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이브라힘 루고바 Ibrahim Rugova | |
출생 | 1944년 12월 2일 유고슬라비아 민주 연방 코소보 세르체 |
사망 | 2006년 1월 21일 (향년 61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프리스티나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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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정치인, 학자, 작가 |
당적 | 코소보 민주동맹 |
1. 개요
코소보의 정치인, 전 대통령, 작가. 별명은 발칸의 간디이다.2. 초기 생애
1944년 알바니아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불가리아군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철수한 이후 공산주의 계열 파르티잔들에게 처형당했다.루고바는 프리슈티나 대학교와 파리 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했으며 점점 민족주의에 관심을 가지며 고대 코소보 지방에 있었던 다르다니아 왕국의 복원을 강조했다. 그는 알바니아인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에 가입했고 활발한 작품활동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유고슬라비아 작가협회 회장까지 올랐다.
3. 정치 경력
1989년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코소보의 자치권 박탈을 추진하자 루고바는 코소보 민주연맹을 창당하여 코소보의 자치권 박탈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을 벌였다. 원래 또다른 코소보 민족주의자 작가인 렉세프 코스자가 코소보 민주연맹 대표로 거론되었지만 그의 거부로 루고바가 대타를 뛰게 된 것이다.코소보 민주연맹은 곧바로 코소보 전역은 물론 전세계에 흩어진 알바니아인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확보했으며 1992년 세르비아와 별개로 임시정부 선거를 치러 루고바를 대통령으로 추대한다. 세르비아는 선거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했고[1] 코소보 민주연맹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루고바는 평화주의적인 투쟁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다. 밀로셰비치 역시 루고바를 탄압했다가 코소보 전체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고바를 출국금지시키거나 수배하는 등의 엑션은 취하지 않았다. 이 둘은 밀로셰비치-루고바 협정이라는 교육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전쟁이 끝나자 과격파 민병대였던 코소보 해방군이 힘을 얻게 되었고 루고바는 이들과 대립하며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랑부예 회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코소보 내전이 발발했고 루고바는 로마로 추방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한 루고바는 귀국 후에도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코소보 민주연맹은 정치적 라이벌인 하심 타치의 코소보 민주당을 누르고 코소보의 제1당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루고바는 코소보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지향했으며 코소보 해방군의 사령관이던 라무쉬 하라디니즈를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등 국민통합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4. 사망
2005년 8월 30일, 그는 폐암으로 코소보 내 미군기지인 캠프 본드스틸에서 치료를 받다가 독일 란트스톨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2006년 1월 21일, 미국인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다가 영면에 들었다.5. 기타
- 코소보 내에서는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로 프리스타나 시내에는 루고바의 동상이 있다.
- 생전 다르다니아 왕국의 재건에 관심이 많았으며 직접 다르다니아 국기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 엄청난 골초였다.
- 특이한 버릇으로는 회담 이후에 광물 표본을 선물로 주는 버릇이 있었다. 큰 광물을 줄수록 만족스러운 회담이었음을 나타냈다고 하며 이때문이 코소보를 방문한 외교관들은 루고바가 선물로 주는 돌 크기에 전전긍긍했다고…
- 2005년 3월, 암살 시도를 겪었다.
[1] 코소보 민병대가 루고바의 반대파를 탄압했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