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01:20:09

왕선(원나라)


1. 개요2. 생애
2.1. 치수 사업에서 성과를 거두다2.2. 홍건적을 토벌하다2.3. 서달에게 토벌당하다

1. 개요

王宣
(? ~ 1367)

왕선은 원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벌로, 양주(揚州) 흥화현(興化縣) 사람이다. 그는 기주(沂州)에 근거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지만 명나라의 북벌 과정에서 명나라군의 침공을 가장 먼저 받게 되었고, 결국 명나라의 대장군(大將軍) 서달에게 토벌당하게 된다.

2. 생애

2.1. 치수 사업에서 성과를 거두다

왕선은 원래 회동(淮東) 지역의 호민(豪民)으로 명성을 얻었고, 그로 인해 출사하여 사농연(司農掾)의 관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원나라 순제(順帝) 시기에 황하의 제방이 무너져서 강물이 범람하는 일이 발생하자 행성(行省)에서는 회하, 양주 일대에 거주하는 인재들을 모집하였고, 행성의 관리들은 백성들 중에서 장정인 자들을 모집하여 물길을 깊게 파내서 범람을 막으려고 하였다. 왕선은 이때 앞장서서 스스로를 천거하여 행성의 치수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행성에서 왕선의 관직을 회남북도원수부도사(淮南淮北都元帥府都事)로 승진시켰다. 그 후에 왕선은 화폐를 모아서 양주의 시장에서 파는 대나무 껍질을 사들여 이후의 범람에 대비하였으며, 자신이 관할하는 도원수부에서 일할 장정들도 모집하였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자 왕선은 3만여 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게 되었고, 또 그로부터 수개월 후에 양주의 치수 공사를 끝마쳤다.

2.2. 홍건적을 토벌하다

왕선이 치수 공사를 끝마친 무렵에 서주(徐州)의 홍건적 수령 형마이(滎麻李)가 서주성을 근거지로 삼아서 반란을 일으키자 행성에서는 왕선을 초토사(招討使)로 삼아 반란을 평정하게 하였는데, 그는 승상 탈탈(脫脫)과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야속(也速)을 따라 반란을 평정하고 서주를 회복하였다. 이 공으로 인해 왕선은 반란을 토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회남회북의병도원수(淮南淮北義兵都元帥)에 발탁되어 회하 지역의 의병들을 모두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 왕선은 의병들을 이끌고 마릉(馬陵)을 지켰으며, 등주(滕州)[1]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반란까지 진압하고 그곳까지 수비하였다. 왕선은 홍건적과 전투를 벌이면서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때는 병사들을 시켜서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그 결과 군량이 풍족해졌다. 왕선은 그 뒤에 산동(山東)의 익도(益都)[2]로 군대를 옮겨서 그곳을 지켰는데, 홍건적의 장수 전풍(田豐)이 익도를 노략질하자 아들 왕신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에게 파견하여 그를 도와 전풍을 토벌하게 하였다. 산동의 홍건적이 평정되자 왕선과 왕신은 기주로 회군하여 그곳을 지켰고, 원나라 조정에서는 왕선 부자의 공을 논하여 두 사람을 모두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승진시킨다. 1367년 10월 3일[3]에 원나라 조정에서는 왕선에게 사도(司徒)의 관직과 기국공(沂國公)의 작위를 더해주니 왕선의 벼슬은 극품(極品)에 이르게 되나, 그는 머지않아 몰락하게 된다.

2.3. 서달에게 토벌당하다

1367년 10월 21일[4], 장사성까지 제압하여 강남을 장악한 명나라의 태조(太祖) 주원장은 서달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25만 대군을 내주면서 중원(中原)을 향하여 북벌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왕선이 지키는 기주는 명나라의 북벌군을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러나 서달은 처음에 기주를 무력으로 함락시킬 생각이 없었기에 곧바로 기주로 진격해오는 대신에 회안(淮安)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그와 동시에 왕선에게 편지를 보내서 왕선 부자를 회유하려고 하였다. 왕선은 결국 서달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에게 항복을 청하니 명나라에서는 왕선을 강회행성평장정사(江淮行省平章政事)로 삼았다.

왕선은 대외적으로 서달에게 항복을 청하였지만 그는 애초부터 명나라에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왕선은 겉으로는 서달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그를 배반하려 하였다. 왕선은 비밀리에 왕신을 동쪽으로 파견하여 거주(莒州)[5], 밀주(密州)[6] 등의 고을들에서 의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원외랑(員外郞) 왕중강(王仲剛)과 며느리[7] 및 부로(父老) 풍(馮)씨 등을 서달의 군대에 보내서 맛난 음식으로 명나라군을 대접하게 하였고, 이로써 서달을 안심시키려 하였다.

서달이 대접을 받은 뒤 역주(嶧州)[8]를 무너뜨리기 위해 진격하니 왕중강 등은 기주성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왕선은 본색을 드러내어 병사들을 이끌고 기주성에 남아있던 명나라의 사신 서당신(徐唐臣)을 겁박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당신은 겨우 목숨을 건져 서달에게 달아나 일의 전말을 알리니 서달이 즉시 회군하여 기주성을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서달이 급하게 공격해온 탓에 왕신이 모병한 증원군도 기주성으로 오지 못하였고, 서달이 도독(都督) 풍종리(馮宗里)를 시켜서 기주성에 수공(水攻)까지 퍼붓는 등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성을 공격하자 왕선은 서달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성문을 열어서 항복하니 이날이 1367년 11월 10일[9]이었다.

서달은 기주성을 무너뜨리자 왕선으로 하여금 그의 아들 왕신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게 하였다. 왕선이 편지를 쓰자 서달은 항장(降將) 손유덕(孫惟德)에게 그 편지를 주고 왕신을 설득하게 하였지만 왕신은 오히려 손유덕을 죽이고 그의 형 왕인(王仁)과 함께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가 있는 산서(山西)를 향하여 달아나버렸다. 왕선에게 배신을 당한 것도 모자라서 손유덕까지 죽임을 당하게 되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서달은 왕선을 직접 잡아다가 몽둥이로 때려죽였으며, 왕중강 등도 모두 죽여버렸다.
[1]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덩저우시(滕州市)[2]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칭저우시(靑州市) 일대[3] 양력으로는 10월 26일[4] 양력으로는 11월 13일[5] 오늘날의 산둥성 르자오시(日照市) 쥐현(莒縣)[6] 오늘날의 산둥성 주청시(諸城市) 일대[7] 왕신의 아내이다.[8] 오늘날의 산둥성 짜오좡시(棗莊市) 이청구(嶧城區) 일대[9] 양력으로는 1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