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09:22:39

와세다대학/도몬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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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조직
정치경제학부, 이공학부 연구과,
국교학부 SILS 등 그 외 다수
입학 후 대학 생활 정보 동문 교우회 도몬카이
[稲門会]
캠퍼스 관련 상세 정보
와세다-게이오 라이벌 정기전 소케이센 [早慶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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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와세다 한인 동문
2.1.1. 한인 교수
2.2. 와세다 일본 현지 동문
2.2.1. 일본인 교수
2.3. 그 외 국가의 동문2.4. 중화권 동문2.5.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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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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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와세다대학의 도몬카이 (稲門会) (한국식으로 주로 도문회 혹은 도몬회라고도 함)와 일본 외 국가 동문에 대해서 나열한다.

2. 상세

  • 도몬카이의 영향력이 큰 이유는 와세다대학이 일본에서 학생수가 두 번째로 많은 대학[1]으로, 특히 문과 계열의 학생수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맘모스학교라는 별명이 있다.
  • 와세다대학 문서에서 언급되었듯 2020년대 일본 최고의 부자인 야나이 타다시 패스트리테일링(유니클로) 사장도 와세다 출신이다. 와세다 시절 야나이 다다시는 젊은 세대를 휩쓴 히피와 록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일을 안하고 평생 잘 먹고 잘 살지 와세다대학에서 고민하다가 최고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 개교 2년 뒤인 1884년에 두 명의 조선인 유학생을 받아들인 것을 시작으로 여러 한국인들이 와세다대학을 거쳐갔다. 상기의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삼성 이병철 초대회장, 박태준, 롯데 신격호 회장[2], 신익희, 이광수, 송진우, 양주동, 김성수 등 많은 유명인물을 배출하였다. 그 당시 와세다대학에 한국인이 상당히 많았던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구제고등학교의 졸업장이 필요했는데, 당시 조선에는 구제고등학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조선인들은 와세다대학과 같은 사립대학에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학교 홍보 차원에서 열심히 밀고 있다.[3] 영화 노르웨이의 숲 사전 시사회까지 열었을 정도[4]. 2021년에는 새로 개관한 국제문학관이 '무라카미하루키 라이브러리'라는 이름으로 헌정되었는데, 평소 공개 활동을 꺼리는 무라카미가 찾아 화제가 되었다.
  • 오타쿠계의 정신적 대부인 아즈마 히로키를 처음부터 문화구상학부 정교수로 받아들인 일이나, 그 외 이런저런 행보를 보더라도 현재 이슈나 화젯거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열심히 움직이는 활동적인 학교이다.

2.1. 와세다 한인 동문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유니온센터빌딩 1710호[8]에 위치한 와세다대학 한국교우회[9]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와세다 메인 캠퍼스 안에 한국 전통양식의 “한종각(韓鐘閣)” 및 내부에 성덕대왕신종[10]의 복제인 “한국의 종”을 설치하기도 했다. 1982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김창성 전방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 한국인 동창회원들이 제작해 기증한 것으로 와세다대학 캠퍼스 공원 내 설치돼 있다. # 당시 와세다 한인동문들은 “마치 독립운동을 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고 소회 2000년대 삼성 이건희 회장, 롯데 신격호 회장 등이 수십억원의 와세다대학 모교한인장학금 기부를 하기도 했다. 2023년 기준 약 1만여명의 한국인이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교우회와 마찬가지로 1947년도에 만들어져 2021년부터 대학 공인 서클로 인정받은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와세다대학 한국인학생회도 있다. #

2.1.1. 한인 교수

이성시 - 재일교포 와세다대 교수 (1995-2023).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 역임 #

2.2. 와세다 일본 현지 동문

2.2.1. 일본인 교수

2.3. 그 외 국가의 동문

2.4. 중화권 동문

  • 쑹자오런 - 중국의 혁명가, 정치가 - 宋教仁 (Sòng Jiàorén) - 대한민국 건국훈장 - 송교인
  • 리다자오 - 중국 국가 설립 핵심 멤버 - 李大钊 (Lǐ Dàzhāo) - 이대조
  • 천두슈 - 중국 국가 설립 핵심 멤버 - 陈独秀 (Chén Dúxiù) - 진독수 #
  • 인루겅 - 중화민국의 외교관
  • 펑파이
2021년 중국 당 창립 100주년에 주목…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한 주요인물 2명은

하기는 편의상 한어병음 및 한국 한자 직독을 추가하였다.[22]
  • 랴오중카이 (廖仲恺) (Liào Zhòngkǎi): 요중해 - 혁명 지도자,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역임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 재정부 장관, 노동부 장관
  • 랴오청지 (廖承志) (Liào Chéngzhì): 요승지 - 중국 당원, 외교가
  • 진쇼푸 (金硕甫) (Jīn Shuòfǔ): 김석보 - 통련회 회원, 혁명가, 중화민국 창립자 중 한 명
  • 양룬바이 (杨沦白) (Yáng Lúnbái): 양륜백 - 통련회 회원, 혁명가, 중화민국 창립자 중 한 명
  • 시에츠 (谢持) (Xiè Chí): 사지 - 통련회 회원, 혁명가, 중화민국 창립자 중 한 명
  • 자오톄차오 (赵铁桥) (Zhào Tiěqiáo): 조철교 - 통련회 회원, 혁명가, 중화민국 창립자 중 한 명
  • 천슈윈 (陈漱云) (Chén Shùyún): 진수운 - 통련회 회원, 혁명가, 중화민국 창립자 중 한 명
  • 양자오롱 (杨兆容) (Yáng Zhàoróng): 양조용 - 통련회 회원, 혁명가, 중화민국 창립자 중 한 명
  • 리친허 (李琴鹤) (Lǐ Qínhè): 이금학 - 통련회 회원, 혁명가, 중화민국 창립자 중 한 명
  • 진리치우 (金丽秋) (Jīn Lìqiū): 김려추 - 통련회 회원, 혁명가, 중화민국 창립자 중 한 명, 중화민국 초대, 2대 쓰촨성 참의원
  • 진메이링 (金美龄) (Jīn Měilíng): 김미령 - 전 중화민국 총통부 국책 자문
  • 청종모 (城仲模) (Chéng Zhòngmó): 성중모 - 공법학자, 전 중화민국 사법원 부원장, 대법관
#

2.5. 작품


[1] 모든 인원을 합친 학생 수로 와세다대학은 전국 2위를 기록하고 있다.[2] 이병철을 와세다 선배로 대했다고 한다.[3] 정작 무라카미는 자신의 수필집에서 말하길 자신이 와세다대학에서 얻은 것은 지금의 아내밖에 없다고 했으며, "우리 때 와세다대학 문학부에서 뛰어난 인재라고 할 만한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 때 와세다대학 문학부는 적당히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해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취직을 하려고 찾아갔더니 면접위원이 안됐지만 와세다대학 문학부 가지고는 안되겠네라고 해서 당황했다." 등 대학 측에서 들으면 민망할 소리만 줄줄이 늘어놓고 있다. 그래도 학교에 대한 애증은 교차하는 모양이라기보다는 그가 대학을 다녔던 1960년대의 시대적 상황(전공투 등 운동권)을 꼬집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학생운동 시기에 와세다 대학 캠퍼스 곳곳은 지하 저항서클들이 엄청나게 활발히 움직이던 때였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소설가 나카가미 켄지는 와세다대학 재학생도 아니고 와세다대학 근처 재수학원생이었는데도, 와세다대학의 지하 서클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4] 일본 시사회를 2군데에서 했는데 한 군데가 와세다대학, 다른 한 곳은 주일 노르웨이 대사관이었다고 한다.[5] 뭐 부정입학 의혹으로 결국엔 중퇴하여 본인에게는 흑역사.[6] 진짜로 별명이 손수건 왕자(ハンカチ王子)다.[7] 닌코 덴노에 의해 세워진 학교로, 본래 황족과 화족을 위한 관립학교였다. 패전 후 사립학교로 전환되고 평민에게도 개방되었으나, 여전히 황족들은 모두 가쿠슈인에서 공부했다.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전 과정을 다 갖추고 있다.[8] 와세다 한국교우회가 매입함[9] 한국동창회에서 2003년 명칭 갱신[10] 일명 에밀레종[11] 당시 직함명은 주무이사였다.[12] 명예[13] 파일:D64D1B7E-67B8-421C-8C97-545829FA6943.jpg 2019년 협찬 내역을 공개하기도 했다. 정경 학사, 이학 학사, 문학 학사, 상학 학사, 상학연구과 (석사), WBS MBA 등 동문이 기부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14] 한국 미술사의 허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수준 높은 유물을 다수 수집하였다. 이 사람의 수집품 중 현재까지 지정문화재만 50점(국보 12점, 보물 32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과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신윤복 필 미인도 등이 유명하다) 가까이 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을 만들었으며, 1945년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15] 특명교수란 특정학부에 소속되지 않고 대학본부에 직접 소속돼 연구 또는 강의하는 교수를 말하는 것이지 특임교수가 아니다.[16] 김 전 대통령의 와세다에서의 마지막 강연은 2009년 10월 27일. 일본어가 굉장히 능통했다. 2분38초부터 김 전 대통령 인터뷰 참조.[17] 김영삼 전 대통령은 와세다대 교우회 규칙 제2장 정회원 제 6조에 의해 교직원 교우 및 4에 해당한다. 와세다의 정식 동문이 맞다. Waseda Alumni[18] 일본 3대 중창단 중에는 멤버 전원이 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인 다크 덕스도 있었다.[19] 와세다대학 최악의 흑역사 2[20] 130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21] 영국 귀화 출신이다.[22]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전 청나라 및 중화민국 인물에 대해서는 한자 직독으로 기재하는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