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움베르토 노빌레 Umberto Nobil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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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5년 1월 21일 이탈리아 왕국 라우로 |
사망 | 1978년 7월 30일 이탈리아 로마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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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조종사, 탐험가, 항공 엔지니어, 정치인 |
1. 개요
이탈리아의 군인, 조종사, 탐험가, 항공 엔지니어, 정치인.2. 생애
처음에는 철도 기사였으나, 군의 의뢰로 비행선 제조에 종사하였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과 함께 비행선 노르게호(號)로 북극을 탐험, 1926년 5월에 극점을 통과하여 북극해 횡단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동행했던 아문센과 당시 엄청난 갈등을 빚으며 원수 지간이 되고 말았다. 아문센의 주장에 따르면 노빌레는 이탈리아군 장교인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면서 협의를 거부하기 일쑤였고, 이탈리아인, 노르웨이인 하는 식으로 차별을 했다고 한다. 아문센은 이후 1927년에는 우라니엔보르그에 칩거하면서 자서전 "탐험가로서 나의 삶"을 집필했는데, 어찌나 노빌레한테 불만이 많았던지 이 책에서는 자서전 전체의 ⅓ 이상을 노빌레와 있었던 갈등을 언급하는 데 할애하기도 했다.1928년 5월 비행선 이탈리아호로 두 번째의 북극 탐험을 시도하였으나 극점을 통과한 얼마 뒤에 비행선이 조난되었다. 그를 비롯한 승무원은 구조되었으나, 구원에 나선 아문센이 도리어 사망하였다. 북극 통과 비행은 무난히 마쳤으나, 북위 81도 선상에서 이탈리아호가 추락하여 조난당해버린 것이다.
노빌레의 구조 과정은 당시 파시스트 이탈리아 언론의 정치적인 윤색과 선동 등으로 논란이 많았다. 조난과 구조 당시 노빌레의 편지는 검열되었다. 이탈리아의 언론들은 노빌레를 연일 비난했다. 노빌레는 이탈리아에 돌아온 후 불만을 토로했고, 무솔리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참사의 책임은 모두 노빌레에게 전가되어 부하들을 버렸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노빌레는 사임한 후 이탈리아를 떠났다.
1931년부터 소련의 비행선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4년 간 도움을 줬다. 1939년부터는 미국 일리노이주 루이스 대학에서 항공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이탈리아 공군은 전의 사고 관련된 혐의를 모두 무혐의로 인정하고 중장으로 진급시키며 복직시켰다. 1946년에는 이탈리아 제헌 국회의원이 되어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 초안 작성에 도움을 줬다. 이후에는 은퇴할 때까지 고향 나폴리 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책을 써냈다.
노르웨이에서는 전술한 아문센의 자서전 내용에 더불어 아문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여 노빌레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1978년에 사망했다. 로마 외곽 비냐 디 발레에 있는 이탈리아 공군 박물관에는 노빌레를 기념하는 대규모 상설 전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