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28 08:06:41

온양 정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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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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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be673> 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신라 6성 {{{#!wiki style="margin: -1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60><tablebordercolor=#ecd8e9> 溫陽 鄭氏
온양 정씨
}}}
<colbgcolor=#710048><colcolor=#ecd8e9> 관향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
도시조 지백호(智伯虎)
시조 정보천(鄭普天)
집성촌
인구 29,761명(2015년)
링크 온양정씨충정공파종중

1. 개요2. 분파3. 항렬4. 인물

1. 개요

온양군(現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 일대)을 관향으로 하고 정보천(鄭普天)을 기세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

온양 정씨 역사

온양 정씨(溫陽鄭氏)의 시조 정보천(鄭普天, 900년생)은 고려 초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책록되었다고 한다. 정보천은 사로(斯盧) 진지부촌장(珍支部村長) 지백호(智伯虎)의 34세손이고, 아버지는 정사맹, 어머니는 면천 복씨(卜氏)이며, 외조부는 복지겸(卜智謙)이라고 한다.

10세 정희, 11세 정진, 12세 정득진은 조선의 벼슬을 거부하고 고려에 충절을 지켜 두문절사(杜門節死) 하였다. 12세손 정득량(鄭得良)의 손자인 정충기(鄭忠基)가 1450년(세종 3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1] 정충기의 손자인 정순붕(鄭順朋)은 1504년(연산군 10)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에 이르렀고,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온양 정씨는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 43명, 우의정 2명(정순붕·정만석), 공신 1명을 배출하였다. 정유(지중추부사), 정예남(영중추부사), 정뇌경, 정광진(대사헌), 정기안(지중추부사), 정유악(형조판서), 정민시(이조판서), 정광한(예조판서), 정창순(예조판서), 정태호(이조판서) 등 10명이 정2품에 올랐고, 정뇌경(충정), 정기안(효헌), 정민시(충헌), 정만석(숙헌) 등 4명이 시호를 받았다.== 역사 ==


▣ 온양 정씨 시조 : 정보천(鄭普天)

온양(溫陽) 시조(始祖) 보천(普天)은
新羅 52대 효공왕(孝恭王)4년(西紀 900年)에 誕生하시고,
高麗 太祖 王建 17년(西紀 934年)에 湯井候로 策錄(35세) 되었다.

서기 900년 탄생하시여,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하여
정희공(貞僖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책록(策錄)되었고,
고려 호부상서(戶部尙書)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온양정씨(溫陽鄭氏)의 시조(始祖)가 되시었다.

공께서는 서기 900년 탄생하시여,
일찍이 향년 35세에 고려 태조 왕건 17년(서기 934년)에
탕정후(湯井侯, 侯爵)에 책록(策錄)을 받으시고,

만년에 정희공(貞僖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책록(策錄)되었고,
고려 호부상서(戶部尙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온양정씨(溫陽鄭氏)의 시조(始祖)가 되시었다.

또한 고려 태조(太祖)때에
부친인 정사맹(지백호 33세)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 사도(司徒)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歷任)하시고, 배위(配位)는 복씨(卜氏)로 부(父)는 복지겸(卜智謙)이시다.
정사맹(지백호 33세)의 2째 아드님이시다.


▣ 정보천(鄭普天)의 부친 정사맹(鄭師孟)
정사맹(鄭師孟)(高麗) (지백호 33세, 三韓壁上功臣 門下侍中)
사찬(沙飡) 정우성(鄭友聖)선조의 큰아들이며, 태조(太祖)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사도(司徒)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歷任)하였다.

배위(配位)는 복씨(卜氏)로 부(父)는 복지겸(卜智謙)이니,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고려(高麗)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홍 유(洪 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은 일등(一等)에 책훈(策勳)되었고, 그 후(後)에 공신(功臣) 홍 유(洪 儒), 복지겸(卜智謙), 유흑필(庾黔弼)을 태조묘(太祖廟)에 배향(配享)하였다.

▣ 정보천(鄭普天)의 조부 정우성(鄭友聖)
정우성(鄭友聖) (지백호 32세, 沙湌 侍中)
아찬(阿湌) 정사량(鄭駟良)선조의 큰 아들이며, 사찬(沙湌)을 역임(歷任)하였다. 공(公)은 서기(西紀) 920년 경명왕(景明王) 4년에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과 함께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하여,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을 역임(歷任)하였고, 배위(配位)는 손씨(孫氏)로 부(父)는 이척찬(伊尺飡) 손 숙(孫 叔)이다.
 
☜ 정우성(鄭友聖)선조와 재종형제간(再從兄弟間)이며,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歷任)한 정교림(鄭僑林)선조는 동래인(東萊人)이 되어, 그 후손(後孫)인 신라(新羅)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역임(歷任)한 정회문(鄭繪文) 선조가 동래정씨(東萊鄭氏) 시조(始祖)가 되었다.


▣ 온양 정씨 - 본관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 연혁

온양(溫陽)은 충청남도 아산시(牙山市)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이었다.

671년(신라 문무왕 11)에 탕정주(湯井州)로 승격되어 총관(摠管)이 파견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탕정군으로 강등되었으나 음봉현(陰峰縣)·기량현(祈梁縣)·평택현(平澤縣)을 영현으로 관장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에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 현으로 강등되었다. 1414년(태종 14)에 신창(新昌)과 병합하여, 온창현(溫昌縣)이라 이름을 바꾸었다가 1416년에 다시 온수현을 분리하였다.

1441년(세종 23)에 왕이 온천에 행차한 후 병에 차도가 있어 온양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이후에도 역대 왕들은 이곳 온천에 자주 행차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홍주부 온양군이 되었고, 1896년에 충청남도 온양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온양군은 아산군·신창군과 함께 아산군으로 통합함으로써 폐지되었다. 1941년 관할 군내면·서면·읍내면을 합해 만든 온양면이 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 인근지역을 편입해 면적을 확장하던 온양읍이 1986년에 시로 승격, 아산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온양시와 아산군을 통합하여 아산시가 되었다.


▣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공훈 – 온양 시조 정보천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유금필 장군의 역할과
유금필 장군이 후백제를 격파하여 후삼국 통일의 기초를 다진 정보천(온양 시조)의 공로에 “탕정후작”을 수여(934년)하고, 고려 호부상서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후에 “정희공작”의 칭호를 수여하였다. 또한 유금필은 죽어서 태조 왕건의 배향공신이 되었다.

(주요 내용)
1. 공산(대구) 전투(927년)
2. 고창(안동) 전투(930년)
3. 운주성 전투(934년)

● 대구 공산 전투에서 목숨만 살아온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 고려 1대, 918~943)은
후백제 견훤이 공산 전투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전주에서 보충한 병력과 함께 개성으로 진격함을 방어하기 위하여,
후 고구려의 왕 궁예(弓裔, ?~918)의 마군 대장이었던 유금필 장군에게 2,000기병으로 급히 탕정 지역에서 방어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당시 그 지역을 다스리던 정보천의 제반 협조와 정보에 의하여,
탕정 지역에 막사를 짓던 후백제 견훤군을 몰살 시킴으로써,
다시 삼국 통일의 승기를 고려가 가져오고, 이어서 고창전투, 운주성 전투로 사실상 삼국통일을 기초를 확실히 함으로써 온양 정씨 시조 정보천에게 “탕정후”를 태조 왕건 17년(934년)에 수여하게 되었다.

2. 분파



▣ 정득진(12세손, 두문절사) → 三登公派
▣ 정득전(12세손) → 府使公派
▣ 정득량(12세손) → 少尹公派
◈ 정포(13세손) → 高城公派
◉ 정충근(14세손) → 正郎公派
▶ 정예종(16세손) → 水使公派
▶ 정인조(16세손) → 禁衛公派
▶ 정순조(16세손) → 通政公派
◉ 정충본(14세손) → 司直公派
◉ 정충기(14세손) → 持平公派
▶ 정수붕(16세손) → 桂香堂公派
▶ 정백붕(16세손) → 叢桂堂公派
▶ 정순붕(16세손)
♣ 정렴(17세손) → 北窓公派
♣ 정적(17세손) → 琴松堂公派
♣ 정담(17세손) → 十竹軒公派
▶ 정구붕(16세손) → 僉正公派
◉ 정충간(14세손) → 校理公派
◈ 정대(13세손) → 判官公派

▣ 정주(11세손) → 展力公派
▣ 정유(17세손) → 溫溪君公派
▣ 정희번(18세손) → 溫城君公派
▣ 정희(10세손, 두문절사) → 大司成公派

3. 항렬

26세 ○우(愚)
27세 ○교(敎)
28세 ○호(好)
29세 ○영(永)
30세 낙(樂)○
31세 ○희(熙)
32세 재(在)○
33세 ○진(鎭)
34세 해(海)○
35세 ○식(植)
36세 형(熒)○
37세 ○균(均)
38세 종(鍾)○
39세 ○순(淳)
40세 동(東)○
41세 ○섭(燮)
42세 기(基)○
43세 ○현(鉉)

4. 인물


● 정득량(鄭得良, ? ~ 1412년) : 12세손. 고려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역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에 이르렀다. 묘는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조읍리. 配 貞敬夫人 晉州姜氏.
● 정수붕(鄭壽朋, 1474년 ~ 1534년) : 1494년(성종24) 사마시에 급제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지냈다.
● 정백붕(鄭百朋, 1478년 ~ ) : 정수붕의 동생. 1504년(연산군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헌대부 형조판서에 이르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 정순붕(鄭順朋, 1484년 ~ 1548년) : 연산군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工曹)·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거쳐 중종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을 때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소윤(小尹)으로서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활약했다. 그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이 되고 우찬성겸지경연사(右贊成兼知經筵事)에 승진하여 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이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 정귀붕(鄭龜朋) : 152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金化현령을 역임하고, 중직대부(中直大夫)에 올랐다.
● 정렴(鄭磏, 1506년 ~ 1549년) : 정순붕의 아들.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유의로서 1544년 중종의 병환에 약을 짓기 위하여 내의원제조들의 추천을 받아 입진(入診)하였다. 처방을 모아 『정북창방(鄭北窓方)』을 편찬하였다.
● 정현(鄭礥) : 1545년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올라 사섬사직장(司贍寺直長)이 되었으며 1551년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가 되고 다음해 대호군을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이르렀다.
● 정창순(鄭昌順) : 1757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정조 때 대사간, 대사헌(大司憲),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 정예남(鄭禮南) : 1596년(선조 29)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를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 어의(御醫)로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의학에 밝아 허준(許浚) 등과 의방신서(醫方新書)의 편찬에 착수했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하였다. 육가잡영에 그의 시(詩)가 전한다.
● 정뇌경(鄭雷卿, 1608년 ~ 1639년) : 정순붕의 현손. 1630년(인조 8)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좌랑, 수찬, 지평, 정언 등의 언관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배종하여 심양(瀋陽)에 갔다가 참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사후 의정부(議政府)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
● 정유악(鄭維岳, 1632년 ~ ?) : 정뇌경의 아들. 1666년(현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하여 좌승지(左承旨), 공조참판(工曹參判),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고,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에 남인(南人)으로서 극변에 안치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등용되었고, 이듬해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진도(珍島)에 안치되었다가 1697년 전리에 방귀, 1699년 방송(放送)되었다.
● 정광한(鄭光漢, 1720년 ~ 1780년) : 175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정조(正祖)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 정기안(鄭基安, 1695년 ~ 1767년) : 정순붕의 6대손. 1728년(영조 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66년(영조 42) 한성부 우윤·지중추부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저서로 1834년(순조 34) 아들 정만석이 편집·간행한 『만모유고(晩慕遺稿)』가 있다.
● 정창순(鄭昌順, 1727년 ~ ?) :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 관찰사(觀察使),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정민시(鄭民始, 1745년 ~ 1800년) : 정순붕의 후손이자 창사(昌師)의 아들.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사성 등을 지내고, 예조·호조·이조·형조·공조·병조의 판서와 의정부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정조(正祖)의 총신이며 시파(時派)의 거두였으므로 1801년(순조 1) 벽파(僻派)인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에 의해 관작이 추탈(追奪)되었으나 아들 성우(性愚)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獻).
● 정만석(鄭晩錫, 1758년 ~ 1834년) : 정기안의 아들. 1783년(정조 7)문과에 급제하고, 1829년 우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숙헌(肅獻).
● 정태호(鄭泰好, 1837년 ~ ?) : 1858년(철종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1890년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 정술교(鄭述敎, 1845년 ~ 1915년) : 통사랑(通仕郞)이 되고 고종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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