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린덴-프레오브라제니 봉기 Илинденско-Преображенско въстание İlinden İsyanı | |||
| 날짜 | <colbgcolor=#fff,#191919>1903년 8월 2일 ~ 1903년 10월 | ||
| 장소 | 오스만 제국 마나스티르 빌라예트, 셀라니크 빌라예트, 코소보 빌라예트, 아드리아노플 빌라예트 | ||
| 결과 | 반란은 진압되었고 3만 명의 난민이 불가리아로 도피했다. | ||
| 교전 세력 | |||
최고 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플 위원회 스트란자 공화국 크루셰보 공화국 | |||
| 지휘관 | |||
| 데임 그루에프 보리스 사라포프 니콜라 카레프 야네 산단스키 | 후세인 힐미 파샤 오메르 루치디 파샤 | ||
1. 개요
1903년 8월부터 10월까지 마케도니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가 일으킨 반란2. 배경
오스만 제국 내에서 민족 집단 간 지배 경쟁은 주로 교회와 학교를 통한 선전 활동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지 주민과 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1893년 테살로니키에서 설립된 내부 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플 혁명 조직(IMARO)은 주로 불가리아계로 마케도니아와 아드리아노플 지역의 오스만 제국 내 자치를 통한 독립을 목표로 했으며, 이는 다민족 주민을 통합하고 세르비아나 그리스에 의한 분할을 방지하려는 전략이었다.1895년 설립된 최고 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플 위원회(SMAC)는 불가리아의 비밀적 지원을 받아 지역의 불가리아 합병을 추진했으며,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가 신중한 장기 봉기를 준비한 반면, 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플 위원회는 즉각적인 게릴라 작전과 소요를 통해 열강 개입을 유도하려 했다. 테살로니키의 소규모 보수파 조직인 불가리아 비밀 혁명단체는 1900년까지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에 통합되었고, 이반 가르바노프는 이후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내 우익 세력의 핵심이 되었다. 1901년 체포된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회원의 폭로로 일련의 체포가 이루어졌고, 가르바노프는 중앙위원회의 통제권을 장악해 봉기 계획을 추진했다. 1903년 1월 중순 가르바노프는 최고 간부들과 봉기 실행을 논의했고, 결국 동의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4월 젬이드지 단체는 테살로니키에서 테러 폭탄 공격을 감행했으나 오스만의 보복과 체포로 이어졌다. 고체 델체프는 5월 오스만군에 의해 사망했다. 5월 2~7일 스미레보 회의에서는 봉기 계획이 확정되었고, 8월 2일을 봉기 날짜로 정했으며, 아드리아노플 봉기는 8월 19일로 결정되었다. 봉기의 목적은 열강의 개입을 유도하고 마케도니아와 아드리아노플 지역의 자치를 확보하는 것이었으며, 무기는 불가리아에서 스코페로 공급되었고, 자금은 스톤 납치 사건과 유럽 내 인맥을 통해 마련되었으며, 일부 마우저 소총은 오스만군 사망자에게서 확보되었다.
3. 전개
1903년 8월 2일, 마나스티르 빌라예트에서 봉기가 시작되었으며, 이 지역이 불가리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봉기가 마케도니아 내부의 사건임을 열강에 보여주기 위해 선택되었다. 비톨라 혁명 지역에서는 봉기 지침과 선언문이 보이보데스[1]에게 전달되었고, 전신선이 차단되었으며, 불가리아인들은 비톨라 인근 마을에서 무슬림 농민의 건초더미에 불을 질러 봉기 개시를 알렸다. 크루세보에서는 니콜라 카레프와 피투 굴리 등의 지도하에 800명의 반군이 마을을 점령하고 행정청과 오스만 관리, 파트리아키스트를 공격해 사망자와 체포자를 냈다. 반군은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깃발과 “자유 아니면 죽음” 구호를 게양했다. 이후 통신과 철도가 차단되고, 여러 차례 철도 폭파 시도가 이루어졌으며, 카레프 지도 하에 크루세보 공화국이 수립되어 무슬림과 기독교인 주민에게 독립 마케도니아를 위한 투쟁을 촉구했다.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와 마케도니아-아드리아노플 위원회가 봉기를 주도했으며, 반군은 약 2만6천 명으로 추산된다.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는 기독교인 총독 임명과 국제적 감시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열강에 보냈고, 봉기 초기에는 오스만 관료와 무슬림 주민 공격, 집과 농작물 파괴가 이어졌다. 농민과 여성, 아동, 아로마니아인들이 반군을 지원했고, 불가리아 깃발과 행진가를 통해 반군은 불가리아와 연관되었다. 오스만 술탄 압둘 하미드는 12개 대대와 오스만군을 파견해 봉기를 진압했으며, 유럽 여론에는 이를 “불가리아 테러리스트의 소규모 행동”으로 포장했다.8월 12일 슬리바 전투와 메츠킨 카멘 전투 후 1만8천 명의 오스만군이 크루세보를 점령하고 불태웠으며,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8월 14일 니콜라 푸쉬카로프가 이끄는 반군은 스코페 인근 군용 열차를 탈선시키고 다리를 파괴했으며, 체타가 마나스티르 빌라예트 전역의 소규모 주둔지와 초소를 공격했다. 오르히드에서는 여성 교사들이 임시 병원을 운영했으나 체포되었다가 증거 부족으로 풀려났다. 봉기는 코소보, 테살로니키, 아드리아노플까지 확산되었으나 지역별 참여 정도는 차이가 있었다. [2]
1903년 8월 19일, 아드리아노플(트라키아) 지역에서 불가리아인 반란이 시작되었고, 미하일 게르지코프, 게오르기 콘돌로프, 스타마트 이코노모프, 라자르 마자로프가 지휘했다. 반군은 지역 산맥의 이름을 따 “스트란자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봉기의 주된 목적은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봉기를 지원하고 오스만군을 끌어들여 마케도니아로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부 마을이 점령되고 스트란자 지역 일부가 약 20일간 유지되었으나 말코 타르노보 공격은 실패했다. 이후 오스만군의 강력한 군사 작전과 해상 상륙으로 반군은 양측에서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로도페 산맥 서부 트라키아에서는 일부 체타의 소규모 공격만 발생했다. 8월 중순, 코소보 빌라옛에서 아나톨리아군과 알바니아 민병대가 마케도니아로 파견되어 봉기를 진압했고, 약 40개 대대가 지원군으로 참여했다.
8월 24일 나시르 파샤가 오메르 루시치 파샤를 교체하고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으며, 반군이 점령한 모든 지역을 포위하고 기독교 마을을 체계적으로 소각했다. 8월 말, 두 개 군대가 스미레보와 클레이수라를 탈환했다. 소피아, 아테네, 베오그라드에서는 작가, 학자, 마케도니아 단체들이 모여 오스만군의 기독교인 학살과 유럽 열강의 소극적 대응을 규탄했다. 일부 체타는 불가리아로 피신했고, 일부는 오스만군에 항복했다. 열강의 개입 요청이 실패하자, 9월 9일 봉기 총사령부는 불가리아 정부에 긴급 군사 지원을 호소했다. 10월 초, SMAC는 세레스 산작 북부로 지원대를 보내 봉군을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지역 주민들은 적대적이었다. 불가리아는 열강과 주변국의 압력으로 군대를 파견하지 못했고, 반군 총사령부는 10월 초 모든 혁명 활동 중단과 민병대 외 조직 해산을 선언했다. 농민들은 귀가하고 많은 이들이 오스만 당국에 항복했으며, 1,700정의 소총이 마나스티르 총독에게 반환되었다. 봉기는 10월 말까지 완전히 진압되었다.
4. 결과
1903년 일린덴 봉기의 실패 원인은 열강과 인접 국가들의 지원 부재, 준비 부족(훈련, 전략, 계획)과 무기 부족이었다. 봉기 후 9,830채의 가옥이 소실되고 약 60,953명이 집을 잃었으며, 3만 명의 불가리아인 기독교인이 불가리아 공국으로 피난했다. 1904년 IMARO 추정치는 5,000명 사상, 205개 마을 파괴, 70,000명 노숙, 3만 명 피난으로 기록되었다. 봉기 중 약 1,000명의 반군이 사망했고, 오스만군에 의해 4,5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200개 마을이 파괴되고 최소 3,000건의 강간과 10만 명 이상의 노숙자가 발생했다. 봉기는 어느 정도 열강의 개입을 촉발해 1903년 10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뮐츠슈테그 프로그램을 후원했고, 피해자 보상과 마케도니아 지역의 외국 경찰 파견, 민족 경계 설정이 이루어졌다. 불가리아와 오스만 제국은 1904년 국경 경찰 강화와 정치범 석방에 합의했으나, 불가리아는 비밀리에 전 봉기 참여자를 지원했고, 오스만 제국은 개혁 약속을 완전히 이행하지 않았다.제1차 세계대전 중 불가리아가 점령한 남부 세르비아에서는 공식 기념이 이루어졌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는 봉기 기념이 억제되거나 무시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불가리아는 이를 자국의 역사로 인정하고 참전용사에게 연금을 지급했다.
북마케도니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린덴 봉기를 독립과 반불가리아적 투쟁의 상징으로 재평가하고, 1944년 ASNOM 첫 회의와 1991년 북마케도니아 독립을 각각 ‘두 번째’와 ‘세 번째 일린덴’으로 연결해 기념했다. 봉기 지도자와 혁명가들은 북마케도니아에서 민족 영웅으로 숭배되며, 크루세보 공화국과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인물들의 이름은 국가 찬가에 포함되었다. 불가리아 학계에서는 봉기를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불가리아인의 공동 투쟁으로 보고 있으며, 당시 마케도니아 민족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세 가지 역사 서술(마케도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모두 역사적 기록을 뒷받침하며, 2017년 양국 총리들이 고체 델체프 무덤에서 공동 추모 행사를 진행했고, 이후 역사적 사건을 공동 기념하기 위한 정부 간 역사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불가리아와 북마케도니아는 역사적 해석을 놓고 EU 가입 조건과 외교적 분쟁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