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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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왕 | }}}}}}}}} |
鄭筠
? ~ 1179년(명종 9년)
1. 개요
고려의 무신이자 무신정권의 2번째 집권자인 정중부의 아들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무신정변으로 무신들이 집권한 후 아버지를 제치고 무신정권의 1인자 노릇을 하던 이의방을 암살하는 갑오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권력자로 만들었지만 똑같이 본인도 아버지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2. 생애
1170년에 발생한 무신정변은 비록 정중부가 주도하기는 했지만 그는 무신정변 초반의 혼란기가 자신에게 화를 미칠 것을 염려한듯 두문불출하면서 지냈고 그 사이 선봉에 서서 무신정변을 시행한 소장파 이의방, 이고, 채원 등이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기존의 노장파였던 대장군 한순 등이 이에 반발하다가 모조리 숙청당하고 소장파들의 연합 역시 얼마가지 않아 이고와 채원이 이의방에 의해 차례로 제거됨에 따라 이의방은 실질적인 1인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무신정변을 주도하기도 했고 무신들 사이에서 인망이 두터웠던 정중부까지는 어쩔 수 없었던지 이의방은 정중부를 아버지로 모시면서 일단 두 사람의 권력 다툼은 일어나지 않았다.조위총의 난 토벌군 | ||||
원수(元帥) | ||||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인첨 | ||||
부원수(副元帥) | ||||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기탁성 | ||||
중군(中軍) 병마사(兵馬使) | 좌군(左軍) 병마사(兵馬使) | 우군(右軍) 병마사(兵馬使) | 전군(前軍) 병마사(兵馬使) | 후군(後軍) 병마사(兵馬使) |
상장군(上將軍) 최충렬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진준 |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경진 | 상장군(上將軍) 조언 | 상장군(上將軍) 이제황 |
지병마사(知兵馬使) | 지병마사(知兵馬使) | 지병마사(知兵馬使) | ||
섭대장군(攝大將軍) 정균 | 섭대장군(攝大將軍) 문장필 | 사재경(司宰卿) 하사청 | ||
기타 지휘관 | ||||
동로 가발 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 → 후군 총관사(後軍摠管使) 두경승 |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지병마사(知兵馬事) 이의민 |
정균은 아버지를 1인자로 올리고 자신은 정3품 좌승선에 올라 각종 전횡을 일삼았다고 하며[1] 특히 무신의 인사권을 틀어쥔 지병부사 자리를 차지해 한창 무신 인사권을 휘두르다 나중에는 지병부사 자리를 내려놓기도 한다. 또한 궁궐 밖 태후의 옛 별궁이 화재를 당한 뒤 쓰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정균이 이를 무단으로 차지하였는데도 왕이 이를 막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빼도박도 못할 악덕 권신이다. 나중에 가서는 공주를 자기 부인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이미 상서 김이영의 딸과 결혼한 상태였던 것으로 봐서는 본처도 아닌 첩으로 들일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 오만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데 전횡을 일삼다가 결국 1179년 경대승이 결사대를 일으켜 정중부 일파를 칠 때 가장 먼저 목숨을 잃었다. 당시 정균은 숙직실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평소 총애하던 허승이 이끌고 온 군사들에 의해 붙잡혀 목이 베어졌고 사후에 효수된다. 이후 그의 아버지 정중부와 매부 송유인도 경대승이 명종에게 요청하여 출동시킨 금군에 의해 목숨을 잃고 나란히 효수되면서 정중부의 가문은 순식간에 몰락하게 된다.
3. 대중매체
}}}]] ||- <박시백의 고려사>에서는 이의방을 죽여버리는 모습으로 첫 등장한다. 아버지인 정중부가 정권을 잡자 매부인 송유인과 함께 2인자로 행세하고 다니다가 경대승 일파였던 허승에게 베이면서 등장종료.
[1] 당시 정중부는 재상인 문하시중이었으나 70세가 넘은 고령이었고 사직을 청할만큼 건강도 나빠서 실세는 2인자인 아들 정균이었다.[2]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것과 같이 고려에서는 사위도 아들과 다를바 없다고 여겼고 딸도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족보에도 사위, 외손자 등이 기록되었고 장인이나 외할아버지가 고관인 경우에도 음서제가 적용되었는데 외가로도 혈통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왕위에 오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고려의 공주들은 철저히 같은 개성 왕씨 남자와 혼인했다. 어머니의 성씨를 줘서 표면상 근친혼이 아니도록 꾸밀지언정 다른 집안과 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