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01:14:26

이진영/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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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파일:external/www.sksports.net/Large_200205152321044239_2565.jpg
SK 와이번스 시절
파일:20141008085500362.jpg
LG 트윈스 시절
파일:이진영kt.jpg
kt wiz 시절

1. 중,고등학교 시절2. 프로 경력
2.1.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2.2. SK 와이번스 시절
2.2.1. FA 1기
2.3. LG 트윈스 시절2.4. kt wiz 시절
2.4.1. 2016 시즌2.4.2. 2017 시즌2.4.3. 2018 시즌2.4.4. 은퇴
3. 연도별 성적4. 국가대표 경력

1. 중,고등학교 시절

군산남중학교 재학 당시 연습타구가 학교와 바로 이웃한 군산상고 테니스장으로 넘어가면서 군산상고 나창기 감독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군산상고로 진학해 고1이던 1996년 2년 선배 정대현과 함께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1년 후배로는 이승호가 있으며 전주고등학교 야구부와의 전국대회 전북예선에서는 이진영이,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리는 본선에서는 이승호가 던졌다고 한다.

2. 프로 경력

파일:이진영.jpg

2.1.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No.10 이진영
1999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0830000025405.jpg
65경기 210타석/190타수 49안타 4홈런
13타점 14득점 17BB/40K 5도루
.258/.316/.347 OPS .663 wRC+ 70.4 WAR -0.10

1997년 외환 위기의 후폭풍으로 재정 상태가 극도로 악화된 쌍방울은 1999년 드래프트 1차 지명자였던 이진영과 지명권 양도로 삼성으로 간 투수 라형진을 제외한 지명자 13명 전원과 계약하지 않았다. 그 중 일부 대학 진학자들은 SK에 지명권이 넘어가 입단했으므로[1], 이진영을 제외한 고졸 선수들은 사실상 지명권 포기.

입단 당시 모기업의 상황이 어려워 다른 1차 지명자에 비해 적은 금액인 1억 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으며, 그나마 그 계약금조차 지급하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쌍방울은 연봉만 주고 나중에 계약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이진영 아버지가 거절했다. 나중에 계약금을 받았는데 이진영은 주주들이 준것으로 알고있다고 말했다.기사
입단 당시에는 최고 구속 150km/h에 이르는 빠른 볼이 주 무기였기에 투수로 쓸지 야수로 쓸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쌍방울 입단 한 달 만에(...)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고 바로 타자로 전향하여, 최종적으로는 외야수로 정착하게 되었다.[2]

마지막 돌격대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서 은퇴시기가 가까워질수록 쌍방울 이야기를 많이 했다. 기자들이 많이 질문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자기 스스로도 사구에 맞은 후 '쌍방울 정신으로 이겨내겠다'라고 말하기도..

kt에서 은퇴를 앞둔 시기 기자와의 대담에서 쌍방울 시절을 추억한 기사.

2.2. SK 와이번스 시절

No.10, 35 이진영
2000~2008
파일:2007071800002084771_18050.jpg
1013경기 3812타석/3342타수 1015안타 105홈런
447타점 534득점 375BB/468K 69도루
.304/.377/.461 OPS .838 wRC+ 127.5 WAR 26.49

쌍방울 해체 후 신생 팀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온 강병철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으면서 지속적인 출전기회를 얻었다. 이 와중에 채종범-윤재국과 함께 대표적인 강병철의 양아들 취급을 당하면서 여러모로 고생이 심했지만, 그가 국가대표급 외야수로 성장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다. 그 시절에는 늦은 밤에 야식으로 치킨을 시켜먹으며 무지막지하게 스윙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진영 본인도 강병철 감독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기용하면서 욕먹는 것에 대해 미안함도 느꼈다고 한다.

2002 시즌을 기점으로 타격 포텐이 터지기 시작했고, 2003~2004 시즌부터 절정의 타격감을 보여주며 주포 이호준, 박경완과 더불어 SK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군림했다. 조범현 감독은 "홈런타자"로 개조하려고 시도했지만 2005년 20홈런에서 더 이상의 거포 포텐셜을 터뜨리는 데 실패[3]하며 타율은 타율대로 까먹었다. 이듬해 2006년의 성적은 SK 초창기 시절(2000-01) 같은 성적으로 롤백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입은 잔부상이 2007~2008시즌 때 발목을 잡고 말았으며, 김성근 감독의 우익수-1루수 병행 시스템에 묶이면서 팀 내 위치가 어정쩡해졌다.[4]

2007년까지 SK에서의 포지션은 확고부동한 주전 우익수였지만 2007년 SK 우승 소속으로 코나미컵에 출전해 5번 우익수로 선발 출전했고 마지막 주니치와 결승전에서 5-3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8회말 2아웃 주자 1루에서 결정적인 동점홈런으로 5:5로 균형을 맞추었지만 9회에 한점내주며 결국은 6:5로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2008년도에는 팀 사정때문에 1루수로 출장한 날이 더 많았다. 김성근 감독이 박재상-김강민-조동화로 이어지는 발빠른 외야수라인을 선호했던 탓도 있고, 부활한 박재홍을 살리기 위해 우익수로 쓰는 날이 많았기[5]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1루수 수비를 봐야 할 이호준[6]박정권[7]이 시즌 초반과 중반에 각각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공백이 된 1루를 맡을 선수가 없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에 대해 이진영은 익숙치 않은 포지션이고 빠른 타구가 많이 날아와서 우익수 때보다 힘들다고 불만을 터뜨렸다.[8] LG에서도 간혹 1루수를 보기도 한다.

사실 이진영의 외야수비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때 다이빙 캐치로 거품이 많다. 국민우익수라는 별명이 무색한 수비를 자주 보여주는데 어깨와 센스는 좋은데 타구판단이랑 마무리가 안 좋은 편이라서 이상하게 정신줄 놓은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강병철 감독이 SK 재임시절 이진영을 보고 했던 말이 "저놈 참 골때리는 애라서 힘들었어"라고 할 정도였다.

2.2.1. FA 1기

2008년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하고 LG 트윈스로 이적했다. 당시 계약 총액수는 비공개였으나 LG에서 받은 연봉과 기타 수당을 고려했을 때 최소 4년 40억 원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SK는 30억도 제시하지 않은 듯.[9] 반면 LG는 이진영의 동선을 미리 파악해 대기를 탔고 원팀 우선협상시한이 끝나자마자 바로 연락하는 등 이진영을 영입하는데 공을 들였다고 했다. 이외에도 일본 센트럴 리그 몇몇 구단에서 영입 의사를 표시했으나, 제시한 조건에 비해 적응의 어려움이 더 클 것이라 판단해 고사했다고 하다.[10]

그리고 이는 SK 입장에선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당시 SK 입장에서는 이진영의 빈 자리를 조동화박재상, 박재홍을 로테이션으로 기용하며 메우려 했지만 세 선수 모두 심각한 공격력 난조를 극복하지 못했다. 비록 2009년에는 좌익수 박재상과 우익수 박정권이 타격면에서 터졌지만 박재상은 그 후 다시는 2009년 만큼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며 플루크 시즌이었음을 증명했고, 박정권은 이호준이 지명타자가 되어버리면서 그대로 1루수 붙박이가 되었다. 거기다 박재홍도 2009년 이후 매년 하락세를 타면서 SK의 중견수 김강민을 제외한 나머지 외야수들은 더이상 방망이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조동화는 발만 빠르지 공격력에서는 노답이었고 이후 2013년부터 중용된 이명기[11]와 한동민은 매서운 타격을 보이고 있지만 수비능력으로는 이진영은커녕 평균에도 미치지 못해 대타나 지명타자가 더 어울리는 상황. 이래저래 이진영을 잡지 않은 것이 SK에는 두고두고 큰 독이 된 셈.

한편 이적 직후 인터뷰에서 "서울 구단이 잘 되어야 프로야구가 살아난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고 격려해주던 SK팬들에게까지 강한 비난을 받았다

2.3. LG 트윈스 시절

No.35 이진영
2009~2015
파일:PS1511270013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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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로 이적 후 팀에 잘 융화되어 주장까지 역임했다.LG 트윈스 시절 기록은 754경기 2838타석/2527타수 772안타 45홈런 377타점 314득점 266BB/285K 34도루 .306/.371/.416 OPS .787 wRC+ 112.3 WAR 13.31

2.4. kt wiz 시절

No.35 이진영
2016~2018
파일:이진영2017.jpg
327경기 1020타석/916타수 289안타 15홈런
142타점 117득점 87BB/112K 4도루
.316/.374/.443 OPS .818 wRC+ 106.7 WAR 2.19

2016년 KBO 리그 2차 드래프트로 kt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팀을 옮기면서 팬들에게 고맙다는 인터뷰를 했다. 팬들 역시 앞으로도 응원하겠다는 의견이 거의 대부분이다.

며칠 뒤 마음을 추스린 이진영은 앞으로의 다짐과 LG팬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담은 인터뷰를 했다.
그러게요.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하는 후회가 많았습니다. 제가 올시즌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꾸준히 제 몫을 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점 때문에 LG에 남을 수 없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솔직히 답을 찾지 못했어요. 찾을 필요도 없었고요. 분명한 건 제가 더 이상 이 팀에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직까지 한국의 정서는 선수와 구단의 관계가 비즈니스보다는 정에 움직이는데 흥미로운 건 구단이 필요할 때는 정을 내세우고, 구단이 필요 없을 때는 비즈니스를 앞세운다는 거죠.

인터뷰 도중 LG 프런트에게 서운함을 보이기도 했다.[12] 자신은 팀에서 은퇴하고 싶었고 어떻게 하면 LG에 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기도 했으며 결국 발표난 뒤에는 혼자 술을 많이 먹었다고...

2.4.1.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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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시작하자마자 또 깨졌다. 유리몸 4주 동안 결장이라고한다.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76&aid=0002901345

4월 3일 LG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신재웅으로부터 결승 3점포를 쏘아올렸다.

4월 6일 삼성전에서 2호 홈런을 쏘아 올렸지만.. 팀은 4회 대멸망해버리고 결국 11-6으로 패배.

4월 13일 넥센전에서 달아나는 3호 홈런을 쏘아올렸다.

4월 14일 현재 타율은 .312이며 3홈런 9타점을 기록중이다.

초반에 계속해서 맹타를 휘두르고 있으며 5월 7일, 유한준이 불의의 부상으로 전력 이탈하면서 대신 4번타자로 출장해 3타수 2안타를 기록하여 한화전 승리에 앞장섰다.

5월 13일 NC전에서 5회 이재학을 상대로 역전 쓰리런을 쳤다. 벌써 시즌 7호.

그런데 그 이후 9월 초 현재 무려 4달 동안 홈런이 1개도 없다!그래도 팀내에서 중심타자 역할을 잘해주고 있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0.332에 10홈런 123안타 72타점 출루율 0.403 장타율 0.480 OPS 0.883. 커리어로우였던 지난 시즌에서 탈피해서 다시 리바운딩에 성공했다. 이제 세 번째 FA 시즌을 맞게 된다.

2.4.2. 2017 시즌

1월 26일 드디어 kt와 2년 15억에 재계약을 했다.

6경기를 치르며 2할대의 타율과 3할 초의 출루율로 3안타 ops 5할대로 타격감이 잘 올라오지 않고 있다. 그와중에 7일 삼성전에서 7회말, 9회말 두 차례나 희생번트를 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타격감이 떨어진 것인지 2할 중반대로 타율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5월 6일 한화전에서 5회 무사 1,2루에서 초구 희생번트로 1사 2,3루를 만들었다. 이후 추가점을 하나 더 만들어 3대 0을 만들었으나 7회 팀은 역전당해 패배.

5월 7일 송은범을 상대로 1회 무사 2루에서 중전 안타를 때려 이대형을 홈으로 불러들였고, 이것이 경기의 결승타가 되었다.

6월 14일 우규민을 상대로 4회 2사 1,2루에서 좌중간을 가르는 2타점 적시타[13]를 쳐냈다. 프로통산 1998안타.

6월 16일, 역대 9번째 20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2000안타를 기록하며 성구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가 시작된 시점에서도 홈런이 없다 김주일도 응원할때 홈런이 없으니 안타로 응원하라고 얘기할 정도.

시즌 마수걸이 홈런은 시즌이 다 끝나가는 9월 1일에 첫 홈런을 쳤다. 9월 4일에도 대타로 출격해서 시즌 2호 홈런을 쳤다.

9월 19일에 시즌 3호 홈런을 칠 뻔했지만 비디오 판정 후 2루타로 정정되었다. 성적은 전성기에 비해 많이 떨어졌지만 LG에게만은 극강이라 시즌 말미 LG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막는 고춧가루 선봉장으로 활약중이다.

시즌 최종 성적은 102경기 284타석 76안타 2홈런타/출/장 0.290/0.336/0.420 ops 0.756을 기록했다. 타율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으나 출루율과 장타율이 많이 떨어지며 다소 아쉬운 결과를 낳았다.

2.4.3. 2018 시즌

4월 19일 SK전 9회 1점차로 뒤진 2사 1,2루의 기회에서 황재균의 대타로 나왔으나 범타로 물러났다. 그 이후로도 대타로도 써먹기 힘든 지경으로 득점권에서 이닝을 끝내버리기만 한다.

5월 19일 NC전 9회말 동점인 2사 1,2루의 기회에서 이창진의 대타로 나와 단타를 때렸는데 상대 좌익수의 실책성 송구로 졸지에 끝내기 안타가 터지고 말았다. (...)

5월 25~27일 LG 트윈스 3연전에서는 3경기 중 2경기에서 결승타를 기록해내며 여전히 LG 트윈스를 상대로는 강한 모습을 이어나갔다.

6월 17일 NC 다이노스와의 원정경기에서는 9회 대타 결승 홈런을 뽑아내며 팀의 기나긴 연패 탈출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9월 4일 LG 트윈스와의 홈 경기에서는 박기혁, 강백호가 출루한 상황에서 깨끗한 번트를 대며 무난히 1사 2,3루 상황을 만들어주는 줄 알았으나 서상우의 송구실책(...)이 갑자기 터져나오며 의문의 끝내기를 적립했다.

대타로 나오면서 3할 5푼이 넘는 타율과 함께 시즌 타율도 3할을 넘으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2.4.4. 은퇴

파일:이진영 은퇴식.jpg
시즌 종료 직후 FA 계약이 만료되자마자 10월 19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서 최후의 쌍방울 레이더스 출신 선수는 모두 은퇴했다.[14]

이에 대해 이진영은 "팀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고참으로 책임감을 느끼는 한편, 젊은 친구들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것이 맞다는 판단으로 ‘은퇴’라는 결단을 내렸다”며, “선수생활을 마치는 것은 아쉽지만, 프로 생활 20년 동안 최선을 다했고, KT를 비롯한 그동안 소속 구단과 항상 응원해준 팬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다른 모습으로 팬들 앞에 서서 야구계에 도움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은퇴 소감을 밝혔다. 기사

이후 인터뷰에 의하면 다른 팀으로 간다 해도 고작 1,2년 선수생활 연장하기 위해 후배들의 자리를 빼앗는 건 아닌 거 같아 은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다만 콱팬들은 그의 은퇴 후 타선이 식물 수준이 되어버리면서 이진영을 왜 내보냈냐고 성토하는 사람들도 많다.

2019년 7월 28일 LG와의 홈경기에 은퇴식을 치를 예정이라고 한다.기사

은퇴식전 기자회견을 통해 "내가 20년 동안 야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대표팀에서의 영광들, SK 시절에 우승 순간들, LG 시절에 포스트시즌 갔던 기억들, 그리고 KT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배가 되는 것이었다. 창단한 지 얼마 안 됐지만 KT가 좋은 성적 내는 명문 구단이 되도록 도움을 주는 게 목표였다. 그런 게 나에게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내가 많은 일을 했구나 하는 자부심도 생기고, 20년이란 시간이 참 길었다." 라는 소감을 밝혔다.

경기전과 5회 클리닝 타임때 은퇴식을 진행하였다. 이진영 "국민 우익수 별명 좋아해...찬스에 강했던 선수로 기억됐으면"

이진영은 은퇴 후 박찬호의 주선으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으면서 국가대표팀에서는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했다.

3.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1999 쌍방울 65 190 .258 49 5 0 4 13 14 5 17 .347 .316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0 SK 105 292 .247 72 16 4
(5위)
7 33 34 2 21 .401 .298
2001 120 321 .280 90 16 1 7 31 49 9 35 .402 .351
2002 128 419 .308 129 22 8
(1위)
13 40 73 11 42 .492 .375
2003 128 481 .328
(5위)
158
(4위)
29
(5위)
6
(1위)
17 70 81 10 62 .520 .408
2004 117 404 .342
(2위)
138 19 1 15 63 74 8 66 .505 .438
(3위)
2005 122 453 .291 132 19 1 20 74 76
(4위)
8 55 .470 .369
2006 118 428 .273 117 13 0 11 41 54 3 41 .381 .340
2007 80 220 .350 77 10 3 7 42 40 6 22 .518 .412
2008 95 324 .315 102 20 0 8 53 53 12 31 .451 .377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9 LG 120 380 .300 114 18 1 14 69 50 5 40 .463 .366
2010 104 378 .331
(4위)
125 28 0 7 50 56 10 32 .460 .381
2011 97 323 .276 89 18 1 2 37 43 3 26 .356 .331
2012 105 365 .307 112 18 0 4 55 39 4 44 .389 .381
2013 106 368 .329
(3위)
121 26 1 3 62 41 6 37 .429 .390
2014 119 412 .325 134 19 2 6 65 53 4 45 .425 .384
2015 103 301 .256 77 5 1 9 39 32 2 42 .369 .351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16 kt 115 371 .332 123 23 1 10 72 49 2 45 .480 .403
2017 102 262 .290 76 26 1 2 31 28 0 17 .420 .336
2018 110 283 .318 90 17 1 3 39 40 2 25 .417 .370
KBO 통산
(20시즌)
2159
(5위)
6975 .305 2125 367 33 169 979 979 112 745 .439 .373

4. 국가대표 경력

4.1.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감독 이라는 사람 한명 때문에 선수들 성적은 전부 묻혔다.

4.2. 2006 WBC

2006 WBC
파일:이진영 2006.jpg
일본과의 1차전에서 4회말 2사 주자 만루에서 니시오카 츠요시의 잘 맞은 타구를[15]다이빙 캐치로 잡아내는 인생 수비를 보여주었다. 3실점을 막아준 이 호수비로 인해 한국은 분위기를 잡은 한국은 결국 8회 이승엽의 역전 투런으로 승리했다. 반면 이 수비로 분위기가 꺾인 일본은 그 뒤로 공격다운 공격한 번 못해보고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일본과의 2차전, 2사 2루의 상황에서 사토자키 토모야가 안타를 쳐내자 이진영이 완벽한 홈송구로 2루주자였던 이와무라 아키노리를 잡아내는데 성공한다.[16] 대표팀 4강 진출로 당시에 친구 정성훈 및 몇몇 선수들과 함께 병역 특례를 받았다.

4.3.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파일:이진영 도하.jpg
이대호-장성호와 함께 중심타선으로 팀 타선을 묵묵히 지켰으나... 투수 처참한 실력으로 3위로 동메달에 그치고 미필 선수들은 베이징 올림픽 이전까지 극심한 군입대 압박에 시달려야했다.
여담으로 2003년 삿포로 참사 감독을 맡던 김재박이 이때도 선수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4.4. 2008 베이징 올림픽 최종 예선

2008 베이징 올림픽 최종 예선
파일:이진영 2008.jpg

4.5. 2008 베이징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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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대 후반의 나이가 된 이진영은 이용규가 이번 대회 엄청난 타격감을 보여주며 주전 우익수 자리를 꿰차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기회를 덜 받게 되었으나, 백업에서 0.333의 타율과 4할의 출루율을 보이며 꾸준히 활약했다. 특히 준결승전인 일본전에서 한점차로 뒤진 7회 1사 1,2루의 상황에서 대타로 나와 일본의 철벽 마무리인 후지카와 큐지를 상대로 2루주자 정근우를[17] 불러들이는 동점 적시타를 때려내며[18][19]본인이 왜 국민우익수라는 별명을 얻었는지 모두에게 증명했다. 이진영의 동점타 이후 8회에 대역전극이 펼쳐지며 대표팀은 결승에 진출했고, 이후 결승에서도 드라마 같은 경기로 우승을 차지하며 이진영도 대표팀의 주역으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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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7 18 6 0 0 0 4 2 .333 .400 .333 .733 0 3 2 -

4.6. 2009 WBC

2009 W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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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활약을 바탕으로 다시한번 국가대표팀에 승선했으며, 베이징 올림픽 때와 달리 이용규가 중견수로 출전한데다 메이저리거인 추신수가 공격력을 살리기 위해 지명타자로 고정되면서 주전 우익수 자리를 계속 담당했다.

본선 1라운드 A조 첫경기인 대만과의 경기에서 1회 2대0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만루홈런"을 쏘아올리며[20] 일찌감치 승부를 결정짓는 한방을 날렸으며, 본선 2라운드 1조 승자결승전인 일본 전에서는 1회 1사 만루상황에서 다르빗슈 유에게 2타점 적시타를 날려 점수차를 3점으로 벌리는 활약을 했다. 다만 결승 일본전에서 2번 지명타자로 선발출전 했으나, 무안타로 침묵했고, 대표팀은 강민호와 벤치의 사인미스로 스즈키 이치로에게 연장 10회에 2타점을 얻어맞고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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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9 16 4 0 0 1 7 3 .250 .368 .438 .806 1 4 3 -

4.7. 2013 WBC

2013 W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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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2 2 0 0 0 0 0 0 .000 .000 .000 .000 0 0 0 -
커리어 마지막으로 뽑힌 국가대표팀이 였으나 아무것도 못하고 국대 야구 암흑기의 시발점을 겪으며 1라운드 광탈 후 짐싸들고 귀국했다.


[1] 대구상고 투수 이영욱홍익대학교 야구부로 진학 후 졸업과 함께 SK로 입단했다.[2] 수술 후 공을 던졌더니 127km/h가 나왔다고 한다. 이 구속은 투수로는 굉장히 느린 구속이고, 야수로서는 충분히 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이기에 타자로 정착.[3] 즉 이진영 선수 경력 중 유일하게 20홈런을 친 시즌은 이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4] 다만 고타율의 성적을 기록했으나 경기수는 이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타석수도 그렇고 많이 부족한건 마찬가지다.[5] 현대 시절에 중견수-우익수로 출장을 많이했다. 단, 좌익수 수비에는 들어간적이 없다. 대신 그 자리에 이숭용이나 김인호 - 전준호 외에 여러 선수들이 들어갈때도 있었다.[6] 이호준은 이해와 그 다음해에는 선수 경력 시절 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들었어야 했다.[7] 당시 한화팬들에게 많이 까였었다. 이유는 어디서 듣보잡 선수가 잘하던 용병을 부상입혔다 라는 날조로 인해 선수시절 타팀팬들도 잘 안까던 박정권이였는데 유일하게 까인 시즌이다.[8] 이진영이 SK를 떠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고, SK 말기에 프런트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호준과 박정권 둘 다 SK의 2008년 한국시리즈 우승반지가 없던 이유가 이랬다.[9] 김성근 관련 서적 중에 이진영의 LG 이적 당시 비화가 있는데 LG의 보장 금액이 SK보다 10억 이상 많다는 전화 통화 내용이 있다.[10] 제안한 금액이 국내 구단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같은 금액이라면 말이 통하는 한국에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고.[11] 2017년 트레이드KIA 타이거즈로 간다.[12] 팀 자체에 대해 애정이 꽤 컸던 모양. 실제로 이진영은 정성훈과 더불어 FA로 영입된 타 팀 선수임에도 이진영 본인이나 팬들이나 LG 트윈스 프랜차이즈 의식이 강했던 몇 안되는 선수다.[13] 정확히는 1타점 2루타+좌익수 송구실책[14] 이진영의 은퇴 후 쌍방울에게 지명을 받은 선수까지 포함하면 박정권이 있으나 박정권은 쌍방울 소속이었다고 보기엔 애매한 것이 2000년 고등학생 시절 지명을 받긴 했지만 프로 입단 대신 대학에 진학했고 실제로 선수로 뛰게 된 건 쌍방울이 해체된 뒤 선수단이 SK로 인계된 후였다. 박정권은 쌍방울 유니폼을 입은 적도 없다. 당시에는 고졸 선수가 지명을 받은 후 대학에 진학해도 지명권이 유지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듬해 박정권도 은퇴하면서 쌍방울 지명 선수도 모두 은퇴했다.[15] 상대 투수는 봉중근. 당시 봉중근은 구위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16] 당시 2루주자 이와무라가 급한 마음에 3루를 돌아 홈에 들어오면서 스텝이 꼬여 넘어질뻔하는 행운도 있었다.[17] 이때 정근우의 슬라이딩도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18] 심지어 이때 이진영은 장염으로 인해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동점타를 치고도 1루에서 표정이 영 좋지가 않았다.[19] 참고로 이 점수는 후지카와 큐지가 국가대표로 뛰면서 내준 유일한 자책점이다.[20] 참고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WBC에서 기록한 첫 만루홈런이다. 14년 뒤 2023 WBC 대표팀은 졸전 끝에 탈락이 확정되고 중국 상대로 박건우, 김하성이 만루홈런 두 방을 쳐내면서 분풀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