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4 16:27:20

정신현상학


1. 개요2. 설명3. 의식
3.1. 감각적 확신, 이것과 사념3.2. 지각 '사물'과 '착각'3.3. 힘과 오성, 현상과 초감각적 세계
4. 자기의식
4.1. 자기확신의 진리
4.1.1.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주인과 노예4.1.2. 자기 의식의 자유 스토아 주의와 회의주의와 불행한 의식
5. 이성
5.1. 이성의 확신과 진리5.2. 관찰하는 이성
5.2.1. 자연의 관찰5.2.2. 순수한 상태에서 외적 현실과 관계하는 자기의식의 관찰 논리학적 법칙과 심리학적 법칙5.2.3. 자기의식이 자신의 직접적인 현실과 맺는 관계, 인상학과 골상학
5.3. 이성적인 자기의식의 자기실현
5.3.1. 쾌락과 필연성5.3.2. 마음의 법칙과 자만의 광기5.3.3. 덕성과 세계행로
5.4. 절대적으로 실재하는 개인
5.4.1. 정신적인 동물의 왕국과 기만, 또는 사태 그 자체5.4.2. 법칙을 제정하는 이성5.4.3. 법칙을 음미하는 이성
6. 정신
6.1. 참다운 정신, 인륜
6.1.1. 인륜의 세계, 인간의 법칙과 신의 법칙, 남성과 여성6.1.2. 인륜적 행위, 인간의 지와 신의 지, 죄책과 운명6.1.3. 법적인 상태
6.2. 자기에게서 소외된 정신, 교양
6.2.1. 자기에게서 소외된 정신의 세계
6.2.1.1. 교양과 현실의 교양세계6.2.1.2. 신앙과 순수한 통찰
6.2.2. 계몽사상
6.2.2.1. 계몽과 미신의 싸움6.2.2.2. 계몽의 진리
6.2.3. 절대적 자유와 공포
6.3. 자기를 확신하는 정신, 도덕성
6.3.1. 도덕적 셰게관6.3.2. 치환6.3.3. 양심, 아름다운 혼, 악과 악의 사면
7. 종교
7.1. 자연종교
7.1.1. 빛7.1.2. 식물과 동물7.1.3. 공작인
7.2. 예술종교
7.2.1. 추상적인 예술작품7.2.2. 살아 있는 예술작품7.2.3. 정신적인 예술작품
7.3. 계시종교
8. 절대지

[clearfix]

1. 개요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은 독일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1807년 발간한 철학 서적이다. 내용이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2. 설명

정신현상학의 이전 이름은 ‘의식의 경험의 학’인데, 여기서 경험은 경험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경험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헤겔이 관상학과 골상학을 거론하고 비판한 것은, 헤겔이 그들을 직접적으로 엄밀하게 ‘비판’했다기 보다는, 의식이 그러한 것을 경험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직접적 비판의 측면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결국 정신현상학은 “다른 사상들에 대한 비판의 집대성”은 아니다. 단지 의식이 A를 경험한 뒤 -A를 경험하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B를 가져오는 것의 반복일 뿐이다. 이때 의식이 A를 경험하는 것이, 달리 말하면 의식에 A가 현상한 것이다. 그런데 의식은 헤겔에 있어 곧 정신이므로, 이것은 ’정신현상학‘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획 자체는 헤겔이 최초가 아니다. 이것은 독일 관념론의 맥락 속에서, 피히테가 초기 철학에서 ’지식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선취한 바가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피히테는 지적 직관이라는 무제약적인 직관을 통해 제1원칙인 “코기토”를 이끌어내고, 여기서부터 절대적 자기의식인 ’절대적 자아‘에 이르기까지 변증법적인 연역의 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헤겔이 보기에 이것은 만족스러운 기획이 아니었다. 헤겔은 학문의 시작점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그것은 최후에 와서 진리로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피히테는 학문의 시작점은 전혀 증명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보았고, 그래서 ’연역적‘인 논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헤겔은 생각했다.

헤겔이 이 책에서 변증법이라는 것을 어떠한 논리로서 명료하게 사용하고 있지는 않으나, 어쨌든 ’변증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체와 내용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것은 명백히 연역법, 귀납법, 귀류법 같은 것들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다. 정신현상학은 각각 의식의 모순을 ’논증‘하는 것이 아니고, 의식이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귀류법이 아니다. 또한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경험 자체를 기술하는 것이지, 경험적 자료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므로 귀납법도 아니다. 또한 연역법도 아니라는 것에는 결국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헤겔이 보기에는 이런 경험의 연쇄를 통해서 결국 진리가 현상하는 것이다. 일단 그러한 과정 속에서 헤겔은 대상의식, 자기의식을 나누었다. 그런데 이성 속에서는 이 두 가지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현상한다. 여기서부터 이성은 대상과 자기의 긴장을 계속해서 지양해 나가는데, 그 원리는 앞서 서술된 ‘의식’장과 ‘자기의식’장에서 추상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 원리를 ‘이성’장에서는 구체적으로 통일시키고 있는 것이고, ‘정신’장에 이르러서는 이 통일이 직접적 통일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에는 비로소 객관적 인륜성이 현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인륜성이란 아직 진리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 것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직접적이고 단순한 통일이라서, 그 자체로 즉자 대자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그 절대적 본질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종교’에서 비로소 현상하기 시작하며, ‘절대지’단계에서 일단은 완결지어진다.

문제는 그래서 ‘의식’장과 ‘자기의식’장이, 그 이후의 장들에 대해 어떤 형식을 지닌 것인지를 보는 것이다. 여기서 공통적인 것은 확신-분열-지양이라고 하는 도식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저 세 가지는 정신현상학 전체에 있어서 난잡하게 뒤섞여있으며, 도식을 거치고 있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저 세 가지가 중요하다는 것만은 직관할 수 있으니, 도대체 대상적인 의식은 무엇이고 자기에 대한 의식은 무엇인지를, 정신현상학 전체에 있어 고찰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어쨌든, 정신현상학은 선형적인 구조물도 아니다. 의식 장에서 오성을 다루고 넘어간 것은, 오로지 가장 추상적인 오성을 다루고 넘어간 것이다. 오성적 사고는 정신현상학의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기의식 장에서 회의주의를 다루고 넘어간 것 역시, 가장 추상적인 회의주의를 다루고 넘어간 것이다. 당연히도 이 역시 정신현상학의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되어가는 의식의 경험의 학 속에서 여러 번 지양된다.

그렇다면 정신현상학적 논의들은, 그것들에서 단편적 논의를 떼어 오는 것이 유효한 논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해도, 본질적으로 어떤 ‘사회학’혹은 ‘윤리학’일 수는 없다. 하지만 헤겔에게 있어서 인식(혹은 의식)은 인륜적인 것이며, 따라서 윤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것이다. 헤겔이 여기서 정말로 중요시한 것이 ‘경험’이라면, 그는 또한 ‘자유’를 중요시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대체 왜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굳이 써냈는가”하는 점에 답하자면: 헤겔은 오직 정신에 현상하는 지를 추적하는 것만으로 진리를 해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 이유는 사회적이고 인륜적인 것들이 지에 현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식의 자유는 증명되어 있는 대신 전체에 걸쳐 드러나 있는데, 지적 직관이나 철학자의 선언 같은 것이 외부로부터 들어와야만이 진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즉 의식의 본질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독일 관념론자인 그로서는 너무나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헤겔에게 있어서 자유는 절대자와 이념적으로 매개되어 있는 자유다. 여기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가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은, 관념론-유물론 문제가 아닌, 인식론의 차원에서 둘이 뒤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배반해 있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자유를 단순히 필연의 인식, 필연의 지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엥겔스가 인용한 엔치클로페디를 근거로 하고 있긴 하나, 헤겔이 자유를 정말로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유가 오히려 필연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전제되고 있는 것인데, 헤겔이 개념론에서 주관성을 말하는 이유는 그럼 대체 무엇인가?

마르크스가 헤겔을 오해했다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해는, 이전의 사상가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기 위해서는 반쯤 필수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철학적 작업을 단지 “관념론을 비판하기 위해”수행했다. 이것은 너무한 처사이고, 철학 전체가 지니고 있는 인륜성을 절벽에서 밀어버리는 것이다. 헤겔이 법철학을 쓸 당시에 철학 체계는 기본적인 완성이 되어 있었고, 헤겔은 그 책의 서설에서 “법이 어떠해야 하는 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법을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지”를 가르친다고 써놓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법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곧 현실적 법규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게 ‘자유는 필연의 인식’따위의 테제로 설명 가능한가?

반면 정신현상학은 단지 의식의 현상학을 기술할 뿐이므로 그러한 가르침, 즉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무언가는 없다. 오히려 그보다 더 급진적인 무언가, 즉 “이렇게 생각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세 가지 계기가 바로 이성, 정신, 종교이며, 이 세 가지는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각각의 규정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나뉘어진 것에 가깝다. 여기서 헤겔은 “이렇게 생각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 비슷한 무언가”가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겪을 수 있는 모든 인륜적 과정 그리고 그 전체”가 자유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정신현상학을 읽는 것이 적어도 처음 읽을 때의 마음가짐인 편이 좋다. 이것이 물론 헤겔의 의도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통찰이 헤겔에게 분명히 발견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3. 의식

3.1. 감각적 확신, 이것과 사념

우선 감각적 확신이란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소여된 것의 인식, 즉 수용적 인식이다. 예를 들어 내가 눈 앞의 나무를 본다고 한다면, 이것은 눈 앞의 ‘직접적으로 존재자인 것’이 나에게 수용적으로 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어떤 역할도 하지 않고 대상의 풍요로움을 그대로 만끽하는데, 그래서 이것은 추상적인 의미에서 직접지이자 순수지라고 표현된다. 이러한 추상적 확신이 정신에 현상하는 단계에서 의식은 대상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어떤지 아무런 증명이나 사유를 가할 필요가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가장 빈약한 것이고, 대상으로부터 ‘존재’만을 추상하는 의식인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대상의 존재에는 바로 나의 존재가 있고, 이 두가지가 갈라져 나온다고 설명한다. 바로 여기서 나는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역할을 하도록 다시금 ‘소여’된다. 여기서 나는 “지금”이 소여되었을 때, “지금은 밤이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히도, 지금이 낮이 되면 다시 “지금은 낮이다”라는 의식으로 변할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술어가 아닌 주어로서 “지금”자체뿐이다. 그런데 어떤 것 자체를 말한다는 것은 이미 보편자를 말하는 것이고, 감각적 확신의 대상은 이미 보편자와 매개된 것으로 드러난다.

정신현상학의 시원인 직접지로서 감각적 확신은 이렇게 의식 자신의 경험에 의해 부정되며, 의식은 곧 지각으로 이행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부정 자체의 내용이다. 의식은 직접지를 부정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감각적 확신이 직접지가 아니라고 경험한다. 여기서 정신현상학의 모험이, 즉 직접지라는 보물을 찾기 위한 모험이 시작된다.

3.2. 지각 '사물'과 '착각'

의식이 지각의 단계로 오면, 대상은 더 이상 감각적 대상이 아니라 보편자와 매개된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 ‘나’에 대하여 존재하는 존재자로서 대상을 의식한다. 물론 여기서 대상은 나의 존재가 아니라 나의 의식에 매개되어 있을 뿐이고, 이 의식으로서의 나는 보편적인 나일 뿐이다. 여기서 자아가 제시하는 대상과 단순한 대상이 다시금 이분된다. 전자는 구별이고, 후자는 집약인데,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본질로, 어느 것을 비본질로 놓을 지가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편이든 대상은 ‘다수의 특성들을 지닌 사물’이다. 예를 들어 소금은 하얗고, ‘또한’ 짜고, ‘또한’ 정육면체이며, ‘또한’ 특정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의식이 지각함으로서 ‘여기’에 있는 소금 속에 이러한 특성들이 삼투하고 있다. 다르게 말해 이 특성들을 집약하는 것은 오로지 앞에서와 같은 ‘여기’의 의식일 뿐인데, 당연히도 이 특성들은 서로 아무 상관이 없이 ‘또한’을 통해서만 서로 연결되어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또한’은 특성들의 구별이자 또한 집약이기도 하다. 그래서 헤겔은 이것을 ‘물성’이라고 정의한다. 이 물성은 지각의 단계에서는, 특성들이 아무런들 상관없는 방식으로 통일되는 ‘배타적 통일’일 뿐이고, 이것이 사물이라고 규정된다. 사물은 결국 감각을 통해서만이 대상을 집약할 수 있고, 여기서 또 감각적 보편자로서, 그리고 순수한 보편자로서 대상이 이분된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될 뿐이다.

그런데 순수한 보편자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사물의 ‘자기 동일성’일 테다. 그리고 이것이 보여지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지각의 책임이며, ‘착각’일 뿐이다. 그런데 지각은 이것을 보이지 못한다. 지각은 대상을 여전히 ‘소여’로서 파악하고 있고, 따라서 대상만을 참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순수한 대상은 결국 순수한 보편자이지, 감각적 보편자가 아니다. 감각적 보편자는 대상과 나의 매개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미 착각의 위험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전략을 수정해서, 자신의 인식 행위 속에서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려 하고, 마침내 여기서 ‘소여’는 사라지고 지각의 진리는 의식으로 된다. 의식은 자기 내 반성까지도 의식한다. 이번에는 대상의 분리가 나의 분리로 옮겨온다. 나의 눈이 앞을 보고, 나의 코가 냄새를 맡고, 나의 귀가 소리를 듣는다. 이것들은 서로 아무런들 상관없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보편적 매체이다.

결국 똑같은 방식을 겪는다. 나의 지각의 ‘자기 동일성’으로 무한히 지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각은 본질성과 비본질성을 규정하려 하는데, 적어도 지각은 위에 이미 서술된 구별과 집약의 모순을 해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의 자립성, 즉 타자와 구별되는 단순한 규정성은 곧 그것의 본질인데, 달리 보면 타자와의 구별로서의 관계가 그 본질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즉 사물은 오직 관계일 뿐이라면, 지각은 사물의 자립성을 부정하기에 이르며, 사물은 몰락하고, 여기서 이미 지각의 진리는 오성으로 이행하게 된다.

3.3. 힘과 오성, 현상과 초감각적 세계

의식이 오성의 단계로 오면, 대상은 더 이상 감각적 보편자가 아니라 순수한 보편자, 혹은 무제약적 보편자가 된다. 여기서 보편자는 아직 ‘나’에 귀속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고, 또한 본질성과 비본질성이 형식과 내용으로 이분되어 있는 대상인 것이다. 오성은 사물의 자립성을 해체하고 인식 활동을 하는 동시에, 반성을 통해 사물의 자립성을 대자 존재로서 받아들인다. 여기서 대상이 된 무제약적 보편자 속에서는 오성의 능동성과 수동성이 서로에게 이행하고 있는데, 이 이행의 운동이 ‘힘’이다.

오성의 수동성은 힘의 표출으로, 이것은 대상의 자립성이 마구 확산되는 힘이다. 오성의 능동성은 본래 힘으로, 대상의 자립적 질료들이 사라져버려 힘이 자신의 표출로부터 ‘되밀려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본래 힘은 표출해야 하고, 표출된 힘은 되밀려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힘은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이 실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두 가지 계기는 매개 중심으로 나타나는 어떠한 통일을 통해서 분열되어 존립하고, 그러한 것은 대상상을 띄고 있으므로 운동 역시 대상적 형식을 띈다. 그 결과로서 비대상적인 것으로서 사물들의 ‘내면’이 출현한다.

힘이 표출을 하면, 이 극단 속에서 질료들의 존립이 힘으로부터 빠져나온다. 존재는 힘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존재는 힘의 본질이다. 여기서 타자는 힘의 표출을 지양함으로서 자신을 힘의 본질이 아니게 하려고 한다. 문제는 힘 자체가 그러한 지양이고, 혹은 힘 자체가 타자의 지양인 것이다. 타자는 앞에서 서술한 ‘본래 힘’으로 드러난다.

여기서는 구별들로부터 비로소 구별들이 소멸하며, 이 소멸이야말로 서로 간의 운동이다. 힘이 현실적으로 되려면 표출을 해야 하고, 이 표출은 힘의 지양이다. 그런데 그렇게 표출된 것이 본래 힘이다. 이 두 계기는 무차별적 통일로 붕괴한다. 이 통일이 힘의 개념으로서의 개념이다. 힘의 실현은 자립성이나 실재성을 표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상실하며, 대신 ‘보편성’이 되었다.

오성은 처음에는 이 보편성이 힘의 본질이라고 인식한다. 첫 번째 보편자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 오성의 개념이고, 이제 두 번째 보편자는 자신을 즉자 대자적으로 서술하는 바대로의 힘의 본질이다. 이 두 가지는 직접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이분됨이다. 여기서 오성은 운동의 “매개 중심을 통해 사물의 참된 배후를 꿰뚫어 본다.” 통일로서 힘의 소멸을 현상이라고 한다. 현상에는 힘이 없고, 단지 가상의 전체로 된다.

“그런데 현상의 운동 속에는 지각의 존재와 감각적으로 대상적인 것 일반이 단지 부정적인 의미만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서 내면적 진리가 오성에 대해 존재하게 되었다. 이것이 ‘초감각적 세계’이며, 현상의 너머에 있는 무언가다. 대상은 사물의 내면과 오성을 현상 속에서 통일하도록 하는 ‘추론’이 된다. 그런데 오성은 의식의 내면 속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므로, 이 내면은 아직 현상의 무이자 공허일 뿐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현상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여기서 형식적으로는 발생되는 것과 발생하는 것이 구별되지만, 이는 전자가 수동적 매체이며 후자가 능동적인 것이거나 단일자라는 내용적 구별과 같다. 이러한 무차별성은 모든 힘들과 규정성들을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힘의 법칙을 세우게 된다. 초감각적 세계는 “법칙들의 정적인 왕국”이다.

여기서도 다수성과 단일성의 모순이 나타난다. 법칙들은 불특정한 다수의 법칙들인데, 오성은 이것을 무차별적으로 통합해야만 오성일 수 있다. 이 통합은 법칙을 점점 더 피상적으로 만들 뿐이다. 종국에 가서는 특정한 법칙들과 만유인력으로 정의되는 ‘법칙의 순수개념’이 대치한다. 여기서 법칙은 이중의 방식으로 현존하는데, 1. 구별자들이 자립적인 계기로 표현되는 법칙으로서, 2. 단순한 자신 안으로 되돌아간 존재라는 형식으로서 존재한다. 후자는 그 무차별성이 다시금 ‘힘의 개념으로서 힘’을 불러들인다.

예를 들어 단순한 전기는 힘이다. 그런데 이것은 법칙으로서 표현된다. 법칙 속에서 이것은 양전기와 음전기로 구별된다. 법칙이 아니라면 전기는 이중적 존재로 표상되지 않을 테다. 이것이 구별자들을 자립적 계기로 표현하고, 힘은 외려 그 단순성에 파묻혀서 전기의 존재와 아무런들 상관없는 ’전기의 개념‘만을 헝성하고 있다. 그런데 힘의 법칙은 공허한 동어반복으로 설명된다. 힘이 이중화를 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그렇게 이중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그 이상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때문에 오성은 다시 법칙들의 다수성으로 도로 후퇴한다.

오성은 결국 이 다수성을 오성 안에 전부 밀어넣는다. 힘의 개념이 공허하다면, 모든 법칙들의 구별이 “그것이 사태 자체의 구별이 아니”고, 오직 오성의 설명 안에서만 한계 지어진다는 의식이다. 여기서 힘과 법칙은 똑같은 것인데, 예를 들어 번개는 전기의 법칙인데, 설명은 법칙을 힘으로 요약한다. 이 힘이 표출되면 법칙이 유발되고 이 법칙들은 다시 서로 안에서 사라진다.

당연히도 이런 설명은 오성 내에서 아무런 설명이 되지 않는다. 대신 여기서는 힘과 법칙의 직접적인 교체 자체를 고찰할 경우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운동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반대이다. 오성은 다시 현상(힘의 결여, 가상들의 전체)를 끌어들이고, 여기에 제 2의 법칙을 밀어넣는다. 그것은 “동일한 것의 비동일화와 비동일적인 것의 동일화”를 표현한다. 헤겔은 이것을 “전도된 세계”라고 명명한다. 중요한 점은 이제 오성의 대상이 완전히 현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현상 내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같은 대상을 봐도 여기서는 이랬다가, 저기서는 저랬다가 하는 것이다.

사태가 이런 식이 되면, 현상은 초감각적인 것을 대립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 따라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현상에 귀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감각적 세계만이 현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의 표상은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성은 그것은 감각적 세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성은 이내 이것을 부정한다. 사물이 감각을 통해 ’현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초감각적인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초감각적 세계 속에서 무한성이 발생한다. 즉 그것은 A가 바로 즉자적으로 B이기도 하다는 의식, 대립물이 서로를 직접적으로 지니는 의식이다. 결국 초감각적 세계 자체마저 자기내적 구별, 즉 무한성을 표현한다. 이것은 자기 동일성을 지니는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관련인 분열도 한다. 이 모든 초감각적인 것들이 의식에 향하는 순간부터 오성의 진리는 자기의식 내에서 만들어지므로, 의식은 자기의식으로 이행한다. 이제부턴, 의식의 대상은 자기일 수 있을 뿐이다.

4. 자기의식

4.1. 자기확신의 진리

여기서 의식의 대상이 자기로 정립되어 있긴 하지만, 물론 그것은 아직 자기의식 자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진정한 자기의식으로 정립되어 있지는 않다. 대상의식의 대상이었던 구별자들은 이제와서는 자기에 대하여 부정적인 계기들로서, 즉 타자로서 존재할 뿐이다. 자기의식은 이러한 타자 존재로부터의 귀환이며, 자기의식으로서의 운동이다. 여기서 현존하는 것은 대상에 매개된 자아가 아니라, “나는 나”라고 언표하는 자기 확신이다. 타자 존재는 자기의식에 대해 구별된 계기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구별과 자기의식의 통일이 욕망이다.

자기의식으로서 의식은, 직접적이고 부정적인 대상으로서 타자를 대상을 가지는 한편, 자기 자신 역시 대상으로 가진다. 그러나 전자는 역시 자기의식 안으로 귀환했고, 대상은 생명이 되었다. 이러한 반성을 통해 자기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구별하고, 이 존재를 통해 생명을 직접적으로 욕망한다.

한편 이 통일은 타자를 자기로부터 밀쳐내는 측면도 있다. 이것은 자기의식과 생명의 대립으로 양분해버린다. 여기서 욕망은 오히려 대상의 자립성을 경험한다. 여기서 단순한 보편적 유동성으로서 즉자와, 형태들의 구별로서 타자를 나누어야 한다. 여기서 즉자는 구별에 대해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성을 정립하는데, 왜냐하면 개체가 존재하려면 보편자를 희생시켜야 하는데, 바로 이를 통해 타자와의 대립이 이미 지양되기 때문이다. 이 지양이 개체의 존립을 산출하는 것은: 즉자는 타자를 자신 안에 정립하고, 결국 자신의 단순성을 지양해버리기 때문이다.

헤겔은 “스스로를 전개하는 그리고 자신의 전개를 해체하면서 이 운동 속에서 스스로를 단순하게 보존하는 전체가 바로 생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기의식이 욕망하는 대상으로서 생명이 있고, 자기의식 역시 이런 규정에 부합하는 생명이다. 따라서 생명이 타자를 지양하는 바로 그 속에서 자기를 정립했듯이, 자기의식 역시 타자를 지양하는 바로 그 속에서 자기를 정립한다.

욕망은 ‘자기의식과는 다른 무언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욕망의 대상인 생명의 경우 타자에게서 유래하는 부정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보편적 본성으로부터 유래하는 부정이기도 하다. 이것은 절대적 부정이며, 이것을 대상으로 삼을 경우, 자기의식은 또다른 자기의식 속에서 욕망의 만족에 도달하게 된다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자기의식은 자기의식에 대해 있다.” 왜냐하면 생명의 절대적 부정에 대한 자기의식은 결국 자기의식에 대한 자기의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자기의식은 진정한 자기의식이 된다.

4.1.1.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주인과 노예

“자기의식은 다른 자기의식에 대해 즉자 대자적임으로써 그리고 이를 통해서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다른 자기의식은 자기의식이긴 하나, 나에 대해서 타자인 자기의식이기도 한 자기의식이다. 그런데 자기의식의 타자로서 자기의식은 결국 자기의식이며, 그에 대한 타자로서 자기의식도 자기의식이다. 이것이 무한히 이어지는 것이 바로 자기의식의 ‘무한성’이다.

자기의식이 타자화된다는 것은, 자기의식이 자기 자신을 상실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자기의식의 본질은 타자의 지양이다. 그런데 타자 역시 여기서는 자립성을 갖는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일자의 행동’과 ‘타자의 행동’이 나뉘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전의 ‘힘들의 유동’과 유사하게 능동성과 수동성으로 이중화되어 있다. 이 양자는 서로 같으면서 같지 않고, 따라서 불평등하다. 승인받는 자와 승인하는 자가 있고, 자기의식의 자립성은 오직 승인으로부터 유래할 뿐이다. 이것은 자기의식의 주도권 싸움인 것이다.

이 양자는 자기의 상대편의 죽음으로부터 자기 자신이 자기의식의 진리임을 입증하려 한다. 그러나 상대의 죽음은 자기의식을 승인할 자기를 상실하며, 따라서 진리의 입증도 불가하다. 따라서 자기의식은 전략을 변경한다. 대자 존재가 본질인 의식으로서 자립적 의식, 대타 존재가 본질인 의식으로서 비자립적 의식이 양분된다. 헤겔은 전자를 주인, 후자를 노예라고 규정한다.

주인은 여기서 노예의 의식을 자신과 매개하는 한에서 대자적이다. 그리고 노예는 이러한 매개에 순종한다. 왜냐하면 노예는 자신의 자립성이 물성에 매여 있음을 인정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의 노동, 즉 물성에 매인 자립적 활동을 착취한다. 주인은 노예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사물에 관련된다. 주인은 사물을 무화시킴으로서 향유한다.

그런데 이 대상의 부정성은 노예에게는 낯선 것이라는 측면이 현존한다. 형식이 자기의 바깥에 정립되기 때문에, 그 낯선 본질이 나와 아주 다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관계가 부정적인 탓에, 의식은 절대적 공포를 느끼고, 이 가운데서 형성 행위 즉 노동을 한다. 이 두 가지, 즉 공포와 노동이 노예의 의식의 계기들이다. 노예는 공포를 통해 노동의 지혜를 얻고, 노동을 통해 또한 공포를 극복한다.

한편 주인은 결국 노예의 노동 없이는 사물을 향유할 수 없고, 사물의 자립성이라는 측면을 노예의 노동에 떠넘길 뿐인데, 이는 결국 애초에 주인의 의식이 진리가 아니었음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의식의 진리가 대자 존재임을 주인은 입증할 수가 없다. 이렇게 주인이 몰락하게 된다.

“따라서 자립적 의식의 진리는 노예의 의식이다.” 노예의 의식이 진리로 되면서,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이 다같이 예속으로 떠밀려 들어간다. 이를 통해 순수한 부정성이 존립한다. 또한 이런 절대적 부정성이야말로 사실은 주인의 것인 것처럼 보였던 대자 존재일 따름이다. 이것의 핵심은 노예가 행위했던 ‘노동’인데, 이것은 억제된 욕망으로서, 대상의 자립성 속에서 대상과의 부정적 관련을 대상의 형식으로 되게 하고, 그런 한에서 “자립적 존재를 자기 자신으로서 직관하기에 이른다.”

4.1.2. 자기 의식의 자유 스토아 주의와 회의주의와 불행한 의식

이제부터는 자기의식의 순수한 사변을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의 자기의식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이제 의식의 순수한 운동으로서 스스로에게 본질이 되는 의식, 즉 앞에서 노예의 지혜로부터 시작된 ‘사유하는 의식’이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의식의 대자 존재로서, 개념과 대상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지 자체의 운동이 개념이라면 자아의 지가 대상이다. 여기서 대상은 사유로부터 비로소, 개념을 통해 운동할 수가 있다. 사유 속에서 나는 자유롭다. 사유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 머물고, 대상을 나에 대해 있게 하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의 경우 이 사유 안에 온갖 욕망과 노동이 응집되어 있는 것이다. 이 원리를 헤겔은 “의식이 사유하는 본질이며 그 무엇이건 오직 의식이 그때에 사유하는 본질로서 행위하는 경우에만 의식에 대해 본질성을 지니거나 참이고 선하다”는 원리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자연적 현존재에 대해 아무런들 상관없는 방식으로 귀환한 사유이며, 여기서 자연적 현존재 역시 자유롭게 방기된다. 여기서는 단지 자유의 추상적 개념만이 존재할 뿐이다.

회의주의의 경우 이전에는 추상적 개념으로 머물렀던 자유의 실현이자 현실적 경험이다. 회의주의는 타자의 전적인 비본질성과 비자립성을 의식에 대해 생성한다. 이로서 규정된 존재들의 무화와 자기의식의 실제적 부정성이 나타난다. 이것은 정신현상학이 지금까지 거쳐 온 변증법적 운동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의식이 회의주의 자체가 되면 그것은 자기의식이 상실될 수 있는 위험성을 고정하려 한다. 회의주의를 통해 마침내 자기의식 자체의 자립성조차도 자유를 위해 사라지게 되는가 하면, 이를 통해 자기의식은 자유에 대한 확신, 혹은 아타락시아에 안주한다.

그런데 회의주의적 자기의식은 감각적 표상과 사유된 표상 양자의 동일성을 해체해버림으로서, 전적으로 우연한 혼란에 빠져 자기 동일성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의식은 비본질적인 것을 소멸시키는 과정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비본질적인 것의 의식으로 만든다. 이 안에서 “의식은 진실로 자신을 그 자체 안에서 자신과 모순되는 의식으로서 경험”한다.

회의주의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을 갈라놓기만 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합치려고 시도하는 의식이 등장한다. 이 의식은 자신의 절대적 부정성, 즉 모순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 모순 자체와 그에 대한 의식, 그리고 그 모순을 합치려 하는 의식은 결국 하나다. 이것이 불행한 의식이다.

불행한 의식은 통일을 위해 불변자를 끌어들인다. 세 가지 불변자의 계열이 있다: 이것은 자기 감정, 노동, 자기 희생이다.

자기 감정의 양식으로서 의식은, 불행한 의식을 순수한 의식으로서 고찰한다. 즉 모순의 통일에 대한 직접적인 확신, 그리고 자기 자신의 분열만을 다시금 느낄 뿐인 순수한 심성에 머물고 만다. 왜냐하면 애초에 불행한 의식이 불변자에 대립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확신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성은 단지 스스로에게 개별적인 것으로서 현실성을 지닌다. 이 불행한 의식은 이제 자신을 욕망하고 노동하는 자로서 발견한다. 여기서 의식이 발견하는 현실은 자신과 같이 부서져 양분된 현실이다. 이 현실이 불변자의 형태이다. 현실은 지양되고, 불변자가 현실을 떨쳐낸 채 현실을 해체하는 위력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여전히 의식의 피안에 있고, 따라서 의식의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그 자체 대자적으로 입증하기는커녕 오히려 이 행동의 운동을 다른 극단, 즉 순수한 보편자로 되돌려 반사한다.

이것의 절대적인 위력 때문에 불변적 의식이 자신의 형태를 포기하고 희생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자신의 자립성에 관한 의식을 만족시키는 일을 완전히 단념한 의식인데, 그러나 의식은 겉으로는 자기 감정을 만족시키는 것을 단념하지만 실은 오히려 이를 현실적으로 만족시키는 데에 도달한다. 의식은 자기를 포기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의식은 불변자에 관한 사고애 의해 매개되어 있다. 따라서 의식은 이제 결단, 노동, 소유, 향유 등의 포기를 통해 자유의 의식과 자신의 대자 존재로서의 현실성이라는 의식을, 자신에게서 진정으로 완벽하게 제거한다. 의식은 자신의 직접적인 자기의식을 하나의 대상적 존재로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이 직접적인 자기의식이 대상적 존재가 됨으로서, 자기의식은 대상의식과 직접적으로 통일된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러하다. 자기의식의 진리는 이성인데, 왜냐하면 나의 개별성의 포기는 나의 전적인 소멸이 아니라 불변자와의 일체화이며, 불변자가 되어 개별적으로 행위하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의식에게 이런 개별적 의식으로서의 자신의 행동과 존재가 곧 존재와 행동 자체가 돠는 이런 대상 속에서 의식에게는 이성의 표상이, 즉 자신의 개별성 속에서의 의식의 확신이 절대적으로 즉자적이라는 또는 실재성 일체라는 표상이 생성된다.”

5. 이성

5.1. 이성의 확신과 진리

이성은 현실적인 의식인 개별성을, 불변자로서 대상적인 것으로 정립했다. 이성에게는 이제 가변자와 불변자의 통일이, 그리고 자기의식과 대상의식의 통일이 존립한다. 여기서 지양된 것은 개별자다. 그리고 개별적인 것의 지양은 곧 보편자다. 이성은 개별과 보편의 매개이며, 또한 통일이다. 이 단계에서 이성은 자기 자신이 곧 실재성이며, 또한 개별자로서 불변자이기 때문에, 세계와 대립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해했으며, 따라서 여기서 더 이상 무매개적 타자는 존립하지도 않는다. 또는 같은 말이지만: “자기의식은 현실 일체가 다름 아니라 자신이라는 점을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주관적 관념론’으로 설명된다. 이성은 다음과 같이 판단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나는 나이다”라는 명제로, 이 대상이 일체의 실재이자 유일한 대상일 뿐이라고 하는 그러한 판단이다. 이것은 역시 단지 하나의 확신, 확언일 뿐이다. 여기서는 오히려 또 다른 확언 역시 같은 권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나는 타자를 정립한다”라는 명제로, 이 타자가 나의 대상이자 본질이라고 하는 그러한 판단이다. 이 두 가지를 매개함으로서 이성의 진리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내가 나에게 대상이자 본질이 되는 것은 내가 타자 일반으로부터 물러나 타자 곁에 병존하는 하나의 현실로서 나섬으로서 그런 것이다”라고 하는 또 다른 확신이다.

여기서 판단의 ‘반성’이 등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범주’일 뿐이었던 순수한 본질성에 ‘구별’을 집어넣는다. “왜냐하면 그것의 본질은 바로 타자 존재 속에서 또는 절대적 구별 속에서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존재한다.” 이것은 범주의 다수성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비로소 헤겔이 그렇게도 찬양하는, 그러한 “개념적 파악”이 시작이 된다.

5.2. 관찰하는 이성

이성은 자신이 타자 존재와의 구별 속에서 그것과 동일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성은 이제 스스로 관찰과 경험을 할 줄 안다. 이성은 첫 번째로, 이전까지는 사물을 지각과 사념을 통해서만 파악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려 한다. 이것이 ‘관찰’이다. 의식은 “관찰한다.”

5.2.1. 자연의 관찰

이성은 여기서 자연에 대한 소여를 다시금 끌고 온다. 그러나 이성은 거기서 보편자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런 보편자에 대한 ‘기술’ 일반이 성립한다. 이것은 지루하고 천편일률적인 반복 일반이다. 기술하는 것이 우연적인 것인지 즉자적인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반복하는 것이고, 대상 자체의 운동을 그대로 묘사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제 이성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하기 위해 사물을 인식하게끔 해주는 ‘징표’를 성립시킨다. 이성이 자기 자신을 문제에 포함시키면서, 징표란 사물들을 구별하게끔 쓰일 뿐만 아니라 “사물 자체가 존재 일반의 보편적 연속성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 타자로부터 자신을 유리시켜서 대자적으로 존재하게끔 하는 그런 것”으로 되기도 한다.

동물을 구별하는 징표로 발톱과 이빨을 취할 때, 이를 통해서만이 동물은 보편자로부터 갈라져 나와 대자적으로 존립한다. 그런데 식물에게는 딱히 그러한 징표가 없다. 여기서 정적인 존재와 관계 속의 존재가 이분된다. 그런데 관계 속의 존재로서 사물은 결국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규정성의 구별들 중에서 어느 쪽을 고수해야 하는가, 말하자면 본질성이 다시금 문제가 되고 있다.

이어서 징표는 규정성의 구별들과 본질태들이 뒤섞이는 상황을 맞이하는데, 왜냐하면 징표가 구별한다고 믿었던 것이 다른 원리 위에서는 결합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즉 도대체 무엇이 본질적인 징표이고 무엇은 아닌지를 관찰이 제대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보편적 원리가 필요한데, 예컨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이 원리 자체가 이미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이제 이성은 정적인 규정성을 폐기하고 규정성이 자신을 자신의 반대와 관련시킨다는 그러한 바의 규정성을 끌고 온다.

이런 까닭에 ‘법칙’이 출현할 수밖에 없다. “법칙의 진리는 감각적 존재가 관찰하는 의식에 대해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경험 속에 있다.” 그런데 법칙은 결국 존재해야 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 그 진리를 실재 속에 지니는 바에 의해서만이 진정으로 법칙일 수 있다. 즉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서 단지 존재해야 할 뿐인 것은 공허하다. 이런 실재가 바로 “즉자적으로 보편적인 것에 대한 대립이 된다.” 법칙은 이성의 본질이 되지 않으며, 단지 법칙은 어떤 낯선 것이다.

그러나 돌을 떨어뜨리면 돌이 낙하한다는 사실을 법칙화하기 위해 모든 돌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으므로, 여기서는 이성 나름의 유추가 성립한다. 물론 이 유추는 그 본질상 모순적인 것이라 법칙을 위한 완전한 권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성은 단지 높은 개연성이 유추된 법칙을 진리로 상정한다. 이것은 법칙을 개념으로서 가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는 순수한 조건을 찾아내 감각적 존재들로 연구를 할 수가 있고, 이것은 법칙의 계기들을 특정한 존재로부터 제거해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하는 사물 대신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존재, 즉 질료를 본다. 그런데 연구와 실험은 자신이 대상으로 삼는 감각적 존재를 질료로 지양하지는 못한다. 이제 이성은 감각적 존재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법칙, 즉 개념을 본다. 이제 관찰의 대상은 개념 자체가 되고, 따라서 관찰 자체가 그 관계 속에서 변경된다.

‘유기체의 관찰’이 등장한다. 유기체란 헤겔의 정의에 따르면 “개념의 단순성 속에서 과정을 그 자체에 지니는 그런 대상”이다. 다시 말해, 개념의 모든 대타적 규정들이 과정이라는 이름 하에 통일되어 있는 것이 유기체다. 유기체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존한다. 이 관계가 유기체의 과정에 흘러들어간다.

a)비유기체에 대한 유기체의 관련
유기적 자연과 비유기적 자연이 이분된다. 여기서 법칙은 유기체의 다양성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빈약함을 드러낸다. 하늘을 나는 동물은 조류고, 바다에 사는 동물은 어류고.. 이런 건 별 의미가 없다. 도대체 왜 조류의 개념이 하늘을 나는 동물인 것인가?

b)목적론
목적의 개념에는 유기체의 본질이 있다. 그러나 관찰하는 의식은 이 본질에 속하지 않고 유기체의 외부에 귀속하는 목적만을, 즉 외적 합목적성만을 본다. 유기체는 무언가를 산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존한다. 이 자기보존은 오히려 유기체의 내적 합목적성이다. 관찰하는 의식은 전자를 유기체의 존재, 후자를 유기체의 지속이라는 형식 속에서 구한다.

y)내면과 외면
그런데 유기체의 존재 즉 현실과, 목적 개념이 내용상 대립하고 있는데, 이 둘을 관계시키기 위해 ‘내면’과 ‘외면’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가 있다. 내면은 유기적 목적이며 외면은 현실이다. 이 둘 사이의 관련은 “외면은 내면의 표현이다.”라는 법칙으로 언표된다. 이제 유기적 본체는 하나의 외면과 내면의 내용으로서 정립된다.

aa)내면
“내적인 것으로서의 유기적 실체는 단순한 영혼이나 순수한 목적 개념 또는 그런 보편자이다.” 그런데 이 내면은 자신의 전체에서 외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자신의 고유한 외적 측면을 지닌다. 이것은 내포는 외면과 똑같은 크기를 지닌다는 그런 만큼의 고유한 직접적 외면성이다. 이것은 자연의 개념에 부합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비이성성만을 전시하고 있을 뿐인데, 왜냐하면 내면적 현상들은 그것들의 감각적 존재와 아무런들 상관없이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bb)내면과 형태로서의 외면
“유기체의 개념이 지닌 단순한 계기들을 ‘형태화’의 계기들과 비교할 수 있도록 해주는 또 다른 측면이야말로 비로소 참된 외면을 내면의 압형으로 표현하는 진정한 법칙을 제공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대립자들의 관련으로서 유기적 통일, 즉 형태화된 유기체가 대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화의 설명의 본질은 개념으로 존립하는 데 반해, 그 내용을 법칙의 측면으로 만들기 위한 단순성과 직접성은 충분히 유기적이지 못하다. 이제 문제는 형태화 일반이다. 이것을 고찰해 보면 결국 내면 안에 내면과 외면이 있으며, 외면 안에 내면과 외면이 있음이 발견된다. 왜냐하면 형태화는 자신 고유의 내면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yy)내면이자 외면으로서의 외면 자체 또는 비유기체로 전이된 유기적 관념
유기체의 내면과 외면을 비교하려는 시도 자체가 비유기적 자연으로 전이되므로, 외면 자체에서의 내면과 외면이 문제가 된다. 여기서의 부정성은 더 이상 과정의 운동이 아니라 정적인 통일이자 단순한 대자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과정이 어찌되었든 자기를 보존한다. 여기서는 비중과 응집이 이분된다. 전자는 순수한 대자 존재이며, 후자는 타자 속에서의 대자 존재이다. 그런데 이 두 측면들에서 법칙을 발견한다 해도, 그것은 물체의 본질적 본성을 표현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표상할 뿐이다. 외연이 없는 내포는 추상이고, 타자 존재라는 계기는 대자 존재에 대해 평행하기는커녕 상관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제 ‘유’와 ‘종’이 등장한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추론할 수 있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고 헤겔은 설명한다. 그것은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또는 유로서의 보편적 생명”과 “개별자로서의 또는 보편적 개체로서의 보편적 생명”이다. 전자가 자신을 종으로서 매개 중심 속으로 내보내는 반면 후자는 자신을 본래의 개별성으로서 매개 중심 속으로 내보낸다. 이러한 추론은 ‘형태화’라는 측면에 속하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살펴본 바가 있다.

이제 헤겔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형태화된 현존재에서 이루어지는 관찰에는 단지 생명 일반으로서의 이성만이 생성될 수 있는데, 이때 생명 일반에는 자신을 구별하면서 그 어떤 이성적인 계열화와 분지화도 그 자체에서 현실적으로 지니지 못하며 또한 형태들의 내적으로 근거지어진 체계도 되지 못한다.”ㅡ“그러므로 유기적 생명의 보편성이 그것의 현실성에서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참다운 매개 없이 자신을 직접적으로 개별성이라는 극단으로 전락시키므로, 관찰하는 의식은 단지 사물로서의 사념만을 눈앞에 둔다.”

5.2.2. 순수한 상태에서 외적 현실과 관계하는 자기의식의 관찰 논리학적 법칙과 심리학적 법칙

“이성의 자연 관찰은 비유기적 자연 속에서 개념이 실현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 개념은 법칙인데, 이때 법칙의 계기들은 사물들이고 이 사물들은 동시에 추상물들로서 태도를 취하며 관계한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자신 안으로 반사된 단순성이 아니다.” 이제 관찰은 개념으로서 실존하는 개념 자체나, 혹은 자기의식에서만 자유로운 개념을 발견한다.

1)논리적 법칙
먼저 등장하는 것은 사유의 법칙들이다. 이것은 실재성의 외부에서 등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즉자적 보편자로서 직접적 존재를 자체에 지니고 있다. 이 법칙들은 절대적 개념이다. 그 내용 자체는 감각적 존재가 될 수가 없고, 본질적으로 절대적 형식이다. 이것의 상세한 전개는 헤겔 본인의 저서 <논리의 학>으로서, 달리 말하면 사변 철학인데, 이런 철학 내에서는 사유 법칙들이 사유하는 운동 전체로서 지 자체인, 그런 사라지는 개별적 계기들로서 보여준다. 그것은 “그 자체 대자 존재이다.” 그래서 또한 행동하는 의식이며, 관찰하는 의식은 이것에 이끌릴 뿐이다.

관찰하는 의식이 여기서 사념하는 바는 단지 법칙들 속에서의 사유를 사각지대로 치워버리고, 자신은 행동하는 의식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행동하는 의식은 “대자적으로 존재해서 타자 존재를 지양하고 또 이처럼 자기 자신을 부정적인 것으로 직관하는 가운데 자신의 현실성을 지니는 것이다.”

2)심리학적 법칙
“그러므로 의식이 행위하는 현실에서 관찰을 위한 새로운 장이 열린다.” 여기서 소여된 타자 존재와의 관계가 있는데, 정신은 소여된 인륜성에 적합하게 되도록 행동하고, 한편으로는 현실로부터 단지 특수한 것만을 추출하여 붙잡으면서 대상적인 것을 자신에게 적합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렇게 자신의 개별성의 부정, 자신의 보편성의 부정이 이분된다.

이번에 중요한 것은 자연이 아닌 정신의 내적 합목적성인데, 능력들은 보편성에, 그것들의 통일은 현실적 개체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이 의식적 개체를 존재하는 개별적 현상으로 취급하느냐, 아니면 의식적 개체를 보퍈성의 형식을 띄게 함으로써 의식적 개체의 법칙을 발견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개체는 보편성과 결합하면서도 동시에 분리되는데, 바로 이 때문에 “무엇이 개체에 영향을 미치고 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오직 개체 자체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이제 관찰의 대상은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여건으로서 개인의 세계다.

5.2.3. 자기의식이 자신의 직접적인 현실과 맺는 관계, 인상학과 골상학

1)관상학
“개인은 그 자체 즉자 대자적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선 개인 자신의 직접적 현실태, 혹은 즉자태와의 관계가 설명될 수 있다. 여기서는 개인이 지닌 체형이나 용모와 같은 특수한 조형 같은 것들이, 특수한 현실로서 존재한다. 또한 개인의 부분으로서 ‘기관’만이 내면의 가시화가 된다. 왜냐하면 내면이 특수한 기관 속에 있는 활동성 자체이기 때문이다.

표현에는 두 측면, 너무 많이 표현하는 측면과 너무 적게 표현하는 측면이 있다. 전자는 직접적으로 내면이고, 후자는 내면이 자신을 타자화하여 외면성으로 된 행위의 성과이다. 활동 기관은 존재이기도 하면서 행동이기도 하다는 규정에 내맡겨져 있다. 관상학은 여기서 행동으로서 행동과 행실로서 행동을 구분하고, 전자를 내적인 행동이며 후자가 외적인 행동이라고 이야기한다. 기관은 이 양자의 매개 중심이다. 행실과는 다른 외면성이 개인에게 존속하는데, 한편으로 외면성은 내면 안으로 수용되어 있다.

“이제 이러한 매개 중심이 동시에 내면으로 환수된 표출(외화)이라고 규정되기 때문에, 그것의 현존재는 직접적인 행동 기관에 국한되지 않으며, 그러한 매개 중심은 오히려 얼굴과 형태화 일반의 아무것도 완수하지 않는 운동과 형식이다.” 얼굴은 개체에게 얼굴일 뿐만 아니라 언제든 벗어버릴 수 있는 가면이기도 하다. 개체의 참다운 본질은 오히려 의지와 행실 속에 있다.

2)골상학
이번에는 자기의식적 개체의 외면보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그것의 직접적 현실태에 대한 관찰이 남아있다. 물론 이 역시 내면에 대하여 외면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관계와 함께 직접적 현실태에 대한 의미로서 골상학을 다룬다. 이것은 개체의 전적으로 정적인 현실태인데, 이것은 자기의식적 운동과는 구별되는 자신의 대자적 전시이자 한낱 사물로서의 존재다. 이 현실태는 또한 자기의식의 ‘자기 내 반성된 존재’로서 현존재다. 이것은 “정신의 순수한 본질과 정신의 육체적 분지화의 매개 중심”에 불과하다.

문제로 되는 것은 자기의식적 개체의 존재로서의 ‘뇌’라는 사실보다는, 그것의 현실이자 현존재가 그의 ‘두개골’이라는 골상학의 등장이다. 이것의 관찰은 두 가지로 양분되는데, 첫 번째로 “메마른 대자 존재, 즉 정신의 골화된 특성”과 두 번째로 “메마른 즉자 존재”이다. 골상학의 관찰은 결국 자기의식의 본성과는 우연적으로나마 관련되어 있을 뿐이고, 두개골이라는 메마른 존재 자체의 ‘근원적 소질’이라고 해봤자 “현실적으로 이렇지는 않지만 본래는 이러이러했어야만 했다”고 하는 공허한 쑥덕거림일 뿐이다.

관찰하는 이성은 여기서 가장 열악한 사유에 도달했으며, 또한 더 밑으로 갈 수 없는 바닥을 찍은 것이다. 이 반작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참다운 본질은 그의 행실이다. 이 자립적 자기의식은 이제 자기를 실현한다.

5.3. 이성적인 자기의식의 자기실현

“자기의식이 즉자적으로 대상적 현실이라는 점이 자기의식에 대해 존재한다.” 이것은 자신이 곧 일체의 실재라는 직접적 확신에서 벗어나서 자립적인 자기의식을 자신에 대해 정립한다. 이러한 자기의식은 곧 이성의 자유이며, 관찰에서 벗어나 자기의 실현에까지 고양된 것이다.

“개인의 순수하게 개별적인 행동과 거동은 개인이 자연 존재로서, 다시 말해 존재하는 개별성으로서 지니고 있는 욕구와 관련된다.” 이러한 기능들은 헤겔에 따르면 보편적인 보존적 매체, 이를테면 민족 전체의 위력을 통해 현실성을 지닐 수가 있다. 그러나 물론, 개인은 단지 존속이 아니라 자신의 내용 역시 보편적 실체 속에서 지닌다. 각자는 보편적 정신 안에서 오직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자기 확신을 지니며, 그만큼 타자에 대한 확신도 지닌다. “타자들을 나로서, 그리고 나를 타자들로서 직관한다.”

그러나 이성은 이런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아직 이성은 보편적 실체, 혹은 실제적 인륜성 자체를 자신의 본질에 관한 의식으로 고양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개별적 의식은 인륜적 실체를 단지 견고하게 신뢰한다. 그러나 이 신뢰는 자신을 순수한 개별성으로서 인지하지 않게 하고, 이것이 오히려 신뢰 자체를 상실시킨다. “개별적 의식은 대자적으로 유리되고, 더 이상 보편적 정신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본질이 된다.”

이제 겨우 정신의 개념이 직접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는데, 자기의식은 스스로에게 “개별적 정신으로서 본질이 된다는 규정성을 부여한다.”

의식은 한편으로는 소여된 현실과 그 대신 현실로 만드는 목적으로 양분되어 나타난다. “자기의식은 덕이 된다. 덕이 겪는 경험은 다름 아니라 자신의 목적이 즉자적으로 이미 달성되어 있으며, 행복은 직접적으로 행동 자체 속에서 발견되고 행동 자체가 곧 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의식에게 현실이란 단지 자신의 목적 실현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5.3.1. 쾌락과 필연성

“무릇 스스로에게 실재인 자기의식은 그 대상을 자기 자신에서 지니는데, 그러나 이 대상은 자기의식이 이를 이제 비로소 대자적으로 지니는 것일 뿐이지 아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식에게 존재는 그 자신의 현실과는 다른 현실로서 마주 서 있으며, 자기의식은 그의 대자 존재를 성취함으로써 자신을 다른 자립적 본체로서 직관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런 최초의 목적은 개별적 본질로서의 자신을 다른 자기의식 속에서 의식하게 되는 것 또는 이 타자를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자기의식은 순수한 개체성만을 수행하며, 따라서 인륜적 정신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자기의식은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이 욕망에는 본질이 없고, 생동하는 현존재와는 아무런들 상관없이 단순한 가상만이 있다. 욕망은 오히려 생동하는 현존재를 지양하며, 쾌락을 향유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목적을 실현하는 것은 따라서, 그 자체가 목적을 지양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과 타자의 자기의식의 통일로서, 즉 보편자로서 대상이 되는 것이다. 쾌락의 향유는 자기 자신이 되었다는 긍정적 의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양할 뿐이라는 부정적 측면또한 지니고 있다. (헤겔이 파우스트를 인용하며 이를 “악마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라고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자기의식은 전자의 긍정적 의미만을 자신의 실현의 의미로 파악한다. “여기서는 자기의식의 개별성이 도달한 현실이 부정적 본질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스스로 보게 되는데, 이러한 본질은 다름아니라 이 개체성이 즉자적으로 무엇인지에 관한 개념이다.” 개체성이 자신의 본질로 경험하는 대상은 공허한 필연성이다. 그것은 개별성의 무(비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추상적 필연성 앞에서 개별성은 분쇄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자기의식 자체는 이러한 상실 가운데 살아남는데, 이런 필연성조차도 자기 자신의 본질로 정립될 뿐이기 때문이다. “필연성을 자신으로서 인지하는 이런 의식의 자기 내 반성이 이제 의식의 새로운 형태이다.”

5.3.2. 마음의 법칙과 자만의 광기

“자기의식은 보편자나 법칙을 직접적으로 자신 안에 지니고 있음을 안다. 이 법칙은 직접적으로 의식의 대자 존재 속에 존재한다는 그런 규정 때문에 마음의 법칙이라고 불린다.” 여기서는 욕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법칙이 자기의식이 실현할 목적이 된다. 마음 속에는 법칙이 대자적으로 존립하긴 하지만 이미 실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러한 법칙 자체가 현실에 맞서 있을 뿐이다. 이것은 현실을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 현실적 법칙은 보편적 법칙이자 질서인데, 이것은 마음의 법칙과 우연적으로만 일치할 수 있을 뿐이다.

마음의 법칙이 실현될 경우, 그것은 개인으로부터 도망가버린 또다른 질서가 된다. 실현된 마음의 법칙은 또한 마음의 법칙이 지양해야 할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인은 이 질서를 승인한다. 이제 사정이 완전히 거꾸로 된다. “이제는 인간의 마음 자체가 자신의 ‘탁월한 의도’에 대립해 있으며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보편성은 실은 오히려 즉자적으로 보편적인 것이고, 이 속에는 바로 이 직접적 개별성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보편성에 자신을 의탁하는 의식의 개별성이 오히려 몰락하게 된다는 점을 이 의식은 알지 못한다.” 의식은 자기 자신의 소외에 도달하고, 필연성은 보편적 개체성으로 된다. 여기서 자기의식이 경험하는 바는 자기의식이 대자적으로 그것인 바와 “모순된다.”

의식은 자신의 비현실성을 자각한다. 이것은 인류의 복지를 위한 마음의 고동, 착란된 자만의 광기로 이행한다. 그런데 이 의식은 타인들의 저항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식을 지닌 타인들도 똑같은 경험을 한다. 공적 질서가 보여주는 것은 보편적 반목일 뿐이다. 이런 공적 질서가 곧 ’세계 운행‘이다. 이런 가운데 의식의 개별성을 희생시키는 의식의 형태가 덕이다.

5.3.3. 덕성과 세계행로

덕의 의식에게는 법칙이 본질적인 것이다. 개체성은 지양되어야 한다. 개체성은 세계 운행에서 절멸된다. “그런데 이런 지양을 통해서 말하자면 세계 운행의 즉자에 그것이 그 자체 즉자 대자적으로 실존에 들어설 공간이 만들어진다.” 덕은 이러한 세계 운행의 참된 본질을 신앙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덕은 세계 운행과 벌이는 투쟁의 행동이다. 덕의 목덕은 현실에 대해 참된 본질이 승리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여기서 덕이 현실을 제압하는 데 있어서는 “재능, 능력, 힘”이 등장한다. 이것이 덕에 의해 존재하면 선하게 응용되는 것이고, 세계 운행에 존재하면 그 원리에 의해 오용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는 것이 보편자로서 능력이다. 그런데 여기서 “선은 투쟁 자체의 개념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실현되어 있다.” 따라서 덕은 세계 운행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가 없다. 덕이 선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단지 지키기 위해서일 뿐인 것으로 된다.

덕이 개체성을 희생하는 데 반해, 세계 운행의 원리는 바로 개체성이다. 그것은 선의 전도이자 현실성의 원리이며, 불변자를 추상의 무로부터 실재의 존재로 전도시키는 것이다. 세계 운행은 덕에 대해 승리한다. 그러나 물론 실제적인 덕에 대해서가 아니라 가상적이고 기만적인 덕에 대해서 승리한다.

“개채의 행동과 거동이 곧 목적 그 자채이다.” 왜냐하면 세계 운행의 개체가 대자적으로 행위할 경우, 이는 바로 단지 아직 즉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현실로 산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체성은 희생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즉자에 대립해 있는 것도 아니다.

5.4. 절대적으로 실재하는 개인

“이제 정립된 목적은 자기 확신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목적의 실현은 진리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아니면 목적은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현실은 확신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ㅡ“자기의식은 순수한 범주 자체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 또는 자기의식이 곧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된 범주이다.”

5.4.1. 정신적인 동물의 왕국과 기만, 또는 사태 그 자체

처음에 나타나는 절대적 실재성은, 단지 범주에 관한 공허한 사고에 불과한 추상적인 보편적 실재성이다. 개체는 단순한 즉자 존재로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규정성으로서 존재한다. 규정된 즉자가 하나의 질이 된다. 여기서 의식은 자기 자신과의 순수한 교호 작용에 침잠하며, 자신을 자신의 일자 안에서 보존한다. 의식의 근원적 본성은 개인에게 목적이자 내용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정립은 행동하는 것으로서의 정립에 대해 제약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행동하는 개체에게서는 규정성이 부정성 일반으로 해체되어 있다.

여기서 본성은 첫째, 대상으로서 또는 목적으로서 현존한다. 따라서 현존하는 현실에 이 본성이 대립해 있다. 그리고 둘째, 목적의 운동 혹은 수단이 또 다른 계기다. 마지막으로 셋째, 행위자가 목적이 아니라 행위자의 타자로 존재하는 바대로의 대상이다. 이 세 가지 계기들 속에서 그 내용은 전부 같다. 다시 말해 내용상의 어떤 구별도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개체의 근원적 본성은 아직 행동하는 것으로 정립되어 있다기보단, 특수한 능력, 재능, 개성 등등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행동은 부정성인데 본성이 부정성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근원적 내용은 의식이 이를 실현하고 나서야 비로소 의식에 대해 존재하게 된다.”ㅡ“개인은 행동을 통해 자신을 현실화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의식은 자신의 목적을 규정하기 전부터 미리 앞서 목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목적을 실현한 것, 즉 작업 성과조차도 결코 자신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작품은 규정된 것이므로, 이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별이 성립한다. 그런데 비교하는 사고로서는 구별 자체가 비본질적인 구별일 뿐이다. 그래서 근원적 본성은 오직 즉자일 수 있을 뿐이며, 본성과 작품은 서로 상응한다.

개인은 자신에게서 자신밖에는 발견하지 못하므로, 오직 기쁨만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작품은 존재하는 것이고, 개체의 실재성을 점점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는 의식에게 행동과 존재의 대립을 발생하도록 한다. 작품 속에서 이것은 근본 모순이 되고, 또 작품 속에서 부정적으로 통일된다.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념’과 ‘실재’는 각각 목적으로서 그리고 근원적 본질성이 되는 것으로서 등장한다. 여기서 목적이 참된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 목적을 표현하는 수단이 선택될 것인지는 우연한 것이고 한갓 행운이 결정한다.

그런데 의식의 행동에는 내적 우연성 뿐만 아니라 통일성과 필연성도 있다. 행동이 그 자체 즉자 대자적으로 현실의 본질이기에 행위가 이루어진다. 작품 속에서 대상적 현실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된 대상적 현실은 당연히 대자적으로 진리를 지니지 못한다. 확신에 대립해 있는 현실은 단지 의식에 대해 존재하며, ”이 자기의식에게는 모든 대립이 사라졌다.“ 이제 의식은 자신의 행동에 맞서 개념과 확신을 내세운다. 의식은 현실을 사라지는 계기로서 경험하며, 이제 현실과 작품이 참된 작품으로 통일된다.

참된 작품이란: “자신을 단적으로 주장하면서 자신을 지속되는 것으로서 경험하게 되는 ‘사태 자체’이다.” 이것은 개인적 행동 자체가 지닌 우연성과는 독립적이다. 즉 상황이라든가 수단이라든가 현실인 그런 사태와는 독립적이다. 이것은 단순한 본질이라는 형식을 띄고, 다른 모든 계기들이 사태 자체와 맞서 있으면서도 사태 자체가 단지 그것들의 통일이다.

의식은 목적으로서의 목적,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순수한 행동을 사태 자체로 만들었다. 사태 자체는 결심과 실재의 통일이다. 그 내용은: 의식이 현실이 자신의 ‘하고 싶음’ 이외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다. 이 의식은 정직한 의식이라 불리운다. 정직한 의식에게 “사태 자체는 자신의 사태이지만 전혀 작품이 아닌 것이기도 하며, 또는 그것이 순수한 행동이자 공허한 목적이기도 하고 또한 행실을 결여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헤겔은 이것이 보이는 만큼 그리 정직하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의식에게 관건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사태일 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이 행동이라면, 그가 사태 자체를 정말로 진지하게 여길 수는 없다. 타인들은 이것을 처음에는 사태 자체가 완수되었다고 받아들이고는, 그것을 위해 서둘러 행동한다.

그러나 “의식이 사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의 행동과 거동이며, 이것이 사태 자체였다는 점을 타인들이 깨닫게 되면서 그들은 그렇게 자신이 속았다는 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타인들 역시 결국은 사태 자체가 아닌 자신들의 행동을 보여주려 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이야말로 똑같은 기만이다.

순수한 사태는 자신에 대한, 타인에 대한 기만으로 드러난다. 이제 관건이 되는 것은 개체성에 의해 삼투되어 있는 실체로서 사태 자체다. 이것이 ‘주체’이며, 주체 안에서 개체성은 개체성 자체로서, 즉 ‘바로 이 개체성’인 것 못지않게 ‘모든 개인들’로서 존재한다.

5.4.2. 법칙을 제정하는 이성

이 단계에 오면, 개인의 근원적 본성은 지양되고, 개인은 보편적 자기로서의 자기로 드러난다. “역으로 형식적인 사태 자체는 자신 안에서 자신을 구별하면서 행동하는 개체성에서 충족된다.” 왜냐하면 개체성의 구별들이 바로 저 보편자의 내용을 이루기 때문이다.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대상이 된다. 그 현존재가 자기의식의 현실이자 행동인 그런 절대적 사태이다. 이 사태를 헤겔은 ‘인륜적 실체’라고 명명한다. 그것의 의식은 인륜적 의식이다. 이 대상이 곧 자기이며, 자기는 이 대상에 압도된다. 이 대상의 분할이 “절대적 본질의 규정된 법칙들인 집단들”이다. 이 대상은 집단들의 본질이다.

자기의식은 이런 실체의 대자 존재이므로, 자신 안의 법칙의 현존재를 언표한다: “건전한 이성은 무엇이 옳고 선한 것인지를 직접 안다.” 이는 건전한 이성에게 직접적으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고 또한 언표한다: “이것은 옳고 선한 것이다. 더욱이 바로 이것이.” 이때 이것은 규정된 법칙들이고, 내용이 풍부한 사태 자체이다. 이 언표가 바로 법칙의 제정이다.

그러나 이 건전한 이성은 서투르다. 그것은 무조건적으로 언표된 의무에서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이 의무를 훼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성은 사념하는 바에 따라 의무를 언표하고, 그 의무는 사념에서부터 조건을 사상해버린 무조건적 의무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자신이 사념한 바를 말하지 않고, 단지 그것의 무조건적 의무만을 말한다.

유명한 예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율인 “너의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헤겔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나는 오성을 가지고서 그를 사랑해야 한다. 오성이 없는 사랑은 그에게 아마 증오보다도 더 큰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법칙이 아니라 계율이며, 순수 당위일 뿐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하나의 예시를 들었을 뿐이다.)

법칙 제정에 남은 것은 공허한 동어반복 뿐이다. 따라서 헤겔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로써 인륜적 본질은 직접적으로 그 자체가 내용이 아니라 단지 어떤 내용이 자기 자신과 모순되지 않음으로써 법칙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가르는 척도에 불과하다. 법칙 제정적 이성은 단지 검증하는 이성으로 격하된다.“

5.4.3. 법칙을 음미하는 이성

“보편자는 형식적 보편성이고, 규정된 내용은 이런 형식적 보편성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형식적 보편성 속에서는 규정된 내용이 오직 자기 자신과의 관련 속에서만 고찰되기 때문이다.”ㅡ“보편자는 더 이상 존재하면서 유효한 실체나 즉자 대자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내용을 오직 그 자신과 비교하면서 그 내용이 동어반복인지를 고찰하는 그런 단순한 지 또는 형식이다. 법칙은 더 이상 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검증된다. 그리고 법칙은 검증하는 의식에 대해 미리 주어져 있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이성이 법칙의 검증에 모순율을 끼워넣고, 그것을 단지 형식적 기준이 아니라 실제적 기준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성은 이론적으로는 모순율을 형식적으로만 취급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옳은 것은 인륜적 실체로서 이미 존재하며, 그러한 자기 동일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검증도 가해질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예컨대 비소유가 자기 모순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소유를 단순한 규정성으로 두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일 뿐이다. 인륜적 본질성이란 “자기 동일성을 통해 자기 자신의 본질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이제 법칙 제정과 검증이 인륜적 실체의 계기들로서 지양되고, 이들이 정직성의 형식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정직성이 바로 법칙을 의식의 본질로서 유효성을 지니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직성이 인륜적 실체 하에서 취급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법칙 검증은 조금 다른 내용을 지니게 된다. 검증의 보편성은 이제 형식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즉자적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정신적 본질은 우선 자기의식에 대해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법칙으로서 존재한다.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성이 아닌 형식적 보편성이었던 검증의 보편성은 지양되었다.”ㅡ“법칙들은 존재한다.”

“옳은 것이 나에게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점, 바로 이를 통해 나는 인륜적 실체 속에 존재한다. 이렇게 인륜적 실체은 자기의식의 본질이며, 반면에 자기의식은 인륜적 실체의 현실이자 현존재이고 또 인륜적 실체의 자기이자 의지이다.”

6. 정신

정신이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본질로서 출현하고, 정신의 본질은 인륜적 실체로서 의식에 현상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의식 형태들은 정신의 추상물들이다. 그리고 의식과 자기의식의 통일이 완수된 것으로서 정신은 이성을 지닌 의식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고찰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본질이다.

“직접적 진리인 한에서의 정신은 한 민족의 인륜적 삶이다. 즉, 이때 정신은 하나의 세계인 개체이다. 정신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그것인 바를 넘어서 의식으로 전진해야만 하며, 아름다운 인륜적 삶을 지양하고 일련의 형태들을 거치면서 자기 자신에 관한 지에 도달해야 한다.“

6.1. 참다운 정신, 인륜

“보편적 본질이자 목적으로서의 실체는 개별화된 현실로서의 자신에 대립하여 등장한다. 무한한 매개 중심은 자기의식인데, 즉자적으로 자신과 실체의 통일인 이런 자기의식이 이제 대자적으로 바로 그런 것이 된다.” 이제 자기의식은 단지 직접적으로만이 아니라 자립적으로 이 통일을 완수한다. 이 통일 내에서 ‘인간법’과 ‘신법’이 양분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인륜적 본질이다.

6.1.1. 인륜의 세계, 인간의 법칙과 신의 법칙, 남성과 여성

인간법은 한 민족으로서 보편성과 개별성이라는 두 형식을 지닌다. 전자인 현실적 실체로서 정신은 한 민족이며, 후자인 현실적 의식으로서의 정신은 그 민족의 시민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법에 맞서 신법이 등장한다. 이 신법의 등장 하에 국가 권력은 두 가지 대립을 지닌다.ㅡ“현실적 보편성으로서의 국가 권력은 개인적 대자 존재에 맞서 있는 권력이고, 현실태 일반으로서의 국가 권력은 아직 자신과는 다른 타자를 내적 본질에서 지닌다.” 여기서 맞서는 권력의 측면과 타자를 본질적으로 지닐 뿐인 측면이 나뉘는 것이다.

헤겔은 여기서 직접성의 요소 속에서 인륜성을 표현하는 자기의식, 혹은 타자 속에서 본질로서의 그리고 또한 이런 자기로서의 자신에 관한 직접적 의식, 즉 ‘자연적인 인륜적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정의한다.ㅡ“아직 내적인 무의식적 개념으로서의 가족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현실태에 마주 서있고, 민족의 현실을 이루는 요소로서의 가족은 민족 자체에 마주 서 있으며, 직접적인 인륜적 존재로서의 가족은 보편자를 위한 노동을 통해서 자신을 도야하고 보존하는 인륜성에 마주 서 있고, 페나테스로서의 가족은 보편적 정신에 마주 서 있다.”

그러나 가족은 그 구성원들의 자연적 관계인 한에서는, 그 내부에서 인륜적 본체가 아니다. 따라서 가족에 속하는 바대로의 개별자는 단지 비현실적인 자일 뿐이다. 이러한 보편성은 순수 존재이자 죽음이다. 개별성은 추상적 부정성으로 넘어간다. 이 존재는 자연적 관계로 되어 있었던 파괴를 스스로 떠맡는다. 이로서 죽은 존재는 보편적 개체성으로 고양된다. 그것은 사자에 대한 최후의 의무로서 장례로 되며, 이를 통해 신법에 대한 인륜적 행위가 성립된다.

인간법의 현실적 생동성은 정부에 있는데, 이것은 공동체의 정신인 보편적 회합을 유지하면서도 때로는 뒤흔든다. 질서의 붕괴는 정신이 인륜적 현존재로부터 자연적 현존재로 침몰하는 것을 방지한다. 공동체는 여기서 자신이 지닌 위력의 진리와 확증을 신법의 본질에서 지닌다. 이 신법이 가족을 주재하고 있는데, 여기서 자체 안의 구별들 사이의 관련이 신법이 지니는 현실성의 생동하는 운동을 이룬다. 여기서 세 가지 관계가 나온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일단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자연적인 상호 승인일 뿐이고, 그 현실태는 자식에 있다. 민족의 존립은 이러한 세대의 교체 속에서 있다. 반면 형제와 자매의 관계는 혼합되지 않으며, 가족 속에 밀폐되어 있지도 않다. 이것이 신법의 영역에서 인간법으로 이행하는 바로 그 계기다. 이 속에는 남성과 여성, 즉 양성이 “인륜적 의미 속에서 인륜적 실체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두 가지 구별자를 각자 나누어 갖는 상이성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직접성을 띄는 인륜적 정신이 위 구별의 현존재가 된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 중 그 무엇도 혼자만으로는 즉자 대자적이지 못하다. 인륜적 왕국은 즉자 대자적이며, 그 존립에서 그 어떤 분열로도 더렵혀지지 않은 오점 없는 세계이다. 그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통합은, 보편적 정신과 신적 법칙이 양분된 것의 직접적 통합이다. 양자는 이제 하나의 운동이 된다.

6.1.2. 인륜적 행위, 인간의 지와 신의 지, 죄책과 운명

그런데 이 왕국에서는 아직도 개별자는 비현실적인 존재일 뿐이다. ‘운명’은 신법과 그 자신이 현존재를 지니게 하는 두 자기의식을 그 자신의 단순성의 심연 속으로 삼켜버린다. 이것은 인륜적 세계의 안정된 조직과 운동이고, 이러한 운동의 활동이 자기의식이다. 여기서는 의식에 대해 오직 하나의 법칙만이 본질이 된다는 바로 그 점으로부터 인륜적 위력들의 상호 대립이 성립한다. 이들 중 한 가지로 결정된 인륜적 의식이 ‘품성’이 된다.

인륜적 의식은 자기 쪽에서만 합법을 보고, 다른 쪽에서는 불법을 보기 때문에, 양쪽 중에서 신법의 의식은 인간법의 의식에서 폭력 행위를 목도한다. 이에 반해 인간법의 의식은 신법의 의식에서 아집과 불복종을 목도한다. “이를 통해 의식에게서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의 대립이 발생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실체 속에서는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의 대립이 발생한다. 그리고 인륜적 자기의식의 절대적 권리는 인륜적 본질의 신적 권리와 분쟁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신적 의식은 일종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적 자기로서 ‘행실’이 존립하고, 이것의 현실성이 지닌 형태는 다름 아니라 ‘알고 있음’이다. 자기의식은 행실을 통해서 바로 ‘죄과’가 되는데, 이것은 인륜적 본질로부터 갈라져 나온 자신의 고유한 본질이다. 죄과는 한 가지 법칙은 지키고 다른 법칙을 거부했으므로 ‘범죄’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론 ‘죄를 짓는 자’는 ‘바로 이 개별자’는 아니다. 그것은 아직 비현실적인 존재다.

인륜적 본질은 신적-인간적 법칙의 통일임에도, 행실은 그 중 오직 한 가지만을 다른 한 가지에 맞서 수행한다. 그래서 행실은 침해하면서, 또한 침해당하기도 한다. 여기서 “행위는 본질에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과 동맹을 맺고서 참된 권리가 아니라면 그 무엇에도 현실성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언표한다. 인륜적 의식은 그 자신의 것으로서의 이러한 현실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행동 때문에 자신의 대립자를 승인해야만 한다. 인륜적 의식은 자신의 죄과를 인정해야만 한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행위자는 자신의 현실성 대신 비현실성에, 즉 심정에 도달했다. 인륜적 개체는 “자신이 가한 것보다 더 많은 해악을 입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개체들 간의 쟁투가 성립한다. 그리고 양측은 똑같이 파멸한다. 양쪽이 똑같이 굴복해야만 절대적인 법이 완수되며, 양측을 모두 집어삼키는 부정적 위력으로서의 인륜적 실체가 또는 전능하고 정의로운 운명이 등장한다.

그런데 인륜적 본질의 현존재가 강함과 행운에 의거한다면, 인륜적 본질이 붕괴한다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이제 실체는 만인에게서의 형식적 보편성으로서 밖으로 나오며, 더 이상 생동하는 정신으로서 만인에게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개체성의 단순한 견고함은 수많은 점들로 파열되었다.

6.1.3. 법적인 상태

이제 개별자는 자신의 비현실성을 벗어나 출현한다. 인륜적 실체가 단지 참된 정신에 불과하기 때문에 개별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후퇴한다. 이제 자기의식의 자아가 즉자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본질로 간주되며, 자기의식의 계열들이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현실성에 대한 단념을 통해 출현하는 스토아주의, 혼란한 회의주의, 그로부터 법의 형식주의로 이행한다.

법의 인격적 자립성은 공허한 형식주의를 극복할 수 없는데, 그것이 현실적 효력이라 여기는 추상적 보편자는 실체와는 아무런들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치해서, 혹은 만인과 대치해서 있는 인격자가 있다. 자기의식의 보편적 유효성은 자기의식으로부터 소외된 실재라는 것이 현실적 진리로 정립된다.

6.2. 자기에게서 소외된 정신, 교양

아무런 소외 없이 즉자 대자적으로 유효한 자기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자기의 실체는 자기의 외화 자체이며, 외화는 곧 실체, 또는 자신을 하나의 세계로 질서 있게 정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보종하는 정신적 위력들이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정신은 단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화되고 분리되어 대립하는 세계를 형성한다.

“전체는 두 개의 왕국으로 와해되는데, 그 하나는 그 안에서 자기의식이 현실적으로 자신이면서 또한 자신의 대상이기도 한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첫 번째 왕국의 피안에서 현실적 현전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신앙 속에 존재하는 그런 순수한 의식의 왕국이다.”

6.2.1. 자기에게서 소외된 정신의 세계

헤겔은 여기서 정신의 절대적 본질로서 종교와, 단지 현실 도피로서의 신앙을 구분하며, 아직 후자만이 고찰의 대상이라고 선을 긋는다. 그리고 여기서 신앙은 개념과 대립하는 한에서 고찰된다.
6.2.1.1. 교양과 현실의 교양세계
6.2.1.2. 신앙과 순수한 통찰

6.2.2. 계몽사상

6.2.2.1. 계몽과 미신의 싸움
6.2.2.2. 계몽의 진리

6.2.3. 절대적 자유와 공포

6.3. 자기를 확신하는 정신, 도덕성

6.3.1. 도덕적 셰게관

6.3.2. 치환

6.3.3. 양심, 아름다운 혼, 악과 악의 사면

7. 종교

7.1. 자연종교

7.1.1.

7.1.2. 식물과 동물

7.1.3. 공작인

7.2. 예술종교

7.2.1. 추상적인 예술작품

7.2.2. 살아 있는 예술작품

7.2.3. 정신적인 예술작품

7.3. 계시종교

8. 절대지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