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은 회취법(灰吹法), 큐펠레이션(cupellation)과 같은 원리의 재련법으로 광석이나 합금을 고온에서 녹여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을 납, 구리, 아연, 비소와 같은 비금속으로부터 분리하는 기술이다.19세기에 고안된 패틴슨 공정, 19세기 중반에는 파크스 공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전세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2. 명칭
한국에서 연은분리법, 연은법이라 지칭한 이 명칭은 일본에서는 회취법이라 하였으며, 서양의 cupellaiton의 번역어로도 쓰이는데 기술의 원리는 같지만 단어의 의미는 다소 차이가 있다. 연은분리법은 납과 은을 분리한다는 의미이고, 회취법은 재와 불을 이용한다는 의미이지만, 큐펠레이션의 뜻은 도가니(cupel)를 이용한다는 뜻이다. 도가니는 납을 흡수할 수 있는 다공성 내부 재질로 구성되었으며 골재와 식물재, 석회석, 조개껍질, 점토, 혼합된 석회 등이 사용되었다.[1]이 중 석회나 조개껍질 등 도가니(cupel)에 재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큐펠레이션(cupellation)에 해당하는데 이 번역어로서의 회취법은 그 용어 자체가 재를 사용하였다는 의미를 가리키기에 차이가 있다. 이는 일본의 아스카 유적 연구 논문에서도 cupellation을 회취법이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 지적한 바 있으며 재를 사용하진 않아 회취법이라 하지 않고 석취법이라 명명하였는데, 큐펠레이션(cupellation)은 회취든 석취든 용기의 재질이 무엇인지를 가리지 않고 포괄하는 용어인 것이다.[2]
3. 방법
| | |
| 7세기 아라비아에서 사용된 연은분리법# | 중세후기 유럽에서 사용되던 연은분리법# |
| |
| 조선에서 전래된 이와미 은광의 연은분리법# |
납이 포함된 은광석에서 녹는점의 차이를 이용해서 납만을 녹여 은을 분리하는 기술로 재를 가득 담은 도가니(cupel)를 용로(鎔爐)에 올리고, 도가니에 담긴 재 위에 은이 포함된 납 또는 방연석 등의 광석을 얹은 후, 용로에 숯을 채워넣고 불을 붙여 온도를 높이면 녹는점이 낮은 납이 먼저 녹아 재에 섞이고, 녹는 점이 낮은 은은 재 위에 남는다.
4. 역사
4.1. 고대 오리엔트
기원전 4000년 이전부터 연은분리법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에게 해로 그 기술이 전파되었으며 이들 유적에서는 연은분리법으로 은을 정련했을 때 나오는 부산물인 산화납이 발견되었다.#[3]#[4]4.2. 유럽
4.3. 동아시아
4.3.1. 중국
4.3.2. 한국
한성백제시기의 야철지였던 서산 부성산성# 인근 지역인 쇠팽이, 은부리, 화천리, 도성리에서 발견된 8점의 슬래그와 3점의 원광석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납 광석의 재련슬래그임이 확인되어 납으로부터 은을 산출한 연은분리법이 행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5] 또한 한성백제시기 석촌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금제이식에서 수은 아말감법이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다.[6]조선에서는 <연산군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1503년 6월 13일(연산 9년 5월 18일) 조에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이라는 사람이 개발해 시연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연철을 화로에 녹여 은을 골라내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백성이 임금 앞에서 기예를 시연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생에 한 번 있기도 힘들었으나 정사인 실록에 기록된 것을 볼 때, 연은분리법이 조정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상당한 관심을 끌었던 기술이었음이 시사된다.
양인(良人)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掌隷院) 종 김검동(金儉同)이, 납[鉛鐵]으로 은(銀)을 불리어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남비 안에 매운재를 둘러 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 하니, 전교[7]하기를, "시험해 보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49권, 연산 9년(1503년) 5월 18일 계미 3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연산군일기 49권, 연산 9년(1503년) 5월 18일 계미 3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연은분리법 시연을 본 연산군은 "이제 은을 넉넉히 쓸 수 있다(銀可足用)”며 흡족해하고 닷새 뒤에는 조선 최대의 은광이 있는 함경도 단천에서 연은분리법으로 은을 캐도록 지시한다. 그래서 이 당시의 연은분리법을 단천연은법이라 하기도 하며 강계, 풍천 등의 은광에서도 연은분리법이 사용되었다. 또한 공조판서 정미수가 민간에 채굴을 허용 하는 대신 세금을 내게하는 채은납세제(採銀納稅制)’와 행장[8]을 발급하라고 건의했으며 연산군은 이를 시행한다. 당시 납부 금액은 채굴하는 한 사람 당 1일에 은 1냥이었다.
그러나 1506년 연산군이 반정으로 물러나고 중종은 연산군 때의 사치풍조 척결을 내세우며 은광 채굴을 금지시킨다. 1507년 4월에는 연은분리법도 금지하는 방안을 강구해 보라는 왕의 지시가 내려지기도 한다.#
이후 몇몇 대신들은 재정 부양을 위해서 민간에 은 채굴을 다시 허용하자고 요청해 민간에 은광 채굴이 일시 허용된다.
1508년에는 단천에서 은이 많이 나는데 이걸 군민들이 무단으로 캐서 통사(通事)에게 팔고 통사가 이 은을 가지고 북경에 가지고 가는 일이 있다며, 즉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고 있으니 이를 단속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자 중종은 이를 단속할 강직한 사람을 보내 관리 감독하게 하고 단천의 은은 1년간 나라에서 사용할 분량만큼만 캐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한다.(중종실록 7권)
"금물(禁物)을 교역한 자는 김형석만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단천(端川)에서 생산되는 연광(鉛鑛)을 취련(吹鍊)하여 은을 만들기 때문에 은 값이 매우 저렴하였는데 지금은 전보다 점차 비싸졌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북경으로 가는 통사(通事)들이 많이 갖고 가서 중국에 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은을 생산하는 곳이 있을지라도 실로 우리 나라의 이익은 아닌 것입니다. 단천에 은(銀)이 생산되는 곳은 관(官)이 지정한 곳뿐이 아니고 곳곳에 있습니다. 선왕(先王)의 제도에 산림천택(山林川擇)을 비록 백성과 더불어 함께 하였으나, 또한 엄금(嚴禁)하여 씀씀이를 절약하였으니 아마 생산에 한계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은을 산출(産出)하는 각처의 공천(公賤)으로 하여금 채취(採取)해서 공(貢)으로 바치게 하여 불시(不時)의 수요(需要)에 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호조 판서로 있을 때에 항상 이 일을 계청(啓請)하고자 하였으나, 말하는 사람이 재리(財利)를 말한다고 비난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감히 주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관원을 보내서 감독하여 채취하여 저장해 두었다가 국용(國用)에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1521년) 8월 27일 병오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1521년) 8월 27일 병오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그런데 이전의 명들이 잘 지켜지지 않았던 모양인지 이런 얘기가 계속 나온다.
통사(通事)들이 법금(法禁)을 어기고 단천(端川)의 은(銀)을 가져가므로 중국 사람들이 다 ‘단천의 은이 아니면 안된다.’ 하니, 만일 중국에서 공납(貢納)을 요구하면 그 폐해가 백성에게 미칠 것입니다. 사사로 가져가는 금은(金銀)·주옥(珠玉)에 대해서는 본디 그 법금이 있으니, 이제 다시 더욱 밝혀서 범하는 자가 있으면 사신도 아울러 다스리소서. 또 공무역(公貿易)은 긴요하게 관계되는 물건이 아니니 수량을 줄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행차에 있어서 법금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시 더욱 밝혀서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신도 아울러 죄주도록 하라. 공무역도 적당히 줄이도록 승전(承傳)을 바치라." 하였다.
중종실록 49권, 중종 18년(1523년) 8월 11일 무신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중종실록 49권, 중종 18년(1523년) 8월 11일 무신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또한 이 은을 캐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닌지 이런 얘기도 나온다.
신이 전에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로서 단천(端川)에서 은(銀)을 캐는 일을 보았습니다. 은을 캐는 구멍은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이 깊고 또 그 구멍이 매우 좁아서 겨우 세 사람이 드나들 수 있으므로, 은을 캘 때에는 벌거벗고 코를 막고 목구멍을 가리고 횃불을 밝히고서 들어가니, 구멍 안에 오래 들어가 있지 못하고 곧 다시 나오는데, 형색(形色)이 죄다 변하여 산 기색이 아주 없으니,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에는 각 고을에 사는 공천(公賤)을 시켜 그 신역(身役)을 갈음하여 캐게 하므로 민폐가 없을 듯하나, 캐는 것은 사람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사람을 사서 대신하니, 단천 백성이 홀로 그 괴로움을 받습니다. 그곳에 사는 백성은 항상(恒産)이 없어 산전(山田)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므로 가난하기가 다른 도(道)보다 갑절 심한데, 봄·가을로 은을 캐면 백성의 힘이 다하여 유리(流離)하게 될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한 두해쯤 걸러서 캐게 하여 힘을 쉬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중종실록 49권, 중종 18년(1523년) 9월 12일 기묘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중종실록 49권, 중종 18년(1523년) 9월 12일 기묘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효원은 아뢰기를, "신이 전에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 보았는데, 은을 캐는 일은 과연 상의 분부처럼 압사하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은이 난다는 말을 듣고 그 근처 사람들을 추문(推問)하였으나 굳게 감추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형신(刑訊)까지 하면서 철저히 추문한 뒤에야 사실대로 공초(供招)하였고 캐어 보니 과연 은이 있었습니다. 전에 캔 곳보다 더 많았습니다만, 많은 백성들이 몰래 캐어 가므로 지금은 바닥이 났다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은이 나는 곳이 한 곳뿐이 아닙니다. 단, 국금(國禁)이 이와 같기 때문에 캐지 못하는 것이지, 백성에게 캐서 팔게 한다면 캐기는 쉬울 것입니다." 하고, 장순손은 아뢰기를,
"국금이 비록 빈틈이 없다지만 부경하는 사신 일행 중에 은을 가지고 가지 않는 자가 없어서 함경도로 들어가는 부상대고(富商大賈)는 모두가 은 캐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합니다. 신들은 생재의 방도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75권, 중종 28년(1533년) 6월 24일 을미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국금이 비록 빈틈이 없다지만 부경하는 사신 일행 중에 은을 가지고 가지 않는 자가 없어서 함경도로 들어가는 부상대고(富商大賈)는 모두가 은 캐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합니다. 신들은 생재의 방도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75권, 중종 28년(1533년) 6월 24일 을미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단천에서 나는 품질 좋은 은 때문에 여러 폐단들이 나타났는데 은을 캐기 위해 깊게 파고 들어가다 구멍이 무너져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압사하는 사고도 꽤나 많았다. 또 단천 현지에서는 납을 은으로 잘 정제해 보냈는데 이것이 덩어리의 형태로 가공될 때 일부 장인들이 그 안에 다른 것을 넣고 은을 겉에 씌워 유통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어차피 무게를 따지는 것이니 덩어리로 만들지 말고 납작한 형태로 만들게 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은이 단천에서만 나는 것은 아닐 텐데 단천에서만 채굴하다 보니 폐단이 크고 그곳의 백성들만 고통받고 있으니 다른 곳에서도 채굴 시험을 해보라는 명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자 은광 개발을 하던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전래된 유래를 나타낸 기록이 2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인 중종실록에는 종4품 판관으로 있었던 유서종(柳緖宗)이라는 사람이 일본인을 끌어들여 연은분리법을 유출했다는 내용이다. 유서종이 실록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 사간원이 왕에게 이른 내용이다.
간원이 아뢰기를, "의주 판관(義州判官) 유서종(柳緖宗)은 일가가 패란된 일이 많아 조관에 합당치 않으니 개차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85권, 중종 32년(1537년) 7월 16일 계사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중종실록 85권, 중종 32년(1537년) 7월 16일 계사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사간원이 왕에게 이른 내용은 유서종 일가가 모반에 관여된 일이 있으므로 조관(朝官, 조정의 관직)에 임명하기 합당하지 않다는 내용으로, 조정에서 이 유서종이라는 사람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어 2년 뒤 유서종이 왜인과 접선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사헌부가 유서종의 죄에 관한 첩보를 입수하여 왕에게 고한 내용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주 판관(全州判官) 유서종(柳緖宗)은 김해(金海)에 있을 때 사인(私人)을 거느리고 바다 밖의 가덕도(加德島)에서 수렵하다가 동래 현령(東萊縣令) 김모(金某)에게 체포된 일이 있었고 또한 서울 부상(富商)을 자기 집에 불러다가 접주(接主)시키는 한편, 왜노(倭奴)를 끌어들여 우리 나라 복장으로 갈아 입히고 매매(買賣)를 하도록 한 후에 병사(兵使) 김순고(金舜皐) 에게 청하기를, 나에게 공문(公文)을 준다면 가덕도에 들어가서 왜병을 포착해 올 수 있다고 하였으나 병사가 들어주지 않고 이를 저지하였습니다. 유서종의 계획은 자기 집에 왕래하는 왜인을 죽여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변방에 말썽을 일으켰으니 이는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습니다. 조옥에 내려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1539년) 윤7월 1일 병신 2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1539년) 윤7월 1일 병신 2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유서종이라는 관리는 가덕도에서 허가받지 않은 수렵으로 동래 현령에게 걸린 전과가 있으며, 서울에서 내려 온 큰손을 접대한 적도 있는 사람인데, 이번에는 일본 사람을 위장전입시켜 거짓된 공을 쌓고자 했으니 중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라고 보고한 것이다. 정확한 사건의 전말은 알 수 없지만 끝에 일본인을 죽이려다 어떻게 이야기가 샌 모양이다. 이 사건에서 연은분리법이 관여된 것은 다음 기록에 나온다.
"유서종(柳緖宗)은 잘못이 많으니 죽는 것을 헤아리지 말고 실정을 얻을 때까지 형신(刑訊)하라. 다만 왜인과 서로 통하여 연철을 많이 사다가 불려서 은을 만들고 왜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한 일은 대간이 아뢴 대로 국문하라. 서종은 비록 무반(武班)사람이라 해도 벼슬이 판관(判官)에 이르러 무식하지 않다. 또 불려서 은을 만드는 일은 사람마다 하는 일이 아니요, 반드시 장인(匠人)이 있은 후에라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집에 장인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일이 증거가 없으니 지적할 수는 없고 형벌을 한 번 받고 병이 났으니 또 재차 형벌을 가하면 죽을까 걱정이다. 이 죄를 법에 비추어보면 죽음을 면하기가 어렵다. 다만 상인(商人)을 불러 접주(接主)시킨 것과 ‘나에게 공문(公文)을 달라고 한 일’로 조율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을 따지지 않고 수없이 형신하여 끝까지 추문해야 하겠는가?"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1539년) 8월 19일 계미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1539년) 8월 19일 계미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연은분리법은 당시로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한 고급 기술이었는데, 이를 일본에 유출한 것은 큰 문제가 됨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미 일본에서 들어온 은이 민간에 많이 있었다.
"이제 함경 감사(咸鏡監司)의 계본(啓本)을 보니 ‘진상하는 은(銀)의 수량을 항상 1천여 냥으로 표준삼아 왔는데, 올해는 여러 곳에서 연철(鉛鐵)을 캔 수량이 전례(前例)에 비하여 5분의 1도 안 되므로 정해진 기한까지 앞으로 한 달 동안 일을 하더라도 수량을 채울 수 없으며, 단천(端川)의 은을 채취해 오던 곳은 연맥(鉛脤)이 이미 끊어졌다.’고 하였다. 만약 예년의 수량대로 채취하라고 한다면 민폐가 적지 않을 것이니 예년의 수량에 구애되지 말고 현재 채취한 수량만으로 제련하여 올려보내라고 공조에 이르라."
중종실록 93권, 중종 35년(1540년) 9월 10일 무술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중종실록 93권, 중종 35년(1540년) 9월 10일 무술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 시점에서는 단천의 은도 거의 바닥이 난 상황이었고 이미 일본에서 들어온 은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단천의 은을 채굴하지 말라는 명까지 내려진다.
"근래 왜인들이 잇달아 은을 가지고 와서 나라에서 무역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국용(國用)이 부족하지 않다. 단천(端川)에서 은을 캐는 폐단이 많다고 하니, 5년을 한도로 하여 캐지 못하도록 하라. 민간에서 만약 몰래 채굴한다면 나라의 법이 엄중하지 않게 되니 엄히 금지하라."
중종실록 98권, 중종 37년(1542년) 6월 9일 무자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중종실록 98권, 중종 37년(1542년) 6월 9일 무자 1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두번째는 일본의 긴잔큐키(銀山旧記)에 나오는 기록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연은분리법을 시도했다는 이와미 은광에 전해지는 역사를 보면 1526년 하카타 출신 상인인 가미야 주테이(神屋寿禎)가 은광을 발견했으며, 조선에서 경수(慶寿, 게이주)와 종단(宗丹, 소탄)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하여, 이들로부터 연은분리법에 관한 기술이 전래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은광석에 납이 다량으로 섞여 있던 이와미 은광에서 이 연은분리법 전래는 일본의 은 생산을 대량으로 증가시킨다.(#중앙일보 #이와미 은광의 역사, 공식 홈페이지 / @아카이브)
4.3.3. 일본
7세기 후반 아스카 시대의 종합 공방터로 알려진 나라현 아스카 무라의 아스카이케 유적에서 발견된 은의 알갱이(직경 약 5밀리)가 발견되었고 이때 연은분리법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때는 16세기의 재를 이용한 회취법과는 다르게 다공성인 용기 자체를 이용하여 석취법이라 이름붙였지만 용기의 재질에 따라 분류하던 명칭이 아닌 큐펠레이션에는 해당하는 것이었다.[9]한편 아스카 공방 유적과 주변의 후쿠오카 현에서 출토된 동, 납, 은 등이 함유된 유물의 분석결과 재료의 산지가 한반도산, 고령산지와 칠곡광산에서 채굴된 은광석이라 밝히고 있다.[10]
| |
| 일본 이와미 은광에서 연은분리법을 이용하는 그림. |
16세기초 조선의 기술자들이 전래한 연은분리법은 이와미 은광에서 크게 성공하여, 1533년에 이미 인근의 다른 은광들에까지 기술이 전래되었다고 한다.[11] 1562년에는 모리(毛利) 가에 의해 은광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은광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고, 은광은 다이묘들의 전략적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암살로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일본의 관백(關白)이 되어 은광을 모리 가와 공동 관리하게 되었으며 도요토미 사후에는 자연스럽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 권리가 넘어갔다.
에도 막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누에바에스파냐의 은광에서 주로 행해졌던 수은-아말감 공정(Amalgamation process)을 도입하여 생산량을 더욱 늘이려 했다. 수은-아말감 공정은 은광석을 부순 뒤 바닷물과 수은을 섞어 아말감을 침전시킨 뒤에 수은을 증발시켜 은만 남기는 방법이다.[12] 이는 일본에 '수은 흘려보내기(水銀流し; 스이긴나가시)'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일부 광산에서 채용되었으나, 결정적으로 일본에서는 수은 산출이 적어 값이 매우 비쌌고, 이 시점에는 이미 연은분리법이 각지에 뿌리내리고 있어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13]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이와미 은광 단독으로만 연간 은 100톤이 산출되었고, 일본 전국의 은 생산량은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에 달하여 일본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조선 및 청나라와의 교역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며, 서양까지도 일본의 은이 유출되었다. 덕분에 일본은 대항해시대 이후 처음 확립된 세계무역 체제의 한 축을 맡을 수 있었고, 약 300년간 일본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와미에서 사용한 연은분리법은 중세 독일에서 쓴 것과 같은 방식이라고 평가되었다.[14]
'迪倫齋雜想 : 첫번째 글로벌 무역금융 네트워크 - 은(silver) 무역을 중심으로' 참고
| |
| 일본에서 연은분리법이 최초로 시도된 이와미 긴잔 유적의 입구다. |
5. 기타
당대의 기축통화인 은의 생산량을 늘린다는 점 때문에 종종 조선의 운명을 바꿀 로스트 테크놀로지 취급을 받기도 한다. '조선이 천대한 기술로 일본은 강대국의 기반을 닦았다'는 식으로 조선까들의 단골 혐오선동 레파토리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 중종 대를 넘기기도 전부터 단천 은광의 고갈이 가시화되고 있었고, 당대 명나라로의 은 유출은 정치적, 경제적 요인이 엮여 그야말로 감당 불가한 천문학적 규모였기 때문에 실제 조선의 재정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지는 미지수다. # 단적인 예로 임진왜란 당시 명은 파병군의 식량 조달을 이유로 은의 징색을 요구하다 못해 아예 은광 개발에까지 나섰지만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선조는 혹시라도 은광이 터질까봐 "우리나라는 원래 은이 없어요"라며 뻗댔을 정도다. #[15] 현재도 단천 지역에서는 그냥 납을 캐지 은을 생산하지는 않고 있다.
[1] 역사적인 연금술사, 금속공학자, 그리고 최근에는 화학자들이 큐펠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제작법을 제공해 왔습니다. 가장 흔히, 석회화된 뼈와 식물이 유용한 원료로 권장되어 왔습니다 (참고로 마르티논-토레스 등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뉴먼 1991: 597). 또한, 역사적 자료(Berthier, 1834)와 큐펠레이션 난로 바닥에 대한 분석(Bayley와 Eckstein, 2006)에서는 분쇄된 조개껍질, 점토 또는 석회암을 단독으로 사용하거나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이 밝혀졌습니다.줄번호 21 번역[2] cupellation에 '회취법'이라는 일본어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재(특히 골회)를 깔아놓은 용광로, 혹은 도가니를 이용하는 것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중략) 만약 고대에도 cupellation의 존재를 상정한다면, 그 명칭도 실상에 맞게 근세의 회취법과 하나의 선을 긋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PDF 15쪽 중단 번역[3] There is no doubt that vast quantities of lead were mined around the Mediterranean during the first millennium BCE. Ancient slag heaps and processing installations, such as those at Laurion in Greece (e.g. Hopper 1968; Healy 1978; Ellis Jones 1982), finds of lead objects, as well as emission data from ice-cores in Greenland (e.g. McConnell et al. 2018), demonstrate that lead ores were mined and smelted during the Iron Age. Furthermore, lead artefacts and debris associated with smelting lead ores (e.g. slag) are found in Bronze Age contexts in the Near East (e.g. Yener et al. 1991; Hess et al. 1998; Pernicka et al. 1998; Hauptmann et al. 2002; Efe and Fidan 2006) and around the Aegean (e.g. Gale and Stos-Gale 1981a) 기원전 1천년 동안 지중해 주변에서 막대한 양의 납이 채굴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 라우리온(예: Hopper 1968; Healy 1978; Ellis Jones 1982)과 같은 고대 슬래그 더미와 가공 시설들, 납 유물의 발견, 그리고 그린란드 빙핵에서 나온 배출 데이터(예: McConnell et al. 2018) 등은 철기시대에 납광석이 채굴되고 제련되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근동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예: Yener et al. 1991; Hess et al. 1998; Pernicka et al. 1998; Hauptmann et al. 2002; Efe and Fidan 2006)과 에게해 주변(예: Gale and Stos-Gale 1981a)에서는 납광석 제련과 관련된 납 유물과 찌꺼기(슬래그 등)가 발견된다.[4] Cupellation is believed to have originated around 4000 BC and was widely used globally until it was gradually supplanted by Pattinsonisation and the Parkes process in the nineteenth century (Nriagu 1985). Evidence of silver production by cupellation has been discovered at Fatmali Kalecik in Anatolia (Hess et al. 1998) and Habuba Kabira in Syria (Pernicka et al. 1998), both dating to the fourth millennium BC.큐펠레이션은 기원전 4000년경에 기원한 것으로 여겨지며, 19세기에 파틴슨화법과 파크스 공정에 의해 점진적으로 대체될 때까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Nriagu 1985). 큐펠레이션에 의한 은 생산의 증거는 아나톨리아의 파트말리 칼레지크(Hess et al. 1998)와 시리아의 하부바 카비라(Pernicka et al. 1998)에서 발견되었으며, 두 곳 모두 기원전 4천년으로 연대가 측정된다.[5] 충청남도 서산지역은 백제시대의 부성산성을 중심으로 쇠팽이 야철지, 은부리 야철지, 산수골 야철지, 영탑리 야철지 등과 같은 야철지들과 백제 고분들이 충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Figure 1). 특히 칠지도 제작지로 알려진 곡나철산의 유력한 후보지역 중의 한 곳 인 서산시 지곡면 일대는 쇠팽이(鐵洞, 鐵山), 은부리(銀 邊), 무쇠점(鐵店)과 같은 철과 관련된 지명이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있으며, 이를 통해 이곳이 고대로부터 대규모의 철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PDF 1쪽, 서산 쇠팽이, 은부리, 화천리, 도성리에서 수습한 슬래그 8점과 원광석 3점에 대하여 성분조성, 미세조직, 납 동위원소비 분석을 실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서산지역에서 행해진 제련 공정과 사용원료, 슬래그와 원광석과의 관계 등을 알아보았다. (중략) 납 동위원소비를 이용한 산지분석 결과 한국 북부지역·서부 경기지괴 영역의 방연석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며 이 중 일부 시료의 산지로 해석된 서성광산의 주요 산출 광물들은 수습된 슬래그의 납 동위원소비가 연관성이 크게 나타나 이 지역에서 산출된 방연석을 이용하여 제련 시 배출된 슬래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왕조실록(태종 17년) 기록을 통해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에 해당하는 지곡현은 납 광석으로부터 은이 제련되었고, 은을 단련하기에 좋은 지리적 요건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폐광된 서성광산은 지곡면에 위치해 있으며, 소량의 금, 은이 함유된 방연석, 섬아연석, 황철석 등이 산출된 곳이다. 분석된 슬래그에서 은(Ag)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으나, 은은 산출량이 적고 귀하여 연은분리법 또는 회분법과 같은 공정을 통하여 잔여량 없이 모두 회수되었을 수 있다. 즉 이번에 분석한 슬래그들은 고대 문헌과 분석결과를 토대로 은 등의 제련 시 배출되어 생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PDF 1쪽, 13-14쪽[6] 연구결과, 금동이식의 주환은 동심재에 수은 아말감 금도금하였고, 중간식의 육면체는 금 분말을 용융시켜 소환을 이어 붙였으며 수하식 구체는 반구체 두 개를 땜하여 붙인 것을 확인하였다.- 석촌동 고분군 출토 금제이식의 제작기법 연구 및 보존처리 PDF 1쪽 상단[7] 傳敎. 임금이 어명을 내림.[8] 여행 증명[9] 이번에 실시한 아스카이케 유적의 조사에서 적어도 7세기 후반에는 은의 정련법으로서 근세에 도입된 '회취법'의 프로토타입으로서의 '석취법'이 행해져 순도가 높은 은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정착되어 있었음을 실증할 수 있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당시의 기술수준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지식이다.PDF 17쪽 상단 번역[10] 쇼와 10연대로 정리된 자료이지만 한반도의 광산에 대한 기술에서 칠곡광산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월산동 고령 광산'이 은(Ag) 및 휘은광(Ag2S)의 주산지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휘은 광 항목 내에서 '방연광과 치밀한 혼합 집합체를 이루고, 황동광·섬아납광 및 황철광을 수반하고, 때로는 자연은 및 자연금을 수반하는 경우가 있음'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이 주변지역이 구리와 은(또한 납도)이 함께 산출하는 광산이 존재할 수 있는 지질조건인 것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부근에서 칠곡광산과 비슷한 납 동위원소비를 가지며, 구리와 은을 동시에 산출하던 광산이 고대에 가동되고 있어 그것이 이들 자료의 원료가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PDF 37쪽 하단 번역[11] 회취법(灰吹法) 기술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서아시아에서 대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 기술이 일본에 전해진 것은 왜인지 매우 늦어서, 기록에 따르면 전국시대인 1533년에 하카타의 거상인 가미야 토시사다(神谷寿禎)가 조선의 계수(桂寿), 종단(宗丹)을 일본에 초빙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이와미 은산 일기」「조선왕조실록」), 이것이 이와미 은산에서의 은 정련법으로 도입되어, 이 은의 회취법이 훗날 금의 정련에도 응용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12] 최영수(1995), 『라틴아메리카 식민사』, 서울 : 대한교과서(주), 154~157쪽 ; 강석영(1996), 『라틴아메리카史』(하), 대한교과서(주), 16쪽, 252쪽.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넷에서 재인용.[13] 야마구치 게이지 지음·김현영 옮김(2001), 『일본 근세의 쇄국과 개국』, 서울 : 혜안, 31쪽.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넷에서 재인용.[14] 이와미 은의 일부 생산량(중세 독일의 "자이거 방식"과 같은 은 생산 수단인 "하이후키호"라는 방법으로 얻어진)이 동아시아로 유출되었다.PDF 2쪽 하단 번역[15] 임진왜란 2년차인 1593년 당시 명 경략 송응창이 계산한 연간 주둔비용이 100만 냥, 이 중에서 64만 냥을 조선 정부가 부담할 것을 요구했다. # 위의 단천은광 생산량과 비교해보자.