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padding-top: 5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5%;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 <rowcolor=#cd9f51> 1901 | 1902 | 1903 | 1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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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뷔스 판트호프 | 헤르만 에밀 피셔 | 스반테 아레니우스 | 윌리엄 램지 | |
<rowcolor=#cd9f51> 1905 | 1906 | 1907 | 19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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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폰 바이어 | 앙리 무아상 | 에두아르트 부흐너 | 어니스트 러더퍼드 | |
<rowcolor=#cd9f51> 1909 | 1910 | 1911 | 19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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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오스트발트 | 오토 발라흐 | 마리 퀴리 | 빅토르 그리냐르 | |
<rowcolor=#cd9f51> 1912 | 1913 | 1914 | 19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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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사바티에 | 알프레드 베르너 | 시어도어 윌리엄 리처즈 | 리하르트 빌슈테터 | |
<rowcolor=#cd9f51> 1918 | 1920 | 1921 | 19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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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하버 | 발터 네른스트 | 프레더릭 소디 | 프랜시스 윌리엄 애스턴 | |
<rowcolor=#cd9f51> 1923 | 1925 | 1926 | 19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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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프레글 | 리하르트 아돌프 지그몬디 | 테오도르 스베드베리 | 하인리히 오토 빌란트 | |
<rowcolor=#cd9f51> 1928 | 1929 | 19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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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빈다우스 | 아서 하든 | 한스 폰 오일러켈핀 | 한스 피셔 | |
<rowcolor=#cd9f51> 1931 | 1932 | 19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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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보슈 |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 | 어빙 랭뮤어 | 해럴드 클라이턴 유리 | |
<rowcolor=#cd9f51> 1935 | 1936 | 19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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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졸리오퀴리 | 이렌 졸리오퀴리 | 피터 디바이 | 월터 호어스 | |
<rowcolor=#cd9f51> 1937 | 1938 | 19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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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카러 | 리하르트 쿤 | 아돌프 부테난트 | 레오폴드 루지치카 | |
<rowcolor=#cd9f51> 1943 | 1944 | 1945 | 19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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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드 헤베시 | 오토 한 | 아르투리 비르타넨 | 제임스 B. 섬너 | |
<rowcolor=#cd9f51> 1946 | 1947 | 194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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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워드 노스럽 | 웬들 매러디스 스탠리 | 로버트 로빈슨 | 아르네 티셀리우스 | |
<rowcolor=#cd9f51> 1949 | 1950 | 195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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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지오크 | 오토 딜스 | 쿠르트 알더 | 에드윈 맥밀런 | |
<rowcolor=#cd9f51> 1951 | 1952 | 19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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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시보그 | 아처 마틴 | 리처드 싱 | 헤르만 슈타우딩거 | |
<rowcolor=#cd9f51> 1954 | 1955 | 195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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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스 폴링 | 빈센트 뒤비뇨 | 시릴 노먼 힌셜우드 | 니콜라이 세묘노프 | |
<rowcolor=#cd9f51> 1957 | 1958 | 1959 | 196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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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R. 토드 | 프레더릭 생어 | 야로슬라프 헤이로프스키 | 윌러드 리비 | |
<rowcolor=#cd9f51> 1961 | 1962 | 196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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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 캘빈 | 존 켄드루 | 막스 페루츠 | 줄리오 나타 | |
<rowcolor=#cd9f51> 1963 | 1964 | 1965 | 196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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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치글러 | 도러시 호지킨 | 로버트 번스 우드워드 | 로버트 샌더슨 멀리컨 | |
<rowcolor=#cd9f51> 1967 | 196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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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프레트 아이겐 | 로널드 노리시 | 조지 포터 | 라르스 온사게르 | |
<rowcolor=#cd9f51> 1969 | 1970 | 19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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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릭 바턴 | 오드 하셀 | 루이스 를루이르 | 게르하르트 헤르츠베르크 | |
<rowcolor=#cd9f51> 1972 | 197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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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안핀센 | 스탠퍼드 무어 | 윌리엄 하워드 스타인 | 에른스트 오토 피셔 | |
<rowcolor=#cd9f51> 1973 | 1974 | 197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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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윌킨슨 | 폴 플로리 | 존 콘포스 | 블라디미르 프렐로그 | |
<rowcolor=#cd9f51> 1976 | 1977 | 1978 | 197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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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립스컴 | 일리야 프리고진 | 피터 데니스 미첼 | 허버트 찰스 브라운 | |
<rowcolor=#cd9f51> 1979 | 198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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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비티히 | 폴 버그 | 월터 길버트 | 프레더릭 생어 | |
<rowcolor=#cd9f51> 1981 | 1982 | 198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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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이 겐이치 | 로알드 호프만 | 에런 클루그 | 헨리 타우버 | |
<rowcolor=#cd9f51> 1984 | 1985 | 198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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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브루스 메리필드 | 허버트 애런 하우프트먼 | 제롬 칼 | 더들리 로버트 허슈바크 | |
<rowcolor=#cd9f51> 1986 | 198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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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위안저 | 존 찰스 폴라니 | 장마리 렌 | 찰스 피더슨 | |
<rowcolor=#cd9f51> 1987 | 198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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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J. 크램 | 요한 다이젠호퍼 | 로베르트 후버 | 하르트무트 미헬 | |
<rowcolor=#cd9f51> 1989 | 1990 | 199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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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올트먼 | 토머스 로버트 체크 | 일라이어스 제임스 코리 | 리하르트 에른스트 | |
<rowcolor=#cd9f51> 1992 | 1993 | 199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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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마커스 | 캐리 멀리스 | 마이클 스미스 | 조지 앤드루 올라 | |
<rowcolor=#cd9f51> 1995 | 199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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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크뤼천 | 프랭크 셔우드 롤런드 | 마리오 호세 몰리나 | 로버트 컬 | |
<rowcolor=#cd9f51> 1996 | 199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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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크로토 | 리처드 스몰리 | 존 워커 | 폴 보이어 | |
<rowcolor=#cd9f51> 1997 | 1998 | 19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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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스 스코우 | 월터 콘 | 존 포플 | 아메드 즈웨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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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히거 | 앨런 맥더미드 | 시라카와 히데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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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제니퍼 다우드나 Jennifer Anne Doudn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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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4년 2월 19일 ([age(1964-02-19)]세) |
미국 워싱턴 D.C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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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생화학자 |
현직 | UC 버클리[1] (2002년~ / 교수)카리부 바이오사이언스 (2011년~ / 수석과학고문) 매머드 바이오사이언스 (2017년~ / 공동창업) |
학력 | 포모나 칼리지 (생화학 / 1985년 학사) 하버드 대학교 의학대학원 (생화학 · 분자약리학 / 1989년 박사) |
지도교수 | 잭 쇼스택 |
주요경력 |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 (1991~1993년 / 박사후연구원) 예일 대학교 (1993~2002년 / 교수) 제넨테크 (2008~2009년) 에디타스 메디신 (2013~2014년 / 공동창업) |
저서 | 크리스퍼가 온다 (A Crack in Creation) |
배우자 | 톰 그리핀[2] (1988~2000년) 제이미 케이트[3] (2000년~ ) |
자녀 | 앤드루 케이트 (2002년생) |
외부 링크 |
1. 개요
UC 버클리에서 정교수로 재직 중인 미국의 생화학자이다. RNA 구조와 간섭을 밝히는 데 기여했으며 CRISPR 시스템을 통한 유전자 편집 분야의 개척자로 꼽힌다.2. 생애
워싱턴 D.C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국방부의 연설문 작성자로 근무했으며, 모친은 커뮤니티 칼리지 교사로 근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학 교수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부친이 미시건 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며 제니퍼도 거처를 옮겼고, 부친이 하와이의 소도시인 힐로에 있는 하와이 대학교에 임용되며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하와이에서는 문화적 요인으로 인해 백인이었던 다우드나는 폴리네시아 토착민 또래들로부터 하울리[4]라고 불리며 인종적 차별[5]을 당하는 등 소수자 백인으로서 살아갔다.[6]그나마 3학년부터는 힐로의 중심지를 떠나며 전교생이 스무 명 남짓인 작은 학교로 전학을 가며 적응하는 데 성공하고, 5학년에는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 한 학년 월반했다고 한다. 학업 성적이 우수했으나, 하교 후에는 자전거를 타거나 밭을 산책하며 식물을 탐사하는 등 힐로에서의 경험[7]으로 인해 자연에 대한 호기심을 늘려 나갔다고 한다. 축구팀에서 하프백으로 활동했고, 모키하나라는 이름을 붙여준 말도 한 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는 진학 담당 교사에게 자신의 과학적 목표를 말하자, 그에게 여성차별적인 발언을 당하며 화학과 진학을 하지 말라는 억지 조언을 당했음에도, 1981년 화학으로 유명한 포모나 칼리지에 당당히 합격하여 캘리포니아로 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진학하니, 과에 화학 과목 AP 만점자 출신이 수두룩했으며 부유했던 동기들과 달리 학교 보조금을 받고 파트타임으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되었던 제니퍼는 현실적인 여건으로 인해 전과를 고민하기까지 한다. 결국 프랑스어로 전공을 바꾸려고 프랑스어과 교수를 찾아갔는데, 그 교수가 프랑스어를 배우면 될 수 있는 건 프랑스어 선생님이 되는 것 뿐이지만 생명 과학을 배우면 세계적인 인물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하며 끝까지 도전해보라고 조언하며 화학인의 길을 굳히게 된다.[8]
2.1. 학계 활동
1학년을 마친 뒤 여름방학 동안은 고향으로 돌아가, 돈 헴스[9] 교수의 연구실에서 인턴을 경험했다. 이곳에서 전자현미경으로 입자를 분석하고 샘플을 염색해 진화 과정을 추적하며 연구노트를 처음으로 쓰게 되었다. 3학년을 마친 뒤 여름방학 기간에는 생화학과 여교수인 샤를 파나센코의 연구실에서 근무했다. 여성 교수로서 당당히 이름을 떨치던 그녀를 롤모델로 삼으며 동경했다고 하며, 점액세균이 자실체라는 군집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화학 신호 작용 메커니즘을 밝히는 연구를 진행했는데, 예비관찰에 크게 기여하여 처음으로 학술지에 이름을 실었다.학사 졸업 이후에는 1985년, 풀펀딩을 받으며 전미 최고의 화학 명가 연구기관인 하버드 대학교의 박사 과정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다. 1학년 로테이션 기간 중 우선적으로 로베르토 콜테르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박테리아에서 추출한 DNA를 복제하고 기능을 점검하여 박테리아가 다른 박테리아에게 유독한 분자를 생산하는 과정을 연구했다. 이후에는 효모 DNA를 연구하는 잭 쇼스택 교수의 연구실을 경험했는데, 효모 세포가 DNA 조각을 자신의 유전물질에 효율적으로 끼운다는 것을 발견하고, 효모의 특정 DNA 염기서열과 동일한 서열을 끝에 달고 있는 DNA 가닥을 만든 뒤 미량의 전기충격을 주어 효모 세포벽의 작은 통로를 열고, 제니퍼 본인이 제작한 DNA를 넣어 효모 DNA와 결합시키는 유전자 편집 도구를 제작했다.
2.1.1. RNA 구조와 간섭
결국 쇼스택을 지도교수로 선택했는데, 이 무렵 쇼스택은 RNA의 기본적인 성질인 자가촉매 기능을 밝힌 토머스 로버트 체크와 시드니 올트먼의 리보자임 연구를 접하게 되며, 오랜 기간동안 연구해온 효모 DNA를 벗어나 특정 RNA가 효소의 촉매 능력을 발휘하는 매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연구주제를 바꾼다. 이에 다우드나는 RNA로 연구주제를 변경한 쇼스택의 첫 번째 RNA 연구제자가 되었다. 쇼스택은 다우드나가 탁월한 실험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회고했으며, 제니퍼는 쇼스택의 영향을 받아 큰 질문을 던지고 남이 하지 않는 분야일지라도 그것에 왜 중요한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고방칙을 갖추게 되었다.1989년 쇼스택은 리보자임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다우드나는 쇼스택 연구실을 졸업하여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졸업하며 리보자임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RNA 구조를 원자 수준까지 파악해야될 필요성을 느끼고 1991년 여름, 리보자임의 3차원 구조가 가지는 접합과 꼬임을 알기 위해 구조생물학을 공부하러, 2년 전 리보자임 연구에 대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받은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의 토머스 로버트 체크 연구실에서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다우드나는 이곳에서 RNA 인트론의 전자지도를 그리고 그것의 모든 원자와 결합상태를 밝히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를 위해 액체의 RNA 분자를 고체로 변환해 X선결정법 등 영상기법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 잠시 볼더로 온 예일 대학교의 톰 & 조앤 스타이츠 부부로 인해 이들의 새로운 급속냉각 장비와 기술[10]을 접하게 된 것을 계기로 1993년 가을, 예일 대학교의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남자친구였던 박사 과정 학생 제이미 케이트도 다우드나를 따라 예일의 박사로 편입했으며, 그는 오스뮴 헥사민이라는 금속이온 분자를 활용해 RNA 분자의 일부 구석진 부분과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며 다우드나가 앞선 스타이츠 부부의 장비로도 결정의 높은 품질에 비해 파동의 강도만 탐지하고 위상은 측정하지 못했던 X선 탐지기의 한계를 극복하여 접힘 부위의 구조를 밝혀낸 X선 회절 사진을 얻어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결과 다우드나는 1995년, 볼더에서부터 꿈꿔왔던 전자밀도 지도와 RNA 구조 모델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유전자 편집의 또 다른 시발점이자 선구자가 되었다.[11]
다우드나는 전자밀도 지도와 RNA 구조 모델을 만들어내는 문턱을 넘은 이후 모교인 하버드에서 잠시 방문교수로 휴식기를 갖고 결혼과 출산을 하는데, 예일은 RNA 분야 초신성인 그녀를 잡기 위해 남편인 케이트에게도 교수 직을 제안하지만, 그와 연구 분야가 겹치는 극저온 냉각 구조생물학자인 톰 스타이츠의 존재로 인해 예일을 제쳐뒀고 학계 최고 실적을 내던 하버드도 고사한 채 2002년 가을, UC버클리로 거처를 옮기며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12]
버클리로 가자마자 RNA 코로나바이러스인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이 전세게를 강타하며 바이러스의 RNA가 어떻게 박테리아를 장악하는 지에 대한 의제로 연구 방향을 설정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RNA 가닥을 짧은 조각으로 잘라내는 다이서라는 가수분해효소 작용으로 인한 RNA간섭[13] 관련해서 다이서의 분자구조를 밝혀내기 위해 다시 한 번 X선결정법 등 영상분석을 중심으로 연구에 돌입한 결과 2006년, 첫 번째 다이서 관련 논문을 낸 뒤 다이서를 직접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2.1.2. CRISPR와 Cas
한편 2006년, 버클리의 미생물학자인 질리언 밴필드[14]로부터 전화를 받으며 CRISPR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게 된다. 다우드나는 즉시 밴필드에 본인 제자들[15]을 붙여주며 RNA 간섭 원리를 찾기 위해 Cas1 효소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 돌입한다.2008년 7월, 버클리의 스탠리 홀에서 첫 번째 연례 크리스퍼 학회를 주최했다. 학회 기간 동안 크리스퍼 관련 용어와 명칭들을 표준화시켰고, 크리스퍼는 사실 RNA 간섭이 아니라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를 표적으로 작동한다는 기본적 원리가 밝혀졌다. 이로 인해 다우드나 연구실은 RNA 간섭 연구 비중을 줄이고 DNA를 표적으로 하는 메커니즘으로 연구 방향을 전환한다.
크리스퍼 학회를 마친 직후에는 기초과학을 넘어 유전자 편집 도구라는 가능성을 옅보며 응용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2008년 말 버클리 팀원들을 데리고 제넨테크[16]에 입사했다. 하지만 기업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느끼고 2009년 3월, 버클리로 복귀했다.
복귀 이후부터는 직접적인 연구 주도를 어느 정도 내려놓고 연구실의 책임자로서 제자 육성과 프로젝트 권유 등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간 결과, 2009년 6월 제자인 비텐헤프트와 이네크는 Cas가 바이러스의 DNA를 잘라내 박테리아의 CRISPR 염기서열에 추가하는 면역계 기억 생성 단계의 핵심 매커니즘을 실험적으로 규명해내며 다우드나 연구실에 첫 번째 CRISPR 관련 성과를 안겼다. 또한 하우어비츠라는 제자와 협력하여 Cas6 구조로 특허를 낸 뒤 다우드나 연구실의 성과를 상업화[17]하는 것을 목표로 2011년 11월 카리부 바이오사이언스(Caribou Bioscience)라는 스타트업의 수석과학고문으로 설립에 참여했다.[18]
tracrRNA를 비롯해 crRNA, Cas9의 역할과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논문을 냈으나, 아직 이를 생화학적으로 증명해내지 못했고 그럴 여력도 없었던 프랑스의 에마뉘엘 샤르팡티에라는 학자는 2011년 4월,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서 열린 미국 미생물학회 국제 학술 대회 기간에 다우드나가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Cas9이 바이러스의 DNA를 잘라내는 정확한 매커니즘을 밝히고자 공동연구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다우드나와 샤르팡티에는 연구소의 리더로서 공동연구를 관리감독하기 시작했고, 다우드나의 연구원인 마르틴 이네크, 샤르팡티에의 연구원인 크리슈포트 힐린스키가 각각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리아에서 실질적인 실험을 진행해가며 원격협업을 통한 24시간 풀타임 연구공유 체계로 프로젝트가 시작된다.[19]
패혈성 인두염을 유발하는 화농성 연쇄상구균 박테리아[20]로 단세포생물 기반의 실험을 거듭한 결과 2012년 5월 26일 sgRNA 특허를 출원하고 6월 8일, 드디어 tracrRNA, crRNA, Cas의 정확한 매커니즘과 인과관계를 실험적으로 증명[21]했으며 sgRNA[22]를 통한 인간 유전자 편집 도구 시대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제시된 논문이 사이언스지에 투고되었고 6월 20일 채택[23]을 받은 뒤 21일 크리스퍼 학회 발표[24]를 거쳐 6월 28일 논문이 출간되며 인간[25] 유전자 편집 응용 경쟁의 시대가 도래했다.[26]
불과 반 년 뒤인 2013년 1월까지 다섯 곳의 연구실이 인간 세포에서 CRISPR-Cas9이 작동함을 밝혀냄에 따라 상업화의 길이 열렸고, 2월 다우드나와 조지 처치는 샤르팡티에에 공동창업을 제안하지만, 협상이 틀어졌고 9월 조지 처치와 장펑, 케이트 정[27], 데니스 류와 함께 CRISPR 핵심 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4,000만 달러의 거금을 투자받으며 에디타스 메디신(Editas Medicine)[28]을 설립했다.[29]
하지만 에디타스는 보스턴의 장펑과 브로드 연구소 설립자인 에릭 랜더를 중심으로 움직였고, 2014년 4월 이들이 비밀리에 출원했던 특허를 허가받으며 다우드나를 배제[30]하려는 움직임을 벌이자, 2014년 6월 에디타스를 퇴사[31]하고 자신의 지적재산권에 대한 독점 사용권을 본인이 몸 담고 있는 카리부 바이오사이언스의 CRISPR-Cas9 상용화 전담 자회사인 인텔리아 테라퓨틱스에 몰아주는 결정을 내렸다.[32][33]
2014년 11월, 고대로부터 진화한 박테리아 면역 메커니즘을 유전자 편집이라는 기술로 바꾸어놓은 공로를 인정받아 샤르팡티에와 함께 2015년 브레이크스루상 생명과학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2015년에는 타임 100에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34]
다우드나 측[35]은 장펑 측[36]이 채택받은 특허가 자신이 먼저 제출한 특허 출원에 저촉된다며 저촉 심사를 요청했고, 2012년 6월 다우드나-샤르팡티에가 쓴 논문의 CRISPR-Cas9 시스템이 단세포를 넘어 인간 세포에서도 작동할 것이 자명한지에 대한 여부가 핵심 화두가 되며 2015년 12월 저촉 심사가 시작되었다.
2016년에는 조지프 본디드모니에 의해 Cas9을 무력화하는 안티크리스퍼가 발견[37]했는데, 그 무렵 DARPA 세이프 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CRISPR를 사용한 무기의 무력화 도구 개발을 의뢰 받으며 330만 달러의 지원금을 받은 다우드나 연구실은 그와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2016년 12월에는 특허 소송 청문회가 열렸으며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으나, 2017년 2월 재판부는 다우드나-샤르팡티에의 논문이 진핵세포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의 발명이 자명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고 지적하며 장펑의 특허는 다우드나 측의 특허와 서로 저촉되지 않는다고 인정되며 두 측 모두 독자적인 특허 출원이 가능해졌다.[38]
2017년에는 제자 샘 스턴버그와 함께 <크리스퍼가 온다>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또한 두 명의 대학원생 제자들과 CRISPR 기반 체내[39]진단도구 개발 업체인 매머드 바이오사이언스를 설립했다.
2019년 6월, 다우드나가 2012년에 신청한 출원에 근거한 특허를 허가받은 직후 다우드나 측의 새로운 변호인은 장 펑의 특허가 다우드나의 출원에 저촉되는지만 보았던 지난 소송과 달리 누가 먼저 CRISPR-Cas9을 편집 도구로 활용하는 핵심적인 발견을 했냐는 문제를 새로운 쟁점으로 삼으며 새 소송을 시작했다.
2020년, 유전자 편집 방법론 개발에 대한 공로로 논문 출간 8년만이라는 이례적으로 짧은 기간만에 샤르팡티에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두 사람은 과학 부문 노벨상의 공동 수상자에 모두 여성이 선정된 첫 사례가 되었다.[40]
2022년 설립된 Altos Labs의 이사로 합류했다.
2022년 2월 28일 미국특허심판원은 진핵세포에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활용하는 기술을 다우드나보다 장 펑이 먼저 개발[41]했다고 판단 내리며, 다우드나 측 UC버클리 특허 기반 라이센스를 구매한 기업들은 진핵세포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하기 위해 브로드연구소의 특허를 사야 하는 상황이 됐다. 다우드나 측은 즉시 항소했다.
2024년 5월 28일 미국 특허심판원은 2심에서도 원핵세포 CRISPR 기술에 한해서만 다우드나 측의 지적재산권을 인정하고 진핵세포, 즉 인간을 대상으로 한 범위에서는 주장을 기각하며 완패했다.[42]
2025년 5월 12일 미국 연방순회항소법원은 다우드나와 샤르팡티에가 핵심 특허에 대한 권리를 다시 주장할 수 있도록 사건을 재검토할 것을 특허심판원에 명령하며 패배에 가까웠던 분쟁은 다시 수면 위로 오르게 되었다.
3. 여담
- 2018년 11월 중국의 허젠쿠이[43]가 합의에 이르기 전까지는 유전적 대물림에 영향을 주는 생식세포 편집을 보류하자는 국제회의 지침[44]을 고의로 무시하고 CRISPR로 배아 단계에서 생식계열을 편집해 HIV에 저항성[45]을 지닌 맞춤아기를 탄생시키자, 생식세포 편집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그렇다고 생식세포 편집 임상은 향후 현실화 될 것이기에 여러 학회와 회의, 청문회 등을 오고 가며 당국 주도 모라토리엄은 반대했고, 대신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경우에만 최후의 수단[46]으로 생식세포 편집을 진행할 것을 주장한다.
[1] 화학대학, 분자세포생물학과 교수[2] 하버드 대학교 학부 재학 당시 옆 실험실에서 근무하던 의대생이었다. 졸업 후 바이오테크 스타트업에 입사하여 볼더에서 다우드나와 함께 생활했으나, 다우드나가 주말에도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울 정도로 과학광이었던 반면 그리핀은 워라밸을 지키며 퇴근 후 독서와 영화 시청, 전자기기 구입 등 여가생활을 즐겼던 탓에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3] 제니퍼 다우드나가 볼더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할 당시 대학원생으로 X선결정법으로 단백질 구조를 연구하다, 그녀를 도와 X선결정법으로 RNA 연구를 도우며 인연을 맺었다. 2000년, 제니퍼의 고향인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예일 졸업 후에는 UCSB에서 박사후연구원을, MIT에서 잠시 조교수를 하다 다우드나와 함께 UC버클리 교수로 부임한다.[4] Haole. 이방인, 백인이라는 의미를 지닌 원주민 언어인데, 상당히 배타적인, 나아가 차별적인 단어로 쓰인다.[5] 하와이는 과거 주 승격 직전에 백인계 이주민들에게 원주민들이 무수하게 착취당하고 차별당하며 살아온 설움 때문에, 그 보복으로 역으로 원주민계가 사회의 상류층으로 올라간 뒤로는 인종에 관계없이 백인들을 철저히 왕따시키는 상황이다. 미국에서 백인이 일방적인 인종차별의 피해자로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6] 학교에서는 늘 혼자였으며, 3학년 때 따돌림이 심해져 스트레스로 인한 섭식 장애까지 겪었다고 한다. 이 당시 제니퍼의 유일한 도피처는 책이었다고 한다.[7] 따돌림당할 때 독서하며 자연에 대한 관심을 넓혔으며, 부친 서재에 꽂혀 있던 제임스 듀이 왓슨의 이중 나선을 읽으며 자연의 내밀한 진리를 추구하는 일과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야망과 경쟁에 대한 묘사를 통해 과학연구의 인간적인 측면을 느껴, 과학에 더욱 깊이 빠지게 되었다. 특히 DNA 구조를 밝히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결정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보며 여성도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 부모와 친분이 있던 생물학 교수인 돈 헴스와 함께 버섯과 조개껍데기 등을 수집하여 분류하고 진화해온 과정을 알아보는 등 야외 활동이 잦았다고 한다.[8] 그리고 그녀는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었다.[9] 상술했듯 다우드나 부모님의 지인인 생물학 교수다.[10] RNA 결정을 액체질소에 담그어 극저온 냉각을 시키면, X선에 노출되어도 구조가 보존되어 다우드나가 X선 노출에 의해 겪던 결정 구조 붕괴 문제를 해결해줬다.[11] 이 전자밀도 지도와 RNA 구조 모델을 통해 RNA 효소 작용 및 자가 복제 원리를 알게 되었다.[12] 남편인 케이트가 동부의 경직되고 수직적인 문화를 싫어한 영향이 매우 컸으며, 다우드나도 UC버클리가 공립학교인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13] 다이서로 인해 잘라진 RNA 조각들이 mRNA 조각까지 잘라 침묵시키는 현상.[14] RNA 간섭에 CRISPR 시스템이 작동한다고 추정하여, 교내 간판 구조생물학자인 다우드나에게 생화학적 실험을 의뢰한 것이다.[15] 몬태나주립대에서 공부하다 DNA 염기서열 분석의 한계를 느끼며 생화학을 배우러 온 미생물학자 블레이크 비텐헤프트, 반대로 결정학 베이스를 갖추고 있는 마르틴 이네크.[16] 재조합 DNA 특허로 시작된 유전자공학 의약품 개발사.[17] Cas를 활용한 진단키트로 바이러스의 특이적 염기서열을 검출하는 등.[18] 회사 설립을 결정한 뒤 하우어비츠가 다우드나 연구실에서 남은 연구과정을 마무리하는 동안은 다우드나가 1대 CEO를 맡았다. 벤처 업계로부터는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본인들의 사재를 털고 모교인 버클리를 비롯해 게이츠 재단, 국립보건원 등으로부터 기금을 마련받으며 운영했다.[19] 다우드나와 이네크는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힐린스키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샤르팡티에는 연구실을 옮긴 탓에 우메오에서 거주하며 스카이프로 협업했다.[20] 과거 샤르팡티에가 스커볼분자생물학의약연구소에서 연구하던 단세포생물.[21] 특히 tracrRNA의 두 가지 핵심 기능을 밝혀낸 것이 획기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tracrRNA는 crRNA를 생성하며, crRNA의 안내에 따라 Cas와 결합한 복합채 형태로 바이러스에 도달하고, 이때 Cas가 올바른 위치에 붙어서 표적인 바이러스의 DNA를 잘라내도록 도와준다.[22] tracrRNA에 의해 만들어진 안내자 crRNA를 원하는 표적의 정보로 조작하면, 해당 표적의 DNA를 잘라낸 뒤 원하는 DNA를 삽입할 수 있으니 유전자 편집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crRNA와 tracrRNA의 끝부분을 조금씩 잘라내도 기능이 여전히 정상적으로 동작한다는 것에 착안해 이들의 머리와 꼬리를 결합한 두 RNA 복합체인 sgRNA를 만들어내 저가의 편집도구 양산의 길도 제시했다.[23] 투고부터 채택까지의 기간이 매우 짧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리투아니아의 비르기니유스 식슈니스라는 학자가 여타 학술지들로부터 논문 투고를 거절받은 뒤 5월 21일, 학회 회원이었던 다우드나에 Cas9이 DNA를 절단하는 매커니즘을 규명하고 향후 유전자 편집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제시한 논문 초록을 보냈기 때문에 다우드나 측에서 사이언스지의 편집자들에 빠른 검증을 압박했기 때문이다.[24] 식슈니츠 측의 2저자로 참여한 로버트 바랑구가 학회의 조직위원이었기 때문에 다우드나 측에서 식슈니츠 측보다 먼저 논문을 발표할 것을 자처했으나, 식슈니스의 논문이 디우드나 논문보다 빠른 2월, 쉘에 투고되었기 때문에 바링구가 공정한 평가를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발표 중 다우드나가 식슈니스 측이 절단을 통한 생화학적 실험변수 분리 과정에서 tracrRNA의 정확한 역할을 규명해내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곧 이어 발표한 다우드나 측이 이를 완벽하게 규명해내며 완승을 거둔다. 학회가 끝난 이후 만찬 자리에서는 바랑구와 식슈니스가 다우드나 측을 진심으로 인정해주며 훈훈하게 경쟁 일화가 마무리되었다.[25] 다우드나와 샤르팡티에의 연구는 핵이 없는 단세포 생물을 대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진핵세포인 효모를 거쳐 인간을 대상으로듀 매커니즘이 유효한지에 대해 밝혀내야 했다.[26] 논문 출간 과정에서 생화학 실험 기반의 다우드나 연구실 측과는 별개로 지난 2009~2011년의 기간동안 샤르팡티에에 측이 분자생물학적 방법론으로 독자연구한 기간 동안의 tracrRNA 매커니즘 관련해서 사소한 분쟁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27] 인간세포에서 CRISPR-Cas9이 작동함을 밝혀낸 다섯 번째 연구원으로 재미교포다.[28] 창업 당시 사명은 젠진(Gengine)이었다.[29] 창업에 앞서 브로드 연구소의 장펑이 본인과 다우드나의 지적재산권과 잠재적 특허를 전부 하나로 묶어 라이센스를 관리하자고 제안했으나, 다우드나가 이를 거절했다.[30] 장 펑과 브로드 연구소 인사들이 주가 되어 조직을 이끌고 투자자들을 만났으며, 포유류 세포를 대상으로 코돈 최적화와 핵 위치 신호기가 적용된 Cas9으로 sgRNA를 합성하여 2012년 12월 사이언스에 채택된 장펑의 논문을 기반으로 브로드 연구소와 MIT, 하버드가 공동으로 특허를 출원하는 과정에서 다우드나가 조지 처치의 데이터를 표절해 특허 출원을 시도했다는 뉘앙스가 담긴 내용을 넣었다. 조지 처치와 다우드나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며 격분했다. 심지어 장펑은 본인에게 Cas9로 연구 범위를 집중할 것을 제안한 공동연구자 루시아노 마라피니의 이름을 제외한 채 독자적으로 특허를 출원했다.[31] 이번에는 샤르팡티에가 다우드나에게 크리스퍼 테라퓨틱스 합류를 제안했으나, 기업 분쟁에 지친 다우드나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믿을 만한 제자가 설립한 카리부에 지적재산권을 몰아준 뒤 뒤로 물러난다.[32] 인텔리아 테라퓨틱스에는 CRISPR가 수 십억 년동안 치뤄진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의 적응면역 전쟁에 의한 작용이라는 것을 밝혀내며 최초로 CRISPR-Cas 특허를 신청한 선구자 로돌프 바랑구와 에릭 손테이머가 있었으며, 공동으로 연구했으나 장 펑으로부터 특허 출원을 배제당한 루시아노 마라피니가 근무하고 있었다.[33] 한편 2012년 6월 사이언스 투고 CRISPR-Cas9 논문에 관련해 도표와 실험 데이터가 포함된 특허는 UC버클리와 샤르팡티에, 빈 대학교가 공동으로 출원했다.[34] 하지만 월터 아이작슨 전기에 따르면, 이 당시 다우드나와 샤르팡티에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좋았으나, 속으로는 매우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샤르팡티에는 본인이 Cas9 연구를 다우드나에 제안했기에 연구에 대한 소유욕을 느끼고 있었던 반면 다우드나는 동등한 공동 발견이라고 느꼈다. 둘은 2012년 6월 논문이 채택된 이후 상용화 과정에서 각자의 길을 걸으며 창업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다우드나가 CRISPR 관련 언론의 관심을 독차지하게 되면서 샤르팡티에가 이를 상당히 불쾌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경쟁적이고 직설적인 스타일의 다우드나와 반골기질이 강하고 내향적인 샤르팡티에의 성향이 정반대였던 탓에 서로에 대한 오해가 쌓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35] UC버클리, 샤르팡티에, 빈 대학교.[36] 브로드 연구소, 하버드, MIT.[37] 안티크리스퍼 자체도 본디드모니가 처음 발견했다.[38] 다우드나 측은 즉시 항소했으나, 2018년 9월 연방순회항소법원은 특허위원회의 판결을 그대로 인정했다.[39] 환자의 세체포를 추출해서 편집한 뒤 다시 들여보내는 ex vivo가 아닌 CRISPR 편집 도구를 직접 환자의 체내로 들여보내는 in vivo 식의 방식을 뜻한다.[40] 이전까지는 노벨평화상에서만 2번(1976년, 2011년) 공동 수상자 전원이 여성이었던 바 있다.[41] 2012년 7월 장 펑이 진핵세포에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작업을 했다고 주장한 것을 인용했다.[42] 이로 인해 다우드나 측의 라이센스를 기반으로 영리 활동을 벌였던 인텔리아 테라퓨틱스는 사실상 시체 상태가 되었다.[43] 贺建奎:하건규 #[44] 여기서 가장 강력하게 규제했던 게 바로 중국 당국이었고, 이로 인해 허젠쿠이는 2019년 말 선전시 인민재판법원에 피고로 올라 불법의료행위 혐의를 인정하며 징역 3년과 벌금 43만 달러는 물론 평생 생식과학 분야 종사를 금지한다는 처벌을 받았다. 법원은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관련 국가 규정을 고의로 위반하여 연구와 의료윤리의 마지노선을 넘었다는 죄목을 달았다.[45] 수정란에 CCR5 유전자를 표적으로 하는 Cas9을 주입하여 편집했다.[46] 예를 들어 HIV의 경우 생식세포 편집 외 다른 방식으로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에 CRISPR를 쓸 필요가 없었던 케이스다.[47] 원제: The Code Breaker: Jennifer Doudna, Gene Editing, and the Future of the Human 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