이 적에게 성문을 열어주면서, 공화국군은 재빨리 케레타로를 점령하였고, 막시밀리아노 1세는 포로로 잡혔다. 군사재판에 따라 막시밀리안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많은 유럽 군주와 빅토르 위고, 주세페 가리발디 등은 막시밀리아노 1세를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지만, 후에레스는 이 같은 요청을 무시하고 그를 총살시켜버렸다.
4. 영향
이 전쟁의 패배로 멕시코 보수파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니토 후아레스는 헌법 상 재선 금지에도 불구하고 재선되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 전쟁에 너무나도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부었고, 이는 결국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1] 다만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브라질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멕시코 제2제국 성립을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