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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Italian invasion of Albania
알바니아어: Pushtimi italian i Shqipërisë
이탈리아어: Invasione italiana dell'Albania
|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 ||
| width=100% | ||
| 날짜 | ||
| 1939년 4월 7일 ~ 4월 12일 | ||
| 장소 | ||
| 알바니아 왕국 | ||
| 원인 | ||
| 베니토 무솔리니의 확장 욕구 | ||
| 교전국 | | |
| 지휘관 | | |
| 결과 | ||
|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점령 | ||
1. 개요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은 1939년 4월 7일부터 1939년 4월 12일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이탈리아 왕국이 알바니아 왕국을 침공해 점령한 사건이다.2. 배경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의 전략적 위치와 식민적·제국주의적 욕망 때문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왔으며, 특히 블로러와 사잔 섬의 통제는 아드리아해 입구 장악이라는 군사적 이점을 제공했다. 1차 대전 중 이탈리아는 블로러와 사잔 섬을 점령했지만 전후 상황 악화와 국제적 압력으로 철수했고, 이는 이탈리아 여론에 실망을 주어 무솔리니의 대외 팽창 선전에 활용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 집권 후 이탈리아는 경제적 침투와 조약 체결을 통해 알바니아에 영향력을 확대했고, 이는 점차 사실상의 경제 식민지화를 초래했다. 하지만 국왕 조구 1세는 정치적 독립만큼은 양도하지 않으려 했고, 이는 이탈리아가 무력 병합 외의 대안을 포기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는 1937년 이후 알바니아 병합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며 친이탈리아 세력 강화, 조구 제거 시도, 독일과의 협력 확보 등을 모색했다.당시 알바니아 왕국은 추축국인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중 이탈리아에 대한 의존도가 심했다.[1] 나치 독일이 안슐루스와 뮌헨 협정을 통해 오스트리아, 주데텐란트를 병합하자 이에 자극받은 무솔리니는 알바니아를 점령할 야심을 품게 되었다.
1938~39년 동안 이탈리아는 알바니아 내부 불안을 조성하고 정치경제적 압박을 강화했으나 조그의 거부로 협상은 결렬되었다. 1939년 3월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이후 무솔리니는 알바니아 침공 결심을 굳혔고, 알바니아에 독립을 사실상 포기하는 내용의 최후 통첩을 제시했지만 조구 1세는 이를 거부했다. 국제사회는 조그의 지원 요청에 무반응으로 일관했고, 국내에서는 반이탈리아 시위가 이어졌으며, 알바니아는 동원령을 내렸으나 군사적으로 취약했다. 최종적으로 1939년 4월 초 조구 1세는 외교적 고립을 확인하고 침공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3. 전개
1939년 4월 7일 새벽 5시 30분 이탈리아는 ‘OMT 작전’을 개시해 두러스, 블로러, 사란더 등 여러 항구에 동시에 상륙했고, 약 2만 2천 명의 병력, 400대의 항공기, 125대의 경전차가 투입되었다.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됐지만 상륙 경험 부족과 준비 미흡으로 혼란이 컸으며, 배의 흘수와 항만 조건 불일치로 하역이 지연되는 등 전반적으로 조직적 결함이 드러났다. 알바니아군은 약 1만 5천 명 규모로 장비도 열악했고, 일부는 이탈리아 장교들의 영향으로 전의가 약화된 상태였다. 실제 저항은 왕립 헌병대 3천 명과 소규모 애국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특히 두러스에서는 아바즈 쿠피와 무요 울치나쿠 등이 이끄는 약 500명이 몇 시간 동안 항전했으나 해군 포격과 전차 투입으로 결국 함락되었다. 다른 지역 저항은 미미했고, 티라나로 향하는 길은 사실상 비어 있었다. 조구 1세는 침공에 앞선 새벽 가족을 피신시키고 도피했으며, 저항 조직에도 실패하고 군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한 채 망명길에 올라 국민적 신뢰를 잃었다. 4월 8일 오전 이탈리아군은 거의 무저항으로 티라나에 입성했고, 도시와 정부기관은 텅 비어 있었다. 차아노는 기대와 달리 환영 인파 없이 도착했으며 알바니아 여론은 무관심과 불만 사이에 있었다.국제사회는 형식적인 우려 외에 실질적 대응을 하지 않았고, 영국은 표면적으로는 외교적 예의를 유지했지만 사실상 이탈리아를 신뢰할 수 없는 세력으로 간주했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는 분쟁 확대를 우려해 침묵했으며, 튀르키예만이 새 상황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은 이탈리아 조치를 지지했고, 이후 양국 관계는 강화되어 5월 ‘강철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국제연맹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고,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지시로 4월 14일 연맹을 탈퇴했다. 티라나 점령 후 이탈리아는 협력 세력을 모아 샤페르 베이 이피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세웠고, 차아노는 이를 통해 알바니아인의 자치 불능을 강조하며 병합을 정당화했다. 4월 12일 소집된 제헌의회는 조그 폐위와 사보이아 왕가와의 인격적 합일을 결정해 알바니아 왕관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넘겼고, 셰프케트 벌라치가 괴뢰 정권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4월 13일 이탈리아 파시스트 대평의회가 이를 승인했으며, 15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공식적으로 알바니아 국왕이 되었고, 뒤이어 프란체스코 자코모니가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6월 새 헌법 제정으로 알바니아의 독립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4. 영향
이탈리아군의 침공 계획은 부족했으나, 알바니아군의 규모가 이탈리아 침공군에 비해 너무나도 적은데다 저항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바니아를 점령할 수 있었다.[2]알바니아는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령이자 괴뢰국인 이탈리아령 알바니아로 편입되었으며 1943년까지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탈리아령 알바니아는 알바니아의 국왕을 이탈리아 국왕이 겸하는 동군연합 같은 형태였다.
알바니아 왕국의 국왕 조구 1세는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다. 조구 1세는 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 왕국이 패전함에 따라 알바니아로의 복귀를 시도했지만, 알바니아는 엔베르 호자가 이끄는 공산주의 세력이 장악해버리면서 복귀에 실패하고 이집트 왕국에 정착했다가 1953년 이집트 쿠데타 이후 프랑스로 망명해 거기서 사망한다. 조구 1세의 후예들은 알바니아 인민공화국이 무너진 이후에야 알바니아로 귀국했다.
[1] 알바니아의 외채 대부분이 이탈리아가 갖고 있었다.[2] 알바니아 침공에 동원된 이탈리아군은 총 10만명으로, 이중 2만 2천명이 실제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반면 알바니아군은 1만 5천명에 불과했는데, 조구 1세는 알바니아 산악지대에서 이탈리아군에 저항하는 것을 시도했으나 알바니아에 투입된 이탈리아 요원들의 방해로 실패했다. 또한 조구 1세가 알바니아인들로부터 민심을 잃어버리면서 두러스 전투를 제외하면 이탈리아에 대한 알바니아의 저항이 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