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10:24:35

오족협화

1. 개요2. 상세
2.1. 조선인
3.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오족협화()는 일본 제국이 1931년에 만주사변으로 획득한 만주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내세운 구호이다. 이 선전괴뢰국만주국을 통해서 만주국이 실효지배하는 만주지역에서 이용되었다.

오족에 포함되는 다섯 민족은 조선족, 만주족, 한족, 몽골족, 야마토족이다.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고 또 일본이 연해주에 눈독을 들이자 조선인을 모두 야마토족으로 포함시키고 대신에 러시아인이 들어갈 때도 있었다.

2. 상세

만주지역고조선 건국 이후부터 후삼국 시대까지만 해도 절반 가량 한민족의 지역이었으나, 926년에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몽골, 거란, 여진 등 북방유목들이 차지하려고 달려드는 지역이 되었다. 적어도 원나라가 무너진 이후부터 만주여진족이 주류인 지역이 되었다. 후금이 세워지고 나서 여진족만주족으로 개칭된 후, 만주족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세우자, 만주지역은 청나라라는 중화제국의 수많은 지역 중에 특이할 것이 하나 없는 지역이 되었고, 청나라는 만주족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만주를 봉금의 지역으로 두었지만 명나라령이었던 요동지방에는 원래 한족의 비율이 꽤 되었던 것과 더불어 본래 유목민족인 고로 유목민족 특유의 인구부양력문제로 만주족인구가 적었기 때문에[1]만주에는 금방 다른 민족이 들어왔다.

가장먼저 조공책봉관계가 되어 더이상 최전방이 아니게 되었던 만큼, 조선인들이 먼 옛날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던 곳에 슬금슬금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선청나라 사이에 국경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조선정부가 만주에 조선인들이 들어가 사는 것을 수수방관하면서 남만주 지역인 간도에서 조선인 인구비율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늘기 시작했다. 한족은 본래 요동에서 살고 있었긴 하지만 청나라시기까지도 전 만주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은 아니었다.[2] 하지만 중화민국이 성립한 이후, 한족들의 구역이었던 대륙본토가 군벌들에게 찢겨져서 각축장이 되자, 한족 피란민들이 비교적 안전하면서도 농업이 가능한 만주로 피난을 오면서 만주의 한족비율이 상당히 늘어났다. 몽골족인구도 무시할 수 없었는데, 본래 몽골도 만주도 같은 청나라령이었던 만큼 같은 유목민족인 몽골인들도 만주에 들어와서 살았다. 만주족이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농경민족으로 전환한 것에 비하여, 몽골족은 유목생활을 유지했기에 만주족에 전혀 동화가 안되었고, 몽골인들은 농업을 하기 척박한 지역에 따로 살았던 만큼, 한족에 동화되지 않아서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다.

1931년, 일본 제국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들어올 때, 이미 만주는 빈땅이 없는 지역이었다. 만주지역을 점령할 때는 개화기가 끝난지 한참지난 후였기에, 만주지역은 이미 근대적인 토지제도가 이미 정착한 곳이었고 따라서 토지를 수탈하는데는 무리가 있었다. 어느지역을 통치하든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면 그 지역에 자국에 충성하는 핵심민족의 인구가 일정비율 존재해야 했다. 대표적으로 상당수가 친일주의에 동조하고 순응했던 일본 통치하 조선대만이 있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백성인 야마토 민족의 비율이 높아질 때까지는 만주에 사는 여러 민족백성들을 어느정도 달래가면서 통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만주의 주요 민족성분을 차지하던 만주족, 한족, 조선족(또는 러시아인), 몽골족 4개의 민족을 자신들의 민족인 일본인과 섞어서 오족()이라 칭하고, 함께 공존하며 살자고 한 것이다.

일본제국은 만주국을 건국한 1932년부터 일본인 개척촌을 짓고 일본인을 계속 만주로 이주시켰으나[3], 2차 세계대전일본 제국패전으로 끝날 때까지, 만주일본인 비율은 충분하지 못했음으로 만주가 소련군에 의하여 일본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때까지도 오족협화라는 구호는 계속 유지되었다.[4]

물론 오족협화에서 협화는 없었다.[5] 실상은 해당지역의 피지배민족들을 탄압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까지 일본인들의 비율이 늘어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헛소리였을 뿐이었고, 일본인들은 만주지역과 만주국 내에서 압제자 노릇을 했다.

2.1. 조선인

한편 나머지 4개 민족 중 조선인의 경우 어느정도는 일본인과 함께 만주에서 상류계층을 이루고 있었다. 애초에 박정희, 최규하, 백선엽 등 이후 대한민국의 주역이 되는 인물들이 만주국에서 일했으며 조선인은 대체로 일본인이 사무를 맡았다면 군인과 경찰 등 실무에 투입되었다. 이 때문에 만주 내 한족들은 조선인을 두 번째 나쁜 놈(二鬼子)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일본 패망 때 조선인들도 중국인에게 린치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는 만주국 성립 이전 일본인과 같이 들어온 조선인에 한해서였고, 대한제국 이전부터 만주에 살았던 조선인들은 당시 만주 내 독립군과의 연계 문제 등도 겹쳐서 일본 입장에서 쉽게 말해 잠재적 불령선인 정도의 취급이었고 다른 민족들과 크게 다를바 없었다. 그래도 국적은 일본이었던지라 일본에서도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재만 조선인들을 일본 신민으로 대우하라는 요구를 했기에 한족에게 열세이던 지위가 동등한 정도로 상승하기는 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재만 조선인들에게 있어 일본의 패망은 삶의 붕괴를 가져왔다. 사실 청일전쟁 이전까지 철저한 중국의 속국으로서[6]중국인의 아래로 취급되던 조선인이 만주국에서 중국인과 동등하거나 오히려 그 이상의 지위를 누린 건 전적으로 한일합방을 통해 당시 열강이던 일본 제국의 국적(황국신민)을 가졌던 것 하나가 매우 컸다. 한마디로 일본의 비호 아래서 중국인과 수천년에 걸쳐 이어졌던 종속적 지위가 역전됐던 것.

그래서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일본 국적이 날아간 조선인들은 다시 청일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일본의 보호가 사라진 조선인은 영락없이 속국 민족일 뿐이었고, 중국인에게 린치를 당해 상당수가 쫓겨났다. 남은 이들도 중국에서 급격히 동화되어 오늘날엔 중국을 조국으로 여기는 소수민족 조선족으로 전락하고 만다.

3. 같이보기



[1] 하지만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할 쯤에 농경에 종사하는 만주족 수도 상당히 늘었고 다수의 만주족이 반농반목을 하는 실정이었긴 하다.[2] 애초에 만주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들어간 조선인들이 만주 북방에서까지 농지를 가꾸기 전까지는 쌀농사를 못 짓는 지역이었고, 쌀농사가 안되는 지역은 인구부양력이 얼마되지 않는다.[3] 심지어 조선인들의 이주도 권장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 땅을 비워 그곳에 일본인 비율도 늘릴 겸 만주국에 조선인을 보내 실무에 써먹을 생각을 했고 실제로 박정희, 백선엽 등 이후 대한민국의 주역들 상당수가 만주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다.[4] 그러나 연해주에 욕심을 가진 일본이 조선인을 내선일체라는 명분으로 일본인에 포함시키고 조선인의 자리에 러시아인을 넣어 오족의 성분을 바꾸기도 했다. 물론 할힌골 전투 패전 이후 일본은 소련을 함부로 자극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5] 게다가, 마지막의 和 라는 글자는 일본적인 것, 더 나아가서는 일본 그 자체를 의미하는 글자로 쓰이기도 하는데[7]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족협화라는 말 자체가 '다섯 민족이 일본(제국)에 협력한다' 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6] 조선은 아예 중국의 방토로 취급되어 있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만 봐도 대놓고 조선을 "속방"으로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