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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억복

{{{#white 이억복(李億福)
자(字) 중수(仲綏)}}}
시조(始祖) 이신우(李申佑)
관향 원주(原州)
출생 중종 32년 1537년 10월8일
사망 선조 19년 1586년
관직 절위장군(折衛將軍)
수(守)함경남도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
배(配) 숙부인(淑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
슬하 4남
1. 개요2. 일생3. 가족4. 기타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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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름은 이억복(李億福)이요, 자(字)는 중수(仲綏)이며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이영화(李英華)의 증손(曾孫)이며 무장(茂長) 이남(李楠)의 셋째 아들이다.

2. 일생

아버지 무장(茂長) 이남(李楠)과 어머니 도강조씨(道康趙氏) 첨지(僉知) 조계문(趙繼紋)의 딸 사이에 셋재 아들로 중종(中宗 32년)丁酉 1537년 10월 8일 8남1여중 3남으로 태어났다.

1555년(丁卯) 명종(明宗 10)에 무과(武科)에 뽑혀 6진(鎭)의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정책(政策)이 간략(簡略)하고 명령(命令)이 엄숙(嚴肅)해서 변방(邊方)이 편안(便安) 하였으며 이억복(李億福)이 가는 곳 마다 변방의 백성(百姓)들이 서로 경계(境界)하기를 “행여 이장군(李將軍)의 경계(境界)를 범(犯)하지 말자,”라고 하였다고 한다.

1583년(癸未) 선조(宣祖 16)에 오랑캐가 침범(侵犯) 했을 때 북병사(北兵使)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이 문무관(文武官)에 특출(特出)한 인재(人材) 두 사람씩 천거(薦擧)했는데 문관(文官)으로는 김여물(金汝岉)과 서익(徐益)이요, 무관(武官)에는 이억복(李億福)과 유극량(劉克良)이었다.

1584년(甲申) 선조(宣祖 17)에 경원부사(慶原府使)의 교지(敎旨)가 내렸는데 부임(赴任)할 즈음에 임금이 친히 위로(慰勞)하기를 “요사이 변방이 소란(騷亂)하므로 그대로써 간성(干城)을 삼는다, 그런데 변방이 너무 황량(荒凉)하므로 시봉(侍奉)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하시고 왕손(王孫)인 진천군(晉川君) 부실(副室)의 딸로 부실(副室)을 삼아 보내주었다.

1586년(丙戌) 선조(宣祖 19)에 경원에서 남병사(南兵使)로 승진(昇進)되었다가 10월 28일 벼슬길에서 세상(世上)을 뜨시니 임금도 애석(愛惜)히 여겨 풍악(風樂)을 철폐(撤廢)하고 관원(官員)을 보내 제사(祭祀)를 지내게 하였다.

3. 가족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언양김씨(彦陽金氏) 통덕랑(通德郞) 김분(金雰)의 따님으로 4남을 두셨으니, 첫째 아드님은 이위(李渭)이고 승의랑(承議郞)이고 둘째 아드님은 이해(李海)로 승의랑(承議郎)이며 셋째 아드님은 이익(李瀷)으로 당상관(堂上官)이며 넷째 아드님은 이한(李漢)이고 병정교위(秉節校尉)충좌위랑장(忠佐衛郞將)이다.

4. 기타

아! 애석(愛惜)하여라 공의 실적(實績)에 대한 평판(評判)이 이뿐만이 아니련만 돌아가신지 7년 만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문헌(文獻)이 없어져 고증(考證)할만한 것이 없고 다만 금호(錦湖) 나사침(羅士沈)의 일기(日記)에 “이억복(李億福)은 당대(當代)에 명성(名聲)이 높은 무장(武將)으로써 당상(堂上) 품계(品階)에 까지 올랐으며 장차 장도(壯道)에 오르려다가 갑자기 병사(病死)했으니 그 가문(家門)의 불행(不幸)이기도 하다.”라고 쓰여 있다.

5. 참고문헌

원주이씨대동보(1991년)
나사침(羅士沈)의 일기(日記)
원주이씨 강릉공파의 인물과 유산(비천당/김성태 저/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