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13 23:41:38

이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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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추존 국왕
이안사|李安社
파일:목조.jpg
덕릉 전경
출생 1180년~1200년 추정
고려 전주목
사망 1274년 3월 10일
요양행성 경흥
능묘 덕릉(德陵)
재임기간 오동천호소 천호 | 다루가치
1254년 ~ 12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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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고려: 안사(安社)
: 소그차르(速出)
부모 부친 선조고
모친 선조비
형제자매 4남 중 장남
배우자 효공왕후
자녀 이행리 외 5남
묘호 목조(穆祖)
시호 목왕(穆王) →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 }}}}}}}}}

1. 개요2. 내력3. 생애4. 가계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1. 개요

조선의 추존 국왕.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이다.

개국 직후에는 목왕(穆王)의 시호만 가지고 있었지만, 내손자태종이 1411년에 묘호 목조(穆祖)를 올리고 시호를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으로 바꿨다.#

2. 내력

전주 이씨 시조 견성(甄城) 이한의 17세손으로 고려 중~후기 사람이다.[1] 이한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6대 문성왕 시대에 사공을 지냈고, 그와 태종 무열왕 10세 손[2]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 부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자연은 시중, 손자 이천상은 좌복야를 지냈다. 이천상은 아간을 지낸 이광희를 낳았고, 이광희는 사도 삼중대광 이입전을 낳았으며, 이입전 이후로 이긍휴, 이염순, 이승삭, 이충경, 이경영, 이충민, 이화, 이진유, 이궁진, 대장군 이용부를 거쳐 고려시대 내시집주 이린에 이르렀다. 이린은 무신정변의 제1대 집권자였던 이의방의 동생이었다. 이린은 대장군 이양무를 낳았고, 이양무는 상장군 이강제의 딸 이씨와의 사이에서 이안사를 낳았다.
시조 이한(翰) → 2세 이자연(自延) → 3세 이천상(天祥) → 4세 이광희(光禧) → 5세 이입전(立全) → 6세 이긍휴(兢休) → 7세 이염순(廉順) → 8세 이승삭(承朔) → 9세 이충경(充慶) → 10세 이경영(景英) → 11세 이충민(忠敏) → 12세 이화(華) → 13세 이진유(珍有) → 14세 이궁진(宮進) → 15세 이용부(勇夫) → 16세 이린(隣) → 17세 이양무(陽茂) → 18세 이안사(安社)

3. 생애

穆祖聞之, 遂徙居江陵道 三陟縣, 民願從而徙者, 百七十餘家
(中略), 適前日山城別監, 新除按廉使, 又將至。
穆祖恐禍及, 挈家浮海, 至東北面宜州 止焉。
民一百七十餘戶亦從之, 東北之民, 多歸心焉。
於是, 高麗以穆祖爲宜州兵馬使, 鎭高原以禦元兵。
時雙城以北, 屬于開元路。
元 散吉大王來屯雙城, 謀取鐵嶺以北, 再遣人請穆祖降元, 穆祖不得已率金甫奴等一千餘戶降。
散吉聞于元帝, 元爲立斡東千戶所, 給降金牌, 爲南京等處五千戶所, 首千戶、兼達魯花赤。_太祖實錄, 1 總書
①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이 소식을 듣고는, 드디어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70여 가(家)나 되었다.
전일의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새로 안렴사(按廉使)에 임명되어 또 장차 이르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 곧 덕원(德源)[3])에 이르러 살았는데, 백성 170여 호가 따라갔고, 동북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고려에서는 목조(穆祖)를 의주병마사로 삼아, 고원을 지켜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 쌍성(쌍성은 곧 영흥이다) 이북 지방이 개원로에 소속되었고, 원나라 산지 대왕이 와서, 쌍성에 둔 치고 있으면서, 철령 이북 지방을 취하려고 하여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나라에게 항복하기를 권하니, 목조는 마지못하여 김보노 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② 산지가 이 사실을 원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목조를 위해 오동천호소를 세우고 금패를 내려 주어 남경 등처 오천호소의 수천호로 삼고, 다루가치를 겸하게 하였다.
《태조실록》, 권 1 <총서>

《태조실록》에 따르면 원래 이안사는 20대 초반까지 본관인 전라북도 전주에서 살았다. 이 지역의 한 기생을 좋아했는데 하루는 그 고을 별감이 그 기생을 취했다. 그래서 화가 난 이안사는 별감에게 따졌고 싸움까지 일어났는데, 문제는 이 별감이 고을 현감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현감은 이 문제를 도지사급이었던 안렴사에게 알리는 바람에 이안사는 투옥될 위기에 처했다.[4] 그러나 당시는 몽골과의 혹독한 전란기였고, 호족들은 재산과 인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가병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가병들이 버티고 있어 안렴사는 직접 체포하지 못해 조정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안사는 조정에서 움직이기 전에 집을 정리하고 가솔과 가병, 재산과 자신을 따르는 백성 170여 호를 이끌고 강원도 삼척으로 떠났다. 백성 170호가 기꺼이 그를 따라나섰다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리더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5] 1호가 몇 명인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조선 초기의 법적 '호'는 표준적으로는 세금과 군역이 가능한 성인 남성인 '정'(丁) 3명을 뜻했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정' 2~5명 정도를 1호로 셌다. 그 이전에는 자연 호라 하여 한 가족을 통째로 1호로 세는 경우도 많았고, 이럴 경우 수십 명짜리 대가족도 1호로 셌다. 16세 이하의 아이와 여자, 노인[6]은 세지 않은 것이기에 170여호는 '정' 평균 3명으로 세어도 건장한 남자 500여 명+부양인구까지 1,000명은 넘고, 1호를 '정' 5명 이상의 자연 호로 간주할 시 수천 명이 넘는다. 아무리 명문 가문의 가주라지만 관직도 없는 일개 호족이 이렇게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먼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 가능했을 정도로, 당시 고려 중앙정부가 무신정권여몽전쟁을 거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조선 조정은 이에 대해 이안사의 덕망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7][8]

삼척에 정착한 지 1년 만에 아버지 이양무가 숨을 거두자 묏자리를 써야했고, 그때 지나가던 한 도승이 "소 100마리를 제사지내고 황금으로 관을 쓰면 5대에 제왕이 날 자리네."라고 말했다. 그러나 100마리 소를 잡을 길이 막막했던 이안사는 '백'(百)마리 소 대신 '흰'(白) 소를, 황금 대신에 금빛 귀리 짚으로 관을 써서 장사지냈다고 한다.[9]

그렇게 삼척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에 싸웠던 그 별감이 삼척의 안렴사로 임명되어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이안사는 그를 따른 170여 호를 데리고 다시 북쪽으로 더 이동하게 되었다.
셔ᄫᅳᆳ 使者(사자)ᄅᆞᆯ ᄭᅥ리샤 바ᄅᆞᄅᆞᆯ 건너시ᇙ제 二百戶(이백호)ᄅᆞᆯ 어느 뉘 청ᄒᆞ니
(현대어) 서울 사자를 꺼리시어 바다를 건너실 때에, 2백 호의 사람을 어느 누가 청하였던가.
(해석) 목조께서 서울에서 오는 사자를 피해 바다를 건너던 날, 목조를 따랐던 백성이 2백 호였습니다. 언제 누가 그들더러 '제발 같이 가 달라'고 해서 목조를 따라 갔겠습니까?
용비어천가 제18장

이번에 정착한 곳은 지금의 함경남도 원산에 해당되는 동북면 의주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원래부터 어느 정도 상당한 기반이 있었던 이안사를 의주 병마사에 임명하고, 몽골 군대와 싸울 것을 명했다.

이안사는 대몽항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고려 조정과 몽골 사이에서 저울질을 했다. 그러던 중 의주에서 가까운 화주[10]에 몽골 대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몽골 옷치긴 왕가의 산길 대왕(散吉大王)이 두 번에 걸쳐 회유했다. 이에 이안사는 백성 1,000여 호와 자신의 명성을 듣고 따를려고 평양에서 온 백성들을 이끌고 몽골에 투항했다.[11] 이 때가 고려 제23대 고종 41년, 1254년이었다.[12][13] 이후 1281년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가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여원 연합군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수도 개경을 방문하여 충렬왕(제25대)을 알현했을때, 몽골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여러차례에 걸쳐 계속 용서를 구했다. 훗날 1355년 이안사의 증손자인 이자춘이 입조하여 공민왕(제31대)을 알현하자, 공민왕은 "그대의 조부(이행리)와 부친은 몸은 비록 원나라에 있었으나, 그 본심은 고려에 있었다는 것을 내 조부(충렬왕)와 부친도 알고 계셨으니 총애하고 칭찬하셨다"고 말한 배경에는 1281년에 있었던 이행리와 충렬왕의 만남이 있었다.

이안사는 이후 두만강변의 개원로 남경 오동(斡東)[14]으로 이주했고, 그렇게 자리잡은 뒤인 1255년 5,000호 천호장(千戶長: 밍간)과 다루가치[15]의 지위를 몽케 칸으로부터 하사받았다. 윤은숙 강원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천호장은 고위 관리직으로 몽골족이 아닌 사람이 임명되는 일은 매우 드문데, 이는 사실상 옷치긴 울루스로부터 승인받은 군벌 세력이 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16]

다만 윤은숙 교수가 다루가치의 직위를 상당히 높게 평가한데 비해, 청나라의 학자 조익(趙翼)의 저서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17]에 따르면 다루가치는 '사무를 처리하는 관청의 장'을 총칭하는 자리로 문관과 무관을 가리지 않고, 관직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자리는 아니다. 지방 행정을 보는 관청에는 모든 행정단위에 다루가치 관직이 있었다고 한다. 다루가치가 특정한 지위가 아닌 사무를 관리하는 장의 총칭으로 갈수록 그 직명도 세분화되었으며, 다루가치가 '총독, 지사'의 의미로도 널리 쓰였기 때문에 쌍성 총관도 번역하면 다루가치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천호장(千戶長: 밍간) 중에서 이안사가 유일한 고려인은 아니었고, 함경도 정주(定州) 출신 탁청도 천호장 지위를 부여받았다.[18]

이렇게 오동 일대를 다스리는 관직인 오동천호 겸 다루가치에 임명된 이안사는 22년 동안 그 지위를 누리다 제24대 원종 15년인 1274년에 세상을 떠났다. 훗날 현손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하자 그를 '목왕(穆王)'으로 추존하면서 이안사의 무덤을 경흥부에 마했다. 이후 조선 태종 10년인 1410년에 함흥부 북서쪽에 있는 달단동 가평사로 이장되었고, 능호는 '덕릉(德陵)'으로 정해졌다. 1년 뒤에는 '목조(穆祖)'로 재추존되었다.



4. 가계

  • 부 : 이양무(李陽茂)
  • 모 : 삼척 이씨(三陟 李氏) - 상장군 이강제(李康濟)의 딸
    • 형제 : 영필(英弼)
    • 형제 : 영밀(英謐)
    • 형제 : 영습(英襲) - 주부공파

5. 대중매체에서

  • 2021년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에서는 '기생 때문에 야반도주한 인물'로 언급된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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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필(李英弼) · 이영밀(李英謐) · 이영습(李英襲) · 목조

[1] 이색의 이자춘 신도비명에는 전주 이씨의 시조로 이광휘가 언급이 되었는데, 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에는 3대가 더 추가가 되었다, 이는 조선왕조 건국 후 왕조의 신성함을 더 강조하기 위해 나중에 추가로 3대를 조작해 지어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가 있다. 출처: 李安社의 全州 出去에 관한 연구 6P 허인욱.[2] 조선왕조실록에서는 十世, 十世孫, 十代孫으로 혼용하였다. 그러나 각각 10세, 10세인 자손, 10대인 자손으로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10세, 9세손, 9대손으로 사용한다. 태종 무열왕은 시조 김알지의 16세(15대손)이고, 김은의는 시조 26세(25대손)이다.[3] 오늘날 함경남도(북한 기준으로 강원도) 원산시, 문천시이다.[4] 사실 이안사가 마음에 둔 그 기생은 '관기', 즉 관아의 노비였다. 엄연히 관의 소유였으므로 이안사가 떳떳할 이유는 없었다.[5] 물론 완전히 자발적이라는 건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자들의 미화일 수도 있다.[6] 성인 남성은 60세가 넘으면 군역과 세금에서 면제 처리를 해주기 위해 '정'(丁)이 아니라 '노'(老)로 분류를 바꾸어 주었지만, 여자와 아이는 아예 집계하지 않았다.[7] 조선 성종때 왕명으로 편찬한 우리나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대의 뛰어난 시, 문장, 상소, 교서, 묘지, 묘비, 서문, 인물전기, 여행전기 등을 선정해 수록한 조선왕조의 공식 문서모음집인 동문선 119권에는 이색이 지은 이자춘 신도비명이 수록되어 있다. 신도비명에 따르면 이안사가 삼척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백성들 170호가 따라갔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이후 어떤 사건으로 지현(지방 관리)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그 지현이 이안사를 해칠려고 하였고, 이에 어떤 이가 이안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이안사는 가족들만을 거느리고 몽고로 달아났다고 되어 있다.[8] 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에 적힌 것처럼 백성 1000호와 평양에서 이안사의 명성을 듣고 따를려고 찾아온 백성들을 거느리고 몽골에 투항했다는 이야기 역시 전혀 적혀 있지 않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왕조에서 나중에 이안사의 능력과 덕망을 실제와 다르게 조작했다고 의심해 볼 수 있다. 이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조선왕조에서 자신들의 공식문서모음집인 동문선에 이색의 이 글을 수록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9] 이안사가 사망한지 139년이 지나 조선 왕조가 세워졌을 때 왕실에서는 그때 이안사가 썼던 이양무의 무덤을 찾으려 했다. 구구한 지역들이 거론되는 가운데 수세기가 지난 1899년 7월 11일에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삼척의 '이양무묘'로 전하던(제4대 세종 때 처음 발견했다고 전하는 곳.) 무덤을 공식적으로 이양무의 무덤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무덤에 준경묘(濬慶墓)라는 존칭을 붙였다.# 물론 조선 왕조에서 그동안 공식적으로 그 곳이 이안사의 묘라고 선언하지 않은 이유는 이안사의 묘라는 증거나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500년이나 지나서 그 정체가 더 확실해질 이유는 없으니 고종이 황제를 선포하는 시기에 맞춰 시행된, 정통성 강화를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추정된다.[10] 훗날 쌍성총관부의 처소가 되는 쌍성이 바로 화주이다. 조선시대에는 영흥군이었다가 지금은 북한에 의해 금야군요덕군으로 갈라졌다.[11]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권1 <총서>[12] 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에는 이때 이안사가 마지못해 투항했다고 기록했지만, 4년후 조휘탁청 등이 동북면에서 고려 관리 신집평 등을 살해하고 화주 이북 지방을 몽골에 바치며 투항했을때, 조휘는 '총관' 직을, 조휘의 지휘를 받으며, 고려의 관리들을 죽이고 몽골에 투항한 탁청은 천호(千戶) 직을 몽골에서 하사받은 것을 고려하면, 탁청보다 훨씬 좋은 5천호소의 다루가치직을 받은 이안사는 단순히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몽골에 투항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친몽골 행위나 행위들을 해 몽골에 큰 공을 세웠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색의 이자춘 신도비명대로 그냥 가족들만을 거느리고 몽골로 달아나서 5천호소의 다루가치가 되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13] 참고로, 이 일대는 고려 정부에 대한 여론이 원래부터 안 좋았는지 곧이어 1258년에 조휘탁청의 반란에 의해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다.[14] 알동이라고도 읽는다.[15] 원나라의 지방관리[16] 이렇게 부여받은 천호장과 다루가치의 직위는 이후 1290년 제5대 세조 쿠빌라이 칸의 치세 때 옷치긴 울루스의 내분으로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익조)가 오동의 기반을 상실하고, 함흥부 평야로 이주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리고 이행리의 증손자 이성계 때까지 5대에 걸쳐 계속 세습되었다. 이러한 천호장과 다루가치라는 높은 직위는 이후 이성계의 전주 이씨 가문이 주변 지역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내로 흡수하고, 군벌로서 지속적인 성장을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17] 중국 고증사학의 명저로 꼽히는 서적이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11년에 걸쳐서 한국어로 번역했다.[18] 참고로 윤은숙 교수는 몽골로 유학을 떠나 몽골 역사연구소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며, 몽골인 학자와 함께 논문을 쓰는 등 몽골 역사학계의 영향을 받았다. 몽골 입장에서는 조선을 세운 국조가 자신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바람도 있었을 것이다.[19] 목조부터 환조까지 추존 왕들의 자식들의 봉호는 나중에 1872년 12월에 조선고종이 추증했다.[20] 이 사람의 후손으로 사상의학의 창시자 이제마, 소설가 이효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